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님 리퀘



“실례합니다~”

목재로 된 미닫이문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서적에서만 풍기는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무로 된 책장, 칸칸을 빼곡하게 채운 서적들. 도서실로 들어서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때는 봄.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왔다. 크림색 커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오후 세 시의 햇볕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알록달록한 새의 지저귐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어디 보자.”

오이카와는 눈에 띄는 책장 앞을 서성이며 눈높이에 맞는 책들의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훑어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다. 자신도 모르게 신바람이 난 오이카와가 헛기침 몇 번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독서’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철부지 아이가 장난을 준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처럼. 오이카와의 두 눈은 반짝반짝한 빛을 띄었다. 

오이카와는 얼핏 보아 제일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의 중간 즈음되는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치곤 그 사이에 이목구비를 깊이 파묻었다. 종잇장과 눈알이 부딪힐 만큼 거리감이 없었으니 그 안에 적힌 활자가 읽힐 리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의 목적은 책이 아니었다. 

양 손에 펼쳐 든 책으로 얼굴을 가린 자세 그대로, 오이카와는 게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떨리는 숨소리가 크게 나버릴까 호흡까지 꾸욱 참아낸 채. 이윽고 책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오이카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 모서리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귀에 들리는 건 잔잔한 바람 소리, 커튼이 나부끼는 나긋나긋한 울림. 별 다른 반응이 없자, 오이카와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쿠니미쨩?”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았다. 책장에 몸을 바짝 붙이고 얼굴의 절반을 내밀었다. 

어딘가 들뜬 기분이었다. 봄이라서. 벚꽃이 만개해서. 그런 식상한 이유가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문께로 벚꽃 잎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내리 앉았다. 그 솜털 같은 몸짓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심장이 뻐근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나무를 등진 도서실 구석, 쿠니미는 한 폭의 그림을 배경 삼아 단잠에 취해 있었다. 

“어~이.”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쿠니미를 부르는 오이카와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관찰력 좋고 잠귀 밝은 쿠니미가 인기척을 전혀 못 느낄 만큼 곤히 잠들어 있단 사실이었다.

“진짜 자는 건가?”

쿠니미는 기본적으로 낮잠이 많은 타입이었다. 부 활동을 제외하면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조차 깨어 있는 쿠니미를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자기 앞가림을 전혀 못하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연비 좋고 효율 좋고 늘 냉정한. 멀지 않은 과거, 오이카와는 자신이 보아온 쿠니미를 단칼에 정의한 적이 있었다.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을 사실이라 말했는데 무엇이 바뀔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정말, 내가 들어갈 틈 하나 안 주는구나.”

그가 쿠니미를 단순한 후배 이상으로 보게 된 것에 있었다. 

이층짜리 단출한 책장을 베개 삼아 잠든 쿠니미의 곁으로 오이카와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이카와 못지않게 잡티 하나 없는 상아색 피부.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 앞머리. 윤기마저 감도는 칠흑빛 머릿결.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옅은 그늘. 규칙적으로 쌕쌕거리는 숨결. 호흡을 따라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와 가슴. 

참 고운 얼굴이었다. 

아빠 다리로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댄 쿠니미 앞으로 오이카와가 무릎을 굽혔다. 굽힌 무릎 위에 양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었다. 그가 잠이 많아 좋은 점이라 함은, 이렇듯 쿠니미의 얼굴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단 점이었다. 

“잠만보야, 쿠니미쨩은.” 

반면, 짝사랑 상대가 온종일 잠에 취해 있는 터라 변변한 대화의 실마리 한 번 잡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뾰로통해진 오이카와는 잘 뻗은 검지로 쿠니미의 볼을 쿡쿡 찔러댔다. 몰캉한 볼은 찔리면 찔리는 대로 푹푹 들어갔다. 번듯한 이목구비에 고정된 시선을 살짝 내리니 그의 허벅다리 부근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책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도 잘 줄은 몰랐는데.”

봄바람이 상냥한 숨결을 불어넣자 창틀 안 쪽으로 벚꽃 비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제히 낙하하는 벚꽃 잎들과 함께 쿠니미가 읽고 있던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영화 속 주인공 같아. 쿡쿡 대는 개구 진 웃음이 바람결에 새어 나왔다. 스쳐 가는 듯한 행복한 기분도 잠시.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읽고 있었을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에 부릅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자세가 자세다 보니 거꾸로 펼쳐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한눈에 읽기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남은 수단은 하나 뿐이란 걸 오이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큼, 흠. 쿠니미쨩이 뭘 읽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쿠니미쨩이 조, 조, 좋……. 하여간 그런 불순한 동기로 가까이 가는 건 절 대. 절대 아니니까…….”

쥐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쿠니미 옆에 안착하려는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쉴 새 없이 쿵쾅 이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겨우겨우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지만 그와 오이카와 사이엔 여전히 한 뼘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한 줌의 핑크빛 꽃잎이 둘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갔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이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따라 혈류가 거꾸로 치솟았다. 화끈한 열기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쭈뼛 세웠다. 이러다 심장 마비나 호흡 곤란으로 당장 죽어 버리면 어쩌지. 눈앞이 점멸해 나가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 기억이 나질 않자 오이카와는 문득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던 것이다. 걱정도 잠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새끼손가락이 달팽이 기어가듯 거리를 좁혀 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쿠니미 쪽으로 기울어진 몸은 마침내 옷자락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남청색의 와이셔츠 소매가 맞닿아 바스락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채 그대로 호흡을 멈춘 오이카와는 최대한 조용히, 느리게 옆 눈을 흘겼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종잇장이 쉴 틈 없이 팔랑거리는 탓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었다. 

“고래?”

나부끼는 책장 하나를 잡아 앞뒤를 살폈다. 역시나 고래였다.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손바닥 한 면을 쫙 펼쳐 쿠니미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좌우로 세게, 약하게, 빠르게, 느리게 흔들어 보았다. 쿠니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샐쭉 웃었다. 

“잠깐만 책 좀 볼게.”

특유의 개구 진 미소가 폭발하기 직전의 설렘과 긴장감을 살짝 가려 주었다. 다행히 쿠니미는 책을 세게 잡고 있진 않았다. 뭐, 책 표지에 껌 딱지처럼 달라붙은 엄지와 검지만큼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손수 떼어내야 했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것 이외엔 별 다를 게 없었다.

“허먼 멜빌. 백경(白鯨).”

헤에, 이런 책을 좋아하는구나. 꽤 두꺼운 책이긴 했지만-무려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를 자랑했다- 쿠니미가 읽는 거라면 자신도 읽어봐야 하지 않겠냐며 속으로 떵떵거리던 오이카와는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분명 일본어로 쓰인 게 맞는데, 일본어가 아닌 듯했다. 차라리 암호문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미간에 인상을 팍 주며 문장 하나하나를 꾸역꾸역 해석하다 얻어낸 결론은 이런 어려운 책을 이해하는 쿠니미가 대단하다는 것뿐. 세 페이지나 넘겼을까. 오이카와는 문득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묵직해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어……!!”

혹시나 싶었다. 설마 싶었다. 책에서 떨어진 눈알이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정수리를 확인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굽었던 척추가 자동적으로 곧추섰고 쿠니미의 뺨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 신경이 바짝 날을 세웠다. 불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이 미묘한 공기 속에서, 상황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망할 오이카와!! 수업 끝나면 교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이와이즈미였다. 도서실을 쩌렁쩌렁 울리다 못해 학교 전체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외마디 고함에 오이카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워워- 진정해, 에이스. 어차피 캡틴 여기 있을 거 뻔히 아는데 왜 소리를 지르냐.”

“그러다 고혈압 오르겠다. 일단은 진정 좀 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덤으로 말이다.

오이카와는 사고를 빠르게 굴려야 했다. 쿠니미와 자신이 함께 있는 걸 보이는 것까진 상관없었다. 부 활동 시작 시간까지도 아직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엔 노기가 없었다. 그저 제 말을 무시하고 도서실로 튀어온 자신을 문책하러 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상대하는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쿠니미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르고 쓸데없이 화병만 많은 이와이즈미였다. 쿠니미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몰골을 보고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 고함 소리에 쿠니미가 깨기라도 한다면.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제 얼굴을 발견해버린다면. 쿠니미 자신이 들고 있어야 할 책이 제 손에 들려 있다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피한다. 조용히 시킨다. 쫓아낸다.”

그 세 문장을 자기 암시하듯 되뇐 오이카와는 책장 사이로 얼핏 스친 낯익은 실루엣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마츠카와였다. 이와이즈미가 아닌 것에 속으로 쾌재를 외친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에게 온갖 눈짓 발짓을 섞어가며 제 절박한 상황을 표현했다.

쉬이- 조 용 히! 자 고 있 어. 자 고 있 다 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설명을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고 말이다. 다행히 마츠카와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치 즈 햄 버 그 10 개. 알겠지? 10 개 야. 

협상의 대가는 잔인했지만.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이며 다시 한번 10을 강조하는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는 이를 갈았다. 그래도 다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오이카와는 한 시름을 놓게 되는데, 

“야. 오이카와 좀 늦을 거라던데.”

“뭐?! 여기서 더 늦어? 왜! 연락 왔어?”

“소리 낮춰. 일단 도서실이잖아.”

“어……. 응.”

“나한테 라인 와 있더라고. 쿠니미가 좀 다쳤대. 그래서 양호실 들렀다 곧장 부실로 간다고……. 아,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진 말라 더라. 금방 간대.”

이와이즈미의 반응을 비롯해 혹여 하나마키가 자신이든 쿠니미든 발견하면 어쩌나 싶어 오이카와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1초가 1시간 같고 1분이 하루 같았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오, 진짜. 늦으면 1분당 운동장 10바퀴라고 전해라.”

이와이즈미의 서슬 퍼런 협박을 끝으로 세 사람의 발소리는 멀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구부정한 어깨와 풀린 낯짝은 이제 슬슬 쿠니미를 깨워야겠다는 의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머리에 꽃잎 붙었어요, 선배.”

쿠니미가 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 엑, 엑?! 쿠니미쨩??”

언제부터?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내 얼굴 봤어? 내가 하는 짓거리들 다 본 거야? 맛층한테 묵음으로 소리쳤던 것도? 전-부? 다 보고 있었던 거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건 더듬거리다 얼떨결에 내뱉은 ‘쿠니미’란 이름뿐이었다. 즉,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지나치게 의식하고 말았다. 쿠니미의 새끼손가락은 어느새 오이카와의 것과 살짝 닿아 있었다. 당황해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 오이카와와 달리 쿠니미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실눈을 떠보니, 그의 길쭉한 손가락 끝엔 핑크빛 솜털이 붙어 있었다. 쿠니미가 멀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이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전신을 훑어 내리던 따가운 시선이 이내 그의 손아귀에 갇힌 서적을 향했다. 책이 왜 선배 손에? 의문도 잠시. 쿠니미는 발그레한 홍조를 띤 오이카와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런 눈치로 말했다. 

“선배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열이라도 있나? 그 큼지막한 손이 또다시 저에게로 향하자 오이카와는 다시금 눈꺼풀을 질끈 감아 내렸다. 눈꺼풀 안 쪽에 보이는 것이라곤 새까만 어둠뿐이었건만 언뜻 쿠니미가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다. 환청 같은 옅은 웃음소리도 함께 말이다. 

“푸흐, 너무 솔직한 반응이라 오히려 신선하네요.”

뒤늦게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가림막 너머의 쿠니미는 그의 머릿속에서 줄곧 그려왔던 모습 그대로, 정말 웃고 있었다. 휘어진 눈꼬리,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 온화한 얼굴.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고백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건데요?”

“뭐, 뭐!! 아니! 나는 그, 게 아니고……!”

“이러다간 선배가 먼저 졸업장 떼겠어요.”

그랬다간 제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귓전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갔다. 불에 탈 듯 벌게진 귓불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4월의 화창한 봄날.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 사랑은 봄바람을 타고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좋아해요.”


보쿠아카쿠로 쿠로아카보쿠 쿠로아카 위주의 아카른

마츠오이 쿠니오이 이와오이 위주의 오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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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 18.01.29

*김미루(@meru_0421) 썰 기반입니다.


목재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닫혔다. 이자카야를 알리는 얇은 천막이 앞뒤로 흔들렸다. 천이 젖히자 상쾌한 바깥바람이 쿠니미를 반겼다. 쿠니미는 달뜬 뺨을 식히려 손을 들었다. 알코올로 달궈진 볼과 손바닥 사이엔 꽤 온도 차이가 있었다. 적당히 서늘한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가며 뺨을 어루만진 지 몇 차례. 쿠니미는 아예 이자카야 출입구 바로 옆 자리에 쭈그려 앉아 버렸다.

술집 안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몇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거였더라. 쿠니미는 뺨에 얹어둔 손등을 떼어내 숫자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즐거울 만도 한가.”

활짝 만개한 웃음꽃들이 듣기 좋았다. 동시에 그들과 비슷한 온도로 웃을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쿠니미를 감싸 안았다. 탄식하듯 반사적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희희낙락한 웃음소리에서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아! 쿠니미쨩 여기 있었구나~”

그때, 쿠니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돌아간 눈이 반쯤 열린 문어귀에서 꼿꼿하게 멈춰 섰다. 한참 찾았잖아. 꿈이 아니라는 듯 문 틈 새로 삐져나온 이목구비와 선명한 음색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쿠니미쨩도 진짜 오랜만이네.”

배시시 웃던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빈 옆자리로 바짝 다가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던 오이카와의 옆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본 쿠니미는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술집의 온도를 그대로 가져온 오이카와는 신이 난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맛층 턱수염 기른 거 봤어? 영상통화로 볼 땐 엄청 놀렸는데 실제로 보니까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란 거 있지. 맛키는 결혼 준비로 바쁘다면서 얼굴이라도 잠깐 비추고 간 게 어디야 싶고. 이와쨩은 가업으로 이은 두부 장사가 엄청 성황리래, 대단하지?”

쿠니미는 형식적으로만 고개를 까딱였다. 

“미안. 나 혼자만 떠들고 있었네.”

한참 동안 입을 움직인 후에야 오이카와는 술기운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쨩은 어때? 잘 지내는 거지?”

화살은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쿠니미는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답 없이. 그저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어색한 정적에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오이카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던 후배의 속내가 읽히질 않자 천하의 오이카와 역시 당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려 할 무렵이었다.

“하지 마요.”

쿠니미의 무게중심이 오이카와 쪽으로 기울어졌다. 길게 뻗어 난 손가락들이 한껏 일그러진 입술 사이를 톡 건드렸다. 

“예쁜데.”

입술에 닿은 서늘한 감촉, 가까워진 숨결, 읽을 수 없는 표정, 한 톤 낮아진 목소리.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님 연속적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져서 그랬을까. 놀라 확장된 동공은 이내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눈알은 바닥에 꽂혔고 낯부끄러운 열기는 술기운을 대신해 오이카와의 얼굴을 붉혔다.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오이카와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쿠니미쨩 진짜 다 컸네! 이렇게 내 걱정도 해주고!”

자신은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람처럼 오이카와는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했다. 목소리는 높아졌고 팔을 높이 들어 쿠니미의 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툭, 툭 내리쳤다. 그러니까,

“…그러게요.”

쿠니미가 그 손을 낚아채갈 줄은, 오이카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벌써 다 컸는데.”

못 본 새 악력은 어찌나 세진 건지 슬쩍 힘을 줘 손을 빼내려 해도 쿠니미의 손아귀는 돌덩이 마냥 요지부동이었다. 이레귤러의 연속이잖아! 속으로 잔뜩 울상이 된 오이카와는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는데.”

“저기, 쿠니미쨩 이거 좀… 놓고 말하자, 응?”

“왜 자꾸……. 자꾸만.”

취했구나. 오이카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쿠니미, 대답 없이 물끄러미 저만 쳐다보던 쿠니미, 거침없는 스킨십과 묘한 말만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쿠니미. 만취라는 결론을 도출하니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던 쿠니미의 행동거지가 납득되기 시작했다. 

그 쿠니미쨩이 술에 취했다니! 오이카와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붙잡힌 손과는 달리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얄궂은 웃음이었다. 키가 한 뼘쯤 더 커지고 성대가 굵어지고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어도 ‘쿠니미 아키라’란 본질은 그때 그 시절에서 거의 변하질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가 덩치만 큰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동경(あこがれ)이라고 하죠, 보통은.”

쿠니미의 실상을 파악하곤 생글생글 지어 올린 눈웃음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한 건, 그가 다음 말을 꺼낸 직후부터였다.

“처음엔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동경이나 존경의 의미라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렸을 때니까. 그래서… 착각한 건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얼굴 근육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꽉 잡힌 손에서 체온이 공유됐다. 서늘한 손이 따스한 손과 한데 겹쳐져 온도가 뒤섞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소리 없이 뻐끔거리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이 잡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을 대뜸 제 목덜미로 가져갔다. 화들짝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뜬 채 쿠니미 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맞닿은 손바닥에선 불규칙적으로 쿵쾅 이는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보 같죠, 나.”

“……쿠니미쨩?”

“이젠 그만 할 때도 됐는데. 안 이럴 때도 됐는데.”

“…….”

“왜 이럴까. 왜.”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쿠니미의 얼굴은 점점 오이카와에게 가까워져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이카와는 뒷걸음질을 치다 나무문에 뒤통수를 작게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도망갈 곳이나 숨을 장소가 없다는 게 오이카와에겐 마치 패닉처럼 작용했다. 

“사실은 알고 있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

“…….”

“너. 너. 너. 전부 너 때문이라고.”

“…….”

“나는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자꾸만…….”

그 와중에도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은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던 지라,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쿠니미와 코끝이 닿을락 말락 가까워지자, 위험 신호의 마지노선을 느낀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기, 쿠니미쨩! 너무 가깝, 가까워. 좀만 떨어져서-”

“네가.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잖아.”

오이카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쿠니미는 만취했다는 것조차 망각했는지 여태 자신이 느껴왔던 무수한 감정들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정말 그만해야 하는데. 너만 보면 의지가 약해져. 아니, 애초에 내 의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어. 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고 싶어. 평범한 선후배 관계가 됐으면 좋겠어. 동시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몇십 번씩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버려. 그러니까 나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쿠니미의 말들이 별세계의 언어 같았다. 애절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입을 놀리는 그의 눈이 얼핏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오이카와는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감지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쿠니미쨩, 너무 취한 거 같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곤 그저 서글픈 눈을 하고 있던 쿠니미에게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귓전에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반박이라도 하려는 것 마냥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나한테 아무 생각 없잖아요.”

그 순간 오이카와의 입술 위로 무언가가 겹쳐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곤 그대로 초점을 놓아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쿠니미가 쓰게 웃는 얼굴뿐이었다. 

“넌. 내가 이래도 아무 생각 없으니까……. 그만해야 되는 거죠.”

점점 작아지던 쿠니미의 목소리는 어느새 끊겨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품 안으로 쓰러지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그의 심장박동 역시 차츰 잔잔해졌다. 오이카와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새근새근 잠든 쿠니미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은 두 사람을 다정하게 비추어 주었다. 

단 한 사람의 얼굴색만이 시뻘겋게 불거져 있었다.


   *배경은 키예프(우크라이나)입니다. 설정 상 러시아어 사용이 많습니다.


Итак, сколько это?

-그래서, 전부 얼마인가요?

유창한 러시아어가 과일 가게 주인의 귓전을 때렸다. 놀라 동그래진 눈꺼풀을 여러 차례 껌벅이던 주인은 풍만한 아랫배를 감싼 앞치마에 손을 닦으려고 한 행동조차 잊고 말았다. 타지에서 여행 온 듯한 동양인 하나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 입가엔 여유롭게 미소까지 띠고 있었으니 현지인 입장에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디 그뿐일까. 만만한 동양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웠다간 가만 안 두겠단 눈빛이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자, 주인인 이르고예비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솔직한 값을 불렀다. 접대용 미소를 어설프게 쥐어짜 내며 바나나 한 봉과 오렌지 두 개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우왓, 가성 비 장난 아니네.”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쿠로오가 사뭇 놀란 얼굴로 말했다. 

“도쿄에선 입에 풀칠도 못할 가격인데. 안 그래, 아카아시?”

쌀쌀한 날씨 탓에 양 팔로 몸을 감싸 안던 아카아시는 전리품 자랑하듯 콧바람을 내뿜는 쿠로오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이걸로 살 건 다 산 거죠?”

“응. 그나저나, 여긴 어째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냐. 여행 시기를 잘못 잡았나?”

페이퍼백을 가득 채운 내용물은 꽤 묵직했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곧장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인파로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에서 짐 덩어리들을 내려놓곤 목을 감싸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맨살이 드러난 목 언저리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에, 쿠로오씨?”

그러나, 쿠로오는 마치 자신이 추위에 둔감한 사람인 양 그것을 아카아시의 손에 둘둘 감아주었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선 따스한 봄을 맞이하고도 충분히 남을 3월의 한가운데. 반나절 만에 영하와 영상을 왔다 갔다 하는 키예프의 체감 기온은 아카아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여기는 봄이 짧잖아. 이거라도 손에 감고 있어. 맨손보단 나을 거야.”

장갑을 두고 나왔나 봐요. 버스에 올라타며 지나가듯 말하던 아카아시의 옆얼굴과 추위에 벌겋게 부푼 손가락 끝을 쿠로오는 내내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쿠로오씨가 추울 거예요.”

손사래 치듯 머플러가 감아진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쿠로오는 완강했다. 그의 발버둥 정도로 풀리지 않게끔 정성 들여 매듭까지 지어준 후 머플러로 통통하게 부푼 손바닥 틈새에 제 뺨을 파묻었다. 뜻하지 않은 간접적인 스킨십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오야 오야? 밤새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내 품에 파고든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짓궂은 목소리에 은근한 미소가 가미되자 아카아시는 도저히 쿠로오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이정표를 잃은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그, 그건…….”

“조금은 덜 추울 거야. 짐 이리 줘. 내가 들게.”

안절부절못하는 눈알이 애꿎은 콘크리트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사이, 쿠로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괜찮다는 아카아시의 만류를 능숙하게 뿌리치곤 세 덩이의 페이퍼백을 양 팔에 가득 든 쿠로오가 발길을 서둘렀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던 발걸음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섰고,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얼른 와. 

소리 없이 벙긋대는 입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이 아카아시를 부추겼다. 

그런 쿠로오에게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아카아시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부 깊이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가 낯설었다. 발을 내딛고 있는 토양의 느낌마저 전혀 달라 생소했다. 그의 옆을 분주히 스쳐 지나는 사람들은 온통 외지인이었다.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마침내 영어. 귓전을 울리는 언어가 중구난방이었다. 가격표, 표지판, 입간판,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난생처음 보는 활자였다. 

‘첫 여행’이란, 그에게 지독히 낯선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출국 겨우 며칠 전,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후무하던 아카아시는 급한 대로 리에프에게 러시아어 기초 회화 책을 빌렸다. 그러나 첫 배낭여행이란 들뜬 기분은 회화 공부를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에 익힌 거라곤 겨우 몇 마디의 말. 그마저도 어색한 단어를 띄엄띄엄 늘어놓으며 버벅 거리기 일쑤였다. 차라리 러시아어 전공자인 쿠로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그래, 어떤 식으로든 말이 통한다는 건 좋은 거지. 혼자인 것보다 훨씬 외롭지 않고… 그렇긴 한데…….”

아카아시는 뒷말을 아꼈다. 손을 칭칭 둘러싼 차콜 색 머플러엔 쿠로오의 온기가 여실했다. 몇 발자국 앞서 있는 쿠로오의 등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Осторожно!

-조심해요! 

놀란 쿠로오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말의 장터는 인파로 북적였기에 오가는 사람과 어깨를 부닥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아카아시는 은연중에 미간을 험상궂게 찡그리고 있었다. 

Ты в порядке?

-괜찮으세요?

이제 막 장터에 들어서던 금발의 여성 둘이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쿠로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쿵, 작지 않은 소리가 함께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한 여성은 불쾌함으로 가득 찬 눈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О, большое спасибо.

-오, 정말 고마워요. 

순간적으로 발휘된 순발력 및 기사도 정신 비슷한 것은 손아귀에 들려 있던 무거운 짐짝을 저 멀리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 빈자리엔 부드럽게 잡아당긴 여성의 손목이 자리했고 흐트러졌을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눈길은 퍽 다정했다. 

С удовольствием. Есть ли травмы?

-별말씀을.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 버럭 화를 내려던 금발의 여성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큰 키, 자국에선 볼 수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 또한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꼭 첫사랑에 빠진 여학생처럼 양 뺨을 붉힌 여성들은 쿠로오에게 바짝 붙어 핑크빛 기운을 뽑아냈다. 당황한 쿠로오가 뺨을 긁적이며 무어라 대꾸하다 말고 이내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아카아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벌써 몇 번째냐고.”

겨우 사흘째. 키예프에 체류하는 동안 그가 선보인 ‘친절’이란 이미지는 아카아시의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을 반겼다. 춥다, 추워. 쿠로오는 재빨리 집안 곳곳의 전기난로를 켰고 소파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여간 추웠는지 양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싹싹 비벼 한기로 얼어붙은 목 언저리에 갖다 대곤 서늘한 입김을 토해냈다. 

“아, 짐 정리-”

아차 싶은 순간은 항상 반 발자국 늦게 생각나곤 했다. 뒤늦게 현관에 내려둔 짐 덩이들과 덩그러니 내버려둔 아카아시가 떠오른 쿠로오는 한달음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미안. 도와줄게.”

아카아시의 손을 둘둘 감고 있던 차콜 색 머플러는 어느새 싱크대 한 편에 얌전히 개어져 있었다. 그는 쿠로오 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됐어요.”

쿠로오가 들어주려 했던 짐 꾸러미를 한 발 빨리 아카아시가 낚아채 갔다. 페이퍼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텅 빈 냉장고 안에선 쌀쌀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휑한 내부가 야채와 과일들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개 중 오렌지가 내던져지는 소리는 유독 날카로웠다.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는 듯한 잡음이 쿠로오의 귓전을 두드렸다. 

왜 이러지.

종잇장 안 쪽을 굴러다니는 오렌지를 집던 손이 느려졌다. 잔뜩 굳은 어깨가 짙은 한숨으로 풀어졌다. 

평정심.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파동 없는 수면처럼 고요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눈꺼풀을 깜박였다 하면 조금 전 보았던 쿠로오의 옆얼굴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리플레이되곤 했다. 설렘과 기대로 부푼 벽안. 유달리 아름다워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 두드러진 이목구비. 운동부의 것과는 전혀 다른 뽀오얗고 매끈한 살결. 호리호리한 몸 선. 

어떻게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연인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건 바로 아카아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아카아시는 스스로가 미웠다. 기분 좋게 여행 와서 외국어에 능통한 그를 칭찬하기는커녕 그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 전부에게 가시를 세우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모르는 언어, 모르는 사람, 모르는 웃음. 그런 것들을 온종일 반 발자국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선 울컥울컥 한 무언가가 불에 끓듯 치밀어 오르곤 했다. 

러시아어를 잘할 수 있었다면. 미리미리 공부해 뒀더라면. 하다못해 인사말 정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쿠로오가 대화를 시작하는 것까진 좋았다. 타지에 왔으니 그곳 친구를 사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었다. 

다만. 외래어로 쏟아지는 대화의 틈에 끼어들 수 없는 단절감, 분위기에 맞춰 어정쩡하게 웃어야 했던 어색한 공기, 들뜬 웃음 사이로 멀어져 가는 뒷모습,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그에게서 느껴버린 지독한 외로움은 후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화났구나.”

이런 옹졸한 자신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는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참을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설프게 둘러대 봤자 나한텐 안 통해.”

그러나 입이 떨어지기 직전 떼어나간 찰나의 주저를, 쿠로오는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일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항상 그랬다. 아카아시는 쿠로오 앞에만 서면 몸과 마음이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쿠로오의 속내를 파악하긴 복잡하게 널브러진 퍼즐을 1분 안에 맞추란 것처럼 느껴졌건만, 쿠로오는 한 눈에 아카아시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그의 핵심을 푹 찌르는 쿠로오의 통찰력은 아카아시에겐 무척 당혹스럽다가도 또, 부끄러웠다. 

어른스럽다. 능숙하다. 대단하다. 입에 꿀을 바른 수식어구는 쿠로오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노력도, 무덤덤한 표정 아래 감춘 초조함도, 평정심을 노래하는 강박관념도, 은근한 투쟁심과 승리의 욕구마저도. 착한 아이 칭찬하듯 쿠로오는 그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질투했구나, 케이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큰 손아귀가 짤막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뜨렸다. 괜한 오기가 발끈해 무어라 반박하려던 차, 귓바퀴에서 ‘쪽’이란 비현실적인 소리가 났다. 

“귀여워.”

익숙한 입술의 감촉과 앞뒤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애정 넘치는 속삭임, 뒤에서부터 은근하게 감싸 안아오는 팔뚝까지.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됐다. 아카아시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온몸에서 열이 들끓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쿠로오였다. 상대가 쿠로오만 아니었어도 아카아시의 이성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며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 때문에 뚱해진 우리 케이지 기분 풀어줘야겠지?”

제 진심을 훤히 꿰뚫다 못해 그것을 귀엽게 여기는 쿠로오가 얄밉기까지 했다. 됐네요. 달콤한 제안을 보기 좋게 되받아치려던 말대답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말았다. 

“아. 아? 쿠로오씨?!”

무릎 아래에 팔을 넣고 뒷목을 감싸 안아 그를 번쩍 들어 올린 쿠로오는 이미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어.”

아예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는 쿠로오를 보고 있자니 결국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거우니 내려달라는 말은 쿠로오에게 통하지 않았으니 소원대로 그의 목덜미를 꽈악 끌어안았다. 불규칙한 맥박이 얇은 피부 결 아래 쿵쿵 울려댔다. 

쿠로오는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방 안 곳곳을 빛내는 전기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틀 가까이로 다가갔다. 창문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 위로 아카아시를 내려둔 후 바깥 풍경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는 말대답은 5층 아래로 보이는 키예프 시내 전경에 목구멍 아래로 쏙 들어갔다. 

해가 저물기엔 아직 넉넉한 오후, 노란 햇빛 한 움큼은 상냥히 빛났다. 싸늘한 봄바람이 숨을 불어넣는 거리엔 여전히 인파가 북적였다. 엣취, 귀여운 재채기 소리가 쿠로오의 귓전에 와 닿았다. 시선은 창밖에 고정시킨 채, 제 목에 두른 팔을 풀어 손아귀를 겹쳐 잡아 보았다. 조금 차가웠다. 그것을 그대로 뺨에 가져가며 쿠로오가 말했다. 

Мы любители.

네? 유창한 문장 앞에서 아카아시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 해 봐.”

쿠로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아카아시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못 해요.”

“들리는 대로 말하면 되잖아.”

“못한다고 했잖아요.”

가시 돋친 말투였다. 쿠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듣기만 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에선 여전히 생글생글한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의중을 전혀 짐작 못하겠다가도 자꾸만 러시아어로 말하는 쿠로오가 얄밉게 보였다. 일방적으로 선이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싫은 감각. 아카아시는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진즉에 눈치채고 있어서 쿠로오는 일부러 아카아시의 손을 사로잡았던 걸까. 빠지지도 않을 만큼 제 손을 세게 움켜쥔 쿠로오의 손아귀가 오늘따라 밉보이기만 했다.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래어에 지쳐 아카아시마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귀에 익은 문장이 들리자 아카아시는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처럼 훽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을 보고 있어야 할 쿠로오의 샛노란 동공은 어느새 아카아시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고 찬바람은 꽉 닫힌 유리창을 살살 건드렸으며 기울어진 햇볕이 쿠로오의 싱그러운 눈웃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겹겹이 쌓여 얼음장을 이루던 섭섭함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애정이 담뿍 담긴 한마디에, 겨우 말 한마디에, 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슬픈 듯 기쁜 듯 글썽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쿠로오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뒷목을 힘껏 잡아끌었다. 꽃잎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꿀을 찾아 헤맸다. 언제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운 사람들처럼 틈새 하나 내어주지 않고 찰싹 달라붙어 짙은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낯선 공기에서 오가는 혀와 타액이 생소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 말을 내뱉기 위해 떨어진 입술과 입술 사이엔 은빛 실이 짧게 늘어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대답을 들어서 였을까. 놀란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이, 아카아시는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키스 앞에서 쿠로오의 이성이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렸다. 그런 쿠로오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아시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혀를 움직이는 것에만 몰두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촉박한 여행 준비 속에서 아카아시가 유일하게 외워두었던 단 한 마디의 문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형식적인 회화보다 아카아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문장은.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의 여행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 * *


Мы любители.

-우리는 연인입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널 사랑해, 아카아시.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아래 유의 사항을 읽지 않아 생긴 불이익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멜 입니다.
18년도 1월 6일 부산에서 개최되는 후쿠로다니 온리전 ‘사립 후쿠로다니 학원 입학설명회’ 학7 <보쿠아카 신혼방>인포입니다.



*신간




환양換陽 | A5 | 전연령가 | 르노와르지 | 무광코팅 | 180p | 20000원
: ‘인어’를 주제로 한 멜(@melting_winter)과 적선(@Lunarr37)의 보쿠아카 트윈지

1부: <blühen(블뤼엔)> 적선
-인간 보쿠토 X 인어 아카아시
-키워드: 동화
-줄거리: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에 사는 꼬마 도련님 코타로.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책장 뒤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수조에 갇힌 인어 아카아시를 만나게 되는데...


1부 샘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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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Merrowtale> MELL
-인어 보쿠토 X 인간 아카아시
-키워드: 잔혹동화, 식인 소재, 열린 결말
-줄거리: 오대양을 아우르며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가는 인어 일족. 그들을 대표하던 보쿠토 코타로는 900년을 조금 넘긴 기나긴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굳은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고에 휘말린 그는 이와테현의 구석 중 구석, 어느 적적한 해변가로 떠밀려 오게 된다. 육지 자체를 천히 여기며 그 중에서도 바다를 어지럽히는데 선두주자 노릇을 하는 인간을 버러지 보듯 천대하던 보쿠토. 그런 보쿠토를 마냥 순수한 눈으로 올곧게 바라봐주는 아카아시에게, 보쿠토의 마음은 큰 변이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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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들은 재판 예정이 없습니다.
*재록본 이외의 구간은 포스타입에 유료 발행되어 있습니다 : https://melting-winter.postype.com



**최종 수정 18.1.14


기간: 끝났습니다~
문의: 트위터​ 및 에스크



건조한 입김이 탁한 회백색을 띠었다.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이 지나치게 흐렸다. 거 좀 있으면 장난 아니게 쏟아지겠구먼.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노인의 혼잣말을 곁눈질로 들은 남자는 다시금 구름 낀 하늘을 봤다. 사무치도록 시린 날씨였다. 

언제 눈이 쏟아질지 모르는 삿포로의 하늘을 우두커니 선 채 들여다 본지 몇 분. 어느새 정류장 근처엔 서넛의 사람 그림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이라는 안내와 함께 한 대의 버스가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갔다. 남자가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영하권을 훨씬 웃도는 이 추운 날씨 속에서 남자가 오래도록 기다린 버스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정차한 버스가 뒷문을 좌우로 열었다. 털모자와 패딩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꽤 두툼한 지갑이 카드 단말기를 향했다.

[카드를 한 장만 찍어주세요.]

마음이 급할 땐 되는 일이 없는 법이었다. 

언제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쿠니미의 눈썹 사이가 팍 좁아졌다. 그는 앞쪽의 운전석을 향해 조금 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를 복창했다. 친절한 운전수는 천천히 하라는 듯 흰 장갑을 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쿠니미가 버스 안 쪽으로 완전히 올라타자 활짝 열려 있던 뒷문이 천천히 닫혔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유일무이한 교통카드를 찾아 지갑 속을 헤맸다.

[반갑습니다.]

정상 승차를 알리는 녹색 불이 깜박거렸다. 다행히 이번엔 성공한 모양이었다. 쿠니미는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난데없는 소동에 진땀을 뺐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버스 내부를 둘러본 그는 이내 서서 가는 것을 택했다. 유일하게 빈자리로 남아있는 맨 뒷좌석까지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그만큼 발걸음을 옮기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까지 몇 정 거장 되지 않다는 것 또한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저기요……!”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버스 손잡이에 몸을 맡긴 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여린 음성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담한 체구의 여학생이 뺨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여학생은 쿠니미 쪽으로 다가가면서도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쿠니미는 귀찮은 상황에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곤두섰다. 못 들은 척을 할까, 모른 척을 할까. 다음 스테이지의 선택지를 고르듯 사고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불행히도, 여학생의 이어진 대답은 쿠니미의 실낱같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거……. 지갑에서 떨어진 것 같아서요.”

그녀의 양 손바닥 안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아.”

인상 쓰듯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당혹감으로 변질됐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면부지의 사람 손안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 쿠니미의 안색은 누가 봐도 확연히 뒤바뀌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진심과 성의가 짙게 담긴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올라가 있기까지 했다. 그가 놓친 무언가를 건네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손끝이 스치고 무뚝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그러자 여학생은 전신이 불에 들끓듯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벌게진 뺨과 귓불을 식히기 위해 그녀는 그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뒷자리, 같은 교복을 입는 일행들의 재잘거림이 그녀의 등을 응원했다.  

아쉽게도 쿠니미는 형식적인 인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건네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탄 순간부터 뭇 여학우들의 주목을 받던 그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렇게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엔 손바닥보다 한참 작은, 3X4 사이즈의 증명사진이 있었다. 



* * *


‘12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사이 전국적으로 첫눈이 내릴 전망입니다.’

그 날 아침 기상 속보를 기억했다. 기상캐스터의 자주 빛 정장이나 머리스타일이 영화 필름처럼 선명했다. 아침으로 먹었던 쌀밥의 뒷맛이나 된장국에 들어간 두부의 형태는 기억 못 하면서 그녀의 가식적인 감탄사나 사소한 표정 변화는 선명히 기억했다. 티브이 화면 너머 ‘첫눈’의 수식어구는 낱낱이 기억했다. 

왜 그랬을까. 

남에겐 특별한 것이 나에겐 특별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남에겐 평범한 것이 나에겐 유별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과 ‘눈’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의미일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전혀 특별한 의미로 와 닿지 못했을 뿐이다. 돌고 도는 어느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 나는 오래도록 ‘첫눈’이란 낯 간지러운 단어를 미적지근한 온도로 흘려 넘겼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추억이란, 전혀 상관없는 것을 끌어다 멋대로 방아쇠를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나의 의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혹하게도. 



* * *


“거기서 턱을 조-금만 낮춰 볼까요? 네에, 그런 식으로. 좋아요, 눈에 힘주시고…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짤막한 신호음과 함께 인공조명이 두어 차례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개의 라이트 박스가 이루는 대각선의 교점엔 익숙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은 어색한. 약간은 뻣뻣한. 약간은 긴장된. 부자연스러운 미소 한 줌이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네, 끝났습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레 왁스로 고정시킨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울상이 된 눈알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푸핫, 야 방금 오이카와 얼굴 봤냐? 이케멘, 이케멘 노래를 부르더만~ 이케멘 다 죽었네.”

수고하셨습니다, 란 인사가 나오기도 전 하나마키가 폭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핀잔을 가만히 듣고 넘길 리 없을 오이카와가 꽥 소리를 질렀다.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던 눈썹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머리털에 힘 줄 때부터 알아봤다. 졸업사진은 남은 평생 갈 텐데- 안타깝게 됐다.”

말과는 달리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어조였다. 무심하게 태클을 걸어준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의 이마 정 가운데엔 깊은 빡침을 뜻하는 힘줄이 우수수 돋아났다. 이제 막 촬영을 끝마치고 장비를 접고 있던 사진사에게 오이카와가 무어라 외쳤다. 사진사는 곤란하다는 듯 볼만 긁적였다. 오이카와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졸업사진은 원래 평소대로 찍는 거다, 응꼬 야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이와이즈미까지 가세하자 마침내 오이카와가 발끈하듯 폭발했다. 

“하아? 맛키, 맛층, 이와쨩이야말로 아까 엄-청나게 이상했거든? 다들 초초초 썩은 표정으로 찍혔을 게 분명하거든?! 에붸붸붸, 다!”

오이카와는 쫙 펼친 양 손바닥을 관자놀이 옆으로 가져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몰골에 자칫 침체될 법했던 촬영장 공기가 부드럽게 녹아 들었다.

시청각 실을 통째로 빌려 마련한 임시 촬영장엔 아오바죠사이 배구 부 이외의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3학년들의 졸업사진 촬영 시즌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고, 해마다 인터하이, 봄고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배구 부는 매해 타 학생들과는 별도로 졸업 사진을 촬영해 왔기 때문이다. 늘 상 잔주름을 달고 살던 교복 바지가 매끈하게 다려져 있고,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넥타이가 셔츠의 빳빳한 카라를 정갈히 감싸 안았으며 챙겨 입기 귀찮다는 핑계로 빼입기 일쑤였던 조끼를 갖춰 입었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 교복 재킷까지 더해진 채로 말이다. 

“주절주절 시끄럽네. 눈 코 입 멀쩡하게 나오면 땡이지.”

“졸업 사진은 평생 남는단 말이야! 이 오이카와 씨의 잘생김이 반의 반의 반도 못 담겼을 게 분명한데 어떻게 안 슬퍼할 수 있어?!”

“네 놈이 유별난 거다.”

망설임 없는 반박 조에 오이카와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보였으나, 이내 알만 하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하긴~ 이케멘의 고뇌를 이와쨩이 이해할 리 없지.”

구름 낀 하늘을 사라지자 오후의 햇볕이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 바깥의 찬 공기와 따뜻한 실내를 경계 짓는 창틀에 뿌연 김이 서렸다. 창밖으로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가 비쳤다. 오전 중 잠깐 내렸던 첫눈은 그것 위로 소복이 쌓여 있었다. 겨울답지 않은 햇살과 조금은 가라앉은 공기, 교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찰과 음, 퍼석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 아래로 흩어 떨어지는 눈 덩이. 

홧홧 거리는 등 언저리에 닿지 않는 팔을 열심히 뻗어 보며 울부짖는 오이카와, 실컷 때려놓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씩씩 열을 내는 이와이즈미, 잔뜩 성이 난 그의 어깨를 붙들곤 열심히 뜯어말리는 킨다이치, 한 발자국 떨어진 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즐거운 얼굴로 두 손 두 발 놓고 있는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평소와 다를 법 없는 풍경이 적절한 계절감을 만났다. 꼭, 잘 빚어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틀 가장자리에 등을 기댄 쿠니미는 여느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으로 뒤바뀌어가는 풍경을 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반쯤 감겨 있는 눈꺼풀이 사뭇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살은 그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보듬어 보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서였을까. 그림자가 드리워진 낯빛은 조금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 안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졸업인가.”

오래도록 교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마츠카와가 무릎을 폈다. 뻐근해진 허리께를 익숙하게 주무르곤 기지개를 켜듯 말했다. 후련하다는 어조로 말이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일순 찬물 끼얹듯 얼어붙어 버렸다. 암암리에 금기시되던 단어와 문장이 위태위태하던 맥을 단숨에 끊어버린 것처럼. 다 같이 입을 맞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죽음을 닮은 침묵이 도래한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킨다이치였다. 시큰대는 눈시울과 훌쩍이는 콧방울은 진즉에 불거져 있었다. 울음을 참듯 애꿎은 천장만 올려보던 와타리는 이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교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닫혔다.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숨을 죽인 울음소리가 간간이 배어 들었다. 

“뭐야, 왜 니들이 울고 그러냐.”

제일 먼저 수습에 나선 이와이즈미는 벌써부터 눈물바다인 킨다이치와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긁기 바쁜 야하바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졸업하는 건 우린데 왜 너네가 슬퍼하냐, 너무 염려하지 마라, 너희라면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우리 없다고 연습 게을리했다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위로인지 농담인지 구별 못할 말들이 거리낌 없이 오고 갔다. 

그러나, 그간 꾹꾹 눌러 삼키고 있던 슬픔과 설움은 이와이즈미의 말 몇 마디를 기폭제 삼듯 터진 둑처럼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한 몇몇 후배들을 시작으로 곧 교실 전체가 울음바다로 뒤바뀌어 갔다. 보는 사람마저 서러워지도록 엉엉 우는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이와이즈미를 도우려 마침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까지 팔을 걷어 부쳤다. 

쿠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미된 신파극에서 눈을 돌렸다. 창문 유리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찬 기운이 피부 결을 타고 들어와 뼈를 긁었다. 호, 하고 입김을 부었다. 입김이 닿은 주변만 얼어붙은 수증기가 뿌옇게 발했다. 무언가를 쓰려했는지 그의 검지가 유리창 쪽으로 바짝 가까워졌다. 손가락이 유리창에 닿기 직전, 그는 손을 내렸다. 

졸업(卒業). 첫눈(初雪). ……좋아해(好き).

결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적어보지 못했다. 평범한 나날 중 하나에 불과할 오늘에 특별한 의미를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쿠니미는 그랬다. 

“오이카와 넌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빨리 와서 한 마디 좀 해줘라.”

오이카와. 머릿속으로만 맴맴 돌던 단어가 귓전을 때리자 쿠니미는 흠칫 놀란 가슴팍을 남몰래 움켜잡았다. 뿌연 공백만 남은 창가에서 영화 속 풍경으로, 그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가 남겨둔 입김이 옅어져 갔다.  

“잠깐, 잠깐만! 선생님이 사진 바로 뽑아서 주실 수 있대. 이것만 확인… 하고…….”

제 얼굴이 떡하니 찍힌 모니터를 발견한 오이카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잠시 후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인화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떡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한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눈물 콧물 줄줄 흘리던 1, 2학년들이나 그들 달래주기 바쁘던 3학년들마저도 오이카와의 사라진 뒷말이 궁금해졌는지 속속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으하하하, 이게 뭐냐?!”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하나마키였다. 배꼽까지 잡아가며 통쾌하게 웃어대던 하나마키는 인화된 사진 한 장을 집으며 말했다. 

“내 사진이 백 배 천 배 잘 나왔겠는데? 야, 나 기념으로 하나만 줘라. 우울할 때마다 꺼내 봐야지.”

오이카와의 반응은 살피지도 않은 채 이와이즈미가 다음 사진 한 장을 잽싸게 낚아챘다. 

“눈 코 입 제대로 붙어있네. 딱 니 얼굴이구만 뭘. 이건 내 꺼.”

마츠카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농담으로 해본 소리였는데, 니가 진짜 니 무덤을 팠구나. 나도 들고 간다?”

오이카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건 참다못한 오이카와가 약 3초 후 괴성을 지를 거란 일종의 신호였다. 쿠니미는 익숙하게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아악! 니들 전부 절교야!!”

공들인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폭발해 버리는 오이카와의 뒤통수만 쿠니미는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오이카와의 모든 순간을 눈 안에 가득 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단단히 심통이 나 뾰로통하니 부푼 뺨이 귀여웠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며 축 쳐져 있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후 사진 속 제 얼굴을 재차 확인하곤 푹 실망해 버리는 옆얼굴이 퍽 예뻤다.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낮게 깔린 속눈썹, 흐트러진 뒷머리, 영 답답했는지 마음대로 풀어헤친 넥타이, 조금 큰 손, 곱고 긴 손가락,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 끄트머리.

“쿠니미쨩이 보기에도 이상해?”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던 걸까. 돌연 오이카와의 화살이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줄곧 제 쪽은 보지도 않던 눈이 예고도 없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쿠니미의 얼굴엔 당혹감이 짙게 흘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그는는 허겁지겁 눈알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왼쪽 가슴 언저리가 쉴 새 없이 펄떡거렸다. 꼭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 같았다. 

“자, 봐봐.”

그런 쿠니미의 반응이 생소했는지 혹은 그의 얼굴을 읽어낼 수 없는 까닭이었는지,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여덟 걸음쯤 떨어져 있던 거리가 이젠 반걸음조차 안 됐다. 머리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이성이 감전당한 듯싶었다. 

숨은 어떻게 쉬더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떤 거였지. 예전엔 어떻게 이 사람을 상대했지. 

뜨끈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역류해 올랐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피하고자 하는 마음,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자 은연중에 쿠니미는 자신의 팔로 상반신을 감싸 안았다. 꼭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역시… 이상한가?”

쿠니미의 반응을 ‘거절’로 읽어내서였을까. 한 풀 꺾인 어조가 자신감을 툭 잃었다. 큰 손바닥이 뒷목을 감쌌다. 곤란하다는 듯 지어 올린 웃음이 쿠니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급해진 건 쿠니미였다. 

“아, 그……. 저기!”

순간적으로 오이카와의 팔목을 낚아챌 뻔한 쿠니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그의 소매 부근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려다 이르게 포기를 선언하곤 부러 그것을 피해 돌아가려는 사람처럼. 

쿠니미가 붙잡은 덕분에 오이카와는 반쯤 돌아선 상반신을 다시 돌려세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궁금함을 한껏 머금었다. 반면 자신이 잡아 놓고도 놀란 쿠니미는 소리 없이 입만 뻥긋거렸다. 그를 돌려 세운 것까진 좋았지만, 무어라 말머리를 꺼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100미터 달리기를 방금 끝마친 사람처럼 호흡은 가빠지고 맥박은 용수철 마냥 튀어 오르고 산소 결핍의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했다. 

언제나 그렇듯, 쿠니미는 그의 앞에만 서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까지 이상하진 않은 것 같, 아요.”

간신히 대화 주제를 떠올려낸 쿠니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쿠니미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무언의 정적이 오히려 민망했다. 덕분에 귓불이 점점 뜨거워졌다. 길게 길러 넘겨 버린 앞머리가 이때만큼은 귀를 잘 가려주길, 쿠니미는 간절히 바랐다. 

짐짓 휘둥그레져 있던 눈이 조금씩 제자리를 되찾았다. 뒤이어 눈꼬리가 활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어설픈 미소가 미미하게 남아 있던 입술이 시원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

그는 활짝 웃었다. 연갈색을 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살이 포물선 형태로 접혔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턱과 한 톤 높은 음조와 말간 웃음이 오롯하게 쿠니미를 향한 순간이었다. 

“자. 쿠니미쨩도 줄게.”

오이카와는 자신의 소매를 붙들고 있던 쿠니미의 한 손을 잡아끌었다.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만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쿠니미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 뒀다. 난생처음 비를 맞은 꽃 마냥 놀람과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던 쿠니미는 한 발짝 늦게 그것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손바닥 안엔 웬 증명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그것은 여태 오이카와가 기대하고 실망하고 속상해하길 반복하게 만든 원인이 분명했다. 

“기념 선물.”

눈앞의 오이카와를 상대하기 바빠 미처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그것을, 쿠니미는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역시 어색했다. 그가 짓는 최고의 웃음을 본 직후여서 그랬을까.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의 미소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쿠니미쨩만 챙겨 주는 거야.”

‘고마워’란 말과 함께 최고의 웃음을 선물 받았다. 특별, 이란 말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제와 말을 번복할 순 없었다. 쿠니미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소중하단 걸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멍청아. 척 들어도 네 기분 생각해서 한 소리인 걸 왜 모르냐.”

어느새 오이카와 곁으로 다가온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프다며 우는 소릴 낸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보던 쿠니미는 씁쓸한 웃음만을 남겼다. 

정말… 제가 가져도 되나요?

재차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 목울대 아래로 가라앉았다. 감사 인사조차 건넬 틈이 없었다. 어정쩡하게 벌어져 있던 입은 저절로 닫혔다. 손등엔 누군가의 감촉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피부 곳곳에 열꽃이 피어날 것 같았다. 

손안에 쥐어진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이상했다.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감지 않으려고 힘을 꽉 준 눈매가 어설펐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환한 웃음과 이것.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아닌 것. 웃으면 웃는 대로 세상 모든 종류의 꽃이 만개했다 져버리는 듯한 착각이 이는 것과 결코 그렇지 않은 것. 

쿠니미는 옅게 웃었다. 

한쪽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위치 따윈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쿠니미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이 마음에 들고 말았다. 언젠가는 잊힐 단편적인 웃음보다, 영겁에 가깝도록 유지될 어설픈 미소가 좋았다. 비록 렌즈를 향한 형식적인 웃음일 지라도, 그것은 언제까지고 오로지 쿠니미 한 사람만을 가리켜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 * *


몇 년 전 그때처럼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꽤 오랜만이었다. 요 몇 년 간 취업 준비, 졸업 준비에 정신이 없다 보니 사진 한 장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고, 다섯 번의 내정 끝에 취업처도 간신히 정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이카와 생각이 전혀 안 났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겠지만. 

쿠니미에게 있어 그것은 부적과 다름없었다. 증명사진만이 아니었다. 그것에 담긴 계절의 한 때, 숨 죽여 참는 울음소리, 함께 있을 수 있던 마지막 교실 풍경, 심장 언저리를 간질거리게 하는 추억. 그 모든 것이, 사진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꽤 닳았네.”

이 부적을 쿠니미는 지갑 깊숙이, 가슴 깊숙이 봉인한 채 이따금씩 꺼내 보곤 했다. 그때의 기억과 풍경을 조심스레 떠올리곤 예나 지금이나 불규칙하게 쿵쾅 이는 가슴 언저리를 꾹 짓누르곤 했다. 그렇게 어딘가 어색한 이목구비를 한참을 어루만지다 지갑 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증명사진의 가장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고 얇게 앉은 코팅이 벗겨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쿠니미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증면사진을 만져보았다. 뭉근한 손놀림으로 오이카와의 굳은 입꼬리를 매만졌다. 언제 보아도 그때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인 오이카와에게 

“잘 지내요?”

의미 없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차임벨을 눌렀다. 목적지에 다다른 버스는 곧 바퀴를 멈췄다. 보도블록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았다. 차가워, 감탄사도 내뱉을 겨를도 없이 저절로 뒷목이 꺾였다. 

첫눈이었다. 



“매번 감사합니다, 형씨. 조심히 들어가십쇼!”

차임벨 소리가 맑게 울렸다. 살짝 밀어낸 목재 문이 작게 덜컹였다. 샴페인을 담은 길쭉한 쇼핑백이 남자의 손목을 타고 달랑달랑 흔들렸다.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온 추위가 뺨을 스쳐 지났다. 남자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따뜻한 가게 안에서 30분이 넘도록 진열장을 살펴만 보고 있었으니 한기가 제법 낯설 만했다. 가던 길을 잠깐 멈춘 남자는 목 언저리를 칭칭 감싸 둔 와인색 머플러를 매만졌다. 한파가 들어올 틈이 없도록 단단히 매듭짓자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했다.

먹먹한 겨울 하늘은 별 한 점 내보이지 않았다. 꼭 오래도록 들춰보지 않은 일기장 위로 쌓인 먼지더미 같았다. 올해도 눈 보긴 글렀네. 남자는 짧게 혀를 차곤 발걸음을 서둘렀다. 목에 두른 머플러는 구둣발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까지 막진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걷는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어디선가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느리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구세군’이라 쓰인 자선냄비 곁. 빨간색 점퍼를 입은 노인이 종을 흔들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인조적인 것인지 모를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종소리에 맞춰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번잡한 소음으로 가득 찬 거리 안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들리기란 쉽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났다. 무언가의 코스프레라도 한 것처럼 붉은색과 흰색으로 무장한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누볐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는 언젠가의 봄처럼 핑크빛을 띠진 않았다. 굵직한 뿌리에서부터 타고 올라 얇은 가지 끄트머리까지 꼼꼼히 감긴 전구는 무수한 빛의 무리를 뽐냈다. 꼭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또 교회나 성당 같은 것이 어딘가에 있었는지 성가대의 합창이 환청처럼 까마득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보기 좋게 눈살을 찌푸렸다. 탄식처럼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거리와 순진한 얼굴로 함박 웃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통신 수단을 꺼내 들었다. 소매 아래 감춰져 있던 맨손이 찬 공기에 닿아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급하게 나온다고 장갑을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자주 찾는 가게에서 좋은 술이 들어왔다며 오늘 안에 꼭 와달라는 연락만 없었어도, 그는 이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주말을 집구석에 틀어박혀 평범하게 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괜히 나왔어.”

그럴듯한 소리를 내자 얼어붙은 입김이 곧장 뿌옇게 흩어졌다. 머플러에 턱을 푹 내리꽂은 남자는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끌벅적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먼 전원 버튼만 눌렀다가 떼어냈다. 무채색의 바탕화면이 꺼졌다, 켜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규칙적으로 놓인 보도블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에 있을 오거리만 건너면 즐비한 주택가가 바로 코앞이었다. 

그 몇 분 사이 남자는 버튼을 누르는 기계적인 손동작에도 신물이 난 듯했다. 남자는 다른 관심사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뒤적였다. 몇 도쯤 올라간 주변 공기와는 전혀 다른 노래를 듣기 위해 음악 어플을 실행시키자 이번엔 이어폰이 없음을 깨달았다. 장갑과 함께 깜박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화면을 터치하는 손가락은 매 순간 느려졌다. 잔뜩 얼어붙은 손가락 끝과 터치스크린은 제 주인의 말을 들으려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턱턱 막히는 숨통을 환기시키려고 뒷목을 꺾었다. 

그 순간 마츠카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거리 한가운데, 매해 돌아오는 기념일마다 휘황찬란한 장식들을 감싸 안는 구상나무가 트리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채 넓은 아랫단에는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가 비치되었고 풍성한 잎사귀들 사이사이엔 가로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거대한 빛 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렸으며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은 끄트머리엔 사람 머리 만한 별 장식이 번쩍번쩍한 금빛을 발했다. 

그것이 안겨주는 웅장한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츠카와는 무의식 중에 휴대폰 카메라를 높이 들어 올렸다. 조잡스러운 셔터 음이 여러 번 났다. 만족할 만큼 찍었다 싶다가도 마츠카와는 그 아름다움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성탄절이니 캐롤이니 산타니 그에겐 전부 내키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트리만큼은 남다른 의미였을까. 

그림 같은 풍경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선 채 쳐다보고 있던 마츠카와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지 느릿느릿 발걸음을 뗐다. 오거리 맞은편 너머에 위치한 주택가 쪽이 아닌, 트리의 중심을 향해서. 

“여기, 빈자리인가요?”

한 사람 남짓 들어갈 법한 화단 턱을 가리키며 마츠카와가 물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좌우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무리는 빈자리와 마츠카와를 번갈아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엉덩이를 붙이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앉았다. 

마츠카와는 문득 김 빠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시끄러운 캐롤이나 성탄절을 알리는 종소리, 떼로 움직이는 산타클로스 무리를 보아도 꿈쩍도 않던 가슴이었다. 마냥 무덤덤하기 만할 줄 알았던 그것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감화라도 됐던 걸까. 트리를 본 이후부터 그의 가슴께는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뒤늦게 찾아온 감성적인 것이 시비조로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았다. 

“쓸데없이.”

왼쪽 가슴이 묘하게 욱신거렸다. 제법 큰 손은 코트 안을 파고들어 스웨터에 잔주름이 질 만큼 아픈 부위를 세게 틀어쥐었다. 

어라, 어째 코끝까지 찡했다. 위험신호였다. 안구 안 쪽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뜨끈한 기운이 차오를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마츠카와는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나머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빠르게 잠금 화면을 풀고 조금 전 찍었던 사진을 재차 확인하러 사진첩을 열었다. 

그런 날이 있다. 묘하게 잘 풀리지 않는 날. 악재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힘든 작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사람을 뒤흔들게 만드는 날은 꼭 있기 마련이다. 마음 편히 늘어지고 싶은 주말에 가게를 찾아달란 연락, 급하게 나온다고 챙기지 못한 장갑과 이어폰,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왔다는 한파, 유독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귀청을 울리는 소음, 그리고 지금. 

“허……. 이런 기능이 있었어?”

마츠카와에겐 오늘이 딱, 악재가 겹치는 날이었다. 

‘3년 전 오늘’이란 문구를 어색하게 만들 만큼 사진 속 마츠카와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칼, 와인색 머플러, 추위로 빨갛게 물든 콧방울. 

“내년엔 새해 운세 포기할까.” 

현재와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단 점이었다. 

“보나 마나 대흉(大凶) 찍혀 있을 거 같은데.”

사진 속 마츠카와의 옆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남자는 그와 똑같은 색의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꼭 지금처럼, 성대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웃고 있었다. 상큼한 미소를 활짝 지어 올리는 것이 일상처럼 능숙해 보이는 남자와 달리, 마츠카와는 미소를 지은 건지 안 지은 건지 모를 만큼 옅게 웃고 있었지만. 

“……미치겠네.”

꽉 움켜쥔 가슴팍은 조금 전보다 훨씬 괴로운 통증을 수반했다. 머릿속으로만 막연히 그리고 있던 얼굴을 사진이란 매개체로 다시 보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조심조심 손가락을 움직였다. 추위에 마비된 손끝이 딱딱한 화면을 더듬거렸다. 그의 엄지는 사진 속 남자의 초콜릿색 머리칼에서 좀처럼 떼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만지고 있으면 춥고 서늘한 감각이 언젠가는 결 좋은 머리카락 느낌으로 변하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올리며. 

활짝 휘어진 눈꼬리와 방긋 올라간 입술선, 진주빛 피부를 타고난 남자의 얼굴에게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선을 던지고 있었을까. 새하얀 알갱이가 액정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무언가의 알갱이는 평평한 화면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검지 손톱 만한 작은 것은 오이카와의 뺨에 몸을 내던지곤 언제 자신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흔적을 지워 없앴다. 

겨우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은 마치 느린 속도로 재생되는 영화 같았다. 초점을 잃은 멍청한 눈을 하고 있던 마츠카와가 퍼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무렵이었다. 그의 주변은 이상하리 만치 웅성거렸고 누군가의 외마디 말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눈이다!”

그 한 마디가 마츠카와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그를 꿈에서 일깨우듯 또 다른 눈송이가 그의 입술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따뜻한 입술에 맞닿은 눈은 그대로 형체를 잃었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만이 눈송이의 존재감을 알렸다. 

사방에서 감격에 겨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찰각대는 셔터 음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구나, 누군가가 지나가듯 외쳤다. 마츠카와는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마음 편히 늘어지고 싶은 주말에 가게를 찾아달란 연락, 급하게 나온다고 챙기지 못한 장갑과 이어폰,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왔다는 한파, 유독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귀청을 울리는 소음, 그리고 지금. 

성대하게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 우연처럼 마주한 빛바랜 기억의 낱장, 때맞춰 내리는 눈, 화이트 크리스마스. 

‘내년 크리스마스엔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신사 참배를 갔을 때 한껏 진지해진 옆얼굴로 손바닥을 맞대는 오이카와를 보며 의아해진 마츠카와가 먼저 말문을 꺼냈었다. 뭘 소원으로 빌었길래 그렇게 진지하냐고. 

사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성실한 답변을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시즌엔 더 잘하게 해달라던가, 좀 더 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해달라던가의 내용이겠거니 싶었다. 

그런 그였기에, 단순히 ‘내년 크리스마스엔 눈이 오면 좋겠다’고 답하던 오이카와를, 마츠카와는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오지 않았지.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그렇게나 손꼽아 기다리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보니, 정작 그의 곁엔 소원을 빈 당사자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너는. 일부러 뒷말을 숨겼겠지. ……나 혼자만 바보 만들어 놓고.”

마츠카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건 산타클로스가 보내주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미쳤다고 해도 좋고, 눈에 취해 감수성이 폭발한 거라 해도 좋고, 구질구질하다며 손가락질당해도 좋았다. 자신은 크리스마스의 마법에 걸렸다고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의 주문을 외웠다.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외운 번호를 꾹꾹 누르다 말고 잠시 실소를 터뜨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통화 연결 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의 당연한 물음을 듣는 순간 마츠카와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전화번호를 바꾼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자신을 기억했다면, 첫마디는 ‘여보세요?’가 아닌 오랜 침묵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겨우 전화 한 번 한 게 뭐 대수라고 성대가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오랜만이야.”

여보세요, 누구세요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던 수화기가 굳게 다물렸다.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이내라며 마츠카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 일은 아니고……. 여기, 눈 오거든.”

잘 지내냐를 차마 뱉지 못한 입이 딴 소리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잘 지내냐, 고 물었을 때 ‘잘 지낸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대로 말문이 턱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눈송이를 소록소록 날리는 하늘 너머 멀리 시선을 던졌다.

“너, 눈 좋아하잖아.”

한참의 침묵 끝에 오이카와는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랬었나.]

그마저도 냉정한 어조였다.  

“그랬어.”

[그래? 잘 됐네. 여기는 눈 안 와.]

마츠카와는 서글프게 웃었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끊어도 되는 거지?]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돼…….”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전화를 더 붙잡을 수 있는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대화가 좀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뾰족한 방도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금세 그칠 줄 알았던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얇게 퍼져 쌓인 눈송이처럼 그의 머릿속도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내 마츠카와는 입술을 달싹였다. 운세에 대흉이 나오든 두고두고 오늘을 후회하든 평생의 행복을 오늘과 맞바꾸어 다 반납하든 상관없으니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는 틈은 달라고. 눈을 쏟아뜨리는 하늘에게 빌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꺼진 통화만이 뚜, 뚜 소리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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