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윤회와 업보’를 키워드로 해 동양과 현대를 오고 갑니다. 

*원작기반, 동양풍, 사망 소재, 토끼와 용,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W. 멜




눈앞이 먹먹하다.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처음 듣는 다정함. 바람결을 타고 멀리까지 풍겨오는 퍽 온화한 공기.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쿠로오는 자기도 모르게 수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자세를 낮춘다. 


“그건 싫어!”


거죽과 뼈만 앙상히 남은 그의 발톱사이엔 푸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카아시 가고 나면 혼자 남겨질 텐데. 외로워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더 살라고? 그런 거 싫어. 아카아시 없는 삶은 훨씬 짧았으면 좋겠어.”


십여 년 전의 언젠가. 푸르름을 선사해주기만 한다면 제 마음 한 켠을 내주겠다던 아카아시의 터무니없는 약조를, 쿠로오는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 받을래, 그 선물.”

“제가 싫다면요.”


거대한 바다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체가 될 뻔하기를 수십 번, 황야를 빼닮은 사막을 가로지르다 탈진으로 생사를 오가길 수백 번, 시체인 줄 알고 들개나 새들을 비롯한 짐승들에게 뜯어 먹힐 뻔한 것이 수천 번. 포기하고 싶고 그만하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루가 일 년과 같고 한 달은 십 년을 맞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못했다. 쉬이 그만둘 수 없었다. 


‘당신이 그리 해주시기만 한다면, 대가로 제 마음 한 조각을 내드리겠습니다.’


전부가 아니어도 좋았다. 단 한 조각이라도 좋았다. 아카아시라는 이름 하나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나온 길이었고 떠나갈 길이었다. 


“내가. 당신이 죽지 않고 오래 살길 바란다면요.”


보라. 각고의 고생 끝에 손아귀에 쥐게 된 푸르름의 상징을. 떠올려라. 푸른 나비들이 사방을 수놓았던 밀림의 한복판을. 그려라. 이것을 품에 안았을 때 제게 활짝 웃어줄 아카아시의 얼굴을. 


“그래도 안 받으실 겁니까?”


쿠로오가 이를 깨문다. 시퍼렇게 날이 선 송곳니가 위아래로 맞물리며 자연스레 낮은 포효를 읊조린다. 


“그래도 아냐.”


웬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너무 작고 조그맣고 연약해, 한 손에 쥐면 펑 하고 살점이 터져버릴 만큼 작은 동물이 말이다. 쿠로오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아카아시 하나만 생각하며 갖은 고생을 하고 온 자신이었다. 엄연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었고 그 대가로 그의 곁을 조금만 내달라 부탁하려 했던 쿠로오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었던가? 쿠로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카아시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쿠로오는 물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10년 만에 자신이 찾은 아카아시는. 꼭 모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초하다 못해 고고하기까지 하던 무표정의 옆얼굴은 잔잔한 웃음으로 만개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동물과 함께 그의 주변 공기는 순수한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애걸복걸 구애하다 못해 제 발로 떠남을 택할 때조차 뒤도 돌아봐주지 않던 아카아시였다. 제게는 단 한 번도 지어주지 않던 웃음이었고 결코 보여주지 않던 상냥함이었다. 쿠로오는 이것을 참을 수 없었다. 토끼 한 마리가 생뚱맞게 튀어나와 그의 곁을 독차지한 것 같았다. 아카아시라고 밉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쿠로오란 이름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한 아카아시가 원망스러웠다. 


저 작은 것은. 아카아시를 위해 뭔가를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그를 위해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수해본 적이 있을까. 없겠지. 없었겠지. 왜냐면,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아카아시는 너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아닌, 네게 반했던 걸 테니까. 그래서 생각했다. 


“사실은 붙잡고 싶어. 가지 말라고 떼쓰고 싶어. 어리광 피우고 싶어. 근데……. 알아. 아카아시는 그래도 갈 거잖아. 가야하는 거잖아. 많이 기다려왔으니까. 나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달라 하는 건 결국 내 욕심에 지나지 않잖아.”


미웠다. 


“아카아시는 벌써 수 천 년 동안 나를 기다려 줬잖아? 아 물론 나만을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그치만! 그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나를 만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아카아시를 기다릴래. 네가 없어져 버린 이 생에서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야. 분명 다음이 있을 테니까. 다시 태어나서 다음 생의 아카아시를 찾을 거야. 나에겐……. 분명 그게 더 행복한 일 일거야.”


미웠다. 미웠다. 미웠다. 미웠다. 


화가 치밀었다. 질투라 불러도 좋았다. 추악한 감정이라도 좋았다. 뭐든 좋았다. 저 작은 생명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었다.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 지난 10년 간 자신이 내내 겪어왔던 고통을 저 작은 것에게도 안겨주고 싶었다. 


“……너한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하다못해 눈길 한 번이라도 내 쪽을 향하길 바란 것뿐인데.”


그것은 충동. 충동에 가까운 욕구. 폭발적으로 불어난 악의 감정. 


“내 기다림의 대가란 게 겨우 이런 거였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일은 이미 터진 후였다. 사방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혀끝엔 달큰한 피 맛과 물컹한 살코기의 육즙이 닿았으며 눈앞엔 아카아시가 있었다. 


“대답해,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멍한 눈을 한 채,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윽고 녹빛 동공이 부들부들 떨렸다. 뺨에 튄 핏방울에 손을 갖다 댔다. 뜨끈한 체온이 여전했다. 수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금세라도 꺾일 것 같았다. 표정을 잃은 낯빛이 차츰 색을 띠웠다. 


“너……너……!”


적개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가시처럼 표독을 세웠다. 분노로 치민 녹안엔 불꽃이 튀어 올랐고 사람의 것으로 둔갑하고 있던 피부는 녹빛 비늘이 오소소 돋아났다. 비단 같은 윤기가 흘러야 할 비늘은 잔뜩 뒤틀어져 흉측하게 솟아오른다. 쿠로오에게 날을 세우듯 말이다. 고왔던 눈두덩의 흰자위는 피 색으로 물들고 사람의 것 같았던 손톱들은 세 갈래로 뜯겨져 나와 범의 송곳니만큼 거대한 발톱이 되었다. 점찍듯 퍼져 나가던 검붉은 안광은 어느 새 아카아시의 전신을 뒤덮는다. 이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본래 청아한 기를 풍기던 아카아시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검붉은, 불길한 기세를 뿜어낸다. 그가 즈려 밟고 있던 꽃들은 바짝 메말라 시들어 버리고 그들 곁을 지나치던 상냥하던 봄바람은 을씨년스럽게 바뀌어 흡사 칼날처럼 쿠로오의 뺨을 때렸다.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천둥 번개를 수반한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바짝 말라 비튼 대지는 쩍쩍 갈라지며 유례없는 지각변동을 몰고 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거대한 기의 덩어리에 둘러싸인 쿠로오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영웅이 된 줄로만 알았다. 삭막한 전쟁터에서 금의환향한 줄로만 알았다. 환히 웃어 줄 줄 알았다. 기쁘게 반겨줄 줄 알았다. 


“네가 감히…….”


이상은 몽상의 단편일 뿐. 현실은 달랐다. 전혀 달랐다. 


“네 까짓 게 감히!!”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무섭게 번개와 천둥이 연이어 하늘을 울린다. 또렷한 살기를 띤 녹안이 쿠로오를 노려본다. 그의 뺨 위로 톡, 톡 시린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스산하던 바람이 기어코 비를 몰고 온 것이다. 단순한 빗방울이 아닌, 거대한 폭풍으로 자라날 법한 비바람을 말이다. 


뒤늦게 쿠로오가 자세를 낮춘다. 말을 아낀다.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며 그에게 수그린다. 입에 물고 있던 살덩이를 조심히 내려둔다. 


적개심으로 불붙어 있던 시선이 쿠로오의 행동거지를 따라간다. 진즉에 숨이 멎은 목덜미엔 선명한 송곳니 자국이 있었다. 단번에 꿰뚫린 급소였다. 쉴 틈 없이 재잘거리던 입은 꽁꽁 얼어붙었다. 행복으로 만개한 눈웃음이 샐쭉 말려 올라갔다. 그 상태 그대로, 작은 토끼는 숨을 그쳤다. 


아카아시는 멀찍이서 그것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그렇게 지켜보다, 손을 들었다. 양 손바닥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작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달달 떨렸다. 힘이 풀린 다리는 더 이상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릎이 꺾였다. 그의 살갗이 닿은 풀잎에서부터 땅이 황폐화 되어 갔다. 그리고 기었다. 마른 들판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뜨끈한 피가 뭉텅뭉텅 터져 나오는, 아직까지도 따뜻한 살결이 생생한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보쿠토씨, 이름을 불러 보려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히끅 거리는 비음만 터져 나왔다. 검붉던 눈가엔 물빛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니야.”


마침내 운다. 서럽도록 운다. 목 놓아 운다. 끝을 모르는 오열을 토악질한다. 꺽꺽대는 곡조를 따라 하늘이 무너지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용이 겪은 슬픔에 천지가 설움으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쿠로오는 뒷걸음질을 친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이런 결말을 원한 게 아니었기에. 서러운 마음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토로할 곳 없는 외로운 마음은 결국 제 초라한 발톱 끝자락으로 향했기에. 


“나는 그저……!”


벼락이 쳤다. 날카로운 비명이 대지를 갈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무릎베개를 해주던 느티나무 위로 곧장 벼락이 떨어졌다. 쩌적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진 나무는 흉측한 몰골이었다. 사방팔방에 벼락이 내리쳤다. 보쿠토가 좋아하던 토끼풀밭부터, 숲의 변두리에 뿌리를 내린 버들나무까지. 불은 금방 붙었다. 타는 냄새가 숲 전체를 숲 전체를 뒤덮었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타올랐다. 그 무렵 끊어질 줄 모르던 용의 곡조가 뚝 그쳤음을 쿠로오가 뒤늦게 인지했다. 품엔 피범벅이 된 시신을 안고 허망한 눈으론 쿠로오를 좇던 아카아시가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당신과 했던 약속. 이제야 기억났네요. 제가 부탁했던 푸르름이란, 지금 당신의 발치를 굴러다니는 저것인가요?”


푸른빛으로 가득 찼던 나비의 날개 위론 핏방울과 빗방울이 튀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그를 비웃듯 한 쪽 입 꼬리만 말아 올려 보았다. 


“그럭저럭 예쁘네요.” 


쿠로오는 꼬리를 말았다. 뼛속까지 겁에 질린 목소리가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 나왔다.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화가 나서 그랬어.”

“…….”

“나는 계속 너 하나만 바랐는데. 저 새끼는 아무런 대가 없이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게, 그게 너무 싫어서 그랬어. 정말이야. 추방을 해도 좋고 네 눈앞에서 꺼지라 하면 꺼질 게. 더 이상 좋아하지 말라는 건……너무 힘들겠지만 노력해볼게. 좋아하지 않으려고 해볼게. 그러니 제발. 제발…….”

“…….”

“미워하지만 말아줘.”


아카아시의 눈가 주변엔 자꾸 힘줄이 돋아났다. 입은 비뚜름해지려 하고 미간은 좁아지려 하고 인상은 사나워지려 하고 있었다. 즉, 표정 관리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경련 일 듯 도저히 안 올라가는 입가를 좋을 대로 내버려두었다. 뻣뻣하게 굳은 낯빛과 시린 눈매를 세워 쿠로오를 쏘아봤다. 쿠로오가 어떤 변명들을 늘어놓든 귀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대가를 드릴 차례인가요.”


황폐화 된 토지 위를 굴러다니던 자갈들이 일어났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그것들은 아카아시의 손날을 따라 둥그런 형태가 아닌 길고 날카로운 꼬챙이의 형태로 변모했다. 어림잡아도 수십 개는 족히 넘을 가시들이 단 한 개의 목표를 향해 이를 세웠다. 


기억하라. 그 꽃은 오직, 청렴한 마음을 통해서만 피어난다는 것을. 


제 신념과도 같던 말을 거역해도 좋은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무렵엔 때는 이미 늦고 말았지만. 꼬리를 만 호랑이가 벌벌 떨고 있어야할 자리는 사지가 꼬챙이로 들쑤셔진 살점들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본래의 형체조차 모를 만큼 엉망으로 찢겨져 나간 육신 앞에서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천지가 쩌렁쩌렁 진동하고 있음을 몸소 체감했다. 


불처럼 들끓는 복수심과 적개심에도 모자라 불필요한 살생까지 감행해버린 아카아시였다. 거의 피어날 듯 했던 연꽃은 시들고 고운 주홍빛을 띠던 여의주는 탁한 회백색으로 물들어 반으로 쪼개졌다. 그것의 변화와 죽은 보쿠토를 번갈아 보던 아카아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토했다.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어쩌면, 이라 생각한 것이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과 여의주를 함께 두면, 이라 생각한 것이 있었다. 


“……이미 늦었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늘에선 날벼락이 내리치고 땅에선 지반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아카아시는 죽은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반쯤 떠 있는 눈꺼풀을 고이 감겨주고, 그 작고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아 한참을 목 놓아 우는 것뿐. 그렇게, 설움으로 복받친 용의 울음소리만이 천지를 수놓았다. 



* * *



이것은 이야기. 시대를 따라 스쳐 지나간 무수한 전설 중 겨우 하나. 


용은 삶의 반려로 택했던 토끼를 잃었고 호랑이는 운명이라 믿었던 용에게 죽임을 당했다. 천지는 노하고 여의주는 망가졌으며 유일했던 귀천의 기회는 박탈당했다. 자의든 타의든 용은 대지에 남는 길을 택했다. 죽은 토끼를 품에 안은 채 말라 죽는 길을,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을, 다음 생에서야말로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 할 수 있기를. 


그것은 최초이자 최후의, 용의 바람이었다. 



* * *



눈을 뜨면 울고 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천장이 있었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 내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건지 꿈에서 깨어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침을 삼켰다. 눈꺼풀을 깜박여 보았다. 손끝을 들썩거려 보았다. 바윗덩어리도 이만큼 무거울 수 있을까. 가까스로 들어 올린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끝난 줄 알았던 악몽의 연장선이 선명하게 수놓아졌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차올랐다. 


바람은 이루어졌다. 고대하던 이를 만났다. 비참한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보내고 말았던 어여쁜 이를 다시 만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왜 몰랐나 싶을 만큼 운명 같던 사람. 시대와 세계를 뛰어 넘어 다시 만나게 된 해바라기를 닮은 미소. 


‘기념이라면 그럴 듯한 선물이 있어야 겠네요. 선물로는 뭐가 좋겠어요?’


사실은, 해바라기를 주려 했다. 꽃을 꺾어 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그의 눈앞에다 해바라기를 피워주려 했다. 손짓 하나에 무럭무럭 자라나 해를 향해 방긋 웃는 꽃 봉우리를 가리키며 봐요, 당신을 닮은 꽃이에요, 쫑긋 솟아오른 귀에 대고 속삭이려 했다.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발자국 위에 쌓인 눈이 편평하지 않은 것처럼. 옴폭하니 들어간 그곳을 파헤쳐보니 피 묻은 발자욱이 선연한 것처럼. 겨울이 언제까지고 겨울일 수는 없는 것처럼. 봄이 오는 소리에 발맞춰 소복이 쌓여 있던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영원한 망각은 없는 것처럼. 


“아, 깼다.”


파묻어 두었던 슬픔은 예고 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예고라면 내내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인간으로써의 새 생을 시작한 직후부터. 질리도록 내 발치를 졸졸 따라 다니며 경고를 했던 것이다. 그것을 지우려고. 묻으려고.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거부한 건


“‘또’ 그 악몽이구나.”


오히려 내 쪽이었다. 


“작년 이 맘 때도 밤잠 설쳤지, 아카아시.”


어질 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 팔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이 한참을 헤맸다. 아직도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꿈속, 이라기 보단 심해에 가까웠을까. 빛 무리 하나 없는 심해는 그 어떤 꿈보다도 어둡고 춥고 외로울 테니. 


“어떻게 아세요, 같은 질문이라면 그만둬. 아카아시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있으니까. 뭐든……. 알고 싶기도 했고.”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주변을 밝혔다. 낯익은 락커. 선반을 가득 채운 배구 화들. 일렬로 정리정돈 된 서포터들과 스포츠 타올.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드링크 병. 칙칙한 땀 냄새를 가리기 위해 선반 구석에 자리한 오래 된 방향제. 새카만 밤하늘을 채우던 구름이 흩어져 갔다. 부실의 널찍한 창틀 아래로 볕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백한 거였잖아. 내가 첫 눈에 반해 버려서.”


달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것은, 은은한 비단결을 떠올리게 하는 상냥한 빛이었다. 결이 고운 달빛 사이로 황금색 눈이 반짝였다. 밤하늘을 장식한 초승달 같은 눈웃음이 부끄러운 기색을 영 감추지 못했다. 뺨은 발갛게 물들고 뒷목은 긁적이고 호를 그린 눈가는 살풋 떨리는 탓에 온전히 나를 향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더는 울지 마, 아카아시.”


더는 울지 마. 


그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 뺨을 닦아냈다. 손등에 축축한 기운이 흥건했다. 왜라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몸과 마음이 온힘을 다해 말 못한 감정들을 쏟아내려는 것 같았다.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고 그 틈새로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뭔지 모를 절박한 기분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건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건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언젠가 그랬듯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풀린 다리는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물빛이 흐려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더듬더듬 손을 이끌었다. 납작한 배에서부터 탄탄한 가슴과 어깨를 쓸었다. 말리지 않았기에, 나 또한 멈추지 않았다. 손은 목덜미에서 멈췄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선 따뜻한 체온이 가득했다. 쿵쿵 거리는 맥박이 선연했다. 손이 분주히 움직이며 목 주변을 전체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깨끗했다. 상처는 없었다. 멀쩡했다. 살아 있었다. 엄연히, 살아 있었다. 


송곳니에 꿰뚫린 상처는. 핏줄기가 철철 흘러넘치던 바람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졌다. 어디까지 울어야 속이 시원할 작정인지 눈가에선 또다시 수분이 펑펑 솟구쳐 올랐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 감각이 전신을 헤집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은 기어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등을 보듬는 손길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연이은 악몽의 이유도, 내 울음의 이유도, 당신을 갑자기 끌어안은 이유까지도. 다만,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던 것 같다. 


한참을 울었을까.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추하게 울어버린 탓에 슬슬 내가 얼굴을 묻고 있던 그의 교복 자켓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이것도 나름, 선물이라면 선물 일까나.”


들릴 듯 말 듯한 조그만 웃음이었건만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으니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왔다. 무슨 소린가 싶어 궁금하다가도 붕어의 것 마냥 팅팅 부었을 눈두덩을 보이고 싶지 않아 되려 파묻은 얼굴에 힘을 주었다. 


“기억 안나? 오늘 내 생일이었잖아.”

“……아?”


의미 없는 감탄사와 함께 엉망진창이었을 얼굴이 그에게서 저절로 떨어졌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몰골이 말이 아닐 것 같아 급한 대로 흉할 낯짝을 손바닥 아래로 감췄다. 늘어진 눈물 콧물 자국부터 급하게 닦아냈다. 피와 울분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이성이 느릿느릿 현재를 돌이켰다. 고장 난 필름이 영화의 장면들을 띄엄띄엄 이어 붙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습 끝나고 다 같이 파티하려고 했는데 연습 도중 아카아시가 코피 쏟고 비틀 거려서 시합이고 파티고 나발이고 다 중단됐잖아.”


연습? 파티? 시합?


“안색은 창백하지 코피는 줄줄 쏟고 있지 힘 다 빠진 목소리로 자기는 괜찮다 하지.”


아. 웃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싫다는 애 업고 응급실이라도 뛰어 가야 하나.”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죽은 듯이 자는 네 모습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화난 보쿠토씨는 본 적이 없는데. 


“내 생일에 쓰러질 뻔한 널 부실까지 업고 오는 내내. 네 상태 하나 제대로 체크 못한 내가 쓰레기 같았어. 바로 지난주부터. 그 망할 노인네를 만난 이후부터. 네 상태가 이상해졌단 걸 진즉에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 노인네의 멱살을 잡고 흔들든 때려눕히든 무슨 짓을 해서든.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마음이 간질거렸다. 여태껏 남을 몰아세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보쿠토씨가 나에게 머리끝까지 화를 내고 있단 사실에, 마음이 살랑였다. 


“머저리는 나였어. 정작 울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다고.”


온전히 나란 사람을 위해 걱정을 토해내는 이 사람이. 숨을 붙이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사람이. 


“부탁이니까 제발! 사람 간 떨어지게 좀 하지 마.”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해요.”


이번엔 내가 안을 차례였다. 무릎걸음으로 그의 곁에 천천히 다가가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상처 받은 눈을 하고 있는 여린 짐승을 품에 안고 보듬었다. 


“걱정 끼치게 해서 미안해요. 덜컥 울어 버려서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보쿠토씨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옷깃을 끌어다 꾸욱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놓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늦어서 미안해요. 생일 축하해요.”


일순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나 긴 기다림을 거쳐 왔던가.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가슴께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푸흐, 낮게 웃는 소리가 간질거렸다. 


“한참 늦었잖아, 이 지각 쟁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낮에는 노련한 뙤약볕 아래에서 시원한 그늘을 찾아 그와 함께 봄을 보내고 밤에는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따스한 온기가 남은 창가를 거닐다 그의 품에서 잠이 드는. 오래도록 돌아왔지만, 


“제가 마지막 축하이길 바랄게요.”


나의 바람은 늦지 않게 이뤄진 것이었다. 


“보쿠토- 아카아시 상태는 어때?”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 바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보다. 


“아까 시합 중에 아카아시 코에서 피 터지 길래 나까지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도 이제쯤이면 슬슬 괜찮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래에서 애들이 케이크 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불러 오려고-”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부실 문과 함께 활짝 열려 왔다.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말을 하다말았다. 그것은 필시, 한 데 엉겨 붙어 있는 나와 보쿠토씨의 모습을 보아서. 


“……아, 하. 파티는 내일 하자고 전해놔야 겠네.”


‘시합’이란 게 연습 시합을 말한 거였나. 아아,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분명 실전을 코앞에 둔 마지막 연습 시합이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쿠로오씨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고. 

끓는 듯한 설움이 전혀 없었다면 오히려 거짓이리라. 꿈에서 들었던 호랑이의 목소리와 지나치게 흡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등 뒤로는 소름이 돋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잔뜩 수축한 혈관 탓에 손발이 시려오고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연은 맺어졌고, 만나야 할 사람은 이미 만났으며 남은 것은 오직 시간뿐이로구나. 살생의 기억은 피에 남았고 복수귀는 뼈에 사무쳐 마침내 오늘을 갖고 왔구나.’


가슴에 칼자국을 남긴 노파의 어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야 하나 둘 납득이 갔다. 그는 호랑이었고 호랑이는 그였다. 그는 서슴없이 살생을 저지른 자였고 시대를 뛰어넘은 살인자는 바로 그였다. 겉모습이야 어찌 됐든,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일들 잘 봐. 끼어 들어서 미안했다.”


본질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용서 하셔야 합니다.’


똑같은 존재였다. 


‘용서를. 용서를 하십시오.’


미워하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온전히 그만을 미워할 수 있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회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찬스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행하고서야 비로소 지난 업보에서 해방 되실 수 있습니다.’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것이 아닌, 서서히 그 목을 옥죌 수 있는 천재일우의 찬스였다. 지난 생처럼 단숨에 죽여 버리는 멍청한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살가죽을 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만을 불어 넣고 싶었다. 


‘끓듯 차오르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엄한 감정에 눈이 멀어선 아니 됩니다. 결코, 지난 일을 반복 하셔선 아니 됩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흠씬 두들겨 패다 홧김에 모가지를 부러뜨려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주체 못 할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역류해 머리통 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를 하셔야 합니다.’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머리가 아팠다. 깨질 듯이 아팠다. 메아리처럼 머리통을 꽝꽝 울리는 노파의 어귀가 시끄럽다 못해 찢어질 성 싶었다. 뇌의 어딘가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귀가 아프고 눈앞이 화끈거렸다. 


“기다려요.”


결국엔 불러 세웠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말았다.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보쿠토씨가 뭐라 뭐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마치 라디오의 잡음마냥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뗐다. 발걸음의 끝엔 놀란 눈을 한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니, 쿠로오씨가 있었다.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놀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얼떨결에 그를 안는 꼴이 되었다.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던 쿠로오씨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던 그의 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마냥 허공에만 머물러 있었다. 등 뒤에서 날 선 투덜거림이 들리는 듯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뭣하면 소중히 끌어안은 이 목덜미를 단숨에 조를 수도 있었다. 죽이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왜, 라고 작게 중얼 거리는 입이 사뭇 떨리고 있었다. 뺨을 묻은 목덜미가 터질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성질은 똑같구나.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왜 그랬을까. 이유는 정말 모른다. 그냥,


“안아주고 싶었어요.”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어쩌면 그를 맨 처음 만났던, 아득히 먼 옛날부터.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윤회와 업보’를 키워드로 해 동양과 현대를 오고 갑니다. 

*원작기반, 동양풍, 사망 소재, 토끼와 용,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보쿠토 생일 축하해 >.< !




W. 멜




눈을 뜨면 울고 있다.


긴 악몽을 꾼 것 같아 이부자리를 뒤척거리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등줄기가 옷자락을 푹 적시고 있었다. 


꿈의 내용을 떠올리려 할 때면 그것은 벌써 희뿌연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지만, 끔찍한 꿈이었단 선명한 감각 하나는 내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열병 같은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매년 9월과 함께 꼬박꼬박 찾아오는 악몽 따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부터 가을을 제일 싫어했다. 달력이 9월로 넘어갈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악몽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는 순간,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그것의 기억이 옅어져 갔기에 나는 누구에게도 내 고충을 털어 놓을 수 없었다. 처음엔 화들짝 놀래 하며 매년 가을마다 나를 병원에 데려가던 부모님조차 해가 넘어갈수록 나의 출처 없는 악몽에 지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남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야 할 때. 마침내 그것을 ‘과도 망상’이라 도장 찍혔을 때.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워, 잠이 오는 것이 무서워 몇 날 몇 일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우다 그것이 꼭 나흘 째 되던 밤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때. 이제는 한해를 무사히 보내기 위한 관례처럼 악몽을 그저 몽(夢)으로 넘기게 되었을 때. 


나는. 당연하지 않던 것을 당연하게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던 나였다. 열일곱 번째 맞이한 8월이 끝나감과 동시에 올해도 시작이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게 다였다. 특별할 게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했다. 


안일했다. 


올해 가을은 유독 잠자리가 사나웠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뿌옇게 흐려지기 마련이던 꿈결이 그럴 듯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울었어. 꿈에서도.”


누군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목 놓아 우는 스스로가 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손발이 마비되듯 벌벌 떨렸고 구멍 난 가슴엔 아픔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듣는 사람의 억장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릴 정도였다. 끝을 모르는 통곡 소리는 기어코 하늘을 두 쪽으로 쪼개고 지반을 갈라 세웠다. 


그것뿐이었다. 


품에 안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토록 오열하고 있었는지. 왜 그런 꿈을 반복해 꾸고 있는 것인지. 나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여태껏 악몽이 어떠한 내용인지조차 기억 못하던 내가 그것을 확실히 짚어볼 수 있게 된 시기는,


“그……점쟁인지 뭔지 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였지.”


너무 울어 지끈거리기까지 시작한 관자놀이부터 짚는다.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지난주의 기억부터 더듬거려 본다. 첫 대면부터 인상이 퍽 곱지 못했던 노파를 그려본다. 



* * *



그 날은. 인터하이 준준결승 앞이라는 나름대로 중요한 시기였다. 


대전 상대로 네코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감안하면서도 나와 보쿠토씨, 쿠로오씨는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우연히 역에서 만났다. 우에노에 볼 일이 있었던 우리와는 달리 그저 산책 삼아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쿠로오씨 곁엔 늘상 따라붙던 켄마가 보이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게임기를 붙들고 있는 통에 일요일 대낮인 지금까지도 푹 잠에 빠져 있을 거라는 쿠로오씨의 빈정거림에 나는 못내 부러움 섞인 눈을 했던 것 같다. 


가을이란 계절 안에선 숙면은커녕 눈 붙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못 했으니까. 


어쩌다보니 동행을 하고 함께 JR에 올라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보쿠토씨와의 연애 진도 알아맞추기, 낯부끄러웠던 첫 고백의 순간 떠올리기, 오늘 입은 속옷 색깔 맞추기, 지난 발렌 타인에 쿠로오씨가 선물 받은 초콜릿 개수, 합숙 때 다같이 먹었던 바베큐, 어렴풋한 진로, 괴물 리시브, 괴물 부엉이. 마지막엔 서로의 볼과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며 누가 누가 더 못생겼나 같은 대결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고 있으면 과연 어느 쪽이 선배고 고등하교 3학년이고 18살인지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았다. 


피로로 지친 눈두덩을 쓸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목적지엔 금방 도착했다. 간만에 연습 없는 주말을 최대한 만끽하자며 방방 뛰어 다니는 보쿠토씨의 뒷덜미를 낚아채 스포츠 용품 가게에 들러 부족한 서포터를 구비하고, 대뜸 오코노미야끼가 먹고 싶다는 보쿠토씨를 달래러 사방팔방 식당을 찾아 헤매고, 구석진 골목에서 내내 배고픈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길고양이에게 참치 캔을 선물하려 쿠로오씨의 지갑을 선뜻 열리고, 허겁지겁 허기를 달래는 고양이를 둘러싼 건장한 장정 셋이 흐뭇한 미소를 짓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는 보쿠토 네 생일이지 않냐는 화두를 던지고, 자신의 생일조차 까먹고 있었다는 듯한 주먹이 손바닥을 내리치고, 납득하곤


‘그럼 생일 선물!’


그 한 마디와 함께 나와 쿠로오씨의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한 보쿠토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있긴 할까까. 가장 가까운 게임 센터로 들어가 스티커 사진기 안에 우리를 구겨 넣은 보쿠토씨는 땡전 한 푼 없을 줄 알았던 바지 주머니를 뒤져 꼬질꼬질한 500엔을 기계에 넣곤 우리에게 웃으라 했다. 어깨동무까지 하며 최대한 친한 척을 해보이곤 해맑게 웃어 보였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 날벼락인가 싶다가도 3, 2, 1을 외치는 정면의 카메라 앞에서 입 꼬리부터 올리고 말았다. 그것도 잠시, 얼굴 몰아주기를 하자는 쿠로오씨의 깜짝 제안에 번갈아가며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어보고, 서로의 우스운 꼴에 허파에 바람 들린 사람처럼 깔깔 웃다 몇 컷을 날려 먹고, 처음 찍은 몇 장을 제외하곤 잔뜩 흔들려 초점이 엇나간 사진들을 보쿠토씨만이 억울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기념사진으로 간직하려 했는데……. 최고의 생일 선물이 될 뻔 했는데…….’


아쉬운 대로 그나마 잘 나온 사진 서너 장을 조그맣게 오려 나눠 가졌다. 그럼에도 쿠로오씨는 제 잘생김이 반의 반도 나오지 못한 것 같다며 툴툴 거렸지만 나는 꽤 만족하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순간을 어엿한 형태로 남긴 거였을 테니. 


‘쿠로오. 아카아시. 이대로 돌아가긴 좀 아쉬우니까.’


다음 순간이었다. 


‘우리, 점이나 볼래?’


게임 센터의 맞은 편, 허름한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낡은 천막 한 가운데엔 ‘점(占)’이란 글자가 검은 매직으로 굵직하게 쓰여 있었다. 꼭 뭔가에 홀린 사람마냥 발길을 돌리고 있는 보쿠토씨에게 쿠로오씨가 한 마디 거들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점을 믿냐는 말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보쿠토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싫다, 돌아가자, 귀찮다는 반응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라도 발동 했는지 그곳에서 멀어지고 싶어 했던 우리를 되려 질질 잡아 끌었다. 저 무식한 힘은 못 당하겠다며 쿠로오씨가 혀를 내두르는 동안 그럼 복채는 보쿠토씨가 내는 걸로 하자며 그에게 통보하다시피 한 나는 벌써 천막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 다음이었다. 


길쭉한 테이블과 의자 몇 개, 카드 혹은 거울 같은 소도구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천막 내부는 내가 들어섬과 거의 동시에 뭔가가 부서지고 넘어지고  요란한 소음이 나는가 싶더니 이뤄 말할 수 없는 아수라장의 상태로 나를 반겼던 것이다. 묘한 향을 풍기고 있던 향로는 바닥에 엎질러져 희뿌연 재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엎어진 테이블 아래엔 뒤로 넘어간 플라스틱 의자 몇 개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요, 용서를…….’


어느 노파가 있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움푹 팬 볼우물을 가진 채 검버섯이 잔뜩 돋아난 손등을 덜덜 떨고 있던 노파가 있었다. 곱게 빗어 하나로 묶고 있던 백발의 머리칼은 놀라 넘어진 탓에 보기 흉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지그시 감겨 있던 눈은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임을 여실히 말했지만, 그 눈꺼풀 틈으로 살짝 보이는 흰자위는 섬뜩하리만치 서슬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난데없는 굉음에 놀란 보쿠토씨와 쿠로오씨가 뒤따라 들어서는 것도 잠시, 노파는 우리로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발은 물론 땅바닥에 고개가 닿을 만큼 푹 조아린 채 내 발치 앞까지 엉금엉금 기어와선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절을 했던 것이다. 


‘오오, 자비를. 못 알아 뵌 이 비천한 늙은이에게 부디 자비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선 보쿠토씨와 쿠로오씨가 내내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는 노파를 부축하려 해보지만 그 자리에서 도통 꿈쩍도 안 하는 게 노인이 아닌 바위덩어리를 드는 것 같다는 보쿠토씨의 힘겨운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돌아올 뿐이다. 분명한 것은,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를 하셔야 합니다.’


노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향해, 내 발밑을 향해 곧장 절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행하고서야 비로소 지난 업보에서 해방 되실 수 있습니다. 끓듯 차오르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엄한 감정에 눈이 멀어선 아니 됩니다. 결코, 지난 일을 반복 하셔선 안 됩니다. 오오, 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용서를. 참된 이해와 진실한 깨달음을.’


거 노인네 힘 한 번 더럽게 세네,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노파를 겨우 들쳐 멘 쿠로오씨 덕에 바닥에 납작하게 파묻혀 있던 노파의 얼굴이 겨우 들어 올려졌다. 두려움에 파르르 떨던 탄력 없는 눈꺼풀이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보쿠토씨와 쿠로오씨를 발견했을 때, 노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느끼듯 서글픈 곡조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 아아, 어찌 할고. 이 일을 어찌 할고. 연은 맺어졌고, 만나야 할 사람은 이미 만났으며 남은 것은 오직 시간뿐이로구나. 살생의 기억은 피에 남았고 복수귀는 뼈에 사무쳐 마침내 오늘을 갖고 왔구나.’


두 사람의 만류에도,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봐도, 노파는 이유 모를 울음을 한참이나 토해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노파를 의자에 앉히고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 덮어준 뒤 뒤숭숭한 마음으로 천막을 벗어날 무렵, 


‘용서 하셔야 합니다. 용서를. 용서를 하십시오.’


우리들의 귓전에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용서’라는 단어뿐이었다. 


이상한 할머니 였어. 보쿠토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카아시 아까부터 안색 엄청 안 좋은데 괜찮아? 잠깐 쉬었다 갈까? 내 낯빛을 살피던 쿠로오씨가 걱정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답하려던 입은 물리적으로 벌어지기만 할 뿐, 목구멍 안을 맴맴 돌던 단어는 결국 언어화되지 못했다.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 노파의 엎드려 구부러진 등과 ‘용서’를 강조하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왜 이리 잊히지 않는지. 따귀를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왜 이리 얼얼한지. 


지금 돌이켜보면 꿈을 잊으려 한 것은 내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기억해내선 안 된다, 떠올리지 말라는 무언의 사슬이 내내 나를 쥐고 흔들고 있었던 걸 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망각을 취함으로써 내 정신을 온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바로 그 날부터 였다. 수십 년 째 나를 지독히 괴롭혀 왔던 악몽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 말이다. 



* * *



태초에 해와 달, 그리고 천지(天地)가 있었다. 


해는 달을 사랑했고 달은 해를 사랑했다. 그러나 슬픔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는 자신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야 달이 차오르는 것에 큰 상실감을 느꼈다. 달 또한 자신이 사라져야만 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크나큰 슬픔을 느꼈다. 


두 사람의 가여운 사랑을 보다 못한 천지(天地)는 한 가지 약조를 하게 된다. 돌아오는 일천 년 이후, 황혼녘을 수놓는 유성우가 대지를 뒤엎을 때 해와 달이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약속했던 천 년 후, 하늘을 다홍빛으로 물들인 일몰과 함께 천지를 찾은 유성우들은 이제 막 떠오르는 달의 손을 잡고 저물어가는 해를 향해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두 개의 사랑이 처음으로 하나가 된 순간, 하늘은 오색빛깔의 무지개로 뒤덮어지고 두 사람의 둥그런 그림자를 담은 대지는 찬란한 빛을 띠었다. 


놀랄 만 한 일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한 데 겹쳐진 둘의 그림자는 여타의 칠흑색이 아닌, 백색을 가졌던 것이다. 이윽고 지표면에서부터 꽃이 만개하듯 볼록하게 튀어나온 그것은 매끈하면서도 동그란, 분명한 ‘알’의 형태를 띠었다. 생명은커녕 허허벌판의 황무지 같던 대지는 첫 이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해 사방에서 물과 공기와 양지 바른 토양을 끌고 왔다. 이를 내내 지켜보고 있던 하늘 또한 유성우로 가득 채워진 제 몸 위로 오로라를 얇게 걸쳐 입으며 비구름을 몰고 왔다. 


행복했던 ‘함께’도 잠시, 유성우의 축포가 사라짐과 동시에 서서히 서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 해와 달은 아쉬운 마음을 도닥이고 다음 약조를 기한다. 사랑의 결실과도 같은 알에서 새 생명이 부화할 땐 너나 할 것 없이 온 사랑을 다해 키워내기로. 올바른 용기, 순수한 사랑, 희망찬 기쁨 등의 순결한 마음으로 가득 차오른 새 생명이 성체가 되는 순간, 다시 한 번 이 곳에서 만나기로. 대지에서 태어난 생명이 하늘로 귀천(歸天)하는 순간,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지켜봐주기로. 


개기 일식이 끝난 지 수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알은 부화의 조짐을 보였다. 두툼했던 껍질이 갈라지고 삑삑 대는 새된 울음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 그 무렵 온천지가 쪼개지며 개벽이라 부를 만 한 것이 도래했는데 그 쩌렁쩌렁한 진동과 소음들은 마치 새 생명의 울음소리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것은 용()이었다. 정확히는 용의 새끼였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목청이 터져라 제 어미와 아비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비옥한 토지와 앙증맞은 시냇물과 뭇 초록 식물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빈 허물과도 같던 알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라곤 손톱 만 한 주홍빛 구슬-훗날, 용은 이를 가리켜 ‘여의주’라 불렀다-뿐이었다. 


구슬의 꽃을 피워라. 그 때가 와야 비로소 너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 기억하라. 그 꽃은 오직, 청렴한 마음을 통해서만 피어난다는 것을. 


억겁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천지가 온통 새 생명들로 발돋움할 무렵, 용에게 남은 믿음이라곤 가슴에 새겨진 격언과 여의주 안에서 겨우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연꽃뿐이었다. 


이야기는 용이 성체가 가까워지던 시기에서 출발한다. 오랜 세월 홀로 살아온 덕분에 저절로 술법을 익혀버린 용은 말을 하고, 제 이름을 지어보고, 두 발로 걷고, 손을 쓸 줄 알게 되고, 옷을 만들어 입고, 나아가 사람이란 종족과 엇비슷한 외견까지 취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 용에게 첫 눈에 반해버린 한 생명에서부터 비롯된다. 


범이라 불리는 족속들은 본디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범은 개 중에서도 유독 저 홀로의 방랑을 좋아해 무수한 숲과 개천을 정복자의 마음으로 개척하던 중에 용이라 불리는 기이한 존재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사람으로 둔갑한다 하긴 했으나 거죽 밑에 가려진 고귀함을 단숨에 간파해버린 범의 눈물겨운, 끈질긴 애정공세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불행히도,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범에 비해 용의 마음엔 흔한 미동조차 없었다. 범 대하길 들판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풀 보듯 대하고 범의 달콤한 속삭임을 새의 시끄러운 지저귐 정도로 여긴 것이다. 


하루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범이 허심탄회한 토로들을 솔직히 늘어놓았다. 당신의 마음을 흔들고 싶다, 어떻게 해야 나를 보아 주겠느냐, 단 한 번만이라도 이쪽을 봐주면 안 되겠냐는 그 간절한 바람 덕택일까. 긴 침묵 끝에 용은 입을 열었다. 


‘푸른.’


범은 눈을 끔벅였다.


‘푸르름이 갖고 싶습니다.’


용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닮은 저 푸르름을 선물해 오신다면 당신께 제 마음 한 조각을 기꺼이 내드리겠습니다.’


범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푸른, 이라니……. 하늘은 신의 것. 하늘의 색은 곧 신의 색. 너도 알고 있잖아. 온 천지를 뒤져도 하늘과 바다를 제외한 푸른 것은 절대 구할 수 없다는 걸. 차라리 적(赤)이나 녹(綠)을 달라 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구해다 줄게.’


용은 작게 웃었다. 


‘그래선 합당하지 않지요. 붉은 꽃, 녹음 진 수풀 같은 이 주변에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순수한 푸르름을 제게 안겨주십시오. 당신이 그리 해주시기만 한다면, 대가로 제 마음 한 조각을 내드리겠습니다.’


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의 마음과 푸르름. 푸르름과 용의 마음. 범에게 있어 보다 귀한 것을 고르라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범은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푸르름을 찾아 길고 긴 여정을 떠났다. 


그 범이 여정을 떠난 지 십여 년. 봉우리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연꽃을 들뜬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용의 머릿속에서 범은 물론 그 존재마저 까맣게 잊히고 만 어느 날. 


‘와- 꼬리가 엄청 길어! 완전 신기해! 용님, 용님. 이거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그래도 되죠? 으하, 신난다!’


용의 둥지 바로 근처까지 놀러온 한 묘(卯)로 인해 결말이 정해져 있던 세 사람의 운명이 180도 뒤바뀌게 된다. 



* * *



“보쿠토씨. 지금 뭘 하고 계시는지 10자 이내로 설명해보시죠.”


팔짱을 낀 채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아카아시 덕에 화들짝 놀란 보쿠토가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른다.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큰 귀를 쫑긋 세운 채 좌우로 크게 돌리고 있던 보쿠토는 제 품에 안고 있던 것이 행여 들통 날까 마른침만 꼴깍 삼킨다. 땅바닥을 쿵쿵 내리치는 아카아시의 긴 꼬리가 그의 불쾌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지만 보쿠토라고 고집이 없진 않았던 것이다. 


“그……그게……! 요, 요, 요기 근처에 엄-청 때깔 고운 돌멩이 하나가 굴러 다니길래, 뭐냐, 그, 아카아시한테 선물 해주려고!”

“…….”

“여의주……랑 착, 각 하지 않았어! 색이 완전 비슷한데 그, 그거랑 전-혀 다르니까!”

“…….”

“저얼대로! 절대로 여의주 안에 핀 꽃이 보고 싶어서……몰래 보려고 한 게……아닙니다.”

“…….”

“…….”

“뭐해요. 더 말해보세요. 그래서요.”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요.”


그 순간 보쿠토의 눈알에 그렁그렁한 물 기운이 그득 맺힌다. 제 억울함을 호소하듯 혹은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듯 눈물 기 가득한 눈으로 아카아시를 올려다 본다.


“몰래 엿보려 해서 미안해. 거짓말 하려 해서 미안해. 잘못 했어. 그, 그거 훔치려 한 거 아니야……. 조금 있으면 꽃이 필 것 같아서. 그냥. 나는 그냥……! 흑, 흐에엥~”


결국 팡 터져버린 울음보로 인해 죄인이 된 기분이 드는 건 되려 아카아시였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 닦으랴 코에서 흐르는 콧물 닦으랴 하는 통에 그의 품에서 벗어난 여의주는 데굴데굴 굴러가 아카아시의 발치를 향한다. 갓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손톱 만 한 크기의 그것은 벌써 아카아시의 한 손으로도 다 쥐어지지 않을 만큼 꽤 크기가 커져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 고고한 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 있는 연꽃 또한 마찬가지로 말이다. 


“자자. 이제 뚝 그치세요. 여의주는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닭똥 같은 눈물이 흥건하게 쏟아진 탓에 토끼만의 조그만 손바닥이 도저히 눈물을 감당할 수 없게 않자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가뿐히 안아 든다. 손수 만든 옷의 소매를 들어 그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준다. 


“그치만……. 그치만 아카아시가 그랬잖아. 꽃이 피면 가야 한다고. 저 꽃이 피면 어디론가 가버린다 그때 분명 말했잖아.”


아이가 어미의 품속을 파고들 듯 그의 옷깃을 꼬옥 붙잡은 보쿠토가 서러우리만치 눈물을 토한다. 히끅거리는 울음소리와 들썩이는 어깨가 그의 슬픔을 대변한다. 


“나는 그게 너무 슬펐단 말이야. 거기 꼭 가야 해? 안 가면 안 돼? 여기 있자. 나랑 계속 여기서 살자. 가지 마. 가지 마, 아카아시. 내가 토끼풀이 잔뜩 나는 텃밭 찾았단 말이야. 꽃도 잔뜩 피었고, 새들도 많고, 물도 깨끗하고, 너무 예쁜데. 정말 아름다운 들판인데……. 아카아시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가야 해. 가지 마. 가지 말자, 응?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묵묵히 보쿠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회백색 머리칼 사이로 튀어 나온 큰 귀 한 쌍이 그의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린다. 아카아시는 무거운 한숨을 토한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만난 지 꼬박 여섯 달이 지난 참이었다. 제 발목 크기는 되었을까 걱정마저 들었던 아기 토끼는 여섯 달이 지난 지금, 아카아시의 무릎 언저리를 맴돌 만큼 훌쩍 자라나 있었다. 용이란 신분을 가진 자신과 여타 동물들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미처 체감하기도 전, 보쿠토는 틈만 났다 하면 아카아시 곁을 맴돌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처음엔 마냥 귀찮기만 하던 보쿠토가 언제쯤부터 ‘없으면 허전한’ 존재가 되었는지. 수 천 년의 시간동안 홀로 살아왔던 세월의 개수에 비하면 이 여섯 달은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훅 지나쳐 있을 찰나였건만. 그림자마냥 제 뒤를 졸졸 쫓아왔을 때, 선물이랍시고 독버섯을 파헤쳐 와 활짝 웃으며 흙 묻은 손으로 쥐어 주었을 때, 제 꼬리를 베개 삼아 낮잠을 청할 때, 뿔이 신기하다며 그것을 꼭 만져보고 싶다는 것을 핑계로 목마를 태워 달라 졸랐을 때, 오래 간만의 산책이라며 방방 뛰어 오르다 돌부리에 걸려 화려하게 자빠졌을 때, 엄마 아빠가 자주 하는 거라며 대뜸 제 뺨에 입술 도장을 남겼을 때, 당황한 나머지 보쿠토를 멀찍이 내던져 버렸을 때. 가만 생각해보면 추억이랄 게 없진 않았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동안의 추억보다 고작 반년이란 시간동안 보쿠토와 울고 웃은 기억이 깊게 남았을 뿐. 다만, 놀라운 속도로 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보쿠토에게 ‘작별’을 이해시키기란,


“안 갈 거지? 여기 있을 거지, 아카아시!”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 여기 누워 봐요. 보쿠토씨가 제일 좋아하는 무릎베개예요.”


사시사철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 솔솔 부는 바람결을 타고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빛이 스며든다. 울다 지친 보쿠토를 무릎에 뉘인 아카아시가 나무에 등을 기댄다. 훌쩍거림은 잦아 들었지만 여전히 보쿠토의 오동통한 뺨은 축축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보쿠토씨.”

“……응.”


목이 멘 보쿠토가 침울한 어조로 답한다. 


“보쿠토씨한테는 엄마 아빠가 있죠?”

“……응.”

“몇 번인가 저도 저번에 뵈었었죠. 참 귀여우신 분들이었어요.”

“가지 마.”

“저에게도 부모님이 있어요.”

“가지 마…….”

“보고 싶죠. 만나보고 싶죠. 그리고 불안하죠. 내 부모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이대로 괜찮은지. 저는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보쿠토는 입을 다문다. 이유 모를 울컥한 기분이 목울대 가까이 차올랐지만 가만히 듣기만 하기로 한다. 


“돌아가야죠.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죠. 정말 셀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을 혼자 기다려 왔어요. 전혀 외롭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겠죠. 주변엔 아무도 없고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조금만 마음을 내어주면 언제나 저보다 먼저 생을 끝내갔으니까요. 저는 관찰자예요. 내가 사랑했던 것들의 죽음을, 사랑하는 것들의 죽음을, 사랑할 것의 죽음을 그저 방관하는 수밖에 없죠.”

“…….”

“보쿠토씨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죠. 저처럼 오랜 시간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영원에 가까울 시간동안 저와 함께 동고동락하고 싶다고.”

“…….”

“불멸이란 의외로 잔인해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거든요. 기껏해야 조그만 흙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찰나의 시간을 가슴에 묻어 두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뿐.”

“…….”

“보쿠토씨께 그런 비운을 맛보게 할 순 없어요.”


아카아시는 덤덤한 얼굴로 말한다. 만남에 기뻐하고 이별에 슬퍼하는 그 정도의 감흥이 아닌, 모든 것에 통달한 얼굴로 타인의 삶과 죽음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엔 조금쯤 행복했을까요.”


그려질 듯 말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카아시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어느 새 울음을 그친 보쿠토가 호기심으로 그득한 눈망울을 깜박인다. 


“보쿠토씨를 만났으니까요.”

“……!”

“제게는 눈 깜짝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쿠토씨에겐 평생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 저로 가득했겠죠?”


처음엔 동그란 토끼 눈을 짓고 있던 보쿠토가 차츰 함박 웃어 보인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러곤 곧장 짤막한 팔을 뻗어 아카아시를 힘껏 끌어안는데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순간 아카아시의 뒤통수가 나무를 세게 들이 박는다. 아프단 소리가 나올 새도 없이 보쿠토는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한다. 


“아카아시가 없었으면! 나는 내가 아니었을 거야. 아카아시가 너무 좋아. 너무너무 좋아. 멀리 멀리 가버려도 나 잊으면 안 돼. 절대 잊으면 안 돼!”

“하하, 아파요 보쿠토씨. 그리고 안 잊어요. 절대로. 잊어다간 아주 잡아먹어 버리겠단 눈을 하고 있는 토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여기!”

“……말세네요 정말.”


그렇게 한참을 아카아시의 품속에서 부비적거리고 있던 보쿠토가 잊고 있던 사실을 생각해냈는지 고개를 번쩍 든다. 


“맞아!”


보쿠토가 저런 식으로 귀를 높이 쳐올릴 땐 호기심이 발동하거나 무언의 사고를 치기 직전이거나 장난할 거리가 생각 났을 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카아시는 불안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그를 불러본다. 


“왜요?”


보쿠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양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거리는 웃음을 흘린다.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내내 웃거나 배꼽 잡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슬슬 답답해진 아카아시가 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큰 귀를 붙들고 낮게 읊조리려던 찰나,


“오늘이 내 생일이야, 아카아시!”


생일? 


난생 처음 들어본 단어에 생소한 기분이 든 아카아시가 머릿속을 헤집으며 ‘생일’이란 단어의 어원이 뭔지 열심히 뒤지고 있을 무렵, 아카아시의 난감한 얼굴을 재빠르게 캐치한 보쿠토가 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태어난 날 말이야, 태어난 날. 오늘부로 나는 태어난 지 딱 1년 째 되는, 어엿한 성인 토끼란 말씀.”


태어난 날. 그 낯선 울림에 잠시 말문을 잃었던 아카아시가 이제야 알겠단 얼굴로 답한다. 


“아하, 자신이 태어난 날은 매해 돌아오니까 그걸 기념해서 생일이라 하는군요. 처음 알았어요.”


보쿠토가 턱을 갸웃거린다.


“엣……. 그럼 아카아시는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 몰라?”

“언제 태어났는지 조차 까마득한데 생일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제 입장에선 생일을 기억하는 보쿠토씨가 더 신기한 걸요.”


잠시 둥그런 턱에 손바닥을 받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보쿠토가 이내 눈을 반짝인다. 


“오늘을 우리의 생일이라 하면 되겠다!”

“……예?”

“아카아시는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이 생일이잖아. 그럼 이제부턴 오늘이 우리 둘의 생일인 거야. 매년 우리가 태어난 오늘을 기념하는 거지! 와아! 생일 축하해 보쿠토! 생일 축하해 아카아시!”

“어째서 항상 자기 멋대로 인겁니까, 당신이란 사람은.”


어쩐지 자축 세레모니가 되어버린 한 가운데, 아카아시가 이마를 짚는다. 그런 아카아시의 반응에 일순 기가 죽어버린 보쿠토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카아시는……오늘이 생일인 게 싫어?”


아카아시는 그저, 보쿠토가 당연한 것을 물을 때마다 난감했을 뿐.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저으며 보쿠토를 고운 잔디밭 위로 내려둔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다란 몸을 엎드리고 양 손등 위로 턱을 괸다.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 좋아요. 기념이라면 그럴 듯한 선물이 있어야 겠네요. 선물로는 뭐가 좋겠어요? 아, 보쿠토씨 여의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저거 선물로 드릴까요?”


마치 안부 인사 건네듯 여의주를 선뜻 선물로 주겠단 아카아시로 인해 보쿠토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에, 엑? 저거 중요한 거 아니었어? 저걸 줘도 돼?”

“그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아니……. 근데……. 뭐랄까. 내가 받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저건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청렴한 마음가짐으로 있었는지 대한 척도에 불과해요. 귀천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턴 무거운 짐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도…….”


자꾸만 말꼬리를 흐리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보쿠토로 인해 아카아시가 양 손을 쫙 펼친다. 보쿠토의 양 뺨을 잡아채듯 강하게 내리치며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제 곁에 있던 물건이에요. 수 천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 어떤 것도, 저것만큼 제 곁을 오래 머물지 못했어요.”

“…….”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그 마지막 말에 보쿠토는 이뤄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만다. 영겁에 가까웠던 시간들을 제게 선물하고 싶단 말의 뜻이 무엇을 내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보쿠토였기에, 그의 입장에선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카아시는 한창 토끼풀밭을 굴러다니던 여의주를 집어 보쿠토에게 안겨준다.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다음 생일까지는 함께 챙기고 갈 수 있을까. 


여의주 안, 하나둘 벌어지기 시작한 연꽃의 꽃잎을 빤히 들여다보며 속으로 남은 햇수를 가늠하기 시작한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에게선 확고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건 싫어!”


네? 라고 아카아시가 반문할 여지도 주지 않는다. 


“아카아시 가고 나면 혼자 남겨질 텐데. 외로워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더 살라고? 그런 거 싫어. 아카아시 없는 삶은 훨씬 짧았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안 받을래, 그 선물.”

“제가 싫다면요.”

“…….”

“내가. 당신이 죽지 않고 오래 살길 바란다면요.”

“…….”

“그래도 안 받으실 겁니까?”


아카아시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그럼에도 보쿠토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올곧은 황금색 눈이 제 신념을 또렷하게 빛내고 있다. 


“그래도 아냐.”

“…….”

“사실은 붙잡고 싶어. 가지 말라고 떼쓰고 싶어. 어리광 피우고 싶어. 근데……. 알아. 아카아시는 그래도 갈 거잖아. 가야하는 거잖아. 많이 기다려왔으니까. 나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달라 하는 건 결국 내 욕심에 지나지 않잖아.”

“…….”

“아카아시는 벌써 수 천 년 동안 나를 기다려 줬잖아? 아 물론 나만을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그치만! 그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나를 만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아카아시를 기다릴래. 네가 없어져 버린 이 생에서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야. 분명 다음이 있을 테니까. 다시 태어나서 다음 생의 아카아시를 찾을 거야. 나에겐……. 분명 그게 더 행복한 일 일거야.”


그 말을 끝으로. 보쿠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이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강렬한 바람은 풀밭을 가득 채우고 있던 꽃잎과 풀잎을 허공으로 날아 올렸다. 코끝에 희미한 피비린내가 나는 것도 잠시, 아카아시의 뺨 위로 섬뜩한 액체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사방에 튄 검붉은 것이 무엇인지 머리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아카아시는 제 눈앞에서 섬뜩하게 빛나고 있는 송곳니부터 또렷하게 인식하고 말았다. 날이 시퍼런 송곳니를 타고 비 오듯 흘러내리는 끈적한 액체 류는 누가 보아도 선연한 핏방울이었다. 그리고 그 송곳니가 꿰뚫고 지나간 자리엔,


“보쿠토씨?”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살덩어리가 물려 있었다. 


“……너한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하다못해 눈길 한 번이라도 내 쪽을 향하길 바란 것뿐인데.”


벌벌 떨리는 눈이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 그에게 선명히 보이는 것이라곤 시퍼런 송곳니에 물려 찍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토끼 한 마리와


“내 기다림의 대가란 게 겨우 이런 거였니.”


핏물로 시뻘겋게 물든 풀밭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생전 처음 보는 푸른 나비의 날개 죽지, 


“대답해, 아카아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격화, 울분, 슬픔, 증오의 감정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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