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감사합니다, 형씨. 조심히 들어가십쇼!”

차임벨 소리가 맑게 울렸다. 살짝 밀어낸 목재 문이 작게 덜컹였다. 샴페인을 담은 길쭉한 쇼핑백이 남자의 손목을 타고 달랑달랑 흔들렸다.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온 추위가 뺨을 스쳐 지났다. 남자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따뜻한 가게 안에서 30분이 넘도록 진열장을 살펴만 보고 있었으니 한기가 제법 낯설 만했다. 가던 길을 잠깐 멈춘 남자는 목 언저리를 칭칭 감싸 둔 와인색 머플러를 매만졌다. 한파가 들어올 틈이 없도록 단단히 매듭짓자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했다.

먹먹한 겨울 하늘은 별 한 점 내보이지 않았다. 꼭 오래도록 들춰보지 않은 일기장 위로 쌓인 먼지더미 같았다. 올해도 눈 보긴 글렀네. 남자는 짧게 혀를 차곤 발걸음을 서둘렀다. 목에 두른 머플러는 구둣발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까지 막진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걷는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어디선가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느리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구세군’이라 쓰인 자선냄비 곁. 빨간색 점퍼를 입은 노인이 종을 흔들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인조적인 것인지 모를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종소리에 맞춰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번잡한 소음으로 가득 찬 거리 안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들리기란 쉽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났다. 무언가의 코스프레라도 한 것처럼 붉은색과 흰색으로 무장한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누볐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는 언젠가의 봄처럼 핑크빛을 띠진 않았다. 굵직한 뿌리에서부터 타고 올라 얇은 가지 끄트머리까지 꼼꼼히 감긴 전구는 무수한 빛의 무리를 뽐냈다. 꼭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또 교회나 성당 같은 것이 어딘가에 있었는지 성가대의 합창이 환청처럼 까마득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보기 좋게 눈살을 찌푸렸다. 탄식처럼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거리와 순진한 얼굴로 함박 웃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통신 수단을 꺼내 들었다. 소매 아래 감춰져 있던 맨손이 찬 공기에 닿아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급하게 나온다고 장갑을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자주 찾는 가게에서 좋은 술이 들어왔다며 오늘 안에 꼭 와달라는 연락만 없었어도, 그는 이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주말을 집구석에 틀어박혀 평범하게 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괜히 나왔어.”

그럴듯한 소리를 내자 얼어붙은 입김이 곧장 뿌옇게 흩어졌다. 머플러에 턱을 푹 내리꽂은 남자는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끌벅적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먼 전원 버튼만 눌렀다가 떼어냈다. 무채색의 바탕화면이 꺼졌다, 켜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규칙적으로 놓인 보도블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에 있을 오거리만 건너면 즐비한 주택가가 바로 코앞이었다. 

그 몇 분 사이 남자는 버튼을 누르는 기계적인 손동작에도 신물이 난 듯했다. 남자는 다른 관심사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뒤적였다. 몇 도쯤 올라간 주변 공기와는 전혀 다른 노래를 듣기 위해 음악 어플을 실행시키자 이번엔 이어폰이 없음을 깨달았다. 장갑과 함께 깜박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화면을 터치하는 손가락은 매 순간 느려졌다. 잔뜩 얼어붙은 손가락 끝과 터치스크린은 제 주인의 말을 들으려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턱턱 막히는 숨통을 환기시키려고 뒷목을 꺾었다. 

그 순간 마츠카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거리 한가운데, 매해 돌아오는 기념일마다 휘황찬란한 장식들을 감싸 안는 구상나무가 트리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채 넓은 아랫단에는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가 비치되었고 풍성한 잎사귀들 사이사이엔 가로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거대한 빛 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렸으며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은 끄트머리엔 사람 머리 만한 별 장식이 번쩍번쩍한 금빛을 발했다. 

그것이 안겨주는 웅장한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츠카와는 무의식 중에 휴대폰 카메라를 높이 들어 올렸다. 조잡스러운 셔터 음이 여러 번 났다. 만족할 만큼 찍었다 싶다가도 마츠카와는 그 아름다움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성탄절이니 캐롤이니 산타니 그에겐 전부 내키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트리만큼은 남다른 의미였을까. 

그림 같은 풍경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선 채 쳐다보고 있던 마츠카와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지 느릿느릿 발걸음을 뗐다. 오거리 맞은편 너머에 위치한 주택가 쪽이 아닌, 트리의 중심을 향해서. 

“여기, 빈자리인가요?”

한 사람 남짓 들어갈 법한 화단 턱을 가리키며 마츠카와가 물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좌우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무리는 빈자리와 마츠카와를 번갈아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엉덩이를 붙이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앉았다. 

마츠카와는 문득 김 빠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시끄러운 캐롤이나 성탄절을 알리는 종소리, 떼로 움직이는 산타클로스 무리를 보아도 꿈쩍도 않던 가슴이었다. 마냥 무덤덤하기 만할 줄 알았던 그것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감화라도 됐던 걸까. 트리를 본 이후부터 그의 가슴께는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뒤늦게 찾아온 감성적인 것이 시비조로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았다. 

“쓸데없이.”

왼쪽 가슴이 묘하게 욱신거렸다. 제법 큰 손은 코트 안을 파고들어 스웨터에 잔주름이 질 만큼 아픈 부위를 세게 틀어쥐었다. 

어라, 어째 코끝까지 찡했다. 위험신호였다. 안구 안 쪽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뜨끈한 기운이 차오를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마츠카와는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나머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빠르게 잠금 화면을 풀고 조금 전 찍었던 사진을 재차 확인하러 사진첩을 열었다. 

그런 날이 있다. 묘하게 잘 풀리지 않는 날. 악재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힘든 작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사람을 뒤흔들게 만드는 날은 꼭 있기 마련이다. 마음 편히 늘어지고 싶은 주말에 가게를 찾아달란 연락, 급하게 나온다고 챙기지 못한 장갑과 이어폰,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왔다는 한파, 유독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귀청을 울리는 소음, 그리고 지금. 

“허……. 이런 기능이 있었어?”

마츠카와에겐 오늘이 딱, 악재가 겹치는 날이었다. 

‘3년 전 오늘’이란 문구를 어색하게 만들 만큼 사진 속 마츠카와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칼, 와인색 머플러, 추위로 빨갛게 물든 콧방울. 

“내년엔 새해 운세 포기할까.” 

현재와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단 점이었다. 

“보나 마나 대흉(大凶) 찍혀 있을 거 같은데.”

사진 속 마츠카와의 옆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남자는 그와 똑같은 색의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꼭 지금처럼, 성대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웃고 있었다. 상큼한 미소를 활짝 지어 올리는 것이 일상처럼 능숙해 보이는 남자와 달리, 마츠카와는 미소를 지은 건지 안 지은 건지 모를 만큼 옅게 웃고 있었지만. 

“……미치겠네.”

꽉 움켜쥔 가슴팍은 조금 전보다 훨씬 괴로운 통증을 수반했다. 머릿속으로만 막연히 그리고 있던 얼굴을 사진이란 매개체로 다시 보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조심조심 손가락을 움직였다. 추위에 마비된 손끝이 딱딱한 화면을 더듬거렸다. 그의 엄지는 사진 속 남자의 초콜릿색 머리칼에서 좀처럼 떼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만지고 있으면 춥고 서늘한 감각이 언젠가는 결 좋은 머리카락 느낌으로 변하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올리며. 

활짝 휘어진 눈꼬리와 방긋 올라간 입술선, 진주빛 피부를 타고난 남자의 얼굴에게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선을 던지고 있었을까. 새하얀 알갱이가 액정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무언가의 알갱이는 평평한 화면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검지 손톱 만한 작은 것은 오이카와의 뺨에 몸을 내던지곤 언제 자신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흔적을 지워 없앴다. 

겨우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은 마치 느린 속도로 재생되는 영화 같았다. 초점을 잃은 멍청한 눈을 하고 있던 마츠카와가 퍼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무렵이었다. 그의 주변은 이상하리 만치 웅성거렸고 누군가의 외마디 말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눈이다!”

그 한 마디가 마츠카와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그를 꿈에서 일깨우듯 또 다른 눈송이가 그의 입술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따뜻한 입술에 맞닿은 눈은 그대로 형체를 잃었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만이 눈송이의 존재감을 알렸다. 

사방에서 감격에 겨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찰각대는 셔터 음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구나, 누군가가 지나가듯 외쳤다. 마츠카와는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마음 편히 늘어지고 싶은 주말에 가게를 찾아달란 연락, 급하게 나온다고 챙기지 못한 장갑과 이어폰,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왔다는 한파, 유독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귀청을 울리는 소음, 그리고 지금. 

성대하게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 우연처럼 마주한 빛바랜 기억의 낱장, 때맞춰 내리는 눈, 화이트 크리스마스. 

‘내년 크리스마스엔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신사 참배를 갔을 때 한껏 진지해진 옆얼굴로 손바닥을 맞대는 오이카와를 보며 의아해진 마츠카와가 먼저 말문을 꺼냈었다. 뭘 소원으로 빌었길래 그렇게 진지하냐고. 

사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성실한 답변을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시즌엔 더 잘하게 해달라던가, 좀 더 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해달라던가의 내용이겠거니 싶었다. 

그런 그였기에, 단순히 ‘내년 크리스마스엔 눈이 오면 좋겠다’고 답하던 오이카와를, 마츠카와는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오지 않았지.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그렇게나 손꼽아 기다리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보니, 정작 그의 곁엔 소원을 빈 당사자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너는. 일부러 뒷말을 숨겼겠지. ……나 혼자만 바보 만들어 놓고.”

마츠카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건 산타클로스가 보내주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미쳤다고 해도 좋고, 눈에 취해 감수성이 폭발한 거라 해도 좋고, 구질구질하다며 손가락질당해도 좋았다. 자신은 크리스마스의 마법에 걸렸다고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의 주문을 외웠다.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외운 번호를 꾹꾹 누르다 말고 잠시 실소를 터뜨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통화 연결 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의 당연한 물음을 듣는 순간 마츠카와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전화번호를 바꾼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자신을 기억했다면, 첫마디는 ‘여보세요?’가 아닌 오랜 침묵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겨우 전화 한 번 한 게 뭐 대수라고 성대가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오랜만이야.”

여보세요, 누구세요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던 수화기가 굳게 다물렸다.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이내라며 마츠카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 일은 아니고……. 여기, 눈 오거든.”

잘 지내냐를 차마 뱉지 못한 입이 딴 소리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잘 지내냐, 고 물었을 때 ‘잘 지낸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대로 말문이 턱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눈송이를 소록소록 날리는 하늘 너머 멀리 시선을 던졌다.

“너, 눈 좋아하잖아.”

한참의 침묵 끝에 오이카와는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랬었나.]

그마저도 냉정한 어조였다.  

“그랬어.”

[그래? 잘 됐네. 여기는 눈 안 와.]

마츠카와는 서글프게 웃었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끊어도 되는 거지?]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돼…….”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전화를 더 붙잡을 수 있는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대화가 좀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뾰족한 방도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금세 그칠 줄 알았던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얇게 퍼져 쌓인 눈송이처럼 그의 머릿속도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내 마츠카와는 입술을 달싹였다. 운세에 대흉이 나오든 두고두고 오늘을 후회하든 평생의 행복을 오늘과 맞바꾸어 다 반납하든 상관없으니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는 틈은 달라고. 눈을 쏟아뜨리는 하늘에게 빌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꺼진 통화만이 뚜, 뚜 소리를 반복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얇은 종잇장이 팔랑이며 넘어간다. 탁한 회색빛의 그것은 깨알 같은 활자들로 뒤덮여 있다. 콧대에서 살짝 미끄러진 금테의 둥근 안경을 쓸어 올린다. 일직선으로 피어오른 연기의 근원은 한 쪽으로 삐뚜룸하게 말려 올라간 입가다. 자주 애용하는 담배 향이 높지 않은 천장을 향해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신문의 정치 분야를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던 마츠카와는 맞은 편 벽을 향해 슬쩍 눈길을 준다. 1과 2 사이를 가리키고 있는 시침에 거짓은 없다. 고운 미간이 간격을 좁히고 잘 보고 있던 신문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접게 만든다. 피로에 지친 눈에게서 안경을 거둬내자 콧대에 알싸한 통증이 감돈다. 소파 깊숙이 달라붙어 있던 엉덩이를 떼자 내내 꼬고 있던 한 쪽 다리에서 경련이 인다. 쥐가 나 주춤거리는 것도 잠시, 각을 맞춰 접은 신문과 안경을 협탁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 둔다. 깍지 낀 손을 높이 올려 가벼운 기지개를 켜본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탓에 몸의 근육과 뼈, 관절들이 늘어지는 소리를 낸다. 수명이 다한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 벌겋게 부풀어 올랐을 콧대를 주무르고 있자 이번엔 반쯤 남긴 식은 커피가 시야에 들어온다. 따뜻했던 온기는 사라지고 향은 날아갔으며 원두의 쓴 맛과 맹물이 침전물처럼 남았을 그것. 머그잔 안 쪽에 눌러 붙은 커피 찌꺼기를 빤히 쳐다보다, 거리낌 없이 그것을 치워낸다. 


머그 잔은 두 개였다. 식은 커피 또한 두 개였다. 소파는 2인용이었고 방 안 곳곳엔 2인분의 생활용품들이 존재했다. 


그는 본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실 신문의 글자 따윈 눈에 차지도 않았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살피며 현관문이 열리기만을,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그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면 늦는다 연락이라도 하던가.”


머그컵 안 쪽에 눌러 붙은 누리끼리한 커피 찌꺼기를 빡빡 문지른다. 젖은 손을 털고 식기 세척기를 가동시킨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지쳤는지 마츠카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 이후, 그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를 안지 않으면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것도 인형이나 베개 같은 물건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를 끌어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다니. 신종 불면증인가 싶다가도 그의 머리칼이나 목덜미에서 풍기는 체취에 코를 박고 있으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드는 스스로가 있었다. 


아쉬운 대로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 식기 세척기가 돌아가는 사이 마츠카와는 거실의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 두 번째 칸을 눈으로 훑는다. 취미로 모은 클래식 음반이 벌써 한 줌에 다 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나 있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CD를 골라 중고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무렵

쿵. 


그의 모든 행동거지가 정지한다. 단순한 윗집 소음이라기엔 귓가에 생생히 와 닿았던 특유의 둔탁함.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워 소리의 근원지를 탐색하던 마츠카와는 정확히 두 번째, 현관문에 소리 나게 부딪히는 무언가를 향해 빠르게 발을 옮긴다. 


“으항~ 늦었찌~”


맨 처음은 코를 찌르다 못해 마비시킬 지경에 이른 술 냄새. 그 다음은 어깨를 가득 짓누르는 묵직함. 팔다리에 힘이 풀려 축 늘어진 거대한 인영. 


현관문을 당기자마자 제 품으로 풀썩 쓰러진 오이카와를 얼떨결에 안아 들게 된 마츠카와는 일순 그런 생각을 했다. 


“너…….”

“헤헤. 맛쯩 오래, 히끅, 기다려쪄?”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이미 자정을 넘겨버린 시각. 행여 옆집에 민폐가 된 건 아닌지 복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츠카와는 쥐죽은 듯 고요한 멘션 전방을 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물론,


“왜 늦었어.” 


오이카와 토오루 한정으론 전혀 안심하지 못했지만. 품에 안겨진 건 우연이었지만 마츠카와의 허리에 허벅다리를 두른 건 엄연한 고의였다. 내친김에 그의 목에 팔까지 두른 오이카와는 영락없는 고목나무 매미 꼴이었다. 정작 그를 내내 기다린 사람의 속에선 화르륵 불길이 일었지만 말이다. 


“왜 늦었냐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심상치 않다. 짤막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듯한 화를 애써 가라앉혀 본다. 


“수울……. 마셨어.”


어차피 상대는 고주망태였다. 투덜거려봤자 어디까지 알아먹을 지조차 미지수였다. 결국은 어깨를 크게 들썩일 만큼의 한숨을 내쉰다. 오이카와가 떨어지지 않게끔 엉덩이를 양 손으로 받쳐준다. 다행히 현관에서 침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우리 토오루, 주량이 얼마나 됐더라.”


말뜻을 이해 못했는지 정말 주량을 세어 보려던 건지 오이카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본다. 턱을 받치고 있던 검지가 금세 굽어진다. 눈살이 보기 좋게 휘어지고 푸흐흐, 웃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덜미에 힘껏 고개를 묻는다. 잇쎄이 냄새 조아아. 흡사 고양이처럼 애교가 가득 담긴 앙탈이 뒤를 잇는다. 


“내가 미친다 진짜.”


오이카와의 주량은 기껏해야 맥주 세 모금. 소위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취기가 오르는 타입이었다. 잘 취한다, 사실 거기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식을 하든 동창회를 가든 친구를 만나든 금세 취해 버리고 마는 이른바 ‘알코올 쓰레기’의 표본이 바로 그였으니 건강상으로든 미관상으로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문제는, 


“잇쎄이 여기. 수염 났다. 막, 까칠까칠해. 여기……. 뽀뽀하고 싶어. 할래.”


알코올만 들어갔다 하면 튀어 나오는 스킨십 본능이었다. 


턱을 타깃 삼아 폭격기마냥 쪽쪽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도 불구하고 마츠카와의 표정은 짙게 굳어 있다. 오이카와가 다니는 회사의 평판이나 대우나 복리 후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회식이라 이름 붙일 만한 자리도 일 년에 한 번 될까 말까한 정도의. 단지, 차마 술을 거절 못하는 오이카와가 그때마다 알코올을 들이 붓는 데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잔뜩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행방불명이 된 넥타이, 주름 진 정장 바지에서 시작해 발그레한 홍조, 누구에게든 달라붙지 못해 안달 난 몸짓, 평소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애교.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이 분통 난 속이 풀릴지. 음주로 무방비해진 오이카와를 상대했을, 혹은 슬쩍슬쩍 곁눈질 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었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버리는 자신이 옹졸하게 여겨지다가도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디에도 내보이고 싶지 않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고 저 혼자만이 감상하고 싶다는 끓어 넘치는 소유욕은 언제나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물론 이 치졸한 이성과 탐욕스런 감정의 대결은 늘 그렇듯 오이카와 토오루란 이름에서 비롯되었지만. 


“잠깐만, 잠깐만. 뽀뽀 됐어. 이제 충분해.”


턱 끝, 뺨, 콧망울, 이마, 그리고 입술로 진한 입맞춤을 날린 오이카와 덕에 마츠카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만두란 말에 잠시 시무룩한 얼굴을 한 오이카와지만 금세 기운을 차린다. 


“그러엄……. 잇쎄이도. 잇쎄이도 토오루 뽀뽀 해줘.”

“조금만 있다가. 착하지, 우리 여보?”

“지금 해줘어, 응?”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자각은 하고 있는지. 나직한 한숨을 뱉은 마츠카와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의 아래턱을 당긴다. 실크같이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이로 살짝 깨물자 기다렸다는 듯 말캉한 혀가 환대인사를 외친다. 진한 알코올 향과 간간이 기름진 튀김 맛이 난다. 담배 냄새 나. 반면 오이카와는 불평하듯 읊조린다. 덕분에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인지 오이카와는 조금씩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어댄다. 화는 이제 차후의 문제였다. 당장 시급한 사안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그의 이성이었다. 


“불편한 건 없어? 토할 거 같진 않고?”


이성이 뿌리 뽑혀 나갈 듯하다. 어금니로 입 안 쪽을 씹어댄 상태에서 입을 여니 저절로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대로 있다간 취한 사람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일지. 마츠카와는 식은땀이 비죽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뒤, 품에 안긴 제 연인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떨어지기 무섭게 오이카와가 어린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이 있는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면서 말이다. 


“아냐! 툐류 여기 시러. 누워 있기 시러!”

“잠시만. 꿀물 갖고 올게. 그대로 자면 속 버리니까.” 

“잇세이 가지 마, 응? 여기 있어. 여기! 툐류 옆에. 나 꼬옥 안아줘어.”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편이 빠를까. 전신의 혈액이 특정 지점으로 쏠리고 있는 걸 몸소 체감한 마츠카와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 절실하다. 


“……좀 봐줘라.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결국 항복 선언을 외친 건 마츠카와다. 점점 더 목청 높여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는 오이카와를 위해 스스로 협의 점을 찾은 것이다. 두 명이 눕기엔 약간 비좁은 싱글 침대. 마츠카와는 제 품으로 파고드는 오이카와의 뻗친 뒷머리를 조심히 어루만진다. 


“이제 됐어?”

“응.”

“술 깨면 난리 나겠네.”

“응…….”

“자는데 옷 안 불편해?”

“우웅…….”

“벗기면 벗겼다고 화낼 것 아냐.”

“맛층…….”

“아주 앉지도 못하게끔 혼쭐을 내놔야 해. 그래야 술의 ‘ㅅ’자도 안 꺼낼 테지.”

“사랑해.”

“……바-보. 얼른 자.”


만취한 제 연인을 마주 안은 마츠카와는 그 등을 보드랍게 쓸어내린다. 나도, 라는 짧은 중얼거림은 달빛과 함께 잘게 흩어진다. 유독 달이 밝은 밤이다. 


 







*동동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비정기적 연재 (내킬 때, 뽕 찰 때, 원고 탈주하고 싶을 때 이어 씁니다)

*꼭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엠프렉 소재








W. 멜




“잇세이.”


식탁 의자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있던 토오루가 말꼬리를 늘린다. 그의 앞에는 벌써 네 개 째 비워진 푸딩의 포장 용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려 특대 사이즈나 되는 그것들을 네 개나 비운 후에야 배가 불렀는지 일회용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던 토오루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다. 


“나 살 쪘어?”


이유라 함은 그것이었다. 


“빠빠, 빠빠 뿌우딩.”


이번 달 들어 벌써 생후 21개월 차가 된 아카네는 어느 덧 단어와 단어를 이어 붙여 어눌하게나마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카네의 입가 주변에 잔뜩 묻은 푸딩의 흔적을 턱받이로 닦아 내던 잇세이는 토오루의 투정 어린 질문에 잠시 곁눈질만 한다. 


“……그닥?”


대답하기 앞서 미묘한 공백이 길어지자 토오루의 눈썹이 보기 좋게 찡그려진다. 


“왜 망설여? 왜 의문형이야? 진짜 찐 거야? 그래 보여?!”

“아니……. 좋아. 지금이 딱 보기 좋다고.”

“……나 놀리는 거지. 쪘으면 쪘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보기 좋다니까?”

“그거나, 그거나! 결국은 살이 올랐단 소리잖아!”


저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진 토오루는 내친 김에 식탁을 작게 내리치며 자세를 바로 한다. 집에선 언제나 헐렁한 티셔츠와 품 넓은 청바지를 애용하는 토오루였지만 요 두 달 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그의 식욕을 막을 방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임신 3개월 무렵 극심한 입덧에 시달리던 토오루는 드레싱 없는 샐러드, 말린 오징어, 복숭아를 제외한 음식엔 입도 대지 못했다. 심지어 그 흔한 물조차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해대기 일쑤니 잇세이 입장에선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때 아닌 겨울철 딸기가 먹고 싶다거나 홋카이도 기념품인 초콜릿 쿠키가 먹고 싶다거나 오사카 3대 명물 맛집 출신의 타코야끼가 먹고 싶다며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면 차라리 좋았을 일이다. 밤새 헛구역질에 시달리곤 먹은 것이 없어 신물만 토해내는 구토는 지난 두 달 간 잇세이를 뜬 눈으로 지새게 만들었다. 토오루 머리맡에 대야를 준비해 두지 않는 이상 다음 날 아침 무렵엔 침대 시트가 토사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역한 기운은 계속 올라오는 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없으니 최후엔 제 손가락들을 목구멍 너머로 욱여넣으며 구토를 유도하려는 토오루를 목격한 순간, 잇세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해치려 들지 말라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아픈 게 낫다고, 왜 네가 이토록 힘들어야 하냐고, 토오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잇세이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게 3개월 차 였다. 


막상 힘들었던 입덧 기간이 지나자 토오루는 그간 입덧으로 인해 먹지 못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해치우기 시작했다. 흡사 걸신들린 사람마냥 말이다. 임신 중 유독 복숭아를 많이 찾아 냉장실 한 칸을 가득 채워 두었던 복숭아는 사흘이면 사라지기 일쑤고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사이 간식 때를 어찌나 칼같이 잘 맞추는지. 입에 뭔가를 물고 있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처럼 빛깔 좋은 입술은 쉴 틈 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왜, 얼마 전에 이와쨩이랑 맛키랑 아카네 보러 놀러 왔잖아.”

“잠깐만. 나 시간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이따 들으면 안 될까?”


벽에 걸린 시계를 통해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실히 체감한 잇세이가 급한 대로 버터 바른 토스트를 입에 문다. 


“하? 내 말은 듣기 싫단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자, 아카네. 다 먹은 접시랑 포크, 숟가락은 아빠 줘야지요.”

“쩝시! 뽀끄! 수까락! 빠빠 쭤야지이요.”

“응응. 줘야지.”


목적 없이 허공을 휘두르던 아카네의 미키 마우스 무늬의 접시, 포크, 숟가락을 조심히 빼들어 싱크대에 옮겨 둔다. 


“잇세이!!”


앙칼진 토오루의 부름은 외면한 채 말이다. 토스트의 절반가량을 한 번에 입에 넣는 바람에 목이 막힌 잇세이가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조그만 팩 우유의 포장을 뜯어 벌컥 벌컥 들이킨다. 


“그래, 그래. 들어줄게. 그때 나 출장 가고 없었잖아. 걔네가 나대신 보러 와준 거 아니었던가?”


한 시름 놨단 얼굴을 한 뒤 넥타이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토오루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흥!”


실컷 토라진 토오루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부풀린 뒤였다. 시간은 없지만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잇세이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잘못은 어디까지나 잇세이의 몫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작게 어깨를 으쓱인 잇세이가 빠르게 토오루의 뒤편으로 돌아간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뽀오얀 빛을 띤 목덜미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다. 셋팅이 안 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티셔츠 아래로 슬금슬금 손이 미끄러진다. 살집이 오동통하게 오른 가슴 골 사이를 지나친다. 


“예뻐 죽겠어 우리 토오루.”

“뭐, 뭐, 뭐하는 거야. 아카네가 다 보고 있잖아. 손 빼!”


두 아빠들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빤히 지켜보던 아카네가 잇세이의 윙크 한 번에 고사리 만 한 손바닥으로 제 눈두덩을 가린다. 역시 아이의 습득력은 남다르다고, 하룻밤 내내 가르친 보람이 있다며 잇세이가 속으로 씩 웃는다. 반면,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잇세이!”


화들짝 놀란 토오루는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안 보인다. 


“토오루의 귀여운 짓은 나만 독점하고 싶으니까.”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제 아빠들의 사랑 표현을 귀로만 감상하던 아카네가 이내 방긋 웃어 버린다. 까르르 터지는 해맑은 웃음소리에 맞춰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잇세이의 손에는 다정함이 한가득 이다. 어느 덧 가슴께를 지나 배꼽 근처에 머물던 손가락은 주위를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그 안에 자리하고 있을 새 생명에게 조심스레 안부 인사를 건넨다. 


“이 쯤…에 있으려나,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는.”

“모모쨩이 언제부터 아가씨로 정해진 거야?”

“뭔가……. 그런 느낌이 나. 아빠의 감.”

“모모쨩 다 들었지? 이제 꼬추 달고 태어나면 잇세이 아빠 얼굴에 먹칠할 수 있는 거야.”

“모모, 토오루 아빠 좀 그만 괴롭혀. 토오루 아빠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거든.”

“애 다 듣는다니까?!”


다만, 이 다정한 손길에 비하면 잇세이의 입과 혀는 배려가 전혀 없다. 버럭 소리치는 토오루의 귓바퀴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고 그 귓전 가까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낮게 읊조리며 혀로 끊임없이 농간하는 탓이었다. 어느 새 목덜미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른 토오루의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진다. 흡사 잇세이에게 순순히 목덜미를 내주는 순결한 어린 양처럼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자기. 이제 화 풀어라, 응?”


마지막으로 오동통한 살점이 부푼 아랫배를 가볍게 문지른 후 뺨에 뽀뽀를 남긴 잇세이가 선언하듯 말한다.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손길과 녹을 것 같이 달콤하던 입술의 감촉이 멀어지자 못내 아쉬웠는지 토오루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몰라. 회사가 그렇게나 좋으면 얼른 가버리던지.”


그런 토오루의 어깨를 잡아 끌어 잇세이가 다시금 입을 맞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정말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 말에 아침 새벽부터 죄인이 되는 건 


“오전에 거래처랑 정말 중요한 미팅 있거든. 얘기는 나중에 들어줄게. 미안.”


결국 토오루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잇세이 곁으로 다가간 토오루는 식탁 의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정장 자켓을 집어 든다. 한창 연애하기 바빴던 고등학교 시절엔 교복이 안 어울린다며 시도 때도 없이 놀리곤 했건만 정작 옷걸이의 주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정장 한 벌 걸쳤을 뿐인데 사회인은 물론 한 회사의 CEO 쯤 되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잇세이 덕에 토오루는 매일 아침, 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며 펄떡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곤 했다. 마지막으로 약간 헝클어진 넥타이를 예쁘게 동여맨 토오루가 넥타이의 끝을 확 잡아당긴다. 얼떨결에 토오루 쪽으로 끌려간 잇세이의 입술 위로 말랑한 감촉이 와 닿는다. 


“……최대한 빨리 와. 끝나자마자 달려 와. 정시 퇴근에서 1초라도 늦어지면 용서 안 해. 회식 잡혔으면 딱 1차만. 2차까지 가는 순간 그 날로 별거 할 줄 알아. 부장인지 사장인지 면전에 욕하고 바로 뛰쳐나와.”


이제는 퇴근조차 자유롭지 못한 잇세이였지만 어째 그의 입에선 미소가 도통 떠나가질 않는다.


“그랬다간 우리 밥줄 끊겨.”

“내가 벌면 돼. 잇세이는 집에서 아카네 보고 있어.”

“홀몸도 아니면서? 됐다. 차라리 내가 공사판을 가고 말지.”

“그러다 잇세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보험금은 그럭저럭 나올 거야.”

“잇세이!”


푸핫, 자신의 농담조에 일일이 진지하게 대꾸하는 토오루가 귀여웠는지 잇세이는 기어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별 걱정도 많다며 작게 웃음 짓곤 아직까지 눈꺼풀 위로 조막 만 한 손바닥을 얹어둔 아카네에게로 발걸음을 돌린다. 딸아이에게 양 갈래 머리를 시켜주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던 잇세이였건만 아쉽게도 아카네는 아직까지 머리카락이 짧아 한 갈래로 묶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뭐, 정수리에 앵두처럼 솟아나 달랑 거리는 머리끈은 그것대로 사랑스러웠지만 말이다. 


“뺘?”


제 손을 거둬내는 잇세이로 인해 까맣던 시야가 밝아지자 아카네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휘둥그레 떠본다. 그런 아카네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잇세이가 행복함으로 가득한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젖살이 둥그렇게 오른 뺨, 볼록하게 튀어 나온 이마, 사과 머리가 달랑이는 정수리까지. 


“갔다 올 게요, 우리 공주님.”


그럴 듯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현관까지 잇세이를 따라 나온 부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배웅한다. 


“빠빠. 빠빠 시져. 시져……. 시져어! 으앙-”


게다가 잇세이가 현관을 나가려 할 때면 그 순한 아카네가 일순 그렁그렁한 눈을 하며 울음보가 터뜨리려 했으니 이 만하면 말 다했다. 그때마다 아카네의 등을 토닥이며 겨우 달랜 토오루가 눈짓으로 잇세이를 재촉한다. 가지 말라고 아등바등 손아귀를 뻗는 제 자식에게서 떨어지는 것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관문은 금세 닫힌다. 뚜벅이던 구둣발은 차츰 멀어져 간다. 아카네를 안아들고 있던 팔은 그녀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인 후 바닥에 내려둔다. 능숙하게 그녀를 달래는 토오루로 인해 제대로 울지도 못한 아카네는 울음 대신 딸꾹질을 히끅거리며 거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장난감 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뒤뚱거리며 어설픈 걸음마를 떼며 온 아빠들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던 시절은 뒤로한 채 이제는 제자리 뛰기는 물론 마음만 먹으면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 아카네가 장난감 자동차에 몸을 싣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이, 토오루는 심란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연다. 온갖 종류의 과일과 야채가 먹기 좋게 손질 되어 냉장고를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토오루가 한 입에 먹기 좋게끔 밤새 잇세이가 손질해둔 것들이었다. 그 중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복숭아에게로 손을 뻗던 토오루였지만 주저하는 마음이 없진 않다. 냉장고를 뒤적이는 손에서 시선을 멀리해본다. 결혼 직전까지만 해도 근육으로 탄탄했던 팔뚝이 살로 탈바꿈 되어 여과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고개를 내려 보면, 한 때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각선미로 유명했던 다리가 유려한 선을 잃고 군살들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아이를 품고 있는 복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냥……먹지 말까.”


불과 수 일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입덧의 후유증과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식욕 탓에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토오루였다. 그런 그가 이토록 먹는 것을 망설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 살쪘냐?’


사건의 발단은 고작해야 나흘 전. 갑작스레 규슈 지방으로 1박 2일 출장 일정이 잡힌 잇세이를 대신해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가 아이를 봐주러 두 사람의 신혼 방에 놀러온 것이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애초에 아카네 돌보기는 토오루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집에 토오루를 놔두고 간다는 죄책감이 없지 않았던 잇세이가 먼저 이와이즈미, 하나마키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입덧으로 한참 고생하던 무렵 두 사람을 재회하는 바람에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기분이 없지 않던 토오루 입장에선 반갑고 또 감사하기도 했다. 


‘이거 봐. 여기 뱃살 늘었잖아.’


감격의 상봉이란 첫 대면에 이와이즈미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임신 중이니까 당연하잖아, 라고 장난으로 되받아치려던 토오루였지만 어느 새 하나마키까지 가담해 살집이 오른 제 팔뚝을 꼬집으며


‘아카네 때는 이만큼까지 살이 오르진 않았던 거 같은데.’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오자 웃어넘기려던 토오루의 낯빛은 보기 좋게 굳어져 갔다. 


‘운동 부족이겠지.’

‘임산부라도 기초 체력은 필요할 걸~?’

‘위험한 시기는 지났다 했으니까 슬슬 운동 좀 하고 살아라, 굼벵카와.’


결국 기분이 팍 상한 토오루로 인해 하루 내내 그의 투정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툐류. 툐류 빠빠!”


제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토오루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의 허벅지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키가 깡총깡총 발을 구르며 자신을 부르고 있으니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을까. 


“응, 아카쨩. 아빠는 왜요? 벌써 배가 고파졌어요? 아니면 기저귀에 쉬야 했어?”


토오루는 무릎을 굽혀 아카네와 눈높이를 맞춘 후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묻는다.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나지 않는 물개 박수만 열심히 치며 치열이 고른 젖니가 다 보이게끔 해맑게 웃기만 한다. 혹시나 기저귀를 갈아야 하나 싶어 기저귀 안쪽을 들춰보지만 어째 깨끗하기만 하다. 그냥 놀아달라는 건가, 맥 빠지는 한숨을 쉰 토오루가 아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가볍게 안아 든다. 잇세이표 특제 복숭아 꿀 절임 또한 잊지 않고 말이다. 


품에 안겨 자꾸만 재롱을 부리는 아카네와 함께 거실 한 가운데에 엉덩이를 붙인다.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켠다. 오전이라 그런지 영화 채널은 광고만 그득하고 드라마나 예능 채널은 전에 몇 번씩이나 봤던 것들뿐이었으며 뉴스는 토오루의 취향이 아니었다. 한참을 채널을 돌리다 결국 리모컨이 멈춰선 곳은 


“아……. 중계하고 있네.”


프로 배구 채널이었다. 


습관적으로 복숭아를 집어 입에 넣는다.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혀를 녹일 만큼의 달달한 뒷맛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턱을 괴어 본다. 맞은 편 벽에 걸린 티브이 바로 옆에 위치한 달력이 미처 잊고 있던 시기를 상기 시킨다. 지금쯤이면 준준 결승인가, 입으로는 짧게 중얼 거리고 눈으로는 코트를 훑어본다. 경기는 4세트의 종반. 오랜 랠리가 길어지자 양 쪽 팀 모두 지친 기색으로 공을 겨우겨우 받아치고 있었다. 그 중 왼쪽 코트를 예의 주시하던 토오루가 눈썹을 팍 찡그린다. 


“세터란 녀석이 저게 뭐야. 토스 자체가 서투네. 저 4번의 최고 도달점은 훨씬 높아 보이는데 토스가 따라가질 못하잖아.”


프로 배구 계에서 준준 결승 즈음 되면 서로 맞붙게 되는 팀은 대체로 익숙한 얼굴들이기에, 경기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인 영 어렵진 않았다. 하물며 프로 계에 입문한 직후부터 장래를 촉망받고 순식간에 모두의 선망 대상이 되었던 오이카와 토오루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프로 쪽에선 못 보던 얼굴……. 뉴 페이스인가? 아 싫다~ 정말.”


한창 현역으로 뛰고 있을 때만 해도 그는 무척이나 예민하던 사람이었다. 팀의 구성원 변화, 시즌마다 바뀌는 경기장 체크, 콤비를 맞추던 스파이커의 컨디션 체크까지 꼼꼼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시합 전날엔 상대 팀 경기 녹화 비디오들을 주의 깊게 살피느라 꼬박 밤을 새는 버릇마저 있었다. 팀의 숙련도, 스파이커가 선호하는 코스, 세터의 버릇, 서브의 다양성 등 비디오 한 편만 보면 그의 머릿속은 잘 짜인 그물망마냥 퍼져 나가며 상대 팀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파악하곤 했다. 애초에 배구에 재능이 있었던 데다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노력마저 아끼지 않는 수재였으니 감독들 입장에선 그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 날 뿐이었다. 


“그것도 몇 년 전 얘기지.”


스스로를 비웃듯 코웃음을 친다. 


원래 예정대로 라면 토오루의 프로 팀 복귀는 약 1년 후였다. 그 무렵엔 아카네가 세 살이나 되었으니 그녀를 보육원 혹은 어린이 집에 맡길 심산이었다. 비록 아카네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들고 저와 잇세이의 맞벌이로 인해 아카네가 외로움을 많이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토오루는 어찌 됐든 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배구공을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이다. 상대 팀의 기세를 죽일 초강력 서브를 날리고, 자신의 토스를 통해 스파이커에게 블로킹을 무너뜨리게끔 하고, 여섯이서 함께 난관을 돌파하고, 승리의 기쁨을 제 손으로 거머쥐고, 


“툐류 빠빠!”


자신만의 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카네의 부름에 토오루가 천천히 눈을 내린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다. 비치는 것이 있었다. 아이의 동그란 눈 안엔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관리 되지 않은 머리칼, 살집이 올라 희미해진 이목구비, 볼록하게 나온 아랫배와 오동통한 팔뚝까지. 


“빠빠 뽀뽀.”


토오루는 굳은 안색을 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신혼 초기 무채색으로 가득했던 집안은 아카네의 출산과 더불어 알록달록한 벽지로 뒤바뀌어 있었다. 흰 색으로 깔끔하게 도배 되었던 집안의 문이란 문들은 싸구려 캐릭터가 수놓아진 구구단 전지, 동물 이름으로 가득한 포스터로 도배 된 지 오래고, 본디 세탁 용품 외엔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던 베란다는 아카네가 좋아하는 장난감 집과 장난감 상자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집안 구석구석엔 크레파스나 색연필, 심지어는 미처 지우지 못한 유성 펜 낙서들이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욕실 앞을 굴러다니는 장난감 블록들 옆엔 유아용 변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후 20개월부턴 조금씩 배변 유도를 시도해보고 기저귀를 떼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모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아까네 뽀뽀 해주세요.”


문득 토오루는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뜨끈하면서도 울컥한 기운이 목구멍 너머로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왈칵 하고 터져 나올 울음을 겨우겨우 삼켜낸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코끝을 손등으로 쓸고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최대한 물어뜯어 본다. 


“빠빠…?”


그러나, 미처 막지 못한 물줄기 하나가 있었다. 푸석해진 뺨을 타고 또르륵 굴러 떨어진다. 아카네가 볼 새라 재빨리 눈물을 거둬보지만 그 새를 못 참고 불거져 버린 흰자위는 채 감출 틈이 없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그것이 무적의 주문이라도 된 마냥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가까스로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응.”


어딘지 모르게 서글픔이 느껴지는 어조.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아카네였지만 그녀라고, 그녀이기에, 토오루의 눈물을 보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불안함에 떠는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에 젖을 것처럼 물 기운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가 느꼈던 슬픔이 그대로 아카네에게 옮겨진 것 마냥 말이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뒤늦은 후회를 뼈저리게 체감한 토오루가 조심스레 말문을 꺼내 본다. 


“토오루 아빠는 여기 있어요.”

“…….”

“쭉, 우리 공주님 옆에 있을 거예요.”

“…….”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는 아카네를 기어코 거세게 끌어안아 버린다. 


“미안.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나쁜 생각해서 미안해.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너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리거나 하지 않아.”


그제야 아카네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터뜨린다. 정작 제일 울고 싶은 당사자를 대신해 집안이 떠나가라 쉴 새 없이 서러움을 토악질한다. 그 슬픔에 동화 되었는지 토오루의 눈가가 다시금 물결로 일렁인다. 


“아카네를……. 너를 만나게 된 걸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너는 내 행복이고 내 기쁨이고 내 전부인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너인데. 그랬는데. 그게 맞는데…….”


결국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작고 동그란, 그러나 토오루에게 있어선 너무나 큰 아카네의 뒤통수를, 토오루는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그간 뭔지 모르게 서러웠던 감정, 서러운 감정, 서러울 감정들을 한데 끌어 모아 폭발시키며 한참을 오열했다. 사방에 널브러진 오색빛깔의 장난감들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복숭아 꿀 절임과 알록달록한 벽지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두 사람 분의 곡소리는 쉽게 끊이질 않았다. 


*동동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비정기적 연재 (내킬 때, 뽕 찰 때, 원고 탈주하고 싶을 때 이어 씁니다)

*엠프렉 소재




W. 멜




“축하드립니다.”


늙은 의사는 콧대 아래로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린다. 진료 결과가 적힌 차트를 넘겨보며 덤덤한 어조로 말한다.


“임신 10주차네요.”


누군가 한 명쯤은 손뼉 박수를 쳐야할 것 같은 축복의 언사였건만 정작 희소식을 들은 주인공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의사의 맞은편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처진 눈썹, 그에 상반되는 날카로운 눈매,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것 마냥 비죽 내밀어진 입술 선을 가진 사람 하나. 초콜릿을 연상케 하는 밝은 연갈색 머리칼, 수려한 이목구비, 우유를 빼다 박은 것 같은 뽀얀 피부, 그 화려한 외모와 매치되지 않는, 차츰 좁혀지는 미간. 


“네……?”

“네……?”


결혼 2년 차. 즉, 신혼으로 행복의 노래에 취해 한껏 깨를 풀풀 날리고 있어야 할 두 사람, 마츠카와 잇세이와 마츠카와 토오루는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껄끄러운 대답을 남기고 만다. 


“어……. 흠, 큼큼- 당분간은 알코올이나 카페인 섭취 자제하시고 음식은 가려서 드세요. 자칫하다간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니까요.”


이해를 못 하겠단 얼굴로 반문의 여지를 남긴 두 사람 덕에 당황한 건 의사 쪽이었다. 의사의 당황한 낯빛도 잠시, 그는 두터운 안경알을 벗어 내리며 잇세이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내보인다. 


“그나저나, 거기서 곤히 잠들어 있는 따님이 정말 귀엽게 생겼네요.”


보다 정확히는, 잇세이가 앞으로 들쳐 맨 포대기 안에서 쌕쌕 잠이 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을 향해서 말이다. 


예상치 못한 칭찬 세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올린 잇세이가 시선을 내린다. 잠결에 목을 제대로 뉘지 못하는 아이의 뒷목을 살며시 받쳐준다. 곱게 감긴 눈 위로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준다. 조금만 힘주면 망가질 것 같은 이 작은 생명체가, 따뜻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사랑스러운 결실이 자신들의 피를 이은 혈육임을, 잇세이는 매 순간 새롭게 자각하고 있었다. 


“보자, 일 년은 넘은 것 같고 한……. 16개월 쯤 된 것 같은데, 맞나요?”

“18개월이에요. 워낙 순해서 잘 먹고 잘 자고 키우는 데 크게 손을 안 벌렸던 것 같아요.”


의사는 아이의 생김새를 잘 살펴본다. 부드러운 눈매나 앙증맞은 입술은 아까부터 초점 없는 눈으로 ‘임신……. 임신? 정말, 임신이라고?’ 라는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 거리는 잘생긴 쪽의 아빠를 닮았고, 얼굴선을 비롯한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 등은 아이를 품에 안은 아빠 쪽을 닮아 있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든 자는 모습만큼 천사 같을 때는 없지.


아무리 순하다 한들 생후 12개월이 넘는 순간부터 걷고 말하고 울고 떼쓰기 바쁜 아이가 깨어 있지 않음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의사가 이내 토오루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 아이가 첫째면 뱃속의 아이는 둘째겠네요.”


둘째. 둘째란 단어에 말미암아 발화점에 다다른 열기는 기어코 화를 초래한다. 


“그래서…….”


허공으로 드높이 올라간 손바닥이 등짝이란 표적을 매섭게 내리친다. 


“내가 피임 잘 하라 했지 맛층!!!”


마츠카와 토오루(24)는 예정에 없던, 계획조차 하지 않고 있던, 차마 원치 않았던 둘째를 덜컥 임신해 버리고 만 것이다. 



* * *



“그럼, 천방지축 부부의 둘째 아이를 위하여!”


테이블 위로 호기롭게 맥주잔을 들어 올린 하나마키가 목청을 높인다. 맥주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차올라 있는 맥주 거품이 먹음직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뭐가 위하여야!!”


정작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칭할 수 있는 오이카와의 안색은 그리 좋질 못했다. 


“엑- 그러려고 긴급 소집 한 거 아니었냐? 축하 파티? 렛츠 파뤼~?”

“파티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쪽은 진지하다고.”


못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시던 하나마키가 어색한 공기 흐름에 제 볼을 긁적이며 제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런 그를 더더욱 뻘쭘하게 만드는 건 불쾌하단 티를 팍팍 내며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대는 토오루의 행동거지였다. 


“기뻐할 일 아니냐. 그래도 임신 소식인데.”


토오루의 바로 맞은편에 앉은 이와이즈미가 잘 데워진 사케를 홀짝이며 말한다. 


“그게 말이지……. 하아, 이와쨩 그거 나도 좀 줘봐.”


한 쪽 팔로 턱을 괸 채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던 토오루가 사케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안 돼.”


아니나 다를까, 무심결에 알코올에 의지하려 한 토오루를 제지한 건 옆자리에 앉은 잇세이였다.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술 금지랬잖아.”


사케를 향하던 손목이 단호히 붙들린다. 오이카와는 퉁명스레 대꾸한다. 


“……꽉 막혔어. 오늘 같은 날은 좀 마시게 해주면 안 돼?”

“오늘 같은 날이 뭔데. 아주 기념비 적인 날이구만 뭘.”

“잇세이 등짝에 피멍 들게 해줄까.”

“네 전직이 배구 선수란 걸 잊지 않아 줬음 좋겠는데.”


결국 토라진 토오루를 달래려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는 잇세이다. 알코올은 물론 카페인 걱정도 없으니 토오루 입장에선 마음 편히 마실 순 있겠지만


“맛없어.”


주스를 미처 입가에 대기도 전 토오루는 고개부터 돌린다. 일부러 토라진 티를 내는 건가 싶다가도 정말 먹기 싫었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단히 빈정이 상했는지 툴툴거림을 멈추진 않는다. 


“임신? 니들 생각엔 애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뚝 떨어질 것 같니? 내가 피임 잘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결국 콘돔 쓰지 말자 꼬신 건 맛층이잖아. 진짜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잇세이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다. 반찬으로 미리 주문해 둔 양상추 샐러드를 한 젓가락 집는다. 샐러드 드레싱은 죽어도 못 먹는 토오루의 극성 입맛을 고려해 순수한 야채만을 골라 집어 쉴 새 없이 떠드는 토오루 입가에 가져간다. 


“감독님한테 다음 달엔 복귀 가능하다 해뒀는데……. 음, 맛있다. 아 이게 뭐냐고 진짜. 출산 휴가 유급 휴가 이미 다 써먹었단 말이야. 하기야 그거 쓸 때도 우리 팀 애들한테 눈칫밥 엄청 먹었다고! 이런 내 고충을 맛층이 알긴 알아?”


아예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토오루 덕에 반찬들이 담긴 접시와 술잔이 작게 튕겨 오른다. 순간적으로 테이블 위로 쏟아진 알코올과 음식 찌꺼기에 놀란 이와이즈미, 하나마키와 달리, 잇세이 한 사람만이 평온한 눈으로 백팩에서 물티슈를 꺼내 흔적도 안 남을 만큼 말끔하게 닦아낸다. 


“나는 빨리 선수 생활 복귀하고 싶은데. 애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야……. 이대로는 복귀는커녕 영영 은퇴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양 손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토오루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 와중에도 아삭아삭 풀 씹는 소리가 잇새로 생생히 튀어 나온다. 테이블 청소를 끝낸 잇세이는 구석에 물티슈를 쌓아둔다. 


“오히려 잘 됐네. 이참에 다치기 십상인 프로 생활은 접어 버리고 애들이랑 알콩달콩 잘 살아 보는 건 어때.”


가슴팍에 아이를 밀착시키고 있던 포대기의 끈을 조금 느슨히 하던 잇세이가 은근슬쩍 은퇴 얘기를 꺼내 본다. 병원을 출발할 때부터 해가 기울어진 지 한참인 이 순간까지 온종일 숙면을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공주님이 잠결에 입술을 오물거린다. 


“농담이라도 그만 둬. 아카네 분유 값, 기저귀 값, 옷값만 해도 한 달 동안 돈이 얼마나 나가는지 잇세이도 봤을 거 아냐. 게다가 아카네 여기서 조금만 더 크면 어린이 집도 보내야 하는데 그거 전-부 잇세이가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아니잖아. 나도 일해야 해. 하물며 둘째까지 생긴 마당에 돈은 돈대로 더 들고 시간은 시간대로 더 드는데 어떻게 애만 보고 있을 수 있어. 배구가 아니더라도 일은 할 거야. 아니면 못 버티는 걸.”


토오루는 당장 자신의 실수나 잇세이의 잘잘못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생명으로 인해 초래된,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 부담감. 토오루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뱃속 안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생명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편, 어째 부부싸움 한복판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기분이 된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는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태명은 정했냐?”


타이밍 좋게 분위기 전환에 나선 건 하나마키였다. 


둘이 연애를 할 적에야 질리도록 본 얼굴들이었건만 허니문으로 아카네를 임신한 채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직후부턴 육아에 정신이 팔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했다. 첫째인 아카네가 아무리 순하다 할지라도 그 당시 ‘육아’란 것 자체가 처음이었을 두 초보 아빠들에겐 하나부터 열까지가 생전 처음 겪는 일들뿐이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건 드라마에 흔히 나올 법한 가출이라던가 산후 우울증 같은 최악의 경우는 겪지 않았다는 부분인데, 아마 신혼이란 이름 아래 따끈따끈한 사랑의 힘으론 트러블들을 이겨내 온 것 아니었을까. 


그런 두 사람을 근 이 년 만에 만나 볼 수 있었다. 임신 소식이든 뭐든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뜻 깊은 자리를 싸움의 장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뭘 또 정해. 전에 했던 것처럼 붕붕이로 해.”


귀찮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한 쪽 귓구멍을 파던 잇세이가 무심한 투로 말한다. 거기에 성질이 나는 건 오히려 토오루였다. 


“붕붕이? 아카네 임신했을 때 한창 자동차에 빠져 갖고 아무거나 갖다 붙인 주제에 이번에도 또 그걸 쓰자고? 절대 싫어. 안 해.”


두 번 당하진 않겠다는 토오루의 완고한 뜻에 잇세이가 떼굴떼굴 눈알을 굴린다. 돌아가지 않는 사고를 무리하게 돌리려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통통이.”

“기각.”

“롱롱이…….”

“허, 기각.”

“말랑-”

“기각이라고!”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는지 골머리를 앓는 잇세이를 대신해 이와이즈미가 대답한다. 


“고라 어때, 고라.”


이와쨩 치곤 괜찮은 아이디어……인가?


“고라가 뭔데?”


내심 이와이즈미의 센스에 놀란 토오루가 그 뜻을 물으려 하면


“줄임말.”

“무슨 줄임말?”

“고질라를 줄여서 고라.”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고 만다. 


“아니면 고라파덕을 줄여서 고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가쨩한테 무슨 이름을 붙이려 하는 거야, 바보 이와쨩! 고질라!! 고라파덕!!!”


순간적으로 뒷목 끝까지 혈압이 오른 토오루가 빽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양 귀를 틀어막는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그 새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듯 마츠카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말한다. 


“치즈.”

“……치즈? 그럼 치즈쨩이야?”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아 토오루가 화색의 기미를 보일 때면 잇세이는 기다렸다는 듯


“응. 치즈 햄버그 먹고 싶으니까.”


토오루의 이상을 산산이 깨부수고 만다. 토오루가 잇세이의 등짝은 물론 정강이마저 걷어차며 ‘그럼 나도 내가 멋대로 지어도 되지?! 우유 빵 먹고 싶으니까 우유쨩이라 하면 되지??’ 라는 그럴 듯한 논리를 펼치고 있을 무렵, 하나마키가 손수 싸움 중재에 나선다. 


“워워- 진정해, 진정. 그러다 자고 있는 아카네 다 깨우겠다 이것들아.”

“흥! 먼저 시작한 건 맛층이니까 난 몰라.”

“모르긴 또 뭘 몰라. 그보다 니네들, 아카네 태명을 그렇게 대충 지었단 말이야?”


장난으로 해 본 말이었건만 정작 자신들은 아무 것도 몰랐단 식의 눈알 두 쌍이 하나마키에게 향하자 하나마키의 등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그럼 진짜 붕붕이라 불렀어? 이 귀여운 천사한테??”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뒤척이지도 않은 주제에 어느 새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며 잠을 청하고 있는 아카네와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두 남정네를, 하나마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번갈아 본다. 


“일단은…….”

“딱히 생각이 안 났으니까.”


무법자다. 그냥 무법자임이 틀림없다. 지금에야 저렇게 화내고 투닥 거리겠지만 나중엔 귀찮아져서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부를 케이스가 분명하다, 이것들. 


“그런 거 말고 좀 뭐랄까. 특별한 거 있잖냐. 태몽이라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려가며 태명 설정에 공을 들이는 자신이나, 벌써 귀찮아졌는지 자신은 쳐다도 안 본 채 아카네의 볼을 콕콕 찔러 보기 바쁜 잇세이나, 이러든 저러든 샐러드나 뒤적거리고 있는 토오루나.


“태몽? 아카네 때는 태몽 같은 거 꾼 적 없는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물가물한 첫 날 밤을 떠올리던 토오루의 어깨를 마츠카와가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그렇겠지. 나한테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 좋았던 때가 마치 어제 일인 것 마냥 어깨선을 쓰다듬는 손이 능글맞기 짝이 없다. 


“좋아서 기절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 내 테크닉이 그렇게 좋았나?”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는 노골적인 시선에 어느 새 토오루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를 연상케 하듯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이 쪽은 막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마구 뽐내는 데 비해 솔로가 서러운 인생인 맞은 편 사람들은 등목 샤워를 한 것 마냥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다. 


“애정 행각은 그 쯤 하지?”

“태어나지도 않은 애가 벌써부터 뭐가 뭔지 다 알아 듣겠다 이 커퀴들.”

“둘째도 저런 식이었겠지. 안 봐도 뻔해.”

“솔로는 아주 서러워서 돌아가시겠다? 앙?”


어느 새 제 곁으로 훅 다가와선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는 잇세이 덕에 반쯤 정신이 몽롱해져 버린 토오루는 


“우리!! 태몽 얘기하고 있었잖아!”


자칫하다간 잇세이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 대뜸 빽 소리를 질러 버린다. 간만에 선보인 애정 표현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잇세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캔 깡통처럼 확 구겨진다. 


“그래 뭐……. 이번이라고 다를 거 있겠냐. 뭘 꾸긴 했니?”

“태몽이고 태명이고 다 됐다. 그냥 아무 거나 해.”


옆구리가 시려진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솔로의 서글픈 건배사를 외치고 있었다. 저것도 친구라고, 토오루가 이를 까득거린다. 


“모모쨩으로 할 거야.”

“모모? 복숭아?”


웬 복숭아냐며 잇세이가 되받아치려 하니 토오루는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는다. 


“왜냐면! 하루는 꿈에서 복숭아가 잔뜩 나왔거든. 복숭아나무, 복숭아 강, 복숭아 구름, 복숭아 토끼까지 온 사방팔방이 전부 복숭아 길래 깨고 나서도 뭔~가 이상한 꿈이네 하고 넘긴 적이 있었어.”


아예 핏대까지 세워가며 토오루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언제쯤 주문한 메뉴가 나오냐 묻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태몽이었구나~ 싶은 거지.”


직원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곧 나올 거라고, 죄송하단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뺘……?”


제 아빠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아카네가 졸린 눈을 끔벅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눌한 발음과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여기가 어딘지 몰라 좌우를 휘휘 돌려보는 상대적으로 큰 머리통. 똘망똘망한 두 눈은 익숙한 아빠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천천히 끔벅거린다. 


“아이구~ 우리 아카네 깼구나~”

“누가 ‘우리’ 아카네야. 우리 아카네거든, 맛키.”


제일 먼저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다름 아닌 하나마키였다. 내내 품에 안겨 있어 답답했는지 살이 포동한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카네에게 냉큼 다가가 눈높이를 맞춘다. 


“빠야야-”

“으응~ 아빠 친구 타카히로에요~”

“빠야?”


턱을 갸웃거린 아카네가 제 고사리 만 한 손바닥을 쥐었다 편다. 그러자 풀린 눈을 한 하나마키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흡사 처음 보는 사물을 탐색하듯 작고 뭉툭한 손톱이 그 근방을 쓸어본다.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아……. 어떻게 이 귀여운 생명체가 니들 같은 건장한 사내자식들의 딸이란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생명의 위대함이란 정말……종잡을 수가 없어.”


그 해맑은 웃음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린 건 비단 하나마키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벌써 아카네의 오동통한 볼을 쓸어내리고 있던 이와이즈미 또한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네 녀석, 기억하고 있으려나. 나 하지메 삼촌이야.”

“겨우 그런 걸로 우리 아카네의 관심을 끌 수 있겠어 이와쨩? 아카네 여기 보세요, 울룰룰룰루~ 까꿍!”

“셋 다 시끄러. 토오루 너는 왜 또 거기 껴 있어.”

“재미있으니까?”


싱거운 대답에 잇세이가 이마를 짚는다. 우선은 포대기에 갇혀 언뜻 답답해 보이는 아카네를 내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아카네가 자칫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포대기 끈을 풀어 헤친 잇세이는 –그나마 제일 믿음직한- 이와이즈미에게 아카네를 건네준다. 


“엉덩이부터 받쳐서 안 떨어지게 해. 아직은 뒷목 꺾일 수도 있으니까 목도 잡아줘야 하고.”


그래도 첫 아이를 무사히 키워낸 지 약 2년. 제 나름대로 육아 스킬이 꽤 늘어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 잇세이다. 그의 충고를 가슴에 새긴 채 행여 사고를 치진 않을까 조심조심 아카네를 안아 든 이와이즈미의 손이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그 어깨에 볼 한 쪽을 댄 채 세상 구경하기 바쁜 아카네는 누구보다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와이즈미, 하나마키한텐 넘기지 마.”

“엑, 왜? 나도 아카네 안아 볼래!”

“너는 좀 불안해.”

“아 진짜 너무하네. 내가 무슨 바이러스 균도 아니고.”


셋의 상황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토오루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린다. 오랜만에 보는 솔직한 웃음꽃에 너나 할 것 없이 웃어 버리고 만다. 아카네를 만나고 난 뒤론 분명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던 것 같다며 토오루는 이 순간들을 머릿속 깊이,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 담는다. 


“주문하신 초밥 세트 나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 먹음직한 초밥들이 놓이든 말든 네 사람의 신경은 온통 아카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혼자 자리에 붙어있는 토오루를 제일 먼저 신경 쓴 잇세이만이 다시금 의자에 착석한다. 토오루 앞에 일렬로 늘어진 초밥들을 제 쪽으로 끌어 온다. 


“왜?”


이유는 뻔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토오루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와사비 못 먹잖아.”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무심히 대꾸한 잇세이는 밥 위에 얹어진 사시미를 들춰내 눈곱만 한 와사비를 능숙한 젓가락질로 거둬낸다. 


“용케 기억하네.”

“우유 빵에만 환장하는 초딩 입맛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윽……. 초딩 입맛이라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 제일 좋아하는 새우.”


아카네와 두 삼촌들이 가게 구석에서 방방 뛰며 놀고 있는 사이, 다정함을 한 움큼 집어 삼킨 잇세이는 와사비를 모두 빼낸 새우 초밥을 들어 토오루에게 건네준다. 다만 토오루의 안색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잠…깐만.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때깔 좋기만 한 새우의 속살이 오늘같이 끔찍해 보인 적이 있던가. 


“설마……. 이것도 못 먹겠어?”


머리로는 아니라고 외치려 했으나 몸은 저절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눈 딱 감고 삼키자, 삼켜만 내자, 스스로에게 주문 걸 듯 되뇌이는 다짐과 달리


“으…우웩!”


신 내 나는 헛구역질은 여지없이 그의 속을 괴롭히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선 탓에 의자는 뒤로 넘어가 우당탕탕 큰 소리를 낸다. 멀찍이서 놀고 있던 둘, 아니 세 사람의 눈이 화장실로 내달리기 시작한 토오루를 향한다. 


“망할. 잠깐 아카네 좀 보고 있어!”


뒤늦게 욕지거리를 낮게 읊조린 잇세이가 토오루의 뒤를 따른다. 영문을 모를 세 사람만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한껏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야생의 촉이란 녀석이 하나마키의 뇌리를 스쳐 지난다. 


“입덧……은 아니겠지?”


토오루 때문에 한껏 놀랐을 아카네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던 이와이즈미가 그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아니겠지. 아카네 때는 입덧 하나도 없었다면서. 둘째라고 그렇게나 다르겠냐.”

“어어, 그러면 좋겠는데……. 저거는 아무리 봐도-”

“기우야, 기우. 아카네도 무사히 잘 키운 녀석들이 둘째라고 별 힘이 들겠냐. 둘째라고 크게 까다로울 거 없어. 괜찮을 거야.”


‘둘째라고 크게 까다로울 거 없어.’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란 걸, 이와이즈미는 알고 있었을 런지. 










*마츠오이 교류회 원고

*마츠카와에게 큰 형이 있습니다. 

*BGM이 있습니다. 꼭 함께 감상해주세요. (상편과는 다른 BGM입니다.)




W. 멜




빗줄기는 조금 더 굵어진다. 그 대신 빈도가 줄어든다. 물 먹은 솜 덩어리가 코팅된 천 위로 낙하한다. 완만한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절벽의 가장자리 주변으로 모여든다. 팁에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그것들은 미련 없이 추락하고 만다. 오목했던 보도블록을 평평하게 만든 물웅덩이 위에 둥그런 파동이 메아리처럼 퍼져 나간다. 한 점에서 시작해 원으로 이어지던 그것의 흔적이 채 사라지기도 전, 또 다른 빗방울들이 누가 질세라 앞뒤를 다투며 여러 겹의 메아리를 그린다. 


한 사람을 겨우 가릴 법한 작디작은 삼단 우산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인다. 가장자리 아래로 겨우겨우 보이던 초점 흐린 동공은 그늘 속에 모습을 감춘다. 빗소리로 가득한 침묵은 숨통만 조일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


장우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작은 숨소리마저 용납되지 않는다. 쓸데없는 소음은 죽임을 당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고 넘어가 줄래.”


잘게 떨리는 손아귀 위엔 뼈가 허옇게 도드라져 있다. 


“정말 지겹지도 않니?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너의 목소리 한 줌만이 따사로운 햇볕처럼 느껴졌다면. 


“비만 왔다 하면 쫄래쫄래 쫓아와서는 내 눈치만 보고 기껏 한다는 말이 류 얘기뿐이고 결혼식이 어땠다는 둥 신혼여행으론 어딜 갔다는 둥 선물로는 뭘 받았다는 둥 웨딩 앨범이 어쨌다는 둥. 내 심기 건드리는 말들 줄줄이 내뱉기만 하고. 대체 나랑 뭐 하자는 건데. 뭐 하자는 건데!”


너는 웃을까. 


“잊을 만할 때면 꼭 개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줘야 분이 풀리니? 그래서 내가 잘 됐다고, 그 사람 결혼을 인정하고 축하해 주고 훌훌 털어버리길 바랐니? 좋아. 그게 소원이라면 몇 번이고 말해 줄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줄게! 잘 됐네! 진짜 잘 됐어! 고백 안 하고 넘어가길 백 번 천 번 잘 했어.”


아니면 울까. 


“어차피 나 같은 건 꿈도 못 꿀 사람이었는데! 아주 속이 시원하다고!”


꾹 쥔 우산 손잡이가 눈에 띄게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장우산이 고개를 숙인다. 톡, 소리가 나도록 조그만 우산 위에 제 것을 얹어 둔다. 점박이 무늬마냥 찍혀 있던 물방울들이 일제히 미끄러진다. 


“그래.”


습한 날씨. 축축한 공기. 푹 젖은 바짓단. 눅눅한 날씨 한가운데 건조한 음표 하나가 오선지를 지난다. 


“정말 잘 됐어.”


그럴 줄 알았다며 되받아치려던 입이 굳게 닫힌다.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먹먹한 기운이 어금니에 짙게 머문다. 까드득, 입 안의 살점을 씹어대는 이빨 소리가 


“드디어 네가. 형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게 됐으니까.”


적개심으로 차 있었다. 


“뭐?”

“…….”

“잠깐만……. 너 방금 뭐라 했어. 맛층 지금…….”


주변 온도보다 2도쯤 가라앉은 서늘한 어조가 마츠카와의 귓전을 울린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니?”


목적어는 없었어도 마츠카와는 문장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가 아닌. 분명하게. 


“그 정도로 티를 냈으면 솔직히 말해, 모르는 쪽이 멍청한 거 아닌가?”


가림 막 역할을 하던 작은 우산이 오랜 고요 끝에 드디어 고개를 든다. 이글거리는 눈알이 기염을 내뿜으며 불타오른다. 흐릿했던 안광이 홧홧한 격화로 뒤덮어진다. 눈앞의 상대를 매섭게 나무라기 시작한다. 


“설령 내가 마음을 접었다 해도. 내가 그 사람을 포기했다 해도.”


아침부터 공들여 세팅했을 초콜릿 머리칼의 끄트머리가 축 쳐져 있었다. 묵직한 습기가 기다란 속눈썹을 짓눌렀지만 남자는 울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하물며 나도 아닌, 네가. 마츠카와 네가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다만, 상처로 일그러진 눈을 할 뿐이다. 


“……화가 나. 화가 나 죽겠어.”


깨문 입술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우산이 흔들린다. 


“여태껏 내 마음을 뻔히 알고 있었던 너나, 날 연애 대상으로조차 보고 있지 않던 류나, 류의 말 한마디에 입 한 번 벙긋 못하고 그 시간을 내동댕이 쳐버린 나 자신이나, 전부! 전부……. 화가 나. 스스로가 싫어. 내 옆에 알짱거리는 너도 싫고 겨우 첫사랑 하나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나도 싫고 이 비도 지겹고 짜증 나고!”


파르르 떨리던 손이 기어코 우산을 놓는다. 놓아 버린다. 놓쳐 버린다. 


“……미워 죽겠다고.”


튕겨 나간 우산이 아스팔트 바닥을 홀로 나뒹군다. 우산에서 해방된 두 손바닥이 얼굴을 가린다. 푹 숙인 고개 위로 비가 쏟아진다. 흠뻑 젖어든다. 


“알고 있었어. 동성이 좋아해 봤자, 나 같은 어린애가 좋아한다고 날뛰어 봤자, 결국 그 사람은……. 아냐. 아니야. 좋아하겠지. 좋아는 하겠지.”


짠 내음이 물씬 나는 물방울이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정수리 위로 따갑게 쏟아지는 물방울과 한 데 섞여 든다. 무엇이 빗물인지 무엇이 빗물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딱 ‘학생’이란 선 안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거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그 무렵, 손바닥 사이에 파묻혀 있던 얼굴이 천천히 낯빛을 드러낸다. 파리한 안색과 대조되는 불거진 흰자위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피하지도 도리질 치지도 않고 그와 빤히 눈을 맞추고 있던 장우산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행여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진심 어린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배려였다. 


“건드리지 마!”


그 배려를 짜증스럽게 쳐낸 오이카와 덕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지만. 


“차라리 속 시원히 화를 내고 싶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라고. 그 사람을 좋아하든 말든 나를 봐주든 봐주지 않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했든 말든!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잖아. 내 기분에 달린 거잖아. 근데 왜 신경 쓰니. 왜 마음 쓰는 척 해. 왜 선심 쓰는 척, 되지도 않는 동정 베풀고 앉았냐고!”

“…….”

“꼴도 보기 싫어. 차라리 꺼져 버렸으면 좋겠어. 쥐도 새도 모르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마음 같아선 손바닥이 부르터지도록 네 뺨을 후려 치고 싶어. 네가 미워. 네가 싫어. 너 같은 건…….”


분명한 표독을 띠고 있던 눈알이 순식간에 그렁그렁한 물빛으로 번져간다. 


“안 된다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던 수도꼭지가 한계를 드러낸다. 수압을 견뎌내지 못한 수도꼭지가 이내 펑 소리를 내며 터지고 만다.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어. 화도 못 내겠어. 죽도록 미운 얼굴 이다가도 또 가슴이 쿡쿡 쑤셔.”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봇물은 좀처럼 걷잡을 수가 없다.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그것에 빗물이 더해진다. 벌써 퉁퉁 붓기 시작한 눈두덩을 위로하듯 소낙비가 투박한 손길을 건넨다. 속눈썹 끝에 방울방울 맺힌 빗방울이 그를 대신해 소금기를 머금는다. 


“맛층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 사람이 보여. 안 그러고 싶은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돼. 결국엔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다고.”


장우산은 지칠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인다. 이미 흠뻑 젖어 버린 마당에 우산이 무슨 소용이겠냐 만은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이 이상 비를 맞지 않길 원했다. 학교를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바짝 말라 있던 마츠카와의 어깨선 또한 축축한 건 매한가지임에도. 


“하지 마.”


아니나 다를까. 그새 체온이 훅 떨어진 차디찬 손이 우산을 쳐낸다. 이번엔 마츠카와 또한 고집을 부린다. 


“써.”

“하지 말라고.”

“쓰라고.”

“이젠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니?”

“감기 걸려.”

“말했지. 내가 감기에 걸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

“신경 좀 끄라고!!”


그제야 마츠카와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토한다. 우산에서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헤집는다. 벅벅 긁어내린다. 주름 진 미간은 저절로 사나운 인상으로 이어진다. 아오, 짧은 탄성이 들끓는 감정을 작게 대변한다. 


오이카와는 부릅뜬 눈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코앞의 시야마저 가릴 만큼 비는 촘촘히 내리고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현기증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긴장을 푸는 순간 무릎이 푹 꺾일 것 같은. 그래도 오이카와는 주먹 쥔 손에 핏대를 세워가면서까지 마츠카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것 마냥. 마츠카와에게만큼은 스스로가 ‘무죄’ 임을 증명하듯. 


가시를 뾰족이 세우며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오이카와에 비해 마츠카와는 조용하다. 폭풍전야마냥 스산한 빛을 띠는 눈매가 가늘어진다. 


“너 말이야.”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만다. 


“참 잔인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마츠카와의 손을 떠나 내동댕이쳐진 장우산은 조금 전 오이카와가 던져둔 삼단 우산 옆을 따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제 비를 맞고 있는 건,


“니 마음은 그렇게나 소중한 주제에 내 마음은 별 것도 아닌가 봐. 니 가슴 후벼 파는 말은 절대 허락 안 하면서 남의 가슴 후벼 파는 말은 잘도 내뱉는구나.”


오이카와뿐 만이 아니었다. 


“니 마음만 마음이냐?”

“…….”

“감정이 있는 건 세상에 너 하나 뿐이야?”

“…….”

“나는 사람도 아니야?”


순간적으로 움찔한 오이카와의 어깨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마츠카와는 제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묻는다. 까드득, 하는 섬뜩한 소음이 잇새로 튀어나온다.  


“형을 닮은 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냐 묻고 있잖아.”


뒤통수를 쾅 얻어맞은 감각에 오이카와가 처음으로 시선을 떨군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속에서 겹쳐 보이는 건 류세이와 잇세이가 아닌, 자신과 잇세이. 


그래도 오이카와는 뻔뻔해지는 길을 택한다.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이 장대비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한 쌍의 시선 너머에. 그 안에 비치는 것이. 누구도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걱……정이라도 했나 봐.”


으슬 거리는 추위 탓에 드문드문 떨리는 말머리가 애써 화제를 돌린다.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제는 빗물과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야 그렇겠지. 친형이 동성애자가 되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와, 알았어. 이제 이해했어. 그래서, 그딴 식으로 말한 거구나.”


칠흑 같던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내린다. 이마에 들러붙은 그것은 특유의 구불거림을 잊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매달린 물방울이 매끈한 콧날을 타고 미끄러진다. 


“걱정 마. 난 내 처지 잘 알아. 만약. 아주 만약, 그때의 내가 류의 경고를 무시했더라면. 무턱대고 고백을 했더라면. 내 마음을 우선해 대뜸 좋아한단 말부터 꺼냈더라면.”


입술에 생기가 사라진다. 소나기를 흠뻑 맞은 성대가 설움으로 복받친다.


“……뻔하지. 뻔한 결말이야. 눈에 선해. 알아. 안다고.”


숙여져 있던 고개가 번쩍 올라간다. 눈망울 한가득 차오른 울음이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할 자격도 없는 건 아니잖아.”


서럽게 토악질해댄다.  


“좋아하는 건 내 자유잖아…….”


수분을 잔뜩 빨아 당긴 운동화가 바윗덩어리마냥 무겁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느릿느릿, 묵직한 무릎과 다리를 옮겨낸다. 팔을 든다. 비에 젖은 와이셔츠가 반쯤 투명해져 뽀얀 살결을 비친다. 


“잘 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내가 류를 포기해서 잘 됐단 말이야? 고백도 못 한 내가 멍청이고 이기적인 거고 나쁜 거였니? 나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류가 결혼한단 얘기 듣고도 안 울었다고. 내 나름대로 배웅도 해줬다고. 결혼식은 못 갔어도, 속으로 제대로 응원했다고. 류가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고. 류의 행복이 내가 될 수 없다면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셈이었다고.”


주먹을 쥔다. 내리친다. 실없는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내리친다. 


“결국은……! 버텨 냈잖아. 지금까지 잘 견뎌왔잖아. 어떻게든 잘 참았잖아. 여태껏 안 울고 잘 버텨왔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잡음 없이 좋게 좋게 끝낼 수 있었잖아.”


퍽, 퍽.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그를 내친다. 


“근데 넌 왜 그러니. 왜 날 비참하게 만드니. 내 노력들 왜 다 헛수고로 만들어. 내가 이렇게…이렇게 흉한 몰골로 울어 제끼는 게, 그렇게나 보고 싶었니? 어?”


마츠카와는 그를 제지하지도, 막아서지도 않는다. 


“말할 생각 추호도 없었는데. 그때도 울지 않았는데. 다 괜찮았는데. 류 얘기도 그냥.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됐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졸업이고 네 지긋지긋한 낯짝이랑도 끝이고, 류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는데!”


가만히 맞고만 있을 뿐이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에 그래. 내 일정이 엉망진창으로 틀어진 건, 전부 너 때문이라고.”

“…….”

“제발. 나 같은 애는 내버려두고. 니 갈 길 알아서 가면 안 될까?”

“…….”

“나한테 상관 하지 좀 말라고. 어디로든 꺼지라고.”

“…….”

“부탁이니까…….”


의미 없는 주먹질을 반복하던 느린 손이 멎어 간다. 꾹 쥔 주먹과 창백한 손등과 그 위에 고인 빗방울이 발작하듯 떨리고 있었다. 뭉텅이로 흘러내리는 물 자욱에서 지긋지긋한 눈물 냄새가 났다. 


“형이니까.”


한동안 대꾸조차 없던 마츠카와의 입이 조금씩 달싹인다. 


“나는 형이 아니니까.”


빗물이 그의 눈가를 타고 흐른다. 


“난 그 말이 싫었어.”


건조했던 눈가가 차츰, 불그스름하게 젖어간다. 


“줄곧.”


아마. 오이카와는 예상조차 못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만약 오이카와에게 선견지명 비슷한 것이 있었다면 이다음에 벌어질 마츠카와의 행동을 진즉에 알아채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을 테니까. 


“……관계있다면 어쩔래.”


남자치곤 가느다란 손목. 톡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뼈대. 한 쌍의 그것을 단숨에 낚아챈 마츠카와가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는 오이카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한다. 


“놔.”

“가만히 듣고만 앉아 있으니까 내 귀는 꽉 막힌 줄 아나 봐.”

“놓으라고.”

“뭐? 동생이니까 말려? 동성애자가 뭐가 어째?”

“손 놓으라고!”


뼈가 으스러질 만치 꽉 붙잡힌 팔목이 보기 안쓰럽게 발버둥을 친다. 그에 아랑곳 않는 입이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웃기지 마.”


낮게 포효하는 음성에 갈피를 잃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바닥에 접착제를 붙인 마냥 얼어붙은 다리는 뒷걸음질조차 허용치 않고 붙들린 팔들이 일방적으로 끌려간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가까스로 닿는 타인의 뺨이, 그 투박한 피부 결이, 축축한 냉기가 낯설어


“언젠가 말한 적 있지.”


마침내 오이카와는 제 눈을 질끈 감는다. 스스로는 차마 뿌리쳐낼 수 없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닫고


“너랑은 친구 하기 싫다고.”


귀를 막고 싶었다. 


“반했다면 어쩔래.”


쏟아지는 빗소리에 제 몸뚱어리 하나를 온전히 내던지고 싶었다. 


“내가 너 좋다 하면 어쩔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라고 오이카와는 간절히 바랐다. 


“네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네가 날 봐줬음 좋겠다고. 형이 아닌 나를. 순수하게 나만을 바라 봐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너 어떡할래.” 


중심이 기울어진다. 땅 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줄 알았던 다리가 기우뚱, 앞으로 쏟아진다. 


“첫눈에 알았어. 네가 날 ‘나’로 보고 있지 않구나. 나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겹쳐보고 있구나. 처음엔 싫었어. 귀찮았어. 짜증도 났어.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일일이 따지고 싶었어.”


얕게 불거져 있던 콧날이 널찍했던 가슴팍 한가운데로 모습을 감춘다. 


“근데. 그 사소한 몇 마디가……. 도무지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 다른 애들하곤 하하 호호 잘만 웃고 떠들다 가도, 나만 발견했다 하면 정색하고 눈을 피하다 결국엔 어색하고 입 꼬리만 올리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말이 다 안 나오더라.”


두툼한 수갑에서 해방된 손목엔 시퍼런 멍이 남아 있었다. 뒤로 돌아간 큰 손이 연갈색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또 다른 손이 추위에 떨고 있는 등을 감싸 안는다. 


“그 날 말이야. 오늘처럼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와 네가 우연처럼 형을 대면하게 됐던 날.”


깨진 도자기를 어루만지듯 그것을 조심조심 끌어안는다. 


“아무리 모른 척 넘기려 해도, 소용이 없었어.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 섬세한 손길에 놀라 되려 토끼 눈을 하고만 오이카와는 이내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는다. 


“……그렇구나. 내가 아니었구나. 형이었구나. 형이란 사람을 내내 가슴에 품고 있었구나.”


가슴팍 정중앙에 어정쩡하게 걸쳐져 있던 손바닥이 천천히 옷깃을 잡아 끈다. 


“형 앞에선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나한테는 물론이고, 모두의 앞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 말투. 표정. 생기. 그것들을 가만 보고 있으니까.”


억세게 쥔 손아귀를 따라 옷감이 잔뜩 주름지고 있었다. 


“갑자기 확 열이 끓더라.”


눈두덩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눈물 꽃이 낙화한다. 


“네가 형에 대해 일말의 감정을 갖든 갖지 않았든, 솔직히 잘 됐다 생각했어. 이제는 해방됐다 생각했어.”

“그만……해.”

“내 모습에서. 내 얼굴에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생각해버리고 마는 네가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거든.”


이러지 마, 거절을 말하려는 입과 달리 눈에선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진다. 상냥하게 뒷목을 보듬던 손바닥이 순간적으로 힘을 싣는다. 


“……좀 봐줘라.”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창백한 입술이 도장을 찍는다. 흐느끼듯 읊조린다. 


“이제쯤 되면 이 쪽을 돌아 봐줄 때도 됐잖아.”


이번엔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그를 안은 팔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놔…줘.”

“형은 널 보지 않아.”

“맛층 제발.”

“결혼도 했고, 애까지 낳았어.”

“말하지 말라고…….”


구겨진 캔 깡통마냥 우그러든 옷자락이 탁한 울음으로 얼룩진다. 


“너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단 말이야.”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던 실이 맥없이 끊어진다. ‘너 없이도 잘 지낸다’는 문장의 어디가 그토록 서러웠는지, 마침내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내가 잘해줄게. 행복하게 해줄게. 네 전부가 되어 줄게.”


하나뿐인 동아줄에 매달린 마냥 마츠카와를 붙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그의 등 뒤를 향한다. 


“내가, 너의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줄게. 그러니까…….”


줄어들기는커녕 쏟아지는 빗소리에도 지지 않는 오열 감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왜.”


꺽꺽거리는 곡조가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훼방 놓는다. 


“왜 그걸, 흐으…….”


그새 쩍쩍 갈라진 음조가 저절로 쇳소리를 낸다. 


“왜 맛층이 말해주는 거냐고.”

“좋아해.”

“나는 말이야. 널 기다린 게 아니었어. 여태껏 내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사람은. 네가 아니었다고.”

“좋아해, 오이카와.”

“그 말을 해주길 원한 건 네가 아닌데. 다른 사람인데. 전혀 다른데!”

“널 좋아해. 네가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꽉 붙든 손아귀가 어느새 마츠카와의 등을 내리치고 있었다. 고개는 한층 더 깊게 묻은 데 비해, 때리는 강도는 점점 더 거세진다.


“맛층이 아니라고 하잖아! 싫다 하잖아!”


눈물범벅. 콧물 범벅. 빗물 범벅. 


“알아.”


그리고, 울음 범벅. 


“그럼 왜……. 왜! 왜!!”


엉망진창인 몰골이 목에 핏대를 세운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기세의 매서운 눈매가 허공을 노려본다. 부릅뜬 원망 사이로 피눈물이 흐른다. 그런 흉한 몰골마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젖은 머릿결 틈으로 코를 묻는다. 진한 눈물 냄새와 더불어 희끗하게 풍겨오는 샴푸 냄새. 좋아하는 향. 기분 좋은 체취. 


“그렇게 울고, 화내고, 때리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마음껏 토해내.”

“아니라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우는 네가 죽도록 싫다가도, 이게 네 처음이자 마지막 슬픔이라면 용서할게.”

“아니라고…….”

“울어. 울어도 돼.”


귓가에 대고 곧장 읊조리는 속삭임이 비겁하다. 그를 극렬히 부정하고 싶은 머리와는 달리 ‘울어도 된다’는 말 한마디는 꼭 마법의 주문처럼. 눈물샘을 통제 불능으로 만든다. 원망과 애증이 한 데 뒤얽혀 있던 물빛 눈동자가 점차 순수한 슬픔으로 번져간다. 


오열이란, 참 간사한 부류에 속해 있다. 단순한 눈물로 끝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것은 전신으로 슬픔을 터뜨리는 것인지라. 하물며 오이카와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닌 몇 해에 걸쳐 겹겹이 쌓여 있던 것인지라. 그것을 온전히 토해내고 무너뜨리기까진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그것의 첫 단추를 흉하게 뜯어내 버리곤  그 곁에 있길 자처한 마츠카와는


“그리고 날 봐.”


또, 얼마나 긴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날 나로서 봐줘.”

“……바보야.”

“있는 그대로의 날 봐.”

“진짜 바보 멍청이야.”

“널 좋아하고 있는 내 모습을, 그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울고 있는 건 오이카와뿐만이 아니었다. 마츠카와라고 울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다만, 오이카와가 내내 짐짝처럼 움켜쥐고 있던 마음 덩어리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 제 것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목울대 아래 삼켜낸 슬픔이 삭여지는 소리를 낸다. 


“……많이, 기다려야 할 거야.”

“괜찮아.”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알아주었으면 할 뿐이다. 


“내가 맛층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몰라. 네 얼굴 보고 있다가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펑펑 울어 버릴지도 몰라.”

“괜찮아. 내 앞에서만 울면 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 있었다는 걸. 네가 다른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사랑했듯 나 역시도 오롯이 너만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내가 힘들게 할 거야.”

“다 감당할게.”

“절대 좋은 사람이 못 될 거야.”

“전부 각오하고 있어.”

“화도 잘 내고 신경질도 잘 내고 툭하면 나쁜 소리도 많이 할 거고 맛층 기대엔 전혀 못 미칠 거고 나도 모르게 상처 줄 지도 모르고. 예쁜 짓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할지도 몰라.”

“지금도 충분히 예뻐. 괜찮아.”


훅, 숨을 들이켠다. 속사포로 늘어놓던 단점들, 염두해주었으면 좋겠는 충고들이 모두 일시 정지한 채, 가만히 입안을 맴돈다. 속절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무거워진 눈꺼풀이 마침내 몸을 뉘인다. 마지막 물줄기가 눈의 가장자리를 타고 굴러 떨어진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잇세이.”


줄곧 바라 왔던 염원이 타인의 입을 통해 성취될 때의 서글픔, 애달픔, 설움. 누군가를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던,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비참함. 동경과 첫사랑의 경계선. 그 모든 감정들이 한 데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소낙비 사이로 추락해 쓸려간다. 그렇게 지나간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비란 없는 법이지만, 한 날 한 시에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은 찾기란 불가능이다. 어디에든 비는 내린다. 


그 비를 같이 맞아줄 이가 곁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마츠오이 교류회 원고

*마츠카와에게 큰 형이 있습니다. 

*BGM이 있습니다. 꼭 함께 감상해주세요. 




W. 멜




일기 예보엔 우산 그림이 제법 많았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풍기는 물에 젖은 흙냄새. 촉촉하면서도 습기를 흠뻑 머금은 바람의 숨결. 민트 색으로 페인트칠 된 창틀이 보다 짙게 물들고 있었다. 


“결국 쏟아지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창문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던 오이카와가 낮게 중얼거린다. 턱을 괸 채 바깥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는 것도 잠시, 하교 방송을 알리는 스피커와 함께 낯익은 음색이 그를 반긴다. 


“가자.”


오이카와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했다. 운동화 밑창이 물에 젖는 것도 싫었고 우산을 써도 아랑곳 않고 옷깃을 적시는 빗방울이 싫었고 특유의 눅눅한 물 냄새 또한 싫었다. 무엇보다


“정-말. 질리지도 않나 봐.”


비가 오는 날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그가 싫었다. 


“오늘은 우산 제대로 챙겨 왔거든?”


귓전에 닿은 익숙한 목소리에 돌연 팍 찡그려진 미간을 오이카와는 감추지 않는다. 


“알아.”

“이와쨩은.”

“말해 뒀어.”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


비가 올 때면 사람이 180도 바뀌는 것 같았다. 평소엔 언제 어디서 자신이 뭘 하든 어떻게 하든 신경조차 안 쓰던 사람이 비만 왔다 하면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 졸졸 쫓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제 발. 혼 자 가게 해주면 안 될까?”

“싫어.”


맥 빠진 한숨을 토한 오이카와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친다. 책가방 깊숙이 넣어 두었던 삼단 우산을 꺼내 보인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말이다.


“봤지? 우산 제대로 있다고.”

“그래도 같이 가.”

“맛층 너 진짜-”

“가자고.”


결국 백기를 드는 건 언제나 오이카와였다. 아무리 강력한 스파이크를 연속으로 쳐내도 철벽마냥 그것들을 모조리 막아서는 블로킹을 상대하는 기분이랄까. 스트레스도 이 정도면 한계치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당장 오이카와의 머릿속에선 마츠카와를 순순히 돌려보낼 만한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질 않았다. 


“알았어.”


활짝 펼친 우산이 빗방울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제법 굵게 쏟아지는 빗물 세례에 얇은 천이 진동한다. 작은 우산 하나를 뒤따른 장우산 하나가 뭉툭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날개를 펼친다. 흑백으로 가득한 그것은 성큼성큼 빗속을 헤치며 작은 우산의 옆을 지킨다. 


“너무 붙지 마. 물 튀니까.”

“응.”


먹먹한 소음 사이에서 오고 가는 대화는 지독히 건조하다. 발자국 하나를 내딛을 때마다 참방이는 물방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제. 너가 전에 말한 빵집 가봤어.”

“…….”

“우유 빵 맛있더라.”

“…….”

“다른 건 안 먹었어. 너가 먹어보란 것만 먹어 봤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다고.”


작은 우산이 걸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보폭을 맞추기 위해 장우산 또한 뒤늦게 속력을 내보지만, 주변에 물장구까지 튀겨가며 시작된 발걸음은 어느 새 달음박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따라오지 마!”


앞뒤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허벅다리에 맞춰 옆으로 맨 크로스백이 오이카와를 툭툭 건드린다. 눈에 거슬리는 그것을 한 손으로 붙잡아 아예 전력질주를 시작해버리고 마니 이번엔 


“같이 가자고.”


도망치기 바쁜 어깨 자락을 세게 붙들어 맨 마츠카와가 있었다. 행여 놓칠까 교복 와이셔츠에 잔주름이 잔뜩 새겨지도록 그를 붙잡고 있던 마츠카와는 턱 끝까지 올라온 거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고 있었다. 


“……맛층은.”


눈빛을 다 잡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을, 그 안에 담긴 결심을 다 잡고 있었다. 


“꼭 비만 오면 이러더라.”

“…….”

“내가 그렇게 걱정되니? 내가 뭐 죽기라도 한 대?”

“…….”

“아 좀 놓으라고. 아파 죽겠으니까.”


마츠카와는 조용히 오이카와를 응시한다. 붙잡은 손을 놓지도, 힘을 풀지도 않는다. 뚫어질 듯 꽂히는 시선에 날 선 짜증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우산 위로 곧장 추락하는 빗줄기가 시끄럽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뭐가.”

“너. 언제까지 나 피할래.”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비만 오면 나 피해 다니잖아.”

“내가 언제.”

“지금도 나 안 보고 있잖아.”


그제야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린다. 언제까지고 말간 초콜릿색을 띠고 있을 줄 알았던 그의 동공은 이미 짙은 고동 빛으로 얼룩져 날카로운 표독을 품고 있었다. 


“보고 있어.”

“안 본다고.”


확고한 대답에 오이카와가 일순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그 라고 고집을 부리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계속 말장난만 할 거면 나 먼저 갈래.”


남색 우산 아래, 언뜻 보기에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던 오이카와가 신경질적으로 마츠카와를 쳐낸다. 어깨를 옥죄던 족쇄는 쉽게 떨어져 나간다. 


“딸 이래.”


미련 없이 돌아설 줄 알았던 발길이 우뚝 멈춰 선다. 


“류세이 형, 딸 낳았대.”


차마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 마츠카와 입에서만큼은 결코 나오지 않았으면 했을 이름. 하루고 이틀이고 일 년이고 삼 년이고, 언제까지고 감출 수 있으리라 믿었던 마음. 이뤄질 수 없는 소망. 마츠카와 잇세이 한 사람 만큼은 몰랐으면 했던 진심. 


“알고 있었어. 오이카와 네가……. 나랑 형을 겹쳐 보고 있었던 거.”


오이카와 토오루는 마츠카와 잇세이의 형, 마츠카와 류세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  *  *



류세이는 교사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키타이치로 진학한 나의 첫 담임이었다. 


류세이는……. 조금 이상한 교사였다. 깡패를 연상케 하는 험악한 외견은 처음뿐이었다. 얼굴과 매치되지 않는 시원한 눈웃음을, 습관처럼 지을 줄 아는 교사였다. 사사건건 학생들을 골탕 먹이는 교사였고 앙갚음이란 학생들의 살벌한 복수에도 호탕하게 웃으며 어울려줄 줄 아는 교사였고 주먹다짐을 권장하는 교사였으며 일방적인 구타는 용서하지 않는 교사였다. 즉, 선생과 학생이라는 벽을 만들지 않는 교사였다. 


‘류세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류’라 불리게 되고부터 류는 급속도로 격식을 없애며 학생들 속에 녹아들었다. 류, 라는 부름은 우리들 사이에서 너무나 당연한 호칭이었고,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꼭 나이 많은 형 같은 친근한 선생. 내 안에서 류의 이미지란 딱, 거기까지였다. 


그랬어야 했다. 


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렇게 느꼈던 때가 언제였더라. 


고백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불려 나갔다. 뒤뜰이든 옥상이든 교문 앞이든 편지를 통해서든 남의 입을 통해서든 어떤 방법을 써서든. 고백을 받았다. 나를 좋아한다며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뺨을 붉히며 부끄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짓으로 떠들어대곤 했다. 


배구부의 주전 세터가 되었다. 볼 컨트롤도, 테크닉도, 체력도, 성장 속도마저도 독보적이었다. 명실상부한 팀의 사령탑이 되어 있을 무렵엔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쟤는 타고난 수재라고. 장차 배구 계에 큰 획을 그을 아이라고. 


항상 그랬다.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수려한 외모에 혹해 교제를 위한 고백을 마다하지 않았고 뛰어난 배구 센스에 이렇다 할 결과를 원했고 배구 부를 겸하면서 공부까지 잘한단 이유로 모범생의 틀을 씌워 왔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끔. 


“피곤해 보이네 토오루.”


축축한 비 냄새가 났다. 우산이 없는 두 손은 갈 길을 잃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마실래? 내가 애용하는 특제 피로 회복제.”


한 사람도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우산이 내게 손짓했다. 자양강장제라 쓰인 조그만 유리병이 투박한 손바닥 안에 감겨 있었다. 어두침침한 먹구름 아래 유일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 * *



“……헤에, 잘 됐네.”


빗줄기가 한 층 더 굵어진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발에 성난 바람이 힘을 보탠다. 시커먼 하늘 틈새로 간간이 빛이 번쩍인다. 하늘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뭐가.”


불만 섞인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축하한다 전해줘.”

“니 입으로 말해.”

“류를 닮은 딸이면 무지 귀엽겠네.”

“결혼식도 안 온 주제에.”

“류는 참견 쟁이니까. 쓸데없이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형이 섭섭해하는 거 알긴 알아?”

“있지 맛층. 비 쏟아지잖아. 천둥번개도 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제발. 좀 빨리 가면 안 될까, 응?”


남색 우산이 앞으로 숙여지며 자연스레 그늘을 만든다.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다갈색 눈동자 한 쌍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간다. 


“넌 여전한가 봐.”


비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 *



류는 학생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었다. 어린 학생들 각각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성적에 따라서도 외모에 따라서도 집안 배경에 따라서도 학생을 차별하는 법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공평했고 또 균등했다. 


그 점이 더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류 또한 여학생들의 고백을 이따금씩 받곤 했다. 바로 거절해 버리곤 했지만 줄줄이 이어지는 고백 세례는 해를 거듭해 갈수록 류를 알게 모르게 괴롭혔던 것 같다. 고백의 이유는 알 만 했다. 험악한 인상이란 첫 이미지는 싱그러운 웃음 아래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언제나 학생 하나하나를 대충 대하고 넘기는 법이 없었고 아닌 척하면서도 그들의 성장 통을 세심하게 관찰하곤 했으니까. 즉, 이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게 동성이든 이성이든 간에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류가 아무리 남다른 사람일지라도 그에겐 그 나름대로의 절대 방어선이 있었다.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다. 어찌 됐든 ‘교사’라는 것.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있게 대우하고 있는 인격체들은 어디까지나 ‘학생’이라는 것. 류는 그 선을 철저히 지켜왔다. 이슬비 젖듯 류에게 천천히 잠식당한 내 마음이 갈 곳을 잃은 것 또한 


“지금 하려는 말.”


그 때문이었다. 


“안 하는 게 좋을 걸.”


내 짝사랑은 짧았고, 또 깊었다. 끝끝내 ‘말’이란 형태로 내뱉지 못한 불쌍한 감정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졸업했다. 이도 저도 아닌 불완전한 마음은 목구멍 아래로 깊이 잠겨갔다.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속설 따위 내겐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낯선 거리감은 류와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고백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을 이별로 마무리하지 않아서, ‘또 봐’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그런 류를 언젠가는 무덤덤한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성숙하지 못한 때 한 순간이나마 좋아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들 블로커를 했습니다. 마츠카와 잇세이입니다.”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이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언제나 류 혹은 류세이로 기억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불려지길 원했고 소원대로 불러주었다. 그렇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눈웃음에 가려진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나 은근하게 다부진 몸 선이나 하다못해 애인의 유무나 생일이나 가족 관계 같은 중대한 일조차 모르고 있었다. 


“……카와.”


어떻게 보면 사랑. 또 어떻게 보면 동경. 어쩌면 나는, 동경과 사랑의 사이를 헷갈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


눈매가 닮아 있었다. 조금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이 닮아 있었다. 비죽 튀어나온 무뚝뚝한 입가가, 흥미를 돋우는 것을 보면 살그머니 씩 웃고 마는 눈웃음이, 때때로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차분한 표정이. 


“내 얼굴 뚫어지겠다.”


이마를 가볍게 튕기는 손가락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무슨 얘기 중이었지?”

“이와이즈미- 얘는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력이 퇴화하냐.”

“2학년이 되고 한층 더 꽃을 피운 이 오이카와씨의 미모력을 얘기하고 있었나?”

“진지하게 알츠하이머 검사 좀 받아보자 오이카와.”

“맛층 진짜 너무한 거 알아?”

“근처에 빵집 새로 생겼다며. 거기 갔다가 다음엔 어디 갈까 생각하고 있었잖아, 바-보.”

“아…하! 아하. 그래, 그래. 그랬지. 그럼 어디 갈까?”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탄탄면.”

“있지. 뭔가 이상하지 않아? 선택지 없지 않아?!”

“만두 추가.”

“아악 알았어, 알았어! 우유 빵 사고 라면 먹으러 가면 되잖아!”


그제야 마츠카와는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마구 헤집어 흐트러뜨려 놓았다, 에 가까웠지만.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한없이 익숙하다가도 묘하게 낯설었다. 내가 기억하는 류세이보다 앳된 얼굴이 교복을 입고 나와 대화를 하고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만 치부했던 것 같다. 마츠카와가 류를 닮은 것도 류의 이목구비가 비치는 것도 사소한 행동이나 손짓에서 류가 떠오르는 것마저도. 전부 내가 멋대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나 좋을 대로 마츠카와를 류로 겹쳐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마츠카와와 류의 관계성이란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내 기억 속의 류는 언제나 어른스럽고 큰 사람이었고 


‘지금 하려는 말.’

‘안 하는 게 좋을 걸.’


머나먼 존재 같았으니까. 



* * *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

“마음이라면 이미 접었어.”

“…….”

“오래전에 포기했다고.”

“…….”

“근데 왜 자꾸 그 이름 들먹이니. 왜 나 쫓아오니.”

“…….”

“왜 날 가만 내버려두지 못해 안달이 나셨냐고요.”


물비린내가 지독하다. 하늘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빗줄기는 굵어지면 굵어졌지 가늘어지진 않는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 빗물이 웅덩이를 만든다. 개 중 일부는 하수구로 몸을 내던진다. 이미 빗물로 가득 차 있던 하수구는 그것들 전부를 받아내진 못한다. 흙탕물이 분수처럼 낮게 솟아오른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마츠카와가 천천히 시선을 내린다. 바짓단이 젖고 있었다. 운동화 또한 젖고 있었다. 젖고 있는 건 오이카와뿐만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딱, 오늘 같은 날이었지.”


이렇다 할 요동조차 없는 건조한 음성에 오이카와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

“우리는 우산이 없었고.”

“…….”

“급한 대로 근처에 있던 우리 집에 갔고,”

“그만.”

“형을 만났지.”


장우산이 걸음을 뗀다. 거리가 좁혀진다. 작은 우산의 손잡이를 꾸욱 움켜쥐고 있던 손등 위로 큰 손 하나가 다가간다. 허옇게 도드라진 손등은 기어코 뒷걸음질을 친다. 



* * *



“아아. 어째 흐리다 싶었더니만.”


팔을 쭉 펼쳐내자 오목한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고였다. 운동장 위로 점점이 떨어지던 물방울은 금세 후드득 소리를 내며 난데없는 소나기로 돌변했고 


“엑, 나 우산 없는데. 맛층은?”

“나도.”


우산은커녕 쓸 만한 가림막 조차 없었다. 


“아악 짜증 나! 빵집 못 가게 생겼잖아!”

“뛰어가면 못 할 것도 없지.”

“싫어! 아침마다 드라이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비 맞으면 머리 세팅 다 망가질 거고 옷도 다 젖고 축축해지고…….”

“그래서?”

“이 아름다운 미모가 망가져 버린단 말이야!”


심통이 빵빵하게 난 얼굴로 먹구름을 쏘아보는 오이카와를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났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끔 하는 녀석. 그게, 내가 기억하는 오이카와였다. 


“일단 오늘은 포기하자.”


오이카와는 귀여웠다. 인정한다. 남자치곤 귀여운 편이었다. 날씨 하나에 방방 날뛰는 것도 귀엽고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뛰어난 자부심 또한 귀엽고 오늘처럼 당혹감에 찬 얼굴이나 뾰로통해진 몰골도 꽤 귀여웠다. 다만,


“너네 집이……. 걸어서 가기엔 좀 멀었지? 언덕 하나는 넘어야 했던 것 같은데.”


녀석에겐 버릇이 있었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 자주는 아니고, 이따금씩. 내가 잊을 만할 때마다 그것을 상기시키듯.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 갈래?”


멍한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여기서 한 블록만 가면 되거든. 가서 비 그칠 때까지만 있다 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니면 우산 빌려 줄 테니까. 그거 쓰고 가던가.”


그 시선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면 오히려 거짓 이리라. 입학하고 배구 부에 막 입부할 당시엔 그림자마냥 날 좇는 그 눈이 마냥 싫어 오이카와를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차라리 이유나 알자 싶어 말문을 틀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방긋 화답해주는 오이카와 때문에 반쯤 열린 입이 저절로 닫히곤 했다. 때때로는 거리감까지 느껴졌다. 이 이상 알려고 들지 말라는 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었다. 오이카와 본인은 전혀 티를 안 냈다 자부하고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집에 아무도 없을 텐데. 괜찮지?”


툭, 어깨를 건드리기 무섭게 화들짝 놀란 오이카와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분명 내가 말한 내용의 반도 이해 못 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한 지 약 1년. 이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오이카와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에 잠기는지, 내게서 누굴 비춰 보고 있었는지. 이제는 반쯤 포기해 버린 시점이랄까.


“가방 머리 위로 들어. 최대한 비 안 맞게 조심하고.”


태풍이 올라온단 소식도 오늘이 장마의 시작점이란 이야기도 없었다. 갑작스레 우리를 찾아온 소나기였고 그 굵기가 심상치 않았을 뿐이다. 비는 폭포수같이 쏟아졌다. 흙탕물을 발로 걷어찼다. 사방으로 튄 물방울이 내 뒤를 쫓아오던 오이카와에게로 흩어졌다. 뭔가 바락바락 대는 볼멘소리가 났다. 


비가 싫지 않았다. 뺨에 튀는 빗방울이 시원했다. 후덥지근했던 여름 냄새를 말끔히 씻어내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와 함께하는 지금이 즐거웠다. 잡히는 쪽이 지는 것 마냥 은근하게 승부욕이란 불을 지피는 이 단거리 경주마저 즐거웠다. 정작 오이카와는 이 짓궂은 날씨에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지만 말이다. 


“으아 다 젖었잖아아-”

“열심히 전력질주 한 결과지 뭐. 그 덕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고.”

“그야 맛층이 앞서 달리니까……! 물도 다 튀기면서!”

“그러게 빨리 좀 달리지 그랬어, 캡틴.”

“미워 죽겠어.”

“남의 미움을 먹고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이러는 거 보면 ……를 빼다 박은 것 같다니까.”


순간 내 귀가 잘못됐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면,


“뭐해? 안 들어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당연하다는 듯 나를 부추기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순간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뭔가가 내 발길을 붙들려했다. 이성이, 머리가, 불길한 촉이 전신을 들쑤셨다. 문구멍에 열쇠를 맞추려는 내 손을 저지하려 하고 있었다. 


“어라. 지금……. 열쇠 헛도는 거 아니야?”


아무도 없을 텐데. 


“안에 누가 있나 본데?”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난 부모님이 돌아오기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삿포로에 발령 난 이후 명절이 아니면 얼굴도 보기 힘든 형은 온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들어가자. 실례합니다~”


꺼져 있어야 할 부엌의 불이 켜져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복도까지 묵직한 짐과 캐리어가 늘어져 있었다. 낯익은 구두 한 켤레가 현관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형?”


설마 싶었는데.


“어! 오랜만이다, 잇세이?”


조금 짧아진 머리카락.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풍겨오는 비누 향. 시원시원한 웃음소리. 여전한 얼굴. 이 정도면 쌍둥이 아니냐며 닮은꼴 소리를 질리도록 듣고 자란 얼굴. 


“올 거면 온다고 연락 한 통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왜 잊고 있었을까. 형이 교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키타이치에서 근무를 했다는 것. 오이카와가 키타이치 출신이라는 것. 


‘이러는 거 보면 ……를 빼다 박은 것 같다니까.’


그것들이 전부 내가 아닌, 형을 향한 시선이라는 것. 오이카와가 줄곧 감추기 급급했던 마음들, 시선들, 감정들은 전부 나의 형을 가리켰다는 것.


“이 녀석 봐라. 니가 그러면 내가 꼭 특별한 일 있어야만 집에 오는 사람 같잖아.”

“실제로도 그렇잖아.”

“뭐……. 그간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바쁘긴 했지.”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젖은 바짓단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발걸음을 떼는 족족 물기 흥건한 발자국이 복도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하다못해 반기는 기색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요, 동생님.”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섰나 보다. 나와는 달리, 형은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불평을 토로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적당히 손사래를 치며 형에게 가벼운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형이 픽 웃는 소리가 났다. 


그래. 저게 형이었다. 아무리 닮은꼴이라 할지라도 형과 나는 달랐다. 잘 웃지도 않았고 말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형만큼 오래 산 것도 아니었으며 사람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볼 줄도 몰랐다. 나와는 극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전혀 다른 인격체였다. 


“좋은 소식 있거든.”


욕실부터 들렀다. 마른 수건 두 개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 하체를 다 덮고도 남을 큰 타월 하나를 품에 안았다. 젖은 머리를, 뺨을, 목을, 옷을 가만히 닦고 있자 궁금증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그나저나 우리 동생님 몰골이 말이 아니네. 비 쫄딱 맞았어?”

“응. 우산 없었거든.”

“형님 부르지.”

“형님이 계실 줄은 몰랐지.”

“서프라이즈 컨셉이야.”

“뭐래.”


적당히 물기를 닦아내고 욕실을 나서자 잊고 있던 존재가 퍼뜩 떠올랐다. 즉, 오이카와는 형에게 어떠한 감정이 있었고 나에게서 형을 겹쳐 보고 있었고 내게 형이 있는 줄은 몰랐을 거고 내 지레짐작이 맞다면,


“맛층 말이야.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지 않아?”


엿 같은 삼자대면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점이다. 



* * *



“형?”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기. 찝찝한 습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 


“어! 오랜만이다, 잇세이?”


불쾌한 감각. 


“올 거면 온다고 연락 한 통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기운.


“이 녀석 봐라. 니가 그러면 내가 꼭 특별한 일 있어야만 집에 오는 사람 같잖아.”


어딘가 낯익은 음성. 희끗하게 풍겨오는 익숙한 체취. 예리하게 곤두선 촉. 절대 빗나간 적이 없는 육감. 


“실제로도 그렇잖아.”

“뭐……. 그간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바쁘긴 했지.”


반가운 기분과 동시에,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버벅 거리는 사고는 촉이라 불리는 야생적인 감각보다도 느리게 움직였다. 기다란 복도 끝, 형광등 아래의 역광에서 흐릿하게 비치는 실루엣. 


“하다못해 반기는 기색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요, 동생님.”


동생. 동생과 형. 형과……동생? 


“좋은 소식 있거든.”


얼핏 들린 김 빠진 웃음소리에 오한이 돋았다. 사나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미소.


“그나저나 우리 동생님 몰골이 말이 아니네. 비 쫄딱 맞았어?”

“응. 우산 없었거든.”

“형님 부르지.”

“형님이 계실 줄은 몰랐지.”

“서프라이즈 컨셉이야.”

“뭐래.”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 톤의 고저. 생긋 휘어지는 눈가. 직접 보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지는 얼굴. 꿈에서나 그려보았던,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었던 사람. 


“맛층 말이야.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지 않아?”


끝에 가선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말았다. 그래도 티는 안 났으리라. 워낙 작게 중얼거렸으니까. 그래도 마츠카와는 귀신같이 내 말을 알아챘는지 금세 고개를 내밀었다. 뒷목에 걸친 수건, 조금 전보단 덜 젖어 보이는 머리칼, 류를 닮은 이목구비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뭐야~ 손님이 있었어? 누구? 여자 친구?”


불행히도, 내 의문에 답변을 내준 사람은 마츠카와 아닌 또 다른 인기척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특정인을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는, 낯익은 뉘앙스는. 


“아니거든. 뭐해, 안 들어오고.”


나를 헷갈리게 하기 충분했다. 


“이걸로 대충 닦고 있어. 생각보다 많이 젖었……. 아, 차라리 욕실 가서 몸 좀 녹이고 있어라. 갈아입을 옷 빌려 줄 테니까.”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수건이 머리를 덮었다. 문지르는 손길이 투박하긴 했어도 사납진 않았다. 제 나름대로의 배려를 욱여넣은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 맞네. 손님께 얼굴도 안 비추고 뭐 하고 있었니, 나. 잇세이는 부엌에서 물 좀 끓여 줄래? 지인 분께 맛있는 홍차 얻어 왔거든.”


가까워지는 발걸음. 크레셴도로 점점 크게 귓전을 울리는 음성. 내게 오다 말고 우뚝 멈춰 선 걸음. 차츰 확장되는 동공. 


“토오루?”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류?”


그 순간만큼 아찔했던 찰나는 내 남은 평생을 다 걸고 결코 없었으리라.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모든 시간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채 이 좁은 공간 안에 류세이와 나만이 오롯하게 숨을 쉬고 있었던 것 같다. 또 다른 마츠카와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이다. 


“이야~ 오랜만이다!”


류는 한 달음에 달려왔다. 


“둘이 친구였구나. 아~ 잇세이도 아오바죠사이 간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그렇지. 친구일 수도 있겠구나. 와, 근데 토오루 진짜 많이 컸네. 지금 신장 몇이야? 180 넘지 않았어?”


몇 년 만에 보는 동창을 훑어 내리듯. 간만에 보는 조카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는 삼촌처럼. 


“진짜…류? 내가 아는 류 맞아요?”


피부에 눌러붙는 눅눅한 습기를 단숨에 해치우는 시원시원한 웃음이 시야를 환히 밝혔다. 


“그럼 가짜겠냐.”

“류…세이. 류!!”

“오랜만이야, 토오루.”


그 사람이 류라는 걸 내 머리로 온전히 자각했을 땐.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류. 류! 류!! 보고 싶었다고, 이 바보 선생!”

“바보 선생이라니……! 엑, 그보다 차가워-”


180 가까이 되는 거구의 남성이 품에 안겨 봤자 기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도 류는 웃었다. 반갑게 웃어주었다. 마치 말 잘 듣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듯 자꾸만 품속으로 파고 드려는 내 머리를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었다. 비에 홀딱 젖은 흉측한 몰골이었음에도


“바보 선생 맞잖아!”


류가 반문할 틈은 주지 않았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얼마나 키타이치 찾아갔는데! 류 보려고 담벼락 넘고, 경비 아저씨한테 들켜서 쫓겨날 뻔하고, 나보다 한참 어린애들 눈총 받아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번씩 키타이치 주변만 맴돌았는데.”


괜한 설움이 복받쳐 고개를 들었다. 꾹 부여잡은 와이셔츠에서 류의 체취가 났다.


“말도 없이 전근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왜 말 안 해줬어. 왜 귀띔도 안 해줬냐고. 왜…….”


눈가가 저절로 시큰거리고 코끝이 알싸해지고 있었다. 류는 웃고 있었지만, 얼핏 곤란하단 표정이 엿보인 것도 같았다. 어떻게 좀 해봐, 라는 시선이 옆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게서 눈을 피하는 류에게서,


“그나저나 토오루 넌 또 왜 물에 빠진 생쥐 꼴인 거야. 둘 다 우산 없어서 여기까지 뛰어 왔구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애써 화제를 돌리려 애쓰려는 류에게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반가웠던 거야. 우리 잘생긴 토오루 얼굴이 아주 울상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토오루 쫓아다니는 여자 애들이 보면 기겁을 하겠다, 응?”


뭔가가 잘못됐다. 


“여전히 배구는 잘하고 있고? 혹시나 우리 잇세이가 괴롭히거나 하진 않지? 만약에 그런 일 생기면 나한테 다 말해. 저 녀석, 험악하게 보이긴 해도 나한텐 꼼짝 못 하거든.”

“어이.”

“사실이잖아? 동생 군.”


류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차츰 돌아갔다. 쌍둥이라 해도 믿을 법한 똑 닮은 외견. 다른 부분이라곤 류는 잘 웃고 마츠카와는 잘 웃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래서 였을까. 마츠카와가 살짝씩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 사람이 떠오르곤 했다. 겹쳐 보고 싶지 않아도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감격의 상봉은 그쯤 하고. 이 짐들은 다 뭐야, 형. 선생 잘리기라도 했어?”


어딘지 모르게 가시 돋친 말투가 틱틱거렸다. 재회의 기쁨이 뜻 모를 아쉬움으로 이어지면서 기꺼이 제 품을 내주었던 류가 멀어져 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이 류의 동태를 눈으로 좇는다. 류의 주변에서만 빛이 일렁이는 것 같다가도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은 오롯이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부류의 것이었다. 

발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운동화 바닥은 물론이고 양말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벗고 싶었다. 벗어던지고 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벗어내어 이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아니.”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결혼하거든.”


류의 웃음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집에는 보고 하러 왔어. 저기 널브러진 짐들은 청첩장이랑 예물이랑 이것저것…….”


그런 식으로 즐겁게 말하는 류세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만났다는 반가움보다는 거절당했단 절망감으로. 소리 없이 꺼져 가고 있던 불씨가 타오를 수 있는 기회는커녕. 


“예비 신랑 준비물이라 하면 알아 듣기편하려나~”


그것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도록, ‘말’이라 불리는 양동이 물을 한 바가지로 뒤집어쓴 것 같아서. 웃음으로 가장된 손찌검을 몇 차례고, 몇 차례고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아서. 


“……토오루?”


나는 표정을 잃었다. 



=======



*분량상의 문제로 부득이하게 상, 하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엠프렉 소재 있습니다. 





W. 멜





쨍한 햇볕이 수직으로 낙하한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그를 비춘 민트 빛 파도가 눈부시게 찰랑인다. 갈매기 두어 마리가 바다의 지배자 마냥 빙글빙글 춤을 추고 또 다른 무리는 흔들리는 파도 위로 안착해 휴식을 만끽한다. 적당히 살랑거리는 바람, 적당히 부서지는 파도, 적당히 내리쬐는 햇볕이 바다를 누리기엔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을 자아낸다. 인파 많은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진 섬과 섬 사이의 한복판. 엔진을 끈 새하얀 보트가 바람결에 몸을 나부끼고 있었다. 


“바다 들어가긴 딱 좋은 날씨네요. 자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보트 가장자리에 올려둔 두 쌍의 물갈퀴 중 한 쌍이 미미하게 떨린다. 


“뭐야. 무서워? 손이라도 잡아 줄까?”

“아, 아, 아니거든.”

“이제 와서 싫다 해도 소용없는 거 알지? 돈은 벌써 냈으니까-”

“안다고!”


빡빡 우기긴. 

잠수복을 입을 때까지만 해도 물 만난 고기마냥 신난 표정을 짓던 토오루였건만 막상 10kg가 넘는 산소통과 지상에선 걷기 힘든 오리발을 착용하니 보기 안쓰러울 만큼 낯빛이 굳어져 있었다. 


“걱정 마. 강사님이 그랬지? 수영장이나 바다나 크게 안 다르다고.”


‘스킨 스쿠버가 하고 싶어!’


란 말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된 지난 일주일 간 수영장에서 보낸 피나는 연습 시간은 전부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웬 스킨 스쿠버? 다소 뜬금없는 토오루의 돌발 선언에 둘째인 아카네를 업고 있던 잇세이의 팔이 불안함으로 요동쳤다. 


‘그야 여름이니까! 우리 아카리 낳고 부터 휴가 한 번 제대로 못 갔잖아.’

‘너 뭔가 착각하나 본데. 얘네 아직 젖도 못 뗐거든? 애들 놓고 어딜 가.’

‘이와쨩한테 맡기지 뭐.’

‘펄펄 뛸 걸.’

‘괜찮아. 아카리랑 아카네는 귀여우니까. 귀여움으로 모든 게 용서 될 거야.’

‘그 뜻이 아닐 텐데.’

‘어쨌든! 스킨 스쿠버가 하고 싶다구우!’


결국 오랜 친구란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스러운 두 딸, 아카리와 아카네를 떠맡게 된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는 한 발 늦은 허니문을 떠나는 두 사람에게 10년 분의 욕을 뿌리는 지경까지 왔던 것이다. 


“역시…좀 무섭네.”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맛층 가끔 엄청 느끼한 거 알아?”

“가끔이 아니라 항상 이었으면 좋겠는데.”

“됐어. 말 안할래.”

“아차, 우리 여왕님 삐치면 답이 없는데.”


입으로는 투닥 거려도 사람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찰싹 달라붙어선 온몸으로 깨를 쏟아내는 두 사람에게 항복의 백기를 든 건 애꿎은 스킨 스쿠버 강사 쪽이었다. 


“하하하, 두 분 정말 보기 좋으시네요. 이제 잠수할 준비는 끝나신 거죠?”


마지막 심호흡이 토오루의 기관지를 타고 깊숙이 파고든다. 잇세이의 말마따나 무서울 것은 전혀 없었다. 잠수복 입는 요령에서부터 평지에서 오리발로 걷는 방법, 웨이트 벨트(Weight Belt) 사용법, 산소통 착용법, 수중 수화, 긴급 사태 대비 요령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그것들에 부족함은 없었다. 


“저도 뒤따라 잠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호령에 맞춰 입수해주시면 됩니다.”


투명한 빛으로 찰랑이는 파도. 그 아래로 힐끗힐끗 보이는 각양각색의 산호초들과 물결에 맞춰 헤엄치는 이름 모를 열대어 무리. 약속한 듯 물안경을 동시에 내려쓰고 스노클을 착용한다. 그토록 바라던 바다 속으로 입수하기 까지 앞으로-


“하나, 둘, 셋!”


나란히 허공으로 뻗어진 한 쪽 물갈퀴가 풍덩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사라진다. 크게 곡선을 그리며 튀어 오른 물장구가 이내 사그라든다. 

행여 눈 안에 짜디짠 바닷물이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던 마음은 수경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만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해수면 아래에 펼쳐진 것은 말 그대로 절경(絕景)이었다. 수면 위로 찰랑이는 햇볕을 길잡이 삼아 일렁거리는 바닷물 속은 파아란 잉크를 짙게 풀어헤친 것처럼 푸르른 색감을 강렬히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도 수면 가까이는 코발트 블루, 수면에서 멀어질수록 네온 블루로 빛나는 이 곳은 분명한 색의 낙원이었다. 그뿐일까. 끝을 모르는 해저에서 불쑥 솟아오른 산호초는 오색 빛의 가지를 뻗어 올렸고 잔잔한 해류를 바람삼아 좌우로 흔들리는 말미잘의 샛노란 촉수 사이론 자그마한 물고기들이 수줍은 얼굴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눈부신 해저 광경에 토오루가 넋을 놓은 사이, 잇세이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은 손가락이 수경 옆으로 올라가 앞뒤로 흔들린다. 즉, 잠수 직후 몸 상태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수중. 두 사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은 손을 이용한 수화뿐인 게 당연했다. 수경 너머로 기쁜 눈웃음을 내보이며 마찬가지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 토오루는 주먹 쥔 손에 엄지를 펴 아래를 가리킨다. 괜찮으니 보다 더 깊이 하강하잔 뜻이었다. 그러자 스노쿨링을 입에서 빼낸 잇세이가 산소통에 달린 보조 호흡기를 입에 문다. 얕은 해수면이라면 모를까 해저에선 스노쿨링만으론 호흡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토오루 역시 보조 호흡기를 입에 물고 코가 아닌 입으로 숨을 들이 마신다. 잠수한 이후부터 줄곧 산소를 갈구하던 폐가 겨우 한 시름을 놓는다. 


‘맛층! 저거!’


뭘 보고 놀란 건지 토오루가 다급한 마음에 손가락을 뻗어 보지만 아래로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수압에 손은 더욱더 느릿느릿 움직인다. 호흡기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거품이 잇세이의 시선을 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엔 바닷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과는 엄연히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문어야!’


말을 못하는 대신 눈으로만 감탄사를 연신 터뜨리는 그를 위해 잇세이가 한 발 빨리 헤엄쳐 내려간다. 여덟 개로 퍼진 미끈한 다리와 가로로 쭉 찢어진 눈이 바닷 속 불청객을 꺼림칙하게 노려본다. 그러다, 순식간에 시꺼먼 먹물을 찍 뿜으며 빠르게 산호초 틈새로 몸을 감춘다. 보호색까지 무장해버리고 난 뒤엔 그것을 쫓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과연 누가 모를까. 잠깐 기다려 보라며 턱짓을 한 잇세이는 조금 더 깊이 잠수하기 위해 허리를 수직으로 꺾는다. 뒤늦게 토오루가 그를 쫓으려 하지만 양 쪽 귀의 압력이 맞지 않는지 한 쪽 오리발을 들고 수중에서 깡총깡총 뛰어 다니는 꼴이 영락없는 토끼였다. 그런 토오루의 앙증맞은 자태를 곁눈질로 훔쳐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대로 그만두면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칭얼 거릴 테니까.’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었기에 토오루에 관한 것이라면 손바닥 보듯 훤한 마츠카와 잇세이다. 

산호초에 잠수복이 스칠 만큼 꽤 깊이 잠수한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양 다리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오리발이 바닷물을 한 번 차올릴 때마다 그 여파로 생긴 소용돌이에 물고기들이 쏜살같이 달아난다. 그러다가도 또 모여든다. 물고기 중 일부는 불청객에 대한 호기심마저 피어났는지 두 사람 주변을 끊임없이 맴돈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 한 거리에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던 그것들에게 그새 친근감이 생기고 만다. 


‘아. 저거 귀엽네.’


한창 산호초와 말미잘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잇세이의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 거대한 바닷조개가 입을 살그머니 벌리고 있는 등딱지 바로 위, 다섯 갈래로 힘껏 팔을 뻗고 있는 불가사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독…이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니 금세 몸을 뒤집는다. 경계 태세에 돌입한 건지 뻗은 가지들이 꿈틀거렸지만 그마저도 귀엽게 보일 뿐이다. 조심스레 엄지와 검지로 그것을 집어든 잇세이는 토오루를 놀래켜 주고 싶은 마음에 헤엄을 서두른다. 


‘그게 뭐야! 으아아, 얼른 치워! 치워줘, 맛층!! 잇세이!’


예상 범위 이내였지만 물속에서 잔뜩 질색하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토오루의 모습은 어째 또 새롭다. 


‘봐봐. 불가사리야. 귀엽잖아.’

‘하나도 안 귀엽거든! 아악!’


반응이 좋아 손수 어깨에 얹어주었더니 아주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동그란 기포들로 변해 부글부글 뿜어져 올라간다. 그것도 잠시. 이 이상 장난 쳤다간 수중에서 따귀를 맞는 귀중한 경험을 품에 안을 것임을 직감한 잇세이는 재빨리 태세 전환에 나선다. 진정하란 듯 양 손바닥을 펴 토오루에게 보여준 후 어깨에 찰싹 달라붙은 불가사리를 떼어내 작별 인사를 건넨다. 


‘미워.’


짧지만 길었던 수중 인사를 뒤로 하니 풍선처럼 빵빵해진 토오루의 볼이 그를 반긴다. 호흡기를 문 입술이 심술 맞게 툭 튀어 나와 있다. 잔뜩 열이 올랐을 토오루를 위한 최선책은 딱 하나. 


“읍, 읍!”


서로의 호흡기를 손수 떼어내 입에서 입으로 직접 산소를 운반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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