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부제: 초열지옥
*논커플링
*느와르




W. 멜




고막을 찢어지게 만드는 자명종 소리가 고요를 울렸다. 두터운 이불 속에서 비져나온 손바닥은 침대 머리맡을 뒤척이다 문제의 소음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곧이어 베개 아래에서 웅웅 거리는 정겨운 진동음과 뽕짝스러운 벨소리가 다시 한 번 누군가의 단잠을 흔들어 깨웠다. 이불을 뒤척거리다 짙은 포효처럼 흩어지는 한숨은 베개 밑으로 손을 더듬게까지 했다. 네모 반듯한 화면이 진동으로 부르르 떨리며 시계를 닮은 밝은 조명을 띄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알람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린 아카아시는 이불을 홱 젖혔다. 싸늘한 공기가 맨살에 그대로 와닿았다. 기지개를 쭉 켜자 탄탄한 가슴 근육이 위아래로 늘어나 군침이 꿀꺽 삼켜질 듯한 모양새를 갖췄다. 매트리스의 반동을 이용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두칙칙한 커튼을 걷어 제꼈다. 새벽녘 아니랄까봐 밖은 암전으로 가득차 있었다. 해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 이른 시각, 아카아시 케이지의 아침은 빠르게 흘러갔다.
간단히 샤워를 끝마치고 차콜색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어내다 그대로 중요부위만 가려낸 채 현관을 향했다. 먼지 한톨 남아 있지 않은 현관 바닥에는 신문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신문을 집어 식탁에 던져둔 아카아시는 다시금 제 방으로 발길을 돌려 옷장문을 열었다. 비슷비슷한 색들의 정장이 일렬 횡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하나가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고가의 것들이었지만 아카아시는 마치 시장 골목에서 파는 싸구려 양말들의 모양새를 가늠하듯 그것들의 가치를 깔잡아 눈으로 대충 재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상태가 제일 괜찮은 카날리제 의 고급스런 투버튼 정장과 그와 나쁘지 않은 조화를 이루는 청색 셔츠를 집어든 아카아시는 재빨리 맨 몸위로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옷걸이가 좋으면 후줄근한 츄리닝마저 멋드러지게 소화할 수 있다는 말은 아카아시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애초에 츄리닝 따위를 구입해본 기억이 그에겐 일절 없으니 말이다.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우고 소매 부근을 가다듬으며 부드러운 실크 소재로 반짝이는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동여매자 반쯤 열린 문틈으로 향긋한 내음이 밀려들어 왔다. 욕실에 들어서기 전 토스트기에 넣어둔 식빵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는 알림이었다. 정장을 말끔히 갖춰 입고 뜨끈한 토스트 한 쪽 면에 버터를 바르는 그의 모습은 꽤 이질적이었는데 널찍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그에겐 오히려 이 짧은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왜냐하면,

"제목부터 엿같이 썼네."

와삭, 베어문 토스트에서 사르르 녹아내린 버터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한 손으로는 토스트를, 다른 한 손으로는 신문을 펼쳐든 그는 얌전한 표정과 달리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고 있었다.

'네코마, 고양이 발톱으로 부엉이 부리를 겨누고 있어.'
'후쿠로다니 그룹, 점차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은 회복 불구?'
'구시대의 유물과 신시대의 충돌, 그 끝은?!'

"오냐오냐하니까 좆도 모르는 기레기 새끼들이. 아주 위아래 분별도 똑바로 못하고 지들 멋대로 펜을 휘둘러?"

대충 훑어만 봐도 가관이었다. 언제는 허리를 수직으로 굽히며 잘 좀 봐달라고 제 손을 억지로 끌어다 악수를 시키며 능구렁이마냥 웃어대더니. 수 틀리자 곧장 이 모양이었다. 탁, 신문을 내던진 아카아시는 사분의 삼쯤 남겨진 토스트를 마저 입에 쑤셔넣고 의자에서 몸을 뗐다. 조용한 집이었다. 완연한 평온으로 가득찬 저만의 공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상. 새삼스레 느껴지는 그 아늑함이 마치 뜨끈한 우롱차 한 잔이 전신을 배회하며 온 몸을 노곤해지게끔 만드는 것 같아 집밖으로 나가는 것이 점점 꺼려지만 하는 아카아시였다. 안락함도 잠시, 양복 주머니에서 정겹게 울려대는 진동 소리는 아카아시에게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았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딱 하나 뿐이지. 쯧, 짧게 혀를 차고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꼭두새벽부터 전화하지 말랬죠."
[으... 아카아시 어디야.]
"술 작작 쳐드시라고 몇 번을 말해요."
[소리 낮춰어. 머리 깨질 것 같아.]
"신문에 아주 대문짝만하게 실렸던대요. 우리 그룹 망해간다고."
[썅놈 새끼들... 다 족쳐버려야 해. 지들이 삘삘 기어댈 땐 언제고. 가뜩이나 괭이 새끼들 면상 봐서 기분도 더러워 죽겠구만.]
"그래서, 알코올 들이 부으니까 좀 나으신가봐요?"
[전ㅡ혀. 속 쓰려. 해장, 해장, 해장.]
"술 한 잔만 했을까?"
[...큼. 여자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걸걸한게 몇 판은 뛴 듯 싶었다. 심기가 불편한 날이면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아래에 깔리는 여자들을 속사포로 갈아치우던 보쿠토였으니 말이다. 하물며 어제는 그 '네코마'의 대가리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으니 머리 끝까지 치미는 격앙심을 오로지 여자로 풀었으리라.

[아카아시 이럴 때 보면 꽉 막혔어. 스트레스 해소는 붕가붕가지. 떡 한 번 쳐보면 막 스트레스가 빵빵 풀린다니까? 고 놈의 빨통을 따악 물고 쥐고 흔들면ㅡ.]
"쓸데 없는 소리 하실 거면 끊습니다."
[안돼애애!! 해장! 해장!! 나 사무실에 있으니까 데리러 와!!]

데리러 오라니... 커피 내릴 틈도 안 주는 구나.
일방적으로 끊겨버린 전화는 귓가에 잔잔히 남아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드립 커피를 내리기 위해 꺼내 두었던 포트가 외롭게 울부짖었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치닥거리는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코가 비뚤어지게끔 마셔대 고주망태가 된 보쿠토를 본가에 데려다 놓는 것도, 툭하면 그가 내팽개치는 서류들의 뒷처리도, 거래처들 간의 친목 도모도, 부하들의 업무 결제 및 징계도, 하나같이 아카아시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러니 실질적 회장은 아카아시란 헛소문이 조직원들 사이에 나도는 게 백퍼센트 거짓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히 포만감이 차오른 배를 부여잡으며 식기를 정리했다. 신경질적으로 내팽겨쳐진 신문을 곱게 접어 들어 수납장 제일 아랫칸에 박아 넣었다. 검은 색 서랍장, 흰 색 소파, 검은 색 커튼, 흰 색 러그, 검은 색 식탁, 흰 색 주방. 흑백으로 확연히 구분가는 오피스텔이었다. 아카아시는 명암을 좋아했다. 밝고 어두운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했다. 내 편과 네 편이 확실한 것을 좋아했다. 그런 그가 처해 있는 입장이란,

"늦겠네."

어깨를 크게 으쓱거렸다. 해장은 평소 보쿠토가 자주 애용하던 국밥집이 좋을 것 같은데 이 가게가 새벽 5시 24분이라는 꼭두새벽부터 가게문을 열고 있을 지가 의문이었다.

"안되면 꿀물이라도 대령해야지."

잠깐, 그러다 울상 짓는 거 아닌가?
구두를 신다 잠시 망설이는 아카아시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울려 주고 해장국집까지 찾아갔다가 안되면 꿀물까지 갖다 바치려는 셈인 이런 친절한 부하를 요즘 시대에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단 말인가.
문을 열었다. 또로록, 현란한 도어락 알림이 울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숫자는 10을 훌쩍 넘겼고 기계적인 여성 목소리를 내며 좌우로 활짝 벌려졌다. 고요함과 정적 속의 지루한 기다림 끝에 지하층에 도달했을 때, 제 주인을 기다리는 제네시스가 멀찍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갈 곳은 정해져 있으니 망설임도 없었다. 능숙하게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아 주차장을 빠져나갔을 무렵, 때는 아직도 6시를 넘기지 못했다.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던 아카아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반쯤은 기대하고 있었느데 정말 문을 닫았을 줄이야.

"지랄맞게."

머리를 쓸어 넘기다 홧김에 액셀을 짓눌렀다. 급발진한 차가 성난 맹수마냥 포효했지만 새벽녘의 도로는 지나치리만큼 고요해, 그를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안전벨트가 갑갑했다. 풀 자니 깨름칙하고 계속 매고 있자니 압박당하는 것 같아 신경에 거슬렸다. 24시 편의점이 보였다. 급한 대로 대로변에 차를 적당히 세워 두고 안전 벨트를 풀었다. 애용하는 답배 몇 갑과 혹시 몰라 여명 808도 챙겼다. 꿀물만 대접하기엔 양심이 콕콕 찔렸으리라. 가벼운 반찬거리를 품에 안고 다시금 운전을 시작한 그는 크게 숨을 돌린 표정이었다.
사무실까지는 금방이었다. 삐까번쩍한 마천루는 시내 한 복판에 자리잡아 위용을 뽐내고 있었는데 그 건물은 물론이고 그 주변 지대가 모두 후쿠로다니의 것이라 했지만 아카아시는 그 말을 몇 번을 들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10년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말이다. 입구에서부터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우람한 덩치의 사내들에게 차례대로 깍듯이 인사를 받은 아카아시는 손사래를 가볍게 쳤다. 적당히 물러 가란 지시였다. 곧장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1층과 꼭대기층을 가리키는 두 버튼 중 후자를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 내부에서는 바깥의 전경이 그대로 내다보였다. 본격적인 아침의 시작이었다. 울긋불긋한 차들이 도로를 하나둘 채워나갔고 희끄무레했던 하늘은 주홍빛과 회색 구름이 뒤섞여 도심 특유의 불쾌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엘리베이터가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오르면 오를 수록, 아카아시는 자신이 이런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하기 시작했다. 후쿠로다니 그룹의 사무 이사. 더 정확히는 후쿠로다니 조직의 정상급 간부. 어깨 위에 얹어진 묵직한 벽돌이, 그 타이틀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아카아시 케이지에게는 다른 의미의 벽돌이 자기 자신을 크게 짓눌렀을지도 모른다.
정상에 다다르자 구둣발을 크게 움직였다. 뚜벅이는 발소리는 바닥에 일자로 쫙 깔려 있는 고급스런 카페트에 묻혀 단 한 치의 소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가볍게 노크하고 금박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문손잡이를 돌리니 지독한 술 기운이 아카아시의 코를 확 덮쳐왔다.

"뭐야. 츠키시마도 있었어?"

길쭉한 소파에 구부정하게 누워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골골대는 제 보스는 눈에 차지도 않는지 아카아시는 선 채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던 츠키시마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아카아시... 머리통 꽝꽝 대니까 주둥이 좀 닥,"
"뭐 보고 있어?"

두 손으로 귀를 꽉 막은 채 몸을 배배 꼬는 보쿠토였지만 아카아시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지 아주 능숙하게 그를 무시했다. 물론 츠키시마라고 해서

"아, 가계부 정리요. 어제 잘나신 보스님께서 흥청망청 카드 긁어대는 바람에 자금이ㅡ."

보쿠토를 깍듯이 대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츠키시마에게서 노트북을 건네 받은 아카아시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어제 저녁, 불쾌한 기분을 대놓고 표출하며 으르렁 대는 보쿠토의 목줄을 붙드느라 진이 빠져버린 아카아시는 회합이 끝날 무렵 안마나 받으러 가자는, 손바닥과 주먹을 퍽퍽 마주치는 야설스런 손놀림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보쿠토를 거절했다. 지치기도 지쳤거니와 보고할 것도 있어 적당히 핑계를 둘러 대고 빠져나왔건만, 잠깐 안 본 사이에

"내 눈이 삐꾸가 됐나. 영수증에 영이 하나씩 많아 보인다?"

감당도 할 수 없게 될 줄은.

"그거 정상이에요. 내역 하나씩 보세요. 이름 있는 양주들은 하나같이 들이 부으셨다니까요? 그 뿐일까? 업소 여자들이란 여자들은 다 끌어 모아서 자기가 다 낸다 하고~ 글쎄, 우리 보스님은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전ㅡ부 자기껀 줄 아시나봐~ 회사... 아, 조직 자금이였지~? 자기가 우두머리란 자각은 있긴 한 건지."

츠키시마는 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풋, 짧게 웃었다. 츠키시마의 비웃음 소리가 커질수록 새우등마냥 허리를 둥글게 말은 보쿠토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는데,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아카아시쪽이었다. 차라리 입 열고 속사포로 잔소리를 듣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이렇게 오래도록 아카아시가 조용한 날이면, 그 날은 등골이 시린 건 물론이고 이까지 달달 떨렸다. 엄연히 그 자신이 조직의 대가리임에도 말이다.
아카아시는 츠키시마에게 노트북을 건네 주었다. 장부에 잘 기록해둬, 짧게 속삭인 그는 달랑거리는 비닐봉투 안에서 여명 808을 꺼냈다. 탁,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움켜쥔 손등에는 힘줄이 비죽 튀어 올라 있었다. 오한이 돋는 소음에 보쿠토는 자칫 토끼마냥 펄쩍 뛰어 오를 뻔했다.

"숙취. 안 풀 거에요?"

귀에 닿는 아카아시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 화 안났구나 단순히 어림짐작하고 몸을 훽 돌리며 눈을 반짝이던 보쿠토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죽을 듯이 후회해야만 했다.

"작작 좀 하세요. 확, 다 뒤엎어 버리기 전에."

바로 제 코 앞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맹수의 눈이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어서 였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 숙취 해소제를 단박에 들이키고는 두 팔을 번쩍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죄송합니다를 수십번 열창한 보쿠토는 오전 내내 아카아시 눈칫밥만 먹었다고 하더라. 어제 하루 반나절을 몽땅 회합으로 돌리는 바람에 밀려 있던 서류처리는 아카아시의 몫이었다. 간간히 츠키시마가 보조를 해주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였을 뿐. 보쿠토가 손을 대면 일사천리로 일이 빨리 진행되지만 당사자가 하루종일 제 눈치만을 보고 있으니 아카아시 입장에선 답답할 따름이었다. 결국 서류 지옥에서 해방 선언을 먼저 내뱉은 쪽은 아카아시였다. 밥? 밥 먹는 거야?!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눈을 초롱이던 보쿠토는 게임기를 집어 던지고 한달음에 아카아시 옆으로 붙어왔다.

"점심은 역시 불판에 지글지글하게 구운 갈비ㅡ,"
"자장 곱배기."
"저는 짬뽕이요."
"왜!!!"

보쿠토의 절규와는 달리 츠키시마는 벌써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네, 여기 자장 곱배기랑 짬뽕, 그리고 탕수육 대자요. 잔뜩 울상을 짓고 있던 보쿠토는 츠키시마의 통화 안에서 제 몫이 없다는 걸 깨닫자

"간짜장!!! 간짜장 빼먹지마, 츳키!!"

츠키시마에게 닿지 않는 팔을 있는 힘껏 뻗어대는 보쿠토였다.
멋드러진 건물과 값비싼 토지, 남부럽지 않은 해외 명품들을 몸에 휘두르고 손가락질 한 번으로 남의 모가지를 손쉽게 따낼 줄 아는 이 세사람이, 그들이 속한 조직이, 고작 자장면 하나로 절규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했다. 뭐, 보쿠토가 한바탕 긁어낸 영수증 더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입에 풀칠도 못하는 정도였지만. 배달원이 으리으리한 사무실 내에 사뭇 떨리는 손으로 배달통을 내려놓으면 아카아시는 (언제 슬쩍했는지 모를) 보쿠토의 지갑에서 적당히 돈을 꺼내 주었다. 그걸 목격한 보쿠토가 한 마디하려고 입을 열자,

"츠키시마, 어제 지불했던 내역들 읊어볼래."
"아니!!!! 자자, 먹자 먹자. 이 몸이 거하게 한 턱 쏜다!!"
"풉. 고작 짱깨."
"츳키이이이!!"

밥 숟가락에 듬뿍 퍼담으며 허기가 가시자 보쿠토는 슬슬 어제 있었던 그 '불쾌'한 일들에 대해 줄줄 늘어 놓기 시작했다. 괭이 새끼들은 면상을 갈아 엎어야 한다느니, 그 쿠로오란 놈은 머리통에 뭘 넣었는지 모르겠다느니, 능글능글 웃어 넘기는게 보통 놈은 아닌데 그게 더 짜증난다느니. 그새 잔뜩 성이 올라 버린 보쿠토와 달리 츠키시마는 그런 보쿠토를 찰지게 놀려 먹었는데, 두 사람의 조합이 이럴 땐 꽤 재미진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올해까지 합치자면 조직에 입사한지 9년차나 되는 간부급되는 인물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약간 마른 걸 제외하면 피지컬도 괜찮았고 삐뚜룸한 입놀림과 달리 의외로 승부욕도 있는 녀석인지라 보쿠토가 예전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다. 6년차 즈음부터는 아카아시가 그를 회합에 끌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부턴 아카아시가 도맡아하던 업무들을 분업해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그에 반기를 들던 조직원들은 츠키시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아우라와

'헤에, 꼬우면 노력같은 걸 하는 척이라도 해보시던가. 까진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게 욕밖에 더 있어? 말로만 지랄 부르스 떨기 전에 그럴 듯한 행동과 성의를 보이는 게 어떠신가요, 형님들?'

양복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말하는 그의 비릿한 음성에 꼬리를 팍 내렸다 하니 이만하면 말 다했다. 칼을 집는 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기본적인 호신술은 익혔다하여 제작년 부턴 소위 '뒷처리'라 불리는, 손에 핏덩어리 묻히는 일도 거리낌 없이 시키다보니 어느새 조직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꼭 사람 하나 족치고 오는 날이면 딸기 쇼트 케이크 한 상자를 사와 순식간에 두 조각을 해치우는 그의 특이한 습성은 아카아시마저도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게 하곤 했다. 이 바닥에서 일해먹는 사람들의 출생지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츠키시마의 그런 독특한 언행을 볼 때면 때때로 그의 내력이 진지하게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에 비해, 보쿠토는 소재부터가 남달랐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뒷세계를 휘어잡아 거물로 성장한 후쿠로다니 조직은 보쿠토 코타로의 선선대에서부터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두목의 자리. 누군가는 부당하다 목청 높여 항의할 수 있겠지만 그 당사자가 보쿠토라면, 후쿠로다니 조직원들은 일체의 불만 없이 그를 인정하곤 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남자. 그것이 조직원들이 기억하는 보쿠토였고, 보쿠토가 추구하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아무리 그가 툭하면 풀이 죽어 버려도, 술과 여자에 미쳐 돈을 흩뿌리고 아랫도리를 휘둘러도, 업무는 뒷일이고 틈만 나면 빠져나갈 궁리만 머릿 속에 가득하다 할지라도, 서른 여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저질러둔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하는 나이에 열 살 난 어린 애마냥 아카아시를 보모처럼 부려 먹을 지라도, 최후의 최후에는 절대적인 우두머리였으며 누구에게도 쉬이 머리를 굽히지 않는 번득이는 맹금류였다. 그런 막무가내인 보쿠토에게 사람이 따르는 이유는 특별난 것이 없었다. 믿는 것, 의리를 지킬 것. 그 두 가지만을 약속한다면 그게 어떤 인물이든 보쿠토는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일단 인정만 받으면 제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조직원들을 몸소 지켜 내는 게 바로 보쿠토였고 그것이 그의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주원인이었다. 덕분에 후쿠로다니 조직은 언제나 유쾌했다. 주거니 받거니 오고가는 즐거운 덕담과 가끔은 날이 시퍼렇게 곤두선 쌍욕마저 한 차례의 강물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근래에 세력을 펼치고 있는 조직들 중에선 찾아 보기 힘든 것이다. 아랫것들이 간부를 챙겨주고 간부들 역시 그들의 행동력과 신념을 눈여겨 보았으며 보스라고 해서 특별 대우해주는 것이 절대 아닌, 그런 부드러운 분위기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항상 밝은 날 만이 가득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남자. 믿는 것, 의리를 지킬 것. 그것들을 절대적인 신념으로 삼는 보쿠토이기에 더더욱, 그 자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배신'이었다. 짜바리, 프락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들 등등. 배신이라면 치가 떨렸다. 잊혀질 때도 되었건만 수년 전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은 때때로 발작처럼 덮쳐 오는 악몽이 되어 보쿠토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안경군은 좀 더 팍팍 먹어야 해!! 그러니까 팔이 비쩍 마르지~ 그래가지고 몽둥이 휘두를 수 있겠어?"
"보스야말로 너무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과체중 됩니다."
"츠키시마한테 말 걸면서 은근슬쩍 제 밥그릇에 젓가락대지 마시죠, 보쿠토씨."
"칫."

젓가락 끝에 미미하게 묻은 자장 소스만을 입가에 가져간 보쿠토는 쌀 한 톨 남지 않은 깨끗한 밥그릇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추잡채라도 시킬 걸 그랬어. 축 처진 머리가 어째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무의식중에 보쿠토가 젓가락을 갖다댈 정도로 먹음직스런 자장면을 아카아시는 가만히 바닥에만 내려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까부터 양복 주머니에서 징징 울려대는 진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촉이 좋지 않았다.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일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고 있었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문구에 혀를 내둘렀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잘 다녀와 아카아시~ 오래오래 전화하고 와~"
"나 없는 동안 내 몫에 손 대면 그 땐 보스고 뭐고 멱을 따버릴테니까."
"히익!"
"조심하세요, 보쿠토씨."

반 농담삼아 내뱉은 말에 진심으로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는 보쿠토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아카아시는 제 손아귀 안에서 펄떡이며 요동치는 휴대폰을 꾸욱 부여잡고 금박으로 번쩍이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밀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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