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키예프(우크라이나)입니다. 설정 상 러시아어 사용이 많습니다.


Итак, сколько это?

-그래서, 전부 얼마인가요?

유창한 러시아어가 과일 가게 주인의 귓전을 때렸다. 놀라 동그래진 눈꺼풀을 여러 차례 껌벅이던 주인은 풍만한 아랫배를 감싼 앞치마에 손을 닦으려고 한 행동조차 잊고 말았다. 타지에서 여행 온 듯한 동양인 하나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 입가엔 여유롭게 미소까지 띠고 있었으니 현지인 입장에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디 그뿐일까. 만만한 동양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웠다간 가만 안 두겠단 눈빛이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자, 주인인 이르고예비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솔직한 값을 불렀다. 접대용 미소를 어설프게 쥐어짜 내며 바나나 한 봉과 오렌지 두 개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우왓, 가성 비 장난 아니네.”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쿠로오가 사뭇 놀란 얼굴로 말했다. 

“도쿄에선 입에 풀칠도 못할 가격인데. 안 그래, 아카아시?”

쌀쌀한 날씨 탓에 양 팔로 몸을 감싸 안던 아카아시는 전리품 자랑하듯 콧바람을 내뿜는 쿠로오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이걸로 살 건 다 산 거죠?”

“응. 그나저나, 여긴 어째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냐. 여행 시기를 잘못 잡았나?”

페이퍼백을 가득 채운 내용물은 꽤 묵직했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곧장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인파로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에서 짐 덩어리들을 내려놓곤 목을 감싸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맨살이 드러난 목 언저리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에, 쿠로오씨?”

그러나, 쿠로오는 마치 자신이 추위에 둔감한 사람인 양 그것을 아카아시의 손에 둘둘 감아주었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선 따스한 봄을 맞이하고도 충분히 남을 3월의 한가운데. 반나절 만에 영하와 영상을 왔다 갔다 하는 키예프의 체감 기온은 아카아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여기는 봄이 짧잖아. 이거라도 손에 감고 있어. 맨손보단 나을 거야.”

장갑을 두고 나왔나 봐요. 버스에 올라타며 지나가듯 말하던 아카아시의 옆얼굴과 추위에 벌겋게 부푼 손가락 끝을 쿠로오는 내내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쿠로오씨가 추울 거예요.”

손사래 치듯 머플러가 감아진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쿠로오는 완강했다. 그의 발버둥 정도로 풀리지 않게끔 정성 들여 매듭까지 지어준 후 머플러로 통통하게 부푼 손바닥 틈새에 제 뺨을 파묻었다. 뜻하지 않은 간접적인 스킨십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오야 오야? 밤새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내 품에 파고든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짓궂은 목소리에 은근한 미소가 가미되자 아카아시는 도저히 쿠로오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이정표를 잃은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그, 그건…….”

“조금은 덜 추울 거야. 짐 이리 줘. 내가 들게.”

안절부절못하는 눈알이 애꿎은 콘크리트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사이, 쿠로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괜찮다는 아카아시의 만류를 능숙하게 뿌리치곤 세 덩이의 페이퍼백을 양 팔에 가득 든 쿠로오가 발길을 서둘렀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던 발걸음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섰고,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얼른 와. 

소리 없이 벙긋대는 입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이 아카아시를 부추겼다. 

그런 쿠로오에게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아카아시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부 깊이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가 낯설었다. 발을 내딛고 있는 토양의 느낌마저 전혀 달라 생소했다. 그의 옆을 분주히 스쳐 지나는 사람들은 온통 외지인이었다.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마침내 영어. 귓전을 울리는 언어가 중구난방이었다. 가격표, 표지판, 입간판,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난생처음 보는 활자였다. 

‘첫 여행’이란, 그에게 지독히 낯선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출국 겨우 며칠 전,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후무하던 아카아시는 급한 대로 리에프에게 러시아어 기초 회화 책을 빌렸다. 그러나 첫 배낭여행이란 들뜬 기분은 회화 공부를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에 익힌 거라곤 겨우 몇 마디의 말. 그마저도 어색한 단어를 띄엄띄엄 늘어놓으며 버벅 거리기 일쑤였다. 차라리 러시아어 전공자인 쿠로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그래, 어떤 식으로든 말이 통한다는 건 좋은 거지. 혼자인 것보다 훨씬 외롭지 않고… 그렇긴 한데…….”

아카아시는 뒷말을 아꼈다. 손을 칭칭 둘러싼 차콜 색 머플러엔 쿠로오의 온기가 여실했다. 몇 발자국 앞서 있는 쿠로오의 등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Осторожно!

-조심해요! 

놀란 쿠로오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말의 장터는 인파로 북적였기에 오가는 사람과 어깨를 부닥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아카아시는 은연중에 미간을 험상궂게 찡그리고 있었다. 

Ты в порядке?

-괜찮으세요?

이제 막 장터에 들어서던 금발의 여성 둘이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쿠로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쿵, 작지 않은 소리가 함께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한 여성은 불쾌함으로 가득 찬 눈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О, большое спасибо.

-오, 정말 고마워요. 

순간적으로 발휘된 순발력 및 기사도 정신 비슷한 것은 손아귀에 들려 있던 무거운 짐짝을 저 멀리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 빈자리엔 부드럽게 잡아당긴 여성의 손목이 자리했고 흐트러졌을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눈길은 퍽 다정했다. 

С удовольствием. Есть ли травмы?

-별말씀을.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 버럭 화를 내려던 금발의 여성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큰 키, 자국에선 볼 수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 또한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꼭 첫사랑에 빠진 여학생처럼 양 뺨을 붉힌 여성들은 쿠로오에게 바짝 붙어 핑크빛 기운을 뽑아냈다. 당황한 쿠로오가 뺨을 긁적이며 무어라 대꾸하다 말고 이내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아카아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벌써 몇 번째냐고.”

겨우 사흘째. 키예프에 체류하는 동안 그가 선보인 ‘친절’이란 이미지는 아카아시의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을 반겼다. 춥다, 추워. 쿠로오는 재빨리 집안 곳곳의 전기난로를 켰고 소파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여간 추웠는지 양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싹싹 비벼 한기로 얼어붙은 목 언저리에 갖다 대곤 서늘한 입김을 토해냈다. 

“아, 짐 정리-”

아차 싶은 순간은 항상 반 발자국 늦게 생각나곤 했다. 뒤늦게 현관에 내려둔 짐 덩이들과 덩그러니 내버려둔 아카아시가 떠오른 쿠로오는 한달음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미안. 도와줄게.”

아카아시의 손을 둘둘 감고 있던 차콜 색 머플러는 어느새 싱크대 한 편에 얌전히 개어져 있었다. 그는 쿠로오 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됐어요.”

쿠로오가 들어주려 했던 짐 꾸러미를 한 발 빨리 아카아시가 낚아채 갔다. 페이퍼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텅 빈 냉장고 안에선 쌀쌀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휑한 내부가 야채와 과일들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개 중 오렌지가 내던져지는 소리는 유독 날카로웠다.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는 듯한 잡음이 쿠로오의 귓전을 두드렸다. 

왜 이러지.

종잇장 안 쪽을 굴러다니는 오렌지를 집던 손이 느려졌다. 잔뜩 굳은 어깨가 짙은 한숨으로 풀어졌다. 

평정심.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파동 없는 수면처럼 고요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눈꺼풀을 깜박였다 하면 조금 전 보았던 쿠로오의 옆얼굴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리플레이되곤 했다. 설렘과 기대로 부푼 벽안. 유달리 아름다워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 두드러진 이목구비. 운동부의 것과는 전혀 다른 뽀오얗고 매끈한 살결. 호리호리한 몸 선. 

어떻게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연인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건 바로 아카아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아카아시는 스스로가 미웠다. 기분 좋게 여행 와서 외국어에 능통한 그를 칭찬하기는커녕 그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 전부에게 가시를 세우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모르는 언어, 모르는 사람, 모르는 웃음. 그런 것들을 온종일 반 발자국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선 울컥울컥 한 무언가가 불에 끓듯 치밀어 오르곤 했다. 

러시아어를 잘할 수 있었다면. 미리미리 공부해 뒀더라면. 하다못해 인사말 정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쿠로오가 대화를 시작하는 것까진 좋았다. 타지에 왔으니 그곳 친구를 사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었다. 

다만. 외래어로 쏟아지는 대화의 틈에 끼어들 수 없는 단절감, 분위기에 맞춰 어정쩡하게 웃어야 했던 어색한 공기, 들뜬 웃음 사이로 멀어져 가는 뒷모습,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그에게서 느껴버린 지독한 외로움은 후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화났구나.”

이런 옹졸한 자신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는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참을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설프게 둘러대 봤자 나한텐 안 통해.”

그러나 입이 떨어지기 직전 떼어나간 찰나의 주저를, 쿠로오는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일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항상 그랬다. 아카아시는 쿠로오 앞에만 서면 몸과 마음이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쿠로오의 속내를 파악하긴 복잡하게 널브러진 퍼즐을 1분 안에 맞추란 것처럼 느껴졌건만, 쿠로오는 한 눈에 아카아시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그의 핵심을 푹 찌르는 쿠로오의 통찰력은 아카아시에겐 무척 당혹스럽다가도 또, 부끄러웠다. 

어른스럽다. 능숙하다. 대단하다. 입에 꿀을 바른 수식어구는 쿠로오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노력도, 무덤덤한 표정 아래 감춘 초조함도, 평정심을 노래하는 강박관념도, 은근한 투쟁심과 승리의 욕구마저도. 착한 아이 칭찬하듯 쿠로오는 그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질투했구나, 케이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큰 손아귀가 짤막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뜨렸다. 괜한 오기가 발끈해 무어라 반박하려던 차, 귓바퀴에서 ‘쪽’이란 비현실적인 소리가 났다. 

“귀여워.”

익숙한 입술의 감촉과 앞뒤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애정 넘치는 속삭임, 뒤에서부터 은근하게 감싸 안아오는 팔뚝까지.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됐다. 아카아시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온몸에서 열이 들끓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쿠로오였다. 상대가 쿠로오만 아니었어도 아카아시의 이성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며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 때문에 뚱해진 우리 케이지 기분 풀어줘야겠지?”

제 진심을 훤히 꿰뚫다 못해 그것을 귀엽게 여기는 쿠로오가 얄밉기까지 했다. 됐네요. 달콤한 제안을 보기 좋게 되받아치려던 말대답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말았다. 

“아. 아? 쿠로오씨?!”

무릎 아래에 팔을 넣고 뒷목을 감싸 안아 그를 번쩍 들어 올린 쿠로오는 이미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어.”

아예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는 쿠로오를 보고 있자니 결국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거우니 내려달라는 말은 쿠로오에게 통하지 않았으니 소원대로 그의 목덜미를 꽈악 끌어안았다. 불규칙한 맥박이 얇은 피부 결 아래 쿵쿵 울려댔다. 

쿠로오는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방 안 곳곳을 빛내는 전기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틀 가까이로 다가갔다. 창문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 위로 아카아시를 내려둔 후 바깥 풍경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는 말대답은 5층 아래로 보이는 키예프 시내 전경에 목구멍 아래로 쏙 들어갔다. 

해가 저물기엔 아직 넉넉한 오후, 노란 햇빛 한 움큼은 상냥히 빛났다. 싸늘한 봄바람이 숨을 불어넣는 거리엔 여전히 인파가 북적였다. 엣취, 귀여운 재채기 소리가 쿠로오의 귓전에 와 닿았다. 시선은 창밖에 고정시킨 채, 제 목에 두른 팔을 풀어 손아귀를 겹쳐 잡아 보았다. 조금 차가웠다. 그것을 그대로 뺨에 가져가며 쿠로오가 말했다. 

Мы любители.

네? 유창한 문장 앞에서 아카아시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 해 봐.”

쿠로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아카아시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못 해요.”

“들리는 대로 말하면 되잖아.”

“못한다고 했잖아요.”

가시 돋친 말투였다. 쿠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듣기만 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에선 여전히 생글생글한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의중을 전혀 짐작 못하겠다가도 자꾸만 러시아어로 말하는 쿠로오가 얄밉게 보였다. 일방적으로 선이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싫은 감각. 아카아시는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진즉에 눈치채고 있어서 쿠로오는 일부러 아카아시의 손을 사로잡았던 걸까. 빠지지도 않을 만큼 제 손을 세게 움켜쥔 쿠로오의 손아귀가 오늘따라 밉보이기만 했다.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래어에 지쳐 아카아시마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귀에 익은 문장이 들리자 아카아시는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처럼 훽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을 보고 있어야 할 쿠로오의 샛노란 동공은 어느새 아카아시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고 찬바람은 꽉 닫힌 유리창을 살살 건드렸으며 기울어진 햇볕이 쿠로오의 싱그러운 눈웃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겹겹이 쌓여 얼음장을 이루던 섭섭함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애정이 담뿍 담긴 한마디에, 겨우 말 한마디에, 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슬픈 듯 기쁜 듯 글썽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쿠로오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뒷목을 힘껏 잡아끌었다. 꽃잎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꿀을 찾아 헤맸다. 언제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운 사람들처럼 틈새 하나 내어주지 않고 찰싹 달라붙어 짙은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낯선 공기에서 오가는 혀와 타액이 생소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 말을 내뱉기 위해 떨어진 입술과 입술 사이엔 은빛 실이 짧게 늘어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대답을 들어서 였을까. 놀란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이, 아카아시는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키스 앞에서 쿠로오의 이성이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렸다. 그런 쿠로오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아시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혀를 움직이는 것에만 몰두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촉박한 여행 준비 속에서 아카아시가 유일하게 외워두었던 단 한 마디의 문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형식적인 회화보다 아카아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문장은.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의 여행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 * *


Мы любители.

-우리는 연인입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널 사랑해, 아카아시.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W. MELL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갓길에 멈춰 섰다. 한 쪽 머리칼이 잔뜩 뻗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차문을 열었다 닫았다. 쾅 소리 나는 굉음이 외진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굳은 남자의 낯빛은 피로로 도배되었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한 눈가는 퀭하니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지 않은 채 대문 앞을 서성거릴 뿐이었다. 좌우로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를 여러 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녹음된 음성만 반복해 듣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세게 혀를 찼다. 다짜고짜 철제 대문을 두드렸다. 손등이 까질 때까지 두드릴 걸 염려하고 있었는데, 철통같던 대문은 의외로 쉽게 길을 터주었다. 

“보쿠토 코타로!!”

씩씩 대는 걸음 속도에 맞춰 쿠로오가 언성을 높였다. 넓지 않은 마당을 가로질러 잠겨 있지도 않은 현관문 손잡이를 확 잡아 당겼다.

쿠로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워커홀릭(Work-a-holic)마냥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붙잡아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던 그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러브하우스를 버젓이 두고 제 집에 들러붙어 사는 보쿠토를 나무라던 것이 아니었다. 걱정 어린 마음으로 건네준 몇 마디가 도화선으로 작용해 서로의 감정이 상할 만큼 앞 다퉈 싸웠던 일을 이제와 지적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남 부럽지 않던 연애질에 주변에 깨까지 들들 볶던 약혼녀를 러브 하우스에서 내쫓아 버린 것 때문 또한 아니었다. 

종적을 감췄다. 무려 24시간 동안. 아무 연락도, 이렇다 할 통보조차 없이. 중요한 방송 녹화, 잡지 인터뷰, 시나리오 회의, 그리고 연기 트레이닝까지. 모든 스케줄에 무단으로 펑크를 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워커홀릭을 걱정하던 쿠로오의 근심을 싹 날려버린 것처럼 보쿠토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쿠로오가 하루씩이나 걸려 보쿠토를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펑크 난 스케줄 뒤처리 하랴, 제작진들과 스탭 진에게 사죄하랴, 소속사에 보고하랴, 다음 일정 조정하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보쿠토는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쿠로오의 속이 타들어갈 만도 했다. 

“너……!”

너 제정신이냐, 인마?! 외마디 고함을 치려던 쿠로오의 입이 일자로 닫혔다. 

그 곳은 난장판이었다. 활짝 열린 신발장에선 갖가지 신발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얼기설기 얽힌 운동화와 구두 사이로 진흙과 모래, 나뭇잎이 한데 뭉쳐 꼭 쓰레기 더미마냥 현관을 가득 채웠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액자들은 바닥에 나뒹굴어 모서리가 찌그러지거나 흉측하게 부서져 있기 일쑤였다. 흑백 사진, 유화, 포스터를 덮고 있던 유리는 엉망진창으로 깨져 사방팔방 튀어 있었고 관엽식물을 키워내고 있던 고급스런 화병들은 누가 의도적으로 던져 깨뜨려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 천하에 흙 뿌리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잎사귀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물든 화초가 종말을 고했다. 유리 파편과 흙무더기뿐일 줄 알았던 바닥엔 찢어발겨진 종잇장 또한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신문 헤드라인, 얼마 전 맡았던 배역 대본, 잡지 표지, 아끼던 책. 그 외에도 대각선으로 뜯겨져 나간 벽지나 산산조각 난 베란다 유리는 꼭 폐허를 방불케 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신발 벗기를 포기한 쿠로오가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섰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 바닥에 파편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잘근잘근. 퍼석퍼석. 길어봤자 꼬박 하루란 시간.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엇이 잘못되어 이 사단이 났는지. 무엇보다도, 쿠로오는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보쿠토?”

다행히 보쿠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다시피 멀쩡한 가구. 가죽 소파 위에 무릎을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안은 인영이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쿠토임을 확신한 쿠로오가 보폭을 보다 넓혔다. 길쭉한 다리가 성큼성큼 나아가 순식간에 보쿠토와의 거리를 좁혔다. 푹 꺼진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이름을 부르길 여러 번. 퀭하게 가라앉은 눈알, 움푹 들어간 볼, 생기 없이 반쯤 벌어진 입술, 거뭇거뭇 자라나기 시작한 수염 등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이 쿠로오를 향했다. 핏기 없는 안색이 꼭 죽은 생선을 떠올리게 했다. 순간 전신에 오한이 끼친 쿠로오가 손날을 들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만큼 그의 뺨을 두어 대 내리쳤다. 작지 않은 찰과음이 귓전을 휘갈겼다. 

“이 개자식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어? 너 왜 이래. 너 미쳤어? 죽으려고 아주 작정했어?!”

물끄러미 허공만 쳐다보던 동공이 차츰 요동쳤다. 한 때 보석같이 빛나던 금안은 난파선 마냥 심하게 흔들리다 겨우 초점을 잡았다. 

“내 전화 왜 안 받았어.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너 연락 씹지, 피디한텐 항의 전화 오지, 이사란 작자는 또!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하아, 일단 그건 됐고. 당장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너, 집 꼴이 왜 이래. 네 꼬락서니는 또 왜 이렇고!”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간 곳에 대한 측은지심은 잠시뿐이었다. 쿠로오가 잡고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던 보쿠토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없어.”

뭐? 대꾸할 새도 없이 호박 빛 눈알 안에 물기가 흥건하게 차올랐다. 

“케이지가…없어.”

쿠로오가 이마를 짚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나 싶었다.

“너 인마……. 없는 게 당연하잖아. 헤어졌으니까.”

“케이지가 없다고.”

“일단은 병원부터 가자. 지금 네 몸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 돼. 밀린 스케줄이고 뭐고 넌 컨디션 회복이 급선무야.”

“어디에도 없어.”

119 버튼을 꾹 누르려던 손가락이 정지했다. 자신의 뻗친 머리를 멋대로 쓸어 넘겼다. 일순 짜증이 치민 탓이었다. 

“번호……. 나 번호를 몰라. 케이지 번호를 몰라. 전화가 안 되면 문자라도, 라인이라도 남겨 두려 했는데. 케이지한테 연락할 방법을 모르겠어.”

“야.”

“짜증나서 폰을 집어 던졌는데……. 망가졌어. 다 망가졌더라고. 먹통이고 전원도 안 켜지고 말도 안 듣고.”

“보쿠토!!”

“있지, 케이지 번호 알아? 알고 있어? 나…나 알려 주라. 케이지 목소리가 듣고 싶어. 얼굴이 보고 싶어. 그냥, 그냥 보고 싶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액체들이 기어코 추락했다. 양동이 가득 채워져 있던 소금물이 순식간에 엎어진 것처럼. 분수처럼 쏟아진 눈물이 뺨을 흥건히 적셨다. 이렇게 약해 빠진 애가 아닌데. 남 앞에서 쉽게 눈물 보일 애가 아닌데. 상황의 심각성이 차츰차츰 실감나기 시작했다. 병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쿠로오는 한 쪽 무릎을 굽혔다.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주룩주룩 떨구고 있는 보쿠토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이 있었어.”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니었다. 낮게 깔려 속삭임에 가까운 어조는 크게 넘어진 아이의 깨진 무릎을 어루만지는 마냥 다정하고 또 섬세했다. 그것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숨죽여 울던 어깨는 달달 떨리고 울먹임이 그치질 않았다. 딸꾹질과 눈물과 콧물 같은 배설물을 온전히 토해내며 보쿠토는 띄엄띄엄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아카아시가 보고 싶어.

맹목적인 욕망에 휩쓸린 발길이 처음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카페였다. 아카아시가 일하던 카페이자, 우리가 처음 만난 카페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나치게 단순했던 거다. 그 곳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고.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몇 달 전에 그만뒀는데요?”

모르는 직원이 있었다. 아카아시란 이름을 대니 영 모르는 눈치였다. 사장을 불렀다. 구면인 사람이었다. 겨우 한 번 본 내 얼굴을 기억할까 싶었는데 첫 눈에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뭐, 개인 사정이 있다며 급하게 관둔다 길래 잡진 않았는데. 그 쪽들하고 관련된 일인 줄 알았거든요.”

신경 써야 할 건 그녀 하나만이 아니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묘한 위화감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모자를 잊었고 선글라스를 잊었고 마스크를 잊었고 내가 ‘나’라는 걸 잊었다. 요컨대, 나는 이목의 중심이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만두지 말라고 붙잡는 거였는데. 그쪽들 때문에 우리 카페 간판 비주얼 하나 잃었잖아요.”

멍청했다. 내 위치와 입장이 어떠한지 머리로만 알고 있었나보다. 상기 시킨다고 노력한 사람은 쿠로오였고 상기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할 일을 잊고 해야 할 일을 잊고 오롯하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표 같은 눈알들이 뒤통수와 옆구리에 박혔다. 얼마 안 가 한 쪽 어깨에 무게감이 실렸다. 누군가 어깨를 살짝 건드린 탓이었다. 

“저기……. 보쿠토 코타로 맞나요?”

한 때나마 이런 순간을 바란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무리가 아는 척 인사를 건네고 이름과 환호성을 연발하는 순간. 그것 하나를 열망해 여기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용할 만한 것은 다 이용했다. 아카아시도 그 중 하나였다. 단순한 도구일 뿐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아카아시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야 약간의 불화가 있었을 뿐. 

“와~ 예전부터 팬이었어요!”

내가 행복을 만끽할 순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는 왜. 

“전철에서 우연히 보고 말았거든요. 보쿠토군이랑 아카아시군! 두 분의 연애가 너무너무 잘 어울려서 언제까지고 응원, 하고 싶었는데…….”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순히 나를 향한 호감을 표하던 여학생에게 왜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여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사방엔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의 호통을 쳤던 걸까? 아니면 쓸데없는 넋두리라도 털었던 걸까? 나 힘들다고, 괴롭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입 나불거리지 말라고. 애꿎은 사람만 탓했던 걸까? 

아니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화만 내다 끝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이마를 푹 조아렸던 것 같다.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도 그 누구도 내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 같다. 

“헤어진 거 아니에요. 잘못 나간 기사예요. 잠깐 싸웠는데, 케이지가 많이 화를 내서. 내가 많이 잘못한 거라서. 그게 오해되고 와전된 거란 말이에요. 우리 끝난 거 아니라고요. 아닌데. 아닌데……. 케이지를 못 찾겠어요. 우리 케이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나 걔한테 잘못했다 빌어야 해요. 싹싹 빌어야 해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시간이 없는데. 걔 찾아야 하는데. 많이 보고 싶은데. 못 해준 말이 너무 많은데…….”

자연스레 손을 마주 잡았다. 깍지를 꼈다. 묵직한 뒷목을 떨어뜨렸다. 깨물린 입술은 입안으로 사라지고 동그란 방울들이 툭툭 바닥을 때렸다. 

“케이지 보셨어요? 걔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무라도 좋으니까. 뭐든 좋으니까. 제발. 제발 좀 알려주세요.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다고요.” 

아카아시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웃는 얼굴, 미소 짓는 얼굴, 행복한 얼굴만 떠오르길 바랐는데. 정작 머리를 뒤덮는 건, 그가 우는 얼굴, 상처 받은 얼굴, 슬퍼하는 얼굴. 

‘나의 시대가 왔다, 라고 했죠. 그럼 그건 보쿠토씨의 시대인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살고 저는 제 시대를 살 거예요.’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사이였잖아요, 우리.’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싫으면 안 보고 불편하면 피해 다니고. 좋을 때는 저 좋을 대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 싫을 때는 멋대로 선 긋고.’

‘보쿠토씨.’

‘저랑 키스할래요?’

‘이제 와서 남자랑은 못 해먹겠단 개소리 지껄이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쿠토씨?’

‘밑 보일 거 없잖아요. 저는 곧 끝이고, 그 사람과는 백년해로할 사이잖아요. 마지막이라는데, 이런 것 하나 못 들어줘요? 아니야. 아니에요. 달라요. 들어주세요. 부탁이에요. 커플이다 뭐다 따라다니는 수식어구는 많았지만, 우리……. 그럴듯한 키스 한 번 못 해봤잖아요. 안 해봤잖아요.’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좋아해줄 필요도 없어요. 저는 그냥, 그냥…….’

수많은 목소리가 쓰나미처럼 지나갔다. 중구난방으로 뻗어 나간 줄 알았던 문장들은 일제히 단 하나의 결론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분명하게, 녀석의 진심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말했던가. 아카아시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 왔던가. 무엇을 근거 삼아 자신의 곁에 있으라 입방적으로 명령했던가. 

‘앞으로 고작 한 걸음이야. 그 쯤 남은 기분이 들어. 그걸 넘어서는 순간 ‘나의 시대가 왔다!’는 기분에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 알겠어? 완전히 연기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 배우란 직업에 내 평생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이용했다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고 치졸하다 해도 할 말이 없어. 나는 누구보다 주목 받고 싶었으니까. 허접했던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내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계약이 끝난 순간부터 우리는 결별했단 설정이야.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해관계나 각자의 사정이 안 맞아서 결국 헤어졌다는 거지.’

‘아마 그 이후에 지금처럼 우리가 서로 얼굴 맞대고 있을 일은……없지 않겠어?’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해.’

‘게이라고 낙인 찍혀서 여자들한테 바람 맞고 엉엉 울면서 우리 탓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간수 똑바로 해.’

‘내가 너를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너도 나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간단히 끝맺음 할 수 있는 거지.’

‘미쳤구나. 네가 돌았구나. 남의 책장을 허락도 없이 들추는 걸 모자라 다짜고짜 그…아 씨팔. 야. 너 진짜였냐? 진짜 뭐, 게이나 동성애자인 놈이었어?’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머리통부터가 글러 먹은 거였네. 친구로는 쥐뿔도 본 적 없으면서.’

‘소름끼쳐.’

진심도 아니었던 주제에. 돈 몇 푼으로 사람을 사들인 주제에.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고, 이용 가치에 의구심이 생기기 무섭게 냉큼 갖다 버린 주제에. 

하염없이 울기만을 반복했다. 제자리에 주저앉다 못해 무릎까지 꿇고 오열했다. 나아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목적을 위해 타인의 희생이든 뭐든 전부 감수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아카아시의 몸과 마음을 짓밟고 여기까지 왔다. 저질렀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던가. 철판 깔고 꿋꿋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던가. 이도저도 아닌 채 제자리에 머물며 이제와 과거의 잘잘못을 들추는 짓거리가 왜 이리 비참하던지. 

정신이 나간 채 집에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텅 빈 집엔 공허함이 감돌았다. 2층 어딘가엔 아직도 아카아시의 울음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내게 상처 받은 얼굴로, 그럼에도 나를 갈망하는 눈을 한 그가 아직도 집을 헤매는 것 같았다. 사키가 없어졌기 때문에 상실감이 드는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멍청한 나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흔적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다. 

멀끔한 집안을 둘러봤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집이었다. 이른바 허니문, 혹은 러브 하우스. 그 광경이 너무 완벽해 되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선반 위에 최근 날짜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몇 달 전 전국을 뒤흔든 지진의 후속 조치가 헤드라인 전반부를 독차지했다. 큰 기대를 바란 건 아니었다. 막상 내 얘기 하나, 내 힘들었던 고민 하나에 조차 관심 가지지 않는 종이 쪼가리에 허탈감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이야기가 아예 없진 않았다. 얄팍한 종잇장을 몇 개 넘기니 연예 부문에선 나와 아카아시의 이별에 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추측은 꼭 예의를 잘 갖춘 무례 같다는 게 글자에서부터 또렷이 드러났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들지도 않는 것들이 멋대로 펜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찢었다. 갈가리 찢어 주었다. 세로로 북북 찢고 나니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내 얼굴이 대문짝 만 하게 찍힌 사진도, 자신들 입맛대로 휘갈긴 활자도, 정성들여 돌보았던 화초들도, 좋은 집이라고 칭찬받던 벽지도, 액자도, 그림도, 가구도, 전부 찢어 주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엎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뒤따랐다. 엉망진창으로 난잡해진 주위를 둘러보니 돌덩이 같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웹 서핑을 해봤다. 손바닥 만 한 화면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내 이름, 혹은 아카아시의 이름을 눌러 봤다. 수많은 컨텐츠가 나왔다. 그 가상공간에선 욕과 칭찬과 스토킹과 험담이 함께 존재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모를 우리의 사진이, 우리의 순간이 꼴 사나운 가십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아카아시의 근황 같은 건 없었다. 정상적으로 찍힌 아카아시의 얼굴 또한 없었다. 뒷모습, 멀리서 훔치듯 찍은 옆얼굴, 어둑한 배경에 이목구비도 구분 안 가는 형상. 본인이 맞는지도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와중에 벌써부터 아카아시라 도장 찍는 사람들. 

중요한 건, 그 가십거리의 중심이 아카아시가 아닌 나였다는 것. 내가 아카아시를 이용했듯 사람들 역시 아카아시를 이용해 나를 능욕하기 바빴다는 것. 

차라리 잘 된 일일까. 

무감각한 얼굴로 조그만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다 갑작스레 화면이 바뀌었다. 모르는 번호일까 조마조마한 마음도, 아카아시일까 노심초사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쿠로오]

저 이름을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지겹게 봤는지. 짜증나서 끊었고, 꼴 보기 싫어 던졌고, 그 이름이 ‘아카아시’가 아닌 것에 어금니를 갈았다. 퍽 소리가 났다. 유일무이한 통신기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였다. 무엇 하나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싫어 세차게 발을 굴렸다. 발치에 멀쩡한 게 닿았다. 잡지였다. 내 낯짝을 그대로 표지에 쓴 화보집이었다. 언제 찍었는지도 기억 안 나는 그런 흔한 사진. 쉽게 찢기지도 않는 고급 재질 이길래 조금은 힘이 들었던 것 같다. 손에 힘을 주는 대로 종이가 갈라졌다. 그 경계선이 이마 한 가운데와 코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목을 잘라 버리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스스로를 욕보인 걸 뻔히 알면서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진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갈기갈기 찢어낸 조각들은 삽시간에 흩어졌다. 사정없이 찢어낸 것들이라 크기도, 모양도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그 중 두 번째로 컸던 조각이 발등 위에 사뿐하게 앉았다. 짜증이 역류하는 건 잠시뿐.

‘또 몰라? 오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가 언제쯤 오겠어.’

‘감독님~ 제가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포즈가 잘 안 잡히네요.’

‘이 친구랑 몇 컷 찍어 봐도 될까요?’

분명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 중 하나였다. 렌즈 앞에서의 어정쩡한 포즈나 몸 앞에 곱게 모은 손가락들이 아카아시임을 여실히 밝혔다. 그것이 아카아시임을 확인하기 무섭게 눈알이 돌아갔다. 얼굴 조각을 찾기 위해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때만큼은 아카아시를 화보집에 넣지 말라던 쿠로오의 간절한 부탁을 멋대로 거절해버린 사진사에게 감사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조각 맞추기에 여념한 지 한참. 가까스로 끼워 맞춘 아카아시의 얼굴은 만신창이였다. 하필이면 잘게 찢어진 곳이 이목구비여서. 하필이면 머쓱하게, 혹은 어색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서.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유일한 조각들을 조심히 끌어 모았다. 한참 동안을 숨죽여 울었다. 애 닳는 조각들을 꽉 틀어쥐자 그것들은 오히려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손 안에 남은 것은 몇 톨의 부스러기뿐이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W.MELL




먹다 만 감자 칩이 굴러 다녔다. 절반 쯤 읽다 만 점프가 슬슬 지겨워졌다. 오래도록 아빠 자세를 유지한 탓에 척추가 뻐근했다. 한 쪽 허벅지엔 미미하게 경련이 일었다. 책을 덮었다. 눅눅해진 감자 칩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이 없었다. 찌뿌둥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기지개를 켜니 등 뒤로 익숙한 체온이 와 닿았다. 간헐적으로 게임기 버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언제까지 할 거야?”


흘깃 벽시계를 살피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은 지가 바로 조금 전 같은데 창밖엔 한창 어둠이 깔려있다. 


“글쎄요.”


아카아시가 몸을 뒤로 기울였다. 자연스레 그의 하중이 내 등으로 쏠렸다. 내게 기대다 시피 몸을 맡긴 아카아시에게 조금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카아시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네. 켄마가 추천해주는 게임은 거진 재밌거든요.”

“……전-혀 모르겠던데.”


멋대로 뻗친 머리칼을 매만지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네코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붉은 색 바지가 눈에 띄었다. 깜깜한 밤, 마주 닿아 익숙한 등의 감촉,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숨소리. 문득, 섭섭하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발목을 움켜잡았다. 한밤 중 갑자기 감성적인 기분이라도 든 걸까. 


“케이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불러 봤다. 아카아시는 금세 네, 라고 답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말해도 될까, 말하지 말까. 해서 될 말일까, 해선 안 될 말일까. 순간 몰아친 망설임이 목구멍을 에워싸는 것 같았지만 멍청한 입은 내 이성보다 한 발 빨랐다. 


“나는 왜 ‘네코마’일까.”


네? 되묻는 걸 기다릴 틈도 없이 다음 의문이 튀어 나왔다. 


“너는 왜 ‘후쿠로다니’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이란 건 알았다. 그래도 일단 내뱉고 나니, 섭섭한 마음이 한 풀 꺾이는 것 같았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릎을 감싸 안았다. 위축된 마음이 괜한 우울감을 불러 일으켰다. 역시 해선 안 될 말이었다. 


“나도, 너랑 같은 코트에 서보고 싶어. 연습 경기 말고 공식 시합에서 말이야. 네 토스를 받아 보고 싶고, 내가 원 터치한 볼이 네게 이어졌으면 좋겠고, 속공이 먹혀서 같이 하이파이브 쳐보고 싶고, 이기면 이긴 대로 얼싸 안고 싶고, 지면 진대로 같이 울어도 보고 싶고, 너는 너대로 충분히 잘 했다고, 최고의 토스였다 도닥여 주고, 나는 나대로 잘 막아줬다고, 최고의 미들 블로커였다고 위로 받고.”


알고는 있는데. 못난 입은 멈추질 않았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몇 계단씩 뛰어 내려가 네 교실에 쳐들어가고 싶어. 맛있는 거 먹자고 반쯤 졸고 있는 네 팔을 붙잡아 매점으로 달려가고 싶고, 교복 단추 자국이 선명히 남은 네 뺨을 살짝 아프게 꼬집고 싶고, 수업이 끝나면 연습하러 가자며 너를 마중 나가고 싶고, 부실까지 나란히 걸어가고 싶고, 옷 갈아입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싶고, 같은 유니폼을 입은 우리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고, 땀 닦는 수건을 공유하고 싶고, 드링크를 넘겨주다 이것도 간접 키스라며 얼굴을 붉히고 싶고, 연습이 마무리되면 공용 샤워장에 들어서다 서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쳐 보고 싶고, 같이 집에 가자며 함께 교문을 나서고 싶고, 돌아가는 길에 붕어빵 하나씩 입에 물고 싶고, 잘 들어가라며 작별의 뽀뽀도 하고 싶단 말이야.”


페이스 조절이 안 됐다. 평소라면 눈 감고 넘어갔을 일이 물 만난 고기처럼 쏟아진 기분이었다. 같은 학교가 아니란 것에 이토록 연연하는 자신이 싫었다. 아아, 코끝이 짜증나게 시큰 거렸다. 이게 뭐라고 울고 싶은 기분이 되는 건지. 때 아닌 우울증이 기분 좋게 마무리 되어가는 주말을 망친 것 같다. 


“중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어.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어떻게든 후쿠로다니에 입학하고 싶어. 네 선배가 되고 싶어. 아니, 동기여도 좋아. 후배여도 좋을 것 같아. 너랑 같이 배구를 하고 싶단 말이야. 네트 너머로 보는 네가 아니라, 네트 안 쪽에서 함께 하고 싶다고.”


게임기 소리가 멎었다. 옹졸하고 비좁은 내 속내를 들은 아카아시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당황스럽겠지. 스토커처럼 보였으면 어쩌지. 실망했을까. 싫어졌을까. 풍선처럼 커진 설움과 맞바꿔 자신감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런 스스로가 싫다가도 또 한 편으론 속이 시원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간 쌓여온 스트레스가 단번에 펑 터진 것 같았다. 


“쿠로오씨.”


눈을 감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던 아카아시의 마음이 오늘만큼 오리무중일 수 없었다. 


“변태입니까?”


순간 사례가 들릴 뻔했다. 막연히 예상하고 있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대답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뚱한 표정이었다. 


“뭐?!”

“방금 그랬잖아요. 옷 갈아입는 거 몰래 훔쳐보고 싶다는 둥, 같이 샤워장에 들어간다는 둥.”

“아, 아, 아니. 그거느은…….”

“그건 뭔데요.”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눈알이 옆으로 굴러갔다. 아카아시 손아귀에 있어야 할 게임기가 먼발치에 뉘여 있었다. 아카아시는 무릎걸음으로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대로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바-보.”


익숙한 체취가 코를 덮었다. 눈물 나도록 따뜻한 체온이 내 목덜미를 감싸 안아 보다 깊게 내 뒤통수를 제 품속에 끌어 들였다.


“겨우 그런 걸로 삐쳐 있었어요?”

“겨우 그런…거라니. 나는 진지하거든?”


고른 숨소리를 따라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과는 정반대의 쿵쿵대는 맥박이 귓전을 크게 울렸다.


“다른 학교라서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뭐가 좋아. 하나도 안 좋아.”


아카아시가 기분 좋게 웃는 소리를 냈다. 뒤통수를 통해 웃음소리가 곧장 울려 퍼졌다. 응어리진 기분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쿠로오씨가 교문 밖에서 기다려 주는 거.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이 나 하나만 기다려 주는 거, 사실 엄청나게 설레는 일이거든요? 쿠로오씨만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겁니까. 또, 네트 바로 맞은편에서 쿠로오씨 얼굴을 유심히 봐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는 거. 오늘 상태는 괜찮은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벌써 지치진 않았는지, 정말 뚫어질 듯 열심히 보거든요. 그러다 눈 맞으면 쿠로오씨도 픽 웃어 버리는 주제에. 솔직히 같은 팀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요. 팀원들 눈치도 보이고. 그리고 나머진……. 같은 학교 아니어도 충분히 자주, 많이 하고 있는 일들이고.”


조심히 턱을 들자 아카아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끄럽게 휘어진 눈매나 입 꼬리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카아시 그 자체였다. 내 오랜 고민과 걱정거리들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 아카아시를 보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진즉에 털어 놓을 걸 그랬나. 알고 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짐을 괜히 혼자 떠안고 있었나. 


“케이지 지금 너무 예뻐. 알아?”

“기왕이면 멋있다고 해주세요.”

“예뻐.”

“……그래요. 예쁘다고 칠게요.”


바닥을 친 우울이 안도로 뒤바뀌자 다음은 어리광이 빼꼼 고개를 내밀려 했다. 답지 않게 말이다. 


“케이지, 나 뽀뽀해줘.”

“뽀뽀는 제가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싫어. 얼른 뽀뽀.”


무언의 불평도 잠시. 이마, 눈꺼풀, 콧대, 뺨 순으로 따뜻한 깃털이 앉았다 떨어졌다. 입술을 피해 간 건 일부러 인 게 틀림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아랫입술이 부루퉁 튀어 나왔다. 이제는 먼지 한 톨 쯤 남은 불안감을 완전히 없애고 싶었다. 


“괜찮다고 해줘.”


이렇게까지 어린 아이 마냥 굴어도 될까, 싶은 마음이 문득 샘솟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카아시 쪽에서 먼저 한 소리가 나왔다. 그것도 내 일생일대의 굴욕 같은 일침이 말이다.  


“오늘따라 보쿠토씨 같네요.”

“그거 욕이지.”


아카아시는 또 웃었다. 삽시간에 짓뭉개진 내 얼굴은 나 몰라라 한 채. 


“쿠로오씨한테선 보기 드문 일이니까요. 신기해요.”

“신기한 거 알면 얼른. 말해줘.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착한 아이 칭찬 하듯 부드러운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 말이 아카아시 입에서 나왔을 뿐인데. 정말 괜찮아 질 것 같았다. 내친김에 다른 것도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고 치졸하고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고 열등감 느끼는 쿠로오씨지만 엄청 많이 좋아한다 해줘. 하늘만큼 땅만큼. 아니, 우주보다 더 넓게.”

“푸하하, 그게 뭐예요~”


이제는 입까지 손등으로 가리며 쿡쿡 웃어대는 아카아시였다. 


“나 심각해. 입술에 뽀뽀 안 해준 대신이야.”

“그건 또 귀신같이 알아서.”

“거 봐, 안 해줬지.”

“하여간 쿠로오씨는 못 이기겠다니까.”

“얼르은.”


아카아시를 보채듯 뒤통수를 휘휘 내젓자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아카아시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고 치졸하고 쓸데없는 거에 집착……. 뭐였죠? 까먹었어요.”

“열등감 느끼는.”

“열등감 느끼는.”

“쿠로오씨를.”

“쿠로오씨를.”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합니다.”


끝을 모르는 고독과 우울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펄펄 뛰어대는 맥박수와 휘몰아치는 펌프질에 정신이 쏙 빠져나갈 것 같았다. 내 뒤를 끌어안고 있는 아카아시를 정면으로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돌렸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찌할 바 모르겠어 가만히 안아 두질 못하고 조금씩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탔다. 살짝 드러난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좋아하는 냄새, 좋아하는 호흡, 좋아하는 목소리, 좋아하는 웃음, 좋아하는 사람.


“아~ 나 역시 전학갈래. 후쿠로다니 편입할래. 매일같이 얼굴 보고 목소리 듣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싶어.”

“지금 보고 있잖아요. 듣고 있잖아요. 당장 말해주면 되잖아요.”

“유급할까? 지금이라도 시험지 몽땅 백지로 내버릴까? 같은 학교가 안 된다면 같이 졸업이라도-”

“하하하하,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올해 졸업 안하면 앞으로 영영 쿠로오씨 안 볼 거예요.”


힝. 우는 소릴 내도 아카아시는 단호했다. 이제는 내가 아카아시에게 매달리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 따윈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보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안 해주실 거예요?”

“……뭔데.”


톡 튀어나온 쇄골 라인을 따라 쪽쪽 입을 맞췄다. 허리를 안은 손이 척추를 따라 차츰차츰 이동을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살짝 실망한 목소리로 읊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어느 새 꼬리뼈 언저리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아카아시와 눈높이를 맞췄다. 복숭아 빛을 띤 입술 위로 내 것을 진하게 겹쳐 보았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턱에 맞춰 저항 없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말캉한 살점이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넸다. 얼싸 안고 춤을 추고 세게 휘어 감기도 하다 입천장 쪽 여린 살을 장난치듯 톡톡 건드렸다. 진득한 입맞춤이 아카아시의 혼을 쏙 빼놓기 직전, 하나 된 입술을 살짝 떼어내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NTR 주의 




W. 멜




안개꽃이 수놓아진 플레이트 위엔 먹음직한 스콘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홍차에 곁들여 먹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은 식고 바삭하던 표면은 바짝 말라 있다. 어느 누구도 선뜻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코타로는 저를 사랑하니까요.”


묘한 패배감이 아카아시를 뒤흔든다. 사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카아시는 조용히 주먹을 틀어쥔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사키는 깜박 잊었다는 듯 양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마주친다. 살얼음판 같던 묘한 분위기가 박수 소리 한 번에 쩌적 갈라진다. 날 선 목소리로 진실을 꿰뚫던 서늘한 낯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특유의 상냥한 어조가 나긋나긋 흘러나온다. 


“기왕 여기까지 발걸음 해주셨는데 밥 한 끼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선호하는 음식 있으신가요? 아님, 가리거나 못 드시는 음식이 있다면 참고해서 준비해 볼게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다 식은 티 팟과 찻잔을 정리하며 일어선 사키는 눈이 아닌 입으로만 웃음기를 머금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릴까. 그녀의 행동거지를 경계하듯 아카아시는 쉬이 응하지 않는다. 아카아시 앞에 놓인 찻잔이 치워진다. 그 짧은 순간 아카아시의 안색을 가까이서 살핀 사키는 묘한 눈웃음만 흘린다. 


“불고기!! 불고기 하자!”


닫혀져 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리며 우람한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 건 바로 그 때다.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보쿠토는 아주 신바람이 났는지 안방에서 부엌으로 껑충껑충 뛰어온다. 막 앞치마를 두르려던 사키는 등을 짓누르는 익숙한 무게감에 어쩔 수 없단 얼굴로 활짝 웃는다. 


“고기는 어제도 먹었잖아?”


사키의 불평에도 아랑곳 않고 막무가내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보쿠토는 때 아닌 어리광을 부리며 그녀의 고운 어깨선에 코를 묻는다. 


“어제는 바베큐였잖아. 오늘은 뭔가……. 뭔가 그래! 소고기가 먹고 싶어. 먹자, 먹자. 응?”

“음……. 상관없긴 한데, 당장은 재료가 없거든. 나가서 사와야 하는데 기다릴 수 있겠어?”

“당연하지. 아카아시 너도 괜찮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말고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카아시의 척추가 보쿠토의 부름과 함께 뻣뻣하게 굳는다. 저를 돌아본 두 쌍의 눈동자에게 주목받자 상대적 박탈감까지 들고 만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백짓장이 된 사이 그의 입은 멋대로 움직인다. 


“……네. 맛있겠네요.”


망할. 


“좋-아! 결정!”


활짝 휘어진 눈꼬리는 처음엔 아카아시를 향했지만 이내 제 연인에게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한껏 안은 등이 퍽 듬직하다. 제게서 등진 뒷모습에 아카아시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달콤함은 멈추지 않는다. 


“어쭈. 슬금슬금 손이 어디로 올라가실까, 우리 왕자님?”

“으응. 조금만~”

“아카아시군이 다 보잖아. 저리 가 있어요.”

“장보러 나갈 거라며. 나는 같이 못 가니까…….”

“금방 갔다 올게. 아카아시군이랑 집 잘 보고 있어요.” 


다정한 신혼 부부. 핑크빛으로 둘러싸인 한 폭의 그림에 먹물 한 줌이 튀어 있다. 꼭 아카아시 자신이 먹물의 역할을 자처한 것 같아 홀로 가슴을 부여잡는다. 외출 준비 삼아 외투를 챙겨 입는 사키의 그림자를 보쿠토가 졸졸 뒤쫓는다. 그의 걸음이 하나둘 제게서 멀어질수록 아카아시는 속으로 헤아려본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겨우 여섯 걸음. 보쿠토는 발을 멈춘다. 쪽, 꿈에서 들어 본 듯한 입맞춤 소리가 메아리처럼 아득히 울린다. 마주 안은 포옹이 일류 로맨스의 해피 엔딩 같다. 


좋아하지 않는다. 보쿠토의 마지막 발걸음이 말한 결말. 신빙성 제로의 점괘는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그를 끊임없이 다그치고 채찍질한다. 


아카아시는 픽 웃고 만다. 잘 다녀오라 손짓하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좋아하고 말고가 마음먹기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다면. 칼로 그어 버리듯 감정을 잘라낼 수 있다면. 


“집 구경 좀 할게요.”


진즉에 그를 포기할 수 있었으리라. 


어? 되묻는 보쿠토를 뒤로하고 걷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단 둘이 살기엔 과하게 큰 집. 재벌 3세들이 별장으로 삼을 법한, 고급 맨션이나 펜트 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단독 주택은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엔 탁 트인 거실과 흰색을 모티브로 한 새하얀 부엌, 풍채 좋은 안방을 비롯한 개방적인 공간. 서적으로 수두룩한 서재와 각종 옷감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드레스 룸, 바비큐가 가능한 드넓은 발코니를 배경 삼은 2층. 뻥 뚫린 옥상 아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 쬐는 조그만 옥탑 공간. 


깔끔한 인테리어. 부와 멋을 갖춘 거주 공간. 사실 그런 것 따윈 눈에 차지 않았다. 그에겐 구실이 필요했다. 보쿠토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될 구실. 그래서 도망쳤다. 숨을 곳이 필요했고 숨 쉴 곳이 필요했다. 


“윽.”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더니 알싸한 통증이 그의 어깨를 덮친다. 코너 모서리에 세게 부딪힌 탓이다. 어찌나 아팠는지 눈가엔 저절로 눈물이 핑 돈다. 알싸한 통증으로 부풀어 오른 어깨를 감싸곤 주위를 둘러본다. 부의 규모부터 전혀 다른 공기에 박탈감이 차오른다. 좁고 어두운 반지하방, 쾨쾨한 곰팡이 냄새, 벽지를 장식하는 눅눅한 물 자국. 


무엇이 잘못 됐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순간이나마 그와 행복해지려 한 자신이. 그도 저와 같은 감정일 거라 착각한 자신이. 저와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제 눈높이를 맞춰주길 바란 자신이. 아카아시는 너무나 후회로웠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부딪힌 어깨를 움켜쥐던 아카아시가 끝끝내 무릎을 구부린다. 뻥 뚫린 가슴을 힘껏 부여잡는다.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 * *



한 편, 사키를 마중 보낸 보쿠토는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곁에 있고 싶어도 곁을 지킬 수 없는. 이런 결말을 자처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건만 막상 사키를 홀로 내보내니 서글픈 마음을 좀처럼 털어낼 수 없다. 


그는 지금도 종종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속으로 스스로를 깊숙이 가라앉히곤 한다. 과연 이게 잘한 일일까. 배우란 직업을 업으로 삼는 것이나, 스스로의 유명세를 위해 타인을 좋을 대로 이용한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버젓이 두고 가짜를 세워둔 것이나. 


새벽달이 기울어지는 밤이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악몽을 꾼 직후 얄팍한 잠에서 깨어나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침구를 한쪽으로 치웠다. 지친 손바닥은 얼굴을 가리고 약해진 등은 잘게 떨렸다. 그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준 사키는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등을 쓸어내렸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소리 없이 울던 그가 마침내 혼잣말로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욕심이 많으니까. 행복해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다 이루고 싶은 게 뭐가 나빠. 대체 어디가 나쁜 건데.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어. 해야 해. 할 수 있어.  


스스로와 담판을 내릴 때까지 말이다. 


이렇듯 속죄의 밤이 지나고 나면 보쿠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죄책감을 용기로 무장하고 미안함을 웃음으로 가렸다. 


“집 구경 좀 할게요.”


현관문이 다 닫히기도 전. 등 뒤론 낯익은 목소리가 울린다. 어? 되묻는 질문은 홀로 웅웅거린다. 계단을 타고 오르는 소리만이 아득하다. 보쿠토는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춘다. 신발이 즐비한 현관을 손수 정리해 본다. 아끼는 에어 조던 시리즈나, 톰 포드제 가죽 구두나.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켤레는 거뜬히 들어갈 신발장 어딘가에 처넣어 두고 보니 마지막 신발이 현관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다. 


“……아카아시 것.”


때가 잔뜩 묻은 앞코. 너덜너덜한 운동화 끈. 구겨 신느라 헤진 운동화의 뒤축. 브랜드도 이름도 없는 그 낡은 운동화에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인지. 구석에 처박혀 하나는 온전히, 다른 하나는 옆으로 엎어진 그것을 보쿠토는 가지런히 정돈해 둔다. 자신과 전혀 다르게 살아온 그 뿌리 깊은 생명력에 감탄이 나오고 만다. 곰곰이 되짚어 본다. 첫 인상은 어땠더라. 


“말 수도 없고 무뚝뚝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애.”


아카아시가 저를 기억하기 이전, 보쿠토는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유독 겨울바람이 시렸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근처에 촬영 스케줄이 있던 보쿠토는 감독과 스테프들 몫의 커피 심부름을 받았었고 마침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려 했을 뿐이었다. 카페 바로 옆,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길에서부터 들려오는 공방 소리만 아니었어도. 작지 않은 언성의 높낮이를 따라 언뜻 고개만 내비쳤을 때 그 좁은 길모퉁이엔 세 명의 사람이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고 있는 중년 여성. 다른 하나는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대여섯 살의 남자 아이. 나머지 하나가 아카아시였다. 여자를 노려보다시피 인상을 쓰고 있던 아카아시의 품에는 언뜻 보아도 크게 다친 새끼 고양이가 안겨져 있었다. 상황은 알 만 했다. 끼어들었나 보네, 보쿠토는 짧게 혀를 차곤 눈을 돌리려 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박의 외침이 들린 건 바로 그 때였다. 아카아시가 그녀를 상대로 뭐라 대꾸 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날 선 그의 몇 마디가 상황을 타개한 것은 확실했고 여자는 충격을 먹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으며 어느 새 불길이 일은 세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그 사이에 끼어 든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경찰 이야기가 오고 가며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 될 수 있었지만, 아카아시가 그를 기억 하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유니폼인 베레모와 앞치마를 벗어 던진 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곧장 동물병원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볼 기미조차 없이 멀어져 가는 택시 번호판을 보며 보쿠토는 막연히 생각했다.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고. 


그 직후 부터였다. 아카아시가 근무하는 카페를 보쿠토가 단골로 점찍은 것은. 그가 근무하는 시간을 다이어리 한 켠에 메모해둔 채 밤새 대본 연습을 할 때면 아카아시의 얼굴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눈앞의 불의를 피하지 않을뿐더러 당차게 할 말을 하던 그 옆모습이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였을까. 호기심이 호감이 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명이 아카아시 케이지(赤葦 京治) 라는 것도.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도. 저를 귀찮게 여기면서도 무시하지 않고 하나하나 답해주는 것도. 의외로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것도. 다소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 밑엔 저만의 신념이 있다는 것도. 제 잘못은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고집도, 자존심도 만만치 않은 것도. 보면 볼수록, 훤칠한 외모란 것도. 


시간이 날 때마다 카페를 찾았다. 사사건건 말을 걸거나 사고를 치거나 쓸데없는 걸 트집 잡아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다 위장 연애라는 일석이조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나는 보쿠토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 다른 하나는 아카아시의 자금적 지원을 위한 핑계. 이번 기회에 짧게나마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졌던 보쿠토는.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아카아시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제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보다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동그래진 눈을 하며 깜짝 놀라는 얼굴. 당황할 때마다 시선을 피하는 버릇. 하나부터 열까지 닮은꼴이라곤 전혀 없는 취향. 입만 열었다 하면 높아지는 언성. 도통 맞물리질 않는 아귀. 


그런 아카아시를 상대로 두 달이 가당키나 할까란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차라리 목석을 끌어안곤 사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며 기자회견을 여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이래 갖곤 친구는커녕 계약 이후 언짢은 감정만 남겠다 싶었던 그가 언제부터 아카아시를 다시 살펴보게 됐는지. 


스캔들이 대박을 터뜨리고, 세간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실감하는 와중. 엉망진창이었던 첫 데이트를 기억한다. 데이트라기 보단 대외 홍보용 이미지 관리였지만, 보쿠토는 그마저 즐거웠다. 친구와 놀러 나온 기분이 딱 이런 걸까 싶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케이지라 꼬박꼬박 불러주며 ‘함께’가 당연한 것처럼. 


관람 차에 탔을 때만큼 의외의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을까. 저에겐 당연했던 것들이 아카아시에겐 전혀 당연치 않았을 때. 그 괴리감이 꽤 깊다는 걸 알았을 때.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앞에서 처음으로,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당황하며 난색을 표하던 아카아시 특유의 표정은 이후에도 종종 보쿠토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보쿠토 자신과 영화의 흥행을 기념하던 회식 자리. 제 3자에게 성적 희롱을 당하는 아카아시를 가만 두고 보지 못한 것도. 홧김에 으름장을 놓으며 칼날을 세운 것도. 사실은 곤혹스러워 하는 그의 표정이 짜증나게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스케줄이 빡빡해 며칠 간 보지 못했던 사키의 얼굴을 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던 불쾌감은 눈 녹듯 사라졌고 사랑이라 이름 붙인 감정만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아카아시가 제게서 등진 것도 몰랐고 푹 가라앉은 어깨는 보지도 못했으며 탄식 섞인 한숨이나 희미한 눈물 냄새마저, 보쿠토는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집 구경한다더니만…….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보쿠토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계단의 철제 난간엔 드문드문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키와 함께하며 행복했던 시간들이 네모난 틀 안에 박제 되어 있다. 그것들을 흐뭇한 눈으로 만지작대던 보쿠토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 같은 것에 귀를 세우게 된다. 삽시간에 안색이 굳어지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진다. 


“케이지?”


막상 2층에 다다르고 나니 흐느낌은 뚝 멎어 있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불안한 마음이 심장을 쿵쿵거리게끔 한다. 복도식으로 늘어선 방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본다. 찾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곳이라곤 창고로 사용하고 있던 서재 하나.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고동색의 고급스런 문짝을 열고 보니 보쿠토는 해야 할 말 따윈 새까맣게 잊고 만다. 오래된 책 냄새로 그득한 서재 한 가운데, 책장을 팔랑이고 있는 아카아시의 옆모습에 넋을 놓고 만다.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첫 만남 때처럼. 그 날렵하면서도 수려한 턱 선과 콧대를 멍하니 쳐다보다, 가슴이 뻐근해진다.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조금 전 들었던 흐느낌은 환청이었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 밑이 약간 붉어져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한 감각이 가슴을 꾹 짓누른 탓이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가슴께를 힘껏 부여잡으려 하는 순간, 아카아시가 자신을 돌아본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뿌연 먼지가 햇볕을 받으며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햇빛을 등진 실루엣이 묘하게 빛난다. 한 쌍의 에메랄드가 태양빛을 외면하고 있었다. 


“보쿠토씨.”


얼빠진 정신은 제 이름을 듣고서야 뒤늦게 제자리를 찾는다. 아카아시는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여기에 케이지가 읽을 만 한 책이 있던가, 있는 머리 없는 머리 싸매고 굴리던 보쿠토는 다음과 같은 아카아시의 대답에 다시 한 번 넋을 놓고 만다. 


“저랑 키스할래요?”


뭐? 제 귀가 잘못 됐나 되묻기도 전, 아카아시는 쐐기 박듯 그의 말을 가로막는다. 


“차라리 섹스는 어때요?”


아카아시는 어느 앨범을 들춰 보고 있었다. 


“우리들, 일단은 사귀는 사이잖아요. 섹스는커녕 키스 한 번 못 해본 사이란 게 우습지 않아요? 기왕에 하기로 마음먹은 거. 작정하고 제대로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남자 상대 괜찮죠? 나한테 사귀자고 꼬드긴 것도, 꼬박꼬박 이름으로 불러 준 것도,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만든 것도, 전부 당신이었으니까.”


검은 색 턱시도와 흰 색 나비넥타이. 앨범 낱장 하나하나를 빼곡하게 채운 하이얀 드레스. 민트빛 바다와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이 행복한 얼굴로 정지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남자랑은 못 해먹겠단 개소리 지껄이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쿠토씨?”


그것은, 보쿠토와 사키의 웨딩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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