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거신 전화는 전원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전파가 닿지 않는 장소에…….]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휴대폰 플립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전화하랴, 숨 가쁘게 달리랴, 사람 찾으랴.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목을 칭칭 둘러싸고 있던 목도리가 땀에 차 습했다. 아예 무릎 위로 양 손을 얹고 거칠어진 입김을 몰아쉬던 이와이즈미는 애꿎은 것에 분풀이 하듯 목도리를 잡아 뺐다. 삼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는 것도 잠시. 아직 발걸음하지 않은 세 번째 갈래 길 너머로 이와이즈미는 다시금 뜀박질을 시작했다.
겨울이란 계절의 이름도 끝을 맺어간다지만. 2월의 밤은 여전히 쌀쌀하다 못해 뼛속에 한기가 들어설 정도였다. 이 날씨에 길바닥 어딘가를 나뒹굴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오이카와!!”
말썽의 발단은 언제나 오이카와였다. ‘친구’가 낯설어지고 ‘우정’이 부끄러운. ‘연인’이 익숙하고 ‘사랑’이 당연한. 사랑해, 가 아침 인사처럼 튀어나오고 좋아해, 가 약간은 낯 간지러운 그들은. 자타가 공인한 오랜 커플이었다. 이렇듯 쉴 틈 없이 깨를 볶고 사랑을 속삭여야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추운 겨울날 온갖 분노를 폭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싸웠다. 요 근래 싸우지 않은 날의 횟수를 꼽으라면 양 손으로 헤아려 볼 수 있을 만큼, 두 사람 사이에 부는 칼바람은 도통 잦아 들지 않았다. 이유라고 특별나지 않았다. 침대의 창가자리를 두고, 샤워를 오래 한다고, 하루 종일 삐졌단 티를 낸다고, 말 한 마디 져주려고 하질 않는다고, 예전이랑 다를 거 하나 없다고, 툭하면 예전 일을 들먹인다고.
싸운 것까진 좋았다. 딱 거기까지 였다면, 어느 한 쪽이 숙이고 들어가 화해를 이룩하면 그만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그것은 오롯하게 이와이즈미의 몫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만하자.’
‘뭘 그만해. 할 말이라면 아직 태산처럼 남았어.’
‘나! 이와쨩이랑 싸우려고 연애하고 싸우려고 같이 살고 싸우려고 살 섞는 거 아니야. 연애는 나 혼자 하니? 나만 연애해? 나 왜 만나? 요즘 이런 생각들만 해. 이게 행복한 걸까. 진짜 연애가 맞을까.’
‘……후, 또 그 소리야? 이제는 좀. 알아줄 때도 됐잖아. 오래 사귀었잖아. 이런 것도 이해 못해주면 연애는 어떻게 하고 사랑은 또 어떻게-’
‘이와쨩도 알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한 순간부터 연애는 한 풀 꺾인 거라고.’
‘그 이상……. 입 열지 마.’
‘싫은데. 내가 왜?’
‘하지 말라 하면 좀, 하지 마.’
‘헤어져.’
격에 다다랐던 싸움을 한 순간 허무하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다. 처음엔 효과가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미안하단 사과를 읊조렸고 상처 받았을 오이카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것을 손쉽게 얻어낸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나마 승리자가 된 것 같았다. 더 큰 사랑이란 기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 ‘처음’이 어려웠을 뿐. 두 번째, 세 번째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이와이즈미의 언성이 조금만 높아지면 오이카와는 ‘헤어져’를 무기 삼아 꺼내들었다. 그것을 비장의 카드 삼아 기세등등해진 오이카와를 대하는 이와이즈미는 오죽했을까. 처음엔 미안했고 두 번째는 껄끄러웠고 세 번째엔 한숨이 나왔다. 작작 좀 해라. 셀 수 없는 횟수만큼 이별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돌아왔을 무렵 마침내 이와이즈미는 짜증을 섞었다. 크게 상심한 오이카와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고 이와이즈미는 그마저 좋게 보질 못했다.
결국 도피처로 삼은 것이 하나는 가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홧김에 쏟아 붓는 술이었다. 머리가 알딸딸해질 만큼 빈속에 알코올을 들이키고 나면 쌀쌀한 거리를 홀로 배회했다. 개중 눈에 띄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다, 홀린 듯 동전을 넣고 손에 익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가진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대꾸 없는 발신자에게 차츰 윽박을 지르곤 했다. 오이카와냐, 어디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야, 너 자꾸 이럴래, 어디까지 날 속상하게 만들 건데 등. 처음부터 끝까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그리고 잔소리. 잔소리로 귓전이 따가울 때 즈음 오이카와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곤 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된 ‘미안해’는 가슴 먹먹한 ‘잘못 했어’로 이어져 마지막엔 울음으로 제 서러움을 호소했다.
전부 거짓말이고 농담이었단 말이야, 섭섭해서 홧김에 아무렇게 내뱉고 만 거라고, 헤어지지 말자, 그러지 말자,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 말 그대로 믿은 거 아니지, 나랑 진짜 끝내려 한 거 아니지, 내 생각 전혀 안 난 거 아니지, 내가 안 보고 싶어진 거 아니지. 나는 보고 싶어. 이와쨩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보고 싶단 말이야.
결국엔 ‘보고 싶다’였다. 그마저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폭언은 공중전화 속 50엔이 전부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버거웠고, 그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도중에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있다 애꿎은 머리칼만 잔뜩 헝클어뜨려야 했다.
오늘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집에 돌아오고 보니 있어야할 사람이 없었고 ‘토오루’가 아닌 ‘하나마키’란 이름의 부재중 전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술 먹고 푸념을 듣는 것까진 좋았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라져 있었다고. 언제 걸려올지 모를 전화 한 통에 의지할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제 연인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진짜.”
한참의 공방전 끝에 찾아낸 오이카와는 흔한 공중전화박스 바로 옆, 어두침침한 그림자 속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차라리 안에 들어가 있지. 힘껏 뛰었는데도 손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추위였다. 이 날씨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친 채 거리를 떠돌았을 오이카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저절로 울화통이 치미는 것 같았다.
“코트라도 입고 나오던가. 이러다 감기 걸리면 뒷수습은 누가 해주는데.”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그런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이와이즈미가 한 손에 들고 뛰었던 목도리를 오이카와의 휑한 목 언저리에 둘러 주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이와…쨩?”
술도 못하는 게 들이 붓기는 또 얼마나 들이 부었는지. 목도리를 둘러준다 자세를 낮췄더니 스멀스멀 풍겨 오는 술 냄새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붕어를 생각나게 하는 퉁퉁 부은 눈두덩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겨우겨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곤 또 한 번,
“이와쨩!!!”
눈물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시간 홀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주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펄쩍 안겨 들 듯. 오이카와는 저와 눈높이를 맞춘 이와이즈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곤 그의 가슴팍 한 가운데 울음이 터진 꼴 사나운 안면을 깊이 묻었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이와이즈미가 뒤로 벌렁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어 버리고 말았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대체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단 말이야. 흑, 으앙-”
허,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이와이즈미는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안기며 엉엉 우는 오이카와의 머리통에 꿀밤 한 대를 힘껏 쥐어주려다, 이내 포기했다. 벌겋게 부은 눈가와 대비되는 낯짝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가 가시다 못해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등을 묵묵히 쓸어내려 주었다. 손바닥을 통해 지독한 냉기가 전해져 왔다. 이와이즈미는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었던 말들과 혈류가 거꾸로 솟구쳐 오를 만큼 격해져 있던 울화를 삼켜내고 가라앉혔다. 사실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분노 따윈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분풀이보단 오이카와의 심신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를 발견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의 안위부터 확인하고 마는 자신에게 이와이즈미는 진즉에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절실해 보였다. 벼랑 끝으로 내몰려 낭떠러지 아래의 까마득한 어둠에 잔뜩 겁을 먹은 사람처럼. 그것은 이와이즈미의 옷자락을 꾹 붙든 손아귀에 도드라진 핏줄로 증명되어 있었다. 그러니 항복해야 할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단 좀 비켜봐.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거 안 부끄럽냐.”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그러쥔 이와이즈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부정적인 말에 오이카와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싫……어.”
“오이카와.”
“싫어.”
“안 비켜?”
“싫다니까!!”
고집불통. 이와이즈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뒷머리를 벅벅 긁적이다, 오이카와에게 등을 보였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무언의 손짓을 보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의 행동거지에 오이카와가 머뭇거릴 때면 이와이즈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마음 따위 훌훌 털어낸 것 같은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뭐해? 안 업히고.”
그제야 오이카와는 수분으로 불어터진 눈가를 살짝 휘어 보였다. 허락만을 기다린 사람마냥 그의 다부진 등 위로 넙죽 업혔다. 건장한 성인 장정 하나를 든 탓에 이와이즈미의 무릎이 순간적으로나마 부르르 떨렸다. 그마저도 잠시, 튼실한 팔 근육은 오이카와가 미끄러지지 않게끔 그의 허벅다리 뒤쪽을 세게 감싸 안았다.
“헤헤 이와쨩 등 오랜만이다아~”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버둥버둥 거리지 좀 마, 이 망할카와.”
“이와쨩 나 많이 무거워?”
“말이라고 하냐.”
“이와쨩 나 많이 사랑해?”
“말이라고 하냐.”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한 높낮이 없는 음성에 오이카와가 부루퉁 입을 내밀었다. 어깨 부근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바닥이 단숨에 이와이즈미의 목 언저리로 이동했다.
“……성의가 없어. 매정해! 차가워! 미워 죽겠어!!”
목덜미를 쥔 손아귀에 퍽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인 압박을 받은 이와이즈미의 숨통이 급박한 SOS신호를 보냈다. 불행히도 오이카와는 완고했다.
“뭐……. 윽, 오이카와!! 맞고 싶냐?! 야, 숨, 숨 막-”
“나 사랑하냐구!!”
“당연한 거 자꾸 꼬치꼬치 캐물을래?! 이 손, 손부터 놓고 말해라, 앙?!”
“진심과 열정과 정성을 다해서 말해 달라구우!!!”
“어, 좋아 죽겠다! 사랑해서 돌아가시겠다!! 눈앞에 아주 황천길이 보일만큼!!”
어찌나 오래 잡고 있었는지,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그마저도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면 정말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덜미를 붙들고 있을 심산이었나 보다. 부족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쉰 이와이즈미는 일순 뒤통수를 힘껏 젖혀 오이카와의 이마에 왕방울 만 한 혹이 날 만큼 박치기를 할까라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관두고 말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붕어 눈깔 저리가라 할 정도의 눈탱이 밤탱이 꼴을 한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단 극명한 쾌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려한 낯짝이 못난이가 되는 과정을 상상하다 이내 푸하하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곧장 와 닿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거렸다.
내일이면 또 하찮은 이유를 들먹이며 싸울지 모른다. 습관처럼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현관을 뛰쳐나갈지 모른다. 그런 오이카와를 뒤쫓아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 어느 순간 무료해질 지도 모른다. 의미 없다고, 부질없다고 생각할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그림자만 남겨 버린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쫓아가리라. 술에 취해 행방불명 된 채로 울고불고 화를 내다 마지막엔 저를 찾고 그리워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이유인즉,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