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루(@meru_0421) 썰 기반입니다.


목재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닫혔다. 이자카야를 알리는 얇은 천막이 앞뒤로 흔들렸다. 천이 젖히자 상쾌한 바깥바람이 쿠니미를 반겼다. 쿠니미는 달뜬 뺨을 식히려 손을 들었다. 알코올로 달궈진 볼과 손바닥 사이엔 꽤 온도 차이가 있었다. 적당히 서늘한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가며 뺨을 어루만진 지 몇 차례. 쿠니미는 아예 이자카야 출입구 바로 옆 자리에 쭈그려 앉아 버렸다.

술집 안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몇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거였더라. 쿠니미는 뺨에 얹어둔 손등을 떼어내 숫자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즐거울 만도 한가.”

활짝 만개한 웃음꽃들이 듣기 좋았다. 동시에 그들과 비슷한 온도로 웃을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쿠니미를 감싸 안았다. 탄식하듯 반사적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희희낙락한 웃음소리에서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아! 쿠니미쨩 여기 있었구나~”

그때, 쿠니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돌아간 눈이 반쯤 열린 문어귀에서 꼿꼿하게 멈춰 섰다. 한참 찾았잖아. 꿈이 아니라는 듯 문 틈 새로 삐져나온 이목구비와 선명한 음색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쿠니미쨩도 진짜 오랜만이네.”

배시시 웃던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빈 옆자리로 바짝 다가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던 오이카와의 옆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본 쿠니미는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술집의 온도를 그대로 가져온 오이카와는 신이 난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맛층 턱수염 기른 거 봤어? 영상통화로 볼 땐 엄청 놀렸는데 실제로 보니까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란 거 있지. 맛키는 결혼 준비로 바쁘다면서 얼굴이라도 잠깐 비추고 간 게 어디야 싶고. 이와쨩은 가업으로 이은 두부 장사가 엄청 성황리래, 대단하지?”

쿠니미는 형식적으로만 고개를 까딱였다. 

“미안. 나 혼자만 떠들고 있었네.”

한참 동안 입을 움직인 후에야 오이카와는 술기운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쨩은 어때? 잘 지내는 거지?”

화살은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쿠니미는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답 없이. 그저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어색한 정적에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오이카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던 후배의 속내가 읽히질 않자 천하의 오이카와 역시 당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려 할 무렵이었다.

“하지 마요.”

쿠니미의 무게중심이 오이카와 쪽으로 기울어졌다. 길게 뻗어 난 손가락들이 한껏 일그러진 입술 사이를 톡 건드렸다. 

“예쁜데.”

입술에 닿은 서늘한 감촉, 가까워진 숨결, 읽을 수 없는 표정, 한 톤 낮아진 목소리.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님 연속적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져서 그랬을까. 놀라 확장된 동공은 이내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눈알은 바닥에 꽂혔고 낯부끄러운 열기는 술기운을 대신해 오이카와의 얼굴을 붉혔다.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오이카와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쿠니미쨩 진짜 다 컸네! 이렇게 내 걱정도 해주고!”

자신은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람처럼 오이카와는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했다. 목소리는 높아졌고 팔을 높이 들어 쿠니미의 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툭, 툭 내리쳤다. 그러니까,

“…그러게요.”

쿠니미가 그 손을 낚아채갈 줄은, 오이카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벌써 다 컸는데.”

못 본 새 악력은 어찌나 세진 건지 슬쩍 힘을 줘 손을 빼내려 해도 쿠니미의 손아귀는 돌덩이 마냥 요지부동이었다. 이레귤러의 연속이잖아! 속으로 잔뜩 울상이 된 오이카와는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는데.”

“저기, 쿠니미쨩 이거 좀… 놓고 말하자, 응?”

“왜 자꾸……. 자꾸만.”

취했구나. 오이카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쿠니미, 대답 없이 물끄러미 저만 쳐다보던 쿠니미, 거침없는 스킨십과 묘한 말만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쿠니미. 만취라는 결론을 도출하니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던 쿠니미의 행동거지가 납득되기 시작했다. 

그 쿠니미쨩이 술에 취했다니! 오이카와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붙잡힌 손과는 달리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얄궂은 웃음이었다. 키가 한 뼘쯤 더 커지고 성대가 굵어지고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어도 ‘쿠니미 아키라’란 본질은 그때 그 시절에서 거의 변하질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가 덩치만 큰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동경(あこがれ)이라고 하죠, 보통은.”

쿠니미의 실상을 파악하곤 생글생글 지어 올린 눈웃음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한 건, 그가 다음 말을 꺼낸 직후부터였다.

“처음엔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동경이나 존경의 의미라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렸을 때니까. 그래서… 착각한 건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얼굴 근육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꽉 잡힌 손에서 체온이 공유됐다. 서늘한 손이 따스한 손과 한데 겹쳐져 온도가 뒤섞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소리 없이 뻐끔거리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이 잡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을 대뜸 제 목덜미로 가져갔다. 화들짝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뜬 채 쿠니미 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맞닿은 손바닥에선 불규칙적으로 쿵쾅 이는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보 같죠, 나.”

“……쿠니미쨩?”

“이젠 그만 할 때도 됐는데. 안 이럴 때도 됐는데.”

“…….”

“왜 이럴까. 왜.”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쿠니미의 얼굴은 점점 오이카와에게 가까워져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이카와는 뒷걸음질을 치다 나무문에 뒤통수를 작게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도망갈 곳이나 숨을 장소가 없다는 게 오이카와에겐 마치 패닉처럼 작용했다. 

“사실은 알고 있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

“…….”

“너. 너. 너. 전부 너 때문이라고.”

“…….”

“나는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자꾸만…….”

그 와중에도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은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던 지라,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쿠니미와 코끝이 닿을락 말락 가까워지자, 위험 신호의 마지노선을 느낀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기, 쿠니미쨩! 너무 가깝, 가까워. 좀만 떨어져서-”

“네가.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잖아.”

오이카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쿠니미는 만취했다는 것조차 망각했는지 여태 자신이 느껴왔던 무수한 감정들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정말 그만해야 하는데. 너만 보면 의지가 약해져. 아니, 애초에 내 의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어. 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고 싶어. 평범한 선후배 관계가 됐으면 좋겠어. 동시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몇십 번씩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버려. 그러니까 나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쿠니미의 말들이 별세계의 언어 같았다. 애절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입을 놀리는 그의 눈이 얼핏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오이카와는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감지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쿠니미쨩, 너무 취한 거 같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곤 그저 서글픈 눈을 하고 있던 쿠니미에게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귓전에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반박이라도 하려는 것 마냥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나한테 아무 생각 없잖아요.”

그 순간 오이카와의 입술 위로 무언가가 겹쳐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곤 그대로 초점을 놓아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쿠니미가 쓰게 웃는 얼굴뿐이었다. 

“넌. 내가 이래도 아무 생각 없으니까……. 그만해야 되는 거죠.”

점점 작아지던 쿠니미의 목소리는 어느새 끊겨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품 안으로 쓰러지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그의 심장박동 역시 차츰 잔잔해졌다. 오이카와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새근새근 잠든 쿠니미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은 두 사람을 다정하게 비추어 주었다. 

단 한 사람의 얼굴색만이 시뻘겋게 불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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