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사망소재 주의
*FHQ




W. 멜




혼자였던 날 찾아내 준 건 언제나 너였다. 특별했던 건 바로 너였다. 인간든 아니든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며 씩 웃어준 건, 다름 아닌 너였다. 네가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고 네가 있었기에 쓸쓸했으며 네가 있었기에, 네 빈자리를 향해서만 오롯이. 울음을 쏟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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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은 마왕. 마왕이란 타이틀에 걸맞는 우아한 걸음걸이와 기품있는 손짓, 그 자신의 고결한 존재 의의를 항시 자각하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마왕,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그럼 쿠로쨩~ 집 잘 보고 있어!"

그랬어야 했다.
우당탕탕 소란을 피우며 방정맞게 뛰쳐나가는 저 뒷모양새는 요리보고 조리봐도 오이카와 토오루임이 틀림 없었다. 신상으로 맞춤 제작했다는 희멀건 부츠가 허벅지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허벅지에 너무 딱 맞게 제작된 탓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미간을 팍 찌푸리다 제 혼자 자빠지고 마는 오이카와였던 것이다. 그의 몸이 한 번 기우뚱 거릴 때마다 뒤로 길게 늘어져 있던 새까만 로브가 펄럭였고 숫양의 것처럼 둥글게 말아 올라간 한 쌍의 위풍당당한 뿔은 시시때때로 휘청거렸다. 쿠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무 빗자루의 끝을 지지대삼아 턱을 괴고 있던 쿠로오는 거하게 나자빠진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며 큰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리 서둘러. 어차피 약속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벌써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면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전날에 먹고 남겨 두었던 생닭의 도톰한 가슴살 부근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날아 오를 듯한 걸음걸이로 성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까 쿠로쨩이 애인이 없지요~"
"오야오야. 그 잘난 뒤통수 절벽 아래로 확 걷어차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마왕님 보고 죽으라 하는 거야? 너무해!"

부츠와 한참을 씨름하던 오이카와는 제 뒤에서 생글생글 웃는 목소리로 살벌한 협박을 읊조리는 쿠로오에게 선홍빛의 혓바닥을 쏙 내민 채

"메ㅡ롱이다."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의 검지가 공중에 작은 원을 그리자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성문이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 전에는 돌아올테니까~"

순식간에 성 밖을 뛰쳐나간 오이카와는 건성으로 오른손을 흔들여 보였다. 뭐가 그리 급한지. 앞뒤 안 보고 힘차게 달려나가는 폼이 금방이라도 돌뿌리에 걸려 넘어질 것만 같았는데.

"어차피 내 알 바 아닌가."

저 홀로 남겨진 쿠로오는 다시금 지겨운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어두침침한 암석들로 가득찬 성의 꼭대기는 하루라도 청소를 빼먹으면 먼지와 벌레가 들끓어 수 천년째 쿠로오 테츠로를 청소의 늪에서 벗어나질 못하게끔 하고 있었다. 그래도 영생을 사는 제 생명줄 덕택에 익숙해졌기 망정이지, 만약 인간과 같은 찰나를 사는 짧은 수명이었다면 빗자루질만 하다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쿠로오는 제 팔을 걷어부쳤다. 진즉에 벗어던져진 붉은 로브는 대리석 테이블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이와. 이와 뒤에 뭐였지."

아, 이즈미. 이와이즈미.
쿠로오는 습관적으로 뿔을 만지작거렸다. 오이카와의 것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기껏해야 검지 하나 크기. 보통은 마력의 크기를 의미하는 이 뿔의 유래가 살아온 세월에 비례한다는 설 또한 사실이라면, 오이카와는 얼마나 긴 세월을 저 홀로 지새웠던 건지.
쿠로오가 기억하는 지난 수 천년간의 오이카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사상을 가진 악마. 즉, 마왕이었다. 지나다니는 인간 수십은 거뜬히 홀리고도 남았을 아름다운 미모였으나 지나치게 말수가 적어 벙어리로 착각하기 십상이었으며 기괴하게 빛나는 붉은 눈에선 한줌의 따뜻함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매일매일을 죽지 못해 겨우 숨을 쉬는 듯했다. 눈꺼풀을 내렸다 들어올리는 것마저 질려버렸는지 마치 시체처럼 단조로운 하루를 반복하는 듯했다. 밥을 먹고 호흡을 가다듬고 책을 읽고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삶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무딘 존재가 바로 마왕이었던 것이다. 그런 오이카와의 시초나 탄생 배경에 관해선 쿠로오 자신조차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무렵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을테니 어찌보면 당연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쿠로오가 오이카와에게 말을 붙이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천 년은 걸렸던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열심히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이 쪽의 노력은 싸그리 씹어 먹은 채 거만하게 고개만 까딱까딱 거리던 오이카와의 재수 없는 얼굴 하나만큼은 지독하게 선명했지만.
그런 그가 이 한 달, 영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눈 한 번 깜박할 정도의 찰나의 시간동안 아주 돌변하고 말았다.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꿔 태어난 것처럼 사근사근한 얼굴로 웃음지을 수 있게 된 오이카와로 인해 피부에 우수수 닭살이 돋아 오르는 건 오히려 쿠로오였다. 그 계기라 할 수 있는 시작의 날은 눈에 띌 만큼 특별하진 않았다.

"아, 아닌가. 바람이나 쐴 겸 외출한다 했으니까 특별... 하다 할 수 있으려나."

마왕이 성이라는 제 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쿠로오에게 있어, 마족에게 있어, 그리고 인간들에게 있어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산 하나를 통째로 제 영역권으로 바꿔버린 마왕은 그 주위로 이중 삼중의 결계를 발산시키는 결계의 핵심이었다. 마왕 자신이 의도한 것?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그 몸에 깃든,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마력 덕택이었다. 숨결 한 번에 동식물이 말라비틀어 죽는 것은 허다했고 어지간한 마력을 가진 귀족급이 아닌 이상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에 겨워했다.
이유야 어쨌든 마왕이 갖고 있는 어마무시한 마력덕에 그의 성은 언제나 타 마족으로부터, 그리고 인간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오이카와의 부재는 성에 있어 큰 타격이 되곤 했던 것이다. 마왕의 힘에 업어가려는 하등 마족, 그의 목이 떨어지기만을 노리고 있는 백작급 이상의 마족, 그리고 인간까지. 사실 마족들의 경우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해 무시하고 그럭저럭 살아갈만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마왕? 그런 말도 안되는 게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

인간이었다.

'그렇다니까. 우리들 눈이 안닿는 산 속 깊숙한 곳에서 혼자 불로장생의 삶을 살고 있다 하더군.'
'불로장생이라니. 자네는 무슨 애들 농담같은ㅡ.'
'정말일세. 그 머리에 장식된 뿔을 뽑아다 집안에 걸어두면 그 가문은 대대손손 번창한다는 소문이 이 근처엔 파다한 거, 눈치 못채고 있었나?'

근거 없는 헛소문에 휩싸인 채 마왕의 이름을 들먹이던 인간들은

'호오. 그건 그것대로 구미가 당기는 군.'
'말이 그렇단 거지 자네, 그 근처엔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말게나. 마왕이란 놈은 존재하고 숨을 내쉬는 것 자체만으로 재액과 재앙을 초래한다더군. 지금껏 인간들이 멸망하지 않은 이유도 마왕이 마음 먹지 않아서 그렇다 하니까. 섣불리 발을 내딛지 말게. 그러다 화를 입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야.'

마왕의 부재로 성의 결계가 유약해진 틈을 타, 반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배타심에 반은 자신들의 손익을 위해 또한 극소수는 단순히 저들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성을 찾아오곤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으슥한 성 안에 실망해버리고 돌아가버리는 게 대다수였지만.

'그럼 이 얘길 꺼낸 이유가 뭔가. 괜한 궁금증만 부풀지 않았는가.'

사건의 시발점이 이렇듯, 적대감에서 시작된 만남이었다면 쿠로오 자신부터가 절대적인 반대를 지지했을 것이다.

'기사단 있지 않은가. 왕궁 기사단. 친위대라 부르던가. 여튼 그 쪽 사람들이 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있다더군.'
'친위대가?'

이와이즈미 하지메. 그것은, 제국을 대표하는 왕가 친위대 대장을 일컫는 단어였다. 마왕을 운운하기 이전에 제국을 수호하기 바쁜 인간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 명망있는 사람이 마왕이라 불리는 자와 엮이게 될 줄을 누가 감히 짐작했을까.

"그 날, 외출하고 돌아왔던 오이카와 얼굴은."

오이카와 답지 않았다. 뺨이 발갛게 홍조로 물들어 있었고 어딘가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한 발자국 내딛고 머리를 흔들고 한 발자국 내딛고 가슴 부근을 한 손으로 틀어쥐며 윗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인간처럼 말이지."

자세한 정황은 쿠로오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어떤 인간을 만났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했는데도 제 곁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상한 인간을 만났다고. 오이카와 혼자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 인간을 만나고 난 이후, 마왕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이 많아졌고 표정 변화가 다양해졌으며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감정 표현이 풍부해져 갔다. 그 인간의 이름이 이와이즈미란 걸 알게 된 건 조금 뒤.

'들었어. 그 이와뭐시기란 녀석.'

이와이즈미가 소위 친위대라 불리는 왕궁 기사단의 대장인 걸 알게 된 것 또한 그로부터 조금 뒤.

'이와이즈미야.'
'어찌됐든. 기사단이라며. 그것도 대장.'

테이블 위로 거만하게 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껌을 씹듯 쥐의 꼬리를 야금야금 씹어대던 오이카와는 대수롭지도 않단 얼굴로

'그게 뭐.'

짧게 대답했다.

'일의 심각성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인간을 만난다는 이유로 잔소리할 줄 알았더니 고작 그딴 걸로 트집 잡는 거야?'
'인간인 것도 문제야. 아주 큰 문제지.'

쿠로오에게 있어 마왕이란 가족이자 친구이자 형제이자 평생을 갖다바쳐야할, 오직 단 하나뿐인 주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 피에 새겨져 있던 자각과 숭배. 쿠로오는 그 본성을 부정하고 싶지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놈한테 마음주고 정 줘봤자. 우리가 눈깜짝할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오이카와의 안녕이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쥐꼬리를 씹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말아뜬 오이카와는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호를 그린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상냥하네, 쿠로쨩.'

쿠로오를 향해 웃어주었다.

'괜찮아. 날 찾아내 준 건 이와쨩이니까. 나한테 웃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배려란 걸 가르쳐주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다름 아닌 이와쨩이니까. 만약, 아주 만약 이와쨩이 죽어 버린다 해도. 이 오이카와씨는 기다릴 거야. 그 다음 생의 이와쨩을 기다릴 거야. 계속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으니까. 십 년, 백 년, 그리고 천 년. 쿠로쨩 말마따나 우리한텐 눈 깜짝할 시간이잖아, 안 그래?'

그 대답을 듣기 무섭게, 이건 못 이긴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던 쿠로오였다. 어느 쪽의 오이카와가 좋냐 굳이 꼽아보자면, 예전이 아닌 지금의 오이카와가 좋았다. 부질 없는 삶에 하루하루를 죽은 듯이 연명해나가던 오이카와보다 이와이즈미를 만남으로서 나날이 웃을 수 있게 된 오이카와쪽이 훨씬, 훨씬 좋았던 것이다. 쿠로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오이카와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갓잡은 멧돼지나 연어의 생고기를 준비하는 것뿐이었지만.

"오늘 저녁은 뭘 해먹지."

꿩이라도 잡아볼까 싶어 본격적으로 어깨마사지를 시작한 쿠로오는 문득 창 밖을 돌아보았다.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갈대로 장식되어 있던 드넓은 벌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지고 있었다.

"...오이카와?"

황혼에 감화된 바람결을 타고 짙은 아이보리 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스스로 마력을 컨트롤 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오이카와에게선 항상 미미한 아이보리 향이 풍겨 나왔다. 그렇기에 이건,

"망할 마왕님이 드디어 사고치셨구만."

마력을 한 번에 폭발시킨 듯 산 아래쪽에서 농도 짙은 아이보리 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코를 틀어막은 쿠로오가 다급함에 빗자루를 내던지고 로브를 어깨에 걸치는 둥 마는 둥하며 발길을 서두를 무렵이었다.

"오이카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창백하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들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축 처진 어깨와 바닥에 질질 끌려다니는 로브 끝자락에는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뿐일까.

"너... 너. 상태가 왜 이래. 이... 이 피들은 대체."

얼굴이. 손이. 발이.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대각선으로 튀어오른 핏자국들은 창백한 뺨과 대조되어 더욱 색이 도드라졌고 발자국이 한 번 떼어질 때마다 바닥을 적시는 검붉은 애액들은 응어리처럼 뭉쳐 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마력도 아닌 그림자도 아닌 어두운 기운은 오이카와의 몸을 감싸 안았고 오이카와는 자신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쿠로오쪽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야. 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냐?!"

제 방구석에 틀어 박혀 있기 시작했다.
하루 온종일을 부르짖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왜 그러냐고, 얼굴짝이라도 보이라고, 하다못해 응이란 대답이라도 해달라고. 손바닥이 다 까지도록 팔근육에 마비가 올만큼 문짝을 두들기고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이라곤 고요한 침묵뿐이었으며 그 때마다 쿠로오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좌절하고 무너져 내려야만 했다.
아예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피폐한 몰골의 오이카와가 성으로 돌아왔을 무렵, 그 곁에선 희미하게나마 이와이즈미의 냄새가 났다. 정확하게는, 이와이즈미의 혈향이 말이다. 모종의 이유로 오이카와 자신이 그를 죽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은.

"...저로 인해 이와이즈미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던가."

그렇게 가정하면 앞뒤가 들어 맞았다. 수 천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지난 한 달이란 시간은 오이카와에게 있어 전환점과도 같았다. 그리고 몸소 그 계기가 되어 준 것이 바로

"그 인간이지."

오랜 세월 끝에 겨우 찾아낸, 오이카와 자신에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안겨준 인간. 그런 인간의 신변에 어떠한 문제가 생겨 폭주를 해버렸다, 라.
쿠로오는 어깨가 크게 들썩일 만큼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늘까지 합치면 꼬박 일주일째였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이토록 후유증이 긴 것이 상실이란 감각인가? 쿠로오로썬 알 길이 없었다. 하루 이틀이야 방에 틀어 박힌 일은 있었지만 그 이유는 주로 독서나 잠에 취했을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를 만나게 된 이후로 오이카와는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성밖을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그래도 일주일은 심하지 않았냐. 기다리고 있는 이 쪽 입장도 생각해달라고."

오이카와를 따라 덩달아 일주일째 강제 단식을 하고 있으니 쿠로오 자신도 나름대로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끼니는 일체 입에 대지 않은 채 주인 하나만 기다리는 고양이마냥 그 주변만을 빙빙 맴돈 보람이 없진 않았다.

"짜잔. 오이카와씨 부활!"

딱, 일주일째였다. 굳건히 닫혀져 있던 철문이 움직였고 오이카와는 양팔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상큼한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한 마디로, 오이카와는 멀쩡했다. 멀쩡해 보였다. 일주일 전의 초췌했던 몰골은 한낱 환상에 불과했던 마냥, 아주 말끔한 얼굴이었다. 펄럭이는 로브에선 전처럼 미미한 아이보리 향이 풍겼으며 코를 찌르는 피냄새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배고파! 그 동안 밥도 못 먹고 쫄쫄 굶었더니 배가 고파서 돌아가실 거 같아!! 쿠로쨩 오늘 저녁 메뉴 뭐야?"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말들의 연속에 쿠로오는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방긋거리는 입.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가. 피로 한 점 남지 않은 매끄러운 피부결. 꼭,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 일주일 전의 패닉은 쿠로오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오이카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끼."
"응? 뭐라고?"
"망할 마왕 새끼!!!"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 오이카와를 향해 쿠로오가 제 몸을 날렸다. 작지 않게 울려퍼지는 우당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쿠로오가 무려 마왕의 위에 올라탄 채 헤실헤실 웃고만 있는 그의 양 뺨을 힘껏 잡아당긴 것이다.

"일주일 동안 방에 처박혀서 내 말엔 일절 대답도 안하고 얼굴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잔뜩 걱정 시키게 만들고 이제와서 뭐? 배가 고오파? 밥 소리가 나오냐 지금??"
"하하하하."
"웃지마, 못생긴게."
"어레레. 내가 이와쨩한테 자주 하던 말인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거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작 그 입으로 직접 이와이즈미를 언급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리라. 쿠로오는 억세게 붙잡고 있던 오이카와의 뺨을 놔주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랑 무슨 일이 있었어."
"배고파 나. 밥부터 먹으면 안될까?"
"피할 생각하지마. 네가 방에 틀어박혀 있던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진 알고 싶지도 않아. 내가 너 나오는 거 하나만 기다린 거? 네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기다리는 거 하나만큼은 자신있으니까. 근데. 그런 나도 내가 기다려야 했던 이유 하나는 알아야겠다. 무슨 일이야. 너랑 이와이즈미.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바보처럼 헤실거리고만 있던 오이카와는 그제야 차츰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억지로 웃고 있었구나. 그래. 너 하나만 오롯이 바라보고 살아온지가 몇 천년인데.

"그냥. 별 일 아니야."
"......."
"언젠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게 현실이 된 것 뿐이야. 죽었어. 그 애가 죽었어. 그 뿐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쿠로오는 비뚜룸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네가 단지 슬퍼하기만 했다? 네가 고작 그런 놈에 불과하지 않다는 거 난 아주 잘 알아. 넌 마왕이니까. 죽었다는 결말에서 얌전히 포기할 놈이 아니잖아. 왜. 그 때 말했던 것처럼 이와이즈미의 다음 생이라도 주구장창 기다려볼 작정인 거야?"

그제야 오이카와는, 실없는 웃음을 토해냈다. 눈이 가늘어졌다. 두 개의 루비가 선명한 빛을 발하며 쿠로오를 올려다 보았다.

"역시 쿠로쨩~ 오랜 시간 옆에 둔 보람이 있다니까."
"......."
"절반쯤은 맞췄어. 대단하니까 정말."

오이카와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작게 감았다 뜬 눈 아래로, 그늘이 짙어졌다.

"기다리려고 했어. 그 때 결심했던 마음엔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근데. 근데 말이야. 이와쨩이 죽은 이유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도저히 두 손 두 발 놓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순 없었어. 나 때문이야. 이와쨩은 나 때문에 죽어 버린 거라고. 나, 이대로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순 없어. 내가 찾아 갈 거야. 내가 이와쨩을 마중 나갈 거야. 처음 날 찾아내 준 건 그 애였어. 내 처음은 언제나 그 애였던 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먼저 그 애를 찾으러 갈 거야."

오이카와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진 쿠로오는 하.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찾으러 갈 거야.' 그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쿠로오는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카와.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물론 알지. 그걸 위해서 방에만 틀어 박혀서 연구하고 또 공부했는 걸."
"금기 마법이야."

입밖으로 '금기'를 내뱉기 무섭게 마른 침이 꼴깍,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오이카와가 검지를 들어 작은 원을 그리자 그의 위에 올라타 있던 쿠로오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라 먼발치에 나자빠졌다. 그가 부딪힌 벽은 산산조각나며 부서져내렸고 쿠로오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알고 있다 했잖아. 일일이 참견하지마. 기껏해야 종노릇하는 고양이 주제에."
"나는 그저..."
"추가로. 말려봤자 이미 늦었어. 진은 이미 완성된 상태거든. 내 피와 주문 몇 마디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

오이카와는 제 긴 손톱을 들어 손목을 그었다. 톡, 토독. 바닥에 선명한 핏방울이 굴러떨어졌고 그에 맞춰 오이카와의 주변이 붉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둥그렇게 새겨진 거대한 원은 고대의 문자들로 뒤덮여 하나둘 공중으로 떠올랐고 오이카와는 입을 벙긋거리며 알 수 없는 주문들을 읊어 보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쿠로오가 벌어진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고 그 쪽을 향해 기어가며 간절하고 간절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거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돼!! 여기로 돌아오는 게 아예 불가능 할지도 몰라. 까딱하다간 시공간의 틈새 속에 빨려 들어가 길을 잃고 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지도 모른다고!!"
"쿠로쨩."
"차원 이동이 얼마나 네 마력을 갉아 먹을지 몰라. 설령 네가 그토록 바라던 이와이즈미를 만나게 되더라도, 지독한 인과율이 너를, 이와이즈미를 따라 다닐게 분명하잖아!! 아무리 불멸의 삶을 사는 너라도, 가늠할 수 없는 마력이 온몸에서 흘러 넘치는 너라도, 하물며 이 세계에선 마왕이라 불리는 너라도! 그 불행을 피할 순 없어. 인과율은 널 고독하게 만들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끊임없이 발악해도 네 옆에 그 누구도 남지 않게끔 할 거라고!! 제발. 제발 다시 생각해. 다시 생각하자, 응? 오이카와 제발. 제발."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돌아 보았다. 서글픈 웃음이었다. 더이상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없어지면, 마왕은 쿠로쨩이 해줘. 인간들 너무 박대하지 말고. 또 알아? 인간들 중에 쿠로쨩이 소중해할 사람이 있을지."
"나는! ...널 잃고 싶지 않아."
"...미안. 네 기대엔 응할 수 없어. 그야, 이와쨩이 기다리고 있는 걸."

붉은 빛이 삽시간에 높이 퍼져 올라 오이카와를 감싸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핏빛으로 물들어 갔고 그 적안이 붉은 빛에 섞이는 바람에 잘,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나. 쿠로쨩이 있어서 여기까지 살 수 있었어. 이와쨩이 살아 숨쉬는 이 시간대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어.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쿠로쨩."

미안하다 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고맙다고 해봤자. 그래봤자.

"기다릴테니까! 수 백년, 수 천년이 지나도 나는 계속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 네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거머쥐게될 마왕이라 이름은 아주 임시일 뿐이고 네가 돌아오면 다시 돌려줄테니까!! 그러니까... 꼭 돌아와. 돌아와야 해."

그를 감싸고 있던 붉은 빛은 조각조각 나뉘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무늬처럼 새겨진 오이카와의 핏방울 몇 자락. 성 안이 공허한 것 같았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변해버린 오이카와 덕에 시끌벅적하기만 했던 이 고성이, 단 하나의 부재로 인해 침묵으로 침식당한 것 같았다.

"...좋아했어, 이 멍청아."

볼가를 타고 물줄기가 하나 흘렀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닦아내려 하진 않았다. 그저 흘러가게, 조용히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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