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키예프(우크라이나)입니다. 설정 상 러시아어 사용이 많습니다.


Итак, сколько это?

-그래서, 전부 얼마인가요?

유창한 러시아어가 과일 가게 주인의 귓전을 때렸다. 놀라 동그래진 눈꺼풀을 여러 차례 껌벅이던 주인은 풍만한 아랫배를 감싼 앞치마에 손을 닦으려고 한 행동조차 잊고 말았다. 타지에서 여행 온 듯한 동양인 하나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 입가엔 여유롭게 미소까지 띠고 있었으니 현지인 입장에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디 그뿐일까. 만만한 동양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웠다간 가만 안 두겠단 눈빛이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자, 주인인 이르고예비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솔직한 값을 불렀다. 접대용 미소를 어설프게 쥐어짜 내며 바나나 한 봉과 오렌지 두 개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우왓, 가성 비 장난 아니네.”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쿠로오가 사뭇 놀란 얼굴로 말했다. 

“도쿄에선 입에 풀칠도 못할 가격인데. 안 그래, 아카아시?”

쌀쌀한 날씨 탓에 양 팔로 몸을 감싸 안던 아카아시는 전리품 자랑하듯 콧바람을 내뿜는 쿠로오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이걸로 살 건 다 산 거죠?”

“응. 그나저나, 여긴 어째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냐. 여행 시기를 잘못 잡았나?”

페이퍼백을 가득 채운 내용물은 꽤 묵직했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곧장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인파로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에서 짐 덩어리들을 내려놓곤 목을 감싸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맨살이 드러난 목 언저리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에, 쿠로오씨?”

그러나, 쿠로오는 마치 자신이 추위에 둔감한 사람인 양 그것을 아카아시의 손에 둘둘 감아주었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선 따스한 봄을 맞이하고도 충분히 남을 3월의 한가운데. 반나절 만에 영하와 영상을 왔다 갔다 하는 키예프의 체감 기온은 아카아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여기는 봄이 짧잖아. 이거라도 손에 감고 있어. 맨손보단 나을 거야.”

장갑을 두고 나왔나 봐요. 버스에 올라타며 지나가듯 말하던 아카아시의 옆얼굴과 추위에 벌겋게 부푼 손가락 끝을 쿠로오는 내내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쿠로오씨가 추울 거예요.”

손사래 치듯 머플러가 감아진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쿠로오는 완강했다. 그의 발버둥 정도로 풀리지 않게끔 정성 들여 매듭까지 지어준 후 머플러로 통통하게 부푼 손바닥 틈새에 제 뺨을 파묻었다. 뜻하지 않은 간접적인 스킨십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오야 오야? 밤새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내 품에 파고든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짓궂은 목소리에 은근한 미소가 가미되자 아카아시는 도저히 쿠로오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이정표를 잃은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그, 그건…….”

“조금은 덜 추울 거야. 짐 이리 줘. 내가 들게.”

안절부절못하는 눈알이 애꿎은 콘크리트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사이, 쿠로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괜찮다는 아카아시의 만류를 능숙하게 뿌리치곤 세 덩이의 페이퍼백을 양 팔에 가득 든 쿠로오가 발길을 서둘렀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던 발걸음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섰고,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얼른 와. 

소리 없이 벙긋대는 입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이 아카아시를 부추겼다. 

그런 쿠로오에게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아카아시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부 깊이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가 낯설었다. 발을 내딛고 있는 토양의 느낌마저 전혀 달라 생소했다. 그의 옆을 분주히 스쳐 지나는 사람들은 온통 외지인이었다.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마침내 영어. 귓전을 울리는 언어가 중구난방이었다. 가격표, 표지판, 입간판,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난생처음 보는 활자였다. 

‘첫 여행’이란, 그에게 지독히 낯선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출국 겨우 며칠 전,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후무하던 아카아시는 급한 대로 리에프에게 러시아어 기초 회화 책을 빌렸다. 그러나 첫 배낭여행이란 들뜬 기분은 회화 공부를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에 익힌 거라곤 겨우 몇 마디의 말. 그마저도 어색한 단어를 띄엄띄엄 늘어놓으며 버벅 거리기 일쑤였다. 차라리 러시아어 전공자인 쿠로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그래, 어떤 식으로든 말이 통한다는 건 좋은 거지. 혼자인 것보다 훨씬 외롭지 않고… 그렇긴 한데…….”

아카아시는 뒷말을 아꼈다. 손을 칭칭 둘러싼 차콜 색 머플러엔 쿠로오의 온기가 여실했다. 몇 발자국 앞서 있는 쿠로오의 등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Осторожно!

-조심해요! 

놀란 쿠로오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말의 장터는 인파로 북적였기에 오가는 사람과 어깨를 부닥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아카아시는 은연중에 미간을 험상궂게 찡그리고 있었다. 

Ты в порядке?

-괜찮으세요?

이제 막 장터에 들어서던 금발의 여성 둘이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쿠로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쿵, 작지 않은 소리가 함께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한 여성은 불쾌함으로 가득 찬 눈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О, большое спасибо.

-오, 정말 고마워요. 

순간적으로 발휘된 순발력 및 기사도 정신 비슷한 것은 손아귀에 들려 있던 무거운 짐짝을 저 멀리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 빈자리엔 부드럽게 잡아당긴 여성의 손목이 자리했고 흐트러졌을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눈길은 퍽 다정했다. 

С удовольствием. Есть ли травмы?

-별말씀을.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 버럭 화를 내려던 금발의 여성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큰 키, 자국에선 볼 수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 또한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꼭 첫사랑에 빠진 여학생처럼 양 뺨을 붉힌 여성들은 쿠로오에게 바짝 붙어 핑크빛 기운을 뽑아냈다. 당황한 쿠로오가 뺨을 긁적이며 무어라 대꾸하다 말고 이내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아카아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벌써 몇 번째냐고.”

겨우 사흘째. 키예프에 체류하는 동안 그가 선보인 ‘친절’이란 이미지는 아카아시의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을 반겼다. 춥다, 추워. 쿠로오는 재빨리 집안 곳곳의 전기난로를 켰고 소파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여간 추웠는지 양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싹싹 비벼 한기로 얼어붙은 목 언저리에 갖다 대곤 서늘한 입김을 토해냈다. 

“아, 짐 정리-”

아차 싶은 순간은 항상 반 발자국 늦게 생각나곤 했다. 뒤늦게 현관에 내려둔 짐 덩이들과 덩그러니 내버려둔 아카아시가 떠오른 쿠로오는 한달음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미안. 도와줄게.”

아카아시의 손을 둘둘 감고 있던 차콜 색 머플러는 어느새 싱크대 한 편에 얌전히 개어져 있었다. 그는 쿠로오 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됐어요.”

쿠로오가 들어주려 했던 짐 꾸러미를 한 발 빨리 아카아시가 낚아채 갔다. 페이퍼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텅 빈 냉장고 안에선 쌀쌀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휑한 내부가 야채와 과일들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개 중 오렌지가 내던져지는 소리는 유독 날카로웠다.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는 듯한 잡음이 쿠로오의 귓전을 두드렸다. 

왜 이러지.

종잇장 안 쪽을 굴러다니는 오렌지를 집던 손이 느려졌다. 잔뜩 굳은 어깨가 짙은 한숨으로 풀어졌다. 

평정심.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파동 없는 수면처럼 고요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눈꺼풀을 깜박였다 하면 조금 전 보았던 쿠로오의 옆얼굴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리플레이되곤 했다. 설렘과 기대로 부푼 벽안. 유달리 아름다워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 두드러진 이목구비. 운동부의 것과는 전혀 다른 뽀오얗고 매끈한 살결. 호리호리한 몸 선. 

어떻게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연인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건 바로 아카아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아카아시는 스스로가 미웠다. 기분 좋게 여행 와서 외국어에 능통한 그를 칭찬하기는커녕 그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 전부에게 가시를 세우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모르는 언어, 모르는 사람, 모르는 웃음. 그런 것들을 온종일 반 발자국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선 울컥울컥 한 무언가가 불에 끓듯 치밀어 오르곤 했다. 

러시아어를 잘할 수 있었다면. 미리미리 공부해 뒀더라면. 하다못해 인사말 정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쿠로오가 대화를 시작하는 것까진 좋았다. 타지에 왔으니 그곳 친구를 사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었다. 

다만. 외래어로 쏟아지는 대화의 틈에 끼어들 수 없는 단절감, 분위기에 맞춰 어정쩡하게 웃어야 했던 어색한 공기, 들뜬 웃음 사이로 멀어져 가는 뒷모습,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그에게서 느껴버린 지독한 외로움은 후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화났구나.”

이런 옹졸한 자신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는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참을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설프게 둘러대 봤자 나한텐 안 통해.”

그러나 입이 떨어지기 직전 떼어나간 찰나의 주저를, 쿠로오는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일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항상 그랬다. 아카아시는 쿠로오 앞에만 서면 몸과 마음이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쿠로오의 속내를 파악하긴 복잡하게 널브러진 퍼즐을 1분 안에 맞추란 것처럼 느껴졌건만, 쿠로오는 한 눈에 아카아시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그의 핵심을 푹 찌르는 쿠로오의 통찰력은 아카아시에겐 무척 당혹스럽다가도 또, 부끄러웠다. 

어른스럽다. 능숙하다. 대단하다. 입에 꿀을 바른 수식어구는 쿠로오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노력도, 무덤덤한 표정 아래 감춘 초조함도, 평정심을 노래하는 강박관념도, 은근한 투쟁심과 승리의 욕구마저도. 착한 아이 칭찬하듯 쿠로오는 그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질투했구나, 케이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큰 손아귀가 짤막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뜨렸다. 괜한 오기가 발끈해 무어라 반박하려던 차, 귓바퀴에서 ‘쪽’이란 비현실적인 소리가 났다. 

“귀여워.”

익숙한 입술의 감촉과 앞뒤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애정 넘치는 속삭임, 뒤에서부터 은근하게 감싸 안아오는 팔뚝까지.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됐다. 아카아시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온몸에서 열이 들끓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쿠로오였다. 상대가 쿠로오만 아니었어도 아카아시의 이성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며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 때문에 뚱해진 우리 케이지 기분 풀어줘야겠지?”

제 진심을 훤히 꿰뚫다 못해 그것을 귀엽게 여기는 쿠로오가 얄밉기까지 했다. 됐네요. 달콤한 제안을 보기 좋게 되받아치려던 말대답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말았다. 

“아. 아? 쿠로오씨?!”

무릎 아래에 팔을 넣고 뒷목을 감싸 안아 그를 번쩍 들어 올린 쿠로오는 이미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어.”

아예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는 쿠로오를 보고 있자니 결국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거우니 내려달라는 말은 쿠로오에게 통하지 않았으니 소원대로 그의 목덜미를 꽈악 끌어안았다. 불규칙한 맥박이 얇은 피부 결 아래 쿵쿵 울려댔다. 

쿠로오는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방 안 곳곳을 빛내는 전기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틀 가까이로 다가갔다. 창문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 위로 아카아시를 내려둔 후 바깥 풍경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는 말대답은 5층 아래로 보이는 키예프 시내 전경에 목구멍 아래로 쏙 들어갔다. 

해가 저물기엔 아직 넉넉한 오후, 노란 햇빛 한 움큼은 상냥히 빛났다. 싸늘한 봄바람이 숨을 불어넣는 거리엔 여전히 인파가 북적였다. 엣취, 귀여운 재채기 소리가 쿠로오의 귓전에 와 닿았다. 시선은 창밖에 고정시킨 채, 제 목에 두른 팔을 풀어 손아귀를 겹쳐 잡아 보았다. 조금 차가웠다. 그것을 그대로 뺨에 가져가며 쿠로오가 말했다. 

Мы любители.

네? 유창한 문장 앞에서 아카아시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 해 봐.”

쿠로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아카아시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못 해요.”

“들리는 대로 말하면 되잖아.”

“못한다고 했잖아요.”

가시 돋친 말투였다. 쿠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듣기만 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에선 여전히 생글생글한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의중을 전혀 짐작 못하겠다가도 자꾸만 러시아어로 말하는 쿠로오가 얄밉게 보였다. 일방적으로 선이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싫은 감각. 아카아시는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진즉에 눈치채고 있어서 쿠로오는 일부러 아카아시의 손을 사로잡았던 걸까. 빠지지도 않을 만큼 제 손을 세게 움켜쥔 쿠로오의 손아귀가 오늘따라 밉보이기만 했다.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래어에 지쳐 아카아시마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귀에 익은 문장이 들리자 아카아시는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처럼 훽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을 보고 있어야 할 쿠로오의 샛노란 동공은 어느새 아카아시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고 찬바람은 꽉 닫힌 유리창을 살살 건드렸으며 기울어진 햇볕이 쿠로오의 싱그러운 눈웃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겹겹이 쌓여 얼음장을 이루던 섭섭함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애정이 담뿍 담긴 한마디에, 겨우 말 한마디에, 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슬픈 듯 기쁜 듯 글썽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쿠로오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뒷목을 힘껏 잡아끌었다. 꽃잎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꿀을 찾아 헤맸다. 언제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운 사람들처럼 틈새 하나 내어주지 않고 찰싹 달라붙어 짙은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낯선 공기에서 오가는 혀와 타액이 생소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 말을 내뱉기 위해 떨어진 입술과 입술 사이엔 은빛 실이 짧게 늘어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대답을 들어서 였을까. 놀란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이, 아카아시는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키스 앞에서 쿠로오의 이성이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렸다. 그런 쿠로오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아시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혀를 움직이는 것에만 몰두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촉박한 여행 준비 속에서 아카아시가 유일하게 외워두었던 단 한 마디의 문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형식적인 회화보다 아카아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문장은.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의 여행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 * *


Мы любители.

-우리는 연인입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널 사랑해, 아카아시.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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