*동동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비정기적 연재 (내킬 때, 뽕 찰 때, 원고 탈주하고 싶을 때 이어 씁니다)

*엠프렉 소재




W. 멜




“축하드립니다.”


늙은 의사는 콧대 아래로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린다. 진료 결과가 적힌 차트를 넘겨보며 덤덤한 어조로 말한다.


“임신 10주차네요.”


누군가 한 명쯤은 손뼉 박수를 쳐야할 것 같은 축복의 언사였건만 정작 희소식을 들은 주인공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의사의 맞은편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처진 눈썹, 그에 상반되는 날카로운 눈매,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것 마냥 비죽 내밀어진 입술 선을 가진 사람 하나. 초콜릿을 연상케 하는 밝은 연갈색 머리칼, 수려한 이목구비, 우유를 빼다 박은 것 같은 뽀얀 피부, 그 화려한 외모와 매치되지 않는, 차츰 좁혀지는 미간. 


“네……?”

“네……?”


결혼 2년 차. 즉, 신혼으로 행복의 노래에 취해 한껏 깨를 풀풀 날리고 있어야 할 두 사람, 마츠카와 잇세이와 마츠카와 토오루는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껄끄러운 대답을 남기고 만다. 


“어……. 흠, 큼큼- 당분간은 알코올이나 카페인 섭취 자제하시고 음식은 가려서 드세요. 자칫하다간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니까요.”


이해를 못 하겠단 얼굴로 반문의 여지를 남긴 두 사람 덕에 당황한 건 의사 쪽이었다. 의사의 당황한 낯빛도 잠시, 그는 두터운 안경알을 벗어 내리며 잇세이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내보인다. 


“그나저나, 거기서 곤히 잠들어 있는 따님이 정말 귀엽게 생겼네요.”


보다 정확히는, 잇세이가 앞으로 들쳐 맨 포대기 안에서 쌕쌕 잠이 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을 향해서 말이다. 


예상치 못한 칭찬 세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올린 잇세이가 시선을 내린다. 잠결에 목을 제대로 뉘지 못하는 아이의 뒷목을 살며시 받쳐준다. 곱게 감긴 눈 위로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준다. 조금만 힘주면 망가질 것 같은 이 작은 생명체가, 따뜻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사랑스러운 결실이 자신들의 피를 이은 혈육임을, 잇세이는 매 순간 새롭게 자각하고 있었다. 


“보자, 일 년은 넘은 것 같고 한……. 16개월 쯤 된 것 같은데, 맞나요?”

“18개월이에요. 워낙 순해서 잘 먹고 잘 자고 키우는 데 크게 손을 안 벌렸던 것 같아요.”


의사는 아이의 생김새를 잘 살펴본다. 부드러운 눈매나 앙증맞은 입술은 아까부터 초점 없는 눈으로 ‘임신……. 임신? 정말, 임신이라고?’ 라는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 거리는 잘생긴 쪽의 아빠를 닮았고, 얼굴선을 비롯한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 등은 아이를 품에 안은 아빠 쪽을 닮아 있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든 자는 모습만큼 천사 같을 때는 없지.


아무리 순하다 한들 생후 12개월이 넘는 순간부터 걷고 말하고 울고 떼쓰기 바쁜 아이가 깨어 있지 않음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의사가 이내 토오루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 아이가 첫째면 뱃속의 아이는 둘째겠네요.”


둘째. 둘째란 단어에 말미암아 발화점에 다다른 열기는 기어코 화를 초래한다. 


“그래서…….”


허공으로 드높이 올라간 손바닥이 등짝이란 표적을 매섭게 내리친다. 


“내가 피임 잘 하라 했지 맛층!!!”


마츠카와 토오루(24)는 예정에 없던, 계획조차 하지 않고 있던, 차마 원치 않았던 둘째를 덜컥 임신해 버리고 만 것이다. 



* * *



“그럼, 천방지축 부부의 둘째 아이를 위하여!”


테이블 위로 호기롭게 맥주잔을 들어 올린 하나마키가 목청을 높인다. 맥주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차올라 있는 맥주 거품이 먹음직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뭐가 위하여야!!”


정작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칭할 수 있는 오이카와의 안색은 그리 좋질 못했다. 


“엑- 그러려고 긴급 소집 한 거 아니었냐? 축하 파티? 렛츠 파뤼~?”

“파티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쪽은 진지하다고.”


못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시던 하나마키가 어색한 공기 흐름에 제 볼을 긁적이며 제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런 그를 더더욱 뻘쭘하게 만드는 건 불쾌하단 티를 팍팍 내며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대는 토오루의 행동거지였다. 


“기뻐할 일 아니냐. 그래도 임신 소식인데.”


토오루의 바로 맞은편에 앉은 이와이즈미가 잘 데워진 사케를 홀짝이며 말한다. 


“그게 말이지……. 하아, 이와쨩 그거 나도 좀 줘봐.”


한 쪽 팔로 턱을 괸 채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던 토오루가 사케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안 돼.”


아니나 다를까, 무심결에 알코올에 의지하려 한 토오루를 제지한 건 옆자리에 앉은 잇세이였다.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술 금지랬잖아.”


사케를 향하던 손목이 단호히 붙들린다. 오이카와는 퉁명스레 대꾸한다. 


“……꽉 막혔어. 오늘 같은 날은 좀 마시게 해주면 안 돼?”

“오늘 같은 날이 뭔데. 아주 기념비 적인 날이구만 뭘.”

“잇세이 등짝에 피멍 들게 해줄까.”

“네 전직이 배구 선수란 걸 잊지 않아 줬음 좋겠는데.”


결국 토라진 토오루를 달래려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는 잇세이다. 알코올은 물론 카페인 걱정도 없으니 토오루 입장에선 마음 편히 마실 순 있겠지만


“맛없어.”


주스를 미처 입가에 대기도 전 토오루는 고개부터 돌린다. 일부러 토라진 티를 내는 건가 싶다가도 정말 먹기 싫었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단히 빈정이 상했는지 툴툴거림을 멈추진 않는다. 


“임신? 니들 생각엔 애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뚝 떨어질 것 같니? 내가 피임 잘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결국 콘돔 쓰지 말자 꼬신 건 맛층이잖아. 진짜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잇세이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다. 반찬으로 미리 주문해 둔 양상추 샐러드를 한 젓가락 집는다. 샐러드 드레싱은 죽어도 못 먹는 토오루의 극성 입맛을 고려해 순수한 야채만을 골라 집어 쉴 새 없이 떠드는 토오루 입가에 가져간다. 


“감독님한테 다음 달엔 복귀 가능하다 해뒀는데……. 음, 맛있다. 아 이게 뭐냐고 진짜. 출산 휴가 유급 휴가 이미 다 써먹었단 말이야. 하기야 그거 쓸 때도 우리 팀 애들한테 눈칫밥 엄청 먹었다고! 이런 내 고충을 맛층이 알긴 알아?”


아예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토오루 덕에 반찬들이 담긴 접시와 술잔이 작게 튕겨 오른다. 순간적으로 테이블 위로 쏟아진 알코올과 음식 찌꺼기에 놀란 이와이즈미, 하나마키와 달리, 잇세이 한 사람만이 평온한 눈으로 백팩에서 물티슈를 꺼내 흔적도 안 남을 만큼 말끔하게 닦아낸다. 


“나는 빨리 선수 생활 복귀하고 싶은데. 애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야……. 이대로는 복귀는커녕 영영 은퇴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양 손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토오루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 와중에도 아삭아삭 풀 씹는 소리가 잇새로 생생히 튀어 나온다. 테이블 청소를 끝낸 잇세이는 구석에 물티슈를 쌓아둔다. 


“오히려 잘 됐네. 이참에 다치기 십상인 프로 생활은 접어 버리고 애들이랑 알콩달콩 잘 살아 보는 건 어때.”


가슴팍에 아이를 밀착시키고 있던 포대기의 끈을 조금 느슨히 하던 잇세이가 은근슬쩍 은퇴 얘기를 꺼내 본다. 병원을 출발할 때부터 해가 기울어진 지 한참인 이 순간까지 온종일 숙면을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공주님이 잠결에 입술을 오물거린다. 


“농담이라도 그만 둬. 아카네 분유 값, 기저귀 값, 옷값만 해도 한 달 동안 돈이 얼마나 나가는지 잇세이도 봤을 거 아냐. 게다가 아카네 여기서 조금만 더 크면 어린이 집도 보내야 하는데 그거 전-부 잇세이가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아니잖아. 나도 일해야 해. 하물며 둘째까지 생긴 마당에 돈은 돈대로 더 들고 시간은 시간대로 더 드는데 어떻게 애만 보고 있을 수 있어. 배구가 아니더라도 일은 할 거야. 아니면 못 버티는 걸.”


토오루는 당장 자신의 실수나 잇세이의 잘잘못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생명으로 인해 초래된,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 부담감. 토오루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뱃속 안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생명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편, 어째 부부싸움 한복판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기분이 된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는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태명은 정했냐?”


타이밍 좋게 분위기 전환에 나선 건 하나마키였다. 


둘이 연애를 할 적에야 질리도록 본 얼굴들이었건만 허니문으로 아카네를 임신한 채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직후부턴 육아에 정신이 팔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했다. 첫째인 아카네가 아무리 순하다 할지라도 그 당시 ‘육아’란 것 자체가 처음이었을 두 초보 아빠들에겐 하나부터 열까지가 생전 처음 겪는 일들뿐이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건 드라마에 흔히 나올 법한 가출이라던가 산후 우울증 같은 최악의 경우는 겪지 않았다는 부분인데, 아마 신혼이란 이름 아래 따끈따끈한 사랑의 힘으론 트러블들을 이겨내 온 것 아니었을까. 


그런 두 사람을 근 이 년 만에 만나 볼 수 있었다. 임신 소식이든 뭐든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뜻 깊은 자리를 싸움의 장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뭘 또 정해. 전에 했던 것처럼 붕붕이로 해.”


귀찮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한 쪽 귓구멍을 파던 잇세이가 무심한 투로 말한다. 거기에 성질이 나는 건 오히려 토오루였다. 


“붕붕이? 아카네 임신했을 때 한창 자동차에 빠져 갖고 아무거나 갖다 붙인 주제에 이번에도 또 그걸 쓰자고? 절대 싫어. 안 해.”


두 번 당하진 않겠다는 토오루의 완고한 뜻에 잇세이가 떼굴떼굴 눈알을 굴린다. 돌아가지 않는 사고를 무리하게 돌리려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통통이.”

“기각.”

“롱롱이…….”

“허, 기각.”

“말랑-”

“기각이라고!”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는지 골머리를 앓는 잇세이를 대신해 이와이즈미가 대답한다. 


“고라 어때, 고라.”


이와쨩 치곤 괜찮은 아이디어……인가?


“고라가 뭔데?”


내심 이와이즈미의 센스에 놀란 토오루가 그 뜻을 물으려 하면


“줄임말.”

“무슨 줄임말?”

“고질라를 줄여서 고라.”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고 만다. 


“아니면 고라파덕을 줄여서 고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가쨩한테 무슨 이름을 붙이려 하는 거야, 바보 이와쨩! 고질라!! 고라파덕!!!”


순간적으로 뒷목 끝까지 혈압이 오른 토오루가 빽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양 귀를 틀어막는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그 새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듯 마츠카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말한다. 


“치즈.”

“……치즈? 그럼 치즈쨩이야?”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아 토오루가 화색의 기미를 보일 때면 잇세이는 기다렸다는 듯


“응. 치즈 햄버그 먹고 싶으니까.”


토오루의 이상을 산산이 깨부수고 만다. 토오루가 잇세이의 등짝은 물론 정강이마저 걷어차며 ‘그럼 나도 내가 멋대로 지어도 되지?! 우유 빵 먹고 싶으니까 우유쨩이라 하면 되지??’ 라는 그럴 듯한 논리를 펼치고 있을 무렵, 하나마키가 손수 싸움 중재에 나선다. 


“워워- 진정해, 진정. 그러다 자고 있는 아카네 다 깨우겠다 이것들아.”

“흥! 먼저 시작한 건 맛층이니까 난 몰라.”

“모르긴 또 뭘 몰라. 그보다 니네들, 아카네 태명을 그렇게 대충 지었단 말이야?”


장난으로 해 본 말이었건만 정작 자신들은 아무 것도 몰랐단 식의 눈알 두 쌍이 하나마키에게 향하자 하나마키의 등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그럼 진짜 붕붕이라 불렀어? 이 귀여운 천사한테??”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뒤척이지도 않은 주제에 어느 새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며 잠을 청하고 있는 아카네와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두 남정네를, 하나마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번갈아 본다. 


“일단은…….”

“딱히 생각이 안 났으니까.”


무법자다. 그냥 무법자임이 틀림없다. 지금에야 저렇게 화내고 투닥 거리겠지만 나중엔 귀찮아져서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부를 케이스가 분명하다, 이것들. 


“그런 거 말고 좀 뭐랄까. 특별한 거 있잖냐. 태몽이라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려가며 태명 설정에 공을 들이는 자신이나, 벌써 귀찮아졌는지 자신은 쳐다도 안 본 채 아카네의 볼을 콕콕 찔러 보기 바쁜 잇세이나, 이러든 저러든 샐러드나 뒤적거리고 있는 토오루나.


“태몽? 아카네 때는 태몽 같은 거 꾼 적 없는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물가물한 첫 날 밤을 떠올리던 토오루의 어깨를 마츠카와가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그렇겠지. 나한테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 좋았던 때가 마치 어제 일인 것 마냥 어깨선을 쓰다듬는 손이 능글맞기 짝이 없다. 


“좋아서 기절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 내 테크닉이 그렇게 좋았나?”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는 노골적인 시선에 어느 새 토오루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를 연상케 하듯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이 쪽은 막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마구 뽐내는 데 비해 솔로가 서러운 인생인 맞은 편 사람들은 등목 샤워를 한 것 마냥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다. 


“애정 행각은 그 쯤 하지?”

“태어나지도 않은 애가 벌써부터 뭐가 뭔지 다 알아 듣겠다 이 커퀴들.”

“둘째도 저런 식이었겠지. 안 봐도 뻔해.”

“솔로는 아주 서러워서 돌아가시겠다? 앙?”


어느 새 제 곁으로 훅 다가와선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는 잇세이 덕에 반쯤 정신이 몽롱해져 버린 토오루는 


“우리!! 태몽 얘기하고 있었잖아!”


자칫하다간 잇세이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 대뜸 빽 소리를 질러 버린다. 간만에 선보인 애정 표현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잇세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캔 깡통처럼 확 구겨진다. 


“그래 뭐……. 이번이라고 다를 거 있겠냐. 뭘 꾸긴 했니?”

“태몽이고 태명이고 다 됐다. 그냥 아무 거나 해.”


옆구리가 시려진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솔로의 서글픈 건배사를 외치고 있었다. 저것도 친구라고, 토오루가 이를 까득거린다. 


“모모쨩으로 할 거야.”

“모모? 복숭아?”


웬 복숭아냐며 잇세이가 되받아치려 하니 토오루는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는다. 


“왜냐면! 하루는 꿈에서 복숭아가 잔뜩 나왔거든. 복숭아나무, 복숭아 강, 복숭아 구름, 복숭아 토끼까지 온 사방팔방이 전부 복숭아 길래 깨고 나서도 뭔~가 이상한 꿈이네 하고 넘긴 적이 있었어.”


아예 핏대까지 세워가며 토오루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언제쯤 주문한 메뉴가 나오냐 묻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태몽이었구나~ 싶은 거지.”


직원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곧 나올 거라고, 죄송하단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뺘……?”


제 아빠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아카네가 졸린 눈을 끔벅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눌한 발음과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여기가 어딘지 몰라 좌우를 휘휘 돌려보는 상대적으로 큰 머리통. 똘망똘망한 두 눈은 익숙한 아빠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천천히 끔벅거린다. 


“아이구~ 우리 아카네 깼구나~”

“누가 ‘우리’ 아카네야. 우리 아카네거든, 맛키.”


제일 먼저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다름 아닌 하나마키였다. 내내 품에 안겨 있어 답답했는지 살이 포동한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카네에게 냉큼 다가가 눈높이를 맞춘다. 


“빠야야-”

“으응~ 아빠 친구 타카히로에요~”

“빠야?”


턱을 갸웃거린 아카네가 제 고사리 만 한 손바닥을 쥐었다 편다. 그러자 풀린 눈을 한 하나마키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흡사 처음 보는 사물을 탐색하듯 작고 뭉툭한 손톱이 그 근방을 쓸어본다.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아……. 어떻게 이 귀여운 생명체가 니들 같은 건장한 사내자식들의 딸이란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생명의 위대함이란 정말……종잡을 수가 없어.”


그 해맑은 웃음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린 건 비단 하나마키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벌써 아카네의 오동통한 볼을 쓸어내리고 있던 이와이즈미 또한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네 녀석, 기억하고 있으려나. 나 하지메 삼촌이야.”

“겨우 그런 걸로 우리 아카네의 관심을 끌 수 있겠어 이와쨩? 아카네 여기 보세요, 울룰룰룰루~ 까꿍!”

“셋 다 시끄러. 토오루 너는 왜 또 거기 껴 있어.”

“재미있으니까?”


싱거운 대답에 잇세이가 이마를 짚는다. 우선은 포대기에 갇혀 언뜻 답답해 보이는 아카네를 내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아카네가 자칫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포대기 끈을 풀어 헤친 잇세이는 –그나마 제일 믿음직한- 이와이즈미에게 아카네를 건네준다. 


“엉덩이부터 받쳐서 안 떨어지게 해. 아직은 뒷목 꺾일 수도 있으니까 목도 잡아줘야 하고.”


그래도 첫 아이를 무사히 키워낸 지 약 2년. 제 나름대로 육아 스킬이 꽤 늘어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 잇세이다. 그의 충고를 가슴에 새긴 채 행여 사고를 치진 않을까 조심조심 아카네를 안아 든 이와이즈미의 손이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그 어깨에 볼 한 쪽을 댄 채 세상 구경하기 바쁜 아카네는 누구보다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와이즈미, 하나마키한텐 넘기지 마.”

“엑, 왜? 나도 아카네 안아 볼래!”

“너는 좀 불안해.”

“아 진짜 너무하네. 내가 무슨 바이러스 균도 아니고.”


셋의 상황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토오루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린다. 오랜만에 보는 솔직한 웃음꽃에 너나 할 것 없이 웃어 버리고 만다. 아카네를 만나고 난 뒤론 분명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던 것 같다며 토오루는 이 순간들을 머릿속 깊이,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 담는다. 


“주문하신 초밥 세트 나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 먹음직한 초밥들이 놓이든 말든 네 사람의 신경은 온통 아카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혼자 자리에 붙어있는 토오루를 제일 먼저 신경 쓴 잇세이만이 다시금 의자에 착석한다. 토오루 앞에 일렬로 늘어진 초밥들을 제 쪽으로 끌어 온다. 


“왜?”


이유는 뻔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토오루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와사비 못 먹잖아.”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무심히 대꾸한 잇세이는 밥 위에 얹어진 사시미를 들춰내 눈곱만 한 와사비를 능숙한 젓가락질로 거둬낸다. 


“용케 기억하네.”

“우유 빵에만 환장하는 초딩 입맛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윽……. 초딩 입맛이라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 제일 좋아하는 새우.”


아카네와 두 삼촌들이 가게 구석에서 방방 뛰며 놀고 있는 사이, 다정함을 한 움큼 집어 삼킨 잇세이는 와사비를 모두 빼낸 새우 초밥을 들어 토오루에게 건네준다. 다만 토오루의 안색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잠…깐만.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때깔 좋기만 한 새우의 속살이 오늘같이 끔찍해 보인 적이 있던가. 


“설마……. 이것도 못 먹겠어?”


머리로는 아니라고 외치려 했으나 몸은 저절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눈 딱 감고 삼키자, 삼켜만 내자, 스스로에게 주문 걸 듯 되뇌이는 다짐과 달리


“으…우웩!”


신 내 나는 헛구역질은 여지없이 그의 속을 괴롭히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선 탓에 의자는 뒤로 넘어가 우당탕탕 큰 소리를 낸다. 멀찍이서 놀고 있던 둘, 아니 세 사람의 눈이 화장실로 내달리기 시작한 토오루를 향한다. 


“망할. 잠깐 아카네 좀 보고 있어!”


뒤늦게 욕지거리를 낮게 읊조린 잇세이가 토오루의 뒤를 따른다. 영문을 모를 세 사람만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한껏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야생의 촉이란 녀석이 하나마키의 뇌리를 스쳐 지난다. 


“입덧……은 아니겠지?”


토오루 때문에 한껏 놀랐을 아카네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던 이와이즈미가 그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아니겠지. 아카네 때는 입덧 하나도 없었다면서. 둘째라고 그렇게나 다르겠냐.”

“어어, 그러면 좋겠는데……. 저거는 아무리 봐도-”

“기우야, 기우. 아카네도 무사히 잘 키운 녀석들이 둘째라고 별 힘이 들겠냐. 둘째라고 크게 까다로울 거 없어. 괜찮을 거야.”


‘둘째라고 크게 까다로울 거 없어.’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란 걸, 이와이즈미는 알고 있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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