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거신 전화는 전원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전파가 닿지 않는 장소에…….]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휴대폰 플립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전화하랴, 숨 가쁘게 달리랴, 사람 찾으랴.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목을 칭칭 둘러싸고 있던 목도리가 땀에 차 습했다. 아예 무릎 위로 양 손을 얹고 거칠어진 입김을 몰아쉬던 이와이즈미는 애꿎은 것에 분풀이 하듯 목도리를 잡아 뺐다. 삼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는 것도 잠시. 아직 발걸음하지 않은 세 번째 갈래 길 너머로 이와이즈미는 다시금 뜀박질을 시작했다. 


겨울이란 계절의 이름도 끝을 맺어간다지만. 2월의 밤은 여전히 쌀쌀하다 못해 뼛속에 한기가 들어설 정도였다. 이 날씨에 길바닥 어딘가를 나뒹굴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오이카와!!”


말썽의 발단은 언제나 오이카와였다. ‘친구’가 낯설어지고 ‘우정’이 부끄러운. ‘연인’이 익숙하고 ‘사랑’이 당연한. 사랑해, 가 아침 인사처럼 튀어나오고 좋아해, 가 약간은 낯 간지러운 그들은. 자타가 공인한 오랜 커플이었다. 이렇듯 쉴 틈 없이 깨를 볶고 사랑을 속삭여야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추운 겨울날 온갖 분노를 폭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싸웠다. 요 근래 싸우지 않은 날의 횟수를 꼽으라면 양 손으로 헤아려 볼 수 있을 만큼, 두 사람 사이에 부는 칼바람은 도통 잦아 들지 않았다. 이유라고 특별나지 않았다. 침대의 창가자리를 두고, 샤워를 오래 한다고, 하루 종일 삐졌단 티를 낸다고, 말 한 마디 져주려고 하질 않는다고, 예전이랑 다를 거 하나 없다고, 툭하면 예전 일을 들먹인다고. 


싸운 것까진 좋았다. 딱 거기까지 였다면, 어느 한 쪽이 숙이고 들어가 화해를 이룩하면 그만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그것은 오롯하게 이와이즈미의 몫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만하자.’

‘뭘 그만해. 할 말이라면 아직 태산처럼 남았어.’

‘나! 이와쨩이랑 싸우려고 연애하고 싸우려고 같이 살고 싸우려고 살 섞는 거 아니야. 연애는 나 혼자 하니? 나만 연애해? 나 왜 만나? 요즘 이런 생각들만 해. 이게 행복한 걸까. 진짜 연애가 맞을까.’

‘……후, 또 그 소리야? 이제는 좀. 알아줄 때도 됐잖아. 오래 사귀었잖아. 이런 것도 이해 못해주면 연애는 어떻게 하고 사랑은 또 어떻게-’

‘이와쨩도 알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한 순간부터 연애는 한 풀 꺾인 거라고.’

‘그 이상……. 입 열지 마.’

‘싫은데. 내가 왜?’

‘하지 말라 하면 좀, 하지 마.’

‘헤어져.’


격에 다다랐던 싸움을 한 순간 허무하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다. 처음엔 효과가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미안하단 사과를 읊조렸고 상처 받았을 오이카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것을 손쉽게 얻어낸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나마 승리자가 된 것 같았다. 더 큰 사랑이란 기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 ‘처음’이 어려웠을 뿐. 두 번째, 세 번째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이와이즈미의 언성이 조금만 높아지면 오이카와는 ‘헤어져’를 무기 삼아 꺼내들었다. 그것을 비장의 카드 삼아 기세등등해진 오이카와를 대하는 이와이즈미는 오죽했을까. 처음엔 미안했고 두 번째는 껄끄러웠고 세 번째엔 한숨이 나왔다. 작작 좀 해라. 셀 수 없는 횟수만큼 이별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돌아왔을 무렵 마침내 이와이즈미는 짜증을 섞었다. 크게 상심한 오이카와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고 이와이즈미는 그마저 좋게 보질 못했다. 


결국 도피처로 삼은 것이 하나는 가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홧김에 쏟아 붓는 술이었다. 머리가 알딸딸해질 만큼 빈속에 알코올을 들이키고 나면 쌀쌀한 거리를 홀로 배회했다. 개중 눈에 띄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다, 홀린 듯 동전을 넣고 손에 익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가진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대꾸 없는 발신자에게 차츰 윽박을 지르곤 했다. 오이카와냐, 어디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야, 너 자꾸 이럴래, 어디까지 날 속상하게 만들 건데 등. 처음부터 끝까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그리고 잔소리. 잔소리로 귓전이 따가울 때 즈음 오이카와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곤 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된 ‘미안해’는 가슴 먹먹한 ‘잘못 했어’로 이어져 마지막엔 울음으로 제 서러움을 호소했다. 


전부 거짓말이고 농담이었단 말이야, 섭섭해서 홧김에 아무렇게 내뱉고 만 거라고, 헤어지지 말자, 그러지 말자,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 말 그대로 믿은 거 아니지, 나랑 진짜 끝내려 한 거 아니지, 내 생각 전혀 안 난 거 아니지, 내가 안 보고 싶어진 거 아니지. 나는 보고 싶어. 이와쨩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보고 싶단 말이야. 


결국엔 ‘보고 싶다’였다. 그마저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폭언은 공중전화 속 50엔이 전부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버거웠고, 그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도중에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있다 애꿎은 머리칼만 잔뜩 헝클어뜨려야 했다. 


오늘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집에 돌아오고 보니 있어야할 사람이 없었고 ‘토오루’가 아닌 ‘하나마키’란 이름의 부재중 전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술 먹고 푸념을 듣는 것까진 좋았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라져 있었다고. 언제 걸려올지 모를 전화 한 통에 의지할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제 연인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진짜.”


한참의 공방전 끝에 찾아낸 오이카와는 흔한 공중전화박스 바로 옆, 어두침침한 그림자 속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차라리 안에 들어가 있지. 힘껏 뛰었는데도 손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추위였다. 이 날씨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친 채 거리를 떠돌았을 오이카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저절로 울화통이 치미는 것 같았다. 


“코트라도 입고 나오던가. 이러다 감기 걸리면 뒷수습은 누가 해주는데.”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그런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이와이즈미가 한 손에 들고 뛰었던 목도리를 오이카와의 휑한 목 언저리에 둘러 주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이와…쨩?”


술도 못하는 게 들이 붓기는 또 얼마나 들이 부었는지. 목도리를 둘러준다 자세를 낮췄더니 스멀스멀 풍겨 오는 술 냄새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붕어를 생각나게 하는 퉁퉁 부은 눈두덩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겨우겨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곤 또 한 번,


“이와쨩!!!”


눈물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시간 홀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주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펄쩍 안겨 들 듯. 오이카와는 저와 눈높이를 맞춘 이와이즈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곤 그의 가슴팍 한 가운데 울음이 터진 꼴 사나운 안면을 깊이 묻었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이와이즈미가 뒤로 벌렁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어 버리고 말았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대체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단 말이야. 흑, 으앙-”


허,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이와이즈미는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안기며 엉엉 우는 오이카와의 머리통에 꿀밤 한 대를 힘껏 쥐어주려다, 이내 포기했다. 벌겋게 부은 눈가와 대비되는 낯짝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가 가시다 못해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등을 묵묵히 쓸어내려 주었다. 손바닥을 통해 지독한 냉기가 전해져 왔다. 이와이즈미는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었던 말들과 혈류가 거꾸로 솟구쳐 오를 만큼 격해져 있던 울화를 삼켜내고 가라앉혔다. 사실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분노 따윈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분풀이보단 오이카와의 심신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를 발견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의 안위부터 확인하고 마는 자신에게 이와이즈미는 진즉에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절실해 보였다. 벼랑 끝으로 내몰려 낭떠러지 아래의 까마득한 어둠에 잔뜩 겁을 먹은 사람처럼. 그것은 이와이즈미의 옷자락을 꾹 붙든 손아귀에 도드라진 핏줄로 증명되어 있었다. 그러니 항복해야 할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단 좀 비켜봐.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거 안 부끄럽냐.”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그러쥔 이와이즈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부정적인 말에 오이카와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싫……어.”

“오이카와.”

“싫어.”

“안 비켜?”

“싫다니까!!”


고집불통. 이와이즈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뒷머리를 벅벅 긁적이다, 오이카와에게 등을 보였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무언의 손짓을 보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의 행동거지에 오이카와가 머뭇거릴 때면 이와이즈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마음 따위 훌훌 털어낸 것 같은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뭐해? 안 업히고.”


그제야 오이카와는 수분으로 불어터진 눈가를 살짝 휘어 보였다. 허락만을 기다린 사람마냥 그의 다부진 등 위로 넙죽 업혔다. 건장한 성인 장정 하나를 든 탓에 이와이즈미의 무릎이 순간적으로나마 부르르 떨렸다. 그마저도 잠시, 튼실한 팔 근육은 오이카와가 미끄러지지 않게끔 그의 허벅다리 뒤쪽을 세게 감싸 안았다. 


“헤헤 이와쨩 등 오랜만이다아~”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버둥버둥 거리지 좀 마, 이 망할카와.”

“이와쨩 나 많이 무거워?”

“말이라고 하냐.”

“이와쨩 나 많이 사랑해?”

“말이라고 하냐.”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한 높낮이 없는 음성에 오이카와가 부루퉁 입을 내밀었다. 어깨 부근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바닥이 단숨에 이와이즈미의 목 언저리로 이동했다. 


“……성의가 없어. 매정해! 차가워! 미워 죽겠어!!”


목덜미를 쥔 손아귀에 퍽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인 압박을 받은 이와이즈미의 숨통이 급박한 SOS신호를 보냈다. 불행히도 오이카와는 완고했다. 


“뭐……. 윽, 오이카와!! 맞고 싶냐?! 야, 숨, 숨 막-”

“나 사랑하냐구!!”

“당연한 거 자꾸 꼬치꼬치 캐물을래?! 이 손, 손부터 놓고 말해라, 앙?!”

“진심과 열정과 정성을 다해서 말해 달라구우!!!”

“어, 좋아 죽겠다! 사랑해서 돌아가시겠다!! 눈앞에 아주 황천길이 보일만큼!!”


어찌나 오래 잡고 있었는지,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그마저도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면 정말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덜미를 붙들고 있을 심산이었나 보다. 부족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쉰 이와이즈미는 일순 뒤통수를 힘껏 젖혀 오이카와의 이마에 왕방울 만 한 혹이 날 만큼 박치기를 할까라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관두고 말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붕어 눈깔 저리가라 할 정도의 눈탱이 밤탱이 꼴을 한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단 극명한 쾌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려한 낯짝이 못난이가 되는 과정을 상상하다 이내 푸하하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곧장 와 닿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거렸다. 


내일이면 또 하찮은 이유를 들먹이며 싸울지 모른다. 습관처럼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현관을 뛰쳐나갈지 모른다. 그런 오이카와를 뒤쫓아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 어느 순간 무료해질 지도 모른다. 의미 없다고, 부질없다고 생각할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그림자만 남겨 버린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쫓아가리라. 술에 취해 행방불명 된 채로 울고불고 화를 내다 마지막엔 저를 찾고 그리워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이유인즉,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얇은 종잇장이 팔랑이며 넘어간다. 탁한 회색빛의 그것은 깨알 같은 활자들로 뒤덮여 있다. 콧대에서 살짝 미끄러진 금테의 둥근 안경을 쓸어 올린다. 일직선으로 피어오른 연기의 근원은 한 쪽으로 삐뚜룸하게 말려 올라간 입가다. 자주 애용하는 담배 향이 높지 않은 천장을 향해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신문의 정치 분야를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던 마츠카와는 맞은 편 벽을 향해 슬쩍 눈길을 준다. 1과 2 사이를 가리키고 있는 시침에 거짓은 없다. 고운 미간이 간격을 좁히고 잘 보고 있던 신문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접게 만든다. 피로에 지친 눈에게서 안경을 거둬내자 콧대에 알싸한 통증이 감돈다. 소파 깊숙이 달라붙어 있던 엉덩이를 떼자 내내 꼬고 있던 한 쪽 다리에서 경련이 인다. 쥐가 나 주춤거리는 것도 잠시, 각을 맞춰 접은 신문과 안경을 협탁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 둔다. 깍지 낀 손을 높이 올려 가벼운 기지개를 켜본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탓에 몸의 근육과 뼈, 관절들이 늘어지는 소리를 낸다. 수명이 다한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 벌겋게 부풀어 올랐을 콧대를 주무르고 있자 이번엔 반쯤 남긴 식은 커피가 시야에 들어온다. 따뜻했던 온기는 사라지고 향은 날아갔으며 원두의 쓴 맛과 맹물이 침전물처럼 남았을 그것. 머그잔 안 쪽에 눌러 붙은 커피 찌꺼기를 빤히 쳐다보다, 거리낌 없이 그것을 치워낸다. 


머그 잔은 두 개였다. 식은 커피 또한 두 개였다. 소파는 2인용이었고 방 안 곳곳엔 2인분의 생활용품들이 존재했다. 


그는 본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실 신문의 글자 따윈 눈에 차지도 않았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살피며 현관문이 열리기만을,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그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면 늦는다 연락이라도 하던가.”


머그컵 안 쪽에 눌러 붙은 누리끼리한 커피 찌꺼기를 빡빡 문지른다. 젖은 손을 털고 식기 세척기를 가동시킨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지쳤는지 마츠카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 이후, 그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를 안지 않으면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것도 인형이나 베개 같은 물건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를 끌어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다니. 신종 불면증인가 싶다가도 그의 머리칼이나 목덜미에서 풍기는 체취에 코를 박고 있으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드는 스스로가 있었다. 


아쉬운 대로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 식기 세척기가 돌아가는 사이 마츠카와는 거실의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 두 번째 칸을 눈으로 훑는다. 취미로 모은 클래식 음반이 벌써 한 줌에 다 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나 있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CD를 골라 중고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무렵

쿵. 


그의 모든 행동거지가 정지한다. 단순한 윗집 소음이라기엔 귓가에 생생히 와 닿았던 특유의 둔탁함.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워 소리의 근원지를 탐색하던 마츠카와는 정확히 두 번째, 현관문에 소리 나게 부딪히는 무언가를 향해 빠르게 발을 옮긴다. 


“으항~ 늦었찌~”


맨 처음은 코를 찌르다 못해 마비시킬 지경에 이른 술 냄새. 그 다음은 어깨를 가득 짓누르는 묵직함. 팔다리에 힘이 풀려 축 늘어진 거대한 인영. 


현관문을 당기자마자 제 품으로 풀썩 쓰러진 오이카와를 얼떨결에 안아 들게 된 마츠카와는 일순 그런 생각을 했다. 


“너…….”

“헤헤. 맛쯩 오래, 히끅, 기다려쪄?”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이미 자정을 넘겨버린 시각. 행여 옆집에 민폐가 된 건 아닌지 복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츠카와는 쥐죽은 듯 고요한 멘션 전방을 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물론,


“왜 늦었어.” 


오이카와 토오루 한정으론 전혀 안심하지 못했지만. 품에 안겨진 건 우연이었지만 마츠카와의 허리에 허벅다리를 두른 건 엄연한 고의였다. 내친김에 그의 목에 팔까지 두른 오이카와는 영락없는 고목나무 매미 꼴이었다. 정작 그를 내내 기다린 사람의 속에선 화르륵 불길이 일었지만 말이다. 


“왜 늦었냐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심상치 않다. 짤막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듯한 화를 애써 가라앉혀 본다. 


“수울……. 마셨어.”


어차피 상대는 고주망태였다. 투덜거려봤자 어디까지 알아먹을 지조차 미지수였다. 결국은 어깨를 크게 들썩일 만큼의 한숨을 내쉰다. 오이카와가 떨어지지 않게끔 엉덩이를 양 손으로 받쳐준다. 다행히 현관에서 침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우리 토오루, 주량이 얼마나 됐더라.”


말뜻을 이해 못했는지 정말 주량을 세어 보려던 건지 오이카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본다. 턱을 받치고 있던 검지가 금세 굽어진다. 눈살이 보기 좋게 휘어지고 푸흐흐, 웃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덜미에 힘껏 고개를 묻는다. 잇쎄이 냄새 조아아. 흡사 고양이처럼 애교가 가득 담긴 앙탈이 뒤를 잇는다. 


“내가 미친다 진짜.”


오이카와의 주량은 기껏해야 맥주 세 모금. 소위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취기가 오르는 타입이었다. 잘 취한다, 사실 거기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식을 하든 동창회를 가든 친구를 만나든 금세 취해 버리고 마는 이른바 ‘알코올 쓰레기’의 표본이 바로 그였으니 건강상으로든 미관상으로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문제는, 


“잇쎄이 여기. 수염 났다. 막, 까칠까칠해. 여기……. 뽀뽀하고 싶어. 할래.”


알코올만 들어갔다 하면 튀어 나오는 스킨십 본능이었다. 


턱을 타깃 삼아 폭격기마냥 쪽쪽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도 불구하고 마츠카와의 표정은 짙게 굳어 있다. 오이카와가 다니는 회사의 평판이나 대우나 복리 후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회식이라 이름 붙일 만한 자리도 일 년에 한 번 될까 말까한 정도의. 단지, 차마 술을 거절 못하는 오이카와가 그때마다 알코올을 들이 붓는 데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잔뜩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행방불명이 된 넥타이, 주름 진 정장 바지에서 시작해 발그레한 홍조, 누구에게든 달라붙지 못해 안달 난 몸짓, 평소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애교.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이 분통 난 속이 풀릴지. 음주로 무방비해진 오이카와를 상대했을, 혹은 슬쩍슬쩍 곁눈질 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었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버리는 자신이 옹졸하게 여겨지다가도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디에도 내보이고 싶지 않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고 저 혼자만이 감상하고 싶다는 끓어 넘치는 소유욕은 언제나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물론 이 치졸한 이성과 탐욕스런 감정의 대결은 늘 그렇듯 오이카와 토오루란 이름에서 비롯되었지만. 


“잠깐만, 잠깐만. 뽀뽀 됐어. 이제 충분해.”


턱 끝, 뺨, 콧망울, 이마, 그리고 입술로 진한 입맞춤을 날린 오이카와 덕에 마츠카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만두란 말에 잠시 시무룩한 얼굴을 한 오이카와지만 금세 기운을 차린다. 


“그러엄……. 잇쎄이도. 잇쎄이도 토오루 뽀뽀 해줘.”

“조금만 있다가. 착하지, 우리 여보?”

“지금 해줘어, 응?”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자각은 하고 있는지. 나직한 한숨을 뱉은 마츠카와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의 아래턱을 당긴다. 실크같이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이로 살짝 깨물자 기다렸다는 듯 말캉한 혀가 환대인사를 외친다. 진한 알코올 향과 간간이 기름진 튀김 맛이 난다. 담배 냄새 나. 반면 오이카와는 불평하듯 읊조린다. 덕분에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인지 오이카와는 조금씩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어댄다. 화는 이제 차후의 문제였다. 당장 시급한 사안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그의 이성이었다. 


“불편한 건 없어? 토할 거 같진 않고?”


이성이 뿌리 뽑혀 나갈 듯하다. 어금니로 입 안 쪽을 씹어댄 상태에서 입을 여니 저절로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대로 있다간 취한 사람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일지. 마츠카와는 식은땀이 비죽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뒤, 품에 안긴 제 연인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떨어지기 무섭게 오이카와가 어린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이 있는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면서 말이다. 


“아냐! 툐류 여기 시러. 누워 있기 시러!”

“잠시만. 꿀물 갖고 올게. 그대로 자면 속 버리니까.” 

“잇세이 가지 마, 응? 여기 있어. 여기! 툐류 옆에. 나 꼬옥 안아줘어.”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편이 빠를까. 전신의 혈액이 특정 지점으로 쏠리고 있는 걸 몸소 체감한 마츠카와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 절실하다. 


“……좀 봐줘라.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결국 항복 선언을 외친 건 마츠카와다. 점점 더 목청 높여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는 오이카와를 위해 스스로 협의 점을 찾은 것이다. 두 명이 눕기엔 약간 비좁은 싱글 침대. 마츠카와는 제 품으로 파고드는 오이카와의 뻗친 뒷머리를 조심히 어루만진다. 


“이제 됐어?”

“응.”

“술 깨면 난리 나겠네.”

“응…….”

“자는데 옷 안 불편해?”

“우웅…….”

“벗기면 벗겼다고 화낼 것 아냐.”

“맛층…….”

“아주 앉지도 못하게끔 혼쭐을 내놔야 해. 그래야 술의 ‘ㅅ’자도 안 꺼낼 테지.”

“사랑해.”

“……바-보. 얼른 자.”


만취한 제 연인을 마주 안은 마츠카와는 그 등을 보드랍게 쓸어내린다. 나도, 라는 짧은 중얼거림은 달빛과 함께 잘게 흩어진다. 유독 달이 밝은 밤이다.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NTR 주의 




W. 멜




안개꽃이 수놓아진 플레이트 위엔 먹음직한 스콘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홍차에 곁들여 먹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은 식고 바삭하던 표면은 바짝 말라 있다. 어느 누구도 선뜻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코타로는 저를 사랑하니까요.”


묘한 패배감이 아카아시를 뒤흔든다. 사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카아시는 조용히 주먹을 틀어쥔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사키는 깜박 잊었다는 듯 양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마주친다. 살얼음판 같던 묘한 분위기가 박수 소리 한 번에 쩌적 갈라진다. 날 선 목소리로 진실을 꿰뚫던 서늘한 낯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특유의 상냥한 어조가 나긋나긋 흘러나온다. 


“기왕 여기까지 발걸음 해주셨는데 밥 한 끼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선호하는 음식 있으신가요? 아님, 가리거나 못 드시는 음식이 있다면 참고해서 준비해 볼게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다 식은 티 팟과 찻잔을 정리하며 일어선 사키는 눈이 아닌 입으로만 웃음기를 머금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릴까. 그녀의 행동거지를 경계하듯 아카아시는 쉬이 응하지 않는다. 아카아시 앞에 놓인 찻잔이 치워진다. 그 짧은 순간 아카아시의 안색을 가까이서 살핀 사키는 묘한 눈웃음만 흘린다. 


“불고기!! 불고기 하자!”


닫혀져 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리며 우람한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 건 바로 그 때다.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보쿠토는 아주 신바람이 났는지 안방에서 부엌으로 껑충껑충 뛰어온다. 막 앞치마를 두르려던 사키는 등을 짓누르는 익숙한 무게감에 어쩔 수 없단 얼굴로 활짝 웃는다. 


“고기는 어제도 먹었잖아?”


사키의 불평에도 아랑곳 않고 막무가내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보쿠토는 때 아닌 어리광을 부리며 그녀의 고운 어깨선에 코를 묻는다. 


“어제는 바베큐였잖아. 오늘은 뭔가……. 뭔가 그래! 소고기가 먹고 싶어. 먹자, 먹자. 응?”

“음……. 상관없긴 한데, 당장은 재료가 없거든. 나가서 사와야 하는데 기다릴 수 있겠어?”

“당연하지. 아카아시 너도 괜찮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말고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카아시의 척추가 보쿠토의 부름과 함께 뻣뻣하게 굳는다. 저를 돌아본 두 쌍의 눈동자에게 주목받자 상대적 박탈감까지 들고 만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백짓장이 된 사이 그의 입은 멋대로 움직인다. 


“……네. 맛있겠네요.”


망할. 


“좋-아! 결정!”


활짝 휘어진 눈꼬리는 처음엔 아카아시를 향했지만 이내 제 연인에게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한껏 안은 등이 퍽 듬직하다. 제게서 등진 뒷모습에 아카아시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달콤함은 멈추지 않는다. 


“어쭈. 슬금슬금 손이 어디로 올라가실까, 우리 왕자님?”

“으응. 조금만~”

“아카아시군이 다 보잖아. 저리 가 있어요.”

“장보러 나갈 거라며. 나는 같이 못 가니까…….”

“금방 갔다 올게. 아카아시군이랑 집 잘 보고 있어요.” 


다정한 신혼 부부. 핑크빛으로 둘러싸인 한 폭의 그림에 먹물 한 줌이 튀어 있다. 꼭 아카아시 자신이 먹물의 역할을 자처한 것 같아 홀로 가슴을 부여잡는다. 외출 준비 삼아 외투를 챙겨 입는 사키의 그림자를 보쿠토가 졸졸 뒤쫓는다. 그의 걸음이 하나둘 제게서 멀어질수록 아카아시는 속으로 헤아려본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겨우 여섯 걸음. 보쿠토는 발을 멈춘다. 쪽, 꿈에서 들어 본 듯한 입맞춤 소리가 메아리처럼 아득히 울린다. 마주 안은 포옹이 일류 로맨스의 해피 엔딩 같다. 


좋아하지 않는다. 보쿠토의 마지막 발걸음이 말한 결말. 신빙성 제로의 점괘는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그를 끊임없이 다그치고 채찍질한다. 


아카아시는 픽 웃고 만다. 잘 다녀오라 손짓하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좋아하고 말고가 마음먹기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다면. 칼로 그어 버리듯 감정을 잘라낼 수 있다면. 


“집 구경 좀 할게요.”


진즉에 그를 포기할 수 있었으리라. 


어? 되묻는 보쿠토를 뒤로하고 걷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단 둘이 살기엔 과하게 큰 집. 재벌 3세들이 별장으로 삼을 법한, 고급 맨션이나 펜트 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단독 주택은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엔 탁 트인 거실과 흰색을 모티브로 한 새하얀 부엌, 풍채 좋은 안방을 비롯한 개방적인 공간. 서적으로 수두룩한 서재와 각종 옷감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드레스 룸, 바비큐가 가능한 드넓은 발코니를 배경 삼은 2층. 뻥 뚫린 옥상 아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 쬐는 조그만 옥탑 공간. 


깔끔한 인테리어. 부와 멋을 갖춘 거주 공간. 사실 그런 것 따윈 눈에 차지 않았다. 그에겐 구실이 필요했다. 보쿠토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될 구실. 그래서 도망쳤다. 숨을 곳이 필요했고 숨 쉴 곳이 필요했다. 


“윽.”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더니 알싸한 통증이 그의 어깨를 덮친다. 코너 모서리에 세게 부딪힌 탓이다. 어찌나 아팠는지 눈가엔 저절로 눈물이 핑 돈다. 알싸한 통증으로 부풀어 오른 어깨를 감싸곤 주위를 둘러본다. 부의 규모부터 전혀 다른 공기에 박탈감이 차오른다. 좁고 어두운 반지하방, 쾨쾨한 곰팡이 냄새, 벽지를 장식하는 눅눅한 물 자국. 


무엇이 잘못 됐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순간이나마 그와 행복해지려 한 자신이. 그도 저와 같은 감정일 거라 착각한 자신이. 저와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제 눈높이를 맞춰주길 바란 자신이. 아카아시는 너무나 후회로웠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부딪힌 어깨를 움켜쥐던 아카아시가 끝끝내 무릎을 구부린다. 뻥 뚫린 가슴을 힘껏 부여잡는다.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 * *



한 편, 사키를 마중 보낸 보쿠토는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곁에 있고 싶어도 곁을 지킬 수 없는. 이런 결말을 자처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건만 막상 사키를 홀로 내보내니 서글픈 마음을 좀처럼 털어낼 수 없다. 


그는 지금도 종종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속으로 스스로를 깊숙이 가라앉히곤 한다. 과연 이게 잘한 일일까. 배우란 직업을 업으로 삼는 것이나, 스스로의 유명세를 위해 타인을 좋을 대로 이용한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버젓이 두고 가짜를 세워둔 것이나. 


새벽달이 기울어지는 밤이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악몽을 꾼 직후 얄팍한 잠에서 깨어나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침구를 한쪽으로 치웠다. 지친 손바닥은 얼굴을 가리고 약해진 등은 잘게 떨렸다. 그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준 사키는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등을 쓸어내렸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소리 없이 울던 그가 마침내 혼잣말로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욕심이 많으니까. 행복해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다 이루고 싶은 게 뭐가 나빠. 대체 어디가 나쁜 건데.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어. 해야 해. 할 수 있어.  


스스로와 담판을 내릴 때까지 말이다. 


이렇듯 속죄의 밤이 지나고 나면 보쿠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죄책감을 용기로 무장하고 미안함을 웃음으로 가렸다. 


“집 구경 좀 할게요.”


현관문이 다 닫히기도 전. 등 뒤론 낯익은 목소리가 울린다. 어? 되묻는 질문은 홀로 웅웅거린다. 계단을 타고 오르는 소리만이 아득하다. 보쿠토는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춘다. 신발이 즐비한 현관을 손수 정리해 본다. 아끼는 에어 조던 시리즈나, 톰 포드제 가죽 구두나.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켤레는 거뜬히 들어갈 신발장 어딘가에 처넣어 두고 보니 마지막 신발이 현관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다. 


“……아카아시 것.”


때가 잔뜩 묻은 앞코. 너덜너덜한 운동화 끈. 구겨 신느라 헤진 운동화의 뒤축. 브랜드도 이름도 없는 그 낡은 운동화에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인지. 구석에 처박혀 하나는 온전히, 다른 하나는 옆으로 엎어진 그것을 보쿠토는 가지런히 정돈해 둔다. 자신과 전혀 다르게 살아온 그 뿌리 깊은 생명력에 감탄이 나오고 만다. 곰곰이 되짚어 본다. 첫 인상은 어땠더라. 


“말 수도 없고 무뚝뚝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애.”


아카아시가 저를 기억하기 이전, 보쿠토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유독 겨울바람이 시렸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근처에 촬영 스케줄이 있던 보쿠토는 감독과 스테프들 몫의 커피 심부름을 받았었고 마침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려 했을 뿐이었다. 카페 바로 옆,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길에서부터 들려오는 공방 소리만 아니었어도. 작지 않은 언성의 높낮이를 따라 언뜻 고개만 내비쳤을 때 그 좁은 길모퉁이엔 세 명의 사람이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고 있는 중년 여성. 다른 하나는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대여섯 살의 남자 아이. 나머지 하나가 아카아시였다. 여자를 노려보다시피 인상을 쓰고 있던 아카아시의 품에는 언뜻 보아도 크게 다친 새끼 고양이가 안겨져 있었다. 상황은 알 만 했다. 끼어들었나 보네, 보쿠토는 짧게 혀를 차곤 눈을 돌리려 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박의 외침이 들린 건 바로 그 때였다. 아카아시가 그녀를 상대로 뭐라 대꾸 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날 선 그의 몇 마디가 상황을 타개한 것은 확실했고 여자는 충격을 먹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으며 어느 새 불길이 일은 세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그 사이에 끼어 든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경찰 이야기가 오고 가며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 될 수 있었지만, 아카아시가 그를 기억 하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유니폼인 베레모와 앞치마를 벗어 던진 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곧장 동물병원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볼 기미조차 없이 멀어져 가는 택시 번호판을 보며 보쿠토는 막연히 생각했다.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고. 


그 직후 부터였다. 아카아시가 근무하는 카페를 보쿠토가 단골로 점찍은 것은. 그가 근무하는 시간을 다이어리 한 켠에 메모해둔 채 밤새 대본 연습을 할 때면 아카아시의 얼굴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눈앞의 불의를 피하지 않을뿐더러 당차게 할 말을 하던 그 옆모습이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였을까. 호기심이 호감이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명이 아카아시 케이지(赤葦 京治) 라는 것도.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도. 저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무시하지 않고 하나하나 답해주는 것도. 의외로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것도. 다소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 밑엔 저만의 신념이 있다는 것도. 제 잘못은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고집도, 자존심도 만만치 않은 것도. 보면 볼수록, 훤칠한 외모란 것도. 


시간이 날 때마다 카페를 찾았다. 사사건건 말을 걸거나 사고를 치거나 쓸데없는 걸 트집 잡아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다 위장 연애라는 일석이조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나는 보쿠토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 다른 하나는 아카아시의 자금적 지원을 위한 핑계. 이번 기회에 짧게나마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졌던 보쿠토는.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아카아시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제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보다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동그래진 눈을 하며 깜짝 놀라는 얼굴. 당황할 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버릇. 하나부터 열까지 닮은꼴이라곤 전혀 없는 취향. 입만 열었다 하면 높아지는 언성. 도통 맞물리질 않는 아귀. 


그런 아카아시를 상대로 두 달이 가당키나 할까란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차라리 목석을 끌어안곤 사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며 기자회견을 여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이래 갖곤 친구는커녕 계약 이후 언짢은 감정만 남겠다 싶었던 그가 언제부터 아카아시를 다시 살펴보게 됐는지. 


스캔들이 대박을 터뜨리고, 세간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실감하는 와중. 엉망진창이었던 첫 데이트를 기억한다. 데이트라기 보단 대외 홍보용 이미지 관리였지만, 보쿠토는 그마저 즐거웠다. 친구와 놀러 나온 기분이 딱 이런 걸까 싶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케이지라 꼬박꼬박 불러주며 ‘함께’가 당연한 것처럼. 


관람 차에 탔을 때만큼 의외의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을까. 저에겐 당연했던 것들이 아카아시에겐 전혀 당연치 않았을 때. 그 괴리감이 꽤 깊다는 걸 알았을 때.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앞에서 처음으로,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당황하며 난색을 표하던 아카아시 특유의 표정은 이후에도 종종 보쿠토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보쿠토 자신과 영화의 흥행을 기념하던 회식 자리. 제 3자에게 성적 희롱을 당하는 아카아시를 가만 두고 보지 못한 것도. 홧김에 으름장을 놓으며 칼날을 세운 것도. 사실은 곤혹스러워 하는 그의 표정이 짜증나게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스케줄이 빡빡해 며칠 간 보지 못했던 사키의 얼굴을 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던 불쾌감은 눈 녹듯 사라졌고 사랑이라 이름 붙인 감정만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아카아시가 제게서 등진 것도 몰랐고 푹 가라앉은 어깨는 보지도 못했으며 탄식 섞인 한숨이나 희미한 눈물 냄새마저, 보쿠토는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집 구경한다더니만…….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보쿠토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계단의 철제 난간엔 드문드문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키와 함께하며 행복했던 시간들이 네모난 틀 안에 박제 되어 있다. 그것들을 흐뭇한 눈으로 만지작대던 보쿠토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 같은 것에 귀를 세우게 된다. 삽시간에 안색이 굳어지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진다. 


“케이지?”


막상 2층에 다다르고 나니 흐느낌은 뚝 멎어 있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불안한 마음이 심장을 쿵쿵거리게끔 한다. 복도식으로 늘어선 방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본다. 찾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곳이라곤 창고로 사용하고 있던 서재 하나.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고동색의 고급스런 문짝을 열고 보니 보쿠토는 해야 할 말 따윈 새까맣게 잊고 만다. 오래된 책 냄새로 그득한 서재 한 가운데, 책장을 팔랑이고 있는 아카아시의 옆모습에 넋을 놓고 만다.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첫 만남 때처럼. 그 날렵하면서도 수려한 턱 선과 콧대를 멍하니 쳐다보다, 가슴이 뻐근해진다.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조금 전 들었던 흐느낌은 환청이었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 밑이 약간 붉어져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한 감각이 가슴을 꾹 짓누른 탓이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가슴께를 힘껏 부여잡으려 하는 순간, 아카아시가 자신을 돌아본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뿌연 먼지가 햇볕을 받으며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햇빛을 등진 실루엣이 묘하게 빛난다. 한 쌍의 에메랄드가 태양빛을 외면하고 있었다. 


“보쿠토씨.”


얼빠진 정신은 제 이름을 듣고서야 뒤늦게 제자리를 찾는다. 아카아시는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여기에 케이지가 읽을 만 한 책이 있던가, 있는 머리 없는 머리 싸매고 굴리던 보쿠토는 다음과 같은 아카아시의 대답에 다시 한 번 넋을 놓고 만다. 


“저랑 키스할래요?”


뭐? 제 귀가 잘못 됐나 되묻기도 전, 아카아시는 쐐기 박듯 그의 말을 가로막는다. 


“차라리 섹스는 어때요?”


아카아시는 어느 앨범을 들춰 보고 있었다. 


“우리들, 일단은 사귀는 사이잖아요. 섹스는커녕 키스 한 번 못 해본 사이란 게 우습지 않아요? 기왕에 하기로 마음먹은 거. 작정하고 제대로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남자 상대 괜찮죠? 나한테 사귀자고 꼬드긴 것도, 꼬박꼬박 이름으로 불러 준 것도,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만든 것도, 전부 당신이었으니까.”


검은 색 턱시도와 흰 색 나비넥타이. 앨범 낱장 하나하나를 빼곡하게 채운 하이얀 드레스. 민트빛 바다와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이 행복한 얼굴로 정지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남자랑은 못 해먹겠단 개소리 지껄이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쿠토씨?”


그것은, 보쿠토와 사키의 웨딩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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