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님 리퀘



“실례합니다~”

목재로 된 미닫이문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서적에서만 풍기는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무로 된 책장, 칸칸을 빼곡하게 채운 서적들. 도서실로 들어서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때는 봄.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왔다. 크림색 커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오후 세 시의 햇볕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알록달록한 새의 지저귐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어디 보자.”

오이카와는 눈에 띄는 책장 앞을 서성이며 눈높이에 맞는 책들의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훑어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다. 자신도 모르게 신바람이 난 오이카와가 헛기침 몇 번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독서’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철부지 아이가 장난을 준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처럼. 오이카와의 두 눈은 반짝반짝한 빛을 띄었다. 

오이카와는 얼핏 보아 제일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의 중간 즈음되는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치곤 그 사이에 이목구비를 깊이 파묻었다. 종잇장과 눈알이 부딪힐 만큼 거리감이 없었으니 그 안에 적힌 활자가 읽힐 리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의 목적은 책이 아니었다. 

양 손에 펼쳐 든 책으로 얼굴을 가린 자세 그대로, 오이카와는 게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떨리는 숨소리가 크게 나버릴까 호흡까지 꾸욱 참아낸 채. 이윽고 책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오이카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 모서리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귀에 들리는 건 잔잔한 바람 소리, 커튼이 나부끼는 나긋나긋한 울림. 별 다른 반응이 없자, 오이카와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쿠니미쨩?”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았다. 책장에 몸을 바짝 붙이고 얼굴의 절반을 내밀었다. 

어딘가 들뜬 기분이었다. 봄이라서. 벚꽃이 만개해서. 그런 식상한 이유가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문께로 벚꽃 잎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내리 앉았다. 그 솜털 같은 몸짓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심장이 뻐근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나무를 등진 도서실 구석, 쿠니미는 한 폭의 그림을 배경 삼아 단잠에 취해 있었다. 

“어~이.”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쿠니미를 부르는 오이카와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관찰력 좋고 잠귀 밝은 쿠니미가 인기척을 전혀 못 느낄 만큼 곤히 잠들어 있단 사실이었다.

“진짜 자는 건가?”

쿠니미는 기본적으로 낮잠이 많은 타입이었다. 부 활동을 제외하면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조차 깨어 있는 쿠니미를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자기 앞가림을 전혀 못하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연비 좋고 효율 좋고 늘 냉정한. 멀지 않은 과거, 오이카와는 자신이 보아온 쿠니미를 단칼에 정의한 적이 있었다.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을 사실이라 말했는데 무엇이 바뀔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정말, 내가 들어갈 틈 하나 안 주는구나.”

그가 쿠니미를 단순한 후배 이상으로 보게 된 것에 있었다. 

이층짜리 단출한 책장을 베개 삼아 잠든 쿠니미의 곁으로 오이카와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이카와 못지않게 잡티 하나 없는 상아색 피부.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 앞머리. 윤기마저 감도는 칠흑빛 머릿결.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옅은 그늘. 규칙적으로 쌕쌕거리는 숨결. 호흡을 따라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와 가슴. 

참 고운 얼굴이었다. 

아빠 다리로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댄 쿠니미 앞으로 오이카와가 무릎을 굽혔다. 굽힌 무릎 위에 양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었다. 그가 잠이 많아 좋은 점이라 함은, 이렇듯 쿠니미의 얼굴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단 점이었다. 

“잠만보야, 쿠니미쨩은.” 

반면, 짝사랑 상대가 온종일 잠에 취해 있는 터라 변변한 대화의 실마리 한 번 잡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뾰로통해진 오이카와는 잘 뻗은 검지로 쿠니미의 볼을 쿡쿡 찔러댔다. 몰캉한 볼은 찔리면 찔리는 대로 푹푹 들어갔다. 번듯한 이목구비에 고정된 시선을 살짝 내리니 그의 허벅다리 부근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책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도 잘 줄은 몰랐는데.”

봄바람이 상냥한 숨결을 불어넣자 창틀 안 쪽으로 벚꽃 비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제히 낙하하는 벚꽃 잎들과 함께 쿠니미가 읽고 있던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영화 속 주인공 같아. 쿡쿡 대는 개구 진 웃음이 바람결에 새어 나왔다. 스쳐 가는 듯한 행복한 기분도 잠시.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읽고 있었을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에 부릅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자세가 자세다 보니 거꾸로 펼쳐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한눈에 읽기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남은 수단은 하나 뿐이란 걸 오이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큼, 흠. 쿠니미쨩이 뭘 읽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쿠니미쨩이 조, 조, 좋……. 하여간 그런 불순한 동기로 가까이 가는 건 절 대. 절대 아니니까…….”

쥐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쿠니미 옆에 안착하려는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쉴 새 없이 쿵쾅 이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겨우겨우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지만 그와 오이카와 사이엔 여전히 한 뼘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한 줌의 핑크빛 꽃잎이 둘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갔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이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따라 혈류가 거꾸로 치솟았다. 화끈한 열기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쭈뼛 세웠다. 이러다 심장 마비나 호흡 곤란으로 당장 죽어 버리면 어쩌지. 눈앞이 점멸해 나가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 기억이 나질 않자 오이카와는 문득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던 것이다. 걱정도 잠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새끼손가락이 달팽이 기어가듯 거리를 좁혀 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쿠니미 쪽으로 기울어진 몸은 마침내 옷자락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남청색의 와이셔츠 소매가 맞닿아 바스락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채 그대로 호흡을 멈춘 오이카와는 최대한 조용히, 느리게 옆 눈을 흘겼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종잇장이 쉴 틈 없이 팔랑거리는 탓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었다. 

“고래?”

나부끼는 책장 하나를 잡아 앞뒤를 살폈다. 역시나 고래였다.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손바닥 한 면을 쫙 펼쳐 쿠니미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좌우로 세게, 약하게, 빠르게, 느리게 흔들어 보았다. 쿠니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샐쭉 웃었다. 

“잠깐만 책 좀 볼게.”

특유의 개구 진 미소가 폭발하기 직전의 설렘과 긴장감을 살짝 가려 주었다. 다행히 쿠니미는 책을 세게 잡고 있진 않았다. 뭐, 책 표지에 껌 딱지처럼 달라붙은 엄지와 검지만큼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손수 떼어내야 했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것 이외엔 별 다를 게 없었다.

“허먼 멜빌. 백경(白鯨).”

헤에, 이런 책을 좋아하는구나. 꽤 두꺼운 책이긴 했지만-무려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를 자랑했다- 쿠니미가 읽는 거라면 자신도 읽어봐야 하지 않겠냐며 속으로 떵떵거리던 오이카와는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분명 일본어로 쓰인 게 맞는데, 일본어가 아닌 듯했다. 차라리 암호문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미간에 인상을 팍 주며 문장 하나하나를 꾸역꾸역 해석하다 얻어낸 결론은 이런 어려운 책을 이해하는 쿠니미가 대단하다는 것뿐. 세 페이지나 넘겼을까. 오이카와는 문득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묵직해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어……!!”

혹시나 싶었다. 설마 싶었다. 책에서 떨어진 눈알이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정수리를 확인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굽었던 척추가 자동적으로 곧추섰고 쿠니미의 뺨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 신경이 바짝 날을 세웠다. 불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이 미묘한 공기 속에서, 상황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망할 오이카와!! 수업 끝나면 교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이와이즈미였다. 도서실을 쩌렁쩌렁 울리다 못해 학교 전체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외마디 고함에 오이카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워워- 진정해, 에이스. 어차피 캡틴 여기 있을 거 뻔히 아는데 왜 소리를 지르냐.”

“그러다 고혈압 오르겠다. 일단은 진정 좀 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덤으로 말이다.

오이카와는 사고를 빠르게 굴려야 했다. 쿠니미와 자신이 함께 있는 걸 보이는 것까진 상관없었다. 부 활동 시작 시간까지도 아직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엔 노기가 없었다. 그저 제 말을 무시하고 도서실로 튀어온 자신을 문책하러 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상대하는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쿠니미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르고 쓸데없이 화병만 많은 이와이즈미였다. 쿠니미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몰골을 보고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 고함 소리에 쿠니미가 깨기라도 한다면.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제 얼굴을 발견해버린다면. 쿠니미 자신이 들고 있어야 할 책이 제 손에 들려 있다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피한다. 조용히 시킨다. 쫓아낸다.”

그 세 문장을 자기 암시하듯 되뇐 오이카와는 책장 사이로 얼핏 스친 낯익은 실루엣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마츠카와였다. 이와이즈미가 아닌 것에 속으로 쾌재를 외친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에게 온갖 눈짓 발짓을 섞어가며 제 절박한 상황을 표현했다.

쉬이- 조 용 히! 자 고 있 어. 자 고 있 다 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설명을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고 말이다. 다행히 마츠카와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치 즈 햄 버 그 10 개. 알겠지? 10 개 야. 

협상의 대가는 잔인했지만.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이며 다시 한번 10을 강조하는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는 이를 갈았다. 그래도 다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오이카와는 한 시름을 놓게 되는데, 

“야. 오이카와 좀 늦을 거라던데.”

“뭐?! 여기서 더 늦어? 왜! 연락 왔어?”

“소리 낮춰. 일단 도서실이잖아.”

“어……. 응.”

“나한테 라인 와 있더라고. 쿠니미가 좀 다쳤대. 그래서 양호실 들렀다 곧장 부실로 간다고……. 아,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진 말라 더라. 금방 간대.”

이와이즈미의 반응을 비롯해 혹여 하나마키가 자신이든 쿠니미든 발견하면 어쩌나 싶어 오이카와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1초가 1시간 같고 1분이 하루 같았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오, 진짜. 늦으면 1분당 운동장 10바퀴라고 전해라.”

이와이즈미의 서슬 퍼런 협박을 끝으로 세 사람의 발소리는 멀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구부정한 어깨와 풀린 낯짝은 이제 슬슬 쿠니미를 깨워야겠다는 의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머리에 꽃잎 붙었어요, 선배.”

쿠니미가 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 엑, 엑?! 쿠니미쨩??”

언제부터?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내 얼굴 봤어? 내가 하는 짓거리들 다 본 거야? 맛층한테 묵음으로 소리쳤던 것도? 전-부? 다 보고 있었던 거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건 더듬거리다 얼떨결에 내뱉은 ‘쿠니미’란 이름뿐이었다. 즉,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지나치게 의식하고 말았다. 쿠니미의 새끼손가락은 어느새 오이카와의 것과 살짝 닿아 있었다. 당황해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 오이카와와 달리 쿠니미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실눈을 떠보니, 그의 길쭉한 손가락 끝엔 핑크빛 솜털이 붙어 있었다. 쿠니미가 멀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이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전신을 훑어 내리던 따가운 시선이 이내 그의 손아귀에 갇힌 서적을 향했다. 책이 왜 선배 손에? 의문도 잠시. 쿠니미는 발그레한 홍조를 띤 오이카와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런 눈치로 말했다. 

“선배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열이라도 있나? 그 큼지막한 손이 또다시 저에게로 향하자 오이카와는 다시금 눈꺼풀을 질끈 감아 내렸다. 눈꺼풀 안 쪽에 보이는 것이라곤 새까만 어둠뿐이었건만 언뜻 쿠니미가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다. 환청 같은 옅은 웃음소리도 함께 말이다. 

“푸흐, 너무 솔직한 반응이라 오히려 신선하네요.”

뒤늦게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가림막 너머의 쿠니미는 그의 머릿속에서 줄곧 그려왔던 모습 그대로, 정말 웃고 있었다. 휘어진 눈꼬리,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 온화한 얼굴.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고백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건데요?”

“뭐, 뭐!! 아니! 나는 그, 게 아니고……!”

“이러다간 선배가 먼저 졸업장 떼겠어요.”

그랬다간 제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귓전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갔다. 불에 탈 듯 벌게진 귓불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4월의 화창한 봄날.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 사랑은 봄바람을 타고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좋아해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