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또님 디자인입니다.




W. MELL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갓길에 멈춰 섰다. 한 쪽 머리칼이 잔뜩 뻗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차문을 열었다 닫았다. 쾅 소리 나는 굉음이 외진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굳은 남자의 낯빛은 피로로 도배되었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한 눈가는 퀭하니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지 않은 채 대문 앞을 서성거릴 뿐이었다. 좌우로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를 여러 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녹음된 음성만 반복해 듣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세게 혀를 찼다. 다짜고짜 철제 대문을 두드렸다. 손등이 까질 때까지 두드릴 걸 염려하고 있었는데, 철통같던 대문은 의외로 쉽게 길을 터주었다. 

“보쿠토 코타로!!”

씩씩 대는 걸음 속도에 맞춰 쿠로오가 언성을 높였다. 넓지 않은 마당을 가로질러 잠겨 있지도 않은 현관문 손잡이를 확 잡아 당겼다.

쿠로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워커홀릭(Work-a-holic)마냥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붙잡아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던 그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러브하우스를 버젓이 두고 제 집에 들러붙어 사는 보쿠토를 나무라던 것이 아니었다. 걱정 어린 마음으로 건네준 몇 마디가 도화선으로 작용해 서로의 감정이 상할 만큼 앞 다퉈 싸웠던 일을 이제와 지적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남 부럽지 않던 연애질에 주변에 깨까지 들들 볶던 약혼녀를 러브 하우스에서 내쫓아 버린 것 때문 또한 아니었다. 

종적을 감췄다. 무려 24시간 동안. 아무 연락도, 이렇다 할 통보조차 없이. 중요한 방송 녹화, 잡지 인터뷰, 시나리오 회의, 그리고 연기 트레이닝까지. 모든 스케줄에 무단으로 펑크를 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워커홀릭을 걱정하던 쿠로오의 근심을 싹 날려버린 것처럼 보쿠토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쿠로오가 하루씩이나 걸려 보쿠토를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펑크 난 스케줄 뒤처리 하랴, 제작진들과 스탭 진에게 사죄하랴, 소속사에 보고하랴, 다음 일정 조정하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보쿠토는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쿠로오의 속이 타들어갈 만도 했다. 

“너……!”

너 제정신이냐, 인마?! 외마디 고함을 치려던 쿠로오의 입이 일자로 닫혔다. 

그 곳은 난장판이었다. 활짝 열린 신발장에선 갖가지 신발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얼기설기 얽힌 운동화와 구두 사이로 진흙과 모래, 나뭇잎이 한데 뭉쳐 꼭 쓰레기 더미마냥 현관을 가득 채웠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액자들은 바닥에 나뒹굴어 모서리가 찌그러지거나 흉측하게 부서져 있기 일쑤였다. 흑백 사진, 유화, 포스터를 덮고 있던 유리는 엉망진창으로 깨져 사방팔방 튀어 있었고 관엽식물을 키워내고 있던 고급스런 화병들은 누가 의도적으로 던져 깨뜨려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 천하에 흙 뿌리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잎사귀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물든 화초가 종말을 고했다. 유리 파편과 흙무더기뿐일 줄 알았던 바닥엔 찢어발겨진 종잇장 또한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신문 헤드라인, 얼마 전 맡았던 배역 대본, 잡지 표지, 아끼던 책. 그 외에도 대각선으로 뜯겨져 나간 벽지나 산산조각 난 베란다 유리는 꼭 폐허를 방불케 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신발 벗기를 포기한 쿠로오가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섰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 바닥에 파편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잘근잘근. 퍼석퍼석. 길어봤자 꼬박 하루란 시간.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엇이 잘못되어 이 사단이 났는지. 무엇보다도, 쿠로오는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보쿠토?”

다행히 보쿠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다시피 멀쩡한 가구. 가죽 소파 위에 무릎을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안은 인영이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쿠토임을 확신한 쿠로오가 보폭을 보다 넓혔다. 길쭉한 다리가 성큼성큼 나아가 순식간에 보쿠토와의 거리를 좁혔다. 푹 꺼진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이름을 부르길 여러 번. 퀭하게 가라앉은 눈알, 움푹 들어간 볼, 생기 없이 반쯤 벌어진 입술, 거뭇거뭇 자라나기 시작한 수염 등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이 쿠로오를 향했다. 핏기 없는 안색이 꼭 죽은 생선을 떠올리게 했다. 순간 전신에 오한이 끼친 쿠로오가 손날을 들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만큼 그의 뺨을 두어 대 내리쳤다. 작지 않은 찰과음이 귓전을 휘갈겼다. 

“이 개자식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어? 너 왜 이래. 너 미쳤어? 죽으려고 아주 작정했어?!”

물끄러미 허공만 쳐다보던 동공이 차츰 요동쳤다. 한 때 보석같이 빛나던 금안은 난파선 마냥 심하게 흔들리다 겨우 초점을 잡았다. 

“내 전화 왜 안 받았어.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너 연락 씹지, 피디한텐 항의 전화 오지, 이사란 작자는 또!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하아, 일단 그건 됐고. 당장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너, 집 꼴이 왜 이래. 네 꼬락서니는 또 왜 이렇고!”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간 곳에 대한 측은지심은 잠시뿐이었다. 쿠로오가 잡고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던 보쿠토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없어.”

뭐? 대꾸할 새도 없이 호박 빛 눈알 안에 물기가 흥건하게 차올랐다. 

“케이지가…없어.”

쿠로오가 이마를 짚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나 싶었다.

“너 인마……. 없는 게 당연하잖아. 헤어졌으니까.”

“케이지가 없다고.”

“일단은 병원부터 가자. 지금 네 몸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 돼. 밀린 스케줄이고 뭐고 넌 컨디션 회복이 급선무야.”

“어디에도 없어.”

119 버튼을 꾹 누르려던 손가락이 정지했다. 자신의 뻗친 머리를 멋대로 쓸어 넘겼다. 일순 짜증이 치민 탓이었다. 

“번호……. 나 번호를 몰라. 케이지 번호를 몰라. 전화가 안 되면 문자라도, 라인이라도 남겨 두려 했는데. 케이지한테 연락할 방법을 모르겠어.”

“야.”

“짜증나서 폰을 집어 던졌는데……. 망가졌어. 다 망가졌더라고. 먹통이고 전원도 안 켜지고 말도 안 듣고.”

“보쿠토!!”

“있지, 케이지 번호 알아? 알고 있어? 나…나 알려 주라. 케이지 목소리가 듣고 싶어. 얼굴이 보고 싶어. 그냥, 그냥 보고 싶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액체들이 기어코 추락했다. 양동이 가득 채워져 있던 소금물이 순식간에 엎어진 것처럼. 분수처럼 쏟아진 눈물이 뺨을 흥건히 적셨다. 이렇게 약해 빠진 애가 아닌데. 남 앞에서 쉽게 눈물 보일 애가 아닌데. 상황의 심각성이 차츰차츰 실감나기 시작했다. 병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쿠로오는 한 쪽 무릎을 굽혔다.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주룩주룩 떨구고 있는 보쿠토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이 있었어.”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니었다. 낮게 깔려 속삭임에 가까운 어조는 크게 넘어진 아이의 깨진 무릎을 어루만지는 마냥 다정하고 또 섬세했다. 그것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숨죽여 울던 어깨는 달달 떨리고 울먹임이 그치질 않았다. 딸꾹질과 눈물과 콧물 같은 배설물을 온전히 토해내며 보쿠토는 띄엄띄엄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아카아시가 보고 싶어.

맹목적인 욕망에 휩쓸린 발길이 처음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카페였다. 아카아시가 일하던 카페이자, 우리가 처음 만난 카페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나치게 단순했던 거다. 그 곳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몇 달 전에 그만뒀는데요?”

모르는 직원이 있었다. 아카아시란 이름을 대니 영 모르는 눈치였다. 사장을 불렀다. 구면인 사람이었다. 겨우 한 번 본 내 얼굴을 기억할까 싶었는데 첫 눈에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뭐, 개인 사정이 있다며 급하게 관둔다 길래 잡진 않았는데. 그 쪽들하고 관련된 일인 줄 알았거든요.”

신경 써야 할 건 그녀 하나만이 아니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묘한 위화감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모자를 잊었고 선글라스를 잊었고 마스크를 잊었고 내가 ‘나’라는 걸 잊었다. 요컨대, 나는 이목의 중심이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만두지 말라고 붙잡는 거였는데. 그쪽들 때문에 우리 카페 간판 비주얼 하나 잃었잖아요.”

멍청했다. 내 위치와 입장이 어떠한지 머리로만 알고 있었나보다. 상기 시킨다고 노력한 사람은 쿠로오였고 상기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할 일을 잊고 해야 할 일을 잊고 오롯하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표 같은 눈알들이 뒤통수와 옆구리에 박혔다. 얼마 안 가 한 쪽 어깨에 무게감이 실렸다. 누군가 어깨를 살짝 건드린 탓이었다. 

“저기……. 보쿠토 코타로 맞나요?”

한 때나마 이런 순간을 바란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무리가 아는 척 인사를 건네고 이름과 환호성을 연발하는 순간. 그것 하나를 열망해 여기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용할 만한 것은 다 이용했다. 아카아시도 그 중 하나였다. 단순한 도구일 뿐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아카아시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야 약간의 불화가 있었을 뿐. 

“와~ 예전부터 팬이었어요!”

내가 행복을 만끽할 순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는 왜. 

“전철에서 우연히 보고 말았거든요. 보쿠토군이랑 아카아시군! 두 분의 연애가 너무너무 잘 어울려서 언제까지고 응원, 하고 싶었는데…….”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순히 나를 향한 호감을 표하던 여학생에게 왜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여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사방엔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의 호통을 쳤던 걸까? 아니면 쓸데없는 넋두리라도 털었던 걸까? 나 힘들다고, 괴롭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입 나불거리지 말라고. 애꿎은 사람만 탓했던 걸까? 

아니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화만 내다 끝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이마를 푹 조아렸던 것 같다.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도 그 누구도 내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 같다. 

“헤어진 거 아니에요. 잘못 나간 기사예요. 잠깐 싸웠는데, 케이지가 많이 화를 내서. 내가 많이 잘못한 거라서. 그게 오해되고 와전된 거란 말이에요. 우리 끝난 거 아니라고요. 아닌데. 아닌데……. 케이지를 못 찾겠어요. 우리 케이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나 걔한테 잘못했다 빌어야 해요. 싹싹 빌어야 해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시간이 없는데. 걔 찾아야 하는데. 많이 보고 싶은데. 못 해준 말이 너무 많은데…….”

자연스레 손을 마주 잡았다. 깍지를 꼈다. 묵직한 뒷목을 떨어뜨렸다. 깨물린 입술은 입안으로 사라지고 동그란 방울들이 툭툭 바닥을 때렸다. 

“케이지 보셨어요? 걔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무라도 좋으니까. 뭐든 좋으니까. 제발. 제발 좀 알려주세요.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다고요.” 

아카아시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웃는 얼굴, 미소 짓는 얼굴, 행복한 얼굴만 떠오르길 바랐는데. 정작 머리를 뒤덮는 건, 그가 우는 얼굴, 상처 받은 얼굴, 슬퍼하는 얼굴. 

‘나의 시대가 왔다, 라고 했죠. 그럼 그건 보쿠토씨의 시대인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살고 저는 제 시대를 살 거예요.’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사이였잖아요, 우리.’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싫으면 안 보고 불편하면 피해 다니고. 좋을 때는 저 좋을 대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 싫을 때는 멋대로 선 긋고.’

‘보쿠토씨.’

‘저랑 키스할래요?’

‘이제 와서 남자랑은 못 해먹겠단 개소리 지껄이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쿠토씨?’

‘밑 보일 거 없잖아요. 저는 곧 끝이고, 그 사람과는 백년해로할 사이잖아요. 마지막이라는데, 이런 것 하나 못 들어줘요? 아니야. 아니에요. 달라요. 들어주세요. 부탁이에요. 커플이다 뭐다 따라다니는 수식어구는 많았지만, 우리……. 그럴듯한 키스 한 번 못 해봤잖아요. 안 해봤잖아요.’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좋아해줄 필요도 없어요. 저는 그냥, 그냥…….’

수많은 목소리가 쓰나미처럼 지나갔다. 중구난방으로 뻗어 나간 줄 알았던 문장들은 일제히 단 하나의 결론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분명하게, 녀석의 진심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말했던가. 아카아시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 왔던가. 무엇을 근거 삼아 자신의 곁에 있으라 입방적으로 명령했던가. 

‘앞으로 고작 한 걸음이야. 그 쯤 남은 기분이 들어. 그걸 넘어서는 순간 ‘나의 시대가 왔다!’는 기분에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 알겠어? 완전히 연기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 배우란 직업에 내 평생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이용했다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고 치졸하다 해도 할 말이 없어. 나는 누구보다 주목 받고 싶었으니까. 허접했던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내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계약이 끝난 순간부터 우리는 결별했단 설정이야.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해관계나 각자의 사정이 안 맞아서 결국 헤어졌다는 거지.’

‘아마 그 이후에 지금처럼 우리가 서로 얼굴 맞대고 있을 일은……없지 않겠어?’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해.’

‘게이라고 낙인 찍혀서 여자들한테 바람 맞고 엉엉 울면서 우리 탓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간수 똑바로 해.’

‘내가 너를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너도 나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간단히 끝맺음 할 수 있는 거지.’

‘미쳤구나. 네가 돌았구나. 남의 책장을 허락도 없이 들추는 걸 모자라 다짜고짜 그…아 씨팔. 야. 너 진짜였냐? 진짜 뭐, 게이나 동성애자인 놈이었어?’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머리통부터가 글러 먹은 거였네. 친구로는 쥐뿔도 본 적 없으면서.’

‘소름끼쳐.’

진심도 아니었던 주제에. 돈 몇 푼으로 사람을 사들인 주제에.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고, 이용 가치에 의구심이 생기기 무섭게 냉큼 갖다 버린 주제에. 

하염없이 울기만을 반복했다. 제자리에 주저앉다 못해 무릎까지 꿇고 오열했다. 나아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목적을 위해 타인의 희생이든 뭐든 전부 감수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아카아시의 몸과 마음을 짓밟고 여기까지 왔다. 저질렀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던가. 철판 깔고 꿋꿋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던가. 이도저도 아닌 채 제자리에 머물며 이제와 과거의 잘잘못을 들추는 짓거리가 왜 이리 비참하던지. 

정신이 나간 채 집에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텅 빈 집엔 공허함이 감돌았다. 2층 어딘가엔 아직도 아카아시의 울음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내게 상처 받은 얼굴로, 그럼에도 나를 갈망하는 눈을 한 그가 아직도 집을 헤매는 것 같았다. 사키가 없어졌기 때문에 상실감이 드는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멍청한 나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흔적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다. 

멀끔한 집안을 둘러봤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집이었다. 이른바 허니문, 혹은 러브 하우스. 그 광경이 너무 완벽해 되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선반 위에 최근 날짜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몇 달 전 전국을 뒤흔든 지진의 후속 조치가 헤드라인 전반부를 독차지했다. 큰 기대를 바란 건 아니었다. 막상 내 얘기 하나, 내 힘들었던 고민 하나에 조차 관심 가지지 않는 종이 쪼가리에 허탈감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이야기가 아예 없진 않았다. 얄팍한 종잇장을 몇 개 넘기니 연예 부문에선 나와 아카아시의 이별에 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추측은 꼭 예의를 잘 갖춘 무례 같다는 게 글자에서부터 또렷이 드러났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들지도 않는 것들이 멋대로 펜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찢었다. 갈가리 찢어 주었다. 세로로 북북 찢고 나니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내 얼굴이 대문짝 만 하게 찍힌 사진도, 자신들 입맛대로 휘갈긴 활자도, 정성들여 돌보았던 화초들도, 좋은 집이라고 칭찬받던 벽지도, 액자도, 그림도, 가구도, 전부 찢어 주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엎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뒤따랐다. 엉망진창으로 난잡해진 주위를 둘러보니 돌덩이 같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웹 서핑을 해봤다. 손바닥 만 한 화면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내 이름, 혹은 아카아시의 이름을 눌러 봤다. 수많은 컨텐츠가 나왔다. 그 가상공간에선 욕과 칭찬과 스토킹과 험담이 함께 존재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모를 우리의 사진이, 우리의 순간이 꼴 사나운 가십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아카아시의 근황 같은 건 없었다. 정상적으로 찍힌 아카아시의 얼굴 또한 없었다. 뒷모습, 멀리서 훔치듯 찍은 옆얼굴, 어둑한 배경에 이목구비도 구분 안 가는 형상. 본인이 맞는지도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와중에 벌써부터 아카아시라 도장 찍는 사람들. 

중요한 건, 그 가십거리의 중심이 아카아시가 아닌 나였다는 것. 내가 아카아시를 이용했듯 사람들 역시 아카아시를 이용해 나를 능욕하기 바빴다는 것. 

차라리 잘 된 일일까. 

무감각한 얼굴로 조그만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다 갑작스레 화면이 바뀌었다. 모르는 번호일까 조마조마한 마음도, 아카아시일까 노심초사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쿠로오]

저 이름을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지겹게 봤는지. 짜증나서 끊었고, 꼴 보기 싫어 던졌고, 그 이름이 ‘아카아시’가 아닌 것에 어금니를 갈았다. 퍽 소리가 났다. 유일무이한 통신기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였다. 무엇 하나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싫어 세차게 발을 굴렸다. 발치에 멀쩡한 게 닿았다. 잡지였다. 내 낯짝을 그대로 표지에 쓴 화보집이었다. 언제 찍었는지도 기억 안 나는 그런 흔한 사진. 쉽게 찢기지도 않는 고급 재질 이길래 조금은 힘이 들었던 것 같다. 손에 힘을 주는 대로 종이가 갈라졌다. 그 경계선이 이마 한 가운데와 코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목을 잘라 버리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스스로를 욕보인 걸 뻔히 알면서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진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갈기갈기 찢어낸 조각들은 삽시간에 흩어졌다. 사정없이 찢어낸 것들이라 크기도, 모양도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그 중 두 번째로 컸던 조각이 발등 위에 사뿐하게 앉았다. 짜증이 역류하는 건 잠시뿐.

‘또 몰라? 오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가 언제쯤 오겠어.’

‘감독님~ 제가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포즈가 잘 안 잡히네요.’

‘이 친구랑 몇 컷 찍어 봐도 될까요?’

분명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 중 하나였다. 렌즈 앞에서의 어정쩡한 포즈나 몸 앞에 곱게 모은 손가락들이 아카아시임을 여실히 밝혔다. 그것이 아카아시임을 확인하기 무섭게 눈알이 돌아갔다. 얼굴 조각을 찾기 위해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때만큼은 아카아시를 화보집에 넣지 말라던 쿠로오의 간절한 부탁을 멋대로 거절해버린 사진사에게 감사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조각 맞추기에 여념한 지 한참. 가까스로 끼워 맞춘 아카아시의 얼굴은 만신창이였다. 하필이면 잘게 찢어진 곳이 이목구비여서. 하필이면 머쓱하게, 혹은 어색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서.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유일한 조각들을 조심히 끌어 모았다. 한참 동안을 숨죽여 울었다. 애 닳는 조각들을 꽉 틀어쥐자 그것들은 오히려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손 안에 남은 것은 몇 톨의 부스러기뿐이었다.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NTR 주의 




W. 멜




안개꽃이 수놓아진 플레이트 위엔 먹음직한 스콘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홍차에 곁들여 먹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은 식고 바삭하던 표면은 바짝 말라 있다. 어느 누구도 선뜻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코타로는 저를 사랑하니까요.”


묘한 패배감이 아카아시를 뒤흔든다. 사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카아시는 조용히 주먹을 틀어쥔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사키는 깜박 잊었다는 듯 양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마주친다. 살얼음판 같던 묘한 분위기가 박수 소리 한 번에 쩌적 갈라진다. 날 선 목소리로 진실을 꿰뚫던 서늘한 낯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특유의 상냥한 어조가 나긋나긋 흘러나온다. 


“기왕 여기까지 발걸음 해주셨는데 밥 한 끼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선호하는 음식 있으신가요? 아님, 가리거나 못 드시는 음식이 있다면 참고해서 준비해 볼게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다 식은 티 팟과 찻잔을 정리하며 일어선 사키는 눈이 아닌 입으로만 웃음기를 머금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릴까. 그녀의 행동거지를 경계하듯 아카아시는 쉬이 응하지 않는다. 아카아시 앞에 놓인 찻잔이 치워진다. 그 짧은 순간 아카아시의 안색을 가까이서 살핀 사키는 묘한 눈웃음만 흘린다. 


“불고기!! 불고기 하자!”


닫혀져 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리며 우람한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 건 바로 그 때다.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보쿠토는 아주 신바람이 났는지 안방에서 부엌으로 껑충껑충 뛰어온다. 막 앞치마를 두르려던 사키는 등을 짓누르는 익숙한 무게감에 어쩔 수 없단 얼굴로 활짝 웃는다. 


“고기는 어제도 먹었잖아?”


사키의 불평에도 아랑곳 않고 막무가내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보쿠토는 때 아닌 어리광을 부리며 그녀의 고운 어깨선에 코를 묻는다. 


“어제는 바베큐였잖아. 오늘은 뭔가……. 뭔가 그래! 소고기가 먹고 싶어. 먹자, 먹자. 응?”

“음……. 상관없긴 한데, 당장은 재료가 없거든. 나가서 사와야 하는데 기다릴 수 있겠어?”

“당연하지. 아카아시 너도 괜찮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말고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카아시의 척추가 보쿠토의 부름과 함께 뻣뻣하게 굳는다. 저를 돌아본 두 쌍의 눈동자에게 주목받자 상대적 박탈감까지 들고 만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백짓장이 된 사이 그의 입은 멋대로 움직인다. 


“……네. 맛있겠네요.”


망할. 


“좋-아! 결정!”


활짝 휘어진 눈꼬리는 처음엔 아카아시를 향했지만 이내 제 연인에게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한껏 안은 등이 퍽 듬직하다. 제게서 등진 뒷모습에 아카아시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달콤함은 멈추지 않는다. 


“어쭈. 슬금슬금 손이 어디로 올라가실까, 우리 왕자님?”

“으응. 조금만~”

“아카아시군이 다 보잖아. 저리 가 있어요.”

“장보러 나갈 거라며. 나는 같이 못 가니까…….”

“금방 갔다 올게. 아카아시군이랑 집 잘 보고 있어요.” 


다정한 신혼 부부. 핑크빛으로 둘러싸인 한 폭의 그림에 먹물 한 줌이 튀어 있다. 꼭 아카아시 자신이 먹물의 역할을 자처한 것 같아 홀로 가슴을 부여잡는다. 외출 준비 삼아 외투를 챙겨 입는 사키의 그림자를 보쿠토가 졸졸 뒤쫓는다. 그의 걸음이 하나둘 제게서 멀어질수록 아카아시는 속으로 헤아려본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겨우 여섯 걸음. 보쿠토는 발을 멈춘다. 쪽, 꿈에서 들어 본 듯한 입맞춤 소리가 메아리처럼 아득히 울린다. 마주 안은 포옹이 일류 로맨스의 해피 엔딩 같다. 


좋아하지 않는다. 보쿠토의 마지막 발걸음이 말한 결말. 신빙성 제로의 점괘는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그를 끊임없이 다그치고 채찍질한다. 


아카아시는 픽 웃고 만다. 잘 다녀오라 손짓하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좋아하고 말고가 마음먹기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다면. 칼로 그어 버리듯 감정을 잘라낼 수 있다면. 


“집 구경 좀 할게요.”


진즉에 그를 포기할 수 있었으리라. 


어? 되묻는 보쿠토를 뒤로하고 걷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단 둘이 살기엔 과하게 큰 집. 재벌 3세들이 별장으로 삼을 법한, 고급 맨션이나 펜트 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단독 주택은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엔 탁 트인 거실과 흰색을 모티브로 한 새하얀 부엌, 풍채 좋은 안방을 비롯한 개방적인 공간. 서적으로 수두룩한 서재와 각종 옷감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드레스 룸, 바비큐가 가능한 드넓은 발코니를 배경 삼은 2층. 뻥 뚫린 옥상 아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 쬐는 조그만 옥탑 공간. 


깔끔한 인테리어. 부와 멋을 갖춘 거주 공간. 사실 그런 것 따윈 눈에 차지 않았다. 그에겐 구실이 필요했다. 보쿠토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될 구실. 그래서 도망쳤다. 숨을 곳이 필요했고 숨 쉴 곳이 필요했다. 


“윽.”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더니 알싸한 통증이 그의 어깨를 덮친다. 코너 모서리에 세게 부딪힌 탓이다. 어찌나 아팠는지 눈가엔 저절로 눈물이 핑 돈다. 알싸한 통증으로 부풀어 오른 어깨를 감싸곤 주위를 둘러본다. 부의 규모부터 전혀 다른 공기에 박탈감이 차오른다. 좁고 어두운 반지하방, 쾨쾨한 곰팡이 냄새, 벽지를 장식하는 눅눅한 물 자국. 


무엇이 잘못 됐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순간이나마 그와 행복해지려 한 자신이. 그도 저와 같은 감정일 거라 착각한 자신이. 저와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제 눈높이를 맞춰주길 바란 자신이. 아카아시는 너무나 후회로웠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부딪힌 어깨를 움켜쥐던 아카아시가 끝끝내 무릎을 구부린다. 뻥 뚫린 가슴을 힘껏 부여잡는다.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 * *



한 편, 사키를 마중 보낸 보쿠토는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곁에 있고 싶어도 곁을 지킬 수 없는. 이런 결말을 자처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건만 막상 사키를 홀로 내보내니 서글픈 마음을 좀처럼 털어낼 수 없다. 


그는 지금도 종종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속으로 스스로를 깊숙이 가라앉히곤 한다. 과연 이게 잘한 일일까. 배우란 직업을 업으로 삼는 것이나, 스스로의 유명세를 위해 타인을 좋을 대로 이용한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버젓이 두고 가짜를 세워둔 것이나. 


새벽달이 기울어지는 밤이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악몽을 꾼 직후 얄팍한 잠에서 깨어나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침구를 한쪽으로 치웠다. 지친 손바닥은 얼굴을 가리고 약해진 등은 잘게 떨렸다. 그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준 사키는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등을 쓸어내렸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소리 없이 울던 그가 마침내 혼잣말로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욕심이 많으니까. 행복해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다 이루고 싶은 게 뭐가 나빠. 대체 어디가 나쁜 건데.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어. 해야 해. 할 수 있어.  


스스로와 담판을 내릴 때까지 말이다. 


이렇듯 속죄의 밤이 지나고 나면 보쿠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죄책감을 용기로 무장하고 미안함을 웃음으로 가렸다. 


“집 구경 좀 할게요.”


현관문이 다 닫히기도 전. 등 뒤론 낯익은 목소리가 울린다. 어? 되묻는 질문은 홀로 웅웅거린다. 계단을 타고 오르는 소리만이 아득하다. 보쿠토는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춘다. 신발이 즐비한 현관을 손수 정리해 본다. 아끼는 에어 조던 시리즈나, 톰 포드제 가죽 구두나.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켤레는 거뜬히 들어갈 신발장 어딘가에 처넣어 두고 보니 마지막 신발이 현관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다. 


“……아카아시 것.”


때가 잔뜩 묻은 앞코. 너덜너덜한 운동화 끈. 구겨 신느라 헤진 운동화의 뒤축. 브랜드도 이름도 없는 그 낡은 운동화에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인지. 구석에 처박혀 하나는 온전히, 다른 하나는 옆으로 엎어진 그것을 보쿠토는 가지런히 정돈해 둔다. 자신과 전혀 다르게 살아온 그 뿌리 깊은 생명력에 감탄이 나오고 만다. 곰곰이 되짚어 본다. 첫 인상은 어땠더라. 


“말 수도 없고 무뚝뚝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애.”


아카아시가 저를 기억하기 이전, 보쿠토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유독 겨울바람이 시렸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근처에 촬영 스케줄이 있던 보쿠토는 감독과 스테프들 몫의 커피 심부름을 받았었고 마침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려 했을 뿐이었다. 카페 바로 옆,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길에서부터 들려오는 공방 소리만 아니었어도. 작지 않은 언성의 높낮이를 따라 언뜻 고개만 내비쳤을 때 그 좁은 길모퉁이엔 세 명의 사람이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고 있는 중년 여성. 다른 하나는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대여섯 살의 남자 아이. 나머지 하나가 아카아시였다. 여자를 노려보다시피 인상을 쓰고 있던 아카아시의 품에는 언뜻 보아도 크게 다친 새끼 고양이가 안겨져 있었다. 상황은 알 만 했다. 끼어들었나 보네, 보쿠토는 짧게 혀를 차곤 눈을 돌리려 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박의 외침이 들린 건 바로 그 때였다. 아카아시가 그녀를 상대로 뭐라 대꾸 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날 선 그의 몇 마디가 상황을 타개한 것은 확실했고 여자는 충격을 먹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으며 어느 새 불길이 일은 세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그 사이에 끼어 든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경찰 이야기가 오고 가며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 될 수 있었지만, 아카아시가 그를 기억 하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유니폼인 베레모와 앞치마를 벗어 던진 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곧장 동물병원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볼 기미조차 없이 멀어져 가는 택시 번호판을 보며 보쿠토는 막연히 생각했다.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고. 


그 직후 부터였다. 아카아시가 근무하는 카페를 보쿠토가 단골로 점찍은 것은. 그가 근무하는 시간을 다이어리 한 켠에 메모해둔 채 밤새 대본 연습을 할 때면 아카아시의 얼굴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눈앞의 불의를 피하지 않을뿐더러 당차게 할 말을 하던 그 옆모습이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였을까. 호기심이 호감이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명이 아카아시 케이지(赤葦 京治) 라는 것도.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도. 저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무시하지 않고 하나하나 답해주는 것도. 의외로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것도. 다소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 밑엔 저만의 신념이 있다는 것도. 제 잘못은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고집도, 자존심도 만만치 않은 것도. 보면 볼수록, 훤칠한 외모란 것도. 


시간이 날 때마다 카페를 찾았다. 사사건건 말을 걸거나 사고를 치거나 쓸데없는 걸 트집 잡아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다 위장 연애라는 일석이조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나는 보쿠토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 다른 하나는 아카아시의 자금적 지원을 위한 핑계. 이번 기회에 짧게나마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졌던 보쿠토는.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아카아시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제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보다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동그래진 눈을 하며 깜짝 놀라는 얼굴. 당황할 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버릇. 하나부터 열까지 닮은꼴이라곤 전혀 없는 취향. 입만 열었다 하면 높아지는 언성. 도통 맞물리질 않는 아귀. 


그런 아카아시를 상대로 두 달이 가당키나 할까란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차라리 목석을 끌어안곤 사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며 기자회견을 여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이래 갖곤 친구는커녕 계약 이후 언짢은 감정만 남겠다 싶었던 그가 언제부터 아카아시를 다시 살펴보게 됐는지. 


스캔들이 대박을 터뜨리고, 세간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실감하는 와중. 엉망진창이었던 첫 데이트를 기억한다. 데이트라기 보단 대외 홍보용 이미지 관리였지만, 보쿠토는 그마저 즐거웠다. 친구와 놀러 나온 기분이 딱 이런 걸까 싶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케이지라 꼬박꼬박 불러주며 ‘함께’가 당연한 것처럼. 


관람 차에 탔을 때만큼 의외의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을까. 저에겐 당연했던 것들이 아카아시에겐 전혀 당연치 않았을 때. 그 괴리감이 꽤 깊다는 걸 알았을 때.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앞에서 처음으로,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당황하며 난색을 표하던 아카아시 특유의 표정은 이후에도 종종 보쿠토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보쿠토 자신과 영화의 흥행을 기념하던 회식 자리. 제 3자에게 성적 희롱을 당하는 아카아시를 가만 두고 보지 못한 것도. 홧김에 으름장을 놓으며 칼날을 세운 것도. 사실은 곤혹스러워 하는 그의 표정이 짜증나게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스케줄이 빡빡해 며칠 간 보지 못했던 사키의 얼굴을 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던 불쾌감은 눈 녹듯 사라졌고 사랑이라 이름 붙인 감정만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아카아시가 제게서 등진 것도 몰랐고 푹 가라앉은 어깨는 보지도 못했으며 탄식 섞인 한숨이나 희미한 눈물 냄새마저, 보쿠토는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집 구경한다더니만…….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보쿠토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계단의 철제 난간엔 드문드문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키와 함께하며 행복했던 시간들이 네모난 틀 안에 박제 되어 있다. 그것들을 흐뭇한 눈으로 만지작대던 보쿠토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 같은 것에 귀를 세우게 된다. 삽시간에 안색이 굳어지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진다. 


“케이지?”


막상 2층에 다다르고 나니 흐느낌은 뚝 멎어 있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불안한 마음이 심장을 쿵쿵거리게끔 한다. 복도식으로 늘어선 방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본다. 찾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곳이라곤 창고로 사용하고 있던 서재 하나.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고동색의 고급스런 문짝을 열고 보니 보쿠토는 해야 할 말 따윈 새까맣게 잊고 만다. 오래된 책 냄새로 그득한 서재 한 가운데, 책장을 팔랑이고 있는 아카아시의 옆모습에 넋을 놓고 만다.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첫 만남 때처럼. 그 날렵하면서도 수려한 턱 선과 콧대를 멍하니 쳐다보다, 가슴이 뻐근해진다.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조금 전 들었던 흐느낌은 환청이었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 밑이 약간 붉어져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한 감각이 가슴을 꾹 짓누른 탓이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가슴께를 힘껏 부여잡으려 하는 순간, 아카아시가 자신을 돌아본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뿌연 먼지가 햇볕을 받으며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햇빛을 등진 실루엣이 묘하게 빛난다. 한 쌍의 에메랄드가 태양빛을 외면하고 있었다. 


“보쿠토씨.”


얼빠진 정신은 제 이름을 듣고서야 뒤늦게 제자리를 찾는다. 아카아시는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여기에 케이지가 읽을 만 한 책이 있던가, 있는 머리 없는 머리 싸매고 굴리던 보쿠토는 다음과 같은 아카아시의 대답에 다시 한 번 넋을 놓고 만다. 


“저랑 키스할래요?”


뭐? 제 귀가 잘못 됐나 되묻기도 전, 아카아시는 쐐기 박듯 그의 말을 가로막는다. 


“차라리 섹스는 어때요?”


아카아시는 어느 앨범을 들춰 보고 있었다. 


“우리들, 일단은 사귀는 사이잖아요. 섹스는커녕 키스 한 번 못 해본 사이란 게 우습지 않아요? 기왕에 하기로 마음먹은 거. 작정하고 제대로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남자 상대 괜찮죠? 나한테 사귀자고 꼬드긴 것도, 꼬박꼬박 이름으로 불러 준 것도,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만든 것도, 전부 당신이었으니까.”


검은 색 턱시도와 흰 색 나비넥타이. 앨범 낱장 하나하나를 빼곡하게 채운 하이얀 드레스. 민트빛 바다와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이 행복한 얼굴로 정지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남자랑은 못 해먹겠단 개소리 지껄이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쿠토씨?”


그것은, 보쿠토와 사키의 웨딩 앨범이었다.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짧은 신호음 뒤로 조명이 번쩍인다. 새하얀 배경지를 두 개의 인공조명이 에워싸고 있다. 중앙엔 오늘의 주인공이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컷, 컷. 잠시만요.”


셔터를 누르고 있어야할 사진사는 손사래를 친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반사판을 들고 있던 보조 스텝이 멀어진다.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보쿠토군, 표정은 좋은데. 표정은 정말 좋은데. 포즈를 좀 어떻게…….”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인다. 쩍 벌려 앉은 다리 간격을 좁히고 슈퍼맨마냥 뻗은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역시 이게 좋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화보 촬영이었다. 나날이 눈덩이처럼 부풀어가는 인기에 발맞춰 유명 잡지사의 표지 모델 제안이 들어온 탓이었다. 바로 몇 주 전 같았으면 텅텅 빈 스케줄 표만 노려보다 시간 때우기로 영화만 돌려보거나 숙소에서 빈둥거렸을 그는 하루가멀다하고 쏟아지는 스케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엄연히 잡지 간판인데.”


보쿠토의 슈퍼맨 포즈를 영 탐탁지 않아 하던 사진사 대신 아카아시가 말을 잇는다. 사진사가 다른 결과물을 보러 모니터 쪽으로 스텝 몇몇을 불러 모으는 사이, 아카아시는 물병과 마른 수건을 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를 뒤따른 여성 두 명의 손엔 꽤 큼직한 메이크업 박스가 들려 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번듯한 코디네이터 하나 없던 보쿠토였건만 이제는 쉬는 시간마다 코디와 옷매무새를 갖춰주는 전용 스텝진이 있었다. 땀방울 맺힌 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기름종이. 지워진 메이크업 위로 보송보송한 파우더가 내려앉는다. 촬영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의 모공을 가득 채운 땀방울은 조명의 열기를 실감케 한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탁한 먼지 냄새와 피부에 직격탄으로 쏟아지는 인공 불빛, 분주하게 오고가는 수많은 걸음걸이. 혼자만이 그 분위기에서 동 떨어진 듯 아카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왜?”


그의 말동무가 되는 것뿐이었다.  


“보기 그렇잖아요.”


수건을 받아 든 보쿠토가 눈살을 찌푸린다.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어디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데?!”


플라스틱 물통을 마저 건네려던 손이 잠시 머뭇거린다. 수건을 건네다 손톱이 스친 탓이었다. 짧게 닿은 피부 결에서 열이 끓어오른다. 물통의 주둥이 부근으로 손아귀를 옮기고 시선을 바닥에 깐다. 물통의 무게감이 일순 사라진다. 애꿎은 입술만 깨문다. 


“……보통 패션 잡지 하면, 그런 요란한 포즈보단 우아하고 정적인 포즈를 선호하잖아요.”


표정 관리가 안 된다는 표현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도통 얌전히 있지 않는 눈알이 옆으로 구른다. 열이 오른 뒷목을 감싸고 눈 맞춤을 피한다. 


“그런가?”


최근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조차 자각하기 어려웠다. 눈을 뜨면 보쿠토에게 끌려 다녔고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까지 보쿠토가 웃고 있었다. 함께, 란 단어가 너무 당연해서 그랬을까. 가짜의 거죽을 썼다한들 이것이 ‘연애’란 사실에 자만해 있었던 걸까. 보쿠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다른 사람일 수 없다며 오만을 부렸던 걸까. 아님, 이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나도 사랑해.’


보쿠토가 말하는 사랑이란 의외로 달콤했다. 부풀은 풍선이 사랑스러운 온기를 함박 머금고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옆얼굴이 꼭 모르는 사람의 것 같아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홀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걸 뼈저리게 자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다.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도 아니었고 오래도록 만난 사이도 아니었다. 개월 수를 세는 것조차 부끄러운, 짧은 시간. 


“그럼 케이지 너가 해볼래?”


보쿠토 코타로란 이름이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스며든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 아뇨. 저는 그냥 조언 삼아 한 말이고 굳이 저를-”

“괜찮다니까~ ”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만류하며 뒷걸음질을 치려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채 제 옆으로 끌고 온다. 메이크업 마무리 단계를 거치자 스텝진이 멀어진다. 멀리서 준비 다 됐냐는 메인 디렉터의 메아리가 울린다. 화들짝 놀란 아카아시가 붙들린 손목을 떨치려 하지만 보쿠토의 악력이란 그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 몰라? 오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가 언제쯤 오겠어.”


제 옆으로 아카아시를 바짝 붙인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귀에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인다. 쟨 누구야. 디렉터의 수군거림엔 날이 서있다.


“감독님~ 제가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포즈가 잘 안 잡히네요.”


옷깃을 잡아 끄는 손가락이 간절하다. 그러나 제발이란 바람이 보쿠토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다. 


“이 친구랑 몇 컷 찍어 봐도 될까요?”


아카아시는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타들어갈 듯 양 옆에서 쏟아져 나오는 태양빛이 눈부시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광량에 손바닥을 들어 시야를 가려내자 두 인공 태양 사이로 거뭇한 인영들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디렉터의 불만스런 태도로 인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개중엔 한쪽으로 비스듬히 뻗쳐오른 머리털도 있었다. 보쿠토의 막무가내 성질을 모를 리 없는 쿠로오가 디렉터에게 양해를 구하려던 참이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 사이의 관계성이라던가, 이번 한 번만 봐달라던가, 대신 B컷으로 해 화보집엔 싣지 말아 달라 던가 등의 여러 말들이 오갔으리라.


그 짧지만 짧지 않은 찰나. 아카아시는 조금 전 쿠로오와 나누었던 대화의 서두를 떠올렸다. 


‘보쿠토씨 말입니다.’


한창 촬영 준비로 목청이 터지고 동분서주로 바쁜 현장 분위기 속, 조곤조곤한 목소리 톤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쿠로오와 아카아시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한 팔로 다른 팔을 감싸며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왜. 분주히 코디를 받고 있던 보쿠토를 한 발 자국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쿠로오는 건조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반면 아카아시는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입안은 바짝바짝 마르고 쓸데없는 헛기침만 튀어 나왔으며 정작 꺼내고 싶은 말은 목구멍 아래에서 윙윙 돌았다.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나 해서요.’


결국은 뱉었다. 확인 사살이었을까.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을 남에게 다시 한 번 묻고 말았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만의 하나, 천만의 하나라는 가정은 쉽게 무너졌다. 마저 말을 이으려던 쿠로오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곤 자리를 옮기잔 제스처를 취했다. 사람 없는 텅 빈 휴게실, 쿠로오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사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부터 열애 중이었어, 저 녀석.’


정해진 답을 들었을 때의 상실감. 차마 배신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었다. 신뢰를 밑바탕 삼았을 때 되돌아올지 모르는 가능성이 배신 아니던가. 손깍지를 쥐고 있던 손가락들이 미미하게 떨렸다.   


‘근데 그런 것치곤 꽤 오래 됐다? 4년이 넘었는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 못 죽어 안달이야, 글쎄.’


4년. 그 현실성 없는 숫자에 심장이 침몰했다.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이 짧은 연애 햇수를 뜻하길 바란 적이 있었다. 흔해 빠진 격언처럼,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란 법은 없었으니까. 


‘뭐, 한 편으론 흐트러짐 하나 없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대단한 것 같기도 해. 그 녀석, 배우 마음먹기 전부터 만난 사이라던데 나 같으면 으레 헤어졌지. 하물며 애인이 배우 같은 한 사람 몫 밥 벌이도 하기 힘든 일 한다 하면 처음엔 열심히 응원해 줄지언정 얼마 못 가 한 쪽이 지쳐 떨어진다던데. 그 둘은 그런 기색도 전혀 안 보였다 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은 성공했잖아? 소위 ‘천생 연분’이라 불리는 족속들이다 이거지. 나 같으면 도저히 무리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큰거리던 눈시울이 부끄러웠다. 울고 싶다는 일방적인 욕구 그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럴 자격 따윈 없고 앞으로도 결코 주어지지 않을 텐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친구도 참 대 인배야. 계약 연애? 보통 사람이 그딴 걸 허락할 리가 없잖냐.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애인이 게이 스캔들에 휘말릴 거라는데도. 선뜻 괜찮다 하는 건 물론 그 대가로 스케줄 없을 때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숙소 하나 내달라 하는 게 전부니. 속이 깊은 건지, 그냥 보쿠토 바보인 건지. 그냥 끼리끼리 잘 만났네 싶다, 나는.’

‘…….’

‘말이 좀 많았네. 근데 그건 왜?’  


쿠로오는 의아한 얼굴로 턱을 갸웃거렸다. 곧장 뻔한 말이 돌아왔다. 


‘별로…….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 일 아니니까.’


아카아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어서. 누구를 위해.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입단속 철저히 할 것. 계약을 비롯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 보고 들었던 모든 걸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 


비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쿠로오는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을까. 보쿠토와 자신이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서로를 좋을 대로 이용해 먹는 관계라는 것? 보쿠토에겐 번듯한 이성 애인이 따로 있었다는 것? 


‘이 시점에서 발각됐다간 너나 나나 보쿠토나 전부 끝장나니까.’


오케이 사인은 금방 난다. 디렉터는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사진사의 입장에선 뻣뻣한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좋은 찬스였기 때문이다. 신이 난 보쿠토가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후 아카아시 옆으로 바짝 붙어 선다. 


“뭐가 좋겠어? 어깨동무? 포옹? 아님 안고 빙글빙글 돌아볼까?”


입안이 까끌 거린다. 찰싹 달라붙은 팔뚝 언저리에서 열기가 끓어오른다. 따뜻한 체온. 사람의 평균 체온이 36.5도라면 이 사람의 체온은 37도쯤 되는 거 아닐까. 아카아시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척추를 올곧게 세운다. 그걸 걱정의 낌새로 파악한 보쿠토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고개를 들이밀며 말이다. 


“너무 걱정 마. 케이지 정도는 가뿐히 들 수 있으니까.”


환한 전깃불 아래 춤추듯 서로를 얼싸안던 한 쌍의 인영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간다. 선악과. 즉, 금단의 열매. 그 달콤한 속삭임이 가라앉은 마음을 뒤흔든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모른 척 했더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가져 오는 결말조차도 같은 도착지를 말한다. 사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이 있었다. 


“표정 풀어.”


큰 손이 뒤통수를 감싼다. 뻗친 뒷머리를 마구 헤집는다. 활짝 웃는 옆얼굴이 조명을 받고 빛을 발한다. 보쿠토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플래시가 번쩍인다. 꽁꽁 얼어붙었던 눈매가 한결 누그러진다. 


차분해졌다, 도 아니고 침착해졌다, 도 아니었다. 다만 착잡했다. 표정을 풀라고 말한 장본인인 주제에 표정이 제일 굳어 있다. 그냥 알 수 있다. 동그랗게 뜬 금안에 생기가 없고 눈꺼풀 가장자리가 미미하게 떨린다. 왜 이제야 알아챘나 싶을 만큼 뻣뻣한 웃음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사람도 긴장하고 있구나. 편안하지 않구나.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구나. 거기까지 생각의 타래가 퍼져나가자 남는 건 거의 없다. 그저, 사랑스런 연인을 품에 안아들던 보쿠토의 순수한 웃음이 지금의 가식과 비교될 뿐이다. 


“둘 다 왜 그리 딱딱해.”


의미심장한 눈초리가 두 사람을 향한다. 


“듣자하니 니들 이 바닥에서 유명하던데. 좀 더 평소답게 굴어 봐. 렌즈 의식하지 말고. 차라리 카메라 없다고 생각해.”


보쿠토는 멋쩍게 웃고 아카아시는 한 걸음 떨어진다. 머리카락에 닿아있던 다부진 손가락은 멀어지고 텁텁한 공기는 이상한 간격을 만든다. 보쿠토는 양 손으로 제 양 뺨을 짝 소리 나게 내친다. 주저할 틈 없이 뺨은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위협적인 소음에 놀란 아카아시가 흠칫하는 것도 잠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돌아온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다시 한 번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어디서 배워먹은 사려인지. 저로 인해 아카아시가 불편할 거란 생각이 어디서 샘솟았는지. 불편하지 않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시켰는지.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건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배후로 돌아간다. 양 팔로 아카아시의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따뜻한 숨이 드러난 목덜미와 귓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바짝 곤두선 귓바퀴 위로 나직한 숨소리가 들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쿠토의 것이기에 아카아시는 훅하고 호흡을 들이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지한다. 괜찮아. 다독이는 속삭임이 뱀의 유혹처럼 홧홧하다. 덩달아 귓전이 뜨겁다. 팔뚝을 타고 내려간 보쿠토가 파르르 떨고 있는 아카아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겹쳐 잡는다.짤막한 머리칼 사이로 콧날을 파묻어 체취를 들이마신다. 


“정면을 보지 않아도 돼. 옆을 봐. 비스듬하게 아래를. 그렇지.”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이렇게 가까워 본 적이 없다. 곧이어 온갖 끔찍한 사고들이 머리를 뒤덮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았던가. 바디 워시는 뭘 썼지. 손톱 관리는 했던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왔지. 세수하고 거울은 봤나. 눈곱이나 뾰루지의 존재 유무를 확인 했어야 했는데. 


그러다 손발에 힘이 빠진다.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첫사랑에 빠진 중학생도 아니고 사랑으로 가슴 부푼 고등학생도 아니었건만. 그는 최소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싶었다. 머리와 마음이 한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좋아하면 안 된다는 이성의 지시를 따라 마음이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자로 긋 듯 마음이 멈춰 섰으면 좋겠다고.


“지금 딱 보기 좋아요~”


다시금 플래시가 터진다. 살짝 구겨진 얼굴로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감춘다. 이 순간이 영겁이 되기만을 바란다.



* * *



손아귀에 얼음을 쥐었을 때. 제일 처음 느껴지는 건 통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즉, 얼음을 만진다고 곧장 상쾌하고 시원하며 추워지진 않는다. 오히려 그들보다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건 바로 통각이다. 피부가 벗겨지고 벌겋게 부풀며 개중 예민한 것은 무르다 못해 살갗이 허옇게 바스라진다. 우스운 것은 그 다음이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아픔이 지나치면 다음 차례엔 시원함이 찾아온다. 상쾌함이 찾아온다. 결코 통증을 잊은 것이 아니다. 피부는 물렀고 아픔은 여전하다. 다만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이란 생경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고 아득해진다. 비로소 아픔에 익숙해진 것이다. 고통은 첫 번째뿐. 두 번째, 세 번째, 혹 그 이후는 최초의 것처럼 오롯하게 통증을 호소하진 않는다. 


보쿠토 코타로의 연인, 아리노 사키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아카아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리노 사키예요.”


다정한 사람. 물결치는 웨이브 진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와 커피 잔을 내려놓는 우아한 손짓에선 기품이 흘러넘친다. 머리카락 색을 쏙 빼닮은 고동색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길게 늘어져 그늘을 드리우고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는 눈매에선 상냥함이 뚝뚝 떨어진다. 


“홍차는 내키지 않으신가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있어야 할 빈 옆자리를 흘겨보며 의구심을 피워낸다. 


“아, 아니요. 약간 긴장이 돼서요. 오늘은 따로 스케줄이 없다 들었는데 보쿠토씨가 다짜고짜 데리고 온 곳이…….”


객관적으로 보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제 시간과 노력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에게 가짜 애인 행세하는 것을 허용케 하며 


“후후. 제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코타로한테 부탁해서요.”


이제 와 그 당사자를 만나본다? 대 인배? 말도 안 된다. 따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결국 그럴 듯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리라. 애초에 그런 얄팍한 감정 하나에 몸과 마음 다 바치려는 바보가 요즘 세상 어디에 있나. 무엇보다 보쿠토와 있을 때의 얼굴, 저와 있을 때의 얼굴이 극명히 다르다.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가름 할 줄 알아야 했다. 


“아카아시군은 의외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인가 봐요. 의심하려 들어 봤자 소용없는데.”


머그 잔 손잡이 부근을 매만지던 손톱이 움찔거린다. 김이 피어오르는 붉은 색 액체 위로 사뭇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비친다. 생긋 웃는 그녀의 실루엣 뒤로 다소 평범한 주거 공간이 펼쳐져 있다. 탁 트인 거실 너머로 햇살이 비쳐 오는 베란다, 와인색 카펫과 집안 곳곳을 장식하는 두 사람의 사진들, 냉장고 앞에 붙어진 서툰 글씨들과 ‘함께’란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2인용 생활 용품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카아시의 이목을 끌었던.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포스터 이미지. 렌즈를 향해 선명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예비 신혼부부를 방불케 했다.   


“……무슨 얘길 듣고 싶으신 건가요.”


찻잔을 감싸 안은 손가락이 곱다. 왼손 약지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칠흑같은 구덩이 속을 재차 확인한 기분이다. 


“아뇨, 뭐……. 특별한 이윤 없고. 그냥, 제 역할을 맡는 사람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보아 하니 침착하고 차분하고 위기 상황도 나름대로 잘 대처할 것 같고.”


맹목적인 사랑이란 게, 정말 가능한 걸까. 진실을 놓치고 있는 아둔한 자는 오히려 자신이었나. 


“솔직히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 겉보기와 달리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애가 워낙 외로움을 잘 타서 말이야.’


묘하게 익숙한 문장. 첫 대면에 곧장 보쿠토와 비슷한 이미지일 거라 여겼다. 그 만큼 밝고 건강한 사람이란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엇비슷한 눈짓,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어투,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먼발치에 어필하기까지. 


“테츠로한테만 맡기기에는 어딘가 불안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니 오히려 안심이 됐어요.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들을 만 한 입장이던가. 기계적으로 움직인 팔다리가 찻잔을 들어 입에 들이 붓는다. 화끈한 기운이 입천장을 덮치고 혀를 덥힌다. 모래알 굴러다니듯 혀가 까끌 거린다. 


“오래 봐왔어요. 그 만큼 좋아하고 사랑하고 또, 아끼고 있어요. 남들이 우리를 두고 뭐라던가요? 천생연분? 우리라고 처음부터 편하게 사랑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적, 울고 싶은 적, 다 내려놓고 싶은 적, 헤아릴 수 없이 많았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그래,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놀음에 빠진 스스로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질투에 눈이 먼 우둔한 자가 사랑에 취한 여인네를 이유 없이 의심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경우는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코타로는 저를 선택했고, 저 역시 마지막까지 그 사람 옆에 서 있길 약속했죠. 이유는 간단해요.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우리는 ‘함께’여서 행복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물론 다소의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행복이란 최종 목표를 훼방하진 못 하겠죠.” 


아카아시는 비로소 눈을 감는다. 화상을 입은 여린 살점이 텁텁한 뒷맛을 내놓는다. 이 여자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자신을 왜 불러 들였는지 알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우리 관계를 얕보지 마세요. 넘볼 궁리조차 하지 마세요.”


대못을 박는다. 이것이 네가 지켜야할 선이라며 날선 으름장을 놓는다. 


“어찌 됐든 코타로는 저를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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