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거신 전화는 전원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전파가 닿지 않는 장소에…….]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휴대폰 플립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전화하랴, 숨 가쁘게 달리랴, 사람 찾으랴.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목을 칭칭 둘러싸고 있던 목도리가 땀에 차 습했다. 아예 무릎 위로 양 손을 얹고 거칠어진 입김을 몰아쉬던 이와이즈미는 애꿎은 것에 분풀이 하듯 목도리를 잡아 뺐다. 삼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는 것도 잠시. 아직 발걸음하지 않은 세 번째 갈래 길 너머로 이와이즈미는 다시금 뜀박질을 시작했다. 


겨울이란 계절의 이름도 끝을 맺어간다지만. 2월의 밤은 여전히 쌀쌀하다 못해 뼛속에 한기가 들어설 정도였다. 이 날씨에 길바닥 어딘가를 나뒹굴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오이카와!!”


말썽의 발단은 언제나 오이카와였다. ‘친구’가 낯설어지고 ‘우정’이 부끄러운. ‘연인’이 익숙하고 ‘사랑’이 당연한. 사랑해, 가 아침 인사처럼 튀어나오고 좋아해, 가 약간은 낯 간지러운 그들은. 자타가 공인한 오랜 커플이었다. 이렇듯 쉴 틈 없이 깨를 볶고 사랑을 속삭여야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추운 겨울날 온갖 분노를 폭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싸웠다. 요 근래 싸우지 않은 날의 횟수를 꼽으라면 양 손으로 헤아려 볼 수 있을 만큼, 두 사람 사이에 부는 칼바람은 도통 잦아 들지 않았다. 이유라고 특별나지 않았다. 침대의 창가자리를 두고, 샤워를 오래 한다고, 하루 종일 삐졌단 티를 낸다고, 말 한 마디 져주려고 하질 않는다고, 예전이랑 다를 거 하나 없다고, 툭하면 예전 일을 들먹인다고. 


싸운 것까진 좋았다. 딱 거기까지 였다면, 어느 한 쪽이 숙이고 들어가 화해를 이룩하면 그만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그것은 오롯하게 이와이즈미의 몫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만하자.’

‘뭘 그만해. 할 말이라면 아직 태산처럼 남았어.’

‘나! 이와쨩이랑 싸우려고 연애하고 싸우려고 같이 살고 싸우려고 살 섞는 거 아니야. 연애는 나 혼자 하니? 나만 연애해? 나 왜 만나? 요즘 이런 생각들만 해. 이게 행복한 걸까. 진짜 연애가 맞을까.’

‘……후, 또 그 소리야? 이제는 좀. 알아줄 때도 됐잖아. 오래 사귀었잖아. 이런 것도 이해 못해주면 연애는 어떻게 하고 사랑은 또 어떻게-’

‘이와쨩도 알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한 순간부터 연애는 한 풀 꺾인 거라고.’

‘그 이상……. 입 열지 마.’

‘싫은데. 내가 왜?’

‘하지 말라 하면 좀, 하지 마.’

‘헤어져.’


격에 다다랐던 싸움을 한 순간 허무하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다. 처음엔 효과가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미안하단 사과를 읊조렸고 상처 받았을 오이카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것을 손쉽게 얻어낸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나마 승리자가 된 것 같았다. 더 큰 사랑이란 기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 ‘처음’이 어려웠을 뿐. 두 번째, 세 번째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이와이즈미의 언성이 조금만 높아지면 오이카와는 ‘헤어져’를 무기 삼아 꺼내들었다. 그것을 비장의 카드 삼아 기세등등해진 오이카와를 대하는 이와이즈미는 오죽했을까. 처음엔 미안했고 두 번째는 껄끄러웠고 세 번째엔 한숨이 나왔다. 작작 좀 해라. 셀 수 없는 횟수만큼 이별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돌아왔을 무렵 마침내 이와이즈미는 짜증을 섞었다. 크게 상심한 오이카와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고 이와이즈미는 그마저 좋게 보질 못했다. 


결국 도피처로 삼은 것이 하나는 가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홧김에 쏟아 붓는 술이었다. 머리가 알딸딸해질 만큼 빈속에 알코올을 들이키고 나면 쌀쌀한 거리를 홀로 배회했다. 개중 눈에 띄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다, 홀린 듯 동전을 넣고 손에 익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가진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대꾸 없는 발신자에게 차츰 윽박을 지르곤 했다. 오이카와냐, 어디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야, 너 자꾸 이럴래, 어디까지 날 속상하게 만들 건데 등. 처음부터 끝까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그리고 잔소리. 잔소리로 귓전이 따가울 때 즈음 오이카와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곤 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된 ‘미안해’는 가슴 먹먹한 ‘잘못 했어’로 이어져 마지막엔 울음으로 제 서러움을 호소했다. 


전부 거짓말이고 농담이었단 말이야, 섭섭해서 홧김에 아무렇게 내뱉고 만 거라고, 헤어지지 말자, 그러지 말자,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 말 그대로 믿은 거 아니지, 나랑 진짜 끝내려 한 거 아니지, 내 생각 전혀 안 난 거 아니지, 내가 안 보고 싶어진 거 아니지. 나는 보고 싶어. 이와쨩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보고 싶단 말이야. 


결국엔 ‘보고 싶다’였다. 그마저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폭언은 공중전화 속 50엔이 전부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버거웠고, 그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도중에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있다 애꿎은 머리칼만 잔뜩 헝클어뜨려야 했다. 


오늘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집에 돌아오고 보니 있어야할 사람이 없었고 ‘토오루’가 아닌 ‘하나마키’란 이름의 부재중 전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술 먹고 푸념을 듣는 것까진 좋았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라져 있었다고. 언제 걸려올지 모를 전화 한 통에 의지할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제 연인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진짜.”


한참의 공방전 끝에 찾아낸 오이카와는 흔한 공중전화박스 바로 옆, 어두침침한 그림자 속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차라리 안에 들어가 있지. 힘껏 뛰었는데도 손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추위였다. 이 날씨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친 채 거리를 떠돌았을 오이카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저절로 울화통이 치미는 것 같았다. 


“코트라도 입고 나오던가. 이러다 감기 걸리면 뒷수습은 누가 해주는데.”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그런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이와이즈미가 한 손에 들고 뛰었던 목도리를 오이카와의 휑한 목 언저리에 둘러 주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이와…쨩?”


술도 못하는 게 들이 붓기는 또 얼마나 들이 부었는지. 목도리를 둘러준다 자세를 낮췄더니 스멀스멀 풍겨 오는 술 냄새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붕어를 생각나게 하는 퉁퉁 부은 눈두덩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겨우겨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곤 또 한 번,


“이와쨩!!!”


눈물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시간 홀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주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펄쩍 안겨 들 듯. 오이카와는 저와 눈높이를 맞춘 이와이즈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곤 그의 가슴팍 한 가운데 울음이 터진 꼴 사나운 안면을 깊이 묻었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이와이즈미가 뒤로 벌렁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어 버리고 말았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대체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단 말이야. 흑, 으앙-”


허,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이와이즈미는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안기며 엉엉 우는 오이카와의 머리통에 꿀밤 한 대를 힘껏 쥐어주려다, 이내 포기했다. 벌겋게 부은 눈가와 대비되는 낯짝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가 가시다 못해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등을 묵묵히 쓸어내려 주었다. 손바닥을 통해 지독한 냉기가 전해져 왔다. 이와이즈미는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었던 말들과 혈류가 거꾸로 솟구쳐 오를 만큼 격해져 있던 울화를 삼켜내고 가라앉혔다. 사실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분노 따윈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분풀이보단 오이카와의 심신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를 발견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의 안위부터 확인하고 마는 자신에게 이와이즈미는 진즉에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절실해 보였다. 벼랑 끝으로 내몰려 낭떠러지 아래의 까마득한 어둠에 잔뜩 겁을 먹은 사람처럼. 그것은 이와이즈미의 옷자락을 꾹 붙든 손아귀에 도드라진 핏줄로 증명되어 있었다. 그러니 항복해야 할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단 좀 비켜봐.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거 안 부끄럽냐.”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그러쥔 이와이즈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부정적인 말에 오이카와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싫……어.”

“오이카와.”

“싫어.”

“안 비켜?”

“싫다니까!!”


고집불통. 이와이즈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뒷머리를 벅벅 긁적이다, 오이카와에게 등을 보였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무언의 손짓을 보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의 행동거지에 오이카와가 머뭇거릴 때면 이와이즈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마음 따위 훌훌 털어낸 것 같은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뭐해? 안 업히고.”


그제야 오이카와는 수분으로 불어터진 눈가를 살짝 휘어 보였다. 허락만을 기다린 사람마냥 그의 다부진 등 위로 넙죽 업혔다. 건장한 성인 장정 하나를 든 탓에 이와이즈미의 무릎이 순간적으로나마 부르르 떨렸다. 그마저도 잠시, 튼실한 팔 근육은 오이카와가 미끄러지지 않게끔 그의 허벅다리 뒤쪽을 세게 감싸 안았다. 


“헤헤 이와쨩 등 오랜만이다아~”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버둥버둥 거리지 좀 마, 이 망할카와.”

“이와쨩 나 많이 무거워?”

“말이라고 하냐.”

“이와쨩 나 많이 사랑해?”

“말이라고 하냐.”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한 높낮이 없는 음성에 오이카와가 부루퉁 입을 내밀었다. 어깨 부근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바닥이 단숨에 이와이즈미의 목 언저리로 이동했다. 


“……성의가 없어. 매정해! 차가워! 미워 죽겠어!!”


목덜미를 쥔 손아귀에 퍽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인 압박을 받은 이와이즈미의 숨통이 급박한 SOS신호를 보냈다. 불행히도 오이카와는 완고했다. 


“뭐……. 윽, 오이카와!! 맞고 싶냐?! 야, 숨, 숨 막-”

“나 사랑하냐구!!”

“당연한 거 자꾸 꼬치꼬치 캐물을래?! 이 손, 손부터 놓고 말해라, 앙?!”

“진심과 열정과 정성을 다해서 말해 달라구우!!!”

“어, 좋아 죽겠다! 사랑해서 돌아가시겠다!! 눈앞에 아주 황천길이 보일만큼!!”


어찌나 오래 잡고 있었는지,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그마저도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면 정말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덜미를 붙들고 있을 심산이었나 보다. 부족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쉰 이와이즈미는 일순 뒤통수를 힘껏 젖혀 오이카와의 이마에 왕방울 만 한 혹이 날 만큼 박치기를 할까라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관두고 말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붕어 눈깔 저리가라 할 정도의 눈탱이 밤탱이 꼴을 한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단 극명한 쾌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려한 낯짝이 못난이가 되는 과정을 상상하다 이내 푸하하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곧장 와 닿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거렸다. 


내일이면 또 하찮은 이유를 들먹이며 싸울지 모른다. 습관처럼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현관을 뛰쳐나갈지 모른다. 그런 오이카와를 뒤쫓아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 어느 순간 무료해질 지도 모른다. 의미 없다고, 부질없다고 생각할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그림자만 남겨 버린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쫓아가리라. 술에 취해 행방불명 된 채로 울고불고 화를 내다 마지막엔 저를 찾고 그리워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이유인즉,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단하님 캘리그라피입니다.

*<팔월>시리즈는 ‘이와오이’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입니다. 앞뒤 내용을 몰라도 글을 읽는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전력 주제: 약속





W. 멜





“결혼해줘 하지메.”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왜 그 때, 오이카와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 넘겼는지에 대해. 





#





PSP 게임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잠깐 했던 게임이었으니 사실은 무척 오랜만에 잡아 보는 게임기였다. 그래픽도, 게임 방식도 어딘가 촌스럽지만 어렴풋하게 스테이지별 보상이 기억났기에 추억을 되살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바닥에 베개를 깔고 손을 닿는 곳엔 감자 칩이 있었으며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막상 일상에서 배구를 제외하니, 꼭 바람 빠진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24시간이 48시간으로 늘어나 버린 듯한 지겨운 감각.

욕실 쪽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그쳤다. 평소에도 샤워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녀석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을 떠는 것 같았다. 슬쩍 시계를 보니 30분은 족히 넘은 듯했다. 바닥에 흐트러진 감자칩 몇 개를 집었다. 입에 넣었다. 짭짜름한 맛이었다. 


“아, 죽었잖아.”


GAME OVER 란 문구가 울적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증기의 열기가 여기까지 풍겨왔다. 구태여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괜히 상대해 봤자 피곤할 뿐이다. 그래도, 또 습관처럼 옷자락 하나 안 걸치고 나왔을 녀석을 위해


“야. 속옷은 입고 나와라.”


한 마디 거들어 줬다.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기계적으로 ‘예’를 눌렀다. 이차원의 못생긴 캐릭터가 또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뭔가…조용했다. 


“옷은 다 입었어?”


어쭈구리. 오늘은 다 쌩까버리겠다 이거지.

이번 판만 끝내면 꿀밤이라도 쥐어 박아 줄까 생각했던 나는. 오이카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을 듣자마자


“결혼해줘 하지메.”


말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점프 키를 눌러야 했다. 점프를 해서 함정처럼 깊게 파인 구덩이를 넘어 서야 했다. 기껏 다시 시작한 게임이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네모난 화면 안에선 금세 ‘GAME OVER’란 문구가 다시 떠올랐고, 나는 멍한 눈으로 그것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랑 결혼해줘.”


내 귀가 잘못 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고 있었다. 녀석은 옷을 반듯하게 입고 있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 위로 수건을 대충 얹어 둔 채, 집에서만 입는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상태 그대로. 내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툭, 소리가 났다. 손에 쥐고 있던 게임기가 바닥으로 추락한 소리였다. 천천히 오이카와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처럼, 이번 역시도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감았다, 떴다. 사고 회전이 서너 발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엔 또 무슨 농담이냐.”


피식- 김빠진 웃음소리도 냈다. 망할 입이 말이다. 


“그거지? 어릴 때 장난처럼 말했던 거.

“…….

결혼을 약속 하자느니, 평생 같이 하자느니, 네 놈 신랑이 되어 달라느니.

“…….”

그때 같은 장난의 연장선이라면 좀 봐줘라. 우리 나이가 몇 인데.”

“…….”

“아씨……. 게임 재미없어 졌다. 자꾸 지기만 하고.”

“…….”

“나 간다. 나중에 보자.”


입은 멀쩡하게 떠들고 있었으면서 눈은 녀석을 마주보지 못했다. 허겁지겁 엎드린 몸을 일으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은 과장했다 싶을 만큼 팔을 크게 저으며 걸었고 녀석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가 엎드려 누워있던 자리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샤워하고 옷도 똑바로 입고, 대꾸도 안 하고, 바보처럼 베실베실 웃지도 않고,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대뜸 가버린다는 날 잡지도 않고. 

오이카와는 거짓말을 더럽게 못 했다. 거짓말만 했다 하면 말을 더듬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뺨을 검지로 문지르다 이내 시선까지 피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식은땀은 둘째치고 말도 더듬지 않았으며 양 팔은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내 눈을 올곧게, 흡사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거짓말이나 농담 따먹기를 한 게 아니라면,


“내가……뭔가 잘못 했나?” 


짚이는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결정된 사항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오이카와에게 털어 놓은 기억이 없었다. 언젠가는 말할 생각이었지만.

오늘을 일찍 들어가 보겠다며 아주머님께 대충 둘러대고 나왔다. 현관을 지나 대문을 나서니 불이 환히 켜져 있는 오이카와 방이 보였다. 라인이라도 남겨둘까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이내 다시 넣었다.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배구 국가 대표 면접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중요한 시점에 말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지도 모르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나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가서 배구공이라도 만질까. 아님 이번 기회에 영어나 독일어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해볼까. 라는 둥의 사사로운 걱정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 날 오이카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어학 공부를 하는 건 어쩐지 적성에 안 맞고 며칠 내내 배구공은커녕 아령 한 번 잡지 못해 전신에 좀이 쑤시던 차였다. 결국 새벽같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같이 챙기던 배구화와 운동복이. 겨우 며칠 사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물질이 씹히는 기분이랄까. 

생경한 감각도 잠시, 나는 금방 그것들을 우겨 넣은 크로스백을 들쳐맨 채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찹찹한 새벽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키며 조깅하듯 가볍게 발걸음을 디뎠다. 익숙한 길, 익숙한 공기, 익숙한 풍경. 겨울 방학이 한창이라 거리가 한산했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때’와 같았다. 익숙한 갈래 길 또한 곧장 이어졌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오이카와네, 왼쪽으로 꺾으면 학교. 어느 쪽으로 갈 지에 대한 고민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현 3학년들 중 국대를 목표로 하는 오이카와 말고는 이 새벽녘에 아무도 학교로 향하지 않겠지만, 워낙에 아침잠이 많은 녀석이니. 오랜만에 머리끝까지 덮어 쓰고 있을 이불을 힘껏 걷어차 줄 심산이었다. 


“어머, 하지메구나. 오랜만이네.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토오루라면 벌써 나갔거든.”


라는 아주머니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알겠다고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못 본 새에 부지런해졌나 싶다가도 이게 나 없다고 마구잡이로 연습량을 늘렸나 싶어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가벼운 조깅에 가까운 발걸음이었다면 이번엔 전력 질주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냥 화가 났을 뿐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하늘이 노오랗게 보이고 머리는 산소 부족이라며 시끄러울만치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는데. 허벅지가 멈추질 않았다. 발이 멈추질 않았다. 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것도 일조하긴 했다. 오버 워크로 쓰러져 버리는 오이카와 따윈 상상도 하기 싫었으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배구화와 체육관 바닥이 미끌리는 소리로 가득한 체육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여, 이와이즈미. 역시 왔구나.”

“간만이다? 애들 금방 스트레칭 끝났다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몸 풀어라.”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였다. 기대도 안 한 녀석들이 코트 구석에서 나를 반기고 있으니 어쩐지…


“얘 봐라? 오랜만에 우리 얼굴 본 게 그렇게나 기뻤냐? 아주 펑펑 울지 그래.”

“누, 누가 운다고-”

“어쭈~ 눈 빨개진 거 같은데~”

“아, 니들이랑 말 안 해. 은퇴하고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들이 말이야.”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린데? 소식 다 들었다.”


바쁘게 배구화 끈을 묶고 있던 손이 멈췄다. 


“너. 해외 팀에서 스카웃 나왔다며?”


한숨이 나왔다.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긴. 당연히 코치 한테서지.”

“……아 진짜.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타일렀는데.”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어 매고 면티로 갈아입고 난 후에야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에게 정신 팔린 나머지 잊고 있던 주변 환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헀다. 쿠니미, 킨다이치, 와타리, 쿄타니, 야하…바. 어라.


“오이카와는?”


체육관 전경을 빠르게 훑어 내리며 오이카와의 이름을 꺼내자 하나마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오이카와? 걔를 왜 여기서 찾냐?”

“왜긴……. 국대 면접 내일부터 아니었어? 체력 테스트 준비해야 할 거 아냐.”

“국대 선발 일정은 잘 모르겠지만……. 나랑 마츠카와랑 그저께부터인가 연습 나왔는데 오이카와는 코빼기도 안 보였어.”


시야가 흔들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척추에서부터 흘러 내렸다. 오이카와에 관한 안 좋은 촉은 틀린 기억이 없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체육관 구석구석을 훑고 있으니 누군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걔가 괜히 오이카와냐?”


마츠카와였다.


“우리 중에서 누구보다 배구를 사랑하는 놈이 그 녀석이잖냐. 분명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연습하고 있겠지. 센다이시 체육관도 있고 공원이나 야외 운동장도 있으니까.”


알고 있었다. 3학년이 정식으로 은퇴하면 구태여 이 체육관에서 연습 해야 할 의무가 없어진다. 어디서든 연습을 강행할 수 있었고 연습 시간 또한 자율이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결혼해줘 하지메.’


불길한 예감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랑 결혼해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녀석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고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마츠카와를 돌아 봤다. 


“……감독님 어디 계셔.”


‘GAME OVER’ 란 게임기의 음성이 귓전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





달렸다.


‘한 발 늦었구나, 이와이즈미.’


앞으로 평생을 달려갈 거리를 오늘 하루 동안 달리는 듯 했다.


‘바로 얼마전에, 오이카와가……국가 대표 자리를 포기했다. 포기하고 싶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더구나.’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버린 걸까. 


‘너도 알다시피 오이카와는 배구에 뛰어난 센스가 있었음에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제 센스를 갈고 닦는, 끊임없이 노력할 줄 아는 탁월한 수재였으니까. 비록 춘고에서 치러졌던 카라스노와의 경기는 패배로 끝났지만, 그 때의 오이카와는……. 그래. 마치 갓 피어난 꽃이었어. 이제 막 피어난 수려한 꽃 한 송이.’


부실에 처박혀 있나 싶어 문손잡이를 돌리면 굳건히 잠긴 문은 도통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 바로 옆에 달린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나는 그 때의 오이카와를 잊지 못했고 오이카와 자신 역시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 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나는……. 갑자기 배구를 포기하겠단 선언을 해버린 오이카와에게 당황하고 말았단다.’


아무도 없었다. 


‘눈빛이 죽어 있었어. 꼭……. 사자(死者)가 입만 뻥긋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녀석을 말릴 틈도 없었어. 겨우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로 더 이상 배구를 못 하겠단 오이카와를……. 차마 억지로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 이유 역시 알 길이 없었고.’


교실로 향했나 싶어 발길을 서둘렀다. 산처럼 쌓인 계단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보다 이와이즈미. 독일 팀에서 들어온 스카웃 제의에 대해선 결심이 섰나?’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허벅지에 바위가 내리 앉는 감각이었다. 


‘기한은 내일까지니 되도록 빨리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전에도 말했듯이 어학 쪽은 현지에서 어학원을 중계 받을 수 있다 하니 가기로 결정했으면 급한 짐만 꾸려서 바로 출국할 수 있게 하고.’


교실에도 없었다. 녀석의 교실도, 내 교실도. 텅 빈 책상과 텅 빈 의자만이 반겨주고 있었다. 


‘널 스카웃한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고? 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왜 그 쪽 팀에서 오이카와가 아닌 널 택했냐에 대한 거겠지.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건 카라스노와 있던 시합 직후. 역으로 그 의도를 추측해보자면……. 뛰어난 세터보단 강렬한 인상의 스파이커를 필요로 했단 뜻이 되겠군. 경기의 승패를 떠나서 각 팀 개개인의 역량을 파악한 뒤 프로 팀이 스카웃하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까.’


“이……망할카와! 어디로 증발한 거야!!”


‘그러고보니……. 그 날 교무실에서 너와 스카웃 건에 대해 상담하고 널 보내고 난 뒤 곧장 오이카와가 들어 오긴 했지. 아마…국가 대표 준비 서류나 추천서 얘기를 하려고 불렀던 것 같은데.’


도서관, 버스 정류장, 자주 가는 빵집, 좋아하는 카페. 망할. 이 녀석이 갈 만한 데가 또 어디 있더라. 


‘이와이즈미. 너의 해외 스카웃 건. 오이카와한테도 제대로 설명했겠지?’


배구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오이카와가 옆에 있어서, 오이카와가 토스를 올려 주니까. 그 공만을 칠 생각이었다. 춘고 시합을 패배로 끝낸 이후 나는 녀석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는 내 자랑스런 파트너이자, 누구보다 뛰어난 세터니까. 앞으로 팀이 갈라 진다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맞붙으면 꺾어 버릴 테다.’


팀이 갈라진다, 라니. 대체 무슨 배짱으로 말했는지. 애초부터 오이카와가 세터가 아니면 스파이크 칠 마음도 없었으면서. 녀석과 내가 가야 할 길이 다르단 것을 그때부터 어렴풋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녀석은 배구가 주가 되는 길을, 나는 배구가 주가 아닌 길을. 배구를 제외한 오이카와는 추호도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배구를 제외한 나는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한 품 정도 큰 아버지의 정장을 입은 채 발벗고 뛰어 다니며 취업을 준비하는 내 모습이나, 갑갑한 넥타이를 끌러 낸 채 서류 더미 속에서 파묻혀 밤이 늦도록 일에 시달리는 내 모습이나 체육 교사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배구공을 품에 낀 내 모습이나 배구 동호회에서 우연처럼 만난 마츠카와, 하나마키와 함께 오랜만에 땀 흘리며 친선 경기를 뛰다 맥주 한 잔을 걸치는 내 모습이나. 애시 당초 스포츠 추천을 써가면서 까지 대학을 갈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나날이 배구에 몰입해 막 피어난 꽃 같았던 오이카와가 성숙해지는 걸 곁에서 바라보는 걸로도 충분하다며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는-


‘그보다 이와이즈미. 독일 팀에서 들어온 스카웃 제의에 대해선 결심이 섰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배구를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오이카와가 국가 대표가 된다 하더라도, 같이 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나날이 멀어져 가고 있음에도, 하물며 팀이 갈라선다 하더라도, 녀석과 배구를 하고 싶단 마음이 간절했나보다. 그렇기에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망할 오이카와!!!”


너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센다이시 체육관은 시끌시끌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시에서 열어 주는 배구 교실 탓이었다. 내 허벅지만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이와……쨩?”


오이카와가 있었다. 

이마를 타고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거칠게 닦아낸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배구 교실인지 뭔지는 관계없었다. 중요한 건 내 눈앞에 오이카와 있단 사실이었고, 녀석은 국대 준비를 나몰라라 한 채 여기에 있었고, 아까부터 불나도록 연락했던 내 전화란 전화는 죄다 씹어 먹었고, 멍청한 얼굴로 저기 있었고, 저기에…… 있었다. 

거칠어진 호흡과 머리끝까지 뻗쳐 오른 홧병 탓에 코에서 저절로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멍청하게 선 채 입만 벙긋거리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무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보자하니까 저게 진짜-


“어이. 어딜 토끼려고.”


다행히 오이카와는 바로 도망치진 않았다. 그 자리에 발바닥을 본드칠한  사람마냥 주춤주춤 탓에 곧장 붙잡을 수 있었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

“감독한테 다 들었어. 뭐? 국대를 포기해? 배구를 못 하겠다고? 나랑 지금 장난 쳐?”

“…….”

“너가 배구를 안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해? 그리고. 배구 못 하겠단 인간이 배구 교실엔 왜 있어. 니가 들고 있는 배구공은 뭔데!

…….”

“오이카와…. 니가 아주 겁대가릴 말아 먹었구나. 내 연락은 죽어도 안 받고 대꾸도 안 하고 내 말은 다 씹어 드시겠다?

…….”

“말해. 뭐든 말해 봐. 입이 뚫렸으면 헛소리든 변명이든 뭐든 좋으니까. 내 말에 대답 좀 해보라고!!


녀석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고 있었다. 며칠 전이랑은 달랐다. 결혼 같은 말도 안되는 소릴 들어도 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상관이야?”


그런데도.


“내가 국대를 포기하든 말든. 배구를 그만두든 말든. 그게 이와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어이.”

“관계없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냐? 시비 걸어? 싸우자고?”

“그러는 이와쨩이야말로!!”


왜. 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을 얼굴을 하고 있냐고, 이 망할카와.


“해외 팀에서 스카웃 들어 왔다며?

“…….”

잘 됐네! 이와쨩은 졸업하면 더 이상 배구 안 할 것 같았는데. 정말 잘 됐어. 무려 해외에서. 그 머나먼 곳에서도 배구 할 수 있게 돼서.”

“너……. 겨우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냐? 내가 해외 팀에서 스카웃 제의 받아서?”

“겨우? ‘겨우’라고 하는 거야, 지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치던 오이카와는. 내가 잠시 힘을 뺀 사이 순식간에 붙잡힌 멱살을 풀어냈다. 


“니가 아닌 내가 스카웃 제의를 받아서 그래? 어? 그럼 너 줄게. 너 해! 니가 다 해!! 니가 국가 대표를 하든 해외 팀에 가든 나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너는 제발-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순간 체육관 내를 쩌렁쩌렁 울린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나는 미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가 국대를 하든 해외를 가든 상관없다고? 어떻게 그래? 어떻게…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냐고!!”


내 손을 뿌리쳐 낸 녀석의 표정은 잔뜩 구겨지다 못해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눈시울을 시작으로 빨개진 코끝과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나는…나는……다르단 말이야…….

“…….”

이와쨩이, 이와쨩이 해외로 가버린다니까. 그럼 영영 못 보니까…이와쨩이 옆에 있길 바랐으니까. 설사 이와쨩이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렇더라도 내 옆에 있길 원했으니까! 이와쨩 없는 나 따윈. 하지메가 없는 나 따윈…….”


나지막한 울음으로 변해갔다. 


“싫어…. 싫다고……. 상상도 하기 싫단 말이야.”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제 눈물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양 손 안에 눈물 번진 얼굴을 묻었고 


 “가지마. 가지마아, 하지메……. 옆에 있어줘. 나, 나, 나 뭐든 할게.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메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게. 배구 관두고 하지메의 신부든 뭐든 될 테니까……. 따라 갈 수 있게 해줘. 여, 옆에 있을 수 있게 해줘. 흡, 부탁이니까…!”


말문이 목구멍 아래에서 턱 막혀버린 나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디뎌 


“……바보냐.”


거칠게 들썩거리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서툴게 안아 주었다. 


“나는……. 네가 계속 배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하지메가. 하지메가 옆에 없으면 다 소용 없단 말이야. 배구를 포기함으로써 하지메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나는 배구 그만 할 수 있어. 언제까지고…언제까지고 하지메 옆에 있을 거란 말이야…!”

“멍청아. 그래서 다짜고짜 결혼해달란 소릴 한 거야?”


품 안에서 얌전히 훌쩍 거리기만 하는가 싶더니 대뜸 고개를 든다. 아아, 엉망진창인 얼굴. 눈물 콧물이 다 번져 있으니 못난이가 따로 없다. 


“그 방법밖엔…생각이 안 나서…….”

“얼씨구. 그럼 내가 오냐 하고 넙죽 받아 줄 거라 생각 했냐?”

“그치만……. 그치만!”

“백 년은 이르다, 임마.”


온갖 못생김으로 치장한 오이카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젠 오이카와 전매 특표 ‘못 생긴 이와쨩’이란 별칭은 오히려 오이카와에게 어울릴 듯싶었다. 벌써 팅팅 부르터 흡사 붕어 눈깔 같은 녀석의 눈두덩이를 쓸어내렸다. 짠 냄새가 났다.


“국가 대표 타이틀부터 따고 프로포즈해라. 그럼 생각 좀 해볼 테니까.”

“너무, 너무해…….”

“아, 엄-청 못 생겼다.”

“너무해!!!”

“정 못 믿겠으면 거울이라도 보여주랴? 너 지금 엄청나게 엉망진창이다.”

“안 돼!!”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녀석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어, 좌우로 넓게 뻗었고 


“아아악!! 아프잖아, 이와쨩!!!”


짝-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오이카와의 양 뺨을 세게 내리쳤다. 


“해외? 그거 아직 결정 난 거 아니거든? 누구 마음대로 판단해, 이 멍청카와.”

“진심으로 때렸다고……. 아파…엄청 아, 아…!”

“안 간다, 안 가. 너 하는 꼬라지 보고 있으면 한 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겨우 며칠 안 봤다고 이 모양 이 꼴이니 마음 편히 놀러나 갈 수나 있을라나 몰라.”

“하지메……!”

“아주 평-생 감시해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라.”

“으아앙-! 나, 나…! 하지메가 제일 좋아! 제일 좋아해, 하지메-”

“아아 달라붙지 마라, 어? 그 지저분한 콧물부터 어떻게 하……야! 이 망할 오이카와!!”


엉엉 울며 내 품으로 파고드는 오이카와의 머리통을 간신히 밀어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입으로는 버럭버럭 고함치는 와중에도 내 가슴팍 어딘가는 뜻 모를 두근거림으로 벅차올라


‘결혼해줘 하지메.’


언젠가 들었던 오이카와의 약속 아닌 약속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결혼하자, 토오루.”



*단하님 캘리그라피입니다.
*<팔월>시리즈는 '이와오이'를 주제로 쓰는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입니다. 앞뒤 내용을 전혀 모르셔도 글을 읽는데 문제가 되진 않아요~
*전력 주제: 오해
*하나하키




W. 멜




눈이 떠진 이유에 특별난 것은 없었다. 첫째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이 내가 애용하는 극세사가 아니어서 였고 둘째는 매트리스가 허리를 잘 받쳐주지 못해 척추가 뻐근해진 탓이었고 셋째는 한껏 뒤틀린 채 통증을 호소하는 뱃속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였다. 우리 집 천장이 이렇게 촌스러웠던가. 익숙치 않은 잠자리와 낯선 천장이 우리 집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란 걸 깨닫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악 소리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용수철처럼 상체가 튕겨져 올라왔다. 재빨리 눈을 아래로 내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옷은 제대로 갖춰 입은 채였다. 티셔츠는 물론이고 바지까지도. 혹시 몰라 양팔을 엑스자로 모았다.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갔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혀 모르는 공간이었다. 낯선 책장, 낯선 침대, 낯선 인형, 낯선 체취. 어제 뭘 했지? 난 왜 여기 있지? 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 새하얀 머릿속에 묻고 물어봐야 답이 나올리 없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친숙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배구공..."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원룸 한 켠을 가득 채우고 배구 용품 때문에. 눈에 익은 배구공과 배구화가 익숙한 누군갈 떠올리게 할 무렵,

"여. 깼냐?"

하지메가 보였다. 하지메의 얼굴이 아닌 목소리 뿐이었지만 분명한 하지메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지메의 목소리였다.

"이와, 쨩...? 에... 정말?"

검지로 발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알싸하게 아팠다.

"그럼 가짜겠냐."

꿈이 아니었다. 얼마만에. 얼마만에 듣는 하지메의 목소리였던가. 속이 간질거렸다. 오랜만에 듣게 된 그 목소리로 인해 감상에 젖었나? 곧 보게 될 익숙한, 익숙하지 않은 얼굴에 감회감이 새롭게 들기라도 했나?

"나. 왜 이와쨩이랑 있는 거야? 여기 이와쨩이 사는 데야? 어라? 왜? 왜??"

아니. 전혀 달랐다. 나는 당황했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게 아니었다. 급하게 이불을 걷어냈다. 나갈 채비를 할 셈이었다. 이 낯설고 낯설지 않은 이질적인 공간을 박차고 나갈 셈이었다. 더 정확히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내 백팩을 들쳐매고 이 곳을 당장 뛰쳐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거... 내 옷 아니잖아!!!"

말아올라간 티셔츠 소매와 정중앙에 떡하니 그려진 고질라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님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었다. 분하고 부끄럽지만 그것을 차마 벗어던지진 못한 채, 협소한 원룸을 부엌과 침실로 구분짓고 있던 미닫이문을 향해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참다못한 하지메가 아예 문을 열어 젖혀 제 얼굴을 드러낸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쫑알쫑알 말도 많다."
"이와쨩 내 옷 어쨌어? 벗겼어? 그러고 자기 옷 나한테 입힌 거야? 변태야? 이와쨩은 변태입니까!!"
"두 달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하지메는 이런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묵묵히 제 양 손에 들려 있던 테이블을 바닥에 내려둘 뿐이었다. 밥 두 공기와 콩나물국과 김치 몇 점. 말간 콩나물국 냄새에 마른 침을 꿀꺽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무늬없는 벽면을 노려보았다. 하지메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하지메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벌써 두 달이나 되었나 싶었다.

"속은 어때."
"속은 무슨 속."
"어설픈 거짓말이라면 집어치워라."
"이와쨩이야말로 무슨 헛소리야."
"정신 놓기 직전까지 무지막지하게 술을 들이붓고선 막판에는 그것들 다 토했잖냐."

반문할 요량이었다. 언제 내가 술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냐며, 게다가 토하긴 뭘 또 토했겠냐며.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신랄하게 반문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척추를 꼿꼿하게 펴기 무섭게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일그러지듯 휘어보였고 하지메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빙글거리는 건 내 쪽이던가. 방향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이마와 어깨에서 지긋한 통증느껴질 즈음엔 이미 내 얼굴은 매트리스가 아닌, 바닥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보니 머릿속은 징징 울렸고 속은 수분이 부족하다며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고 뒤틀릴 것 같은 위장은 바로 알코올 때문인 것이었다. 비록 숙취때문에 거꾸로 나자빠지고 말았지만 나는 재빨리 정자세를 갖췄다. 그 뿐일까. 여유로운 척 손부채질까지 했다.

"기억도 안나나보네."

하지메는 전혀 신경 안쓰는 듯 했지만. 어쩌다보니 침대에서 벗어나게 됐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밥숟갈을 뜨다만 하지메는 나에게도 수저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얌전히 해장이나 하고 가라. 니 놈 옷은 세탁기 돌려놨으니까 걱정 말고."

홱 잡아챈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끝으로 들었다. 고개를 숙였다.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끝만을 노려보았다. 잘 먹을게라는 대답을 아주 작게 중얼거리고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고슬거리는 밥알을 몇 개 깨작거리다 콩나물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마가 따끔따끔거리는게, 뚫어질 듯한 하지메의 시선이 그 곳에 닿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시했다. 밥상을 향해서만 눈을 내렸다. 콩나물국의 말간 빛을 숟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칼칼한 액체가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갔다. 한 번. 하지메의 맛이 났다. 두 번. 하지메의 향이 풍겼다. 먹으면 먹을 수록 내 몸이 온통 하지메로 뒤덮여, 금방이라도 풍선처럼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두 달 만에 본 하지메는 두 달 전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오히려, 일 년 전과 지금이 무척 다르다 할 수 있겠다. 고등학생 시절의 하지메는 나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작았다. 그것을 늘 자신의 콤플렉스로 여기던 하지메였다. 우유를 매끼 한 팩씩 갈아치우고 틈틈히 키 크는 스트레칭까지 하면서 키에 집착하던 하지메였다. 그런 하지메가. 179에서 부동을 유지할 줄 알았던 그 눈금이. 눈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 건, 하지메가 대학에 들어간 직후의 일이었다. 뒤늦은 보상을 받긋 180을 가뿐히 넘기고 내 키마저 넘어선 -나는 대학생이 되었어도 키가 자라질 않았다. 괘씸할 노릇이었다.- 것이었다. 전에는 나보다 아래에 놓여 있던 눈높이가 이제는 동등한, 혹은 더 높다는 것은 지금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지메의 신장이 훌쩍 변해버린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메와 나를 비롯한, 잇세이와 타카히로는 졸업 이후로도 종종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학이나 취직. 어느 쪽을 택했든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모임을 가지곤 했던 것이다. 변하지 말자, 즐거웠던 추억을 잊지 말자에서 시작된 그 짧은 만남들이. 어쩌면 나에겐, 방아쇠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이와쨩 손에서 태어날 수 있는 요리는 튀김 두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밥상이나 엎어줄까?"
"정~말 맛있다. 그치, 고질라쨩?"

티셔츠에 그려진 애꿎은 고질라에게 말을 걸면서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하지메를 마주 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숟가락을 한 번 들때마다 뒤틀리던 속은 차츰 가라앉았다. 진정되면 진정될수록 바늘로 쑤시는 듯했던 편두통역시 입을 다물었고 텅 비어 있던 머릿속이 느릿하게 사고를 굴리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어제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고 지난 두 달간의 악몽이 스멀스멀 발밑에서부터 기어오르고 있었다.

"왜 그래? 너 안색이 안 좋,"
"나. 나 화장실 좀."

가라앉을 줄 알았던 역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기어 올랐다. 벽을 짚은 손이 경련하듯 부르르 떨렸다. 다급하게 열어제낀 문고리 너머엔 지난 두 달 간 몇 번이고 붙들고 붙들었던 변기가 있었다. 그 배경이 우리 집이 아닌, 하지메의 집이었을 뿐. 아주 익숙하게 무릎이 꺾였다. 고개가 변기 안으로 숙여졌고, 나는 눈을 감았다. 식도를 타고 꾸물꾸물 올라오는 액체 속에 무엇이 섞여있을지 알고 있었다. 시큼한 끝맛과 함께 애액들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꿀렁거리며 터져나오는 그것들은 언제쯤 멈출까. 이 끝모를 토악질에서 나는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코끝에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진절머리나도록, 아주 지긋지긋하게 맡아봤던 향이었다.
나는 꽃을 토했다. 빌어먹을 꽃을 토하고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변기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로, 내 입은 쉴틈 없이 샛노란 꽃들을 토해냈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쯤 끝날 일인지. 아마 나는. 남은 평생 동안 이것들을 토해내다 이것들에 파묻혀 홀로 죽어갈 것임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민들레."

내 입에선. 노오란 민들레꽃이 우수수 떨어져 나온다. 누군가를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지메란 이유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자 끝사랑이란 이유로.




#




나의 짝사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에 따라 사소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사소한 일이었다.

"내가 분명 봤다니까. 어떤 귀여운 여자애가 이와이즈미한테 팔짱낀 채 걸어다니는 거."

잇세이는 반쯤 남은 맥주잔을 단 번에 들이키며 말했다. 타카히로는 안주를 추가로 주문하고 있었고 나는 설마 하지메가? 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작 화제의 중심에 있던 하지메는 가볍게 웃기만 하고 도통 입을 열질 않았지만.

"백발백중 여자친구야. 그치, 이와이즈미?"

마른 오징어 다리를 씹었다. 질겅거리는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딱딱한 표면이 타액에 녹아 흐물 거릴 때면 맥주를 들이부었다.
아오바죠사이를 졸업한지 어언 일 년.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모임을 가졌다. 고등학교 때야 매일같이 부대끼던 얼굴이었지만 대학생 혹은 사회인의 타이틀 아래에서 만난다는 것은 꽤 생소한 일이었다. 땀냄새에 절은 채 사소한 장난 하나로 자지러지던 그 때와 달리, 지금은 각자가 밟고 걸어나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렇다고 진지한 얘기 뿐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과제와 시험. 취업과 진로. 그리고 연애. 마지막은 언제나 그런 부류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지곤 했다.
맥주 끝맛이 씁쓸했다.

"잘못 본 거겠지~ 이와쨩의 사촌 동생이나 여자 사람 친구를 맛층이 잘못 본게 분명해."
"얼씨구.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나."
"그야 이와쨩같이 못생긴 사람한텐 애인이 생길 수가 없으니까!"
"한 번만 더 입 나불거려봐라, 이 망할카와. 확 패버린다."
"거봐거봐!! 저렇게 입이 험한데! 폭력적인데! 어떻게 애인이 생겨!"

하지메는 주먹을 높이 들어올렸다 다시금 내렸다. 진심으로 때리려 했던 모양이다. 무섭게시리.

"그러는 오이카와 너야말로. 슬슬 옆구리 안 시리냐?"

오뎅탕을 추가로 주문한 타카히로는 금세 새 맥주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앞에 놓인 잔이 비어 있었다. 나는 스스로 잔을 채우려는 타카히로를 저지하고 병을 뺏어들었다.

"글쎄에. 이 오이카와씨, 요새 삘이 딱 꽂히는 애가 엎달까아."
"아서라~ 니가 그런 소리하면 우린 뭐가 되냐."
"애인 없는 이와쨩이랑 동급?"

빈 잔이 황금빛의 액체로 채워져 갔다. 부드러운 거품이 컵 가장자리를 웃돌 때 즈음 나는 병을 거뒀고 이번엔 타카히로가 내 잔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힐끔, 내 맞은 편에 앉은 이와이즈미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다 이와이즈미한테 한 대 맞겠다."
"실제론 안 때리니까 상관 없어."
"너 지금 뒤통수 맞기 딱 좋거든? 야야. 그럼 삘 안꽂히는 애들이라도 소개자리 주선 해봐봐."

별로. 귀찮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려 했던 나는 문득 옆구리가 따가워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헤에~ 이와쨩한테 소개시켜 달라하는 건 어때?? 나랑은 달리 여 자 친 구 가 버젓이 있다잖아~ 그 친구의 친구 소개해달라 하면 되지! 안그래, 이와쨩?"

살풋 웃으며 건배하듯 잔을 들어올리자 하지메를 제외한 두 사람이 나를 따랐다. 그새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미간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저러면 또 못생겨지는데.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 나는 은연중에 또다시 하지메를 골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진동 울리는 거 같은데. 이와이즈미 네 전화 아니냐?"

바로 그 전화가 오기전까진 말이다.
방금전까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던 너였다.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눈에 띄게 젓가락을 틱틱거리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던 너였다. 그런 네가. 전화 한 통에 퍽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 누가 알았을까. 여긴 너무 시끄럽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널,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여자친구네."
"그러게."

잇세이와 타카히로가 짐짓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친구. 하지메와 여자친구. 참, 실감나지 않는 단어였다. 농담이라던가 장난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잇세이가 추긍했을 때 부정하는 것도 수긍하는 것도 없이 말없이 웃고 있던 하지메는.

"정말이야...?"

그 때 즈음부터, 내 입은 더이상 웃음짓질 못했다. 경련이 일듯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웃어보려 해도 얼굴은 점점 무표정에 가까워졌고 속이 불에 타들어가듯 홧홧거리기 시작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이 바로, 내가 무언가를 토악질해대기 시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술을 잘못 마신건가 싶었다. 안주로 먹었던 파전이나 야채들이 위장 안에서 잘못된 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게, 그 무렵의 나는 새싹을 토하고 있었으니까. 방금 땅에서 움튼 듯한 조그만 새싹들을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것들을 토하기만 하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뜻모를 구토는 고열과 몸살까지 동반해 나를 괴롭혔다. 침대와 화장실을 오고가며 쉬고 토하고 자다 토하고 누워 있다 토하기를 어언 일주일. 입밖으로 튀어나오던 파릇파릇한 새싹은 어느새 손톱만한 봉우리로 변해 있었으며 마침내 만개하듯, 샛노란 민들레가 속에서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꺽꺽대며 토해냈다. 꽃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감각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워 울면서 토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마음 편히 자지도 못했다. 새벽녘이면 발작하듯 토하고 싶단 감각이 몸을 덮쳤고 침대 시트를 꽃으로 얼룩지게 한 적도 적지 않았다. 토하고 토하고 또 토해도, 긁어내고 긁어내고 또 긁어내도. 끝이 없었다.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병원도, 약처방도, 달인 한약마저도 소용없었다. 내장을 뒤집어 질만큼 끝없이 뱉어낼 뿐이었다. 원인 불명이란 타이틀만을 거머쥐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내 생활마저 온전치 않은 지금, 학교는 고사하고 친구들의 얼굴 보는 것마저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원인 불명의 구토 증세가 그 이후로도 쉴 틈 없이 날 옭아매진 않았다. 이유인즉, 확실해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따라 컨디션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꽃으로 범벅이 되어가는 방바닥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가벼운 기침을 할때마다 한두 송이씩 손바닥에 떨어지는 민들레를 가엾게 여길만큼, 여유가 있던 날이었다. 전신을 휩쓸던 열도 꽤 가라앉았고 근육 하나하나를 찢어내는 듯한 몸살도 잠잠해져 있었다. 꽃이 튀어나올까봐 외출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야 있어야만 하는 내 처지가 불쌍했던 나는 책장을 뒤적거렸다. 옷장 안 쪽,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상자들을 뒤적거렸다. 아오바죠사이 vs 카라스노. 일 년 전까지만해도 밤새 질리도록 봤던 그 비디오가 오늘 갑자기 떠오른 건 무슨 이유였는지. 민들레의 쌉싸름한 맛이 감도는 입안에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 나왔다. 귀에 익은 휘슬 소리가, 우렁찬 함성 소리가, 낯익은 경기복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3-2로 끝끝내 카라스노에게 져버린 경기를 흥미롭게 경기를 관전하던 내가 갑작스레 토악질을 시작한 건 비디오를 재생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믿고 있어, 캡틴.]

하지메가 보였다. 화면 너머에 하지메가 있었다. 하지메란 걸 인식하기 무섭게, 잠잠하던 토악질이 다시금 발작하듯 시작된 것이었다. 입을 가린 손 틈새로 민들레가 후두둑 수직으로 떨어졌고 오장육부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경기는 시작되었고 하지메의 모습 따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아니야. 아닐 거야. 절대, 아니라고."

귀에는 여전히 하지메의 목소리만이 웅웅거렸다. 앵무새처럼. 고장난 라디오처럼. 믿고 있다는 말만이 메아리쳤다. 속이 기분나쁘게 울렁거렸고 가슴팍이 터질듯 쿵쾅거렸다.
소꿉 친구였다. 까무룩한 코맹맹이 시절부터 십대의 마지막을 같이 보낸 친구였다. 어릴 땐 매일같이 장수풍뎅이를 잡으러 간다며 싫다는 날 끌고 갔고 홀린듯 배구에 빠져든 날 뒤따르며 배구부에 들어왔고 든든한 스파이커였고 팀을 이끄는 에이스였고 툭하면 쩌렁쩌렁 소릴 질렀고 배구공으로 때리는 일따위 허다했고 어느 하나 멋진 구석 없었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내가 분명 봤다니까. 어떤 귀여운 여자애가 이와이즈미한테 팔짱낀 채 걸어다니는 거.'

"욱, 우웩ㅡ."

'백발백중 여자친구야. 그치, 이와이즈미?'

"우욱. 제발... 제발 그만!!"

잔뜩 쉰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했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고 흡사 뭍으로 내던져진 물고기마냥 펄떡거리고 있었다. 목이 따가웠다. 속이 뜨거웠다. 머리는 하지메의 목소리와 얼굴만을 반복 재생했고 뺨은 이미 눈물 비슷한 액체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 이 빌어먹을 민들레를 토해내는 이유가 하지메 때문이라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절대 납득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이와쨩을 좋아해서 이런 거라면."

볼가를 타고 물줄기 하나가 흘렀다.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거리자 샛노란 꽃 서너 개가 다시금 입밖으로 터져 나왔다. 타액에 흠뻑 젖은 그것들은 아주 작았다. 한 줌 움켜쥐면 금세 바스러져 버릴만큼 작고 또 작았다. 이런 작은 것 때문에, 길가에 흔하게 피어나는 꽃 하나 때문에,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눈 한 번 제대로 감을 수 없었다.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그것들을 손으로 쥐어 보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여리고 연약해, 도리어 울컥한 기분에 휩싸였다.
친구야. 작은 친구야. 갓 피어나 내 입밖으로 나왔던 너는 진정으로 행복하니. 내 몸 속을 헤집고 내 마음을 너덜거리게 만들고 자유를 갈망하며 날 괴롭혀오던 너는, 정말로 행복한 기분이니. 감사는 할게. 네 덕에 내가 하지메를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는지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나는 말이지. 네가 미워.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어떤 이유로든 내가 하지메를 좋아하게 되었다 쳐도, 너무 비참한 타이밍이라 생각해본 적 있니. 너 자신이 내게 너무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니.

'백발백중 여자친구야. 그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말이야. 내가 아니어도 돼. 내가 아니어도 괜찮대. 거긴 내 자리가 아니래. 내가 있을 곳은 친구란 이름 뿐이래. 이제와서 좋아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란 소리야.
차라리 좀 더 일찍 알려주질 그랬어. 내가 아플 거란 신호를. 아주 조금만 일찍. 그랬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텐데. 하지메 생각만 하다가 하루를, 이틀을, 일주일을 꼬박 앓을 일은 없었을 텐데.
작은 꽃아. 나 말이야. 휴대폰을 안 본지 몇 주나 됐는지 모르겠어. 처음엔 널 토해내는 걸 모두의 앞에서 보여주기 무서워서 그랬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아프다고 말하고 싶어. 혼자 끙끙 앓기 싫다고 모두에게 솔직히 털어넣고 싶어. 하지메에게 전부 말해주고 싶어. 하지메 너 때문에 이렇게 아팠다고. 네 여자 친구따위 때문에 이렇게나 속이 문드러졌다고. 근데 있지. 무섭더라고. 이제와서 하지메가 무서워졌어. 하지메에게서 돌아올 대답이 무서워졌어.
싫어하면 어쩌지? 같은 남자 끼리, 소꿉친구 주제에, 여지껏 좋아하는 티 한 번 안내본 사내 자식이, 그것도 버젓이 애인이 있는 사람이잖아. 싫다고 할까봐 무서워. 경멸하는 눈으로 날 훑어내리다 뒤돌아설 게 무서워. 친구로써 밖에 남을 수 없는데 그 '친구'란 이름마저 뜯겨져 나가게 될까봐. 무서워.

"...나는 바보야. 구제불능에, 멍청이에, 겁쟁이에, 나약해 빠진."

그래도 좋아. 하지메가 좋아. 좋아서 어쩔 도리가 없어. 이제껏 불순한 마음 없이 하지메를 대해왔던 나 자신이 신기할 따름이야.
기침과 열기는 가라앉질 않았다. 시합 비디오는 꺼진지 오래였고 나는 옆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바닥이 차가웠다. 반쯤 벌어진 입에선 꽃이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눈을 감았다. 그대로, 숨을 멈추고 싶었다. 호흡을 멈추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휴식기에 접어들었던 독감이 다시금 활개치듯, 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오고가며 열을 토했다. 이번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혼자 남은 방안에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으며 먼발치에 던져 두었던 휴대전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민들레에 파묻혀 죽는 게 빠르지 않을까. 나는 그리 여기며 우는 것마저도 그만 둔 채 먹먹해져 가는 가슴을 혼자 움켜쥐다 얕게 잠들곤 했다.
눈을 뜨면 꽃이 보였고 눈을 감으면 하지메가 보였다. 꿈 속의 하지메는 다정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토오루라 불러 주었고 걸레짝이 된 내 몸을 으스러지게 안아 주었고 사랑한다 속삭여주었다. 그 행복에 겨워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면 난 여전히 차디찬 바닥에 혼자 누워 있었고 하지메 따위, 찾아 볼 수 조차 없었다. 그럴 때면 손바닥 깊이 얼굴을 묻은 채 오열을 시작했다. 더는 싫어서. 희망 고문하듯 반복되는 나날들이 싫어서. 악몽도 이런 악몽이 있을 수 없어서. 좋아해라 말해도 나도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차가운 현실이 싫어서. 그대로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얼마나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솔직히, 세아린 적은 없었다. 눈을 떠도 지옥이었고 눈을 감아도 지옥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내게 한 줌의 희망처럼 주어진 연락이 찾아온 날이 있었는데,

[맛층]

다름 아닌 잇세이였다. 며칠 전부터 주기적으로 웅웅거리던 휴대폰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그 화면 너머로 둥둥 떠오른 이름이 하지메면 어쩌지, 라며 연락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상대방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는지, 하루에 적어도 여섯 혹은 일곱 번을 꼬박꼬박 부재중을 남기곤 했다. 꽃과 잠에 취해 사리분별이 되지 않았던 나는 부재중이 쌓이기 시작한지 정확히 37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통화야 37건이고 확인하지 않은 라인과 메일함은 아주 가관이었다. 개중엔 하지메란 이름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부재중 통화를 한껏 쌓아올린 잇세이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하지메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하지메였으면 나는 다시 전화걸지 않았을테니까, 라고 내심 안심하면서 말이다. 통화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여보... 세요?"
[씨발, 야. 오이카와 전화 받았다.]

욕설 섞인 잇세이 목소리가 통화 너머로 들렸으니 말이다. 집에 틀어만 박혀 사람을 만나지 못한지 얼마나 오래 됐는지. 그 욕설마저도 정겹게 들렸다면 나는 필시 심하게 아프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오이카와. 너 뭐야. 그동안 어디서 뭐하고 있었어.]

꽤 화가 난 어투였다. 알만 했다. 지난 몇 주간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나는 일절,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라인은 안 읽지, 전화는 안 받지, 너 사는데는 모르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갑갑했는지 알아?!]
"...미안. 콜록, 휴학계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어."
[오늘까지 연락 안왔으면 니네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경찰서에 실종신고라도 할 참이었다, 이 멍청아. 휴학을 했으면 했다고 문자 한 통이라도 남기던가.]
"미안해."
[목소린 또 왜 그래. 독감이라도 걸렸냐? 지독하다, 지독해. 쌍으로 잘하는 짓들이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뿌옇게 끼어있던 안개가 점차 개여가는 감각이었다. 여전히 눈은 따가웠고 입안이 시큼한 위액들과 쌉싸름한 꽃맛으로 텁텁거렸다. 그래도 나는 확인해야 했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쨩은?"

입밖으로 내뱉기 무섭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와이즈미가 제일 빡 돌았었지. 너 연락 안된다고 온데만데 다 뒤지고 니네 집 본가 찾아가고 밤새 니 걱정하고. 사람 좀 그만 놀래켜라, 진짜.]

날 찾긴 찾았구나. 그래. 하지메한텐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겠지. 걱정되니까 겠지. 친한 친구가 연락 없이 홀연히 사라졌으니까 겠지. 난 하지메에게 있어, 그저 친구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기침은 점점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쿨럭이는 소리와 함께 동그란 핏방울이 하나둘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 위로 노란색이 덮어졌다. 놀란 나머지 미처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연신 콜록거리자, 잇세이 역시 내 안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야야. 괜찮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오이카와!!]
"나... 나.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독감 맞아. 심한 독감에 걸렸는데, 좀처럼 안 떨어지네."
[아아. 그럼 넌 내일 오지마라. 그냥 집에서 쉬고 있어. 우리가 찾아가든 할테니까.]

손바닥에 민들레 꽃잎이 묻어났다. 그 옆엔 선명한 핏자국까지 묻어 있었다. 상태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이대로 상처 받고 말라비틀어져 가는 건 나라는 것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훔쳐냈다. 어차피 상처 받을 거라면, 그 끝이 나 혼자일뿐이라면, 후회없이 몸과 마음을 부딪힌 후에야 생을 끝내고 싶었다. 삶의 끝이 꽃으로 둘러싸인다는 것. 황홀하지 않은가. 민들레같은 수수한 꽃이 아닌, 장미나 백합같은 화려한 꽃이 나와 더 잘 어울렸겠지만. 길동무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나도 갈래. 거기 이와쨩도 오지? 민폐끼친 사과라도 할 겸 얼굴이나 보게."
[...그래. 우리도 니 얼굴 까먹을 것 같으니까.]

마지막 도박에 내 마음을 맡겼다.




#




'내일 야하바랑 쿄타니가 대학생된 기념으로 가게 빌려서 파티하려 했거든. 이 주 전부터 준비하던 거였는데 네 놈이랑 연락이 안돼서 한창 난리가 나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랑 하나마키는 파티준비하고 이와이즈미는 너 찾아 다니고.'

거울을 봤다. 비쩍 마른 몸이었다. 그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 몸에 남은 것이라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흉물스런 가죽뿐. 탱탱하게 빛나던 피부가 거칠거렸다. 덥수룩하게 돋아난 수염이 턱을 뒤덮고 있었다. 볼우물이 움푹 패이다 못해 홀쭉해져 있었고 그 탓에 광대가 기이할만치 도드라져 보였다. 뺨을 쓸어 내렸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 수염을 정리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푸석한 피부를 가꾸고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를 끝마쳤다. 안경과 마스크를 얼굴에 뒤집어 썼고 품이 한참 헐렁해진 바지를 벨트를 이용해 억지로 고정시켰다.
토악질이 멈췄다. 거짓말처럼 멈췄다. 내 굳은 결심에 반응하듯 오늘은 내내 속이 편안했다. 밖을 향했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뙤약볕이 쏟아져내리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눈에 익은 민들레들이 길가에 한아름씩 피어나 있었고 개중엔 벌써 씨앗을 흩뿌리기 위해 다시금 봉우리로 변모한 것도 있었다. 나는 그것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지긋지긋했다. 휴대폰을 열었고 메일함을 확인했고 약속 장소라는 펍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게를 통째로 빌렸다는 말처럼, 그 곳에서 날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널찍한 테이블 몇 개와 굴러다니는 의자. 선물 꾸러미처럼 몇 박스 놓여진 술병들이 전부였다.

"이상하네. 좀 늦게 왔는데."

혼자여서 차라리 다행인가. 쓰게 웃어버린 나는 소주 몇 병과 맥주 하나, 그리고 테이블에 놓여진 와인잔을 들고 의자에 착석했다. 와인잔에 마셔보는 건 난생 처음인데. 은연중에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비웃어버릴 하지메가 생각났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내저으며 마스크를 벗어놓았다. 오늘에서야 겨우 가라앉은 역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절대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혼자 마시는 술은 막연히 외롭고 또 외롭기만 할 줄 알았다. 도를 넘어섰다고 막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 아픔과 내 푸념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서 마냥 외로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게 필요했던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지난 몇 주를 하지메 하나 때문에 나홀로 울어 제끼며 상처 입기만을 반복했건만

"이와쨩이 보여. 꿈인가."

정작 내 눈으로 직접 하지메를 보자마자,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속이 뒤틀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아주 오랜만에 보는 하지메는 꽤 야위어 보였다.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다. 눈이 피로에 절어 있었다. 내 걱정을 하긴 했구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 속이 미칠듯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염산을 입안에 직접 들이부은 것 같았다. 녹아내린 내장이 혈관을 타고 세포 하나하나를 제 손으로 쥐어 뜯는 것 같았다. 알코올에 젖은 머리는 다행히 그 고통마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토하고 싶다는 욕구 하나만은 분명했다. 눈을똑바로 들었다. 핑핑 도는 머리통 탓에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질 않았지만, 그 너머엔 분명히

"...잠깐 못 본 새에 왜 이렇게 말랐냐."

하지메가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악몽도 아니었다.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저 목소리는 분명,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하지메의 것이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꿈 속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그런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아, 토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불처럼 끓어오르는 꽃들을, 내장들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고개를 떨궜다. 눈을 피했다. 이 진절머리나는 통증의 원인인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날 꿰뚫어 보듯, 너는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내 이마가 뚫어져라, 나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네가 아무 말이 없었기에. 화도 내지 않고 내 몸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코빼기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잇세이와 타카히로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오히려 숨이 막혔다. 와인잔을 단번에 들이켜 비워낼 때면 다시금 투명한 액체로 와인잔을 채웠다. 채우고 비우기의 반복이었다.
너는 말리지 않았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널 보지 않았고 너는 날 보고 있었다.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날 잡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날 붙잡지 않을 줄 알았다. 그야, 너에겐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나는 널 좋아했고 너는 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테니까.

"...토할 것 같아."

하지메와 내가 눈이 마주쳤던 건 찰나에 불과했다. 메스꺼운 속과 꽃이 터져나올 것 같은 입을 손으로 가까스로 틀어막은 내가 벌떡 몸을 일으킨 그 찰나. 하지메는 일자로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내가 먼저 피하고 말았다. 도망치고 말았다. 누가 쫓아올 새라 화장실이라 쓰여진 팻말쪽으로 미친듯이 달려갔을 뿐이고 그대로 문고리를 걸어 잠그었다. 구토는 멈추지 않았다. 변기에 한차례 쏟아지는 노란색이 역겨울 지경이었다. 쌉싸름한 향마저도 지독했다.
결국은 바뀌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바뀐 건 없었다. 하지메를 직접 본다고 해서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 둘이 남았을 때의 적막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술이 없다면 더했을까. 차라리 술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야 했을까.

"오이카와!!!"

더 바라진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할 찬스라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꺾여버릴 마음. 변기물에 씻겨져 내려갈 불쌍한 마음. 그런 가엾은 감정의 끄나풀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 문 당장 열어, 멍청아!!!"

정말. 그 뿐이었다.

"저리가... 저리가!! 오지마!!!"

희망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하는 척, 선심쓰는 척, 동정 베푸는 척, 곁에 남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무심했으면 좋겠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금처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건드리지 않고 날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혼자 잠수타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렇게 사라질 거면!! 그게 네 대답이 될 수 있냐? 나한테까지도 말 못할 얘기야?! 귀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냐, 이 망할카와!!"

좋았을 텐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큰 소리 치지 말라고!!"
"그래!!! 나 몰라. 니 말대로 아ㅡ무 것도 몰라!! 너 새끼가 입 틀어막고만 있으니까 절대 알 리가 없지. 알 방법이 없지!! 그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속이 편하냐? 두 달이나 잠적한 새끼가 대뜸 연락해서는 거지꼴해서 나타나면 내 속이 썩어가겠어 안 썩어가겠어!!!"
"그러니까 이와쨩, 은. 윽, 우욱ㅡ."

민들레가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화장실 바닥을 노란색이 뒤덮어 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가슴이 비상하게 쿵쿵거렸고 머릿속은 술기운으로 어지럽혀진지 오래였다. 덕분에 이성이라는 카테고리가 뚝, 끊기기까지는

"이와쨩 따위... 이와쨩 따위 정말 싫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내가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는데. 왜 내가 휴대폰 던져두고 연락이란 연락 다 무시했는데! 왜 내가... 내가. 못생긴 이와쨩 생각하다 밤새 울고 토하고 울고 토하고를 반복해야 하냐구..."

엎질러진 물과 같았다. 꽉 막혀 있던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감정 덩어리가 폭포수마냥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쨩 따위 싫어 죽겠어. 여자친구가 생기면 다냐고. 애인이 생기면 나 같은 건 돌아보지도 않는 거냐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나, 이제서야 깨달아 버렸단 말이야. 이와쨩 하나 때문에 울고 웃는 나 자신이 최악이란 거. 이와쨩도 미워 죽겠지만 그보다 더 미운 건. 더 끔찍한 건!!"
"......."
"하루라도 이와쨩 생각을 안하고는 못 사는 나 자신이었어."
"...문 열어라. 부숴버리기 전에."
"나 따위 싫지? 꼴도 보기 싫지? 나도 내가 싫어. 이런 나자신이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가. 가버려. 어디로든 꺼져버리라고!!"

딱, 거기까지였다. 밉고 억울하고 화가난 심정을 그대로 눈물과 오열로 쏟아내고 말았던 내 기억은 거기서 칼로 베인듯 뚝 끊기고 말았다.
나는 다시 토하고 있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내 토악질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변기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어차피 질리도록 보았던 샛노랑. 이제와서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얌전히 민들레에 파묻혀 죽을 날만 기다리면 되었던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던 구토가 그친 것은

"어제처럼 또 그러네. 병원은 갔어?"

상냥하게 등을 쓸어내려주는 누군가의 손길 때문에.

"만지지마..."
"빈 속에 술만 주구장창 처넣으니까 그렇지."
"만지지 말라고!!!"

홧김에 그 상냥하던 손을 쳐내고 말았다. 신경질적으로 내 뒷켠에 서있던 하지메를 돌아보았다. 어제의 대부분이 기억난 탓에 기분이 진흙탕을 구르고 있던 나와 달리 하지메는 그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저 눈은 진심이 아니라는 거. 동정심이라는 그럴듯한 겉포장으로 내 마음을 농락할 뿐이라는 거.

"뭐야. 아직도 기억 안나냐?"
"...뭘. 뭘 말이야."
"너가 날ㅡ."
"좋아한다는 거? 그래. 나 이와쨩 좋아해. 똑똑히 기억나. 죽을만큼 좋아해. 그리고! 그 마음만큼 이와쨩을 싫어하게 됐어. 널 좋아하는 나 자신까지도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고!"
"어이. 사람 말 끝까지 듣,"
"나 말이야. 이와쨩 같은 사람 한 트럭으로 갖다줘도 절 대 사절이니까. 이와쨩이 여자를 사귀든 남자를 사귀든 괴물딱지랑 사귀든, 나는 하나도 관심 없으니까!!"

그 때였다. 하지메의 시선이 일순 낮아진 것은. 살점 하나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내 어깨죽지가 그 팔에 휘감긴 것은.

"이 바보."

낮은 울림과 함께 꿈에서까지도 허락받을 수 없었던, 하지메의 품 속에 날아들듯 순식간에 안겨 버린 것은.

"중요한 부분은 다 까먹어 버렸잖아, 멍청카와."

안지마. 안아주지마. 다정해지지마. 착각한다고. 착각해 버린다고. 선심쓰듯 베푼 네 우정이 내 마음이랑 같을 거라 오해해버린다고.

"...놔. 이거 풀어, 이와이즈미."
"안놔. 절대 안놔. 어떻게 붙잡은 넌데. 어떻게 찾아낸 네 진심인데."

왜?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해주는 거야?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야? 진심도 아니면서. 입발린 말로 위로 비슷한 걸 건네려는 것뿐인 주제에.

"알량한 동정이라면 집어치워. 놓으라고 했어."
"내가 내 손으로 널 놓을 것 같아?"
"이와이즈미! 네가 네 입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작작 좀 해... 사람 마음 갖고 노는 짓따위,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날 가슴 깊이 끌어 안고 있던 하지메는 그제야 날 놓아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놓아준 게 아니라, 어깨만 힘껏 붙든 채 내 눈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어제도 제대로 말했지. 내가 반한 건 너였다고."
"...뭐?"
"계속 말하려 했어. 쭉 좋아해왔다고. 내 마음 속엔 줄곧, 너 하나 밖에 없었다고."
"무슨. 무슨 소리야. ...몰라. 하지마. 말하지마. 그대로 입다물어. 아무 것도 말하지마."
"아니. 말해야겠어. 나도 억울하니까. 너한테 반해있던 건 내 쪽이었어. 세이죠 졸업 이후로도 계속 너한테 고백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 그런 날 위해 그 녀석들이 줄줄 읊어낸, 있지도 않은 그럴듯한 거짓말이 도리어 너랑 나 사이를 이 사단으로 치닫게 만든 거야."

거짓말.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여자친구 전화라고 그랬잖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분명 여자친구라고ㅡ.
그게 거짓말이란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하지메?

"자꾸 헷갈리게 하지마. 부탁이니까... 오해하게 하지마."
"그래!! 너는 너대로 오해하고 나는 나대로 널 오해하고. 길게 돌아왔어. 두 달이나 걸렸어. 나는 나대로 썩어 문들어지고 너는 너대로 이렇게... 이렇게나 말라서."

하지메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진 눈은 내 몸을 머리끝에서부터 쭉, 훑어내리고 있었다.

"일방통행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겨우 맞닿았잖냐. 나도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한다잖아. 제발. 제발 그만하자. 내 마음 좀 믿고 받아줘라, 응?"

토하고 싶었다. 여전히 토하고 싶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하지메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왈칵, 하고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변기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 민들레만 죽도록 토해내고 싶었다.

"나, 토해. 자주 토해. 지금도 토하고 싶어. 신기한 거 알려줄까? 내 입에서 꽃이 나온다? 민들레가 막, 입밖으로 토해져서 나와."
"알아."
"...놔줘. 이거 놔줘. 이대로는 이와쨩 옷 버려. 온통... 샛노란 민들레가,"
"싫어."

하지메는 날 놓지 않았다. 안으면 안았지, 놓아줄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세게 안은 탓에 오히려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메의 냄새가 훅 풍겼다. 쌉싸름한 민들레와는 다른, 향긋한 라벤더향. 그 향이 미치도록 달콤해서, 내 숨통을 조여올만큼 향긋해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신 안놔. 안놔줘. 몇 번을 네가 싫다고 해도 좋아. 날 좋아하는 너 자신이 싫다 했지. 그런 널, 내가 좋아해. 내가 사랑해. 전부다 사랑해줄게. 혼자 아파했던 시간들 내가 다 보상해줄테니까."
"꽃... 꽃을 토해버릴 지도 몰라. 나는 분명 말했어."
"오이카와. 아직도 저게 꽃으로 보여?"

하지메의 반문에 들이킨 숨을 훅, 멈춰버렸다. 설마 싶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침부터 내내 토했다고 생각한 변기통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어."

누런 빛을 띄는 위액들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독했던 일방 통행은 진즉에 끝이 났음을. 그것은 한참 전부터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말할 거야. 니가 필름이 끊겨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 줄거야."
"이와, 쨩."
"먼저 반해버리고 사랑한 건 내 쪽이야. 너 하나에 죽고 못 사는 건 오히려 내 쪽이라고. 나때문에 아프지마. 나때문에 울지마. 좋아해. 좋아하고 또 좋아해, 토오루."

사고회로가 정지한 것 같았다. 심장은 터질듯 쿵쾅거렸고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라벤더 향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눈 앞이 민들레로 수놓아진 꽃길로, 노오랗게 물들 것 같았다.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있다며. 여자랑 같이 팔짱 끼고..."
"거짓말인게 당연하잖아, 이 멍청카와!!"

한 순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더이상 나오지도 않을 것 같았던 눈물들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이와, 이와쨩은 바아아보야!!"

그렇게 소리내서 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누구 앞인지도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하고 그저 허망하게, 서럽도록 목놓아 울었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히끅, 얼마나 힘들었는데!!"

뼈만 남은 주먹이 힘없이 하지메의 어깨를 건들였다. 하지메는 얌전히 맞기만 하고 있었고 나는 터져나오는 억울함과 분통함을 눈물로만 쏟아내기 급급했다. 보다못한 하지메가 눈물로 젖은 뺨에 뽀뽀를 남기고 들썩거리는 뒷목을 휘감아 쪽쪽 입을 맞춰주며

"울지마. 안 그래도 못생긴게 더 못생겨졌네."
"이와쨩이 더 못생겼으면서!!!"

웃음기 섞인 핀잔을 얹어줄 때까지 말이다. 그새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바락바락 소리 치니까 내 꼴이 우습기라도 했는지 날 향해 씨익 웃어보이던 하지메는

"진짜? 그렇게 못 생겼냐, 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질문을 던졌다. 내 입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하지메를 향해 나는 마지못해

"거짓말이야."
"그럼 그렇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일 멋있어."

귓가가 새빨갛게 물들어지도록 말이다.




=====


*민들레 꽃말-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



*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FHQ

*꼭 BGM과 같이 감상해주세요.







W. 멜




먼지가 자욱하게 가라앉은 책장에는 낡아빠진 책들이 제멋대로 꽂혀져 있었다. 벽의 곳곳에 자리한 램프들은 파란 빛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창백한 조명은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동물의 가죽 비슷한 것들을 비추고 있었다. 침소로 추정되는 그럴듯한 침대는 이미 거미줄로 화려하게 꾸며져 퀴퀴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인간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를 두개골들이 하나의 장식물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자잘하게 굴러다니는 모래알과 흙먼지가 검게 뒤엉켜 음침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 그 뿐일까. 햇볕 한 줌 용납하지 않던 그 이질적인 공간은 이틀째, 누구누구씨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해 지독한 아수라장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무로된 등받이에 깊이 등을 뉘인 채, 멍하니 천장만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그저. 마지못해 호흡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초의 탄생이 있던 이후, 이와이즈미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처럼.

'가까이 오지마.'

마왕 사냥. 마왕의 뿔을 손에 넣으면 가문이 번창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은 인간들이 눈에 불을 켜며 마왕의 모가지를 노리던 무렵이었다.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고작 한두 달전. 인간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한창 활발했을 무렵이었다.

'썩 꺼지라고.'

단순한 총격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칼날이야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저 머릿수로만 밀어 부치려는 인간들 따위, 손아귀에서 그려내는 불꽃 한 웅큼이면 꽁무니를 내빼고 도망치는 우매한 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날 내려다 보지마, 비천한 생물 주제에.'

그 날만큼은 조금, 달랐다. 그 날은 평범한 인간의 무리가 아니었고 은탄과 성수로 중무장한 사냥꾼들이 눈을 번득이며 들이닥쳤고 나는 맨몸이었고

'너. 다쳤냐?'

그대로 중상을 입었어야만 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 윽!"

인적 드문 숲지대를 깊이 파고든 후에야 겨우 사냥꾼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복부에 박힌 은탄환은 어림잡아 대여섯. 재생은 고사하고 출혈조차 멎지 않았다. 몸에 두르고 있던 천이 검은 색이 아니었다면 누구든 이 피칠갑에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으리라.

'이렇게까지 상처가 심할 줄은 몰랐는데.'

너는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범주 내에서도 머리에 나사 몇 개는 풀린 듯한, 괴상한 축에 속해 있었다. 너는 몸에 두르고 있던 묵직한 갑옷들을 하나둘 벗어던졌고 제 몸집만한 대검을 먼발치에 내팽개쳤다.

'손 대지마. 만지지 말라고, 인...간.'
'만신창이인 주제에 입만 살았네.'

찌익, 천이 뜯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몸을 통째로 꿰뚫어 버릴 듯한 고통이 서너번. 척추 부근이 저절로 뒤틀렸고 반쯤 벌어진 잇새로 고통으로 일그러진 외마디 비명이 튀어 나왔다. 너는 흡사 불덩어리와도 같았던 은탄환들을 네 손으로 직접 뽑아냈고 그 빈자리를 채우듯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얇은 천자락 하나로 익숙하게 지혈을 시작했다.

'...무섭지 않아? 이 오이카와씨는 마왕... 인데.'
'사람이고 동물이고 마왕이고 다치고 아파하는 건 하나같이 똑같은 법이야.'
'그런 말도 안되는,'
'마왕이면 어떻고 사람이 아니면 어때. 눈 앞에서 송장 치우긴 싫다.'

너는 거리낌이 없었다. 남들이 내 뿔에 대한 탐욕과 갈망의 눈으로, 또다른 이들이 내게서 풍겨져 나오는 재액과 재앙으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나를 바라 볼 때, 너는 그 어떤 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너는 진심으로, 나를 치료해주려 하고 있었다.

'다친 몸으로 깝치다 죽지나 마라. 꿈자리 사납다.'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이었다. 마왕이든 인간이든 관계없다며 대뜸 내 곁으로 파고 들었고 내 피가 멈춤과 동시에 한치의 미련도 없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

'...후회하게 될 거야. 나와 얽히게 된 것에 대해. 나에게 관여한 것에 대해. 나를 죽이는 게 아닌, 오히려 살려 돌려 보낸 것에 대해. 분명 후회할 거야, 이름 모를 인간.'

다시금 갑옷을 갖춰 입고 대검을 등쳐업은 채 성큼성큼 멀어져 가던 너는. 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는지 금세 고개를 돌리며

'이와이즈미 하지메.'
'뭐?'
'다 쓰러져가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주는 게 어떠냐, 이 말씀이다.'

싱그러움이 가득 머금어진 미소를 한껏 지어올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쿵쾅거렸다. 느릿느릿 재생되고 있는 살결에서는 네 손길이 남긴 따스한 촉감이 생생했다. 봄 바람 비슷한 것이 뺨을 스쳤고 전신에 생기가 감돌았다. 코를 통해 스며드는 희미한 꽃내음이 생소했다.
아마. 첫사랑이었다. 첫 눈에 반해 있던게 분명했다. 네가 고작 인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얼마 가지 못해 바스라지는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처럼 시들어갈 허무한 존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슴 한복판이 벅차오름으로 잔뜩 일그러질 만큼, 심장이 통째로 뜯겨져 나갈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을 만큼, 당장이라도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네 뒷모습을 꼭 끌어 안아 버리고 싶을 만큼,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이 두 다리를 질질 끌어 네 뒤를 좇고 싶을 만큼, 나는 네게 빠져버렸다. 영겁에 가까운 그 시간들을 오직 너라는 사람 하나를 위해 버텨낸 사람마냥. 홀리듯, 너에게 빠져 들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너는, 제국을 지킨다는 둥의 어엿한 기사 노릇을 하고 있던 인간들 중 하나였다. 아무렴 어떤가. 네가 기사든 한 나라의 왕이든 땡전 한 푼 없는 거지든,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란 인간의 본질을 좋아했고 그 숭고하면서도 순결한 영혼을 사랑할 뿐이었다. 그건 네가 어디사든 누가 되었든,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네가 속해 있는 수호대의 작전 본부에 놀러 나갔으며-대체로 변신술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둔갑을 취했다- 너는 이런 날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기척을 느낄 때면 너는 그저

'또 왔냐.'

라며 처음 헤어졌을 때와 같은, 초원의 푸르름을 닮은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처음, 내 안에서 단순히 '이상한 인간'으로 치부되었던 너는. 하루가 다르게 나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들을 들끓게 해주었다.

'이와이즈미, 이와이즈미, 이와이즈미.'
'귀 안 먹었다. 그만 좀 불러.'
'있지. 이와이즈미는 너무 길지 않아?'
'내 이름에 불만 있냐?'
'이와... 이와... 아! 이와쨩은 어때? 이와쨩, 이와쨩, 이와쨩. 입에 착착 감겨!!'
'그 입 찢어 버린다.'
'후에~ 이와쨩은 너무너무 폭력적이랍니다! 이래갖고 어떻게 기사님 중의 기사님이 되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랍니다!'
'자기도 마왕인 주제에.'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손꼽아 기다려졌다. 해가 떠오를 때면 네 얼굴을 볼 수 있단 생각에 몸이 벌떡 일으켜졌고 해가 저물 때면 너와 작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단 생각에 손발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듯했다. 황량하게만 느껴졌던 갈대 벌판이 황금으로 물들며 찬란하게 빛났고 바로 얼마전까진 관심도 없던 작은 텃길에 피어난 조막만한 들꽃마저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너를 만나서 내 세상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너로 인해 내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으며 너라는 이유 하나가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었다.

'좋아해.'

그렇기에 나는. 내 마음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었다. 불가능했다. 나날이 활짝 만개해가는 벚꽃처럼, 나는 너에게 내 사랑을 토로했고 너는

'이제 말하냐. 속 터지는 줄 알았다.'

라며 내 몸이 달콤함에 으스러지도록, 꽈악 끌어안아 주었다. 나의 전부, 나의 삶, 나의 희망. 너는 가볍게 웃어보이며 내 전부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대장이 밀회? 여자와의 밀회라면 우리도 조용히 눈 감,'
'여자 따위가 아니니 이렇게 말을 꺼내지.'
'뭐?'
'마왕말이야, 마왕. 이 세계가 낳은 재앙 덩어리. 그것과 매일같이 만나고 있다고.'
'...설마. 그럴 리 없어. 대장님은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나'로 인해 네가 있을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나'로 인해 네가 곤란한 처지에 놓여져 있었음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나와 얽히게 된 것에 대해. 나에게 관여한 것에 대해. 나를 죽이는 게 아닌, 오히려 살려 돌려 보낸 것에 대해. 분명 후회할 거야, 이름 모를 인간.'

내가 했던 말을 나 자신이 후회하게 될 줄은, 당시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이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약한 종족이란 것쯤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인 너 또한 그 숨을, 그 당돌하던 패기를, 당차게 빛나던 옆모습을, 사랑스럽게 날 내려다보던 그 눈빛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한 톨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란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 이와쨩이 죽어 버린다 해도. 이 오이카와씨는 기다릴 거야. 계속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그 말 그대로, 나는 기다릴 셈이었다. 십년, 백년, 그리고 천년. 무수히 흘러가는 시간의 틈새 속에서 나는 또다시 네 윤회를 기다릴 셈이었다. 그 숭고한 영혼이 이 땅에 다시금 내려앉기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셈이었다.

'뭘 가만히 있어, 이 멍청카와!!'
'그치만... 그치만!'
'도망치라고!!! 너까지 죽고 싶냐?!!'

잊혀지질 않았다. 도무지 잊혀지질 않았다. 네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너의 대검이 네 몸을 관통했을 때. 핏덩이를 토악질해대며 얼어붙은 날 향해 고함을 질렀을 때. 네 주변의 잔디들이 네 흥건한 핏줄기로 시뻘겋게 물들어 버렸을 때. 저 먼발치에서 한 때는 너와 함께한, 한 때는 너를 대장으로 모시던 이들이 차게 식은 눈으로 널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을 때.

'다신 이와쨩 보고 싶다 안할게. 더이상 여기 놀러 오지도 않을게. 멀리서 얼굴만 보고 갈테니까.'
'굼...벵이가. 하여간. 더럽게... 말 안들어요.'
'제발. 제발. 내 곁에 남아 있어줘. 날 혼자 두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죽지마. 죽지말고... 평생. 나랑 살자, 응?'

나 때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책임이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게 된 것도 네 감긴 눈꺼풀에 이성이 끊어진 내가 폭팔하듯 그 일대를 멸망시킨 것도 이미 주검이 되어버린 네 몸뚱아리를 붙들고 끊임없이 오열한 것도.

차라리 날 탓하지 그랬어. 너 때문에 이 꼴이 됐다고 날 죽도록 원망하지 그랬어. 나같은 거 감싸지 말질 그랬어.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 몸. 구차하게 살아 남아봤자, 그 곳엔 이미 네가 없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은 웃으면서 죽어버리면. 이 마왕님이 좋아라 할 줄 알았냐고."

오이카와는 이마에 얹어 두고 있던 손등을 아래로 떨궜다. 코끝에는 여전히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의 피, 그외의 인간들의 피. 그제야 초점을 잃고 있던 오이카와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기 시작했다. 뇌리에 번쩍이는 뭔가가 스쳐지나가듯, 오이카와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먼지낀 서적들을 들춰내고 또 들춰낸지 어언 한 시간. 표지는 물론이고 종잇장 하나하나까지 너덜거리는 흡사 고서라 불릴만한 두툼한 서적을 들었다. 금기된 주술의 목록. 그가 눈여겨 보던 부분은

"...차원 이동. 찾았다."

그 뒤로는 일이 아주 수월했다. 구축식을 그려내는 것이 약간 까다로웠을 뿐이었지 마력의 정점에 위치한 마왕에게 있어 마력의 소모는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인과율."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책에는 쓰여있지 않았던 것이다. 쿠로오 또한 그 부분을 염려하며 끝끝내 차원이동을 시도하는 오이카와를 말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했다. 이와이즈미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제 모든 것을 걸었다.

처음에 말이야. 날 찾아준 건 이와쨩이었잖아. 서슴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준 건 이와쨩이었잖아. 이런 날 찾아준 건 언제나 이와쨩이었으니까. 이와짱이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고 쓸쓸하다는 감정을 체감할 수 있었고, 이와쨩이 내 옆에서 완전히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슬픔이란 걸 배웠으니까.

둥그런 구축식에서 차오른 붉은 빛들이 전신을 감싸 안았고 손발이 희끄무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가. 이와쨩을 마중 나갈게."




#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토오루! 이런데서 뭐하고 있어?"

기껏해야 내 허벅지 높이. 한 손에는 그물망이 달린 막대기를 들고 조그만 슬리퍼를 신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너는. 이 뙤약볕에 엎어져 있던 내가 신기했는지 막대기로 나를 쿡쿡 쑤셔보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작은 아이. 작아진 너. 아아, 나는

"제대로 왔구나. 이와쨩이 있는 곳을. 제대로 찾아온 거구나."

나는 그대로 너를 끌어 안았다. 숨이 막힌다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너. 자기 모르는 새에 우유를 트럭으로 마셨냐며 왜 이렇게 거대해졌냐며 목청을 높이는 너. 내 뿔을 몇 번 만지작 거리더니 자기가 갖고 있는 공룡이란 것과 비슷하다며 눈을 빛내는 너. 그런 널 다시금 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금 주어져서, 나는 꽤나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바로

"하지메쨩~ 한참 찾았잖아! 여기서 뭐... 히엑!!"

또다른 나를 발견하기 전까진.
내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세계는 어떨까. 금서를 읽으면서 문득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 책에 따르면, 어느 세계에나 영혼이란 본질은 같되 외견이나 그 성질이 다른 것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 상상해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직접 조우하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어렴풋이 그려본 적이 있었다. 웃기지 않을까. 재미있지 않을까. 서로 농담도 주고 받고 이와이즈미 하나를 두고 장난스레 싸우진 않을까.

"...불쾌하네."

그러나, 그것은 내 오만이었고 큰 착각에 불과했다.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 '오이카와'란 존재는 내게서 너를 앗아갈 인간이라는 것. 겨우 재회하게 된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을, 아주 꺼림칙한 존재라는 것. 그렇다고 그 유쾌하지 않은 감각을 나만이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메쨩... 그 사람 누구야...? 거기 있지마. 싫어. 싫어. 이상한 사람 따라가면 안된다고 엄마가. 엄마가..."

'오이카와'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내 품에 안긴 너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시끄러운 울음에 기분이 확 가라앉아 당장이라도 저 입을 두 갈래로 찢어버리고 싶단 욕구가 끓어 올랐지만

"아아~ 또 운다. 자꾸 울면 같이 장수풍뎅이 잡으러 안간다 했지?"

어느 새 내 품에서 빠져나가 '오이카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는 너로 인해

"응... 응. 토오루 안 울게. 안 울어. 뚝 그쳤어! 저런 사람말고. 나랑 놀자. 나랑만 놀아, 하지메쨩."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기에 내가 '오이카와'를 죽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고 합당한 결과였다. 네 옆에 있어야할 건 저런 꼬마가 아닌 나여야 했으니까. 네 옆을 지켜야할 건 저런 울보가 아니라 나란 존재여야 했으니까.
그러나, 너는 웃지 않았다. 내마음을 뒤흔들고 했던 그 싱그러운 웃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너는 고작 네 몸집만한 '오이카와'의 시신을 안고 귀청이 터져나가도록 울부짖었으며 그 이후, 네가 짓는 웃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고 수십년이 지나 주름살이 그득한 얼굴이 되어서도.

"...토오루가 보고 싶어."

날 뻔히 눈 앞에 두고도 그 따위 말을 내뱉으며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그렇게 죽어갔다. 그게 처음이자, 인과율의 시작이었다. 무수한 차원이동을 반복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오이카와'가 죽거나 네가 미쳐버리거나.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는 '오이카와'를 죽이지 않으려 했음에도 '오이카와'는 죽어갔다. 내가 그 세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이카와'가 죽어버린 적도 있었다. 내 발자취가 닿은 세계의 '오이카와'는 언제나 죽음 곁에 있었다. 불치병에 걸리고,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익사 당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절벽 아래로 실족사를 당하고, 트럭에 치이고, 총격을 받았고, 독살 당했고, 테러에 휘말렸고, 화재의 중심에 있었고. 그에 비해 너는. 언제나 소리 없이 울거나 분노하거나 자괴감에 절어 있었고. 나는 언제나 그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며 다음 세계로의 이동을 서둘렀다. '오이카와'를 가만 죽게 놔두자니 네가 망가지고 '오이카와'를 살리자니 나 스스로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아무리 널 '오이카와'에게서 구원해보려 해도 속수무책처럼, 너는 무너져 내려갔다. 이쯤되니, 나 자신이 정말, 재앙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있는 곳엔 항상 네 울음과 네 고통이 뒤따랐다.

'설령 네가 그토록 바라던 이와이즈미를 만나게 되더라도, 지독한 인과율이 너를, 이와이즈미를 따라 다닐게 분명하잖아!!'
'인과율은 널 고독하게 만들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끊임없이 발악해도 네 옆에 그 누구도 남지 않게끔 할 거라고!!'

기이한 일이었다. 그제야 쿠로오가 했던 따끔한 충고가 떠오르다니. 그제야 인과율이란 게 무얼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널 원한다고 발버둥쳐도 너는 날 돌아보지 않았다. 차라리 너를 죽여버릴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이렇게나 원하고 또 원하는데,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라며 손아귀에서 칠흑으로 가득찬 마력구를 뽑아내려 한 적이 있었다.

"...이게 뭐야? 내 손이 왜. 왜"

마력의 정점을 웃돌던 나는

"투명해지는 거야?"

마력은커녕, 나 자신의 존재 유무조차도 지탱할 수 없게된 것이다. 차원이동이 마력을 갉아 먹는다던 말을, 솔직히 걱정조차 않았다. 영겁의 세월동안 이 몸에 축적되온 마력이 고작 금기 마법 몇십 번으로 바닥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번. 딱 한 번 남았단 뜻이지."

반쯤 투명해진 손바닥 너머로 희멀건 병원 바닥이 비춰졌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이젠 몇 번째인지도 셀 수 없었다. 족히 삼십 번은 넘도록, 세계를 이동한 것 같았는데. 너는 여전했다.

'너 때문이야.'

이번 세계에서도 역시, '오이카와'는 나로 인해 죽어갔고

'너 때문에!! 오이카와가 죽은 거라고!'

이번 세계의 너는. 여지껏 볼 수 없었던 증오심이 불타는 눈으로

'날 찾으러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웃기지마.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내 모든 게 무너졌다고!! 너 따위한테 말 걸지 말 걸 그랬어. 모른 척 할 걸 그랬어. 만나지 말 걸 그랬어.'

나를 노려보며

'너같이 저주 받은 놈.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네 목을 스스로 그었다. 사방에 네 피가 튀었고 내 뺨에 또한 네 피가 튀었다.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피바다 속에서 너는. 끝끝내 원망어린 눈을 거두지 않았다.
앞으로 한 번이었다. 다음 세계가 마지막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이 몸도, 길고 길었던 내 마음의 방황도, 모두 끝이 날 것이다. 고독기. 세계와 세계를 이동하는 이 찰나의 고독한 순간을 조금만 더 참으면, 또다시 널 볼 수 있다. 수 십 번의 죽음을 보고 수 백 번의 네 절규를 보고 수 천 번의 네 원망을 들었으면서도, 또다시 나는 너를 찾아 나섰다. 네 말과 행동으로 인해 진즉에 너덜너덜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너를 마중 나간다.

"아,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려."

나에게 있어 마지막이 될
이 세계의 너는
이번만큼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런
그런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어
날 향해주었으면 좋겠다.




*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사망소재 주의
*FHQ




W. 멜




혼자였던 날 찾아내 준 건 언제나 너였다. 특별했던 건 바로 너였다. 인간든 아니든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며 씩 웃어준 건, 다름 아닌 너였다. 네가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고 네가 있었기에 쓸쓸했으며 네가 있었기에, 네 빈자리를 향해서만 오롯이. 울음을 쏟아낼 수 있었다.




#




그 이름은 마왕. 마왕이란 타이틀에 걸맞는 우아한 걸음걸이와 기품있는 손짓, 그 자신의 고결한 존재 의의를 항시 자각하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마왕,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그럼 쿠로쨩~ 집 잘 보고 있어!"

그랬어야 했다.
우당탕탕 소란을 피우며 방정맞게 뛰쳐나가는 저 뒷모양새는 요리보고 조리봐도 오이카와 토오루임이 틀림 없었다. 신상으로 맞춤 제작했다는 희멀건 부츠가 허벅지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허벅지에 너무 딱 맞게 제작된 탓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미간을 팍 찌푸리다 제 혼자 자빠지고 마는 오이카와였던 것이다. 그의 몸이 한 번 기우뚱 거릴 때마다 뒤로 길게 늘어져 있던 새까만 로브가 펄럭였고 숫양의 것처럼 둥글게 말아 올라간 한 쌍의 위풍당당한 뿔은 시시때때로 휘청거렸다. 쿠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무 빗자루의 끝을 지지대삼아 턱을 괴고 있던 쿠로오는 거하게 나자빠진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며 큰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리 서둘러. 어차피 약속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벌써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면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전날에 먹고 남겨 두었던 생닭의 도톰한 가슴살 부근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날아 오를 듯한 걸음걸이로 성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까 쿠로쨩이 애인이 없지요~"
"오야오야. 그 잘난 뒤통수 절벽 아래로 확 걷어차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마왕님 보고 죽으라 하는 거야? 너무해!"

부츠와 한참을 씨름하던 오이카와는 제 뒤에서 생글생글 웃는 목소리로 살벌한 협박을 읊조리는 쿠로오에게 선홍빛의 혓바닥을 쏙 내민 채

"메ㅡ롱이다."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의 검지가 공중에 작은 원을 그리자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성문이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 전에는 돌아올테니까~"

순식간에 성 밖을 뛰쳐나간 오이카와는 건성으로 오른손을 흔들여 보였다. 뭐가 그리 급한지. 앞뒤 안 보고 힘차게 달려나가는 폼이 금방이라도 돌뿌리에 걸려 넘어질 것만 같았는데.

"어차피 내 알 바 아닌가."

저 홀로 남겨진 쿠로오는 다시금 지겨운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어두침침한 암석들로 가득찬 성의 꼭대기는 하루라도 청소를 빼먹으면 먼지와 벌레가 들끓어 수 천년째 쿠로오 테츠로를 청소의 늪에서 벗어나질 못하게끔 하고 있었다. 그래도 영생을 사는 제 생명줄 덕택에 익숙해졌기 망정이지, 만약 인간과 같은 찰나를 사는 짧은 수명이었다면 빗자루질만 하다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쿠로오는 제 팔을 걷어부쳤다. 진즉에 벗어던져진 붉은 로브는 대리석 테이블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이와. 이와 뒤에 뭐였지."

아, 이즈미. 이와이즈미.
쿠로오는 습관적으로 뿔을 만지작거렸다. 오이카와의 것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기껏해야 검지 하나 크기. 보통은 마력의 크기를 의미하는 이 뿔의 유래가 살아온 세월에 비례한다는 설 또한 사실이라면, 오이카와는 얼마나 긴 세월을 저 홀로 지새웠던 건지.
쿠로오가 기억하는 지난 수 천년간의 오이카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사상을 가진 악마. 즉, 마왕이었다. 지나다니는 인간 수십은 거뜬히 홀리고도 남았을 아름다운 미모였으나 지나치게 말수가 적어 벙어리로 착각하기 십상이었으며 기괴하게 빛나는 붉은 눈에선 한줌의 따뜻함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매일매일을 죽지 못해 겨우 숨을 쉬는 듯했다. 눈꺼풀을 내렸다 들어올리는 것마저 질려버렸는지 마치 시체처럼 단조로운 하루를 반복하는 듯했다. 밥을 먹고 호흡을 가다듬고 책을 읽고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삶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무딘 존재가 바로 마왕이었던 것이다. 그런 오이카와의 시초나 탄생 배경에 관해선 쿠로오 자신조차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무렵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을테니 어찌보면 당연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말을 붙이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천 년은 걸렸던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열심히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이 쪽의 노력은 싸그리 씹어 먹은 채 거만하게 고개만 까딱까딱 거리던 오이카와의 재수 없는 얼굴 하나만큼은 지독하게 선명했지만.
그런 그가 이 한 달, 영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눈 한 번 깜박할 정도의 찰나의 시간동안 아주 돌변하고 말았다.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꿔 태어난 것처럼 사근사근한 얼굴로 웃음지을 수 있게 된 오이카와로 인해 피부에 우수수 닭살이 돋아 오르는 건 오히려 쿠로오였다. 그 계기라 할 수 있는 시작의 날은 눈에 띌 만큼 특별하진 않았다.

"아, 아닌가. 바람이나 쐴 겸 외출한다 했으니까 특별... 하다 할 수 있으려나."

마왕이 성이라는 제 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쿠로오에게 있어, 마족에게 있어, 그리고 인간들에게 있어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산 하나를 통째로 제 영역권으로 바꿔버린 마왕은 그 주위로 이중 삼중의 결계를 발산시키는 결계의 핵심이었다. 마왕 자신이 의도한 것?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그 몸에 깃든,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마력 덕택이었다. 숨결 한 번에 동식물이 말라비틀어 죽는 것은 허다했고 어지간한 마력을 가진 귀족급이 아닌 이상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에 겨워했다.
이유야 어쨌든 마왕이 갖고 있는 어마무시한 마력덕에 그의 성은 언제나 타 마족으로부터, 그리고 인간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오이카와의 부재는 성에 있어 큰 타격이 되곤 했던 것이다. 마왕의 힘에 업어가려는 하등 마족, 그의 목이 떨어지기만을 노리고 있는 백작급 이상의 마족, 그리고 인간까지. 사실 마족들의 경우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해 무시하고 그럭저럭 살아갈만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마왕? 그런 말도 안되는 게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

인간이었다.

'그렇다니까. 우리들 눈이 안닿는 산 속 깊숙한 곳에서 혼자 불로장생의 삶을 살고 있다 하더군.'
'불로장생이라니. 자네는 무슨 애들 농담같은ㅡ.'
'정말일세. 그 머리에 장식된 뿔을 뽑아다 집안에 걸어두면 그 가문은 대대손손 번창한다는 소문이 이 근처엔 파다한 거, 눈치 못채고 있었나?'

근거 없는 헛소문에 휩싸인 채 마왕의 이름을 들먹이던 인간들은

'호오. 그건 그것대로 구미가 당기는 군.'
'말이 그렇단 거지 자네, 그 근처엔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말게나. 마왕이란 놈은 존재하고 숨을 내쉬는 것 자체만으로 재액과 재앙을 초래한다더군. 지금껏 인간들이 멸망하지 않은 이유도 마왕이 마음 먹지 않아서 그렇다 하니까. 섣불리 발을 내딛지 말게. 그러다 화를 입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야.'

마왕의 부재로 성의 결계가 유약해진 틈을 타, 반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배타심에 반은 자신들의 손익을 위해 또한 극소수는 단순히 저들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성을 찾아오곤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으슥한 성 안에 실망해버리고 돌아가버리는 게 대다수였지만.

'그럼 이 얘길 꺼낸 이유가 뭔가. 괜한 궁금증만 부풀지 않았는가.'

사건의 시발점이 이렇듯, 적대감에서 시작된 만남이었다면 쿠로오 자신부터가 절대적인 반대를 지지했을 것이다.

'기사단 있지 않은가. 왕궁 기사단. 친위대라 부르던가. 여튼 그 쪽 사람들이 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있다더군.'
'친위대가?'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것은, 제국을 대표하는 왕가 친위대 대장을 일컫는 단어였다. 마왕을 운운하기 이전에 제국을 수호하기 바쁜 인간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 명망있는 사람이 마왕이라 불리는 자와 엮이게 될 줄을 누가 감히 짐작했을까.

"그 날, 외출하고 돌아왔던 오이카와 얼굴은."

오이카와 답지 않았다. 뺨이 발갛게 홍조로 물들어 있었고 어딘가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한 발자국 내딛고 머리를 흔들고 한 발자국 내딛고 가슴 부근을 한 손으로 틀어쥐며 윗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인간처럼 말이지."

자세한 정황은 쿠로오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어떤 인간을 만났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했는데도 제 곁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상한 인간을 만났다고. 오이카와 혼자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 인간을 만나고 난 이후, 마왕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이 많아졌고 표정 변화가 다양해졌으며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감정 표현이 풍부해져 갔다. 그 인간의 이름이 이와이즈미란 걸 알게 된 건 조금 뒤.

'들었어. 그 이와뭐시기란 녀석.'

이와이즈미가 소위 친위대라 불리는 왕궁 기사단의 대장인 걸 알게 된 것 또한 그로부터 조금 뒤.

'이와이즈미야.'
'어찌됐든. 기사단이라며. 그것도 대장.'

테이블 위로 거만하게 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껌을 씹듯 쥐의 꼬리를 야금야금 씹어대던 오이카와는 대수롭지도 않단 얼굴로

'그게 뭐.'

짧게 대답했다.

'일의 심각성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인간을 만난다는 이유로 잔소리할 줄 알았더니 고작 그딴 걸로 트집 잡는 거야?'
'인간인 것도 문제야. 아주 큰 문제지.'

쿠로오에게 있어 마왕이란 가족이자 친구이자 형제이자 평생을 갖다바쳐야할, 오직 단 하나뿐인 주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 피에 새겨져 있던 자각과 숭배. 쿠로오는 그 본성을 부정하고 싶지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놈한테 마음주고 정 줘봤자. 우리가 눈깜짝할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오이카와의 안녕이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쥐꼬리를 씹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말아뜬 오이카와는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호를 그린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상냥하네, 쿠로쨩.'

쿠로오를 향해 웃어주었다.

'괜찮아. 날 찾아내 준 건 이와쨩이니까. 나한테 웃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배려란 걸 가르쳐주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다름 아닌 이와쨩이니까. 만약, 아주 만약 이와쨩이 죽어 버린다 해도. 이 오이카와씨는 기다릴 거야. 그 다음 생의 이와쨩을 기다릴 거야. 계속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으니까. 십 년, 백 년, 그리고 천 년. 쿠로쨩 말마따나 우리한텐 눈 깜짝할 시간이잖아, 안 그래?'

그 대답을 듣기 무섭게, 이건 못 이긴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던 쿠로오였다. 어느 쪽의 오이카와가 좋냐 굳이 꼽아보자면, 예전이 아닌 지금의 오이카와가 좋았다. 부질 없는 삶에 하루하루를 죽은 듯이 연명해나가던 오이카와보다 이와이즈미를 만남으로서 나날이 웃을 수 있게 된 오이카와쪽이 훨씬, 훨씬 좋았던 것이다. 쿠로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오이카와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갓잡은 멧돼지나 연어의 생고기를 준비하는 것뿐이었지만.

"오늘 저녁은 뭘 해먹지."

꿩이라도 잡아볼까 싶어 본격적으로 어깨마사지를 시작한 쿠로오는 문득 창 밖을 돌아보았다.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갈대로 장식되어 있던 드넓은 벌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지고 있었다.

"...오이카와?"

황혼에 감화된 바람결을 타고 짙은 아이보리 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스스로 마력을 컨트롤 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오이카와에게선 항상 미미한 아이보리 향이 풍겨 나왔다. 그렇기에 이건,

"망할 마왕님이 드디어 사고치셨구만."

마력을 한 번에 폭발시킨 듯 산 아래쪽에서 농도 짙은 아이보리 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코를 틀어막은 쿠로오가 다급함에 빗자루를 내던지고 로브를 어깨에 걸치는 둥 마는 둥하며 발길을 서두를 무렵이었다.

"오이카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창백하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들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축 처진 어깨와 바닥에 질질 끌려다니는 로브 끝자락에는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뿐일까.

"너... 너. 상태가 왜 이래. 이... 이 피들은 대체."

얼굴이. 손이. 발이.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대각선으로 튀어오른 핏자국들은 창백한 뺨과 대조되어 더욱 색이 도드라졌고 발자국이 한 번 떼어질 때마다 바닥을 적시는 검붉은 애액들은 응어리처럼 뭉쳐 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마력도 아닌 그림자도 아닌 어두운 기운은 오이카와의 몸을 감싸 안았고 오이카와는 자신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쿠로오쪽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야. 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냐?!"

제 방구석에 틀어 박혀 있기 시작했다.
하루 온종일을 부르짖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왜 그러냐고, 얼굴짝이라도 보이라고, 하다못해 응이란 대답이라도 해달라고. 손바닥이 다 까지도록 팔근육에 마비가 올만큼 문짝을 두들기고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이라곤 고요한 침묵뿐이었으며 그 때마다 쿠로오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좌절하고 무너져 내려야만 했다.
아예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피폐한 몰골의 오이카와가 성으로 돌아왔을 무렵, 그 곁에선 희미하게나마 이와이즈미의 냄새가 났다. 정확하게는, 이와이즈미의 혈향이 말이다. 모종의 이유로 오이카와 자신이 그를 죽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은.

"...저로 인해 이와이즈미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던가."

그렇게 가정하면 앞뒤가 들어 맞았다. 수 천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지난 한 달이란 시간은 오이카와에게 있어 전환점과도 같았다. 그리고 몸소 그 계기가 되어 준 것이 바로

"그 인간이지."

오랜 세월 끝에 겨우 찾아낸, 오이카와 자신에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안겨준 인간. 그런 인간의 신변에 어떠한 문제가 생겨 폭주를 해버렸다, 라.
쿠로오는 어깨가 크게 들썩일 만큼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늘까지 합치면 꼬박 일주일째였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이토록 후유증이 긴 것이 상실이란 감각인가? 쿠로오로썬 알 길이 없었다. 하루 이틀이야 방에 틀어 박힌 일은 있었지만 그 이유는 주로 독서나 잠에 취했을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를 만나게 된 이후로 오이카와는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성밖을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그래도 일주일은 심하지 않았냐. 기다리고 있는 이 쪽 입장도 생각해달라고."

오이카와를 따라 덩달아 일주일째 강제 단식을 하고 있으니 쿠로오 자신도 나름대로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끼니는 일체 입에 대지 않은 채 주인 하나만 기다리는 고양이마냥 그 주변만을 빙빙 맴돈 보람이 없진 않았다.

"짜잔. 오이카와씨 부활!"

딱, 일주일째였다. 굳건히 닫혀져 있던 철문이 움직였고 오이카와는 양팔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상큼한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한 마디로, 오이카와는 멀쩡했다. 멀쩡해 보였다. 일주일 전의 초췌했던 몰골은 한낱 환상에 불과했던 마냥, 아주 말끔한 얼굴이었다. 펄럭이는 로브에선 전처럼 미미한 아이보리 향이 풍겼으며 코를 찌르는 피냄새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배고파! 그 동안 밥도 못 먹고 쫄쫄 굶었더니 배가 고파서 돌아가실 거 같아!! 쿠로쨩 오늘 저녁 메뉴 뭐야?"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말들의 연속에 쿠로오는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방긋거리는 입.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가. 피로 한 점 남지 않은 매끄러운 피부결. 꼭,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 일주일 전의 패닉은 쿠로오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오이카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끼."
"응? 뭐라고?"
"망할 마왕 새끼!!!"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 오이카와를 향해 쿠로오가 제 몸을 날렸다. 작지 않게 울려퍼지는 우당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쿠로오가 무려 마왕의 위에 올라탄 채 헤실헤실 웃고만 있는 그의 양 뺨을 힘껏 잡아당긴 것이다.

"일주일 동안 방에 처박혀서 내 말엔 일절 대답도 안하고 얼굴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잔뜩 걱정 시키게 만들고 이제와서 뭐? 배가 고오파? 밥 소리가 나오냐 지금??"
"하하하하."
"웃지마, 못생긴게."
"어레레. 내가 이와쨩한테 자주 하던 말인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거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작 그 입으로 직접 이와이즈미를 언급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리라. 쿠로오는 억세게 붙잡고 있던 오이카와의 뺨을 놔주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랑 무슨 일이 있었어."
"배고파 나. 밥부터 먹으면 안될까?"
"피할 생각하지마. 네가 방에 틀어박혀 있던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진 알고 싶지도 않아. 내가 너 나오는 거 하나만 기다린 거? 네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기다리는 거 하나만큼은 자신있으니까. 근데. 그런 나도 내가 기다려야 했던 이유 하나는 알아야겠다. 무슨 일이야. 너랑 이와이즈미.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바보처럼 헤실거리고만 있던 오이카와는 그제야 차츰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억지로 웃고 있었구나. 그래. 너 하나만 오롯이 바라보고 살아온지가 몇 천년인데.

"그냥. 별 일 아니야."
"......."
"언젠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게 현실이 된 것 뿐이야. 죽었어. 그 애가 죽었어. 그 뿐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쿠로오는 비뚜룸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네가 단지 슬퍼하기만 했다? 네가 고작 그런 놈에 불과하지 않다는 거 난 아주 잘 알아. 넌 마왕이니까. 죽었다는 결말에서 얌전히 포기할 놈이 아니잖아. 왜. 그 때 말했던 것처럼 이와이즈미의 다음 생이라도 주구장창 기다려볼 작정인 거야?"

그제야 오이카와는, 실없는 웃음을 토해냈다. 눈이 가늘어졌다. 두 개의 루비가 선명한 빛을 발하며 쿠로오를 올려다 보았다.

"역시 쿠로쨩~ 오랜 시간 옆에 둔 보람이 있다니까."
"......."
"절반쯤은 맞췄어. 대단하니까 정말."

오이카와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작게 감았다 뜬 눈 아래로, 그늘이 짙어졌다.

"기다리려고 했어. 그 때 결심했던 마음엔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근데. 근데 말이야. 이와쨩이 죽은 이유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도저히 두 손 두 발 놓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순 없었어. 나 때문이야. 이와쨩은 나 때문에 죽어 버린 거라고. 나, 이대로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순 없어. 내가 찾아 갈 거야. 내가 이와쨩을 마중 나갈 거야. 처음 날 찾아내 준 건 그 애였어. 내 처음은 언제나 그 애였던 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먼저 그 애를 찾으러 갈 거야."

오이카와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진 쿠로오는 하.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찾으러 갈 거야.' 그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쿠로오는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카와.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물론 알지. 그걸 위해서 방에만 틀어 박혀서 연구하고 또 공부했는 걸."
"금기 마법이야."

입밖으로 '금기'를 내뱉기 무섭게 마른 침이 꼴깍,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오이카와가 검지를 들어 작은 원을 그리자 그의 위에 올라타 있던 쿠로오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라 먼발치에 나자빠졌다. 그가 부딪힌 벽은 산산조각나며 부서져내렸고 쿠로오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알고 있다 했잖아. 일일이 참견하지마. 기껏해야 종노릇하는 고양이 주제에."
"나는 그저..."
"추가로. 말려봤자 이미 늦었어. 진은 이미 완성된 상태거든. 내 피와 주문 몇 마디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

오이카와는 제 긴 손톱을 들어 손목을 그었다. 톡, 토독. 바닥에 선명한 핏방울이 굴러떨어졌고 그에 맞춰 오이카와의 주변이 붉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둥그렇게 새겨진 거대한 원은 고대의 문자들로 뒤덮여 하나둘 공중으로 떠올랐고 오이카와는 입을 벙긋거리며 알 수 없는 주문들을 읊어 보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쿠로오가 벌어진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고 그 쪽을 향해 기어가며 간절하고 간절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거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돼!! 여기로 돌아오는 게 아예 불가능 할지도 몰라. 까딱하다간 시공간의 틈새 속에 빨려 들어가 길을 잃고 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지도 모른다고!!"
"쿠로쨩."
"차원 이동이 얼마나 네 마력을 갉아 먹을지 몰라. 설령 네가 그토록 바라던 이와이즈미를 만나게 되더라도, 지독한 인과율이 너를, 이와이즈미를 따라 다닐게 분명하잖아!! 아무리 불멸의 삶을 사는 너라도, 가늠할 수 없는 마력이 온몸에서 흘러 넘치는 너라도, 하물며 이 세계에선 마왕이라 불리는 너라도! 그 불행을 피할 순 없어. 인과율은 널 고독하게 만들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끊임없이 발악해도 네 옆에 그 누구도 남지 않게끔 할 거라고!! 제발. 제발 다시 생각해. 다시 생각하자, 응? 오이카와 제발. 제발."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돌아 보았다. 서글픈 웃음이었다. 더이상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없어지면, 마왕은 쿠로쨩이 해줘. 인간들 너무 박대하지 말고. 또 알아? 인간들 중에 쿠로쨩이 소중해할 사람이 있을지."
"나는! ...널 잃고 싶지 않아."
"...미안. 네 기대엔 응할 수 없어. 그야, 이와쨩이 기다리고 있는 걸."

붉은 빛이 삽시간에 높이 퍼져 올라 오이카와를 감싸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핏빛으로 물들어 갔고 그 적안이 붉은 빛에 섞이는 바람에 잘,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나. 쿠로쨩이 있어서 여기까지 살 수 있었어. 이와쨩이 살아 숨쉬는 이 시간대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어.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쿠로쨩."

미안하다 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고맙다고 해봤자. 그래봤자.

"기다릴테니까! 수 백년, 수 천년이 지나도 나는 계속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 네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거머쥐게될 마왕이라 이름은 아주 임시일 뿐이고 네가 돌아오면 다시 돌려줄테니까!! 그러니까... 꼭 돌아와. 돌아와야 해."

그를 감싸고 있던 붉은 빛은 조각조각 나뉘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무늬처럼 새겨진 오이카와의 핏방울 몇 자락. 성 안이 공허한 것 같았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변해버린 오이카와 덕에 시끌벅적하기만 했던 이 고성이, 단 하나의 부재로 인해 침묵으로 침식당한 것 같았다.

"...좋아했어, 이 멍청아."

볼가를 타고 물줄기가 하나 흘렀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닦아내려 하진 않았다. 그저 흘러가게, 조용히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머리를 기대고 있던 창이 덜컹였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이 흐릿했다. 액셀을 짙게 밟고 있는 탓에 풍경들은 차츰 형상을 잃고 옅어져 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가벼운 접촉사고라 했으니까."

숨을 내뱉을 때마다 뿌연 김이 유리창에 서렸다. 의자 위로 버려진듯 아무렇게나 던져둔 손등 위로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그런 가벼운 사고였으면 사치코가 왜 전화를 했겠어요! ...왜 다 큰 어른이 애처럼 울면서 전화를 했겠냐구요."

옆에 바짝 달라 붙은 이형의 존재가 저를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일까. 미안한 얼굴일까.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일까. 어느 쪽이든,

"토오루군. 눈을 못 뜨고 있다잖아요."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입김으로 가려진 창 너머는 반복적이었다. 주홍의 가로등 불이 하나. 그 주변을 뒤덮은 먹색의 어둠이 하나. 그 단조로운 반복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금빛의 향연이 밤하늘 위로 못박혀 있었다.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보석들처럼 반짝이며 저와 오이카와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던 그것들은, 지금으로 돌아와 이와이즈미의 눈가를 찌푸리게끔 했다.

'믿고 있어, 너희들.'

1번의 유니폼을 갖춰입고 내 등을, 내 긍지를 밀어주던 널 좋아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안심하지 않고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앞길을 마련해 나가던 널 좋아했다. 네가 있던 코트를 좋아했다. 네가 머물렀던 교실 책상을 좋아했다. 네 체취가 흠뻑 묻어 있던 옷자락을 좋아했다.

'이와쨩!'

방긋하고 호를 그리는 눈웃음을 좋아했다. 제 이름을 한 톤 높여 부르는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사내 주제에 틈만 나면 안기려고, 안으려고 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좋아했다. 어릴 때 심심치않게 주고 받던 뽀뽀 한줌을 점차 의식하게 되버린 네 얼굴을 좋아했다. 부끄럼 탈 때면 그 고운 손등을 입가에 가져가는 네 버릇을 좋아했다. 볼 한가득 우유빵을 머금고 우물거리는 네 뺨과 입술을 좋아했다.

뭐가 유성이고 뭐가 반짝거리고 뭐가 예쁘단 거냐.

쾅ㅡ. 작지 않은 마찰음이 이마를 두들겼다.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이마 정가운데가 얼얼했다. 눈가가 찔끔하고 눈물을 뽑아낼만큼 꽤 아팠다.
그토록 구구절절 좋아했던 건 지금의 오이카와였다. 저와 같은 시간선을 걸어가던, 절친한 친구이자 배구부의 주장이자 사귄지 두 달도 되지 않았던 지금의 오이카와였다. 그런 오이카와를 버젓이 두고

"이, 이와쨩? 자학은 나쁜 거에요?"

저 따위 가짜를.

불그스름한 동공을 동그랗게 확장시키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 이마에 손을 얹었다. 보다 정확히는, 손을 얹으려 했다.

"건드리지마."

탁 소리 날 정도로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을 밀쳐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바로 옆자리에 앉지 않는 이상 들리지도 않을 그 작은 중얼거림에는 분명한 철심이 박혀 있었다. 적의가 가득 담긴 언구. 차게 내쳐지는 바람에 갈 곳을 잃은 손은 힘없이 축, 쳐졌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의식적으로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지만 안타깝게도, 이와이즈미는 병원 입구에 다다라 차문을 열기 직전까지 오이카와에게 이렇다할 눈길 하나 제대로 건네지 않았다.
처음 와보는 병원이 아니었다. 정기 검진을 받으러, 신체 검사를 받으러, 틈만 나면 오버워크를 해버리고 마는 오이카와를 따라서 질리도록 와본 적이 있는 병원이었다. 그럼에도, 병원 곳곳에서 풍겨져 나오는 흉흉한 분위기는 분명.

"밤이라서 그렇겠지."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병원은 쥐죽은 듯 조용할 줄로만 알았다. 깜깜해지도록 꺼버린 조명과 어두칙칙한 복도 한가운데서 희미한 소독약 냄새만 가득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 이와이즈미의 예상을 깨부수고 정작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녹색 가운을 입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의사와 간호사들, 캐캐묵은 쇠비릿내를 빼닮은 지독한 피냄새와 그에 맞먹을만큼의 알코올 향, 아프다는 언어의 형태가 외마디 비명으로 쩌렁쩌렁 채워진 응급실 복도. 다리 끝에 쇠사슬이 배배꼬여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맴도는 것처럼. 한 발 내밀면 누군가가 고꾸라지는 비명이 들렸고 다른 한 발을 내딛으면 삐삐거리는 기계음이 단조로운 음을 때리며 골을 울렸다. 홀린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하던 이와이즈미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듣지마. 아무 것도 듣지마. 내 목소리에만 귀기울여."

두 쪽으로 찢어질 것 같은 고막을, 두 귀를 제 손으로 막아주던

"손이 두 개밖에 없어서 눈은 못 가려줘. 그러니까 앞만 보고 걸어. 움직여.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이와쨩이 가야할 길만 나아가."

마왕 덕이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텐데."
"이번엔 쳐내지마. 아팠단 말이야."
"넌 진짜ㅡ."

뒤로 꺾은 고개 너머로, 오이카와가 있었다. 험악한 뿔 한 쌍이 자라나 있었고 장미를 빼다박은 듯한 붉은 눈동자 두개가 저 하나만을 지그시 들여다 보고 있었고 그것들만 제외하면,

"손 치워."

오이카와 그 자체였다.
좋아 라는 감정의 끄나풀은 외견이 아닌, 그 본질에 핵심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차마 죄의식을 떨쳐낼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버젓이 놔두고 타인과 손을 잡았고 데이트를 했고 사진을 찍었고 나아가선 얼떨결에 키스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몇 걸음. 오이카와가 가만히 누워있을 침대까지 고작 몇 보였다. 입술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마왕과 맞잡았던 손은 진흙을 움켜쥔 마냥 찐득거렸다. 이대로, 오이카와를 마주 볼 수 있을까. 마주 볼 양심이 남아 있긴 하던가. 오이카와가 눈을 감고 있어도 지옥이었고 눈을 뜨고 있어도 지옥이었다. 어느 쪽이든 지옥이라는 결말밖에 남지 않았다면, 차라리

"눈 뜨고 있어라, 이 망할... 오이카와."

백색의 일렬로 늘어진 장막을 살포시 걷어내자, 마법처럼 귀가 찢어져라 들려오던 주변의 굉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 눈을 감고 있었다. 뽀얀 뺨과 대비되는 연갈색빛의 머리칼은 그 끝이 살짝 구불어 이마에 들러 붙어 있었다. 감긴 눈꺼풀 끝에는 남자치곤 기다란 속눈썹이 매달려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앙 다물고 있는 입술에는 미미한 핏기만이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자잘한 생채기들과 붕대, 그리고 흉물스럽게 꽂혀진 산소 호흡기를 빼놓고 보면 사람과 아주 흡사한 마네킹, 혹은 잡지표지에 한 번쯤 실릴 법한 곱상한 모델이라 칭해도 부족함은 없었다. 아주 익숙했다.

"어이."

부르면 당장이라도 몸을 벌떡 일으킬 것 같았는데.

"일어나. 여기가 학교냐? 수업 시간이야?"

수액 바늘이 꽂힌 손등을 툭툭 건드리며 여느 때처럼, 조금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는데.

"장난치지마. 야. 기껏 불렀는데 씹지 말라고."
"......."
"눈 똑바로 떠서, 나 보라고... 나 좀 보라고!!"

무릎에서 힘이 풀려 버린 건 왜일까.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은 건 왜일까. 침대 위에 힘없이 놓여진 손을 붙들어 매자,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마왕이란 놈에게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사람의 체온이, 온정이 만개하듯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눈을 감고 있든 쿨쿨 잠을 자고 있든 울지 않을 거라던 막연한 다짐은 오이카와의 창백한 몰골을 마주하기 무섭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바빴다. 뜨뜨미지근한 눈물 줄기는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려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규칙적으로 파동을 이뤄내는 곡선들이 녀석은 아직 괜찮다고, 아직 살아 있다는 증명을 내보이고 있었는데, 붕대와 반창고 몇 개를 빼면 이렇게 멀쩡했는데.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이었는데.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그 말갔던 갈색빛 동공을 동그랗게 떠보일 것 같았는데. 어째선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주변이 찢어지는 곡소리로 가득차서인지, 그 어느 곳보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공간이어서인지, 오이카와의 부모님과 제 부모님의 울음 섞인 한숨이 마이크라도 갖다댄 듯 크게 들려서 인지, 해주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건만 그것들을 토로하며 양심을 짓누르고 있는 이 돌덩이에 대한 변명할 기회조차 저에게 주어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 모두 때문인지.

"원인을 모르겠군요."

다른 환자의 수술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는지 입가에서 마스크를 벗어내리며 오이카와의 진료 차트를 확인하던 의사는 핏덩어리들로 물들어진 의료 장갑을 벗고는 입을 열었다. 녹색으로 일괄된 수술복 곳곳에는 거뭇거뭇한 핏자국이 흉터처럼 흉물스레 튀어 있었다.

"진단 결과는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의식을 잃을 이유도, 잃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의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피냄새가 짙게 펄럭거렸다. 숨이 막혔다. 그의 것이 아니었건만 그의 살결에서 풍기는 피내음 같았다.

"사고 당시 보호자분들은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어째서인지 환자분은..."
"선, 선생님. 저희 토오루. 토오루 괜찮은 거죠? 그냥, 그냥 의식만 잃은 거죠? 금방 깨어날 수 있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좋아해.'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준 건 네 쪽이었는데. 친구와 연인, 이성과 동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벼랑끝에 다다라 있던 건 네 쪽이었는데.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밑바닥까지 쥐어짜내어 친구라는 마지막 희망을 지워버린 건 네 쪽이었는데. 말끔하게 차려둔 밥상 위로 숟가락만 얹듯. 나는 네 고백 위에 내 비겁함을 겹쳐 놓았을 뿐이었다.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었다. 내 손톱 끝자락이라도 어떻게든 닿아 보려고 애쓰는 네 손을 휘어잡아 묵묵히 이끌어 가고 싶었다. 소중하니까라는 변명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 놓으며 진심으로 날 좋아해주는 너를 피해다녔다. 무심한 척을 했다. 더 아껴주자, 조금 더 있다 사랑하자며 내 마음 하나 아끼는 걸 우선시했다.

'우리, 사귀는 거 맞아?'

차게 식어 있던 그 눈은 또렷하게 날 향하고 있었다.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원망하고 있다고, 상처 받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만, 언제쯤 의식을 되찾을지는 저희 쪽에서도 확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너와 꼭 닮은 다른 이와 함께 너와 걷던 길을 걷고 잡지 못했던 손을 잡고 생각도 못하고 있던 데이트를 하고 너와는 해보지도 못했던 사진을 찍고 키스를 하고. 한 순간이나마 네가 아닌 다른 이에게 가슴 설레했던

"이대로 의식을 찾지 못할 경우,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해두셔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를.

의사는 미련없이 발을 돌렸다. 그를 뒤따르던 간호사들은 임시 보호소마냥 마련된 오이카와의 침대 주변을 얇은 장막 하나로 가려주었다. 손등 위로 허연 뼈가 도드라질만큼 오이카와 손만을 꼭 붙들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주룩주룩 굴러 떨어지는 눈물들을 구태여 닦으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가슴 한 가운데를 향해 총구를 겨냥한 후 펑 터뜨려 버려 홍수처럼 뿜어져 나온 것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시뻘건 핏방울 대신 말간 눈물이 터져 나온 거겠지만.

"하지메. 우린 잠깐 바람 쐬러 갔다 올테니까. ...토오루를 부탁할게."

아랫입술을 앙 다물기만 한 채 곡소리 하나 내지 않는 이와이즈미가 안쓰럽기라도 했던 걸까. 그 소리 없는 오열에, 억장이 다시 한 번 무너지기라도 했던 걸까. 두 사람의 부모들은 조용히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으리라. 부모들은 동시에 그리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옮겼지만 애석하게도,

"역시 훤칠하네, 이 쪽의 오이카와씨. 날 닮아서 그런가?"

그 곳엔 둘이 아닌 셋이 남아 있었음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호기심에 병원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사고를 치고 다닐 줄 알았던 오이카와는 의외로 얌전했다. 응급실 내부를 쭉 훑어 보더니 픽 웃더니 팔짱만을 끼고 있었다. 요란한 흰 부츠를 바닥에 대고 딱딱 소리가 나게끔 부지런히 두드려 대기까지 했다.
정작 난해했던 건 그가 짓고 있던 표정이었다. 말 없이 뚝뚝 눈물만 떨구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걱정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또다른 자신을 보며 특별난 감상에 젖어 있는? 머리가 띵해질 만큼 지독한 소독약 냄새에 짜증이 나는?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되지 못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적안에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죽진 않았네?"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죽지 못해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를 내려다 보는 듯한, 그런 경멸심이 말이다.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 내리던 눈물들은 급브레이크를 밟듯 정지하고 지그시 감겨 있는 눈꺼풀을 향한 미안함으로 가득차 있던 사고 회로가 작동하기를 거부했으며 염산을 부어 넣어 매분매초 녹아내리던 내장이 잠잠해졌다.

...뭐야. 잘못. 들은 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겠지. 그렇겠지?

분주한 소음들은 들리지 않았다. 저와 오이카와. 이렇게 셋이서 백야의 공간으로 덩그러니 던져진 것처럼. 주변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잘만 돌아가던 분침과 시침이 이 때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얼어 붙은 듯 느리게만 흘러 갔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고개 너머로, 오이카와는 방긋 웃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이자 끝이 말린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살풋 접어진 눈살 사이로 가느다랗게 번득거리는 붉은 빛이

"의외다."

시퍼런 송곳이 되어 날아 들었다.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이 찬 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을 때, 오이카와는 가볍게 발걸음을 뗐다. 사람의 것치고 체온이 극히 낮았던 손. 얼음장을 방불케했던 손등과 정돈되지 않은 채로 기괴하리만치 길게 자라 있던 손톱. 바로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마왕의 신체 일부는 지금에 와서야 낯선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눈물로 젖은 뺨 정중앙에 딱딱한 손톱 끝이 닿았다. 볼을 쓸어 내리는 손길이 찼다. 오이카와는 몸을 수그렸다. 몸소 눈높이를 낮춰 주었다. 눈은 여전히 생글생글거렸지만,

"보통은. 깨꼬닥하고 다 죽어 버리는데 말이야."

그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멈출 것 같지 않던 시간이 멈추고 뭔가 뱉어 냈어야 할 입은 삽시간에 얼어 붙었다. 뺨에 닿아 있는 오이카와의 낮은 체온이 낯설었다. 등골이 오싹거렸다. 얼음물을 머리통에 끼얹은 마냥 볼이, 얼굴이, 전신이 오들오들 떨려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듯 했다. 귓가를 후벼파는 그 목소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의 것마냥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그것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얼어 붙은 머리통이 느리게 사고를 돌리기 시작할 무렵, 촉 소리가 났다. 물로 가득찬 풍선이 쇠바늘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몸을 추스리다 삽시간에 터져 버리는, 물이 우수수 떨어져 버리는 그런 소리가 났다.
오이카와는 길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새가 앉듯 가볍게, 일상의 일부를 건네듯 간지럽게, 안녕 반가워 같은 인사를 건네듯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곧장 떼어냈다. 얼어 붙은 태엽 인형에 태엽을 감은 듯했다.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두뇌가 굴러다니기 시작하고 쥐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던 심장이 거센 펌프질을 시작했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던 슬픔의 감각은 곧장 불처럼 끓어 올라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왔다. 까드득 소리가 새어 나올만큼 이를 악물었고 주먹을 꽉 쥐어낸 손 안에는 세워진 손톱이 거침없이 살을 파고 들었다.

"너. 뭐라 지껄였냐. 그리고 씨발, 뭔 짓거리야."

입술에는 여전히 서늘한 감촉이 생생했다. 소매를 들었다. 찝찝했다. 더러웠다. 싫었다. 싫은 감각이었다. 교복 소매에 입술을 문질렀다. 앞뒤로, 좌우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문지르며 피가 배어 나올만큼 문질렀다. 한참을 문질러도 그대로였다. 깃털처럼 내리앉은 촉감이 여전했다. 깃털? 만일 깃털이라면, 정말 깃털이 내리 앉았다면 그것은 분명

"뭐긴~ 저 오이카와씨 말이야. 안 죽은 게 용하다고."

적안의 악마에게서 뽑혀져 나온 새까만 깃털이리라. 맹독을 묻힌 칠흑임이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츄~ 했잖아. 애정 표현이라구요, 애정 표현. 찐한 키스도 한 사이에 이런 것도 허락 못해줘?"

안 죽어서 아깝게 됐다 같은 표정으로 입을 맞추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입술 끝에서부터 배어 들어 오는 쇳내에 침을 뱉었다. 불그죽죽한 피가 방울방울 섞여 있었다.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오래 주저 앉아 있어서 그런지 한쪽 무릎이 저릿저릿거렸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쭈그려 앉아 있었고 양손으로 턱받침으로 하고 있었고 눈꼬리를 반달처럼 휘어 둔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눈 깜짝할 새였다. 반쯤 눕다시피 제 몸을 뒤로 제껴야만 했던 오이카와는 제 멱살을 붙든 채 사납게 눈을 치껴든 이와이즈미를 그저 올려다 봐야 했던 것이다.

"이것 좀 놓는 게 어때?"
"닥쳐. 닥쳐. 입 닥쳐!! 너 뭐야. 뭐? 죽진 않았네? 의외? 뚫린 입이라고 뭐든 말할 수 있는 거냐?? 어?!"

입가가 쓰라렸다. 바늘로 콕콕 쑤셔대듯 마구 비벼댄 후유증이 뒤늦게 찾아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말을 끊지 않았다. 입가의 통각마저 마비된 사람마냥 오이카와를 빠르게 쏘아 붙이기 바빴다. 목에 핏대를 곧추 세워가며 고함 아닌 고함을 질러대는 이와이즈미와 달리, 오이카와는 극히 차분했다. 놓아 달라는 말은 정말 말뿐이었는지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가만히 그가 붙든대로 붙들려 있을 뿐이었다. 피가 맺힌 이와이즈미의 입술을 빤히 들여다 보던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럼 뭐. 안 죽었다고 신발 벗고 춤이나 췄어야 했어?"

그는 더이상. 웃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이와이즈미는 이와이즈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여태껏, 분노란 감정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적이 있었던가. 격노란 이름이 전신을 휘감아 이성을 짓밟아댄 적이 있었던가.

"헤에. 이와쨩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구나. 저기서 쿨쿨 잠만 자고 있을 오이카와씨, 점점 부러워지네."
"썩을. 야. 내 말은 말같지도 않ㅡ."
"콱, 뒈져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서는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아, 기분이 안 좋았다.

"왜 이도저도 아니게 살아 남아서는."

열 대를, 아니, 백 대를 쥐어 패도 속이 후련할 것 같지 않았다. 옷깃을 붙든 손을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고 싶었다. 동정과 연민따윈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붉은 홍채들을 이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호흡 한 번 마저 여실히 느껴지는 이 비좁은 거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지고 싶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단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악!!!"

대가리를 부딪혔다. 이마빡이 얼얼해질만큼, 두개골에 금이 갈 걸 각오할만큼 억세게 쥐어 박았다. 벌겋게 부은 두 개의 이마에서 주먹만한 혹이 고개를 내미려 할 때, 이와이즈미는

"그게!! 의식불명인 사람 앞에서 할 소리냐, 이 망할 오이카와!!!"

목청을 높였다.

"마왕이라도 좋았어.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생각했어. 넌 오이카와라 이름을 댔으니까. 겉모습이 살짝 다르다 해도 넌 여전히 오이카와였으니까. 내가 알던 오이카와랑 쥐뿔도 다르질 않았으니까. 그래. 인정해. 가슴 떨려 했어. 기뻐 했어. 너랑 나란히 걷는 것도 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도 무심코 키스를 해버린 것도, 전부 좋았어. 너니까. 오이카와였으니까. 나한테만 보이면 어때. 나만 만질 수 있는 거면 뭐 어때. 어차피 다른 놈들한테 보여주기도 아까웠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사람 답다? 인간 답다? 근데. 근데 말이야. 아니야. 넌 아니야. 넌 오이카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냥, 그냥 찌꺼기인 거야. 내가 만들어 낸!!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 항상 오이카와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그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게 만들어 버려서!"
"......."
"그 미안함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가짜에 불과하다고..."

그래. 넌 환상이야.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내 착각이 일으킨 한낱 착시였던 거야.

"아니야."

그런데 이상하지. 환상에 불과한 널 때려버린 이마가 아까부터 얼얼거려. 혹이라도 난 것 같아. 넌 또 왜 그런 얼굴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헤실거리던 네 얼굴이 왜그렇게 한껏 일그러져 있는 거야. 울고 싶은 건 내 쪽인데

"가짜 아니야. 환상도 아니고 착각도 아니야. 나는... 여기 있어."



"...여기에 있다고."

네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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