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또님 디자인입니다.
W. MELL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갓길에 멈춰 섰다. 한 쪽 머리칼이 잔뜩 뻗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차문을 열었다 닫았다. 쾅 소리 나는 굉음이 외진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굳은 남자의 낯빛은 피로로 도배되었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한 눈가는 퀭하니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지 않은 채 대문 앞을 서성거릴 뿐이었다. 좌우로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를 여러 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녹음된 음성만 반복해 듣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세게 혀를 찼다. 다짜고짜 철제 대문을 두드렸다. 손등이 까질 때까지 두드릴 걸 염려하고 있었는데, 철통같던 대문은 의외로 쉽게 길을 터주었다.
“보쿠토 코타로!!”
씩씩 대는 걸음 속도에 맞춰 쿠로오가 언성을 높였다. 넓지 않은 마당을 가로질러 잠겨 있지도 않은 현관문 손잡이를 확 잡아 당겼다.
쿠로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워커홀릭(Work-a-holic)마냥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붙잡아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던 그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러브하우스를 버젓이 두고 제 집에 들러붙어 사는 보쿠토를 나무라던 것이 아니었다. 걱정 어린 마음으로 건네준 몇 마디가 도화선으로 작용해 서로의 감정이 상할 만큼 앞 다퉈 싸웠던 일을 이제와 지적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남 부럽지 않던 연애질에 주변에 깨까지 들들 볶던 약혼녀를 러브 하우스에서 내쫓아 버린 것 때문 또한 아니었다.
종적을 감췄다. 무려 24시간 동안. 아무 연락도, 이렇다 할 통보조차 없이. 중요한 방송 녹화, 잡지 인터뷰, 시나리오 회의, 그리고 연기 트레이닝까지. 모든 스케줄에 무단으로 펑크를 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워커홀릭을 걱정하던 쿠로오의 근심을 싹 날려버린 것처럼 보쿠토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쿠로오가 하루씩이나 걸려 보쿠토를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펑크 난 스케줄 뒤처리 하랴, 제작진들과 스탭 진에게 사죄하랴, 소속사에 보고하랴, 다음 일정 조정하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보쿠토는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쿠로오의 속이 타들어갈 만도 했다.
“너……!”
너 제정신이냐, 인마?! 외마디 고함을 치려던 쿠로오의 입이 일자로 닫혔다.
그 곳은 난장판이었다. 활짝 열린 신발장에선 갖가지 신발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얼기설기 얽힌 운동화와 구두 사이로 진흙과 모래, 나뭇잎이 한데 뭉쳐 꼭 쓰레기 더미마냥 현관을 가득 채웠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액자들은 바닥에 나뒹굴어 모서리가 찌그러지거나 흉측하게 부서져 있기 일쑤였다. 흑백 사진, 유화, 포스터를 덮고 있던 유리는 엉망진창으로 깨져 사방팔방 튀어 있었고 관엽식물을 키워내고 있던 고급스런 화병들은 누가 의도적으로 던져 깨뜨려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 천하에 흙 뿌리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잎사귀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물든 화초가 종말을 고했다. 유리 파편과 흙무더기뿐일 줄 알았던 바닥엔 찢어발겨진 종잇장 또한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신문 헤드라인, 얼마 전 맡았던 배역 대본, 잡지 표지, 아끼던 책. 그 외에도 대각선으로 뜯겨져 나간 벽지나 산산조각 난 베란다 유리는 꼭 폐허를 방불케 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신발 벗기를 포기한 쿠로오가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섰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 바닥에 파편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잘근잘근. 퍼석퍼석. 길어봤자 꼬박 하루란 시간.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엇이 잘못되어 이 사단이 났는지. 무엇보다도, 쿠로오는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보쿠토?”
다행히 보쿠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다시피 멀쩡한 가구. 가죽 소파 위에 무릎을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안은 인영이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쿠토임을 확신한 쿠로오가 보폭을 보다 넓혔다. 길쭉한 다리가 성큼성큼 나아가 순식간에 보쿠토와의 거리를 좁혔다. 푹 꺼진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이름을 부르길 여러 번. 퀭하게 가라앉은 눈알, 움푹 들어간 볼, 생기 없이 반쯤 벌어진 입술, 거뭇거뭇 자라나기 시작한 수염 등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이 쿠로오를 향했다. 핏기 없는 안색이 꼭 죽은 생선을 떠올리게 했다. 순간 전신에 오한이 끼친 쿠로오가 손날을 들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만큼 그의 뺨을 두어 대 내리쳤다. 작지 않은 찰과음이 귓전을 휘갈겼다.
“이 개자식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어? 너 왜 이래. 너 미쳤어? 죽으려고 아주 작정했어?!”
물끄러미 허공만 쳐다보던 동공이 차츰 요동쳤다. 한 때 보석같이 빛나던 금안은 난파선 마냥 심하게 흔들리다 겨우 초점을 잡았다.
“내 전화 왜 안 받았어.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너 연락 씹지, 피디한텐 항의 전화 오지, 이사란 작자는 또!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하아, 일단 그건 됐고. 당장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너, 집 꼴이 왜 이래. 네 꼬락서니는 또 왜 이렇고!”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간 곳에 대한 측은지심은 잠시뿐이었다. 쿠로오가 잡고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던 보쿠토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없어.”
뭐? 대꾸할 새도 없이 호박 빛 눈알 안에 물기가 흥건하게 차올랐다.
“케이지가…없어.”
쿠로오가 이마를 짚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나 싶었다.
“너 인마……. 없는 게 당연하잖아. 헤어졌으니까.”
“케이지가 없다고.”
“일단은 병원부터 가자. 지금 네 몸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 돼. 밀린 스케줄이고 뭐고 넌 컨디션 회복이 급선무야.”
“어디에도 없어.”
119 버튼을 꾹 누르려던 손가락이 정지했다. 자신의 뻗친 머리를 멋대로 쓸어 넘겼다. 일순 짜증이 치민 탓이었다.
“번호……. 나 번호를 몰라. 케이지 번호를 몰라. 전화가 안 되면 문자라도, 라인이라도 남겨 두려 했는데. 케이지한테 연락할 방법을 모르겠어.”
“야.”
“짜증나서 폰을 집어 던졌는데……. 망가졌어. 다 망가졌더라고. 먹통이고 전원도 안 켜지고 말도 안 듣고.”
“보쿠토!!”
“있지, 케이지 번호 알아? 알고 있어? 나…나 알려 주라. 케이지 목소리가 듣고 싶어. 얼굴이 보고 싶어. 그냥, 그냥 보고 싶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액체들이 기어코 추락했다. 양동이 가득 채워져 있던 소금물이 순식간에 엎어진 것처럼. 분수처럼 쏟아진 눈물이 뺨을 흥건히 적셨다. 이렇게 약해 빠진 애가 아닌데. 남 앞에서 쉽게 눈물 보일 애가 아닌데. 상황의 심각성이 차츰차츰 실감나기 시작했다. 병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쿠로오는 한 쪽 무릎을 굽혔다.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주룩주룩 떨구고 있는 보쿠토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이 있었어.”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니었다. 낮게 깔려 속삭임에 가까운 어조는 크게 넘어진 아이의 깨진 무릎을 어루만지는 마냥 다정하고 또 섬세했다. 그것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숨죽여 울던 어깨는 달달 떨리고 울먹임이 그치질 않았다. 딸꾹질과 눈물과 콧물 같은 배설물을 온전히 토해내며 보쿠토는 띄엄띄엄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아카아시가 보고 싶어.
맹목적인 욕망에 휩쓸린 발길이 처음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카페였다. 아카아시가 일하던 카페이자, 우리가 처음 만난 카페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나치게 단순했던 거다. 그 곳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몇 달 전에 그만뒀는데요?”
모르는 직원이 있었다. 아카아시란 이름을 대니 영 모르는 눈치였다. 사장을 불렀다. 구면인 사람이었다. 겨우 한 번 본 내 얼굴을 기억할까 싶었는데 첫 눈에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뭐, 개인 사정이 있다며 급하게 관둔다 길래 잡진 않았는데. 그 쪽들하고 관련된 일인 줄 알았거든요.”
신경 써야 할 건 그녀 하나만이 아니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묘한 위화감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모자를 잊었고 선글라스를 잊었고 마스크를 잊었고 내가 ‘나’라는 걸 잊었다. 요컨대, 나는 이목의 중심이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만두지 말라고 붙잡는 거였는데. 그쪽들 때문에 우리 카페 간판 비주얼 하나 잃었잖아요.”
멍청했다. 내 위치와 입장이 어떠한지 머리로만 알고 있었나보다. 상기 시킨다고 노력한 사람은 쿠로오였고 상기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할 일을 잊고 해야 할 일을 잊고 오롯하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표 같은 눈알들이 뒤통수와 옆구리에 박혔다. 얼마 안 가 한 쪽 어깨에 무게감이 실렸다. 누군가 어깨를 살짝 건드린 탓이었다.
“저기……. 보쿠토 코타로 맞나요?”
한 때나마 이런 순간을 바란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무리가 아는 척 인사를 건네고 이름과 환호성을 연발하는 순간. 그것 하나를 열망해 여기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용할 만한 것은 다 이용했다. 아카아시도 그 중 하나였다. 단순한 도구일 뿐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아카아시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야 약간의 불화가 있었을 뿐.
“와~ 예전부터 팬이었어요!”
내가 행복을 만끽할 순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는 왜.
“전철에서 우연히 보고 말았거든요. 보쿠토군이랑 아카아시군! 두 분의 연애가 너무너무 잘 어울려서 언제까지고 응원, 하고 싶었는데…….”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순히 나를 향한 호감을 표하던 여학생에게 왜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여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사방엔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의 호통을 쳤던 걸까? 아니면 쓸데없는 넋두리라도 털었던 걸까? 나 힘들다고, 괴롭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입 나불거리지 말라고. 애꿎은 사람만 탓했던 걸까?
아니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화만 내다 끝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이마를 푹 조아렸던 것 같다.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도 그 누구도 내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 같다.
“헤어진 거 아니에요. 잘못 나간 기사예요. 잠깐 싸웠는데, 케이지가 많이 화를 내서. 내가 많이 잘못한 거라서. 그게 오해되고 와전된 거란 말이에요. 우리 끝난 거 아니라고요. 아닌데. 아닌데……. 케이지를 못 찾겠어요. 우리 케이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나 걔한테 잘못했다 빌어야 해요. 싹싹 빌어야 해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시간이 없는데. 걔 찾아야 하는데. 많이 보고 싶은데. 못 해준 말이 너무 많은데…….”
자연스레 손을 마주 잡았다. 깍지를 꼈다. 묵직한 뒷목을 떨어뜨렸다. 깨물린 입술은 입안으로 사라지고 동그란 방울들이 툭툭 바닥을 때렸다.
“케이지 보셨어요? 걔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무라도 좋으니까. 뭐든 좋으니까. 제발. 제발 좀 알려주세요.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다고요.”
아카아시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웃는 얼굴, 미소 짓는 얼굴, 행복한 얼굴만 떠오르길 바랐는데. 정작 머리를 뒤덮는 건, 그가 우는 얼굴, 상처 받은 얼굴, 슬퍼하는 얼굴.
‘나의 시대가 왔다, 라고 했죠. 그럼 그건 보쿠토씨의 시대인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살고 저는 제 시대를 살 거예요.’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사이였잖아요, 우리.’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싫으면 안 보고 불편하면 피해 다니고. 좋을 때는 저 좋을 대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 싫을 때는 멋대로 선 긋고.’
‘보쿠토씨.’
‘저랑 키스할래요?’
‘이제 와서 남자랑은 못 해먹겠단 개소리 지껄이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쿠토씨?’
‘밑 보일 거 없잖아요. 저는 곧 끝이고, 그 사람과는 백년해로할 사이잖아요. 마지막이라는데, 이런 것 하나 못 들어줘요? 아니야. 아니에요. 달라요. 들어주세요. 부탁이에요. 커플이다 뭐다 따라다니는 수식어구는 많았지만, 우리……. 그럴듯한 키스 한 번 못 해봤잖아요. 안 해봤잖아요.’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좋아해줄 필요도 없어요. 저는 그냥, 그냥…….’
수많은 목소리가 쓰나미처럼 지나갔다. 중구난방으로 뻗어 나간 줄 알았던 문장들은 일제히 단 하나의 결론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분명하게, 녀석의 진심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말했던가. 아카아시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 왔던가. 무엇을 근거 삼아 자신의 곁에 있으라 입방적으로 명령했던가.
‘앞으로 고작 한 걸음이야. 그 쯤 남은 기분이 들어. 그걸 넘어서는 순간 ‘나의 시대가 왔다!’는 기분에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 알겠어? 완전히 연기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 배우란 직업에 내 평생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이용했다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고 치졸하다 해도 할 말이 없어. 나는 누구보다 주목 받고 싶었으니까. 허접했던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내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계약이 끝난 순간부터 우리는 결별했단 설정이야.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해관계나 각자의 사정이 안 맞아서 결국 헤어졌다는 거지.’
‘아마 그 이후에 지금처럼 우리가 서로 얼굴 맞대고 있을 일은……없지 않겠어?’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해.’
‘게이라고 낙인 찍혀서 여자들한테 바람 맞고 엉엉 울면서 우리 탓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간수 똑바로 해.’
‘내가 너를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너도 나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간단히 끝맺음 할 수 있는 거지.’
‘미쳤구나. 네가 돌았구나. 남의 책장을 허락도 없이 들추는 걸 모자라 다짜고짜 그…아 씨팔. 야. 너 진짜였냐? 진짜 뭐, 게이나 동성애자인 놈이었어?’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머리통부터가 글러 먹은 거였네. 친구로는 쥐뿔도 본 적 없으면서.’
‘소름끼쳐.’
진심도 아니었던 주제에. 돈 몇 푼으로 사람을 사들인 주제에.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고, 이용 가치에 의구심이 생기기 무섭게 냉큼 갖다 버린 주제에.
하염없이 울기만을 반복했다. 제자리에 주저앉다 못해 무릎까지 꿇고 오열했다. 나아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목적을 위해 타인의 희생이든 뭐든 전부 감수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아카아시의 몸과 마음을 짓밟고 여기까지 왔다. 저질렀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던가. 철판 깔고 꿋꿋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던가. 이도저도 아닌 채 제자리에 머물며 이제와 과거의 잘잘못을 들추는 짓거리가 왜 이리 비참하던지.
정신이 나간 채 집에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텅 빈 집엔 공허함이 감돌았다. 2층 어딘가엔 아직도 아카아시의 울음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내게 상처 받은 얼굴로, 그럼에도 나를 갈망하는 눈을 한 그가 아직도 집을 헤매는 것 같았다. 사키가 없어졌기 때문에 상실감이 드는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멍청한 나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흔적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다.
멀끔한 집안을 둘러봤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집이었다. 이른바 허니문, 혹은 러브 하우스. 그 광경이 너무 완벽해 되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선반 위에 최근 날짜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몇 달 전 전국을 뒤흔든 지진의 후속 조치가 헤드라인 전반부를 독차지했다. 큰 기대를 바란 건 아니었다. 막상 내 얘기 하나, 내 힘들었던 고민 하나에 조차 관심 가지지 않는 종이 쪼가리에 허탈감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이야기가 아예 없진 않았다. 얄팍한 종잇장을 몇 개 넘기니 연예 부문에선 나와 아카아시의 이별에 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추측은 꼭 예의를 잘 갖춘 무례 같다는 게 글자에서부터 또렷이 드러났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들지도 않는 것들이 멋대로 펜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찢었다. 갈가리 찢어 주었다. 세로로 북북 찢고 나니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내 얼굴이 대문짝 만 하게 찍힌 사진도, 자신들 입맛대로 휘갈긴 활자도, 정성들여 돌보았던 화초들도, 좋은 집이라고 칭찬받던 벽지도, 액자도, 그림도, 가구도, 전부 찢어 주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엎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뒤따랐다. 엉망진창으로 난잡해진 주위를 둘러보니 돌덩이 같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웹 서핑을 해봤다. 손바닥 만 한 화면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내 이름, 혹은 아카아시의 이름을 눌러 봤다. 수많은 컨텐츠가 나왔다. 그 가상공간에선 욕과 칭찬과 스토킹과 험담이 함께 존재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모를 우리의 사진이, 우리의 순간이 꼴 사나운 가십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아카아시의 근황 같은 건 없었다. 정상적으로 찍힌 아카아시의 얼굴 또한 없었다. 뒷모습, 멀리서 훔치듯 찍은 옆얼굴, 어둑한 배경에 이목구비도 구분 안 가는 형상. 본인이 맞는지도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와중에 벌써부터 아카아시라 도장 찍는 사람들.
중요한 건, 그 가십거리의 중심이 아카아시가 아닌 나였다는 것. 내가 아카아시를 이용했듯 사람들 역시 아카아시를 이용해 나를 능욕하기 바빴다는 것.
차라리 잘 된 일일까.
무감각한 얼굴로 조그만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다 갑작스레 화면이 바뀌었다. 모르는 번호일까 조마조마한 마음도, 아카아시일까 노심초사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쿠로오]
저 이름을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지겹게 봤는지. 짜증나서 끊었고, 꼴 보기 싫어 던졌고, 그 이름이 ‘아카아시’가 아닌 것에 어금니를 갈았다. 퍽 소리가 났다. 유일무이한 통신기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였다. 무엇 하나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싫어 세차게 발을 굴렸다. 발치에 멀쩡한 게 닿았다. 잡지였다. 내 낯짝을 그대로 표지에 쓴 화보집이었다. 언제 찍었는지도 기억 안 나는 그런 흔한 사진. 쉽게 찢기지도 않는 고급 재질 이길래 조금은 힘이 들었던 것 같다. 손에 힘을 주는 대로 종이가 갈라졌다. 그 경계선이 이마 한 가운데와 코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목을 잘라 버리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스스로를 욕보인 걸 뻔히 알면서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진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갈기갈기 찢어낸 조각들은 삽시간에 흩어졌다. 사정없이 찢어낸 것들이라 크기도, 모양도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그 중 두 번째로 컸던 조각이 발등 위에 사뿐하게 앉았다. 짜증이 역류하는 건 잠시뿐.
‘또 몰라? 오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가 언제쯤 오겠어.’
‘감독님~ 제가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포즈가 잘 안 잡히네요.’
‘이 친구랑 몇 컷 찍어 봐도 될까요?’
분명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 중 하나였다. 렌즈 앞에서의 어정쩡한 포즈나 몸 앞에 곱게 모은 손가락들이 아카아시임을 여실히 밝혔다. 그것이 아카아시임을 확인하기 무섭게 눈알이 돌아갔다. 얼굴 조각을 찾기 위해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때만큼은 아카아시를 화보집에 넣지 말라던 쿠로오의 간절한 부탁을 멋대로 거절해버린 사진사에게 감사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조각 맞추기에 여념한 지 한참. 가까스로 끼워 맞춘 아카아시의 얼굴은 만신창이였다. 하필이면 잘게 찢어진 곳이 이목구비여서. 하필이면 머쓱하게, 혹은 어색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서.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유일한 조각들을 조심히 끌어 모았다. 한참 동안을 숨죽여 울었다. 애 닳는 조각들을 꽉 틀어쥐자 그것들은 오히려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손 안에 남은 것은 몇 톨의 부스러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