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님 리퀘



“실례합니다~”

목재로 된 미닫이문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서적에서만 풍기는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무로 된 책장, 칸칸을 빼곡하게 채운 서적들. 도서실로 들어서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때는 봄.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왔다. 크림색 커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오후 세 시의 햇볕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알록달록한 새의 지저귐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어디 보자.”

오이카와는 눈에 띄는 책장 앞을 서성이며 눈높이에 맞는 책들의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훑어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다. 자신도 모르게 신바람이 난 오이카와가 헛기침 몇 번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독서’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철부지 아이가 장난을 준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처럼. 오이카와의 두 눈은 반짝반짝한 빛을 띄었다. 

오이카와는 얼핏 보아 제일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의 중간 즈음되는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치곤 그 사이에 이목구비를 깊이 파묻었다. 종잇장과 눈알이 부딪힐 만큼 거리감이 없었으니 그 안에 적힌 활자가 읽힐 리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의 목적은 책이 아니었다. 

양 손에 펼쳐 든 책으로 얼굴을 가린 자세 그대로, 오이카와는 게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떨리는 숨소리가 크게 나버릴까 호흡까지 꾸욱 참아낸 채. 이윽고 책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오이카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 모서리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귀에 들리는 건 잔잔한 바람 소리, 커튼이 나부끼는 나긋나긋한 울림. 별 다른 반응이 없자, 오이카와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쿠니미쨩?”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았다. 책장에 몸을 바짝 붙이고 얼굴의 절반을 내밀었다. 

어딘가 들뜬 기분이었다. 봄이라서. 벚꽃이 만개해서. 그런 식상한 이유가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문께로 벚꽃 잎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내리 앉았다. 그 솜털 같은 몸짓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심장이 뻐근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나무를 등진 도서실 구석, 쿠니미는 한 폭의 그림을 배경 삼아 단잠에 취해 있었다. 

“어~이.”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쿠니미를 부르는 오이카와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관찰력 좋고 잠귀 밝은 쿠니미가 인기척을 전혀 못 느낄 만큼 곤히 잠들어 있단 사실이었다.

“진짜 자는 건가?”

쿠니미는 기본적으로 낮잠이 많은 타입이었다. 부 활동을 제외하면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조차 깨어 있는 쿠니미를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자기 앞가림을 전혀 못하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연비 좋고 효율 좋고 늘 냉정한. 멀지 않은 과거, 오이카와는 자신이 보아온 쿠니미를 단칼에 정의한 적이 있었다.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을 사실이라 말했는데 무엇이 바뀔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정말, 내가 들어갈 틈 하나 안 주는구나.”

그가 쿠니미를 단순한 후배 이상으로 보게 된 것에 있었다. 

이층짜리 단출한 책장을 베개 삼아 잠든 쿠니미의 곁으로 오이카와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이카와 못지않게 잡티 하나 없는 상아색 피부.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 앞머리. 윤기마저 감도는 칠흑빛 머릿결.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옅은 그늘. 규칙적으로 쌕쌕거리는 숨결. 호흡을 따라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와 가슴. 

참 고운 얼굴이었다. 

아빠 다리로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댄 쿠니미 앞으로 오이카와가 무릎을 굽혔다. 굽힌 무릎 위에 양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었다. 그가 잠이 많아 좋은 점이라 함은, 이렇듯 쿠니미의 얼굴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단 점이었다. 

“잠만보야, 쿠니미쨩은.” 

반면, 짝사랑 상대가 온종일 잠에 취해 있는 터라 변변한 대화의 실마리 한 번 잡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뾰로통해진 오이카와는 잘 뻗은 검지로 쿠니미의 볼을 쿡쿡 찔러댔다. 몰캉한 볼은 찔리면 찔리는 대로 푹푹 들어갔다. 번듯한 이목구비에 고정된 시선을 살짝 내리니 그의 허벅다리 부근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책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도 잘 줄은 몰랐는데.”

봄바람이 상냥한 숨결을 불어넣자 창틀 안 쪽으로 벚꽃 비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제히 낙하하는 벚꽃 잎들과 함께 쿠니미가 읽고 있던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영화 속 주인공 같아. 쿡쿡 대는 개구 진 웃음이 바람결에 새어 나왔다. 스쳐 가는 듯한 행복한 기분도 잠시.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읽고 있었을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에 부릅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자세가 자세다 보니 거꾸로 펼쳐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한눈에 읽기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남은 수단은 하나 뿐이란 걸 오이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큼, 흠. 쿠니미쨩이 뭘 읽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쿠니미쨩이 조, 조, 좋……. 하여간 그런 불순한 동기로 가까이 가는 건 절 대. 절대 아니니까…….”

쥐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쿠니미 옆에 안착하려는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쉴 새 없이 쿵쾅 이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겨우겨우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지만 그와 오이카와 사이엔 여전히 한 뼘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한 줌의 핑크빛 꽃잎이 둘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갔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이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따라 혈류가 거꾸로 치솟았다. 화끈한 열기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쭈뼛 세웠다. 이러다 심장 마비나 호흡 곤란으로 당장 죽어 버리면 어쩌지. 눈앞이 점멸해 나가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 기억이 나질 않자 오이카와는 문득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던 것이다. 걱정도 잠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새끼손가락이 달팽이 기어가듯 거리를 좁혀 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쿠니미 쪽으로 기울어진 몸은 마침내 옷자락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남청색의 와이셔츠 소매가 맞닿아 바스락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채 그대로 호흡을 멈춘 오이카와는 최대한 조용히, 느리게 옆 눈을 흘겼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종잇장이 쉴 틈 없이 팔랑거리는 탓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었다. 

“고래?”

나부끼는 책장 하나를 잡아 앞뒤를 살폈다. 역시나 고래였다.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손바닥 한 면을 쫙 펼쳐 쿠니미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좌우로 세게, 약하게, 빠르게, 느리게 흔들어 보았다. 쿠니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샐쭉 웃었다. 

“잠깐만 책 좀 볼게.”

특유의 개구 진 미소가 폭발하기 직전의 설렘과 긴장감을 살짝 가려 주었다. 다행히 쿠니미는 책을 세게 잡고 있진 않았다. 뭐, 책 표지에 껌 딱지처럼 달라붙은 엄지와 검지만큼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손수 떼어내야 했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것 이외엔 별 다를 게 없었다.

“허먼 멜빌. 백경(白鯨).”

헤에, 이런 책을 좋아하는구나. 꽤 두꺼운 책이긴 했지만-무려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를 자랑했다- 쿠니미가 읽는 거라면 자신도 읽어봐야 하지 않겠냐며 속으로 떵떵거리던 오이카와는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분명 일본어로 쓰인 게 맞는데, 일본어가 아닌 듯했다. 차라리 암호문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미간에 인상을 팍 주며 문장 하나하나를 꾸역꾸역 해석하다 얻어낸 결론은 이런 어려운 책을 이해하는 쿠니미가 대단하다는 것뿐. 세 페이지나 넘겼을까. 오이카와는 문득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묵직해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어……!!”

혹시나 싶었다. 설마 싶었다. 책에서 떨어진 눈알이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정수리를 확인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굽었던 척추가 자동적으로 곧추섰고 쿠니미의 뺨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 신경이 바짝 날을 세웠다. 불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이 미묘한 공기 속에서, 상황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망할 오이카와!! 수업 끝나면 교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이와이즈미였다. 도서실을 쩌렁쩌렁 울리다 못해 학교 전체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외마디 고함에 오이카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워워- 진정해, 에이스. 어차피 캡틴 여기 있을 거 뻔히 아는데 왜 소리를 지르냐.”

“그러다 고혈압 오르겠다. 일단은 진정 좀 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덤으로 말이다.

오이카와는 사고를 빠르게 굴려야 했다. 쿠니미와 자신이 함께 있는 걸 보이는 것까진 상관없었다. 부 활동 시작 시간까지도 아직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엔 노기가 없었다. 그저 제 말을 무시하고 도서실로 튀어온 자신을 문책하러 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상대하는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쿠니미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르고 쓸데없이 화병만 많은 이와이즈미였다. 쿠니미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몰골을 보고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 고함 소리에 쿠니미가 깨기라도 한다면.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제 얼굴을 발견해버린다면. 쿠니미 자신이 들고 있어야 할 책이 제 손에 들려 있다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피한다. 조용히 시킨다. 쫓아낸다.”

그 세 문장을 자기 암시하듯 되뇐 오이카와는 책장 사이로 얼핏 스친 낯익은 실루엣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마츠카와였다. 이와이즈미가 아닌 것에 속으로 쾌재를 외친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에게 온갖 눈짓 발짓을 섞어가며 제 절박한 상황을 표현했다.

쉬이- 조 용 히! 자 고 있 어. 자 고 있 다 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설명을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고 말이다. 다행히 마츠카와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치 즈 햄 버 그 10 개. 알겠지? 10 개 야. 

협상의 대가는 잔인했지만.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이며 다시 한번 10을 강조하는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는 이를 갈았다. 그래도 다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오이카와는 한 시름을 놓게 되는데, 

“야. 오이카와 좀 늦을 거라던데.”

“뭐?! 여기서 더 늦어? 왜! 연락 왔어?”

“소리 낮춰. 일단 도서실이잖아.”

“어……. 응.”

“나한테 라인 와 있더라고. 쿠니미가 좀 다쳤대. 그래서 양호실 들렀다 곧장 부실로 간다고……. 아,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진 말라 더라. 금방 간대.”

이와이즈미의 반응을 비롯해 혹여 하나마키가 자신이든 쿠니미든 발견하면 어쩌나 싶어 오이카와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1초가 1시간 같고 1분이 하루 같았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오, 진짜. 늦으면 1분당 운동장 10바퀴라고 전해라.”

이와이즈미의 서슬 퍼런 협박을 끝으로 세 사람의 발소리는 멀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구부정한 어깨와 풀린 낯짝은 이제 슬슬 쿠니미를 깨워야겠다는 의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머리에 꽃잎 붙었어요, 선배.”

쿠니미가 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 엑, 엑?! 쿠니미쨩??”

언제부터?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내 얼굴 봤어? 내가 하는 짓거리들 다 본 거야? 맛층한테 묵음으로 소리쳤던 것도? 전-부? 다 보고 있었던 거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건 더듬거리다 얼떨결에 내뱉은 ‘쿠니미’란 이름뿐이었다. 즉,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지나치게 의식하고 말았다. 쿠니미의 새끼손가락은 어느새 오이카와의 것과 살짝 닿아 있었다. 당황해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 오이카와와 달리 쿠니미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실눈을 떠보니, 그의 길쭉한 손가락 끝엔 핑크빛 솜털이 붙어 있었다. 쿠니미가 멀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이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전신을 훑어 내리던 따가운 시선이 이내 그의 손아귀에 갇힌 서적을 향했다. 책이 왜 선배 손에? 의문도 잠시. 쿠니미는 발그레한 홍조를 띤 오이카와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런 눈치로 말했다. 

“선배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열이라도 있나? 그 큼지막한 손이 또다시 저에게로 향하자 오이카와는 다시금 눈꺼풀을 질끈 감아 내렸다. 눈꺼풀 안 쪽에 보이는 것이라곤 새까만 어둠뿐이었건만 언뜻 쿠니미가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다. 환청 같은 옅은 웃음소리도 함께 말이다. 

“푸흐, 너무 솔직한 반응이라 오히려 신선하네요.”

뒤늦게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가림막 너머의 쿠니미는 그의 머릿속에서 줄곧 그려왔던 모습 그대로, 정말 웃고 있었다. 휘어진 눈꼬리,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 온화한 얼굴.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고백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건데요?”

“뭐, 뭐!! 아니! 나는 그, 게 아니고……!”

“이러다간 선배가 먼저 졸업장 떼겠어요.”

그랬다간 제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귓전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갔다. 불에 탈 듯 벌게진 귓불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4월의 화창한 봄날.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 사랑은 봄바람을 타고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좋아해요.”


*김미루(@meru_0421) 썰 기반입니다.


목재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닫혔다. 이자카야를 알리는 얇은 천막이 앞뒤로 흔들렸다. 천이 젖히자 상쾌한 바깥바람이 쿠니미를 반겼다. 쿠니미는 달뜬 뺨을 식히려 손을 들었다. 알코올로 달궈진 볼과 손바닥 사이엔 꽤 온도 차이가 있었다. 적당히 서늘한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가며 뺨을 어루만진 지 몇 차례. 쿠니미는 아예 이자카야 출입구 바로 옆 자리에 쭈그려 앉아 버렸다.

술집 안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몇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거였더라. 쿠니미는 뺨에 얹어둔 손등을 떼어내 숫자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즐거울 만도 한가.”

활짝 만개한 웃음꽃들이 듣기 좋았다. 동시에 그들과 비슷한 온도로 웃을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쿠니미를 감싸 안았다. 탄식하듯 반사적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희희낙락한 웃음소리에서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아! 쿠니미쨩 여기 있었구나~”

그때, 쿠니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돌아간 눈이 반쯤 열린 문어귀에서 꼿꼿하게 멈춰 섰다. 한참 찾았잖아. 꿈이 아니라는 듯 문 틈 새로 삐져나온 이목구비와 선명한 음색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쿠니미쨩도 진짜 오랜만이네.”

배시시 웃던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빈 옆자리로 바짝 다가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던 오이카와의 옆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본 쿠니미는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술집의 온도를 그대로 가져온 오이카와는 신이 난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맛층 턱수염 기른 거 봤어? 영상통화로 볼 땐 엄청 놀렸는데 실제로 보니까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란 거 있지. 맛키는 결혼 준비로 바쁘다면서 얼굴이라도 잠깐 비추고 간 게 어디야 싶고. 이와쨩은 가업으로 이은 두부 장사가 엄청 성황리래, 대단하지?”

쿠니미는 형식적으로만 고개를 까딱였다. 

“미안. 나 혼자만 떠들고 있었네.”

한참 동안 입을 움직인 후에야 오이카와는 술기운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쨩은 어때? 잘 지내는 거지?”

화살은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쿠니미는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답 없이. 그저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어색한 정적에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오이카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던 후배의 속내가 읽히질 않자 천하의 오이카와 역시 당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려 할 무렵이었다.

“하지 마요.”

쿠니미의 무게중심이 오이카와 쪽으로 기울어졌다. 길게 뻗어 난 손가락들이 한껏 일그러진 입술 사이를 톡 건드렸다. 

“예쁜데.”

입술에 닿은 서늘한 감촉, 가까워진 숨결, 읽을 수 없는 표정, 한 톤 낮아진 목소리.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님 연속적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져서 그랬을까. 놀라 확장된 동공은 이내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눈알은 바닥에 꽂혔고 낯부끄러운 열기는 술기운을 대신해 오이카와의 얼굴을 붉혔다.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오이카와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쿠니미쨩 진짜 다 컸네! 이렇게 내 걱정도 해주고!”

자신은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람처럼 오이카와는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했다. 목소리는 높아졌고 팔을 높이 들어 쿠니미의 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툭, 툭 내리쳤다. 그러니까,

“…그러게요.”

쿠니미가 그 손을 낚아채갈 줄은, 오이카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벌써 다 컸는데.”

못 본 새 악력은 어찌나 세진 건지 슬쩍 힘을 줘 손을 빼내려 해도 쿠니미의 손아귀는 돌덩이 마냥 요지부동이었다. 이레귤러의 연속이잖아! 속으로 잔뜩 울상이 된 오이카와는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는데.”

“저기, 쿠니미쨩 이거 좀… 놓고 말하자, 응?”

“왜 자꾸……. 자꾸만.”

취했구나. 오이카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쿠니미, 대답 없이 물끄러미 저만 쳐다보던 쿠니미, 거침없는 스킨십과 묘한 말만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쿠니미. 만취라는 결론을 도출하니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던 쿠니미의 행동거지가 납득되기 시작했다. 

그 쿠니미쨩이 술에 취했다니! 오이카와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붙잡힌 손과는 달리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얄궂은 웃음이었다. 키가 한 뼘쯤 더 커지고 성대가 굵어지고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어도 ‘쿠니미 아키라’란 본질은 그때 그 시절에서 거의 변하질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가 덩치만 큰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동경(あこがれ)이라고 하죠, 보통은.”

쿠니미의 실상을 파악하곤 생글생글 지어 올린 눈웃음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한 건, 그가 다음 말을 꺼낸 직후부터였다.

“처음엔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동경이나 존경의 의미라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렸을 때니까. 그래서… 착각한 건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얼굴 근육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꽉 잡힌 손에서 체온이 공유됐다. 서늘한 손이 따스한 손과 한데 겹쳐져 온도가 뒤섞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소리 없이 뻐끔거리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이 잡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을 대뜸 제 목덜미로 가져갔다. 화들짝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뜬 채 쿠니미 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맞닿은 손바닥에선 불규칙적으로 쿵쾅 이는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보 같죠, 나.”

“……쿠니미쨩?”

“이젠 그만 할 때도 됐는데. 안 이럴 때도 됐는데.”

“…….”

“왜 이럴까. 왜.”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쿠니미의 얼굴은 점점 오이카와에게 가까워져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이카와는 뒷걸음질을 치다 나무문에 뒤통수를 작게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도망갈 곳이나 숨을 장소가 없다는 게 오이카와에겐 마치 패닉처럼 작용했다. 

“사실은 알고 있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

“…….”

“너. 너. 너. 전부 너 때문이라고.”

“…….”

“나는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자꾸만…….”

그 와중에도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은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던 지라,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쿠니미와 코끝이 닿을락 말락 가까워지자, 위험 신호의 마지노선을 느낀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기, 쿠니미쨩! 너무 가깝, 가까워. 좀만 떨어져서-”

“네가.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잖아.”

오이카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쿠니미는 만취했다는 것조차 망각했는지 여태 자신이 느껴왔던 무수한 감정들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정말 그만해야 하는데. 너만 보면 의지가 약해져. 아니, 애초에 내 의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어. 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고 싶어. 평범한 선후배 관계가 됐으면 좋겠어. 동시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몇십 번씩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버려. 그러니까 나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쿠니미의 말들이 별세계의 언어 같았다. 애절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입을 놀리는 그의 눈이 얼핏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오이카와는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감지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쿠니미쨩, 너무 취한 거 같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곤 그저 서글픈 눈을 하고 있던 쿠니미에게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귓전에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반박이라도 하려는 것 마냥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나한테 아무 생각 없잖아요.”

그 순간 오이카와의 입술 위로 무언가가 겹쳐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곤 그대로 초점을 놓아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쿠니미가 쓰게 웃는 얼굴뿐이었다. 

“넌. 내가 이래도 아무 생각 없으니까……. 그만해야 되는 거죠.”

점점 작아지던 쿠니미의 목소리는 어느새 끊겨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품 안으로 쓰러지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그의 심장박동 역시 차츰 잔잔해졌다. 오이카와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새근새근 잠든 쿠니미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은 두 사람을 다정하게 비추어 주었다. 

단 한 사람의 얼굴색만이 시뻘겋게 불거져 있었다.


건조한 입김이 탁한 회백색을 띠었다.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이 지나치게 흐렸다. 거 좀 있으면 장난 아니게 쏟아지겠구먼.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노인의 혼잣말을 곁눈질로 들은 남자는 다시금 구름 낀 하늘을 봤다. 사무치도록 시린 날씨였다. 

언제 눈이 쏟아질지 모르는 삿포로의 하늘을 우두커니 선 채 들여다 본지 몇 분. 어느새 정류장 근처엔 서넛의 사람 그림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이라는 안내와 함께 한 대의 버스가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갔다. 남자가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영하권을 훨씬 웃도는 이 추운 날씨 속에서 남자가 오래도록 기다린 버스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정차한 버스가 뒷문을 좌우로 열었다. 털모자와 패딩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꽤 두툼한 지갑이 카드 단말기를 향했다.

[카드를 한 장만 찍어주세요.]

마음이 급할 땐 되는 일이 없는 법이었다. 

언제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쿠니미의 눈썹 사이가 팍 좁아졌다. 그는 앞쪽의 운전석을 향해 조금 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를 복창했다. 친절한 운전수는 천천히 하라는 듯 흰 장갑을 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쿠니미가 버스 안 쪽으로 완전히 올라타자 활짝 열려 있던 뒷문이 천천히 닫혔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유일무이한 교통카드를 찾아 지갑 속을 헤맸다.

[반갑습니다.]

정상 승차를 알리는 녹색 불이 깜박거렸다. 다행히 이번엔 성공한 모양이었다. 쿠니미는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난데없는 소동에 진땀을 뺐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버스 내부를 둘러본 그는 이내 서서 가는 것을 택했다. 유일하게 빈자리로 남아있는 맨 뒷좌석까지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그만큼 발걸음을 옮기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까지 몇 정 거장 되지 않다는 것 또한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저기요……!”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버스 손잡이에 몸을 맡긴 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여린 음성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담한 체구의 여학생이 뺨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여학생은 쿠니미 쪽으로 다가가면서도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쿠니미는 귀찮은 상황에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곤두섰다. 못 들은 척을 할까, 모른 척을 할까. 다음 스테이지의 선택지를 고르듯 사고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불행히도, 여학생의 이어진 대답은 쿠니미의 실낱같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거……. 지갑에서 떨어진 것 같아서요.”

그녀의 양 손바닥 안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아.”

인상 쓰듯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당혹감으로 변질됐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면부지의 사람 손안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 쿠니미의 안색은 누가 봐도 확연히 뒤바뀌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진심과 성의가 짙게 담긴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올라가 있기까지 했다. 그가 놓친 무언가를 건네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손끝이 스치고 무뚝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그러자 여학생은 전신이 불에 들끓듯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벌게진 뺨과 귓불을 식히기 위해 그녀는 그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뒷자리, 같은 교복을 입는 일행들의 재잘거림이 그녀의 등을 응원했다.  

아쉽게도 쿠니미는 형식적인 인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건네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탄 순간부터 뭇 여학우들의 주목을 받던 그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렇게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엔 손바닥보다 한참 작은, 3X4 사이즈의 증명사진이 있었다. 



* * *


‘12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사이 전국적으로 첫눈이 내릴 전망입니다.’

그 날 아침 기상 속보를 기억했다. 기상캐스터의 자주 빛 정장이나 머리스타일이 영화 필름처럼 선명했다. 아침으로 먹었던 쌀밥의 뒷맛이나 된장국에 들어간 두부의 형태는 기억 못 하면서 그녀의 가식적인 감탄사나 사소한 표정 변화는 선명히 기억했다. 티브이 화면 너머 ‘첫눈’의 수식어구는 낱낱이 기억했다. 

왜 그랬을까. 

남에겐 특별한 것이 나에겐 특별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남에겐 평범한 것이 나에겐 유별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과 ‘눈’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의미일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전혀 특별한 의미로 와 닿지 못했을 뿐이다. 돌고 도는 어느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 나는 오래도록 ‘첫눈’이란 낯 간지러운 단어를 미적지근한 온도로 흘려 넘겼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추억이란, 전혀 상관없는 것을 끌어다 멋대로 방아쇠를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나의 의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혹하게도. 



* * *


“거기서 턱을 조-금만 낮춰 볼까요? 네에, 그런 식으로. 좋아요, 눈에 힘주시고…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짤막한 신호음과 함께 인공조명이 두어 차례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개의 라이트 박스가 이루는 대각선의 교점엔 익숙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은 어색한. 약간은 뻣뻣한. 약간은 긴장된. 부자연스러운 미소 한 줌이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네, 끝났습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레 왁스로 고정시킨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울상이 된 눈알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푸핫, 야 방금 오이카와 얼굴 봤냐? 이케멘, 이케멘 노래를 부르더만~ 이케멘 다 죽었네.”

수고하셨습니다, 란 인사가 나오기도 전 하나마키가 폭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핀잔을 가만히 듣고 넘길 리 없을 오이카와가 꽥 소리를 질렀다.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던 눈썹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머리털에 힘 줄 때부터 알아봤다. 졸업사진은 남은 평생 갈 텐데- 안타깝게 됐다.”

말과는 달리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어조였다. 무심하게 태클을 걸어준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의 이마 정 가운데엔 깊은 빡침을 뜻하는 힘줄이 우수수 돋아났다. 이제 막 촬영을 끝마치고 장비를 접고 있던 사진사에게 오이카와가 무어라 외쳤다. 사진사는 곤란하다는 듯 볼만 긁적였다. 오이카와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졸업사진은 원래 평소대로 찍는 거다, 응꼬 야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이와이즈미까지 가세하자 마침내 오이카와가 발끈하듯 폭발했다. 

“하아? 맛키, 맛층, 이와쨩이야말로 아까 엄-청나게 이상했거든? 다들 초초초 썩은 표정으로 찍혔을 게 분명하거든?! 에붸붸붸, 다!”

오이카와는 쫙 펼친 양 손바닥을 관자놀이 옆으로 가져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몰골에 자칫 침체될 법했던 촬영장 공기가 부드럽게 녹아 들었다.

시청각 실을 통째로 빌려 마련한 임시 촬영장엔 아오바죠사이 배구 부 이외의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3학년들의 졸업사진 촬영 시즌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고, 해마다 인터하이, 봄고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배구 부는 매해 타 학생들과는 별도로 졸업 사진을 촬영해 왔기 때문이다. 늘 상 잔주름을 달고 살던 교복 바지가 매끈하게 다려져 있고,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넥타이가 셔츠의 빳빳한 카라를 정갈히 감싸 안았으며 챙겨 입기 귀찮다는 핑계로 빼입기 일쑤였던 조끼를 갖춰 입었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 교복 재킷까지 더해진 채로 말이다. 

“주절주절 시끄럽네. 눈 코 입 멀쩡하게 나오면 땡이지.”

“졸업 사진은 평생 남는단 말이야! 이 오이카와 씨의 잘생김이 반의 반의 반도 못 담겼을 게 분명한데 어떻게 안 슬퍼할 수 있어?!”

“네 놈이 유별난 거다.”

망설임 없는 반박 조에 오이카와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보였으나, 이내 알만 하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하긴~ 이케멘의 고뇌를 이와쨩이 이해할 리 없지.”

구름 낀 하늘을 사라지자 오후의 햇볕이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 바깥의 찬 공기와 따뜻한 실내를 경계 짓는 창틀에 뿌연 김이 서렸다. 창밖으로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가 비쳤다. 오전 중 잠깐 내렸던 첫눈은 그것 위로 소복이 쌓여 있었다. 겨울답지 않은 햇살과 조금은 가라앉은 공기, 교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찰과 음, 퍼석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 아래로 흩어 떨어지는 눈 덩이. 

홧홧 거리는 등 언저리에 닿지 않는 팔을 열심히 뻗어 보며 울부짖는 오이카와, 실컷 때려놓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씩씩 열을 내는 이와이즈미, 잔뜩 성이 난 그의 어깨를 붙들곤 열심히 뜯어말리는 킨다이치, 한 발자국 떨어진 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즐거운 얼굴로 두 손 두 발 놓고 있는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평소와 다를 법 없는 풍경이 적절한 계절감을 만났다. 꼭, 잘 빚어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틀 가장자리에 등을 기댄 쿠니미는 여느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으로 뒤바뀌어가는 풍경을 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반쯤 감겨 있는 눈꺼풀이 사뭇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살은 그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보듬어 보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서였을까. 그림자가 드리워진 낯빛은 조금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 안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졸업인가.”

오래도록 교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마츠카와가 무릎을 폈다. 뻐근해진 허리께를 익숙하게 주무르곤 기지개를 켜듯 말했다. 후련하다는 어조로 말이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일순 찬물 끼얹듯 얼어붙어 버렸다. 암암리에 금기시되던 단어와 문장이 위태위태하던 맥을 단숨에 끊어버린 것처럼. 다 같이 입을 맞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죽음을 닮은 침묵이 도래한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킨다이치였다. 시큰대는 눈시울과 훌쩍이는 콧방울은 진즉에 불거져 있었다. 울음을 참듯 애꿎은 천장만 올려보던 와타리는 이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교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닫혔다.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숨을 죽인 울음소리가 간간이 배어 들었다. 

“뭐야, 왜 니들이 울고 그러냐.”

제일 먼저 수습에 나선 이와이즈미는 벌써부터 눈물바다인 킨다이치와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긁기 바쁜 야하바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졸업하는 건 우린데 왜 너네가 슬퍼하냐, 너무 염려하지 마라, 너희라면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우리 없다고 연습 게을리했다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위로인지 농담인지 구별 못할 말들이 거리낌 없이 오고 갔다. 

그러나, 그간 꾹꾹 눌러 삼키고 있던 슬픔과 설움은 이와이즈미의 말 몇 마디를 기폭제 삼듯 터진 둑처럼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한 몇몇 후배들을 시작으로 곧 교실 전체가 울음바다로 뒤바뀌어 갔다. 보는 사람마저 서러워지도록 엉엉 우는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이와이즈미를 도우려 마침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까지 팔을 걷어 부쳤다. 

쿠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미된 신파극에서 눈을 돌렸다. 창문 유리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찬 기운이 피부 결을 타고 들어와 뼈를 긁었다. 호, 하고 입김을 부었다. 입김이 닿은 주변만 얼어붙은 수증기가 뿌옇게 발했다. 무언가를 쓰려했는지 그의 검지가 유리창 쪽으로 바짝 가까워졌다. 손가락이 유리창에 닿기 직전, 그는 손을 내렸다. 

졸업(卒業). 첫눈(初雪). ……좋아해(好き).

결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적어보지 못했다. 평범한 나날 중 하나에 불과할 오늘에 특별한 의미를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쿠니미는 그랬다. 

“오이카와 넌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빨리 와서 한 마디 좀 해줘라.”

오이카와. 머릿속으로만 맴맴 돌던 단어가 귓전을 때리자 쿠니미는 흠칫 놀란 가슴팍을 남몰래 움켜잡았다. 뿌연 공백만 남은 창가에서 영화 속 풍경으로, 그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가 남겨둔 입김이 옅어져 갔다.  

“잠깐, 잠깐만! 선생님이 사진 바로 뽑아서 주실 수 있대. 이것만 확인… 하고…….”

제 얼굴이 떡하니 찍힌 모니터를 발견한 오이카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잠시 후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인화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떡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한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눈물 콧물 줄줄 흘리던 1, 2학년들이나 그들 달래주기 바쁘던 3학년들마저도 오이카와의 사라진 뒷말이 궁금해졌는지 속속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으하하하, 이게 뭐냐?!”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하나마키였다. 배꼽까지 잡아가며 통쾌하게 웃어대던 하나마키는 인화된 사진 한 장을 집으며 말했다. 

“내 사진이 백 배 천 배 잘 나왔겠는데? 야, 나 기념으로 하나만 줘라. 우울할 때마다 꺼내 봐야지.”

오이카와의 반응은 살피지도 않은 채 이와이즈미가 다음 사진 한 장을 잽싸게 낚아챘다. 

“눈 코 입 제대로 붙어있네. 딱 니 얼굴이구만 뭘. 이건 내 꺼.”

마츠카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농담으로 해본 소리였는데, 니가 진짜 니 무덤을 팠구나. 나도 들고 간다?”

오이카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건 참다못한 오이카와가 약 3초 후 괴성을 지를 거란 일종의 신호였다. 쿠니미는 익숙하게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아악! 니들 전부 절교야!!”

공들인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폭발해 버리는 오이카와의 뒤통수만 쿠니미는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오이카와의 모든 순간을 눈 안에 가득 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단단히 심통이 나 뾰로통하니 부푼 뺨이 귀여웠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며 축 쳐져 있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후 사진 속 제 얼굴을 재차 확인하곤 푹 실망해 버리는 옆얼굴이 퍽 예뻤다.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낮게 깔린 속눈썹, 흐트러진 뒷머리, 영 답답했는지 마음대로 풀어헤친 넥타이, 조금 큰 손, 곱고 긴 손가락,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 끄트머리.

“쿠니미쨩이 보기에도 이상해?”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던 걸까. 돌연 오이카와의 화살이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줄곧 제 쪽은 보지도 않던 눈이 예고도 없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쿠니미의 얼굴엔 당혹감이 짙게 흘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그는는 허겁지겁 눈알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왼쪽 가슴 언저리가 쉴 새 없이 펄떡거렸다. 꼭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 같았다. 

“자, 봐봐.”

그런 쿠니미의 반응이 생소했는지 혹은 그의 얼굴을 읽어낼 수 없는 까닭이었는지,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여덟 걸음쯤 떨어져 있던 거리가 이젠 반걸음조차 안 됐다. 머리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이성이 감전당한 듯싶었다. 

숨은 어떻게 쉬더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떤 거였지. 예전엔 어떻게 이 사람을 상대했지. 

뜨끈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역류해 올랐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피하고자 하는 마음,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자 은연중에 쿠니미는 자신의 팔로 상반신을 감싸 안았다. 꼭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역시… 이상한가?”

쿠니미의 반응을 ‘거절’로 읽어내서였을까. 한 풀 꺾인 어조가 자신감을 툭 잃었다. 큰 손바닥이 뒷목을 감쌌다. 곤란하다는 듯 지어 올린 웃음이 쿠니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급해진 건 쿠니미였다. 

“아, 그……. 저기!”

순간적으로 오이카와의 팔목을 낚아챌 뻔한 쿠니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그의 소매 부근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려다 이르게 포기를 선언하곤 부러 그것을 피해 돌아가려는 사람처럼. 

쿠니미가 붙잡은 덕분에 오이카와는 반쯤 돌아선 상반신을 다시 돌려세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궁금함을 한껏 머금었다. 반면 자신이 잡아 놓고도 놀란 쿠니미는 소리 없이 입만 뻥긋거렸다. 그를 돌려 세운 것까진 좋았지만, 무어라 말머리를 꺼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100미터 달리기를 방금 끝마친 사람처럼 호흡은 가빠지고 맥박은 용수철 마냥 튀어 오르고 산소 결핍의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했다. 

언제나 그렇듯, 쿠니미는 그의 앞에만 서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까지 이상하진 않은 것 같, 아요.”

간신히 대화 주제를 떠올려낸 쿠니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쿠니미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무언의 정적이 오히려 민망했다. 덕분에 귓불이 점점 뜨거워졌다. 길게 길러 넘겨 버린 앞머리가 이때만큼은 귀를 잘 가려주길, 쿠니미는 간절히 바랐다. 

짐짓 휘둥그레져 있던 눈이 조금씩 제자리를 되찾았다. 뒤이어 눈꼬리가 활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어설픈 미소가 미미하게 남아 있던 입술이 시원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

그는 활짝 웃었다. 연갈색을 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살이 포물선 형태로 접혔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턱과 한 톤 높은 음조와 말간 웃음이 오롯하게 쿠니미를 향한 순간이었다. 

“자. 쿠니미쨩도 줄게.”

오이카와는 자신의 소매를 붙들고 있던 쿠니미의 한 손을 잡아끌었다.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만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쿠니미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 뒀다. 난생처음 비를 맞은 꽃 마냥 놀람과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던 쿠니미는 한 발짝 늦게 그것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손바닥 안엔 웬 증명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그것은 여태 오이카와가 기대하고 실망하고 속상해하길 반복하게 만든 원인이 분명했다. 

“기념 선물.”

눈앞의 오이카와를 상대하기 바빠 미처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그것을, 쿠니미는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역시 어색했다. 그가 짓는 최고의 웃음을 본 직후여서 그랬을까.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의 미소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쿠니미쨩만 챙겨 주는 거야.”

‘고마워’란 말과 함께 최고의 웃음을 선물 받았다. 특별, 이란 말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제와 말을 번복할 순 없었다. 쿠니미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소중하단 걸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멍청아. 척 들어도 네 기분 생각해서 한 소리인 걸 왜 모르냐.”

어느새 오이카와 곁으로 다가온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프다며 우는 소릴 낸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보던 쿠니미는 씁쓸한 웃음만을 남겼다. 

정말… 제가 가져도 되나요?

재차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 목울대 아래로 가라앉았다. 감사 인사조차 건넬 틈이 없었다. 어정쩡하게 벌어져 있던 입은 저절로 닫혔다. 손등엔 누군가의 감촉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피부 곳곳에 열꽃이 피어날 것 같았다. 

손안에 쥐어진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이상했다.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감지 않으려고 힘을 꽉 준 눈매가 어설펐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환한 웃음과 이것.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아닌 것. 웃으면 웃는 대로 세상 모든 종류의 꽃이 만개했다 져버리는 듯한 착각이 이는 것과 결코 그렇지 않은 것. 

쿠니미는 옅게 웃었다. 

한쪽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위치 따윈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쿠니미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이 마음에 들고 말았다. 언젠가는 잊힐 단편적인 웃음보다, 영겁에 가깝도록 유지될 어설픈 미소가 좋았다. 비록 렌즈를 향한 형식적인 웃음일 지라도, 그것은 언제까지고 오로지 쿠니미 한 사람만을 가리켜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 * *


몇 년 전 그때처럼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꽤 오랜만이었다. 요 몇 년 간 취업 준비, 졸업 준비에 정신이 없다 보니 사진 한 장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고, 다섯 번의 내정 끝에 취업처도 간신히 정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이카와 생각이 전혀 안 났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겠지만. 

쿠니미에게 있어 그것은 부적과 다름없었다. 증명사진만이 아니었다. 그것에 담긴 계절의 한 때, 숨 죽여 참는 울음소리, 함께 있을 수 있던 마지막 교실 풍경, 심장 언저리를 간질거리게 하는 추억. 그 모든 것이, 사진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꽤 닳았네.”

이 부적을 쿠니미는 지갑 깊숙이, 가슴 깊숙이 봉인한 채 이따금씩 꺼내 보곤 했다. 그때의 기억과 풍경을 조심스레 떠올리곤 예나 지금이나 불규칙하게 쿵쾅 이는 가슴 언저리를 꾹 짓누르곤 했다. 그렇게 어딘가 어색한 이목구비를 한참을 어루만지다 지갑 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증명사진의 가장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고 얇게 앉은 코팅이 벗겨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쿠니미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증면사진을 만져보았다. 뭉근한 손놀림으로 오이카와의 굳은 입꼬리를 매만졌다. 언제 보아도 그때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인 오이카와에게 

“잘 지내요?”

의미 없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차임벨을 눌렀다. 목적지에 다다른 버스는 곧 바퀴를 멈췄다. 보도블록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았다. 차가워, 감탄사도 내뱉을 겨를도 없이 저절로 뒷목이 꺾였다. 

첫눈이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꼭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W. 멜







“어쩔 수 없죠.” 


그것은 나의 입버릇이다. 눈을 피하고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차며 뒷목을 감싸 쓸어내린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불복종할 이유는 없다. 화를 내봤자 바뀌는 건 없고 아까운 시간과 감정만 소모할 뿐이니. 그럼 그런 거라고, 원래부터 그런 거였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때마다 선배는 묘한 눈으로 나를 훑는다. 일일이 따지는 것도 아니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괜찮다는 내 낯빛을 구석구석 살피곤 한다.


“다녀오세요. 오랜만에 뵙는 거잖아요.”


끈질긴 시선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춤거리며 발을 떼지 못하는 선배의 등을 내가 힘껏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배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미안해. 


돌아올 대답은 어차피 뻔했기에 나는 또 ‘괜찮아요’라는 대답을 대신할 것을 준비한다.


“사랑해요. 제 생각 많이 하고요.”


닫혀가는 문 틈새로 힘없이 웃는 선배의 얼굴이 지나간다. 반 뼘쯤 낮아진 다갈색 눈동자가 문에 가로막혀 완전히 사라진다. 닫힌 문에게 손을 흔든다. 끝없이 인사를 건네준다. 다녀오라고. 가기만 하지 말고, 꼭 다시 돌아오라고. 


“……밖이 생각보다 쌀쌀하네. 목도리라도 둘러줄 걸.”


그것이 나의 사랑 방식이었다. 


“저녁 메뉴는……. 나베나 할까.”


저녁 무렵엔 돌아온다 했던 것 같다. 마침 나베 재료들도 사두어둔 참이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말고 먹음직한 전골 요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선배 옆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얼마 전에 구비한 코타츠는 두 사람이 쓰기엔 조금 큰 사이즈였다. 보온의 용도나 둘이 나란히 이불을 뒤집어 써 가만히 귤을 까먹는 용도로 쓰기엔 아깝다 생각한 차였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베와 코타츠, 그리고 선배와 함께 보내는 첫 겨울이라니. 꽤나 낭만적인 겨울 아닌가.


“버너…버너……. 버너를 어디다 뒀더라.”


한창 이삿짐을 풀던 도중 안 쓸 것 같다며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둔 건 확실한데. 살짝 까치발을 들자 정리되지 않은 내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높은 찬장에 겨우 검지가 닿던 몇 달 전에 비하면 짧은 시간 동안 키가 확 컸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안은 어지러웠다. 선배가 즐겨 먹는 소유라면 두 박스, 선배가 자주 챙겨주는 길 고양이들을 위한 통조림, 식단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찬장 깊이 숨겨 두었던 우유 빵 한 꾸러미. 그것들을 치워 내니 새까맣게 코팅된 플라스틱 가방이 드러난다. 눅눅한 먼지와 기름 냄새는 덤으로 말이다. 


“아직 쓸 수 있으려나.”


가스통을 열어 조금 녹이 슨 부탄가스를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고 점화 버튼을 꾹 눌러본다. 그러자 파란 불꽃이 균일하게 피어오른다.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단 화력이 미미하긴 했지만. 


버너를 식탁 위에 얹어두자 식탁 가장자리에 샛노란 프리지아로 장식된 화병에게 눈이 갔다. 막 프러포즈했을 당시가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백은커녕 좋아하는 마음조차 죄악감으로 느껴지던 풋풋했던 시절은 이제는 옛 일기장의 낱장과도 같다. 프리지아 꽃다발을 건네주며 함께 살자는 말을 꺼냈을 때 선배의 얼굴은 여전히 생생하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 초승달을 그리던 입가, 꽃다발을 품에 안고 그것을 꼭 닮은 행복한 웃음을 얼굴 가득 걸다, 갑자기 제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사랑스러운 사람. 덩달아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주곤 작게 물었다. 앞으로도 함께 해줄 거죠. 선배는 울다 웃기를 반복하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도’가 아니고 ‘평생’이야, 아키라. 직접 내 말을 지적해주던 선배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바라보다 이내 잘게 떨리는 어깨를 조심스레 마주 안아주었다. 


“러브 하우스……. 까진 아직 멀었나?”


올 겨울을 넘기면 연애 햇수만 7을 넘긴다. 같이 동거를 시작한지는 꼬박이 1년 가까이가 되고. 오랜 연애였다. 그간 악착같이 함께 모은 돈으로 1LDK 방을 사고 나니 결혼식은 꿈도 못 꾸게 되었지만. 선배는 혼인 신고서 한 장에도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물론 서류를 작성할 당시엔 서명하려 펜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 애꿎은 종이 몇 장을 날려 먹었지만, 쩔쩔 매는 옆모습이 귀여워 웃어 넘겼던 것 같다. 


“보자……. 남은 건 재료 손질이랑 냄비 정도인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앙증맞은 자석들이 덕지덕지 붙은 냉동실 칸. 딸기 모양 자석 밑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토오루가 못 먹는 것들!’의 타래가, 눈에 띄는 냉장실 정중앙 엔 ‘아키라와 토오루의 음식 저장 창고. 두 사람 이외엔 건드리지 마시오 - ㅅ -’라는 귀여운 경고 문구가, 냉장고 구석구석엔 균형 잡힌 식단을 갖추기 위한 재료들이 나열된 전단지들이. 


어디든, 무엇이 되었든, 선배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기, 양배추, 깻잎, 숙주, 청경채, 팽이버섯, 그리고 육수.”


‘맛있는 나베 만들기’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팅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먹기는 많이 먹어봤지만 직접 만들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하면 선배보고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라 할 심산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와이즈미 선배니까, 저녁 시간 전까지 미리 언질만 해두면 맛있는 걸 먹여주겠지. 내가 만든 실패한 전골 요리 같은 것보다 훨씬 좋은 걸.


“아쉽기는 아쉽겠지만.”


야채 종류는 흐르는 물에 씻어 내고, 식기 세척기에 모셔져 있는 도마를 펼치며 칼을 들었다. 양배추를 손질하려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싱크대에서 고개를 들면 곧장 보이는 손바닥 만 한 창가엔 조그만 라디오가 있었다. 부엌만 들어갔다 하면 불난리를 치고 119를 외치는 선배 덕에 부엌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될 수 있었지만, 저것만큼은 아니었다. 


맛층이 생일 선물이라고 준 거야. 졸업했다고 학교 까먹지 말라고 특별히 민트 색으로 골라준 거다?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다니까. 


“어쩔 수 없지.”


남이 준 선물을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요리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게 썩 나쁘진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주부터 듣기 시작한 음악 채널은 곡 선정이 꽤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 라디오의 전원을 켜자 자잘한 잡음과 익숙한 멜로디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피아노 전주였다.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깻잎과 손질된 소고기와 배추를 한 데 겹쳤다. 일정한 크기로 잘라 냄비 안에 가지런히 포개 넣었다. 만개한 장미꽃마냐 냄비를 가득 채운 전골 재료들을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육수 만들기는 금방이었다. 남은 일이라곤 같이 먹어줄 상대를 기다리는 것뿐. 아직 두 시조차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식재료를 너무 일찍 준비했나 싶어 무안한 마음에 볼을 긁적였다.   


우연이었다. 휴대용 버너와 함께 찬장에 처박아 두고 싶었던 라디오를 켠 것은 정말 우연에 불과했다. 아님, 단순한 변덕이었을 지도. 라디오 채널을 켜자마자 처음 들린 노랫말이 마음에 든 것도, 그것을 들으며 밀린 우편물을 정리하던 것도, ‘제 42회 아오바죠사이 고교 졸업 동문회’란 이름의 편지 봉투 위로 선배의 이름이 적힌 걸 본 것도, 멀리서 들려오는 선배의 부름에 무심코 그것을 구겨버린 것 또한, 하나같이 우연의 산물이었다. 


왜 그랬을까. 


기껏해야 동문회 안내지였는데. 선배가 좋아하고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자리가 있다는 걸 일러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선배가 지나가다 눈여겨 본 뮤지컬 공연의 티켓 예매를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 날짜가 동문회 일시와 겹쳤던 것?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 보러 가면 그만이니까. 어쩔 수 없죠, 특기인 입버릇으로 얼버무리면 그만이었으니까. 


“……Because you don’t know what it means to me.”


당신은 그 사랑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었다. 애절함이 흠씬 묻어나는 음색에 나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To remind how I still love you…I still love you.”


왜 그랬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정말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 한 건 아닐까. 인정하면 편하다. 받아들이면 편하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내가 순순히 인정할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다고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것. 


“……선배?”


다름 아닌 당신에 관한 것이었다. 



* * *



아키라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쫓겨 나간 현관 앞. 급하게 나오느라 얇은 청재킷 하나밖에 걸칠 수 없던 그는 재킷의 깃을 빳빳하게 세웠다. 고개를 들어 언뜻 훔쳐본 하늘은 꽤나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뽀오얀 입김이 절로 나오는 찬 공기 틈으로 손바닥을 마주 비벼 그 사이에 따뜻한 숨을 호호 불어 넣었다. 


가라 해서 나오긴 나왔지만, 정작 당사자의 낯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온 신경은 꽉 닫힌 문을 향해 바짝 곤두서 있는데 막상 가야 할 길은 그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즉,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뛸 듯이 기뻐야 했음에도. 


어딘가 먹먹한 마음 한 구석을 애써 감싸 안고 철제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던 차. 정겨운 야구 응원가가 재킷 주머니에서 울려 퍼졌다. 암울하던 토오루의 안색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필시 ‘아키라♡’란 세 글자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어디야 망할카와.]


아쉽게도,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그가 바라는 이의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아……. 이와쨩.”


순간 허탈해진 토오루는 맥 빠진 한숨을 쉬었다. 다리 힘마저 풀렸는지 내려가는 계단 두 개를 한 번에 밟아 버렸다. 


[어디냐니까. 나 이제 막 공항 입국해서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야.]


하마터면 위험천만 했을 상황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토오루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애꿎은 204호 우편함 뚜껑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휴대 전화를 잡고 있는 손끝이 추위에 바르르 떨렸다. 


“미안. 나 이제 막 집 나왔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어?”

[이 굼벵카와가!]


오랜만에 듣는 욕지거리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미안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양보니 배려니 따위의 단어를 입에 담을 입장이 아니란 걸 토오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삿포로로 발령받은 이야기나, 마츠카와가 혈혈단신으로 교토에 자리를 잡았다거나, 하나마키 혼자 미야기 현에 남아 꽃집을 시작했다던가.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 제 친구들과 ‘함께’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그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근 일 년 동안 잘 지낸다 연락 한 번 없었던 자식이라 그런가, 얼굴 한 번 보기 더럽게 힘들다?]

“하하.”

[쿠니미가 잘해 주냐?]


택시 잡아야겠지. 여기서 하네다까지 얼마나 나오려나? 걸리는 시간은? 그런 자잘한 걱정을 하며 큰 도로 쪽으로 나가려던 토오루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

[왜 대답이 없어.]

“…….”

[설마……. 쿠니미 이 자식을 진짜.]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치며 수화기에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그건 아니라고. 아키라는 내 생각 정말 많이 해준다고. 매일 매일 사랑한다 말해준다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거지는 일체 안 하고 나를 값비싼 도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며 나한테는 오히려 과분하다 싶은 사람이라고. 그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속마음을 와르르 쏟아내자 토오루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낯부끄러운 마음과 씁쓸한 기분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문제. 문제랄 것은 없었다. 충분히 행복했다. 이 이상의 기쁨은 없을 만큼 둘이서 함께 보내는 소소한 일상들이 퍽 즐거웠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때라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죠. 그래. 그 말을 할 때마다 였다. 


본인은 티를 안 냈다 자부할 지라도,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미간이나 눈을 마주치길 피하는 버릇에서 불편한 기색 역력히 드러났다. 아키라의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토오루는 언제부터 적응하고 말았던 것일까. 


[오늘도 네 낯짝 보기는 글렀구나.]


생각해보면 참 단순했다. 국가 대표로 선발된 카게야마가 연락도 없이 두 사람의 집을 무턱대고 찾아 왔을 때나, 마츠카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라디오를 자랑했을 당시나, 오늘 같이 이와이즈미가 삿포로에서 먼 발길을 내어줄 무렵이나, 미야기에 하나마키를 비롯한 후배들을 보러가자고 말을 꺼냈을 때나, 하다못해 지나가던 여자들이 토오루를 향해 추파를 던졌을 때마저. 아키라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먼발치로 돌리곤 했다.


[그나저나 내일 동문회 소식은 들었어? 마츠카와 녀석은 출장 근무라 안 된다 그랬고 나나 하나마키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애초에 그것 때문에 도쿄 온 거기도 하고.]


이건 뭘까. 왜 이리 어렵게 생각했던 걸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겼던 걸까. 이렇게나 단순하고, 또 사랑스러운데. 


“……아니.”


똑똑한 아이니까. 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아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아키라를 멋대로 규정짓고 있던 건 대체 누구였는지. 


[안내장 안 갔어? 일주일 전쯤엔가 배부했다던데.]


그것 또한, 분명한 아키라의 사랑 방식이었음을. 


“미안 이와쨩. 나 역시 못 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 어?]

“이번 주말은 내내 아키라랑 보낼 거거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랑한다 말해줄 거야. 질리도록 안아주고 귀엽다고 말해주고 곁에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야 너 그러고 전화 끊지 마라. 끊지 마. 전화 잡고 있-]

“그러니까 미안. 이번 연말엔 꼭 연락할게.”


전화를 끊어낸 손길이 가벼웠다. 되돌아가는 걸음걸음이 깃털처럼 사뿐하고, 큰 짐을 덜어낸 듯한 어깨는 새로운 사랑을 발견한 꼬마 아이마냥 기쁨으로 너울거렸다. 철제 계단을 타고 오르며 나는 시끌시끌한 소음은 더 이상 소음이 되지 못했다. 집을 막 나섰을 당시, 떨쳐내기 힘들었던 앙금의 이유가 확실해졌다. 귓가에 희미한 노랫소리가 닿았다. 비록 작고 가느다란 탓에 눈치 채기는 어렵지만, 분명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덜컥 열린 현관문의 낡은 경첩 소리나, 코끝을 확 감싸 안는 신선한 야채들 냄새나, 그것들을 정성껏 손질하고 있는 선 고운 옆모습이나, 굉음에 놀라 빠르게 깜박이는 한 쌍의 눈꺼풀이나, 그것들 하나하나하가


“……선배?”


행복한 결말을 노래하고 있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히나님(@hina_184S2) 썰 기반입니다. 





W. 멜




“자~ 빨리 빨리 움직여서 몸 풀어 놓자.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


가벼운 손뼉 소리와 함께 배구화가 일제히 미끄러진다. 니스 칠 된 코트 위로 희끗한 땀 냄새 섞인 구호가 울려 퍼진다. 허공을 가르는 배구공이 깨끗한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하면 코트 바깥에서부터 도움닫기로 치고 들어온 선배들이 차례로 스파이크를 쳐 내린다. 시원시원하게 허공을 가르며 코트 모서리 안 쪽에 꽂히는 스파이크가 날카롭다. 한 번 공이 내리칠 때마다 응원 구호는 목청을 높이고 상대팀은 어깨를 움츠린다. 


즉, 누가 보아도 뻔한 결과를 암시하고 있었다. 


“오늘 뭔가 좋네, 쿠니미쨩.”


선배는 대단하다. 레귤러도 아닌 선수에게조차 뚜렷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오늘 컨디션은 어떤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잘 들어가는 코스가 어딘지, 단 한 번의 토스로 모든 걸 꿰뚫곤 했다. 


“……그러게요.”


경기 초반부터 땀에 흠뻑 젖는 건 싫었다. 지치는 것 또한 싫었다. 피곤에 절어 절호의 찬스인 공을 눈앞에서 놓쳐버리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애초부터 가망 없는 기회는 오히려 포기하는 게 낫지만. 


배구 부에 발을 들인지 4년. 선배와 알고 지낸 것 또한 4년. 하지만, 2살이란 나이차는 생각보다 적지 않아 실질적인 기간으로 따지면 선배와 함께 한 배구 생활은 1년도 채 안 되었으리라. 오죽하면 선배와 같이 시합을 뛰어본 횟수가 한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그 단기간에도, 선배는 내 본질을 확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적으로 돌리면 되려 무서운 사람이랄까. 


“오이카와 말이야.”


서브 2번, 스파이크 2번. 준비 운동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상대는 이번 인터하이가 초전인 것 같았고 겁먹을 일도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나설 차례가 돌아 올 수도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시합일수록 주전들의 체력을 보존하고 싶을 테니. 


“뭔가 가볍지 않냐?”


아, 시끄럽게 진짜. 


공을 튕겨내던 손등 위로 힘줄이 도드라진다. 슬쩍 시선을 흘겨보니 아무래도 타 학교인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유니폼. 처음 보는 얼굴. 왜소한 체구에 뚜렷하지도 않은 이목구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입만 나불거리긴.


그래도 뭐, 상관할 생각은 없었다. 내 흉을 본 것도 아닐뿐더러 선배가 가벼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저런 ‘것’들에게 일일이 태클 걸어 봤자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고, 뒤처리가 귀찮고, 엮여 봤자 말도 안 통할 거고, 스트레스고,


“그래도 알고 보면 오이카와 쟤 진-짜 불쌍한 놈이야. 위에는 우시와카 있어, 밑에는 카……. 뭐였냐, 그…천재 세터. 같은 중학교 였다며? 결국엔 천하의 오이카와도 괴동이나 천재 앞에선 속수무책인 거지. 얼굴이라도 반반해서 봐 줄만 한 거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한 발 늦고 말았다. 


신경질 적으로 내던진 배구공이 코트 구석을 굴러 다녔고 선수들만 드나들 수 있는 경기장의 입구 부근은 충분히 어두컴컴했고 멱살을 붙잡은 손아귀엔 실핏줄이 허옇게 도드라졌고 나보다 한 뼘 혹은 그 이하의 눈높이가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저기요.”


창백하게 질린 안색. 바들바들 떠는 살점. 당혹감으로 잔뜩 젖어 버려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 아마 이 사람 귀에만 들릴 만큼 욕지거리를 읊조린 것 같았다. 


“그 쪽은 대체 누구세요?


나답지 않게. 


제가 모르는 오이카와 선배의 파트너라도 되세요? 아니면 우리 팀의 감독 쯤 되세요? 아하, 공식 시합엔 처음 출전하는 햇병아리 팀의 코치인가? 누가 들으면 그 쪽이 뭐 프로 배구 출신에, 전국 대회 우승은 식은 죽 먹기로 해내는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들리겠어요.”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멱살을 잡힌 탓에 입으로 숨을 쉬다 못해 컥컥대는 쇳소리를 낸다거나 그 새로 침을 줄줄 흘린다거나. 참, 보잘 것 없었다. 


“당신이 그 사람이랑 배구를 단 한 번이라도 같이 해봤습니까?”


별 것도 아닌 게 진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불거리는 당신 같은 겁쟁이 보다. 선배가 훨씬 대단할 텐데요.”


아 짜증나. 선배가 보면 뭐라고 둘러대지. 


“오늘 경기는 우리가 이길 거고요. 앞으로도 쭉 우리가 이길 거고요. 우시와카든 카게야마든 우리는 전부 때려 부수고 나아갈 자신 있거든요. 왜냐하면,”


날벌레 새끼 하나 퇴치했다고 할까. 


“배구는 선배 혼자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여섯이서 강한 쪽이 이기는 겁니다, 배구는.”


잠시 정수리 꼭대기까지 끓어올랐던 용암이 빠른 속도로 식어간다.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이 빠지니 이름 모를 녀석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져 내린다. 


마지막으로 충고 한 마디나 덧붙이자 싶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머리채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교과서라도 펼치는 게 어때요. 그 얼빠진 머리통으론 공부도, 배구도 전-혀 재능이 없을 것 같은데.”

“아……아…!”

“좋게좋게 말 할 때 내 시야 안팎에서 사라지라고 이 새끼야.”


벌레 퇴치는 쉬웠다. 누가 쫓아가기라도 하는 건지 부랴부랴 짐을 챙겨 뒤꽁무니를 빼는 날벌레들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맥이 빠졌다. 겨우 저런 것들한테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나 싶어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길게 울린다.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저 멀리, 구호를 외치는 선배의 옆얼굴이 보였다. 덕분에 또 김이 샜다. 


선배는 내 기분 같은 건 모르겠지. 눈치 채주지도 못하겠지. 그리고 졸업을 하겠지. 나만 남겨 두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면 지나가 있을 짧은 시간이라도, 나와 선배는 분명.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배구를 했을 테니까. 그것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니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