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윤회와 업보’를 키워드로 해 동양과 현대를 오고 갑니다.
*원작기반, 동양풍, 사망 소재, 토끼와 용,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W. 멜
눈앞이 먹먹하다.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처음 듣는 다정함. 바람결을 타고 멀리까지 풍겨오는 퍽 온화한 공기.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쿠로오는 자기도 모르게 수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자세를 낮춘다.
“그건 싫어!”
거죽과 뼈만 앙상히 남은 그의 발톱사이엔 푸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카아시 가고 나면 혼자 남겨질 텐데. 외로워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더 살라고? 그런 거 싫어. 아카아시 없는 삶은 훨씬 짧았으면 좋겠어.”
십여 년 전의 언젠가. 푸르름을 선사해주기만 한다면 제 마음 한 켠을 내주겠다던 아카아시의 터무니없는 약조를, 쿠로오는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 받을래, 그 선물.”
“제가 싫다면요.”
거대한 바다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체가 될 뻔하기를 수십 번, 황야를 빼닮은 사막을 가로지르다 탈진으로 생사를 오가길 수백 번, 시체인 줄 알고 들개나 새들을 비롯한 짐승들에게 뜯어 먹힐 뻔한 것이 수천 번. 포기하고 싶고 그만하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루가 일 년과 같고 한 달은 십 년을 맞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못했다. 쉬이 그만둘 수 없었다.
‘당신이 그리 해주시기만 한다면, 대가로 제 마음 한 조각을 내드리겠습니다.’
전부가 아니어도 좋았다. 단 한 조각이라도 좋았다. 아카아시라는 이름 하나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나온 길이었고 떠나갈 길이었다.
“내가. 당신이 죽지 않고 오래 살길 바란다면요.”
보라. 각고의 고생 끝에 손아귀에 쥐게 된 푸르름의 상징을. 떠올려라. 푸른 나비들이 사방을 수놓았던 밀림의 한복판을. 그려라. 이것을 품에 안았을 때 제게 활짝 웃어줄 아카아시의 얼굴을.
“그래도 안 받으실 겁니까?”
쿠로오가 이를 깨문다. 시퍼렇게 날이 선 송곳니가 위아래로 맞물리며 자연스레 낮은 포효를 읊조린다.
“그래도 아냐.”
웬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너무 작고 조그맣고 연약해, 한 손에 쥐면 펑 하고 살점이 터져버릴 만큼 작은 동물이 말이다. 쿠로오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아카아시 하나만 생각하며 갖은 고생을 하고 온 자신이었다. 엄연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었고 그 대가로 그의 곁을 조금만 내달라 부탁하려 했던 쿠로오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었던가? 쿠로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카아시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쿠로오는 물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10년 만에 자신이 찾은 아카아시는. 꼭 모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초하다 못해 고고하기까지 하던 무표정의 옆얼굴은 잔잔한 웃음으로 만개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동물과 함께 그의 주변 공기는 순수한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애걸복걸 구애하다 못해 제 발로 떠남을 택할 때조차 뒤도 돌아봐주지 않던 아카아시였다. 제게는 단 한 번도 지어주지 않던 웃음이었고 결코 보여주지 않던 상냥함이었다. 쿠로오는 이것을 참을 수 없었다. 토끼 한 마리가 생뚱맞게 튀어나와 그의 곁을 독차지한 것 같았다. 아카아시라고 밉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쿠로오란 이름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한 아카아시가 원망스러웠다.
저 작은 것은. 아카아시를 위해 뭔가를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그를 위해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수해본 적이 있을까. 없겠지. 없었겠지. 왜냐면,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아카아시는 너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아닌, 네게 반했던 걸 테니까. 그래서 생각했다.
“사실은 붙잡고 싶어. 가지 말라고 떼쓰고 싶어. 어리광 피우고 싶어. 근데……. 알아. 아카아시는 그래도 갈 거잖아. 가야하는 거잖아. 많이 기다려왔으니까. 나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달라 하는 건 결국 내 욕심에 지나지 않잖아.”
미웠다.
“아카아시는 벌써 수 천 년 동안 나를 기다려 줬잖아? 아 물론 나만을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그치만! 그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나를 만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아카아시를 기다릴래. 네가 없어져 버린 이 생에서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야. 분명 다음이 있을 테니까. 다시 태어나서 다음 생의 아카아시를 찾을 거야. 나에겐……. 분명 그게 더 행복한 일 일거야.”
미웠다. 미웠다. 미웠다. 미웠다.
화가 치밀었다. 질투라 불러도 좋았다. 추악한 감정이라도 좋았다. 뭐든 좋았다. 저 작은 생명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었다.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 지난 10년 간 자신이 내내 겪어왔던 고통을 저 작은 것에게도 안겨주고 싶었다.
“……너한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하다못해 눈길 한 번이라도 내 쪽을 향하길 바란 것뿐인데.”
그것은 충동. 충동에 가까운 욕구. 폭발적으로 불어난 악의 감정.
“내 기다림의 대가란 게 겨우 이런 거였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일은 이미 터진 후였다. 사방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혀끝엔 달큰한 피 맛과 물컹한 살코기의 육즙이 닿았으며 눈앞엔 아카아시가 있었다.
“대답해,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멍한 눈을 한 채,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윽고 녹빛 동공이 부들부들 떨렸다. 뺨에 튄 핏방울에 손을 갖다 댔다. 뜨끈한 체온이 여전했다. 수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금세라도 꺾일 것 같았다. 표정을 잃은 낯빛이 차츰 색을 띠웠다.
“너……너……!”
적개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가시처럼 표독을 세웠다. 분노로 치민 녹안엔 불꽃이 튀어 올랐고 사람의 것으로 둔갑하고 있던 피부는 녹빛 비늘이 오소소 돋아났다. 비단 같은 윤기가 흘러야 할 비늘은 잔뜩 뒤틀어져 흉측하게 솟아오른다. 쿠로오에게 날을 세우듯 말이다. 고왔던 눈두덩의 흰자위는 피 색으로 물들고 사람의 것 같았던 손톱들은 세 갈래로 뜯겨져 나와 범의 송곳니만큼 거대한 발톱이 되었다. 점찍듯 퍼져 나가던 검붉은 안광은 어느 새 아카아시의 전신을 뒤덮는다. 이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본래 청아한 기를 풍기던 아카아시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검붉은, 불길한 기세를 뿜어낸다. 그가 즈려 밟고 있던 꽃들은 바짝 메말라 시들어 버리고 그들 곁을 지나치던 상냥하던 봄바람은 을씨년스럽게 바뀌어 흡사 칼날처럼 쿠로오의 뺨을 때렸다.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천둥 번개를 수반한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바짝 말라 비튼 대지는 쩍쩍 갈라지며 유례없는 지각변동을 몰고 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거대한 기의 덩어리에 둘러싸인 쿠로오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영웅이 된 줄로만 알았다. 삭막한 전쟁터에서 금의환향한 줄로만 알았다. 환히 웃어 줄 줄 알았다. 기쁘게 반겨줄 줄 알았다.
“네가 감히…….”
이상은 몽상의 단편일 뿐. 현실은 달랐다. 전혀 달랐다.
“네 까짓 게 감히!!”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무섭게 번개와 천둥이 연이어 하늘을 울린다. 또렷한 살기를 띤 녹안이 쿠로오를 노려본다. 그의 뺨 위로 톡, 톡 시린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스산하던 바람이 기어코 비를 몰고 온 것이다. 단순한 빗방울이 아닌, 거대한 폭풍으로 자라날 법한 비바람을 말이다.
뒤늦게 쿠로오가 자세를 낮춘다. 말을 아낀다.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며 그에게 수그린다. 입에 물고 있던 살덩이를 조심히 내려둔다.
적개심으로 불붙어 있던 시선이 쿠로오의 행동거지를 따라간다. 진즉에 숨이 멎은 목덜미엔 선명한 송곳니 자국이 있었다. 단번에 꿰뚫린 급소였다. 쉴 틈 없이 재잘거리던 입은 꽁꽁 얼어붙었다. 행복으로 만개한 눈웃음이 샐쭉 말려 올라갔다. 그 상태 그대로, 작은 토끼는 숨을 그쳤다.
아카아시는 멀찍이서 그것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그렇게 지켜보다, 손을 들었다. 양 손바닥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작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달달 떨렸다. 힘이 풀린 다리는 더 이상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릎이 꺾였다. 그의 살갗이 닿은 풀잎에서부터 땅이 황폐화 되어 갔다. 그리고 기었다. 마른 들판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뜨끈한 피가 뭉텅뭉텅 터져 나오는, 아직까지도 따뜻한 살결이 생생한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보쿠토씨, 이름을 불러 보려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히끅 거리는 비음만 터져 나왔다. 검붉던 눈가엔 물빛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니야.”
마침내 운다. 서럽도록 운다. 목 놓아 운다. 끝을 모르는 오열을 토악질한다. 꺽꺽대는 곡조를 따라 하늘이 무너지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용이 겪은 슬픔에 천지가 설움으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쿠로오는 뒷걸음질을 친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이런 결말을 원한 게 아니었기에. 서러운 마음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토로할 곳 없는 외로운 마음은 결국 제 초라한 발톱 끝자락으로 향했기에.
“나는 그저……!”
벼락이 쳤다. 날카로운 비명이 대지를 갈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무릎베개를 해주던 느티나무 위로 곧장 벼락이 떨어졌다. 쩌적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진 나무는 흉측한 몰골이었다. 사방팔방에 벼락이 내리쳤다. 보쿠토가 좋아하던 토끼풀밭부터, 숲의 변두리에 뿌리를 내린 버들나무까지. 불은 금방 붙었다. 타는 냄새가 숲 전체를 숲 전체를 뒤덮었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타올랐다. 그 무렵 끊어질 줄 모르던 용의 곡조가 뚝 그쳤음을 쿠로오가 뒤늦게 인지했다. 품엔 피범벅이 된 시신을 안고 허망한 눈으론 쿠로오를 좇던 아카아시가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당신과 했던 약속. 이제야 기억났네요. 제가 부탁했던 푸르름이란, 지금 당신의 발치를 굴러다니는 저것인가요?”
푸른빛으로 가득 찼던 나비의 날개 위론 핏방울과 빗방울이 튀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그를 비웃듯 한 쪽 입 꼬리만 말아 올려 보았다.
“그럭저럭 예쁘네요.”
쿠로오는 꼬리를 말았다. 뼛속까지 겁에 질린 목소리가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 나왔다.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화가 나서 그랬어.”
“…….”
“나는 계속 너 하나만 바랐는데. 저 새끼는 아무런 대가 없이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게, 그게 너무 싫어서 그랬어. 정말이야. 추방을 해도 좋고 네 눈앞에서 꺼지라 하면 꺼질 게. 더 이상 좋아하지 말라는 건……너무 힘들겠지만 노력해볼게. 좋아하지 않으려고 해볼게. 그러니 제발. 제발…….”
“…….”
“미워하지만 말아줘.”
아카아시의 눈가 주변엔 자꾸 힘줄이 돋아났다. 입은 비뚜름해지려 하고 미간은 좁아지려 하고 인상은 사나워지려 하고 있었다. 즉, 표정 관리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경련 일 듯 도저히 안 올라가는 입가를 좋을 대로 내버려두었다. 뻣뻣하게 굳은 낯빛과 시린 눈매를 세워 쿠로오를 쏘아봤다. 쿠로오가 어떤 변명들을 늘어놓든 귀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대가를 드릴 차례인가요.”
황폐화 된 토지 위를 굴러다니던 자갈들이 일어났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그것들은 아카아시의 손날을 따라 둥그런 형태가 아닌 길고 날카로운 꼬챙이의 형태로 변모했다. 어림잡아도 수십 개는 족히 넘을 가시들이 단 한 개의 목표를 향해 이를 세웠다.
기억하라. 그 꽃은 오직, 청렴한 마음을 통해서만 피어난다는 것을.
제 신념과도 같던 말을 거역해도 좋은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무렵엔 때는 이미 늦고 말았지만. 꼬리를 만 호랑이가 벌벌 떨고 있어야할 자리는 사지가 꼬챙이로 들쑤셔진 살점들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본래의 형체조차 모를 만큼 엉망으로 찢겨져 나간 육신 앞에서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천지가 쩌렁쩌렁 진동하고 있음을 몸소 체감했다.
불처럼 들끓는 복수심과 적개심에도 모자라 불필요한 살생까지 감행해버린 아카아시였다. 거의 피어날 듯 했던 연꽃은 시들고 고운 주홍빛을 띠던 여의주는 탁한 회백색으로 물들어 반으로 쪼개졌다. 그것의 변화와 죽은 보쿠토를 번갈아 보던 아카아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토했다.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어쩌면, 이라 생각한 것이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과 여의주를 함께 두면, 이라 생각한 것이 있었다.
“……이미 늦었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늘에선 날벼락이 내리치고 땅에선 지반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아카아시는 죽은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반쯤 떠 있는 눈꺼풀을 고이 감겨주고, 그 작고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아 한참을 목 놓아 우는 것뿐. 그렇게, 설움으로 복받친 용의 울음소리만이 천지를 수놓았다.
* * *
이것은 이야기. 시대를 따라 스쳐 지나간 무수한 전설 중 겨우 하나.
용은 삶의 반려로 택했던 토끼를 잃었고 호랑이는 운명이라 믿었던 용에게 죽임을 당했다. 천지는 노하고 여의주는 망가졌으며 유일했던 귀천의 기회는 박탈당했다. 자의든 타의든 용은 대지에 남는 길을 택했다. 죽은 토끼를 품에 안은 채 말라 죽는 길을,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을, 다음 생에서야말로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 할 수 있기를.
그것은 최초이자 최후의, 용의 바람이었다.
* * *
눈을 뜨면 울고 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천장이 있었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 내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건지 꿈에서 깨어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침을 삼켰다. 눈꺼풀을 깜박여 보았다. 손끝을 들썩거려 보았다. 바윗덩어리도 이만큼 무거울 수 있을까. 가까스로 들어 올린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끝난 줄 알았던 악몽의 연장선이 선명하게 수놓아졌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차올랐다.
바람은 이루어졌다. 고대하던 이를 만났다. 비참한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보내고 말았던 어여쁜 이를 다시 만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왜 몰랐나 싶을 만큼 운명 같던 사람. 시대와 세계를 뛰어 넘어 다시 만나게 된 해바라기를 닮은 미소.
‘기념이라면 그럴 듯한 선물이 있어야 겠네요. 선물로는 뭐가 좋겠어요?’
사실은, 해바라기를 주려 했다. 꽃을 꺾어 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그의 눈앞에다 해바라기를 피워주려 했다. 손짓 하나에 무럭무럭 자라나 해를 향해 방긋 웃는 꽃 봉우리를 가리키며 봐요, 당신을 닮은 꽃이에요, 쫑긋 솟아오른 귀에 대고 속삭이려 했다.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발자국 위에 쌓인 눈이 편평하지 않은 것처럼. 옴폭하니 들어간 그곳을 파헤쳐보니 피 묻은 발자욱이 선연한 것처럼. 겨울이 언제까지고 겨울일 수는 없는 것처럼. 봄이 오는 소리에 발맞춰 소복이 쌓여 있던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영원한 망각은 없는 것처럼.
“아, 깼다.”
파묻어 두었던 슬픔은 예고 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예고라면 내내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인간으로써의 새 생을 시작한 직후부터. 질리도록 내 발치를 졸졸 따라 다니며 경고를 했던 것이다. 그것을 지우려고. 묻으려고.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거부한 건
“‘또’ 그 악몽이구나.”
오히려 내 쪽이었다.
“작년 이 맘 때도 밤잠 설쳤지, 아카아시.”
어질 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 팔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이 한참을 헤맸다. 아직도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꿈속, 이라기 보단 심해에 가까웠을까. 빛 무리 하나 없는 심해는 그 어떤 꿈보다도 어둡고 춥고 외로울 테니.
“어떻게 아세요, 같은 질문이라면 그만둬. 아카아시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있으니까. 뭐든……. 알고 싶기도 했고.”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주변을 밝혔다. 낯익은 락커. 선반을 가득 채운 배구 화들. 일렬로 정리정돈 된 서포터들과 스포츠 타올.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드링크 병. 칙칙한 땀 냄새를 가리기 위해 선반 구석에 자리한 오래 된 방향제. 새카만 밤하늘을 채우던 구름이 흩어져 갔다. 부실의 널찍한 창틀 아래로 볕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백한 거였잖아. 내가 첫 눈에 반해 버려서.”
달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것은, 은은한 비단결을 떠올리게 하는 상냥한 빛이었다. 결이 고운 달빛 사이로 황금색 눈이 반짝였다. 밤하늘을 장식한 초승달 같은 눈웃음이 부끄러운 기색을 영 감추지 못했다. 뺨은 발갛게 물들고 뒷목은 긁적이고 호를 그린 눈가는 살풋 떨리는 탓에 온전히 나를 향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더는 울지 마, 아카아시.”
더는 울지 마.
그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 뺨을 닦아냈다. 손등에 축축한 기운이 흥건했다. 왜라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몸과 마음이 온힘을 다해 말 못한 감정들을 쏟아내려는 것 같았다.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고 그 틈새로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뭔지 모를 절박한 기분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건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건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언젠가 그랬듯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풀린 다리는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물빛이 흐려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더듬더듬 손을 이끌었다. 납작한 배에서부터 탄탄한 가슴과 어깨를 쓸었다. 말리지 않았기에, 나 또한 멈추지 않았다. 손은 목덜미에서 멈췄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선 따뜻한 체온이 가득했다. 쿵쿵 거리는 맥박이 선연했다. 손이 분주히 움직이며 목 주변을 전체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깨끗했다. 상처는 없었다. 멀쩡했다. 살아 있었다. 엄연히, 살아 있었다.
송곳니에 꿰뚫린 상처는. 핏줄기가 철철 흘러넘치던 바람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졌다. 어디까지 울어야 속이 시원할 작정인지 눈가에선 또다시 수분이 펑펑 솟구쳐 올랐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 감각이 전신을 헤집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은 기어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등을 보듬는 손길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연이은 악몽의 이유도, 내 울음의 이유도, 당신을 갑자기 끌어안은 이유까지도. 다만,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던 것 같다.
한참을 울었을까.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추하게 울어버린 탓에 슬슬 내가 얼굴을 묻고 있던 그의 교복 자켓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이것도 나름, 선물이라면 선물 일까나.”
들릴 듯 말 듯한 조그만 웃음이었건만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으니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왔다. 무슨 소린가 싶어 궁금하다가도 붕어의 것 마냥 팅팅 부었을 눈두덩을 보이고 싶지 않아 되려 파묻은 얼굴에 힘을 주었다.
“기억 안나? 오늘 내 생일이었잖아.”
“……아?”
의미 없는 감탄사와 함께 엉망진창이었을 얼굴이 그에게서 저절로 떨어졌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몰골이 말이 아닐 것 같아 급한 대로 흉할 낯짝을 손바닥 아래로 감췄다. 늘어진 눈물 콧물 자국부터 급하게 닦아냈다. 피와 울분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이성이 느릿느릿 현재를 돌이켰다. 고장 난 필름이 영화의 장면들을 띄엄띄엄 이어 붙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습 끝나고 다 같이 파티하려고 했는데 연습 도중 아카아시가 코피 쏟고 비틀 거려서 시합이고 파티고 나발이고 다 중단됐잖아.”
연습? 파티? 시합?
“안색은 창백하지 코피는 줄줄 쏟고 있지 힘 다 빠진 목소리로 자기는 괜찮다 하지.”
아. 웃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싫다는 애 업고 응급실이라도 뛰어 가야 하나.”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죽은 듯이 자는 네 모습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화난 보쿠토씨는 본 적이 없는데.
“내 생일에 쓰러질 뻔한 널 부실까지 업고 오는 내내. 네 상태 하나 제대로 체크 못한 내가 쓰레기 같았어. 바로 지난주부터. 그 망할 노인네를 만난 이후부터. 네 상태가 이상해졌단 걸 진즉에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 노인네의 멱살을 잡고 흔들든 때려눕히든 무슨 짓을 해서든.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마음이 간질거렸다. 여태껏 남을 몰아세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보쿠토씨가 나에게 머리끝까지 화를 내고 있단 사실에, 마음이 살랑였다.
“머저리는 나였어. 정작 울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다고.”
온전히 나란 사람을 위해 걱정을 토해내는 이 사람이. 숨을 붙이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사람이.
“부탁이니까 제발! 사람 간 떨어지게 좀 하지 마.”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해요.”
이번엔 내가 안을 차례였다. 무릎걸음으로 그의 곁에 천천히 다가가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상처 받은 눈을 하고 있는 여린 짐승을 품에 안고 보듬었다.
“걱정 끼치게 해서 미안해요. 덜컥 울어 버려서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보쿠토씨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옷깃을 끌어다 꾸욱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놓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늦어서 미안해요. 생일 축하해요.”
일순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나 긴 기다림을 거쳐 왔던가.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가슴께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푸흐, 낮게 웃는 소리가 간질거렸다.
“한참 늦었잖아, 이 지각 쟁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낮에는 노련한 뙤약볕 아래에서 시원한 그늘을 찾아 그와 함께 봄을 보내고 밤에는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따스한 온기가 남은 창가를 거닐다 그의 품에서 잠이 드는. 오래도록 돌아왔지만,
“제가 마지막 축하이길 바랄게요.”
나의 바람은 늦지 않게 이뤄진 것이었다.
“보쿠토- 아카아시 상태는 어때?”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 바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보다.
“아까 시합 중에 아카아시 코에서 피 터지 길래 나까지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도 이제쯤이면 슬슬 괜찮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래에서 애들이 케이크 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불러 오려고-”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부실 문과 함께 활짝 열려 왔다.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말을 하다말았다. 그것은 필시, 한 데 엉겨 붙어 있는 나와 보쿠토씨의 모습을 보아서.
“……아, 하. 파티는 내일 하자고 전해놔야 겠네.”
‘시합’이란 게 연습 시합을 말한 거였나. 아아,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분명 실전을 코앞에 둔 마지막 연습 시합이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쿠로오씨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고.
끓는 듯한 설움이 전혀 없었다면 오히려 거짓이리라. 꿈에서 들었던 호랑이의 목소리와 지나치게 흡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등 뒤로는 소름이 돋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잔뜩 수축한 혈관 탓에 손발이 시려오고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연은 맺어졌고, 만나야 할 사람은 이미 만났으며 남은 것은 오직 시간뿐이로구나. 살생의 기억은 피에 남았고 복수귀는 뼈에 사무쳐 마침내 오늘을 갖고 왔구나.’
가슴에 칼자국을 남긴 노파의 어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야 하나 둘 납득이 갔다. 그는 호랑이었고 호랑이는 그였다. 그는 서슴없이 살생을 저지른 자였고 시대를 뛰어넘은 살인자는 바로 그였다. 겉모습이야 어찌 됐든,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일들 잘 봐. 끼어 들어서 미안했다.”
본질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용서 하셔야 합니다.’
똑같은 존재였다.
‘용서를. 용서를 하십시오.’
미워하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온전히 그만을 미워할 수 있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회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찬스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행하고서야 비로소 지난 업보에서 해방 되실 수 있습니다.’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것이 아닌, 서서히 그 목을 옥죌 수 있는 천재일우의 찬스였다. 지난 생처럼 단숨에 죽여 버리는 멍청한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살가죽을 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만을 불어 넣고 싶었다.
‘끓듯 차오르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엄한 감정에 눈이 멀어선 아니 됩니다. 결코, 지난 일을 반복 하셔선 아니 됩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흠씬 두들겨 패다 홧김에 모가지를 부러뜨려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주체 못 할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역류해 머리통 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를 하셔야 합니다.’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머리가 아팠다. 깨질 듯이 아팠다. 메아리처럼 머리통을 꽝꽝 울리는 노파의 어귀가 시끄럽다 못해 찢어질 성 싶었다. 뇌의 어딘가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귀가 아프고 눈앞이 화끈거렸다.
“기다려요.”
결국엔 불러 세웠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말았다.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보쿠토씨가 뭐라 뭐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마치 라디오의 잡음마냥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뗐다. 발걸음의 끝엔 놀란 눈을 한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니, 쿠로오씨가 있었다.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놀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얼떨결에 그를 안는 꼴이 되었다.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던 쿠로오씨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던 그의 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마냥 허공에만 머물러 있었다. 등 뒤에서 날 선 투덜거림이 들리는 듯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뭣하면 소중히 끌어안은 이 목덜미를 단숨에 조를 수도 있었다. 죽이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왜, 라고 작게 중얼 거리는 입이 사뭇 떨리고 있었다. 뺨을 묻은 목덜미가 터질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성질은 똑같구나.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왜 그랬을까. 이유는 정말 모른다. 그냥,
“안아주고 싶었어요.”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어쩌면 그를 맨 처음 만났던, 아득히 먼 옛날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