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프렉





W. 멜





그것은

아이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겪는 알싸한 통증. 

즉, 뒤늦은 성장통이었다. 





*





“세 번째 생일 축하해 사야카.”

“생일 축하해, 예쁜 우리 딸.”


컴컴한 거실을 빛내는 가느다란 초 세 개가 조그만 입김 앞에서 거세게 흔들린다. 볼에 바람을 빵빵히 불어 넣었던 아이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고깔모자에 몇 번이고 애를 먹은 끝에 겨우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럼 선물 공개 시간인가?”


왼손에는 미니 포크, 오른손에는 미니 숟가락을 꼬옥 움켜쥐고 있는 고사리만 한 손이 좌우로 힘차게 흔들린다. 


“우와아-!”


아이의 얼굴 가득 피어 있는 웃음꽃은 순식간에 거실 공기를 따스하게 물들인다.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이였건만 정작 ‘행복’이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드는 건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두 아빠였다. 


“누구부터 할까. 사야카가 정해볼래?”

“움…움!”


얇게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양 갈래 곱게 나뉘어 오색빛깔 고무줄에 묶여 있다. 고심에 또 고심을 거듭하는 아이의 볼은 오동통하게 부푼 젖살과 보기 좋은 복숭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통통한 종아리와 조막만 한 발바닥이 식탁 아래에서 앞뒤로 왔다갔다 거린다. 식탁 위에 팔꿈치를 겨우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만 앉은 키를 가진 이 작은 아이는


“떼쯔 아빠…께즤 아빠…떼쯔 아빠…께즤 아빠…움, 사야까는……!”

“사야카는?”

“떼쯔 아빠!!”


쿠로오와 아카아시의 단 하나 뿐인 귀염둥이, 쿠로오 사야카였다. 


“웨~이!”

“참나. 이런 걸로 승부해 봤자 의미도 없는 걸.”


쿠로오가 이겼다는 듯 양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사야카에게 하이파이브를 신청하자 쿠로오의 손짓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사야카는


“웨이!”


눈꼬리가 활짝 휘어지도록 웃으며 그 고사리만 한 손바닥을 살짝 쿵 맞댄다. 


“허윽- 아카아시 방금 봤어? 우리 사야쨩이, 우리 사야쨩이 이 아빠한테 하이파이브하는 거?!”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쿠로오씨.”


식탁 한 켠에 마련해 둔 은은한 스탠드 조명을 킨 아카아시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러자 불이 다 꺼진 케이크와 선물 꾸러미로 그득한 식탁 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친다. 워낙에 사야카 바보, 딸 바보였던 쿠로오는 사야카의 손짓 발짓 하나에도 감격하며 난리 부르스를 추는 편이지만 생일이 돌아올 무렵에면 그 빈도와 정도가 더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생크림 케이크 위에 꽂혀져 있던 불 꺼진 초를 빼내는 사이 사야카의 콧잔등에 제 코를 비비던 쿠로오가 사야카와 눈을 맞춘다. 아이를 놀리듯 놀리지 않는 듯한 개구 진 어조로 묻는다. 


“사야쨩~ 올해 아빠의 선물이 뭘까요~?”

“아하하, 아빠 간지러워!”

“알아 맞 춰 보 세 요. 테츠 아빠 선물이 뭔지 알아 맞추면…알아 맞추면!”

“알아 마쭈면!”


발랄한 음성이 쿠로오의 마지막 말을 따라하며 되묻자 그런 사야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단숨에 아이의 뒷머리를 꽈악 끌어안곤


“뽀뽀해 버릴 거지요! 쪽쪽쪽!!”

“아이~ 아빠 수염! 따 가 워~”

“오야오야, 테츠 아빠님의 수염 공격을 잔뜩 받으시죠 우리 공주님~?”


뽀뽀 세례를 날리는 쿠로오다. 어떻게 보면 다정한, 또 어떻게 보면 행복한 풍경에 케이크를 자르고 있던 아카아시의 입가에도 미소가 절로 피어오른다. 

결혼한 지 4년. 허니문의 축복을 통해 아카아시의 뱃속에 자리 잡은 사야카는 두 사람의 보물 단지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갓 태어난 생명과 그것의 ‘처음’을 함께 밟아갔던 초보 아빠들은 지극히 미숙하고 또한 서툴렀다.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아이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걸 하루하루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딩-동


“어?!”


그 차임벨이 울리기 전까지만 해도


“께즤 아빠! 께즤 아빠! 얼른! 얼른 문!”


그들의 행복은 완벽했을 것이다. 


“꼬따로 삼쫀 왔따구! 얼르은!”





*




“사야카~ 헤이 헤이 헤이!!”

“헤이 헤이 헤이! 꼬따로 삼촌!”


척 봐도 눈에 띄는 머리칼. 왁스로 번지르르해진 머리카락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솟구쳐 올라 있었다. 


“뭐야. 나 빼고 한창 파티 중이었어? 내가 제일 늦었네.”


마치 잊고 있던 집안 식구 하나가 주인공마냥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쿠토는 양 손 가득 바리바리 싸든 짐을 현관 앞에 내려 두며 혀를 내두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린 사야카가 현관을 향해, 더 정확히는 보쿠토를 향해 쪼르르 발길을 옮긴다. 


“으응 아냐아냐. 사야까는 꼬따로 삼촌 기다리고 있었는 걸!”


와아, 감탄사를 연발하며 녹안을 반짝이는 사야카가 보쿠토의 한 짐 가득한 선물들을 내려다보며 깡충깡충 뛰어 오른다. 결국 보다 못한 보쿠토가 


“으쌰. 우리 사야카 그 새 얼마나 많이 컸나?”


한 팔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든다. 


“사야까 이~따 만큼 컸어!” 

“으하- 그새 꽤 무거워 졌네. 쿠로오, 아카아시, 이 몸 왔다고 헤이 헤이 헤이! 나 반기는 건 사야카 뿐이야?!”


뒤늦게 심통을 부린 보쿠토가 사야카를 안아든 채 익숙하게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제야 식탁에서 일어나 보쿠토 몫의 접시와 포크를 챙기던 아카아시는 당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올해는 좀 늦으셨네요. 차 밀렸어요?”

“어어. 휴가 시작철 이라고 어지간히 막히더라. 그래도! 무사히 사야카 선물은 사수했으니까. 신나지, 사야카?!”

“꺄아아- 꼬따로 삼촌이 최고야!”


보쿠토의 품에 안긴 채 물 만난 고기마냥 신바람을 부르던 사야카는 벌써부터 기대로 꽃 피워진 눈을 하고 있었다. 


“어. 왔냐.”

“뭐야 쿠로오. 그 실망한 표정은. 니 선물도 사왔으면 했어?”

“……별로.”


조금 전 헤벌쭉한 표정과는 명백히 다른, 싹 굳어진 얼굴을 한 쿠로오가 소리 나게 의자를 밀치고 일어선다. 이 묘하게 짜증 섞인 소음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걸 눈치챈 건 케이크 조각을 덜어내고 있던, 아카아시 뿐이었다. 


“어디 가요, 쿠로오씨.”


보쿠토의 등장 전후로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쿠로오가 등을 보이자마자 걱정기 어린 음성 하나가 쿠로오를 향한다. 그러나, 


“우와아아! 선물! 사야까 선물! 우아…크레…끄레…? 삼쫀 이게 뭐야?”

“크레파스야. 종이에다 대고, 요-렇게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거!”

“꾸레빠…스?”

“크 레 파 스!”

“꾸! 레! 빠! 쓰!”

“아이 그게 뭐야. 자자, 여기 삼촌이 종이 줄 테니까-”


까르르 자지러지는 사야카의 웃음소리와 제 딸과 알콩 달콩한 기색이 역력한 보쿠토로 인해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쿠로오다. 


“담배 좀.”


이미 보쿠토와 사야카의 깔깔대는 대화에 묻혀 버린 아카아시의 나지막한 질문. 그 대답을 들릴 듯 말 듯 작게 잇던 쿠로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베란다로 향한다. 한 발 늦게 그런 쿠로오를 발견한 보쿠토가 사야카의 앙증맞은 손바닥에 보라색 크레파스를 쥐어주며 멀어져 가는 쿠로오를 불러 세운다. 


“어, 쿠로오! 치킨 사왔는데 안 먹어?”


쿠로오는 대답하지 않는다. 


“야!! 쿠로오!”


낭창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야카 또한 쿠로오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내 말 무시하지 말라고!”


이미 베란다 밖으로 나간 후 유리문을 세게 닫아 버린 쿠로오였다. 얼핏 보이는 뒷모습에서 매년 돌아오는 연례행사를 지레짐작한 아카아시 또한 자리에서 일어선다. 


“잠깐만 여기 있어요, 보쿠토씨. 사야카.”

“뭐야. 쟤 왜 저래 아카아시.”

“뭐……. 늘상 있는 일이니까요. 걱정 말아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매년 사야카의 생일에만 방문 해오는 보쿠토로 인해. 1년의 단 하나뿐인 자신과 아카아시의 하나뿐인 딸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도쿄에서부터 여기까지 몸소 발걸음 해주는 보쿠토로 인해. 매일 같이 함께 있어주는 자신보다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보쿠토에게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네주는 사야카로 인해. 쿠로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오늘이 이따금씩 미워지곤 했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 미운 건


“옹졸하고 비겁하고 속 좁은 나 자신이지만.”


불 붙인 담배 끄트머리를 물고 폐부 깊이 들이 마시자 그리웠던 니코틴과 타르의 기운이 세포 하나하나 깊숙이 파고든다. 폐의 수명이 닳아 없어짐과 동시에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던 스트레스가 단숨에 해방되는 기분. 후, 내뱉은 뿌연 날숨엔 응어리가 져 있었다. 


“알고는 계시네요.”

“……뭐야. 언제 나왔어.”

“방금 전에.”

“하여간 귀신 같이 안다니까.”

“부대껴 산 지 몇 년 차인데요. 다 알죠.”


결혼 직전까지 피우던 줄담배를 결혼 직후, 사야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며 칼같이 금연을 외쳤던 쿠로오다. 그 단호함과 아이를 향한 열성에 놀란 아카아시가 돌연 웃음보를 터뜨린 것을 제외하면 쿠로오의 금연 소식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다만, 금연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싶을 때가 


“나…진짜 못 됐지.”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뭐가 못 됐어요.”

“이상하게 저 녀석 앞에서만 서면 표정 관리가 안 돼.”

“그게 뭐 어때서요.”

“쟤는 그래도 날 친구로 알 텐데. 나는 쟤를…….”


연애는 물론이고 결혼까지 한 와중에도 쿠로오는 여전히 보쿠토의 낌새만 보이면 그를 의식하기 바빴다. 


“바보 같은 사람.”

“누구더러 바보래.”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한 순간이나마 짝사랑했던 사람을 불나게 의식하는 누구누구씨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바보가 떠올라서요.”

“그게 한 순간이었냐. 나한텐…….”


깊게 빨아들인 숨으로 인해 입에 물린 담배가 단숨에 절반 가까이 타들어간다. 


“아직도 애라니까, 이 사람은.”

“질투가 많은 거라 해줄래?”

“옹졸하고 비겁하고 속 좁죠.”

“그게 남편한테 할 소리인가.”

“전부 쿠로오씨가 자기 입으로 한 말 이거든요?”


주면 주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받아치는 아카아시 덕에 쿠로오가 픽 실소를 터뜨린다. 베란다 손잡이에 기대어 있던 쿠로오 옆으로 아카아시 또한 발걸음을 옮긴다. 


“정-말 바보예요.”


그리곤 쿠로오의 입가에 걸쳐져 있던 하얀 막대기를 덥썩 뺏어들곤 능숙하게 제 입으로 가져간다. 놀란 쿠로오가 어, 야! 외치며 그를 말릴 새도 없이 뻐끔뻐끔 내뱉는 담배 연기가 길게 피어오른다. 


“전 이미 당신 꺼잖아요.”

“…….”

“사야카도 당신하고 제 아이고.”

“…….”

“질투할 게 뭐가 있어요.”

“…….”

“결국 사야카의 진짜 아빠는 당신이고”

“…….”

“제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당신인 걸요, 쿠로오씨.”


무심한 듯 내뱉는 말들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쿠로오의 가슴팍에 내리꽂힌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멀리 내다보는 시선에 희끗하게 확신 어린 행복이 서려 있다. 담배가 걸쳐져 있는 중지와 검지가 묘하게 새끈하다. 


“……맞아. 그랬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계절, 이 하루, 이 시간은 쿠로오에게 있어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발 늦은 성장통이었다. 그것은 수 년 전부터 쿠로오 홀로 앓아오던 지독한 열병의 일종이었지만 이제 그는


“우리, 결혼했지.”


혼자가 아니었다. 


“미안. 내가 분위기 다 망쳤네.”

“아셨으면 됐어요.”

“으아~ 보쿠토 얼굴 진짜 어떻게 보냐. 그냥 확 내쫓을까.”

“그러시던가요. 대신 사야카가 찢어져라 울 걸요.”

“……그건 안 돼지.”


이젠 다 타들어간 담배를 난간에 지져 끈 아카아시가 싱긋 웃으며 쿠로오를 돌아본다. 정말이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미소였다. 


“그건 그렇고. 사야카가 담배 냄새 맡으면 엄-청 화낼 텐데.”

“아.”

“게다가. 생일 선물이라고 한 박스씩 준비 해 놓은 동화책들, 얼른 개봉박두 안 하면 사야카 사흘 내내 삐져 있을 텐데.”

“아!!!”

“담배 냄새 다 지우고 들어와요 테츠로.”


뒤늦게 머리통을 벅벅 긁으며 후회의 발악을 시전하는 쿠로오다. 베란다에 묻은 담배 냄새와 함께 마지막 성장통의 내음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간다. 




*영화 <노팅힐> 장면 중 일부에 감명 받아 급하게 적어 내렸습니다 u.u**

*짧습니다. 





W. 멜





팔뚝이 무거웠다. 급하게 꽃집에 들러 사버린 장미꽃 무더기가 묵직했다. 그래도 웃음이 났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숫자가 1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터질듯 쿵쾅거렸다. 사실은, 호텔 로비에서 조금 헤매긴 했다. '그'가 어느 호실에 묵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명을 써요. 일반인이나 기자는 못 알아채게 하려고. 전에 '밤비'를 쓰기도 했죠.’


‘아카아시’가 어느 호실에 묵냐 물으니 지배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고, 그제야 나는 아카아시가 가명으로 썼으리란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밤비, 덤보, 포카혼타스. 그 어느 쪽도 아니라길래 자포자기하던 중 지배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제리’란 분이 현재 투숙 중이긴 합니다만. 지인이신가요?’


얼떨결에 듣게 된 희소식에 웃음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품에 가득 안은 장미에서 달콤한 향이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음은 이미 호텔의 꼭대기층이었건만 엘리베이터는 거북이마냥 느릿느릿 거동했다. 


아카아시를 만난 건 정말 우연. 어쩌면, 기적의 단편이라 칭할 수 있겠다. 다 쓰러져가는 퀴퀴한 중고 헌책방을 아버지대에 이어 운영하고 있던 나는 아직도 아카아시와 대면하게 된 그 순간을 잊지 못 한다. 값비싸 보이는 둥그런 선글라스는 녹빛으로 선팅되어 있었고 대충 걸친 듯한 자켓에선 귀티가 풍겨져 나왔으며 먼지 쌓인 헌책을 쓸어 내려보는 손가락은 길쭉하면서도 고와 보였다. 그가 유명인이란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펼쳐보는 신문지의 연예 부문에서 심심치 않게 얼굴 혹은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었으니 그를 못 알아보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할리우드에서 한창 주가가 상승 중인 유명한 배우였다. '동양의 에메랄드'란 그럴 듯한 별칭까지 따라 붙으면서 말이다. 그런 유명인이 이케부쿠로의 이름 없는 헌책방을 방문 했단 것따위. 그런 믿기지 않는 일따위. 기삿거리도 술 안주거리도 되지 못 했다. 솔직히 외견이나 분위기만 비슷한 가짜인 줄 알았다. 아카아시가 선글라스를 벗어 내며 거미줄이 꾸덕꾸덕하게 달라붙은 책자를 내게 내밀기 전까진 말이다.

그 뒤의 일은 어찌된 영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이건 꿈이라 믿어서 그랬을까. 아카아시가 내 손을 잡고 눈꺼풀을 감고 입술과 입술 사이가 몇 센티였던 것까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지만. 그 이후는 필름이 끊긴 마냥 흑백으로 고정된 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카아시는 내 옆에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우스갯 소리에도 소리내어 웃고 눈살을 사랑스럽게 접어냈다. 입술을 가린 작은 주먹이 앙증맞았고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짙은 에메랄드빛 안광이 선하게 반짝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초인종 소리가 났고 나는 덜 깬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침대 위에서 펄쩍 뛰어 올랐고 내 뺨을 세차게 꼬집었고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대충 구겨 입다 계단 대여섯 칸을 대차게 굴러 떨어졌고 엉망인 몰골을 확인도 못한 채 냅다 현관으로 달려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면 눈꼬리를 살풋 접어 올리며 나를 반겨주던 아카아시의 얼굴이 차츰차츰 사색이 되었고 내 뺨과 머리칼을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괜찮냐 물었고 나는 열기로 홧홧해진 뺨과 귓불을 감추기 급급했다. 하루라도 반나절이라도 일분 일초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일이 바쁘다 하면서도 내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강아지마냥 꼬물꼬물 내 품 속으로 파고드는 아카아시를 내려다 보고 있을 때면 오만가지 상상에 빠지곤 했다. 밤이 돌아오는 게 싫었다. 해가 저물어 하늘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게 싫었다. 아카아시가 이 방을 떠나가야 하는 시간이 돌아오는 게 죽도록 싫었다. 아카아시라고 다르진 않았다. 옷가지를 느릿느릿 주워들어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에서 아쉬운 티가 역력히 느껴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침대에 누워 물끄러미 아카아시를 쳐다보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고 턱을 붙잡았고 키스를 퍼부었다. 온힘을 다해. 힘없이 벌어져 내 말캉한 살점을 받아들이고 혀뿌리까지 휘감아 오는 아카아시를 위해. 마치 제한 시간을 가진 마법처럼 우리는 원없이 사랑했고 내일이 없을 것처럼 키스했고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리길 간절히 바라며 어느새 뜨뜻하게 달아오른 서로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당신이 나를 왜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우리에겐 이유같은 수식어구는 필요 없었다. 그저 사랑했을 뿐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멋스럽게 차려입은 정장 카라를 다시금 매만지며 엘리베이터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머리 상태를 정돈했다.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 괜찮은 남자였다. 유명 배우 옆에 서 있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멋있었다.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내디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고 문 앞을 서성거렸다. 초인종을 누를까 내려진 손가락은 금세 거둬졌다. 꽃다발을 안은 자세가 마음에 안 들어 주춤거렸다. 안은 자세를 바꾸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초인종이 아닌 노크를 택했다. 적지 않은 소리의 노크를 여러 번 반복했다. 문은 금방 열렸다. 


“누구…세요.”


환히 웃었다. 뿌듯한 얼굴로 네 앞에 섰다. 흐드러진 장미꽃 한 다발을 네게 들이 밀었고 너의 반응을 기다렸다. 웃어줄 줄 알았다. 여느 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안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는


“잠, 깐만요. 일단 나가요. 나가서 얘기해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람 하나 얼굴이 겨우 보일랑말랑하게 열린 문틈은 그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꼭, 그 내부를 감추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까지 사태파악이 안 됐던 나는 멋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응? 왜? 나……. 엄청 긴장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또다른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기지개 켜는 소리도 들렸다.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깜박이고 있으면 아카아시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지금은 좀 곤란해요. 여태껏 미국에 머물던 애인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귀국하는 바람에-” 

“아카아시. 밖에 누구야?”


다른 말은 안 들렸다. 들리지 않았다. '애인'이라는 말과 다른 남자가 그를 부르는 음성. 뇌가 따라가질 못했다. 사고회로가 복잡하게 꼬이고 있었다. 애인? 무슨 말이야? 내가 무슨 소릴 듣고 있는 거야? 손 한 뼘보다 조금 열려져 있던 문은 금세 활짝 젖혀졌다. 


“아아, 룸서비스야?”


거만함. 그게 첫인상이었다. 눈을 찌를 만큼 물에 축 쳐진 머리칼 사이로는 야생 짐승마냥, 맹수마냥 번득이는 두 눈동자만이 존재했다. 황금으로 테두리칠 된 채 당장에라도 살기를 품고 달려들 것 같은 시선. 나는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던 가운의 끝자락과 고급스런 슬리퍼가 보였다. 그 눈을 마주치자마자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빌어 먹을만큼. 


“아, 아니에요. 이 분은-”


아카아시가 그를 말리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어거지로 올리며 최대한 상냥하게 보이려 애썼다. 


“예 맞습니다.”


아카아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는 눈이었다. 눈짓으로 대답했다. 그럼 너는 뭐라고 둘러댈 건데. 니가 입 열면 상황만 더 꼬여.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헤에. 근데 룸서비스하는 사람이 복장 이래도 돼? 너무 자유분방하지 않나? 이 꽃다발은 뭐야?”

“퇴근 후 마지막 방문이라서 그렇습니다. 이 꽃다발은…. 이 방이 유독 장식이 부족하단 지적을 받아서요. 화병에 이걸 꽂아두면 좀 더 아늑한 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였습니다.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이유야 어쨌든. 꽃은 예쁘네. 아무데나 던져둬. 우리가 정리할 테니까.”


남자는 문에서 멀어졌다. 흥미를 잃은 것마냥 손사래를 치며 몸에 두르고 있던 가운의 끈을 조였다. 남자의 인영이 사라지자 다음은 아카아시였다. 글썽거리는 눈망울을 빛내며 내 곁으로 바짝 붙어 왔다. 


“미안. 미안해요. 숨기려고 한 건 절대 아니었어요. 저 사람은 그냥. 공식 석상에서만 연인인 허울뿐인 사람이고 저는-”

“그만.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머리가 아팠다. 입으로는 괜찮다 말하고 있었으면서도 머리가 깨질듯 지끈지끈거렸다.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눈시울을 울먹이고 있는 건 아카아시였지만, 정작 울어버리고 싶은 건 나였다. 아랫입술을 앙 다문 채 날 안아 주려고 다가오는 아카아시를. 나는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상처 받은 티를 내고 싶진 않았지만, 그 작은 망설임이 아카아시에겐 크게 와닿은 듯 싶었다. 어색한 공기가 가라앉아 우리가 이도저도 아니게 된 사이,


“아참참. 거기 직원? 내가 다 먹은 접시 줄 테니까 그거 갖다 치우고. 현관 옆에 보면 쓰레기 담아둔 봉투 있거든? 그것도 치워.”


남자의 목청이 커졌다. 곧 음식물 찌꺼기가 흠뻑 묻은 접시들을 남자가 들고 나왔고 아카아시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보쿠토씨! 이 분께 그런 거 시키지 말아요. 이 사람은 다르다고요!”


뭐가? 라고 아카아시에게 묻는 얼굴을 하던 남자를 위해 이번엔 내가 말을 꺼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치워 드리겠습니다. 접시들 이리 주시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접시를 건네받았다. 남자의 말마따나 현관 바로 옆에는 허벅지까지 오는 쓰레기 봉투가 있었다. 아카아시가 나와 남자를 번갈아 봤다.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티내면서도 끝끝내 내 이름을 부르진 않았다. 너한테 나는. 딱 거기까지인 존재였다. 


“아아. 혹시 이것 때문에 그래? 요새 여기 담뱃값 많이 올랐지? 담뱃값 포함해서 넉넉히 줄 테니까. 알았죠?”


남자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달러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펫 위로 떨어진 돈이 까마득했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까드득 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끔 조심하며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돈을 하나하나 주워들었고 미미하게 떨리는 주먹을 애써 말아 쥐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앙탈이야, 아카아시~ 오랜만에 봐서 삐쳤구나, 응?”

“보, 보쿠토씨 이것 좀 놓고-”

“나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어?”


슬쩍 눈만 들어 올렸다. 남자는 아카아시의 양 허벅지를 붙들고는 번쩍 들어 올린 채였다. 남자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아카아시를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고 아카아시는 내 눈치를 실컷 보고 있었다. 


“빨리이. 예스 노. 예 아니오!”

“……네. 보…고 싶었어요.”


키스를 했다. 내 눈 앞에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안고, 뒤통수를 부여잡고, 마치 보란 듯이. 나를 코앞에 두고. 버젓하게. 머리가 멍했다. 망치로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 온몸이 저릿저릿 거렸다. 어딘가 망가진 듯 싶었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고 목울대 너머로 울컥한 기분이 차올랐다. 음식물 썩은 내가 나는 접시를 들었고 날파리가 폴폴 날아다니는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반쯤 열린 문밖을 나섰고 예의상 문을 닫아 주었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굳건히 잠기는 소리였다. 소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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