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마츠하나 전력 60분
*24살의 마츠카와X17살의 하나마키
*첫눈에 반한 사람, 마츠카와 잇세이와 과외를 시작하게 된 하나마키의 이야기.
W. 멜
가을의 냄새. 사락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앉는 낙엽소리와 드높은 하늘은 어느덧 계절이 돌고 돌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창가에 서리는 9월. 붉은빛으로 여물어가는 하늘을 좀 더 가까이 보기위해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의자를 옮긴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탁 트인 창문 너머로 하늘이 한뼘 너머로 가까워진다. 그가 하늘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또다른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머그잔을 들이민다.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린 하나마키는 그가 들고온 쟁반위의 것을 보고 김이 빠진다.
"뭐에요- 슈크림 없어요?"
그곳에는 불행히도 슈크림이 아닌 먹음직스러운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이 놓여있었다.
"케이크라도 사주는걸 감사하게 여기는 건 어때?"
"네네~ 감사합니다~"
흥, 아메리카노 시켰으면 한 소리 하려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마츠카와는 그의 입맛을 잘 알고 있었다. 캬라멜 시럽을 듬뿍 얹은 마끼아또. 하나마키는 머그잔을 조심스레 들어 달콤하기 그지 없는 캬라멜 향을 음미하다 못참겠다는 듯 입을 댄다. 달달한 우유 끝에 풍기는 약간의 커피내음이 나쁘진 않다. 그제야 씨익 웃으며 그의 입가에 뭍은 우유 거품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는 마츠카와는 누가보아도 멋스러웠다.
"삐졌어?"
"아뇨~ 전혀~"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꺼내 그의 앞에 털썩 앉은 마츠카와는 케이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딸기를 포크로 집어든다. 그의 입에 넣어 줄까 말까 되도 않는 장난을 치면서 말이다. 그가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자 그제야 빨갛게 익은 딸기를 그의 입술에 갖다대는 마츠카와. 오물거리며 한 볼 가득 딸기를 품고 있는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다 말을 꺼낸다.
"하나마키."
"엑, 갑자기 뭐에요. 항상 히로라고 불렀으면서."
"기억나? 저 사거리-"
턱을 비스듬히 괸 마츠카와의 시선의 끝에는 창밖, 그 너머의 거리가 보인다. 새빨간 단풍잎과 샛노란 은행잎이 살랑거리는 사거리의 중심. 새록새록 떠오르는 처음의 기억. 그를 따라 턱을 괴던 하나마키의 눈이 가늘어진다.
"....기억 못할리가 있나요."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인데. 혀끝을 맴도는 딸기향. 그것이 마냥 싫지는 않다. 생각에 잠겨 가만히 그 때를 떠올리고 있으면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버리는 마츠카와가 있다. 아프잖아요- 투덜거리는 하나마키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해본다.
"저기요! 하면서 날 불러세웠잖아."
"아아아아아 안들려요 안들려!!"
"귀여웠는데 말이지."
물론 지금도. 한 마디만 던졌을 뿐인데 벌겋게 달아오른 채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붕붕 젓는 눈 앞의 이 아이가, 귀여워 미치겠다.
"전 그 때 생각하고 싶지 않다구요!"
"왜?"
"그야....."
당신에게 여자친구가 있었으니까.
#
그 해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그래서 그런걸까, 몸과 마음이 들떴던 이유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쯤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분홍색 머리칼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을때도, 친했던 동성 친구에게 온갖 끔찍한 욕을 들었을때도, 이상하게 자기 혐오는 들지 않았다. 자존감이 높은걸까? 아니면, 포기한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려나."
혼자 걷는 봄의 거리는 예쁘다. 봄을 맞아 만개한 벚꽃들이 저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하늘하늘 흩날린다.
"아니... 아니지."
혼자 걷는 봄의 거리는 끔찍하다. 봄을 맞아 꽃놀이를 나오는 연인들이 풍기는 사랑 내음새가 온바닥에 흩날린다. 우울했다. 얼른 살것만 마저 사고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혼자 방구석에 쳐박혀 게이 야동을 보든, 만화책에 빠져 남주인공을 좋아해보든, 어느 쪽이든 좋으니 이 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로 그 사람을 보기 직전까지.
“저기요!"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의 남자 머리 위로 살짝 앉은 꽃잎은 꽤 귀여웠다.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는데 그 뒷모습이 매력적이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저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순간-
"네?"
세상이 컬러풀하게 보인다는 건...이런 걸까? 나른한 눈매. 짧은 흑색 머리칼. 얇은 셔츠 위로 보여지는 잔잔한 근육. 톱니바퀴가 맞춰진 마냥, 이 봄날의 거리에는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 당신과 내가 눈이 마주친 시간. 그것은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이어져 당신의 모든 것이 온 몸에 새겨지는 듯 했다.
"아,아,그...어..."
"맛층- 오래 기다렸어?"
"아니. 금방 왔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상황에서, 우리의 공간을 침범한 것은 다름 아닌 여자 한 명. 컬러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다시 나락으로 추락한 느낌. 산뜻한 봄 내음 사이에서 추적한 쓰레기 냄새를 맡는 느낌. 아아, 기분이 더럽다. 더러워 미치겠다. 여자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기분을 망칠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그 사람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내가 보낸 시선을 느낀건지 금방 이쪽을 봤지만.
"그 쪽은 누구..?"
예쁜 사람. 높이 올린 포니테일에 부담스럽지 않은 향수 냄새. 누가 보아도 여성스러운 차림새에, 귀여운 얼굴까지. 부족하지 않았다. 그의 여자로써 흠이 없었다. 내가 태클을 걸만한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가 치밀었다. 질투가 났다. 치졸하고, 옹졸한 질투심이.
"과외 학생입니다!!"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엄청난 바보야, 나는! 다른 말도 있었을텐데 하필이면! 주먹을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질투심과 부끄러움을 이기진 못했다.
"하하, 소개하는게 늦었지. 이쪽은 하나마키."
말도 안돼. 말도 안... 어떻게? 멍청한 나는 그 때 자신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도, '하나마키 타카히로'라는 명찰이 붙어있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입만 벌린채 서있었다.
"사실은 말이지~ 오늘 이 녀석 컨디션이 영 안 좋아서 바람 쐴겸 데리고 나왔는데, 어울려도 될까?"
"데이트 아니었어?!"
"화 내지마~ 응? 귀여운 얼굴 다 망가지잖아~"
자연스럽게 여자의 어깨의 팔을 두르는 저 사람. 이 개같은 상황을 모면시켜준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내 눈은 그 사람의 팔언저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뒤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뒤쫓아간지 10여분. 작은 카페에 들어선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니,
"잠깐 화장실-"
고맙게도 여자는 화장실에 가버렸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얼굴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반면, 이쪽에는 전혀 흥미 없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그 사람은 내가 듣고 싶었던, 나를 향한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하자는 거냐?"
"그러니까... 저기.. 과외를 해주셨으면 해서.."
"그게 처음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하는 소리야?"
"죄송..합니다."
"거절한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고, 첫 눈에 반했다는 말따위 통할리도 없었고, 내가 좋아한다 말했을때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날 기피할 저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날 괴롭히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았던 주제에!! 좋아하는 사람이... 날 혐오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누구때문에 데이트 방해는 물론이고 기분까지 더러워진 마당에 과외?"
고개를 절로 숙여졌다. 나는 흙과 먼지가 묻은 운동화. 저 사람은 윤택이 흐르는 가죽 구두. 그래, 당신과 나의 차이는 딱 이만큼이겠지. 뜨거운 뭔가가 목울대 끝까지 차올랐을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돈이 필요해진 참인데 잘됐네. 얼마에 할래."
그의 나른한 웃음 소리는
지독하게
나를
옭아맸다.
#
머그잔이 미적지근하게 식어갈 무렵, 딸기 케이크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마츠카와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인다. 동시에, 더이상 케이크가 없다는 사실에 입맛을 다시는 하나마키에게 무심한듯 말을 던진다.
"설마 흑심을 품고 나한테 말을 걸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부끄러우니까 그만해요...."
가을의 냄새. 하나마키는 그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 가을에 들어서면서 폴라티를 즐겨입었다. 몸에 딱 맞도록 만들어진 옷감은 그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목끝까지 뒤덮어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홍빛 머리칼에서부터 붉게 달아오른 귓볼, 오물거리는 입술, 가려진 목젖, 그리고 살짝살짝 드러난 몸선까지. ...위험하다ㅡ,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적색 경보에 마츠카와는 애써 침착하며 말을 돌려본다.
"아? 그럼 고백은 어떻게 한거야?"
"잇세이!!!!"
"선생님 호칭은 어디다 갖다 버렸어?"
"과외 그만두셨잖아요!"
"과외인가-"
그래, 과외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내가 이 녀석의 과외를 해준게 맞을까? 과외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어떤 스위치를 눌러버린 건 아닐까? 자동적으로 머리를 짚게 된다.
"내가 어쩌다 이런 어린애랑-"
"어린애 아니에요!!"
부끄럽다면서 귀를 붉힐 때가 바로 방금전인데, 어리다는 말에 발작하듯 반응하는 그 모습이 더 어린애처럼 느껴진다는 걸, 하나마키는 알고 있을까? 마츠카와는 투정부리는 아이 달래듯이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다.
"얼씨구, 오냐오냐해줬더니 큰 소리도 치고...우리 히로 많이 컸다?"
"7살차이가 뭐 별거인가요."
금방 그의 손을 쳐낸 하나마키였지만 말이다. 7살. 작지 않은 나이차이. 그리고 성별. 이 두 가지는 그 때의 계절이나 지금이나 두 사람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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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6월의 어느 날. 풋풋하던 새싹들은 어느덧 짙푸른 녹색으로 빛을 발하던 때. 나날이 뜨거워지는 땡볕에 나는 한창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덤으로 하나마키의 어머니가 주신 수박화채 한조각을 입에 문채. 과외는 순조로웠다. 하나마키는 예상외로 모범생이었고, 조금만 알려줘도 금새 잘 따라오는 아이였다. 숙제도 내주는대로 다 해오고, 과외를 시작한 이후로 시험 성적도 상승세라 나쁘지 않았다. 어려운 건 없었다. 전혀.
"좋아합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좋아해요."
첫 한 마디는 농담인줄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말 못할게 뭐 있나ㅡ. 라고 생각-
"좋아해. 좋아해 정말정말 좋아해!!!"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그런 감정이 아니었나보다. 눈물이 한가득 고인 눈으로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폭풍처럼 내뱉었던 너의 고백은 나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했다.
"하나마키..?"
"말하고 싶지 않았어. 7살이나 어린데다가 심지어 남자인 내가 고백해봤자, 가망이 없을거라고. 포기하라고. 포기하는게 편할거라고, 계속, 계속!!"
7살이나 어린. 그래, 이 녀석은 어리다. 어리기에 아직 헷갈려 하는 것이리라. 자신이 좋아해야해는 사람은 나같은남자가 아니라 또래의 여자아이라는 것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 대상이 내가 된다면이라는 생각을 몇번 해본 적 있다. 불쾌할거라고, 꼴도 보기 싫을거라고, 가볍게 결론지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싫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미묘한. 단지, 저 녀석의 눈물 고인 눈이 신경쓰였을뿐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 이렇게... 이렇게 당신앞에만 있으면 가슴이 쿵쿵 거리고 스스로 주체를 못하겠는데... 어떻게 참고 견디란 거야..."
가슴 한가운데를 움켜쥐며 말하는 너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할까. 어떤 말을 해야, 네가 상처 받지 않을까. 그렇다. 난 이미 이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하나하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네가 조금더 빨리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ㅡ, 면 그건 거짓말이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 같았다. 그 백지 위로 그려지는 건 발그레한 볼을 띄고 있는 하나마키의 얼굴. 아니야. 그래선 안돼. 나는 여자친구가 있고, 이 녀석은 어리고, 남자애고, 그러니까-
"...미안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도망쳤다. 비겁하다해도 상관 없었다. 머릿속을 가즉 채운 17살의 꼬맹이를 더이상 보고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방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는 홀로 남겨진 그 녀석의 심정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혼자 남아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는 소리 따위, 들을 수 있을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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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말이에요."
"응? 언제-"
다 식어버린 머그잔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던 하나마키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느새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은 마츠카와는 그의 턱을 들어 예쁜 볼 언저리에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아 그만해요. 사람들 다 쳐다본다구요."
"부끄러워? 소심해졌어?"
"당신이 대담해진거에요!!"
열이 오를때마다 목소리가 커지는 건 여전하다. 뭐, 그게 귀여운 거지만. 촉- 가볍게 입술이 닿는 곳마다 꽃이 피어오르듯 붉어지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사랑스워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은 마츠카와. 사귄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럴때면 잔뜩 긴장해 무릎을 꼬옥 움켜쥐고 있는 하나마키. 그 둘은 누가 보아도 애정이 흘러넘치는 연인이었다. 긴장하고 있는 그의 손위로 마츠카와가 손을 겹쳐온다. 자신의 것과 엇비슷한 손크기에 흐뭇하다가도, 여자보다 부드러운 살결에 흠칫 놀라던 마츠카와는 이내 그 어여쁜 손에 깍지를 끼운다. 놀라지 않게, 천천히. 맞잡은 손은 불에 데이듯 뜨겁고 뜨거워 긴장감이 옮을 것만 같았다.
"하여튼 한 마디도 지려고 안한다니까. 그래서, 언제 말하는 거야?"
"그 때.... 제가.. 처음 고백한 날.... 제 고백 듣자마자 나가버렸잖아요."
아아, 그 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그는 아직도 그 때처럼 울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하나마키를 지그시 보기만 했다.
"...그때 어디 가셨어요..?"
"....비밀."
"치사해!"
들으면 너 분명 울테니까. 널 혼자 버려두고 그대로 여자친구를 찾아가 미친듯이 몸을 섞었다는 걸 알게된다면, 너 분명 울테니까. 볼에 바람을 빵빵히 채워 흥 소리가 나도록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나마키를 달래기 위해 깍지 낀 손에 힘을 준다. 이럴 땐 달콤한 말이 특효라는 걸, 마츠카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왔잖아."
"....무슨 심경의 변화였어요?"
"심경의 변화라... 그냥, 조금 늦게 깨달은 것 뿐이야."
동그래진 눈. 살짝 벌어진 입술사이로 풍기는 캬라멜 향. 그래, 그런 네가 좋아.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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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그 날로부터 일주일 째. 알고 있었다. 가망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 다 되도록 연락 한통 없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돼. 또 울어버릴 것 같아. 어제도, 그제도, 계속... 울었는데. 차라리 말하지 말걸. 아무리 참기 힘들어도 그냥 마음속에만 담고 있을걸. 바지 자락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또 한바탕 쏟아지려고 준비중이었다. 방문이 열리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선생님..?"
지금 눈 잔뜩 부어있을텐데.! 울다 지쳐서 잠든게 하루이틀이 아니라 피부도 푸석할테고! 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분명 고백... 거절하셨을텐데. 다시는 못 볼줄 알았는데. 아니야, 착각하지 말자. 분명 돈이 필요해서 돌아오신 걸거야. 고백은 고백일뿐, 공적인 관계는 과외 선생님과 학생이니까. 헷갈리지 말자. 정리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이 마주친 5초의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자신과의 매듭을 지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대답해야한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억지로 웃어보이면서.
머릿속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리를 하고나니 한결 개운했다. 우리 둘만의 공간에서 들리는 것은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와 연필이 종이에 닿아 사각이는 소리밖에 없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마음이 편했다. 차라리 아무말도 안하고 공부만 봐주는게 편했다. 그래, 이게 올바른 관계인 거다. 내 고백따위 없었던 일로 하면 그만인 거다. 처음봤을 때처럼, 이쪽에는 흥미도 없다는 것처럼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연필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실렸다. 냉정해져야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못이 되어 가슴 한가운데를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오늘만, 오늘만 견디자. 오늘만 지나면, 분명 괜찮아질거야.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 빌어먹을 감정은 점점 더 무뎌질테니. 그렇게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고 있을때, 폭탄 선언과도 같은 말이 들렸다.
"헤어졌어."
또 다. 처음 만났을때와 같다. 이 공간에 우리 둘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시간이 멈춰버리고 우리 둘만을 감싸는 것처럼.
"헤어졌다고요?"
"그래. 두번 대답하게 하지마."
그 사람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면의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나때문에 그런걸까? 내 고백 때문에? 기대.. 해도 되는걸까?
'...미안하다.'
아니. 그건 분명 거절의 의미였다. 이제와서 기대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뭐지? 동성의 위로가 필요한건가? 온갖 생각들이 물밀듯 덮쳐왔다. 실날같은 기대심에 들뜨다가도, 그걸 부정하듯 떠오르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겹쳐왔다.
"하지만, 그..!"
"아아, 시끄러워. 이제 됐어. 이미 끝난일이니까."
"괜찮지 않아요!!"
그래. 중요한건 괜찮지 않다는 것이다. 그걸 말하는 당신도, 그리고 나도. 분명 괜찮지 않다. 어쩌면 여자쪽에서 헤어지자 했을 수도 있다. 바로 나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미치도록 올라오는 죄책감과 죄악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이 사람이 헤어지자 했을리 없어. 여자쪽에서 헤어지자 한걸거야.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내가...동성애자라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헤어지자 소리를 들은거야. 그게 얼마전 그에게 고백하고 부정당한 내 모습과 겹쳐보이자, 빌어먹게도, 공감이 되기 시작했다.
"호들갑 떨기는."
"그치만.. 그치만..! 좋아하잖아요!!"
그 여자를 좋아하잖아. 왜 헤어진거야. 정말 나 때문이야? 내가 쓸데 없는 소릴 지껄여서?
"좋아하는데... 그렇게 좋아하는데... 헤어진다는게 말이 되냐구요..."
"어이."
부럽다. 저렇게까지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애원해도, 받을 수 없는데.
"...미안해요.. 선생님 사랑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그 사람이... 부러워서 그래요.."
"하나마키."
"아니에요! 이제 더이상 말 안할게요. 저도 정리했는걸요? 정말 괜찮아요!"
아니에요. 사실은 괜찮지 않아요. 그 여자를 바라보는 마음의 절반, 아니 손톱만큼이어도 좋으니까, 날 돌아봐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제대로 있다는 걸-
"대답해, 하나마키."
오늘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잔뜩 충혈되고 부어있을 내 눈과 가늘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눈이 마주쳤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
"넌 아직 어려."
그래. 나의 또다른 컴플렉스. 나는 이 사람보다 7살이나 어렸다.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만약에 우리가 연인이 될지라도, 나이의 벽은 무시할 게 못 됐다. 알고 있어. 제대로.. 알고 있다고. 그래도-
"어리지 않아요! 알거 다 아는데-"
"살아가다보면"
그 사람은 나도 모르게 높아지는 언성을 잘 끊을 줄 알았다.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서 말하는 그로 인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좋아해도 헤어져야할 때가 있어."
"왜....?"
"으음, 예를 들면-"
손으로 턱을 문지를 모습이 멋있다. 저기에 수염을 기르면 어떨까? 분명 잘 어울리겠지? 사귀게 된다면, 그런 모습을 매일같이 볼 수 있을텐데. 차라리 여자였다면 가능성이 있었을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아... 그렇구나. 망치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감각이란 이런거겠지. 기대했던 내가 바보같아. 무슨 기대를 한거람. 눈물샘은 하루도 마를 새가 없구나.
"그 사람이 귀엽고 귀엽고 귀여워서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젠장. 불난데 기름 붓냐고. 결국 새어나오는 눈물 한줄기에 다급하게 손으로 문질러 보지만, 날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이 사람이 그걸 놓쳤을리 없다. 내 마음 다 알고 있는 주제에. 내 고백 제대로 들었으면서. 가슴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에 속이 메슥거리시 시작했다. 토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모든 걸 놓고 싶다. 더이상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상대가 남자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따라주질 않을 때."
귀가 잘못 됐다. 어딘가 잘못된게 틀림 없다. 그럴리 없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그의 입밖에서 튀어나올리 없었다. 헛소리가 들린거다.
"너 때문에 헤어졌다ㅡ. 라면 어쩔래?"
귀도 고장나고,
눈물샘도 고장나고,
내 마음도 고장난게
틀림 없다.
#
"히로 얼굴 새빨개."
"놀리지 마세요!"
잘 익은 사과 같아ㅡ,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길은 진득하다. 깍지 낀 손을 놓기는 커녕 그대로 자신의 입가에 가져가 촉- 소리가 나도록 손등에 입을 맞춘다. 손등 뽀뽀임에도 불구하고 마츠카와의 그것은 어째서 이리 야한건지.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던 하나마키는 문득 자신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치사해, 나는 엄청 떨렸는데.
"잇세이는 그 때 안 떨렸어요?!"
"무진장 떨렸지."
손등에 흩뿌려진 입술자욱은 핏줄이 그대로 비치는 손목까지 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쪽 소리가 적나라하게 나도록 입을 맞춘 마츠카와는 그의 손을 저의 가슴께로 가져간다. 규칙적이라기엔 너무나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박동에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오른다.
"지금도 떨려."
그리고 서로 말을 맞춘 마냥
"사랑해, 히로."
"사랑해요, 잇세이."
두 사람만의 가을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