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입김이 탁한 회백색을 띠었다.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이 지나치게 흐렸다. 거 좀 있으면 장난 아니게 쏟아지겠구먼.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노인의 혼잣말을 곁눈질로 들은 남자는 다시금 구름 낀 하늘을 봤다. 사무치도록 시린 날씨였다.
언제 눈이 쏟아질지 모르는 삿포로의 하늘을 우두커니 선 채 들여다 본지 몇 분. 어느새 정류장 근처엔 서넛의 사람 그림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이라는 안내와 함께 한 대의 버스가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갔다. 남자가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영하권을 훨씬 웃도는 이 추운 날씨 속에서 남자가 오래도록 기다린 버스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정차한 버스가 뒷문을 좌우로 열었다. 털모자와 패딩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꽤 두툼한 지갑이 카드 단말기를 향했다.
[카드를 한 장만 찍어주세요.]
마음이 급할 땐 되는 일이 없는 법이었다.
언제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쿠니미의 눈썹 사이가 팍 좁아졌다. 그는 앞쪽의 운전석을 향해 조금 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를 복창했다. 친절한 운전수는 천천히 하라는 듯 흰 장갑을 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쿠니미가 버스 안 쪽으로 완전히 올라타자 활짝 열려 있던 뒷문이 천천히 닫혔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유일무이한 교통카드를 찾아 지갑 속을 헤맸다.
[반갑습니다.]
정상 승차를 알리는 녹색 불이 깜박거렸다. 다행히 이번엔 성공한 모양이었다. 쿠니미는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난데없는 소동에 진땀을 뺐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버스 내부를 둘러본 그는 이내 서서 가는 것을 택했다. 유일하게 빈자리로 남아있는 맨 뒷좌석까지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그만큼 발걸음을 옮기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까지 몇 정 거장 되지 않다는 것 또한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저기요……!”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버스 손잡이에 몸을 맡긴 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여린 음성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담한 체구의 여학생이 뺨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여학생은 쿠니미 쪽으로 다가가면서도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쿠니미는 귀찮은 상황에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곤두섰다. 못 들은 척을 할까, 모른 척을 할까. 다음 스테이지의 선택지를 고르듯 사고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불행히도, 여학생의 이어진 대답은 쿠니미의 실낱같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거……. 지갑에서 떨어진 것 같아서요.”
그녀의 양 손바닥 안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아.”
인상 쓰듯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당혹감으로 변질됐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면부지의 사람 손안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 쿠니미의 안색은 누가 봐도 확연히 뒤바뀌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진심과 성의가 짙게 담긴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올라가 있기까지 했다. 그가 놓친 무언가를 건네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손끝이 스치고 무뚝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그러자 여학생은 전신이 불에 들끓듯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벌게진 뺨과 귓불을 식히기 위해 그녀는 그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뒷자리, 같은 교복을 입는 일행들의 재잘거림이 그녀의 등을 응원했다.
아쉽게도 쿠니미는 형식적인 인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건네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탄 순간부터 뭇 여학우들의 주목을 받던 그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렇게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엔 손바닥보다 한참 작은, 3X4 사이즈의 증명사진이 있었다.
* * *
‘12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사이 전국적으로 첫눈이 내릴 전망입니다.’
그 날 아침 기상 속보를 기억했다. 기상캐스터의 자주 빛 정장이나 머리스타일이 영화 필름처럼 선명했다. 아침으로 먹었던 쌀밥의 뒷맛이나 된장국에 들어간 두부의 형태는 기억 못 하면서 그녀의 가식적인 감탄사나 사소한 표정 변화는 선명히 기억했다. 티브이 화면 너머 ‘첫눈’의 수식어구는 낱낱이 기억했다.
왜 그랬을까.
남에겐 특별한 것이 나에겐 특별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남에겐 평범한 것이 나에겐 유별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과 ‘눈’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의미일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전혀 특별한 의미로 와 닿지 못했을 뿐이다. 돌고 도는 어느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 나는 오래도록 ‘첫눈’이란 낯 간지러운 단어를 미적지근한 온도로 흘려 넘겼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추억이란, 전혀 상관없는 것을 끌어다 멋대로 방아쇠를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나의 의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혹하게도.
* * *
“거기서 턱을 조-금만 낮춰 볼까요? 네에, 그런 식으로. 좋아요, 눈에 힘주시고…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짤막한 신호음과 함께 인공조명이 두어 차례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개의 라이트 박스가 이루는 대각선의 교점엔 익숙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은 어색한. 약간은 뻣뻣한. 약간은 긴장된. 부자연스러운 미소 한 줌이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네, 끝났습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레 왁스로 고정시킨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울상이 된 눈알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푸핫, 야 방금 오이카와 얼굴 봤냐? 이케멘, 이케멘 노래를 부르더만~ 이케멘 다 죽었네.”
수고하셨습니다, 란 인사가 나오기도 전 하나마키가 폭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핀잔을 가만히 듣고 넘길 리 없을 오이카와가 꽥 소리를 질렀다.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던 눈썹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머리털에 힘 줄 때부터 알아봤다. 졸업사진은 남은 평생 갈 텐데- 안타깝게 됐다.”
말과는 달리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어조였다. 무심하게 태클을 걸어준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의 이마 정 가운데엔 깊은 빡침을 뜻하는 힘줄이 우수수 돋아났다. 이제 막 촬영을 끝마치고 장비를 접고 있던 사진사에게 오이카와가 무어라 외쳤다. 사진사는 곤란하다는 듯 볼만 긁적였다. 오이카와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졸업사진은 원래 평소대로 찍는 거다, 응꼬 야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이와이즈미까지 가세하자 마침내 오이카와가 발끈하듯 폭발했다.
“하아? 맛키, 맛층, 이와쨩이야말로 아까 엄-청나게 이상했거든? 다들 초초초 썩은 표정으로 찍혔을 게 분명하거든?! 에붸붸붸, 다!”
오이카와는 쫙 펼친 양 손바닥을 관자놀이 옆으로 가져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몰골에 자칫 침체될 법했던 촬영장 공기가 부드럽게 녹아 들었다.
시청각 실을 통째로 빌려 마련한 임시 촬영장엔 아오바죠사이 배구 부 이외의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3학년들의 졸업사진 촬영 시즌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고, 해마다 인터하이, 봄고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배구 부는 매해 타 학생들과는 별도로 졸업 사진을 촬영해 왔기 때문이다. 늘 상 잔주름을 달고 살던 교복 바지가 매끈하게 다려져 있고,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넥타이가 셔츠의 빳빳한 카라를 정갈히 감싸 안았으며 챙겨 입기 귀찮다는 핑계로 빼입기 일쑤였던 조끼를 갖춰 입었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 교복 재킷까지 더해진 채로 말이다.
“주절주절 시끄럽네. 눈 코 입 멀쩡하게 나오면 땡이지.”
“졸업 사진은 평생 남는단 말이야! 이 오이카와 씨의 잘생김이 반의 반의 반도 못 담겼을 게 분명한데 어떻게 안 슬퍼할 수 있어?!”
“네 놈이 유별난 거다.”
망설임 없는 반박 조에 오이카와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보였으나, 이내 알만 하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하긴~ 이케멘의 고뇌를 이와쨩이 이해할 리 없지.”
구름 낀 하늘을 사라지자 오후의 햇볕이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 바깥의 찬 공기와 따뜻한 실내를 경계 짓는 창틀에 뿌연 김이 서렸다. 창밖으로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가 비쳤다. 오전 중 잠깐 내렸던 첫눈은 그것 위로 소복이 쌓여 있었다. 겨울답지 않은 햇살과 조금은 가라앉은 공기, 교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찰과 음, 퍼석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 아래로 흩어 떨어지는 눈 덩이.
홧홧 거리는 등 언저리에 닿지 않는 팔을 열심히 뻗어 보며 울부짖는 오이카와, 실컷 때려놓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씩씩 열을 내는 이와이즈미, 잔뜩 성이 난 그의 어깨를 붙들곤 열심히 뜯어말리는 킨다이치, 한 발자국 떨어진 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즐거운 얼굴로 두 손 두 발 놓고 있는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평소와 다를 법 없는 풍경이 적절한 계절감을 만났다. 꼭, 잘 빚어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틀 가장자리에 등을 기댄 쿠니미는 여느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으로 뒤바뀌어가는 풍경을 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반쯤 감겨 있는 눈꺼풀이 사뭇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살은 그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보듬어 보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서였을까. 그림자가 드리워진 낯빛은 조금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 안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졸업인가.”
오래도록 교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마츠카와가 무릎을 폈다. 뻐근해진 허리께를 익숙하게 주무르곤 기지개를 켜듯 말했다. 후련하다는 어조로 말이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일순 찬물 끼얹듯 얼어붙어 버렸다. 암암리에 금기시되던 단어와 문장이 위태위태하던 맥을 단숨에 끊어버린 것처럼. 다 같이 입을 맞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죽음을 닮은 침묵이 도래한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킨다이치였다. 시큰대는 눈시울과 훌쩍이는 콧방울은 진즉에 불거져 있었다. 울음을 참듯 애꿎은 천장만 올려보던 와타리는 이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교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닫혔다.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숨을 죽인 울음소리가 간간이 배어 들었다.
“뭐야, 왜 니들이 울고 그러냐.”
제일 먼저 수습에 나선 이와이즈미는 벌써부터 눈물바다인 킨다이치와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긁기 바쁜 야하바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졸업하는 건 우린데 왜 너네가 슬퍼하냐, 너무 염려하지 마라, 너희라면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우리 없다고 연습 게을리했다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위로인지 농담인지 구별 못할 말들이 거리낌 없이 오고 갔다.
그러나, 그간 꾹꾹 눌러 삼키고 있던 슬픔과 설움은 이와이즈미의 말 몇 마디를 기폭제 삼듯 터진 둑처럼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한 몇몇 후배들을 시작으로 곧 교실 전체가 울음바다로 뒤바뀌어 갔다. 보는 사람마저 서러워지도록 엉엉 우는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이와이즈미를 도우려 마침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까지 팔을 걷어 부쳤다.
쿠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미된 신파극에서 눈을 돌렸다. 창문 유리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찬 기운이 피부 결을 타고 들어와 뼈를 긁었다. 호, 하고 입김을 부었다. 입김이 닿은 주변만 얼어붙은 수증기가 뿌옇게 발했다. 무언가를 쓰려했는지 그의 검지가 유리창 쪽으로 바짝 가까워졌다. 손가락이 유리창에 닿기 직전, 그는 손을 내렸다.
졸업(卒業). 첫눈(初雪). ……좋아해(好き).
결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적어보지 못했다. 평범한 나날 중 하나에 불과할 오늘에 특별한 의미를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쿠니미는 그랬다.
“오이카와 넌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빨리 와서 한 마디 좀 해줘라.”
오이카와. 머릿속으로만 맴맴 돌던 단어가 귓전을 때리자 쿠니미는 흠칫 놀란 가슴팍을 남몰래 움켜잡았다. 뿌연 공백만 남은 창가에서 영화 속 풍경으로, 그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가 남겨둔 입김이 옅어져 갔다.
“잠깐, 잠깐만! 선생님이 사진 바로 뽑아서 주실 수 있대. 이것만 확인… 하고…….”
제 얼굴이 떡하니 찍힌 모니터를 발견한 오이카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잠시 후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인화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떡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한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눈물 콧물 줄줄 흘리던 1, 2학년들이나 그들 달래주기 바쁘던 3학년들마저도 오이카와의 사라진 뒷말이 궁금해졌는지 속속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으하하하, 이게 뭐냐?!”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하나마키였다. 배꼽까지 잡아가며 통쾌하게 웃어대던 하나마키는 인화된 사진 한 장을 집으며 말했다.
“내 사진이 백 배 천 배 잘 나왔겠는데? 야, 나 기념으로 하나만 줘라. 우울할 때마다 꺼내 봐야지.”
오이카와의 반응은 살피지도 않은 채 이와이즈미가 다음 사진 한 장을 잽싸게 낚아챘다.
“눈 코 입 제대로 붙어있네. 딱 니 얼굴이구만 뭘. 이건 내 꺼.”
마츠카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농담으로 해본 소리였는데, 니가 진짜 니 무덤을 팠구나. 나도 들고 간다?”
오이카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건 참다못한 오이카와가 약 3초 후 괴성을 지를 거란 일종의 신호였다. 쿠니미는 익숙하게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아악! 니들 전부 절교야!!”
공들인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폭발해 버리는 오이카와의 뒤통수만 쿠니미는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오이카와의 모든 순간을 눈 안에 가득 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단단히 심통이 나 뾰로통하니 부푼 뺨이 귀여웠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며 축 쳐져 있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후 사진 속 제 얼굴을 재차 확인하곤 푹 실망해 버리는 옆얼굴이 퍽 예뻤다.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낮게 깔린 속눈썹, 흐트러진 뒷머리, 영 답답했는지 마음대로 풀어헤친 넥타이, 조금 큰 손, 곱고 긴 손가락,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 끄트머리.
“쿠니미쨩이 보기에도 이상해?”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던 걸까. 돌연 오이카와의 화살이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줄곧 제 쪽은 보지도 않던 눈이 예고도 없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쿠니미의 얼굴엔 당혹감이 짙게 흘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그는는 허겁지겁 눈알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왼쪽 가슴 언저리가 쉴 새 없이 펄떡거렸다. 꼭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 같았다.
“자, 봐봐.”
그런 쿠니미의 반응이 생소했는지 혹은 그의 얼굴을 읽어낼 수 없는 까닭이었는지,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여덟 걸음쯤 떨어져 있던 거리가 이젠 반걸음조차 안 됐다. 머리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이성이 감전당한 듯싶었다.
숨은 어떻게 쉬더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떤 거였지. 예전엔 어떻게 이 사람을 상대했지.
뜨끈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역류해 올랐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피하고자 하는 마음,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자 은연중에 쿠니미는 자신의 팔로 상반신을 감싸 안았다. 꼭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역시… 이상한가?”
쿠니미의 반응을 ‘거절’로 읽어내서였을까. 한 풀 꺾인 어조가 자신감을 툭 잃었다. 큰 손바닥이 뒷목을 감쌌다. 곤란하다는 듯 지어 올린 웃음이 쿠니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급해진 건 쿠니미였다.
“아, 그……. 저기!”
순간적으로 오이카와의 팔목을 낚아챌 뻔한 쿠니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그의 소매 부근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려다 이르게 포기를 선언하곤 부러 그것을 피해 돌아가려는 사람처럼.
쿠니미가 붙잡은 덕분에 오이카와는 반쯤 돌아선 상반신을 다시 돌려세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궁금함을 한껏 머금었다. 반면 자신이 잡아 놓고도 놀란 쿠니미는 소리 없이 입만 뻥긋거렸다. 그를 돌려 세운 것까진 좋았지만, 무어라 말머리를 꺼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100미터 달리기를 방금 끝마친 사람처럼 호흡은 가빠지고 맥박은 용수철 마냥 튀어 오르고 산소 결핍의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했다.
언제나 그렇듯, 쿠니미는 그의 앞에만 서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까지 이상하진 않은 것 같, 아요.”
간신히 대화 주제를 떠올려낸 쿠니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쿠니미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무언의 정적이 오히려 민망했다. 덕분에 귓불이 점점 뜨거워졌다. 길게 길러 넘겨 버린 앞머리가 이때만큼은 귀를 잘 가려주길, 쿠니미는 간절히 바랐다.
짐짓 휘둥그레져 있던 눈이 조금씩 제자리를 되찾았다. 뒤이어 눈꼬리가 활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어설픈 미소가 미미하게 남아 있던 입술이 시원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
그는 활짝 웃었다. 연갈색을 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살이 포물선 형태로 접혔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턱과 한 톤 높은 음조와 말간 웃음이 오롯하게 쿠니미를 향한 순간이었다.
“자. 쿠니미쨩도 줄게.”
오이카와는 자신의 소매를 붙들고 있던 쿠니미의 한 손을 잡아끌었다.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만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쿠니미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 뒀다. 난생처음 비를 맞은 꽃 마냥 놀람과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던 쿠니미는 한 발짝 늦게 그것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손바닥 안엔 웬 증명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그것은 여태 오이카와가 기대하고 실망하고 속상해하길 반복하게 만든 원인이 분명했다.
“기념 선물.”
눈앞의 오이카와를 상대하기 바빠 미처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그것을, 쿠니미는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역시 어색했다. 그가 짓는 최고의 웃음을 본 직후여서 그랬을까.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의 미소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쿠니미쨩만 챙겨 주는 거야.”
‘고마워’란 말과 함께 최고의 웃음을 선물 받았다. 특별, 이란 말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제와 말을 번복할 순 없었다. 쿠니미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소중하단 걸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멍청아. 척 들어도 네 기분 생각해서 한 소리인 걸 왜 모르냐.”
어느새 오이카와 곁으로 다가온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프다며 우는 소릴 낸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보던 쿠니미는 씁쓸한 웃음만을 남겼다.
정말… 제가 가져도 되나요?
재차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 목울대 아래로 가라앉았다. 감사 인사조차 건넬 틈이 없었다. 어정쩡하게 벌어져 있던 입은 저절로 닫혔다. 손등엔 누군가의 감촉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피부 곳곳에 열꽃이 피어날 것 같았다.
손안에 쥐어진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이상했다.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감지 않으려고 힘을 꽉 준 눈매가 어설펐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환한 웃음과 이것.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아닌 것. 웃으면 웃는 대로 세상 모든 종류의 꽃이 만개했다 져버리는 듯한 착각이 이는 것과 결코 그렇지 않은 것.
쿠니미는 옅게 웃었다.
한쪽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위치 따윈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쿠니미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이 마음에 들고 말았다. 언젠가는 잊힐 단편적인 웃음보다, 영겁에 가깝도록 유지될 어설픈 미소가 좋았다. 비록 렌즈를 향한 형식적인 웃음일 지라도, 그것은 언제까지고 오로지 쿠니미 한 사람만을 가리켜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 * *
몇 년 전 그때처럼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꽤 오랜만이었다. 요 몇 년 간 취업 준비, 졸업 준비에 정신이 없다 보니 사진 한 장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고, 다섯 번의 내정 끝에 취업처도 간신히 정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이카와 생각이 전혀 안 났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겠지만.
쿠니미에게 있어 그것은 부적과 다름없었다. 증명사진만이 아니었다. 그것에 담긴 계절의 한 때, 숨 죽여 참는 울음소리, 함께 있을 수 있던 마지막 교실 풍경, 심장 언저리를 간질거리게 하는 추억. 그 모든 것이, 사진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꽤 닳았네.”
이 부적을 쿠니미는 지갑 깊숙이, 가슴 깊숙이 봉인한 채 이따금씩 꺼내 보곤 했다. 그때의 기억과 풍경을 조심스레 떠올리곤 예나 지금이나 불규칙하게 쿵쾅 이는 가슴 언저리를 꾹 짓누르곤 했다. 그렇게 어딘가 어색한 이목구비를 한참을 어루만지다 지갑 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증명사진의 가장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고 얇게 앉은 코팅이 벗겨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쿠니미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증면사진을 만져보았다. 뭉근한 손놀림으로 오이카와의 굳은 입꼬리를 매만졌다. 언제 보아도 그때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인 오이카와에게
“잘 지내요?”
의미 없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차임벨을 눌렀다. 목적지에 다다른 버스는 곧 바퀴를 멈췄다. 보도블록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았다. 차가워, 감탄사도 내뱉을 겨를도 없이 저절로 뒷목이 꺾였다.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