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키예프(우크라이나)입니다. 설정 상 러시아어 사용이 많습니다.


Итак, сколько это?

-그래서, 전부 얼마인가요?

유창한 러시아어가 과일 가게 주인의 귓전을 때렸다. 놀라 동그래진 눈꺼풀을 여러 차례 껌벅이던 주인은 풍만한 아랫배를 감싼 앞치마에 손을 닦으려고 한 행동조차 잊고 말았다. 타지에서 여행 온 듯한 동양인 하나가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 입가엔 여유롭게 미소까지 띠고 있었으니 현지인 입장에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디 그뿐일까. 만만한 동양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웠다간 가만 안 두겠단 눈빛이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자, 주인인 이르고예비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솔직한 값을 불렀다. 접대용 미소를 어설프게 쥐어짜 내며 바나나 한 봉과 오렌지 두 개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우왓, 가성 비 장난 아니네.”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쿠로오가 사뭇 놀란 얼굴로 말했다. 

“도쿄에선 입에 풀칠도 못할 가격인데. 안 그래, 아카아시?”

쌀쌀한 날씨 탓에 양 팔로 몸을 감싸 안던 아카아시는 전리품 자랑하듯 콧바람을 내뿜는 쿠로오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이걸로 살 건 다 산 거죠?”

“응. 그나저나, 여긴 어째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냐. 여행 시기를 잘못 잡았나?”

페이퍼백을 가득 채운 내용물은 꽤 묵직했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곧장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인파로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에서 짐 덩어리들을 내려놓곤 목을 감싸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맨살이 드러난 목 언저리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에, 쿠로오씨?”

그러나, 쿠로오는 마치 자신이 추위에 둔감한 사람인 양 그것을 아카아시의 손에 둘둘 감아주었다.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선 따스한 봄을 맞이하고도 충분히 남을 3월의 한가운데. 반나절 만에 영하와 영상을 왔다 갔다 하는 키예프의 체감 기온은 아카아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여기는 봄이 짧잖아. 이거라도 손에 감고 있어. 맨손보단 나을 거야.”

장갑을 두고 나왔나 봐요. 버스에 올라타며 지나가듯 말하던 아카아시의 옆얼굴과 추위에 벌겋게 부푼 손가락 끝을 쿠로오는 내내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쿠로오씨가 추울 거예요.”

손사래 치듯 머플러가 감아진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쿠로오는 완강했다. 그의 발버둥 정도로 풀리지 않게끔 정성 들여 매듭까지 지어준 후 머플러로 통통하게 부푼 손바닥 틈새에 제 뺨을 파묻었다. 뜻하지 않은 간접적인 스킨십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오야 오야? 밤새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내 품에 파고든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짓궂은 목소리에 은근한 미소가 가미되자 아카아시는 도저히 쿠로오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이정표를 잃은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그, 그건…….”

“조금은 덜 추울 거야. 짐 이리 줘. 내가 들게.”

안절부절못하는 눈알이 애꿎은 콘크리트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사이, 쿠로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괜찮다는 아카아시의 만류를 능숙하게 뿌리치곤 세 덩이의 페이퍼백을 양 팔에 가득 든 쿠로오가 발길을 서둘렀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던 발걸음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섰고,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얼른 와. 

소리 없이 벙긋대는 입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이 아카아시를 부추겼다. 

그런 쿠로오에게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아카아시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부 깊이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가 낯설었다. 발을 내딛고 있는 토양의 느낌마저 전혀 달라 생소했다. 그의 옆을 분주히 스쳐 지나는 사람들은 온통 외지인이었다.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마침내 영어. 귓전을 울리는 언어가 중구난방이었다. 가격표, 표지판, 입간판,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난생처음 보는 활자였다. 

‘첫 여행’이란, 그에게 지독히 낯선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출국 겨우 며칠 전,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전무후무하던 아카아시는 급한 대로 리에프에게 러시아어 기초 회화 책을 빌렸다. 그러나 첫 배낭여행이란 들뜬 기분은 회화 공부를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에 익힌 거라곤 겨우 몇 마디의 말. 그마저도 어색한 단어를 띄엄띄엄 늘어놓으며 버벅 거리기 일쑤였다. 차라리 러시아어 전공자인 쿠로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그래, 어떤 식으로든 말이 통한다는 건 좋은 거지. 혼자인 것보다 훨씬 외롭지 않고… 그렇긴 한데…….”

아카아시는 뒷말을 아꼈다. 손을 칭칭 둘러싼 차콜 색 머플러엔 쿠로오의 온기가 여실했다. 몇 발자국 앞서 있는 쿠로오의 등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Осторожно!

-조심해요! 

놀란 쿠로오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말의 장터는 인파로 북적였기에 오가는 사람과 어깨를 부닥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아카아시는 은연중에 미간을 험상궂게 찡그리고 있었다. 

Ты в порядке?

-괜찮으세요?

이제 막 장터에 들어서던 금발의 여성 둘이 서로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쿠로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쿵, 작지 않은 소리가 함께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한 여성은 불쾌함으로 가득 찬 눈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О, большое спасибо.

-오, 정말 고마워요. 

순간적으로 발휘된 순발력 및 기사도 정신 비슷한 것은 손아귀에 들려 있던 무거운 짐짝을 저 멀리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 빈자리엔 부드럽게 잡아당긴 여성의 손목이 자리했고 흐트러졌을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눈길은 퍽 다정했다. 

С удовольствием. Есть ли травмы?

-별말씀을.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 버럭 화를 내려던 금발의 여성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큰 키, 자국에선 볼 수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 또한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꼭 첫사랑에 빠진 여학생처럼 양 뺨을 붉힌 여성들은 쿠로오에게 바짝 붙어 핑크빛 기운을 뽑아냈다. 당황한 쿠로오가 뺨을 긁적이며 무어라 대꾸하다 말고 이내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아카아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벌써 몇 번째냐고.”

겨우 사흘째. 키예프에 체류하는 동안 그가 선보인 ‘친절’이란 이미지는 아카아시의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을 반겼다. 춥다, 추워. 쿠로오는 재빨리 집안 곳곳의 전기난로를 켰고 소파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여간 추웠는지 양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싹싹 비벼 한기로 얼어붙은 목 언저리에 갖다 대곤 서늘한 입김을 토해냈다. 

“아, 짐 정리-”

아차 싶은 순간은 항상 반 발자국 늦게 생각나곤 했다. 뒤늦게 현관에 내려둔 짐 덩이들과 덩그러니 내버려둔 아카아시가 떠오른 쿠로오는 한달음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미안. 도와줄게.”

아카아시의 손을 둘둘 감고 있던 차콜 색 머플러는 어느새 싱크대 한 편에 얌전히 개어져 있었다. 그는 쿠로오 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됐어요.”

쿠로오가 들어주려 했던 짐 꾸러미를 한 발 빨리 아카아시가 낚아채 갔다. 페이퍼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텅 빈 냉장고 안에선 쌀쌀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휑한 내부가 야채와 과일들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개 중 오렌지가 내던져지는 소리는 유독 날카로웠다.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는 듯한 잡음이 쿠로오의 귓전을 두드렸다. 

왜 이러지.

종잇장 안 쪽을 굴러다니는 오렌지를 집던 손이 느려졌다. 잔뜩 굳은 어깨가 짙은 한숨으로 풀어졌다. 

평정심.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파동 없는 수면처럼 고요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눈꺼풀을 깜박였다 하면 조금 전 보았던 쿠로오의 옆얼굴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리플레이되곤 했다. 설렘과 기대로 부푼 벽안. 유달리 아름다워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 두드러진 이목구비. 운동부의 것과는 전혀 다른 뽀오얗고 매끈한 살결. 호리호리한 몸 선. 

어떻게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연인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건 바로 아카아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아카아시는 스스로가 미웠다. 기분 좋게 여행 와서 외국어에 능통한 그를 칭찬하기는커녕 그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 전부에게 가시를 세우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모르는 언어, 모르는 사람, 모르는 웃음. 그런 것들을 온종일 반 발자국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선 울컥울컥 한 무언가가 불에 끓듯 치밀어 오르곤 했다. 

러시아어를 잘할 수 있었다면. 미리미리 공부해 뒀더라면. 하다못해 인사말 정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쿠로오가 대화를 시작하는 것까진 좋았다. 타지에 왔으니 그곳 친구를 사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었다. 

다만. 외래어로 쏟아지는 대화의 틈에 끼어들 수 없는 단절감, 분위기에 맞춰 어정쩡하게 웃어야 했던 어색한 공기, 들뜬 웃음 사이로 멀어져 가는 뒷모습,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그에게서 느껴버린 지독한 외로움은 후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화났구나.”

이런 옹졸한 자신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는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참을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설프게 둘러대 봤자 나한텐 안 통해.”

그러나 입이 떨어지기 직전 떼어나간 찰나의 주저를, 쿠로오는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일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항상 그랬다. 아카아시는 쿠로오 앞에만 서면 몸과 마음이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쿠로오의 속내를 파악하긴 복잡하게 널브러진 퍼즐을 1분 안에 맞추란 것처럼 느껴졌건만, 쿠로오는 한 눈에 아카아시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그의 핵심을 푹 찌르는 쿠로오의 통찰력은 아카아시에겐 무척 당혹스럽다가도 또, 부끄러웠다. 

어른스럽다. 능숙하다. 대단하다. 입에 꿀을 바른 수식어구는 쿠로오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노력도, 무덤덤한 표정 아래 감춘 초조함도, 평정심을 노래하는 강박관념도, 은근한 투쟁심과 승리의 욕구마저도. 착한 아이 칭찬하듯 쿠로오는 그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질투했구나, 케이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큰 손아귀가 짤막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뜨렸다. 괜한 오기가 발끈해 무어라 반박하려던 차, 귓바퀴에서 ‘쪽’이란 비현실적인 소리가 났다. 

“귀여워.”

익숙한 입술의 감촉과 앞뒤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애정 넘치는 속삭임, 뒤에서부터 은근하게 감싸 안아오는 팔뚝까지.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됐다. 아카아시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온몸에서 열이 들끓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쿠로오였다. 상대가 쿠로오만 아니었어도 아카아시의 이성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며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 때문에 뚱해진 우리 케이지 기분 풀어줘야겠지?”

제 진심을 훤히 꿰뚫다 못해 그것을 귀엽게 여기는 쿠로오가 얄밉기까지 했다. 됐네요. 달콤한 제안을 보기 좋게 되받아치려던 말대답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말았다. 

“아. 아? 쿠로오씨?!”

무릎 아래에 팔을 넣고 뒷목을 감싸 안아 그를 번쩍 들어 올린 쿠로오는 이미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어.”

아예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는 쿠로오를 보고 있자니 결국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거우니 내려달라는 말은 쿠로오에게 통하지 않았으니 소원대로 그의 목덜미를 꽈악 끌어안았다. 불규칙한 맥박이 얇은 피부 결 아래 쿵쿵 울려댔다. 

쿠로오는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방 안 곳곳을 빛내는 전기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틀 가까이로 다가갔다. 창문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 위로 아카아시를 내려둔 후 바깥 풍경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는 말대답은 5층 아래로 보이는 키예프 시내 전경에 목구멍 아래로 쏙 들어갔다. 

해가 저물기엔 아직 넉넉한 오후, 노란 햇빛 한 움큼은 상냥히 빛났다. 싸늘한 봄바람이 숨을 불어넣는 거리엔 여전히 인파가 북적였다. 엣취, 귀여운 재채기 소리가 쿠로오의 귓전에 와 닿았다. 시선은 창밖에 고정시킨 채, 제 목에 두른 팔을 풀어 손아귀를 겹쳐 잡아 보았다. 조금 차가웠다. 그것을 그대로 뺨에 가져가며 쿠로오가 말했다. 

Мы любители.

네? 유창한 문장 앞에서 아카아시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 해 봐.”

쿠로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아카아시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못 해요.”

“들리는 대로 말하면 되잖아.”

“못한다고 했잖아요.”

가시 돋친 말투였다. 쿠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듣기만 해.”

먼 곳을 바라보는 눈에선 여전히 생글생글한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의중을 전혀 짐작 못하겠다가도 자꾸만 러시아어로 말하는 쿠로오가 얄밉게 보였다. 일방적으로 선이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싫은 감각. 아카아시는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진즉에 눈치채고 있어서 쿠로오는 일부러 아카아시의 손을 사로잡았던 걸까. 빠지지도 않을 만큼 제 손을 세게 움켜쥔 쿠로오의 손아귀가 오늘따라 밉보이기만 했다.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래어에 지쳐 아카아시마저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귀에 익은 문장이 들리자 아카아시는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처럼 훽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을 보고 있어야 할 쿠로오의 샛노란 동공은 어느새 아카아시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고 찬바람은 꽉 닫힌 유리창을 살살 건드렸으며 기울어진 햇볕이 쿠로오의 싱그러운 눈웃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겹겹이 쌓여 얼음장을 이루던 섭섭함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애정이 담뿍 담긴 한마디에, 겨우 말 한마디에, 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슬픈 듯 기쁜 듯 글썽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쿠로오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뒷목을 힘껏 잡아끌었다. 꽃잎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꿀을 찾아 헤맸다. 언제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운 사람들처럼 틈새 하나 내어주지 않고 찰싹 달라붙어 짙은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낯선 공기에서 오가는 혀와 타액이 생소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 말을 내뱉기 위해 떨어진 입술과 입술 사이엔 은빛 실이 짧게 늘어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대답을 들어서 였을까. 놀란 쿠로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이, 아카아시는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키스 앞에서 쿠로오의 이성이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렸다. 그런 쿠로오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아시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혀를 움직이는 것에만 몰두했다.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촉박한 여행 준비 속에서 아카아시가 유일하게 외워두었던 단 한 마디의 문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형식적인 회화보다 아카아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문장은.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의 여행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 * *


Мы любители.

-우리는 연인입니다. 

Не трогайте меня. У меня уже есть кто-то, кого я люблю.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Я люблю тебя, Акаши.

-널 사랑해, 아카아시. 

Я люблю вас, тецуро.

-당신을 사랑해요, 테츠로.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W.MELL




먹다 만 감자 칩이 굴러 다녔다. 절반 쯤 읽다 만 점프가 슬슬 지겨워졌다. 오래도록 아빠 자세를 유지한 탓에 척추가 뻐근했다. 한 쪽 허벅지엔 미미하게 경련이 일었다. 책을 덮었다. 눅눅해진 감자 칩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맛이 없었다. 찌뿌둥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기지개를 켜니 등 뒤로 익숙한 체온이 와 닿았다. 간헐적으로 게임기 버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언제까지 할 거야?”


흘깃 벽시계를 살피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은 지가 바로 조금 전 같은데 창밖엔 한창 어둠이 깔려있다. 


“글쎄요.”


아카아시가 몸을 뒤로 기울였다. 자연스레 그의 하중이 내 등으로 쏠렸다. 내게 기대다 시피 몸을 맡긴 아카아시에게 조금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카아시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네. 켄마가 추천해주는 게임은 거진 재밌거든요.”

“……전-혀 모르겠던데.”


멋대로 뻗친 머리칼을 매만지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네코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붉은 색 바지가 눈에 띄었다. 깜깜한 밤, 마주 닿아 익숙한 등의 감촉,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숨소리. 문득, 섭섭하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발목을 움켜잡았다. 한밤 중 갑자기 감성적인 기분이라도 든 걸까. 


“케이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불러 봤다. 아카아시는 금세 네, 라고 답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말해도 될까, 말하지 말까. 해서 될 말일까, 해선 안 될 말일까. 순간 몰아친 망설임이 목구멍을 에워싸는 것 같았지만 멍청한 입은 내 이성보다 한 발 빨랐다. 


“나는 왜 ‘네코마’일까.”


네? 되묻는 걸 기다릴 틈도 없이 다음 의문이 튀어 나왔다. 


“너는 왜 ‘후쿠로다니’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이란 건 알았다. 그래도 일단 내뱉고 나니, 섭섭한 마음이 한 풀 꺾이는 것 같았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릎을 감싸 안았다. 위축된 마음이 괜한 우울감을 불러 일으켰다. 역시 해선 안 될 말이었다. 


“나도, 너랑 같은 코트에 서보고 싶어. 연습 경기 말고 공식 시합에서 말이야. 네 토스를 받아 보고 싶고, 내가 원 터치한 볼이 네게 이어졌으면 좋겠고, 속공이 먹혀서 같이 하이파이브 쳐보고 싶고, 이기면 이긴 대로 얼싸 안고 싶고, 지면 진대로 같이 울어도 보고 싶고, 너는 너대로 충분히 잘 했다고, 최고의 토스였다 도닥여 주고, 나는 나대로 잘 막아줬다고, 최고의 미들 블로커였다고 위로 받고.”


알고는 있는데. 못난 입은 멈추질 않았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몇 계단씩 뛰어 내려가 네 교실에 쳐들어가고 싶어. 맛있는 거 먹자고 반쯤 졸고 있는 네 팔을 붙잡아 매점으로 달려가고 싶고, 교복 단추 자국이 선명히 남은 네 뺨을 살짝 아프게 꼬집고 싶고, 수업이 끝나면 연습하러 가자며 너를 마중 나가고 싶고, 부실까지 나란히 걸어가고 싶고, 옷 갈아입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싶고, 같은 유니폼을 입은 우리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고, 땀 닦는 수건을 공유하고 싶고, 드링크를 넘겨주다 이것도 간접 키스라며 얼굴을 붉히고 싶고, 연습이 마무리되면 공용 샤워장에 들어서다 서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쳐 보고 싶고, 같이 집에 가자며 함께 교문을 나서고 싶고, 돌아가는 길에 붕어빵 하나씩 입에 물고 싶고, 잘 들어가라며 작별의 뽀뽀도 하고 싶단 말이야.”


페이스 조절이 안 됐다. 평소라면 눈 감고 넘어갔을 일이 물 만난 고기처럼 쏟아진 기분이었다. 같은 학교가 아니란 것에 이토록 연연하는 자신이 싫었다. 아아, 코끝이 짜증나게 시큰 거렸다. 이게 뭐라고 울고 싶은 기분이 되는 건지. 때 아닌 우울증이 기분 좋게 마무리 되어가는 주말을 망친 것 같다. 


“중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어.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어떻게든 후쿠로다니에 입학하고 싶어. 네 선배가 되고 싶어. 아니, 동기여도 좋아. 후배여도 좋을 것 같아. 너랑 같이 배구를 하고 싶단 말이야. 네트 너머로 보는 네가 아니라, 네트 안 쪽에서 함께 하고 싶다고.”


게임기 소리가 멎었다. 옹졸하고 비좁은 내 속내를 들은 아카아시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당황스럽겠지. 스토커처럼 보였으면 어쩌지. 실망했을까. 싫어졌을까. 풍선처럼 커진 설움과 맞바꿔 자신감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런 스스로가 싫다가도 또 한 편으론 속이 시원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간 쌓여온 스트레스가 단번에 펑 터진 것 같았다. 


“쿠로오씨.”


눈을 감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던 아카아시의 마음이 오늘만큼 오리무중일 수 없었다. 


“변태입니까?”


순간 사례가 들릴 뻔했다. 막연히 예상하고 있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대답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뚱한 표정이었다. 


“뭐?!”

“방금 그랬잖아요. 옷 갈아입는 거 몰래 훔쳐보고 싶다는 둥, 같이 샤워장에 들어간다는 둥.”

“아, 아, 아니. 그거느은…….”

“그건 뭔데요.”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눈알이 옆으로 굴러갔다. 아카아시 손아귀에 있어야 할 게임기가 먼발치에 뉘여 있었다. 아카아시는 무릎걸음으로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대로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바-보.”


익숙한 체취가 코를 덮었다. 눈물 나도록 따뜻한 체온이 내 목덜미를 감싸 안아 보다 깊게 내 뒤통수를 제 품속에 끌어 들였다.


“겨우 그런 걸로 삐쳐 있었어요?”

“겨우 그런…거라니. 나는 진지하거든?”


고른 숨소리를 따라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과는 정반대의 쿵쿵대는 맥박이 귓전을 크게 울렸다.


“다른 학교라서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뭐가 좋아. 하나도 안 좋아.”


아카아시가 기분 좋게 웃는 소리를 냈다. 뒤통수를 통해 웃음소리가 곧장 울려 퍼졌다. 응어리진 기분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쿠로오씨가 교문 밖에서 기다려 주는 거.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이 나 하나만 기다려 주는 거, 사실 엄청나게 설레는 일이거든요? 쿠로오씨만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겁니까. 또, 네트 바로 맞은편에서 쿠로오씨 얼굴을 유심히 봐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는 거. 오늘 상태는 괜찮은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벌써 지치진 않았는지, 정말 뚫어질 듯 열심히 보거든요. 그러다 눈 맞으면 쿠로오씨도 픽 웃어 버리는 주제에. 솔직히 같은 팀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요. 팀원들 눈치도 보이고. 그리고 나머진……. 같은 학교 아니어도 충분히 자주, 많이 하고 있는 일들이고.”


조심히 턱을 들자 아카아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끄럽게 휘어진 눈매나 입 꼬리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카아시 그 자체였다. 내 오랜 고민과 걱정거리들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 아카아시를 보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진즉에 털어 놓을 걸 그랬나. 알고 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짐을 괜히 혼자 떠안고 있었나. 


“케이지 지금 너무 예뻐. 알아?”

“기왕이면 멋있다고 해주세요.”

“예뻐.”

“……그래요. 예쁘다고 칠게요.”


바닥을 친 우울이 안도로 뒤바뀌자 다음은 어리광이 빼꼼 고개를 내밀려 했다. 답지 않게 말이다. 


“케이지, 나 뽀뽀해줘.”

“뽀뽀는 제가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싫어. 얼른 뽀뽀.”


무언의 불평도 잠시. 이마, 눈꺼풀, 콧대, 뺨 순으로 따뜻한 깃털이 앉았다 떨어졌다. 입술을 피해 간 건 일부러 인 게 틀림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아랫입술이 부루퉁 튀어 나왔다. 이제는 먼지 한 톨 쯤 남은 불안감을 완전히 없애고 싶었다. 


“괜찮다고 해줘.”


이렇게까지 어린 아이 마냥 굴어도 될까, 싶은 마음이 문득 샘솟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카아시 쪽에서 먼저 한 소리가 나왔다. 그것도 내 일생일대의 굴욕 같은 일침이 말이다.  


“오늘따라 보쿠토씨 같네요.”

“그거 욕이지.”


아카아시는 또 웃었다. 삽시간에 짓뭉개진 내 얼굴은 나 몰라라 한 채. 


“쿠로오씨한테선 보기 드문 일이니까요. 신기해요.”

“신기한 거 알면 얼른. 말해줘.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착한 아이 칭찬 하듯 부드러운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 말이 아카아시 입에서 나왔을 뿐인데. 정말 괜찮아 질 것 같았다. 내친김에 다른 것도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고 치졸하고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고 열등감 느끼는 쿠로오씨지만 엄청 많이 좋아한다 해줘. 하늘만큼 땅만큼. 아니, 우주보다 더 넓게.”

“푸하하, 그게 뭐예요~”


이제는 입까지 손등으로 가리며 쿡쿡 웃어대는 아카아시였다. 


“나 심각해. 입술에 뽀뽀 안 해준 대신이야.”

“그건 또 귀신같이 알아서.”

“거 봐, 안 해줬지.”

“하여간 쿠로오씨는 못 이기겠다니까.”

“얼르은.”


아카아시를 보채듯 뒤통수를 휘휘 내젓자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아카아시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고 치졸하고 쓸데없는 거에 집착……. 뭐였죠? 까먹었어요.”

“열등감 느끼는.”

“열등감 느끼는.”

“쿠로오씨를.”

“쿠로오씨를.”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합니다.”


끝을 모르는 고독과 우울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펄펄 뛰어대는 맥박수와 휘몰아치는 펌프질에 정신이 쏙 빠져나갈 것 같았다. 내 뒤를 끌어안고 있는 아카아시를 정면으로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돌렸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찌할 바 모르겠어 가만히 안아 두질 못하고 조금씩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탔다. 살짝 드러난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좋아하는 냄새, 좋아하는 호흡, 좋아하는 목소리, 좋아하는 웃음, 좋아하는 사람.


“아~ 나 역시 전학갈래. 후쿠로다니 편입할래. 매일같이 얼굴 보고 목소리 듣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싶어.”

“지금 보고 있잖아요. 듣고 있잖아요. 당장 말해주면 되잖아요.”

“유급할까? 지금이라도 시험지 몽땅 백지로 내버릴까? 같은 학교가 안 된다면 같이 졸업이라도-”

“하하하하,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올해 졸업 안하면 앞으로 영영 쿠로오씨 안 볼 거예요.”


힝. 우는 소릴 내도 아카아시는 단호했다. 이제는 내가 아카아시에게 매달리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 따윈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보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안 해주실 거예요?”

“……뭔데.”


톡 튀어나온 쇄골 라인을 따라 쪽쪽 입을 맞췄다. 허리를 안은 손이 척추를 따라 차츰차츰 이동을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살짝 실망한 목소리로 읊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어느 새 꼬리뼈 언저리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아카아시와 눈높이를 맞췄다. 복숭아 빛을 띤 입술 위로 내 것을 진하게 겹쳐 보았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턱에 맞춰 저항 없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말캉한 살점이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넸다. 얼싸 안고 춤을 추고 세게 휘어 감기도 하다 입천장 쪽 여린 살을 장난치듯 톡톡 건드렸다. 진득한 입맞춤이 아카아시의 혼을 쏙 빼놓기 직전, 하나 된 입술을 살짝 떼어내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




W. 멜




바람결에 버들나무가 나부꼈다. 길게 뻗은 마른 잎사귀가 강변 위로 몸을 던졌다. 강변을 따라 굽이치는 강물이 하늘의 색을 닮아갔다. 지평선과 해가 맞닿아가는 이별의 시각.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강의 풍경을 쿠로오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석재 난간에 기대 몸을 살풋 앞으로 기울인 채, 입가엔 절반 넘게 타들어간 담배를 꾹 머금은 채. 


사실 큰 강은 아니었다. 스미다, 아라카와 같은 유명한 이름이 붙은 것 또한 아니었다. 개천이라기엔 어딘가 모자라고 강이라기엔 과분한. 기껏해야 근방의 동네 아이들이 무더운 한 계절을 식히기 위해 물놀이를 하러 오는 정도의. 이름 없는 하천 중 하나였다. 


“여, 사회인.”


쌀쌀한 바람에 발맞춰 머리칼이 칠흑빛으로 물결 쳤다. 귓가에 머무는 음색이 퍽 그리웠다. 소리의 근원지엔 팔을 크게 붕붕 휘두르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어른 부엉이가 있었다. 자연스레 턱 끝이 돌아갔다. 얇고 길쭉한 담배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던 재가 단숨에 형체를 잃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 인마.”


투덜거리는 어조와 달리 쿠로오의 입가엔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에 화답하듯 보쿠토는 한 손에 달랑거리는 검은 색 비닐봉지를 흡사 전리품처럼 흔들어 보이며 낄낄 웃었다.  


“아아. 뭐 좀 사온다고.”

“니가 불러놓고 말이야.”

“미안미안~”


보쿠토를 훑어 내린 쿠로오는 근 몇 년 만에 재회한 오랜 친구의 사정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대학 이름과 문양이 수놓아진 점퍼라던가, 얼마 전에 구입한 것처럼 보이는 새 운동화라던가, 학창 시절보다 조금 더 높아진 눈높이나 한층 비대해진 체격 조건이라던가. 예나 지금이나 배구만을 오롯이 양식 삼아 쑥쑥 자라나는 보쿠토를 보고 있자니 대학은 둘째 치고 평범하게 취업 준비를 해 평범하게 회사에 들어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멋쩍게 느껴지는 쿠로오였다. 


“……우리 맹금류는 여전한가 보네.”

“우왓- 여기 엄청 오랜만이네!”


무시냐. 쯧, 짧게 혀를 찬 쿠로오는 두 모금 쯤 남은 담배를 아낌없이 들이켰다. 아직까지 현역 선수로 뛰고 있을 제 벗을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남은 불씨를 난간에 지진 쿠로오 옆으로 보쿠토가 바짝 다가섰다. 


“악!!”


120%의 파워를 자랑하는 손바닥이 친구의 굽은 등짝을 철썩 소리 나게 내리치는 건 덤으로 말이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통의 눈물을 쏙 뺀 쿠로오는 나직하게 욕설을 읊조렸다. 정작 가해자란 사람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정글짐 오르는 꼬마 아이 마냥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렸지만. 구겨진 캔 깡통 닮은 얼굴을 한 쿠로오가 입을 비죽 내밀어 바코드 찍는 소리를 냈다. 


“삐빅, 전치 4주 나왔습니다.”

“하늘 봐봐~ 노을이랑 하늘이랑 진짜 그림 같다.”

“병원 진단서도 손수 끊어다 드리는 특급 서비스.”  

“아!! 저기선 꼬맹이들 논다!”

“오야오야, 맹금류들은 날 때부터 귀가 먹었나~?”


그제야 보쿠토는 쿠로오를 돌아봤다. 시원시원하게 말려 올라가는 입 꼬리와 굽이치듯 휘어진 눈살 너머로 탠저린 색 노을이 펼쳐졌다. 


“아니!”


이 풍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면, 보쿠토는 그 풍경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 


“옛날 생각나서~”


칙칙한 회백색을 머금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말이다. 


“……어련 하시겠어.”


쿠로오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추억의 일기장이라도 들춰보듯 쉴 틈 없이 굴러다니는 데이지 색 눈알은 얇게 부서지는 강물을 뒤좇았다. 강변을 따라 우거진 풀숲은 마른 모래를 닮은 색이었고 얕게 첨벙이는 물방울은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한데 뒤얽혀 무수한 화음을 이뤘다.


“우리들도 저러고 놀았잖아.”


고무줄처럼 축 늘어진 보쿠토가 난간에 뺨을 댔다. 한기 어린 기운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잠시, 쿠로오는 망설임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코웃음까지 치면서 말이다. 


“고등학생이나 된 주제에 말이지.”

“마음만은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거든?!”

“그 정신 연령. 지금도 안녕하시고?”


결국 버럭 발끈해버리는 건 보쿠토, 낄낄 웃음이 터진 건 쿠로오였다. 억울한 마음에, 우울한 기분에 보쿠토의 검지와 검지가 맞부딪히며 핀잔을 내는 사이, 쿠로오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덩치 산만한 사내놈들 끼리 물놀이 하는 게 뭐 좋았다고.”


정말 그랬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체육관 바닥이 땀으로 홍수가 될 만큼 함께 뛰었으면서, 진절머리가 나도록 익숙한 낯짝을 한데 부대끼고 긴긴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으면서. 기껏해야 가벼운 일탈 정도로 치부되었던 물놀이는 쿠로오에게 있어 이미 뿌연 안개 빛이었다. 그러다 어렴풋한 인영 하나가 스쳐 지났다. 마냥 싫지만은 않았나. 쿠로오는 슬프게 웃었다.


“나는 되게 재밌었어.”


로켓 펀치 발사하듯 뻗어나간 한 손엔 비닐 봉 다리가 보기 좋게 흔들렸다. 네모 납작한 비닐이 열심히 앞뒤로 흔들렸다. 살짝 드러난 내용물은 샛노란 비닐 포장지와 캡 모자를 쓴 유치한 유아용 캐릭터로 둘러 싸여 있었다. 낯익은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흔히 보이는 싸구려 불꽃놀이 세트였다. 


“찜통 같이 더웠을 땐 런닝 하다 말고 다 같이 뛰어 내렸잖아. 다이빙이라기엔 어딘가 모자랐지만 일단 내가 선두 주자로 뛰기만 하면…….”


귓전을 두드리는 단어들이 멀어졌다. 스피커의 볼륨을 낮추듯 느릿하지만 명확하게. 구름 낀 해질녘 하늘, 메마른 강변의 색, 멀찍이서 들리는 물장구 소리에 불꽃놀이까지 가미되자 테두리조차 희끄무레했던 조각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갔다.


“아카아시 기억해?”


어렴풋했던 인영이 선명한 윤곽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어, 가볍게 넘겨짚으려는 대답과 달리 쿠로오의 가슴 한 켠은 찌릿한 통증을 자아냈다. 어차피 어긋난 인연, 이제 와 구구절절 토로해봤자 뭐 달라지나 싶었다. 


“대충? 합숙 때 잠깐 보고 만 사이였고, 대화도 거의 안 했고. 걔 말수도 적은 편 아니었냐.”


결국은 쓰게 웃었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입안 쪽 여린 살점을 잘근잘근 씹었다. 


“거의 기억 안나.”


풍덩 소리가 크게 났다. 아이 하나가 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푸하하 웃었다. 참새를 닮은 재잘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해. 네 입장에선 잠깐 있다 사라진 교환학생 정도였으니까.”


얼굴 트고 친해지기엔 반년은 너무 짧았고. 중얼거리는 그의 혼잣말에 쿠로오가 미간을 좁혔다. 댐의 바닥 깊이 가라앉아 있던 순간순간들이 기포처럼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둑의 가장자리까지 차오른 그것들이 툭 터져 나오려는 찰나를, 쿠로오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처음엔 나도 그랬어. 운동부 특기자 라길래 엄청나게 대단한 녀석이 온 줄 알고 기대했는데, 감독 옆에 웬 샌님이 서 있는 거야. 연습은커녕 친해지기도 글렀다 싶었지.”

“맞아. 척 봐도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살았을 법한 비실비실한 녀석이 니네 세터라길래 꽤 놀랐었지.”

“겉보기랑 달리 실력이 대단했지! 그 짧은 시간동안 무려 이 몸과 콤비를 맞춰 시합에 나갈 정도였으니까!”

“얼씨구. 꿈도 크다. 걔가 너한테 맞춰준 거겠지.”


잔잔한 웃음이 났다. 멀찌감치 떨어진 강가에서 물방울이 자잘하게 튀어 올랐다. 무지개 그리듯 곱디 고운 포물선이었다. 


“아~ 언제였더라? 왜, 하루는 니네가 먼저 물속에 들어가 놀고 있었잖아.”

“……그랬던가?”


확신에 차지 않은 물음표가 되돌아오자 보쿠토가 발끈했다. 석재 난간에 의지한 채 강변을 향해 한껏 기울어 있던 몸은 금세 제자리를 찾아 보도블록 위로 착지했다. 


“그랬어! 나랑 아카아시 보고 같이 놀자 들어와라 뭘 돌아서 오려 하냐 그냥 거기서 뛰어내려라 실컷 꼬신 건 너였잖아!”


아하하하, 의미 없이 웃고 만 쿠로오의 심경은 복잡했다. 처음부터 아무 인연이 없었다면. 혹은 아예 절친한 선후배로 남을 수 있는 사이였다면. 안녕, 잘 지내 같은 안부 인사 정돈 건넬 수 있는 관계였다면.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섞어봤다면. 의지가 있었다면. 용기가 있었다면. 만약이란 단어가 수차례 그의 신경을 긁었다. 


“무고한 사람 죄인 취급하지 마시지. 싫다는 애 뒤에서 밀어뜨리고 죽을 뻔하게 만든 놈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보쿠토는 막힘없이 대꾸하는 쿠로오에게 짐짓 놀랐는지 헤에, 콧소리를 냈다. 


“뭐야. 잘 기억하고 있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자조 섞인 본심은 단단한 둑을 무너뜨리며 조금씩 터져 나왔다. 


“그럼. 물에 빠진 애가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어 보이는데 누가 안 당황하겠어.”


보쿠토가 말하는 처음과 쿠로오가 말하는 처음은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다. 


첫 만남은 자주 가는 편의점에서였다. ‘Japanese Basic Conversation(일본어 기초 회화)’이란 촌스런 타이틀의 책자에 얼굴을 깊게 파묻은, 근방에선 못 보던 교복을 입고 있던 남학생. 유학생인가. 어찌 보면 짧게 납득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다. 모든 건 출입구가 비좁은 탓이었다. 쿠로오는 오른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야만 했고 상대 또한 똑같이 오른쪽을 향했다. 놀란 쿠로오가 이번엔 왼쪽을 향하자 마찬가지로 놀란 상대가 왼쪽으로 붙었다. 다음엔 오른쪽. 상대도 오른쪽. 미안하단 말 대신 결국 웃음이 터졌다. 얼굴을 가로막은 책자를 뺏어 들곤 지나가겠습니다, 똑똑히 눈을 맞추며 말을 건넸다. 덜컥 가라앉은 가슴이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한 건 아마 그 때부터였다. 신록을 품은 녹안이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던 순간, 쿠로오는 심장 부근이 뻐근해졌다. 


“수영 못 한단 얘기는 못 들었단 말이야…….”

“본인은 또 얼마나 놀랐겠냐. 잘못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그래서 였을까. 쿠로오는 재회의 순간이 좀처럼 믿겨지질 않았다. 애시 당초 재회의 가능성을 조금도 염두 해두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가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잊을 만 하면 꿈속에 나타나 마음을 헤집는 한 쌍의 에메랄드나 나날이 짙어지는 감정의 타래나,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잊혀 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 뒤로 내가 곧장 안 뛰어들었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코트 건너편에서 다시금 마주한 두 개의 신록은 여전히 깊은 색을 발했다. 자신을 기억하고 말고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 순간의 쿠로오는 온전히 넋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튀어 나올 듯 쿵쾅대는 심장을 방치한 채, 운명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 구나, 말도 안 되는 삼류 로맨스를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그리면서 말이다. 


“그때 멋있었어, 쿠로오.”


보쿠토가 나직하게 말했다. 난간 위에 양 팔을 한 데 겹치곤 그대로 턱을 괴었다. 


“뭐가.”

“아카아시 구하러 잠수했을 때. 너 꼭 동화 속 왕자님 같았다고.”


말이라도 못하면. 픽픽 실소가 터지는 걸 막지 못한 쿠로오가 우스갯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걔를 위기에 빠뜨린 너는 마녀냐?”


보쿠토는 잠시 입을 멈췄다. 무언은 긍정의 표시냐 대답하려던 쿠로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의 말을 잇는 보쿠토 덕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왕이면 마왕으로 해줘.”


아주 기가 찼다. 


“그래도 다행이었어. 아카아시가 금방 정신 차려서.”

“여러 가지 의미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남자한테 홀라당 첫 키스를 내줄 뻔했으니까.”


손바닥이 목덜미를 가렸다. 불규칙한 맥박 수와 홧홧한 기운이 곧장 전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 정도의 불거짐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하하하! 맞아. 이마 박치기였지?!”

“응급처치 하고도 애가 정신을 못 차리 길래 인공호흡……. 하, 다짜고짜 박치기를 당했다고.”

“나는 너무 미안해서 무릎 꿇고 땅바닥에 머리만 처박고 있었는데. 글쎄, 그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니까?”


어쩐지 이마가 들쑤셨다. 그 날 이후 동그만 혹과 함께 울긋불긋한 피멍이 올랐던 이마가 다시금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내 말이. 너무 아파서 울고 싶었다고.”


미안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을 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의 쿠로오는 그런 기대를 했다. 물거품만 끓어오르는 수면에 당황한 것도,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남은 문장이 ‘구해야한다’뿐인 것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것도,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아카아시를 망설임 없이 품에 안은 것 모두, 그가 혼자 해낸 일이었기에. 나름대로의 보상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정당한 대가였다. 


“아카아시도 많이 놀랐던 거겠지.”


굳은 낯빛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을 때, 쿠로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보쿠토 네가 미안하다며 아카아시한테 사죄하고 우리한테 사죄하고 울고불고 난리치다 차라리 불꽃놀이 하자 안 그랬으면……. 그냥. 그냥 모르겠다. 나한텐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라서.”


무안해 하지 않으려고. 점잖게 보이려고. 그 나름대로 최소한의 표정관리를 했으리라. 하지만, 말을 걸 용기가 위축된 건 사실이었다. 티가 많이 났나. 싫어졌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친 순간을 도무지 부정할 수 없었다. 


“슬슬 배고프네. 일단은 밥부터 먹자. 안 그래도 오랜만인데 니 얘기를 안 듣고 갈 수 있겠냐. 관리 중일 테니 술은 안 되겠지?”


결국 합숙 마지막 날까지 형식적인 인사치레만이 오고갔다. 남들은 눈물 콧물 쏙 빼던 송별회의 피날레에도 불편한 기색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카아시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공항에 배웅을 나가자는 보쿠토의 제안을 쿠로오는 완곡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했다. 부외자인 자신이 끼어들어 봤자 특별한 의미도 없을 테고.


“쿠로오 말이야.”


‘마지막’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 건 오히려 쿠로오 자신이었다. 냉정하게 멀어져 가는 시침과 분침 사이로 온종일 시선을 쏟아냈다. 비행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심란한 기분은 물밀 듯 차올랐고, 먹먹했던 후회들만이 끊임없이 되새김질되었다. 애꿎은 휴대폰 플립만 열었다 닫기를 수십 차례.


“아카아시를 어떻게 생각해?”


나를 어떻게 생각해?


마지막으로 쥐어짜낸 용기가 어디에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메일 주소는커녕 전화번호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키패드로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이 전해질 리 없었다. 


“근처에 괜찮은 야키니쿠 가게 생겼는데, 거기로 갈래?”


그럼에도 메일은 도착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모르는 메일 주소, 모르는 발신인, 그리고 모르는 언어. 무지의 삼박자가 그것을 삭제시키게끔 했다. 보낸 이가 본인이란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스팸 메일의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래서 삭제했다. 마침내 게워낼 수 있었다. 


“어설프게 말 돌리지 말고.”


보쿠토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제 보니 약속 장소를 이 굴다리로 정한 이유나, 자꾸만 좋지 않은 기억을 들쑤시려는 보쿠토가 심히 꺼림칙했다. 아카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말 한 마디가 불쏘시개의 역할을 도맡았다. 


“……너야말로 뭐하냐. 아까부터 사람 심기 건드리는 말만 내뱉고. 시비 거는 거 아니면 관둬라.”


냅다 윽박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와 안 좋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쿠로오의 노력을 코웃음 치듯 보쿠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요새는 한국어 공부도 하나봐. 왜? 거기 가려고?”


쿠로오가 눈에 띄게 움찔 거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흘끗 내려간 보쿠토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의 발치엔 아무렇게나 방치해둔 종이봉투가 있었다. 애시 당초 서점을 들렀다 오는 길에 보쿠토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만난다 한들, 구입한 책들의 제목이 보이지 않게끔 미리 손을 써뒀어야 했다. <처음 시작하는 한국어 기초 문법>, <Welcome KOREAN Basic>, <표준 한국어 기초>. 일렬로 늘어진 제목들이 뻔히 들어오자 마침내 쿠로오는 눈을 감았다. 


“별 거 아니야. 회사 거래처가……. 한국이라 그래.”


변명도 참 가지가지였다. 필터링은 고사하고 입이 움직이는 대로 뱉어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저 단순무식한 사고회로가 순순히 납득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던 쿠로오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쿠로오 네 생일이 다음 달이었지? 그럼 좀 빠른 감이 있긴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방긋방긋 웃으며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옆얼굴은 두툼한 점퍼에 손을 꽂아 넣은 채였다. 이 자식이 이젠 내 말을 귓등으로 듣기로 작정했나. 쿠로오가 뿌득뿌득 이를 갈도록 열이 난 이유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놓고 쿠로오의 존재를 무시하듯 휴대폰을 뺨에 갖다 댄 보쿠토의 행동거지 또한 한 몫 거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 갈란다. 말귀도 못 알아먹는 애랑 밥상 같이 할 이유가 없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까마득한 시절. 망설임 없이 삭제했던 메일이 한 통 있었다. 


“생일 선물, 안 받을 거야?”


잊어버리고, 지워 버리고, 게워 내려 했던 무수한 노력을 비웃듯 멋대로 마음 한 켠을 독차지한 메일이 한 통 있었다. 


“받아 봐. 너한테 온 전화니까.”


좋아했어요.


그 뜻 모를 문장 하나가 하루고 이틀이고 몇 년이고 가슴께를 깊숙이 맴돌아 마침내 오늘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자신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는 ‘나도’라는 대답은 불필요했고, 부적마냥 품에 안고 산 여권과 항공권은 사실상 쓸모가 없었다. 이제와 알아버렸다 한들, 때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그때와 지금의 감정이 같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고 항상 그렇듯


“……여보세요.”

[쿠로오씨?]


우리들의 타이밍은 보기 좋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W. 멜




눈을 번쩍 떴다. 낯선 천장과 낯선 공기가 코로 곧장 뻗어 들어왔다. 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고 눈알은 정처 없이 굴러 다녔다. 허리를 푹신하게 받치는 매트리스와 양 손 끝에 닿는 살결의 느낌이 생경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니겠지 입으로만 심호흡하며 눈꼽이 덜 떨어진 시야를 천천히 옆으로 굴렸다. 


“아 미친.”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반나체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여인네가 있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내 양 팔에 하나씩. 무려 팔베개까지 해주며. 가슴팍을 크게 들썩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팔을 빼내려 했다. 쌩판 처음 보는 얼굴인 여인네들은 여전히 숙면을 취하는 듯했다. 


“으음- 쿠로오씨~”

“아, 거기 좀 더, 더-”


씨발. 저절로 욕지꺼리가 튀어 나왔다. 흡사 거머리 떨쳐내듯 팔을 부르르 떨며 벌떡 상체를 일으켜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눈을 아래로 내렸다. 두툼한 이불이 가리고 있는 하체를 드러내 보였다. 


“…진짜냐.”


반쯤 벗겨진 속옷 아래가 방탕했다. 침대 주변은 차마 옷이라 부를 수도 없을 천쪼가리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사이에 낑겨 떨어져 있는 수건에는 회사 근방에서 거래처 식사로 자주 이용하는 6성 호텔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을 막 떴을 땐 멀쩡하던 관자놀이 부근이 편두통으로 징징 울렸다. 텅 빈 속은 메스꺼웠고 머리는 멍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 그런 세세한 과정이 생각났으면 이렇게 멍청하도록 앉아만 있었을까. 송년회라며 회사에서 거하게 회식 자리를 가지며 1차로는 고깃집, 2차로는 노래방을 간 것까진 기억이 났지만. 그 이후는 철저한 공백이었다. 누가 머릿속을 지우개로 싹 지워버린 마냥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에 부장님이나 이사님이 안 계신 정도? 

새벽 중에 두어 번 토했는지 입안과 식도에서 시큼한 향이 남과 동시에 까끌 거렸다. 목이 칼칼해진 탓에 물병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플라스틱 물병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 굴러다니는 걸 찾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 거의 새것마냥 뚜껑 가득 차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당장의 갈증을 해소했더니 차츰 주변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고 난 누구인지. 저 여자들은 뭐고 난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기억은 먹먹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자며 우선은 휴대폰 찾기에 여념 했다. 휴대폰을 찾다 현관에 나뒹굴고 있는 정장 재킷을 찾고 식탁 의자에 던져 놓은 와이셔츠를 찾았으며 베란다 쪽 커튼 아래 버려진 허리띠와 바지를 찾았다. 급한 대로 옷을 추스르고 있으니 이번엔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내 휴대폰인가 싶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왜- 저기에 들어가 있는 거냐고.”


침대와 바닥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애처롭게 부르르 떨고 있는 물체가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다. 있는 힘껏 팔을 뻗어 먼지구덩이 속에서 안쓰럽게 주인을 부르는 그것을 집어 올리면 


[야쿠 모리스케]


익숙한 이름이 나를 반겼다. 


“여. 어제는 잘 들어갔냐? 속은 괜찮아?”

[괜찮기는 개뿔. 니네 부장님은 술도 드럽게 못 마시면서 주정이란 주정은 왜 우리 테이블에 갖다 쏟냐? 니 상사는 니가 챙겨라, 좀.]

“아하하, 우리 나미오씨가 평소엔 꽉 막히고 일만 성실히 하는 사람이긴 한데~ 알코올만 들어 갔다 하면 오지랖이 좀 남다르다. 니가 이해 좀 해라.”

[어휴- 그나저나 난 니가 더 걱정이다. 어제 이사님들이 너만 콕 집어서 들이 붓던데.]

“안 그래도 새벽에 몇 번 토한 거 같더라. 필름은 죄다 끊어졌고, 속은 찝찝해 죽겠고…….”

[그 인간들 너만 못 잡아먹어 안달이네. 평소에 쌓인 감정을 왜 사석에서 푸냐고.]

“내가 뭔가 밉보였나 보지. 그것보다…….”


침대 시트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잠에서 막 깬 듯한 몽롱한 목소리들이 몸을 뒤틀며 하나둘 기지개를 켰다.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푹 숙여버린 나는 재빨리 커튼 너머의 베란다로 발을 내디뎠다. 경치 좋은 전망이 탁 트여 있었다. 


“혹시……어제 나 뭐, 실수한 거 있냐?”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아득한 꿈결 너머에서까지 아른거리던 얼굴이 있었다. 조금 전 물 한 통을 가득 채워 넣었음에도 목은 바짝바짝 마르고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니? 없었는데?]


안도의 한숨이 훅 빠져 나왔다. 긴장으로 일그러져 있던 미간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럼 다행이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통화 건너편에선 야쿠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하긴. 어제 너, 상태가 좀 이상하긴 했다. 여자 애들 옆에 끼고 히히덕거리는 게 딱 만취한 놈 같았거든. 페이스 조절 실패했나 싶어서 봐줄까 했더니 금방 없어져 있고.]

“…….”

[집에 잘 들어간 거 맞지? 아카아시…아니, 이젠 성이 쿠로오였지. 여튼, 집사람이 걱정하겠던데.]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뒷목이 저절로 아래로 꺾였고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뭐야? 너 집 안 갔어? 야. 너 지금 어디야.]

“끊자. 일단 끊자. 이따 연락할게.”

[야. 야! 쿠로오!]


통화 끊긴 휴대폰을 양 손으로 감싸 쥐고 이마에 갖다 댔다. 기도했다. 제발이란 기도문을 속으로 끊임없이 반복했다. 숨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눈꺼풀을 깊게 감아 내리며 꽉 닫혀 있는 폴더를 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통화 목록을 확인해 내려갔다. 


[쿠로오 케이지] - 23:41

[쿠로오 케이지] - 00:23

[쿠로오 케이지] - 01:25


“……하.”


망했다, 라는 세 글자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우 세 통의 전화일 뿐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케이지는 원래부터 전화를 자주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힘들게 시작한 연애 중에도 10번 통화하면 그 중 한 번 혹은 두 번이 케이지에게서 오는 전화일 정도로, 케이지가 제 쪽에서 먼저 전화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쉬운 적도 있었고 그 일로 싸운 기억도 없진 않았지만 케이지가 얼굴 전체를 벌겋게 물들인 채 먼저 전화하는데 용기가 많이 필요하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우고 눌렀다 지우고를 반복한다고, 라는 진솔한 고백을 듣게 된 이후. 나는 내가 자진해서라도 연락을 먼저 하려 노력했다. 그럴 때면 케이지는 내 노력에 보상이라도 주는 것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어 올리며 조용히 내 뺨에 촉- 소리 나게 입을 맞춰주곤 했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행복했던 것이다.


“케이지….”


결혼하자, 라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막상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취업 준비에 벅찬 나머지 그 흔한 반지도, 꽃다발까지도. 프로포즈라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할 만큼 말이다. 내 손보다 약간 작은 케이지의 손 위로 내 것을 겹치며 작게 읊조린 고백.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고백 한 마디에 한참이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땐 역시 거절인가 싶었다. 하기야, 그 때의 우리는 돈도 빽도 없이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양가 부모님은 연애마저 격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가진 거라곤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 하나. 그 뿐이었다. 이런 실정이니, 당연히 케이지가 거절하리라 여겼던 나는 꽉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고 어색한 미소를 애써 지어 올리며 괜찮아, 라고 말하려 했다. 

케이지는 울고 있었다. 감정이 벅차 올랐는지 양 뺨 가득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알 수 있었다. 이 작고 어른스러운 척하기 바쁜 아이가 결혼하자던 내 말을 얼마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일찍이 조숙하며 제 속내를 쉬이 내보이지 않는 아이가 어떤 심정으로 눈물을 흥건히 토해냈는지.

그 길로 우리의 결혼 준비는 불이 붙었다. 절대 안 된다는 양가의 부모님들을 무릎 꿇고 빌고 사죄하고 설득하기까지 꼬박 1년이었다. 설득만으로도 1년이었다. 안정적으로 취업에 성공하게 되며 오만가지 조건 아래, 겨우 얻어낸 결혼 허락은 눈 깜짝할 새 자그마한 결혼식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지난 10월, 마침내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대하게 올리는 결혼식이 아닌, 직계 가족과 친지들만 모아 소박하고 조용히 치뤄진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좋았다. 함께 할 수 있어 기뻤다. 남은 평생을 서로의 곁에 머무르게 될 수 있어 행복했다. 


“뭘 어떻게 말해야 하냐고…….”


나는 정수리 부근을 벅벅 긁었다. 부재중 전화로 남은 케이지의 ‘쿠로오’란 성을 보면 자동적으로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오늘만은. 오늘만은 얘기가 달랐다. 통화 목록 화면을 끄고 나니 뭔가 알림이 많았다. 메일이나 라인이나 가릴 것 없이 알림이 가득했다. 설마 케이지 일까 싶어 급한대로 라인부터 열어보니, 대체로는 어제 회식 뒤풀이 이야기였다. 그 외엔 개인적인 연락이나 푸념 섞인 얘기. 다행히 케이지는 없었다. 잠깐 안도한 숨을 가다듬고 메일함을 열자


“……이 미친.”


메일이 와 있었다. 내가 보낸 것도, 케이지가 보낸 것도 있었다. 찬찬히 메일 목록을 위로 올리니 아주 가관이었다. 


[케ㅣㅇ지전항오ㅑ해ㅛㅛㅎㄹ] - 01:58

[저노ㅘ해써어???] - 02:01

[사ㅏㄹ앙해내ㅐ여보케잊지♡] - 02:06


기가 찼다. 눈알을 뽑고 싶었다. 손가락은 물론 손발이 뽑혀 없어질 것마냥 오그라 들었다. 차라리 보낸 것뿐이었으면 말을 안 한다. 케이지가 답장이 없었으면 읽고 무시했겠지 싶었다. 그러나,


[♡쿠로오씨♡나중에 봐요♡] - 02:07


딱, 죽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 떨리게 불어오기 시작하는 후폭풍을. 차마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





호텔에서부터 집까지 곧장 택시를 타고 오니 2천엔이 훌쩍 넘어 있었다. 잔돈이랄 것도 없이 기사에게 3천엔을 쥐어주고 공동주택 계단을 뛰쳐 올라갔다. 다급한 나머지 손이 자꾸 뒤엉켜 열쇠 구멍에 열쇠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을 헛손질하다 문을 두드려야 하나 싶어 열쇠를 주머니에 구겨 넣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솔솔 풍겼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케이지는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눈으로, 입으로, 표정으로 내 몰골을 훑어 내렸다. 미간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뭘 멀뚱멀뚱 서 있어요? 안 들어오고.”


이 녀석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음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뼛쭈뼛 집 안에 들어선 나는 멀어져가는 케이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 보기만 하며 구두도 제대로 벗지 못했다. 가시 방석 위에 앉은 것도 아닌, 가시 방석을 밟고 서 있는 기분. 

현관에서 곧장 집안의 구조가 훤히 보일만큼 손바닥만한 원룸은 우리의 어설픈 보금자리였다. 오늘따라 집안의 모든 가구가 새롭게 보였다.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입은 본드라도 처바른 것 마냥 딱 붙어 떨어지질 않고 발걸음은 바위를 얹은 것처럼 묵직하기만 했다. 겨우 몇 마디면 되는 거였는데. 미안하다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그 따위로 연락한 뒤 마음대로 외박해서 미안하다고. 어제 회식이 너무 길어져서 그랬다고, 진짜 별 일 없었다고, 너가 생각하는 그런 일 절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그만이었는데. 


“미안. 미안해, 정말…….”


정작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오는 말은 미안하단 말의 연속이었다. 작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에 뒤이어 퍽, 하고 칼이 도마를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뭔가를 썰고 있는 듯 했지만 내가 듣기엔 그저,


“잘못 했어. 정말, 정말이야…….”


나를 향한 질타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구둣발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가요?”

“미안…잘못했어.”

“뭐가 미안한데요. 뭘 잘못했단 건데요.”

“그, 그…….”

“설명을 제대로 해야 알아 처먹죠.”


낭패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화가 돋아나 있던 케이지는 내 쪽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허겁지겁 구두를 벗어 던지고 욕실 문 바로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양 팔도 주먹을 말아쥔 채 귀 옆에 딱 붙였다. 


“……뭐하십니까? 시위하세요?”

“술 먹고 연락 안 해서 미안. 기껏 연락한다는 게 그 모양이어서 미안. 말 없이 외박해서 미안.”

“…….”

“잘못했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칼 소리가 다시 났다. 규칙적으로 도마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뭔가를 썰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팔은 내리지 않았다. 몇 분 앉아 있었다고, 벌써부터 다리가 슬슬 저리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던 부엌 쪽에서 물소리가 났다. 손을 씻는 모양이었다. 젖은 손을 탁탁 털며 앞치마에 닦고 이 쪽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눈앞에, 케이지의 정갈한 발가락들이 보였다. 


“그게 반성하는 태도입니까?”


미안한 건 맞는데. 잘못한 것도 맞는데. 그래서 이렇게 벌까지 서고 있는 건데. 오늘따라 내 진심을 몰라주는 케이지가 조금은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한 건 나였고, 내가 싹싹 비는 게 맞았다. 거기에 케이지가 만족하지 못 한다면 만족할 때까지 용서를 빌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해야 케이지 마음이 풀릴까. 내 머리를 오롯이 채우고 있는 건 오직 그 뿐이었다. 

순간, 시야가 환히 밝아졌다. 케이지가 나와 눈을 가까이 맞춘 채, 내 와이셔츠 카라를 잡아 당겼던 것이다. 


“이딴 걸 묻힌 그대로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면. 이 엿같은 기분이 잘도 풀리겠네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반박하려던 나는 케이지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옷자락으로 더듬더듬 시선을 내리며 석고상마냥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건…아니야. 아니야. 케이지, 나 진짜 니가 생각하는 그런 짓 안 했어! 아니야. 오해라고!”

“좋겠네요, 쿠로오씨는. 여자들이 알아서 달려 들고 놀아주고 그 증거로 옷에 입술 자국까지 찐하게 남겨주고.”

“아니라니까!”

“나한테는 무슨 정신으로 연락한 겁니까? 여자들하고 히히덕거리면서 놀기 바쁠 시간에 어떻게 내 생각을 하셨대? 차라리 연락하질 말지. 괜히 기대해서. 괜히 여지를 남겨서. 그 쪽 기다리다 꼬박 밤새버린 나는…….”

“케이지…….”

“문 열자마자 보이던 이 꼬라지. 이거 보자마자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진짜 아니야. 나는 그냥, 그냥 눈 떠보니까 호텔이었고……. 자기들 멋대로 들러붙은 여자들이 있었고……. 진짜 네가 오해 할 만한 짓 하나도 안 했는데!”


붙들린 와이셔츠가 힘없이 놓여졌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케이지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날 내려 봤다. 


“호텔? 진짜 가지가지하시네요. 됐고, 더 얘기할 가치도 없을 거 같으니까-”

“아냐…아니야.”

“나가요. 여기서 나가.”

“케이지!”

“꼴도 보기 싫다고요!”


그 떄, 정겨운 벨소리가 들렸다. 열이 뻗쳤는지 머리를 쓸어 넘기던 아카아시는 원룸이 떠나가라 울리는 벨소리에 나와 전화 쪽을 번갈아보다 작게 한숨을 쉬며 발길을 돌렸다. 


“…네. 오랜만이네요. ……네, 있어요. 안 그래도 방금 오셨어요. ………… 네? ……아, 회사 회식 끝나자마자 쿠로오씨랑 선배, 리에프, 앨리스 양이 따로……. 네. 아아, 그렇게 된 거 였나요. ……네, 안 그래도 뭔가 오해를 해서……. 네. 알겠습니다. ……아뇨, 저야말로 연락 주셔서 감사하죠. …네. 잘 지내시고, 쿠로오씨께도 말씀 전해드릴 게요. ……네,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붙들고 처음엔 냉랭하게 말을 잇던 케이지의 어조가 눈에 띄게 누그러져 가고 있었다. 한참의 통화 끝에 수화기를 놓은 케이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건 버릇이었다. 자기가 잘못했거나 미안해졌을 때 무심코 물어 뜯어버리는 입술. 양복 주머니가 부르르 짧게 떨렸다. 내 짐작이 맞다면, 문자를 남긴 상대는 야쿠일 게 분명했고 아마 문자 내용은


[야. 이 몸이 사태 수습해 줬으니까 나중에 한 턱 쏴라.]


따위의 것이리라. 눈치 빠른 친구 하나 둔 덕에 일생일대의 위기가 마치 과거의 한 때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 케이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괜한 마음에 양 팔을 더욱 높이 들었고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자 케이지가 쭈뼛쭈뼛거리며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뻔히 보였다. 


“마, 말했지? 나 정말 그런 짓 안 했다고.”


약간 더듬더듬 말했지만 괜찮은 느낌이었다. 한층 부드러워진 공기가 나와 케이지 사이를 감쌌고 케이지는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더니 내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오,오야오야? 자기가 미안해지니까 아예 대낮부터 유혹하는 거야?”

“전혀 아니거든요.”

“……칫.”

“아직 완전히 용서한 거 아니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단추가 전부 풀린 와이셔츠 틈으로 서늘한 입김이 불어 들어왔다. 케이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몸을 빤히 쳐다 봤고 


“……누구누구씨 립스틱 묻은 와이셔츠 따위, 절대 내 손으로 안 빨아 줄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알아서 할게.”

“미워 죽겠어.”

“고마워, 케이지.”

“뭐가 고마워요. 나 아직 화 안 풀렸다니까요?”

“그런 점도 귀여워 죽겠다니까.”

“어쭈. 팔 자꾸 내려갑니다? 오늘 벌이에요. 저녁까지 자세 흐트러지지 말고 딱 그러고 있어요.”

“뭐? 야! 케이지!”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케이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봐야만 했다. 그래도, 케이지의 귓불은 흡사 단풍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월간 쿠로아카

*주제: 봄
*아카아시가 모브와 결혼했습니다. 





W. 멜




"여길 팡팡 두드리면 안 망가져요."


아이의 조언을 따라 남자는 모래의 둔덕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들긴다. 손바닥엔 부드러운 모랫결이, 손톱 사이사이엔 까끌거리는 모래알이 스며들어 있었다. 놀이터 모래 사장 한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남자는 제 맞은 편에서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자갈을 줍고 있는 꼬마를 힐끗 훔쳐봤다. 고사리만한 손이 제 것보다 더 큰 돌을 주워 품에 안았다. 개중엔 분홍빛 꽃잎이 안착한 돌멩이도 있었다. 우와아,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아이가 나즈막히 웃었다. 남자에게 자랑하듯 꽃잎이 스며든 돌을 흔들어 보이던 아이는 모래 둔덕 꼭대기에 그것을 얹었다. 남자는 멍한 눈으로 아이의 행동거지를 찬찬히 살폈다. 

말을 건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눈동자가 닮았으니까. 눈매가 닮았으니까. 누군가를 상기시키는 짙푸른 에메랄드빛의 녹안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뿐이었다. 목끝을 닿을듯 말듯한 아이의 머리칼은 옅은 갈색으로 물들어 바람결에 쉬이 흩어졌다. 오동통한 양 뺨은 젖살이 한웅큼이었고 짤막한 팔다리는 그야말로 다섯 살 난 아이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었다. 눈이 닮은 건. 눈매가 닮아 보이는 건. 고작 우연에 불과했으리라. 편협된 시각에 사로잡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했던 제 착각이었으리라. 

남자는 시선을 멀리 돌렸다. 땟국물이 눌어붙은 꾀죄죄한 배낭은 놀이터 바닥을 나뒹군지 오래였다. 언제나 제 한 쪽 어깨를 차지하고 있던 묵직한 카메라 가방은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뺨을 스치는 4월의 바람이 퍽 다정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 갔다. 청명한 푸르름을 띄던 하늘과 하얀 실같던 구름은 어느새 울긋불긋한 황혼녘으로 물들어, 마치 때깔 고운 단풍을 보는 듯했다. 남자는 카메라를 들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찰나를 위해 셔터를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몇 년 만에 찾은 고국은 산뜻한 봄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폐부 깊이 고향의 숨을 들이키던 남자가 시끌벅적한 도쿄 한복판이 아닌, 허허벌판에 가까운 사이타마현을 구태여 찾은 이유는


"이 근처에 살고 있단 소식을 들었으니까."


쿠로오는 피식, 힘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목 매달아봤자, 남는 건 희끄무레한 미련뿐인데도 말이다. 그가 몸을 일으킨다. 모래먼지가 흠뻑 묻은 손바닥을 탈탈 털어냈다.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하며 그를 올려다 본다. 


"꼬마야. 부모님은 언제쯤 오시니?"


체감은 한 시간 이상이 훌쩍 지난 것 같았지만 손목 시계의 분침은 아이를 만나 같이 놀아준 이후 고작 20분 즈음이 경과했음을 냉정히 알렸다. 오늘도 노숙하긴 싫은데 말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쿠로오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제 뒤편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와


"아빠!"


밝은 표정으로 아이가 뜀박질하는 소리와


"코지. 혼자서 심심하지 않았어요?"


낯익은 목소리가 귓구멍에 닿기 전까진 말이다. 쿠로오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초침이 이 순간만큼은 있는 대로 늦장을 부리는 듯했다. 마른 침이 식도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가 전신으로 느껴졌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몸을 수그리고 있던 인영이 눈에 익었다. 간질이는 바람결을 타고 코에 닿는 엷은 민트향. 짧게 구불거리는 칠흑빛 머리칼. 마주 보게 된 한 쌍의 청록. 거기엔,


"쿠로... 오씨?"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아카아시가 있었다. 





#





"코지는 저 쪽에서 잠깐만 더 놀고 있을래요? 아빠는 이 사람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아카아시는 제 곁에 머무르려는 아이를 간신히 달랬다. 쿠로오는 그네에 앉았다. 긴 다리가 그네 밑으로 질질 끌렸다. 그네를 지탱하고 있던 쇠사슬이 기분 나쁘게 끼익거렸다. 아카아시의 옷깃을 잡아 끌던 아이는 짤막한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의 친구에요?"


아이의 물음에 아카아시는 짧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네. 친구, 에요. 오래된 친구."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법한 그런 미약한 떨림을 섞으면서 말이다. 그러자 아이는 금세 웃었다. 


"응 알았어요. 코지는 저어기서 놀고 있을게요."


아이는 깡총거리며 멀어졌다. 멀어져 갔다고 해봤자 바로 몇 걸음 앞의 모래 사장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얼굴 전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아카아시는 그대로 그네에 주저앉았다. 


"몇 살이야?"

"이제 여섯살이요."


발은 땅끝에 붙인 채, 쿠로오가 그네를 살그머니 움직였다. 쇠사슬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조금씩 앞뒤로 움직일때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결에 와닿았다. 


"닮았더라. 너랑 저 꼬마."


나뭇가지마다 만개한 벚꽃들이 바람결을 타고 흩어졌다. 봄이란 계절만이 그려낼 수 있는 한 폭의 풍경화와 같았다. 


"일단은 자식이니까요."


신발 앞코가 모래밭에 쓸렸다. 얼룩처럼 묻은 흙먼지가 바스락거렸다. 쿠로오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눈 빼곤 전혀 아니었지만."


구태여 아카아시쪽을 돌아보진 않았다. 이제 쯤이면 눈을 마주쳐도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도 떨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쿠로오 자신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그네를 붙들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가 미세하게 떨렸다. 


"코지가 집사람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래요."


쿠로오는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면 아카아시는 몇 발자국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흙장난을 치고 있는 제 혈육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고작해야 몇 년.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의 시선 끝이 머무르는 자리는 완연하게 갈라져 있었다. 


"...여기 생활은 어때?"


목구멍 너머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쿠로오는 천천히 그네를 앞뒤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했다, 축하 자리에 못 가서 미안했다와 같은 식상한 말을 꺼내기엔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아요."


너무 늦었으니까. 

아이의 웃음 소리가 바람에 섞여 날아 들었다. 개구진 웃음 소리에 아카아시 또한 입꼬리를 살며시 말아 올린다. 


"집사람도 잘해주고 코지도 사랑스럽고 저도-..."


아카아시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메였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네의 쇠사슬이 맞부닥쳐 나는 끼익거리는 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쿠로오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방금 전까지 주홍빛 물감을 쏟아낸 듯 노을로 환히 빛나던 하늘은 밤의 어둠과 섞여 자색으로 물들어지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잖아요."


아카아시는 품에 안아든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한 손으로 쓸어 내렸다. 조그만 가방의 지퍼에는 '아카아시 코지' 라는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누군가에게 철없이 매달리던 시절도 있었고"


쿠로오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울다 지쳐 잠드는 밤이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던 때도 있었지만."


뒤이어 그의 입에서 픽, 하는 힘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눈 한 번 감았다 뜨고 지나갔을 찰나에 불과했더라고요."


아카아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눈살을 접었다. 고작해야 십대. 이런 식으로 웃을 수 있는 날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가 아니면, 그가 없는 자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붙잡아 주길 바랐고 매달려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뿐이었다. 


"나름대로 성장한 거죠."

"...그래."


언제까지나 제자리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며 울기만을 반복하는 어린애일 순 없었다. 쿠로오 테츠로란 이름으로 지독하게 번져 있던 색지는. 한 번 물들면 다시는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종잇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주 느리게, 색을 잃어갔다. 그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진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 쪽은 어때요? 이곳 저곳 여행 다닌다 들었는데."


아팠던 얼룩은 차츰 옅어지고,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어. 안 그래도 내일 출국이야."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생각보다... 빨리 출발하네요."


아쉬운 기색이 묻어나는 아카아시의 대답에 쿠로오의 광대가 기분 좋게 씰룩거렸다. 마음 한 구석에 뭉쳐 놓았던 응어리를 훌훌 털어내듯 다시금 그네를 힘차게 앞뒤로 밀어내기 시작한 쿠로오는 보랏빛을 띠는 밤하늘을 향해 다리를 쭉 뻗어 올리며 말했다. 


"여기는 말이야. 봄바람이나 쐴 겸 잠시 들린 거야."


그네가 힘있게 움직이자 바람결이 일렁거렸다. 이미 놀이터 바닥에 착 가라앉은 옅은 핑크빛의 꽃잎들이 그가 일으킨 바람을 타고 살그머니 나풀거렸다. 


"쭉 여행하다 보니까, 문득 봄이 보고 싶어졌어. 날짜 감각을 잊고 살았는데 때마침 벚꽃이 필 무렵인 거 같아 부랴부랴 온 거지. 여기처럼 봄이란 계절이 선명한 나라는 전세계에 몇 군데 없으니까."

"......."

"딱 좋을 때 온 것 같아. 벚꽃은 활짝 피어서 흩날리고 있고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드디어 고향에 왔구나란 그리운 느낌도 나고. 그리고-"


너를 볼 수 있었고.

쿠로오는 뒷말을 삼켰다. 힘차게 앞뒤로 움직이던 그네에서 엉덩이를 떼자 공중으로 솟아오른 감각에 전신을 지배당한 쿠로오였다. 안정적인 착지에 뒤이어 기지개 켜듯 손깍지를 껴고 팔을 쭉 밀어냈다. 기분 좋은 스트레칭 이후 그 근방을 굴러다니던 배낭을 등에 메고 카메라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친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염치 없는 부탁해도 되냐?"


아이의 깔깔대는 웃음이 아카아시에게 전염되고 그 전염된 웃음이 쿠로오에게 이어지듯, 바람결 아래에서 활짝 핀 벚꽃마냥 웃어버린 쿠로오는 그제서야 아카아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아- 예나 지금이나, 그 속으로 깊게 빨려 들 것 같은 에메랄드 한 쌍이었다. 


"안 부탁하면 되겠네요."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웃음에 심장이 놀란 건 아카아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허전했던 벚꽃나무 아래의 풍경이 쿠로오 테츠로란 이름 하나로 완성되고 말았다.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그림. 자기 자신마저도 그 틈에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오야오야? 딱딱하게 말고~ 앞으로 몇 년은 못 볼 얼굴인데~"


아예 허리에 손까지 짚으며 그의 주특기와 다름 없는 능글맞음을 시전하자, 아카아시는 고개부터 돌렸다. 부탁도 부탁이지만 저런 미소는 반칙이었다. 저물어가는 햇빛을 뒤로해 역광이 그의 등뒤로 쏟아지고 있었다. 맨 눈으로 바라보기엔 쿠로오가 지나치게 밝았던 것이다.


"...뭔데요."


아카아시는 애꿎은 쇠사슬을 꾹 쥐며 물었다. 아이가 잘 놀고 있나 봐야했지만, 어째선지 눈에 차지 않았다. 쿠로오 때문임이 분명했다. 뭉클한 기분이 머릿속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이상 쿠로오를 보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아 아카아시 또한 그네를 박차고 일어나면


"나... 배고파서 죽을 거 같거든."

"네?"

"너네 집에서 밥 한 끼만 얻어 먹자."


하는 쿠로오의 어이없는 대꾸와 함께 천둥 소리와 맞먹는 우렁찬 울림이 아카아시의 고막을 꿰뚫었다. 허. 삽시간에 얼굴을 굳힌 아카아시는 나름대로 애절한 빛을 보내던 쿠로오를 무시하며 홱 몸을 돌렸다. 한 손안에 유치원 가방과 장바구니를 잡아든 채 말이다. 

코지-, 낮은 부름이 아이에게 닿았다. 멀리서도 귀를 쫑긋거리던 아이는 모래 묻은 얼굴과 손을 털어낼 생각 없이 제 친부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아카아시는 제 품으로 달려오는 아이를 살그머니 안아 들었다. 아이의 뺨에 덕지덕지 묻은 흙먼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래. 기왕이면 주먹밥이 좋겠다. 네 특기였잖아."


아빠?

이번엔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뺨을 쓸어내리던 손이 삽시간에 얼어 붙은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케이지가 만든 주먹밥은 언제나 최고라니까. 잘 먹겠습니다~

이거... 나들이 가서 먹으려고 새벽부터 준비한 건데. 

왜? 어차피 뱃속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나중에 배고프다고 칭얼대지 마세요, 쿠로오씨. 

또 그런다, 또. 테츠로씨~ 이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

...입 다무세요. 콱 꼬매버리는 수가 있어요. 

아하하, 케이지 귀 빨개졌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희끄무레한 기억의 단편은 가슴 한 구석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항상 그랬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 반찬을 만들고 있으면 쥐죽은 듯 제 뒤편으로 다가오는 쿠로오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고, 아무렇지 않게 주먹밥을 집어 먹는 그에게 퉁명 섞인 핀잔을 던지고, 능숙하게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얼굴을 붉히고. 그 마지막은 언제나 뺨에 닿아 오는 말랑한 감촉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쿠로오는 고개를 떨궜다. 애초부터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짐작하곤 있었다. 다만, 


"역시 무리에요."


바늘 구멍만한 기대를 걸었을 뿐이다. 얼굴에 철판 수십 개를 깔아도 할 말이 없지. 쿠로오는 그리 생각하며 제 머리 뒤쪽으로 팔베개를 벴다. 하늘이 어두침침하게 변모하고 있었다. 짙은 어둠에 잠식되고 있었다. 


"...응."

"......."

"괜찮아."

"......."

"나야말로 미안. 갑자기 이상한 부탁해서."


갈 길이 멀었다. 신칸센 막차가 언제였더라. 설마 벌써 끊기진 않았겠지. 저녁은 역전에서 도시락으로 대충 떼우고. 머릿속으로 다음 여정을 구상하던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쿠로오씨."


아주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응."


기다렸다는 듯 되돌아오는 대답에 또다시 뭉클한 기분이 가슴팍에서부터 꿀렁꿀렁 차올랐다. 목울대가 파르르 떨렸다.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 때 했던 말."


목이 메였는지,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반쯤 벌어진 입이 금붕어마냥 작게 달싹거렸다. 품에 안긴 아이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다, 고사리만한 손바닥을 뻗었다. 옷깃을 꼬옥 붙들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제 아비를 곁에 붙들어 매듯.

쿠로오와 재회한 이후로 줄곧 구름 위를 서성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던 아카아시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을 쏙 빼닮은 녹안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종일 요동치며 넘실거리던 마음이 차츰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 말이에요."


떨리지 않았다. 눈물이 터져나오지도 않았다. 감사의 뜻으로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길 때면


"후회 안 해."


한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후회하지 않는다ㅡ. 아카아시는 쓰게 웃었다. 슬프면서도 기쁜. 잔잔한 파동이 일듯 폐부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미미한 통증. 그 때 마무리 짓지 못했던 마음을, 이제는 확실히 매듭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옷깃을 붙든 조막만한 손에 힘이 실렸다. 


"울지 말아요, 아빠."


고작 여섯살 난 아들의 입에서 듣게 된 위로는. 


"안 울어요, 아빠는."

"그치만. 그치만 아빠... 눈이 엉엉 울고 있는걸."


상상이상으로 가슴 아팠다. 괜찮다는 말만 앵무새마냥 반복하며,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며 아카아시는 입을 열었다. 제 뒤에서 자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쿠로오를 향해 말이다. 


"저도 후회하지 않아요."

"......."

"이 쪽을 돌아보지 않는 당신을 일방적으로 쫓아가 매달리고 구차하게 애걸복걸했던 거."

"......."

"만약 그 때의 당신이 날 붙잡았다면. 나는 지금의 집사람도, 코지도 만나지 못했을테니까. 다른 의미로 불행했을 거에요."

"......."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나에게 또다른 삶의 의미를 안겨준 코지에게 감사해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췄고, 하늘 위에 주홍빛으로 남아 있던 노을의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뿐이에요."


봄이 불어내는 밤의 숨결은 아직 쌀쌀했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벚꽃잎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아이는 추위를 느꼈는지 아비의 품 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아카아시는 뒤로 돌아섰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웃었다. 미련 한 방울 남지 않은 말간 웃음을 얼굴 전체에 완연하게 묻어내며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리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행복해지세요, 쿠로오씨."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즈닥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아스라이 무너져 내려 가는 기억 속 어딘가, 딱 한 번 '집'을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 목숨과 맞바꾸어도 모자라지 않을 그 '집'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며 도망친 적이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지긋지긋한 성가대의 화음, 숨통을 조여오는 웅장한 오르간 음, 추를 발목에 달아 놓은 듯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 그 모든 것들에 진절머리라도 났던 걸까. 짧고 뭉툭한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머지 않은 곳에 날 낳아준 어머니가, 보듬어준 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댔다. 눈 앞이 노오랗게 변해갈수록 양 무릎에 힘이 쭉 풀릴수록 오히려 고집을 부렸다. 이까짓 거 하나도 안 아프다고, 아직 한ㅡ참은 더 뛸 수 있다고, 반드시 부모님을 찾아 갈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고작 여덟살이었다. 교회를 뛰쳐 나온지 한 시간도 채 안되어 길을 잃었고, 뼈에 사무치는 추위에 파르르 몸을 떨었으며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고독감에 길거리 한 가운데서 큰 소리로 엉엉 울부짖어야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르는 사제님의 품 속이었고 나는 다시금 교회로 돌아가는 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교회를 나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곳이야말로 내 삶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 어린 나이에 자각해 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런 내가,

"사제님이 그 분을 무척, 무척 좋아하시는 게 뻔히 보인다는 말이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내가 그 쿠로오씨를?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라며 등짝을 세게 내리칠 뻔했다. 내 어딜 봐서, 그 판단 기준이 뭐길래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인다는 둥의 헛소리를 지껄이냐며 언성이 높아질 뻔했다. 나에 대해선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그럴듯한 말대답을 늘어 놓을 뻔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한 주제에, 내 발은 이미 허공을 내딛고 있었다. 모르고 있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나보다. 깨닫지 못하고 칠칠치 못하고 둔해 빠져있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나보다. 아이의 조그만 등짝을 내리쳐야 했을 손으로 구불거리는 머릿결을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그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발길을 서둘렀다. 그토록 쑤셔대고 돌덩이가 내리 앉은 듯 묵직하던 사타구니 부근이 이때만큼은 한 줌의 깃털과도 같았다. 오히려, 아픔을 느끼고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교회를 박차고 나간 건 두 번째였다. 심지어 미사 도중에 뛰쳐 나간 건 다시, 난생 처음이었다. 개미 지옥을 연상케하는 인파를 헤쳐 나갔다. 신부님, 아카아시 신부님, 거미줄처럼 잡아 당기는 손바닥을 처음으로 힘껏 뿌리쳤다. 일일이 죄송하다 말할 겨를도 없었다. 두텁게 닫혀 있던 교회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고, 끼릭끼릭거리는 기분 나쁜 경첩 소리를 내며 그 틈을 살그머니 내보였다.
문 틈 너머에선 빗내음이 났다. 자유롭게 낙하하는 빗방울들이 조화를 이뤘다. 바닥에서부터 물방울이 튕겨나는 소리들이 마치 소프라노와 알토의 합창마냥 알록달록거렸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달콤쌉싸름한 한 편의 영화처럼 내 눈 앞을 선명하게 아른거렸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그'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 본능적으로 시선을 꽂았다. 늘상 팔짱기고 등붙인 채 기대어 서있던 벽의 한 켠, 땡볕 아래 쭈그려 앉아 고해성사의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껌을 짝짝 씹어대던 교회 앞마당, 제 안방마냥 떡하니 주차해두던 주차장 구석 자리. 그러나,

"쿠로오씨..."

꽃. 버리지 말 걸 그랬다. 꽤 예쁜 색이었는데. 비닐 포장을 풀고 가지런히 모아서 화병에라도 꽂아 두었다면. 꼭 그럴듯한 화병이 아니더라도, 초라한 우유병 하나쯤 빡빡하게 씻어내 하다못해 수돗물이라도 담아 두었다면. 꽃다발을 건네면서 툴툴대는 입과 벌겋게 물든 귓불을 좀 더 눈여겨 봤다면. 코끝에 화악하고 와닿는 달큰한 향과 쿠로오씨의 서툰, 그러나 막무가내인 그 감정을 제대로 마주했다면. 주님이란 방어벽으로 똘똘 뭉친 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선의로 가장된 이기를 내뱉지 않았다면.

"이게 끝이에요?"

해준 게 없는데. 말한 것도 없는데. 싫다고만 했을 뿐인데. 가라고, 가버리라고, 그렇게 당신을 내친 기억뿐인데.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감정에 죄악감마저 옥죄어 오는데. 당신을 모질게 밀쳐내는 것만이 최선이라 믿고 있던 나 자신이 이토록 싫어지는데.
이럴 때면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의 히로인이라도 된 것 같다. 언제까지고 웃을 수 있는 해피엔딩이 돌아 오지 않는, 슬픔과 후회의 세계에서 시뻘건 피를 토하도록 애걸복걸해도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영화의 히로인 말이다.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느 옛날, 뭣도 모르고 교회를 뛰쳐나와 길을 잃고는 목놓아 울어 버렸던 어느 꼬마 아이가 생각났다. 왜일까. 쿠로오씨는 내 부모도 아니고 내 집도 아니고 하물며 내가 돌아가야 할 곳조차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그 의문에 답하기도 전,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너머에서 사람의 인영을 보았다. 보았던 것 같다. 정확히 사람이었는지는 모른다. 나무 그림자를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 한 가닥을 놓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아른거리는 저 인영은 분명 당신일 거라고, 쿠로오씨가 맞을 거라고, 그가 아닐 리 없다고, '잘 있어' 그 말이 끝이었을 리 없다고, 이번에야말로 '보고 싶었어' 라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짓고는 사랑스럽게 입맞추어 주리라고 말이다.
시큰거리는 음부의 고통을 간신히 인내하며 빗 속을 내달렸다. 온 몸에 흩뿌려지는 빗줄기가 채찍과도 같았다. 방금전까진 한 편의 영화같던 그것들을 직접 마주하니 볼을 썰어내리는 시퍼런 칼날과도 다름 없었다. 눈을 찌르는 장대비를 헤쳐나가고 있으면 흐릿한 인영은 점점 선명해지고 문득 그것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실감해야만 했다. 쿠로오씨! 라며 입을 크게 뻐끔거리자, 빗줄기가 입안으로 들이쳤다. 축축한 습기가 옷에 배여들었고 다리는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차츰 무거워져 갔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달린 탓에 가까스로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사람 그림자와 같은 것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쿠로오씨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는데, 키는 나보다 한 뼘쯤 작았으며 광대는 익살스러우리만큼 툭 튀어 나왔고 어깨 또한 비좁았으며 짧게 깎은 머리칼이 적갈색이었다. 우산을 깊이 눌러 쓰고 있었음에도 그 머리카락 끝과 바짓단은 축축한 빛을 띈지 오래였으니 바깥에 서 있던 시간이 짧지 않은 듯 하였다. 나를 피해 도망다니는 듯한 그의 어깨를 거세게 붙잡아 내 쪽으로 돌려 세웠을 때, 어딘지 익숙하단 느낌을 받았다. 특유의 어리버리한 표정과 축 처진 눈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 나는 입을 벌렸다.

"쿠로오씨를 모시는 분이죠."
"......"
"쿠로오씨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죠."

언젠가 쿠로오씨 뒤를 졸졸 쫓아 다니던 사람을 본 기억이 있다. 약간 어리버리한 듯한 인상을 갖고 있던 그는 틈만 나면 쿠로오씨에게 핀잔을 받곤 했다. 쿠로오씨가 낮게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진귀해 무의식 중에 그 모습만을 빤히 들여다 보던 나 자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깨닫고 보면 이토록, 이토록 그의 그림자만을 좇고 있었음에도.

"죄, 죄송합니다. 사람 잘못, 잘못 보셨어요."
"나 급해요. 그 사람 봐야 해요. 할 말이 있어요. 못 건넨 말이 있다구요. 말해야 해요. 전화... 전화 번호를 몰라요. 찾아 가고 싶어도 사는 곳도 몰라요. 나이조차도 몰라요. 쿠로오 테츠로. 그 이름 하나 말고 아는 게 없어요. 너무 늦었는지도 몰라요.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쿠로오씨는 코웃음치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내가 그 사람에게 한 짓거리들을 생각해보면! 이럴 염치 없다는 거 아는데. 이제와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어요. 말하고 싶어요. 쿠로오씨 얼굴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 하지만..."
"부탁이에요. 이렇게 부탁드려요, 오오야마씨."

그는 당혹스런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꼭 붙든 손은 시퍼렇게 질려 사시나무마냥 벌벌 떨리고 있었지만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해 떨어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빗물은 의외로 싸늘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이대로는 간신히 가라앉은 몸살이 확 도져버리진 않을까. 엎친데 덮친격으로 독감까지 올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 없었다. 당장 쿠로오씨를 볼 수만 있다면, 그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찬스가 주어진다면, 지옥 불구덩이든 가시밭길이든 이 몸 하나 불싸질러 가며 어디든 덤벼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지 않은 침묵은 빗소리로 얼룩져 갔다. 오오야마씨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내저으려 하려다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내 안색을 살피더니 인상을 확 굳히시며 얼른 갑시다, 라고 짧게 답해주셨다. 빗소리가 창밖으로 똑똑 떨어지는 아늑한 차안에 들어서자 본격적인 으슬거림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움츠러든 몸을 감싸는 팔의 본능적인 움직임은 보온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미 젖어버린 머리칼과 옷차림은 미지근한 체온마저 빼앗아 열 기운을 북돋았다. 그 와중에도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운이 차시트를 흠뻑 적시는 것 같아 미안함에 가벼운 목례를 하면 벌써 시동을 걸고 기어를 움직이던 오오야마씨는 제 두툼한 파카를 벗어 내 무릎 위에 얹어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얼어 붙은 입을 움직이면

"감사할 거 없어요. 그 쪽이 비에 쫄딱 젖어서 앓아 눕기라도 하는 날엔, 적어도 세 번은 황천길 구경 할테니까요."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차는 미끄럽게, 조금은 거칠게 도로를 빠져 나갔다. 뜨끈한 난방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몸 안은 이미 얼음장과 같았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열로 핑핑 도는 머릿속은 눈꺼풀을 감으라 명령하고 있었지만 그랬다간 정신마저 잃을 것 같았다. 멍해져 가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오오야마씨."
"네?"
"전화 좀 빌려도 될까요."
"형님께 하실 거라면 추천하진 않습니다. 요즘 저기압이세요. 전화 받으면 쌍욕부터 들으실 걸요?"
"상관 없어요."

두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순 없었으니까.
처음엔 전화가 끊겼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는 것마저 무색할 정도로 단호하게 끊겼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러다 휴대폰 전원을 꺼버리는 건 아닐까 슬슬 걱정이 들 무렵,

[싯팔 새끼야.]

쌍욕이 들렸다.

[건드리지 말라 했지, 이 개새끼야. 비 오는데 먼지나게 쳐맞고 싶어?]
"......."
[이것 봐라. 아가리 꽉 다물고는 대답 안 해? 근무지 이전시켜주자마자 이 모양 이 꼴이다 이거지, 좆같은 게. 교육 한 번 피터지게 해봐야 대가리를 똑바로 차리지, 어?]

거침 없는 욕지꺼리였다. 내가 여지껏 듣도보도 못한 싸늘한 저음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쿠로오씨."

목이 메였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였다. 보고 싶은 사람의,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쿠로오씨였다.
내 대답 이후로 정적이 길어지자, 혹시 전화가 끊긴 건 아닐까 싶어 재빨리 말을 꺼냈다.

"통화 끊지 말아요."
['...야, 카네키. 나 싸대기 좀 때려봐.'
'예, 예?'
'좀 때려보라고!!!'
'예!!'
'더 세게!!'
'예!!!'
'시이이팔! 존나게 세게 때렸잖아, 이 개호로 새끼!! 드럽게 아프네. 꿈 아니야? 어이. 거기 전화 받은 형씨. 그쪽 목소리가 내가 아는 누구씨랑 참 비슷한데.']

건너편에서 살벌하게 들려 오는 찰싹거리는 소음에 문득 웃음이 터질 뻔했다면 농담처럼 들릴까.

"누구씨가 누군데요."
[있어. 나 같은 거 싫다고 도망다니고 피해다니고 가라 그러고 딴따라 길만 걷겠다고 한 멍청한 인간. 사람 마음 잔인하게 짓밟아 버린 인간. 그런 못돼처먹은 인간 하나 있어.]
"그 사람 정말 나쁘네요. 쓰레기라 불러도 되겠어요."
[하하하하, 그 쪽이 말하니까 콩트같잖아. 내가 그 쪽 놀음에 놀아난 멍청한 새끼야? 네 장난감이었어? 아주 사람 좆만하게 보지? 사람 마음 그만 휘저어. 그만 괴롭혀. 간신히 다 잡은 마음 흔들리게 하지말고.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한 번만 더 이딴 짓하면 나도 나 감당 못ㅡ.]
"흔들려줘요."
[...뭐?]
"참지 말아줘요. 감당하지 말아줘요."

창 밖으로 빗줄기가 흘러 내렸다. 비냄새가 났다. 쿠로오씨 냄새가 희끗희끗하게 섞여 나는 듯했다.

"나, 많이 생각했어요. 쿠로오씨가 그렇게 가버린 뒤로,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들어줘요, 쿠로오씨."
[......]
"내 처음은 언제나 주님 일 수 밖에 없었어요. 내 생의 시작과 지난 날의 모든 것이 그 분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그 분없는 삶을 상상하는 건 도저히, 도저히 불가능해요. 당신이 저의 두 번째, 혹은 세번째가 될지도 몰라요. 미사나 세례식같은 중요한 날은 같이 못 어울릴지도 몰라요. 그런 날은 얼굴 한 번 보는 것조차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될지, 데이트할 시간을 얼마나 낼 수 있을지 저도 확답을 못 드려요."
[.......]
"감정 표현도 서툴러요. 무조건적으로 남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법만 익혀서 당신이 오해할만 한 일을 자초할지도 몰라요. 연애 경험따위 단 한번도 없어서, 당신을 곤혹스럽게 할지도 몰라요. 눈치 없이 굴지도 몰라요. 기념일 이라던가, 생일 이라던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어요. 미리 알려줘요. 형제 자매분들에게 축복과 사랑을 공평하게 베푸는 방법만을 배우고 자라 이런 특별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무척, 무척 어려워할 거에요.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는 민폐를 끼칠지도 몰라요. 항상 일손이 부족한 크리스마스여서 당신이나 당신 주변 분들께 일을 시킬지도 몰라요. 평범한 연인들이 보낼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아닐거에요. 당신이 상상하는 그 어떤 것보다, 당신이 기대하는 그 어떤 연애보다, 못나고 초라하고 부족할 거에요."
[......]
"이런, 이런 나라도... 당신이 좋아해준다면 좋겠어요. 너무 늦어 버린 게 아니라면 좋겠어요. 제 생의 시작을 주님이 거두어주셨다면, 제 삶의 마지막은 당신의 곁이길 바라고 또 바라요. 아이를 못 낳아도 당신이 곁에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당신을 닮은 예쁜 아이를 입양하면 되니까요. 그 아이에게 세례를 내려주고, 아아, 축복을 내려줄 거에요. 사랑스러운 세례명을 지어줄거에요."
[.......]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리고
거짓말처럼
차가 멈춰섰다.
말을 똑바로 했던가, 전하고 싶은 마음은 제대로 전했던가, 어느새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통화에 방해가 되진 않았을까,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가, 쿠로오씨가 뭔가 대답하긴 했던가. 그런 걱정과 격정, 불안들이 한 번에 쓸려 나가버릴만큼 정신이 쏠리고 말았다. 차문이 거칠게 열리는가 싶더니 몸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며 무릎께를 덥히고 있던 파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귀에 바짝 붙이고 있던 휴대폰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즉,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이끌려 차밖으로 발을 디디게 된 것이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신히 말라붙은 볼자락 위로 다시금 빗물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춥지 않았다. 추위를 느낄 틈조차 없었다. 익숙한 체취와 그리운 품 속이 코끝에 닿아,

"좋아해, 아카아시."

안심해버린 눈가가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또다른 물줄기를 흘려 내보냈기 때문이리라. 갈비뼈가 으스러질만큼 거세게 끌어 안아주던 쿠로오씨로 인해, 앵무새마냥 좋아한다는 말만 귓가에 반복해주는 쿠로오씨로 인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아카아시. 잘가란 말 따위 하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이렇게 좋은데. 네가 좋은데. 사랑해. 사랑해, 케이지. 나만의 케이지. 사랑스런 나의 케이지. 사랑하고 또 사랑해."

나는 다시 한 번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목끝까지 벅차오르는 이 환희와 기쁨과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뭐든 할게. 네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을게. 너에게 있어 내가 두 번째여도 좋아. 세 번째여도 좋아. 다만 네 마지막만은 내가 가질 수 있게끔 해줘. 네 곁에 있게 해줘. 네 감정 표현이 서툴다면 내가 네 몫만큼 좋아한다 말할게. 귀에 딱지 앉도록 사랑한다 말할게. 그만하라 해도 계속 말할게. 뽀뽀도, 키스도, 그 이상의 것들도 하나하나씩 매일같이 해줄게. 이 지긋지긋한 일에서 손을 씻든, 입에 달고 사는 욕설을 끊는 거든, 네가 싫어하는 담배를 그만 두는 거든, 뭐든 할게. 뭐든 할테니까ㅡ."
"사랑해요."

서툴지만 진심을 담은, 짧지만 솔직한 고백을 입에 담으며 그의 너른 어깨를 세게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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