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프렉
W. 멜
그것은
아이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겪는 알싸한 통증.
즉, 뒤늦은 성장통이었다.
*
“세 번째 생일 축하해 사야카.”
“생일 축하해, 예쁜 우리 딸.”
컴컴한 거실을 빛내는 가느다란 초 세 개가 조그만 입김 앞에서 거세게 흔들린다. 볼에 바람을 빵빵히 불어 넣었던 아이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고깔모자에 몇 번이고 애를 먹은 끝에 겨우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럼 선물 공개 시간인가?”
왼손에는 미니 포크, 오른손에는 미니 숟가락을 꼬옥 움켜쥐고 있는 고사리만 한 손이 좌우로 힘차게 흔들린다.
“우와아-!”
아이의 얼굴 가득 피어 있는 웃음꽃은 순식간에 거실 공기를 따스하게 물들인다.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이였건만 정작 ‘행복’이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드는 건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두 아빠였다.
“누구부터 할까. 사야카가 정해볼래?”
“움…움!”
얇게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양 갈래 곱게 나뉘어 오색빛깔 고무줄에 묶여 있다. 고심에 또 고심을 거듭하는 아이의 볼은 오동통하게 부푼 젖살과 보기 좋은 복숭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통통한 종아리와 조막만 한 발바닥이 식탁 아래에서 앞뒤로 왔다갔다 거린다. 식탁 위에 팔꿈치를 겨우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만 앉은 키를 가진 이 작은 아이는
“떼쯔 아빠…께즤 아빠…떼쯔 아빠…께즤 아빠…움, 사야까는……!”
“사야카는?”
“떼쯔 아빠!!”
쿠로오와 아카아시의 단 하나 뿐인 귀염둥이, 쿠로오 사야카였다.
“웨~이!”
“참나. 이런 걸로 승부해 봤자 의미도 없는 걸.”
쿠로오가 이겼다는 듯 양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사야카에게 하이파이브를 신청하자 쿠로오의 손짓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사야카는
“웨이!”
눈꼬리가 활짝 휘어지도록 웃으며 그 고사리만 한 손바닥을 살짝 쿵 맞댄다.
“허윽- 아카아시 방금 봤어? 우리 사야쨩이, 우리 사야쨩이 이 아빠한테 하이파이브하는 거?!”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쿠로오씨.”
식탁 한 켠에 마련해 둔 은은한 스탠드 조명을 킨 아카아시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러자 불이 다 꺼진 케이크와 선물 꾸러미로 그득한 식탁 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친다. 워낙에 사야카 바보, 딸 바보였던 쿠로오는 사야카의 손짓 발짓 하나에도 감격하며 난리 부르스를 추는 편이지만 생일이 돌아올 무렵에면 그 빈도와 정도가 더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생크림 케이크 위에 꽂혀져 있던 불 꺼진 초를 빼내는 사이 사야카의 콧잔등에 제 코를 비비던 쿠로오가 사야카와 눈을 맞춘다. 아이를 놀리듯 놀리지 않는 듯한 개구 진 어조로 묻는다.
“사야쨩~ 올해 아빠의 선물이 뭘까요~?”
“아하하, 아빠 간지러워!”
“알아 맞 춰 보 세 요. 테츠 아빠 선물이 뭔지 알아 맞추면…알아 맞추면!”
“알아 마쭈면!”
발랄한 음성이 쿠로오의 마지막 말을 따라하며 되묻자 그런 사야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단숨에 아이의 뒷머리를 꽈악 끌어안곤
“뽀뽀해 버릴 거지요! 쪽쪽쪽!!”
“아이~ 아빠 수염! 따 가 워~”
“오야오야, 테츠 아빠님의 수염 공격을 잔뜩 받으시죠 우리 공주님~?”
뽀뽀 세례를 날리는 쿠로오다. 어떻게 보면 다정한, 또 어떻게 보면 행복한 풍경에 케이크를 자르고 있던 아카아시의 입가에도 미소가 절로 피어오른다.
결혼한 지 4년. 허니문의 축복을 통해 아카아시의 뱃속에 자리 잡은 사야카는 두 사람의 보물 단지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갓 태어난 생명과 그것의 ‘처음’을 함께 밟아갔던 초보 아빠들은 지극히 미숙하고 또한 서툴렀다.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아이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걸 하루하루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딩-동
“어?!”
그 차임벨이 울리기 전까지만 해도
“께즤 아빠! 께즤 아빠! 얼른! 얼른 문!”
그들의 행복은 완벽했을 것이다.
“꼬따로 삼쫀 왔따구! 얼르은!”
*
“사야카~ 헤이 헤이 헤이!!”
“헤이 헤이 헤이! 꼬따로 삼촌!”
척 봐도 눈에 띄는 머리칼. 왁스로 번지르르해진 머리카락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솟구쳐 올라 있었다.
“뭐야. 나 빼고 한창 파티 중이었어? 내가 제일 늦었네.”
마치 잊고 있던 집안 식구 하나가 주인공마냥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쿠토는 양 손 가득 바리바리 싸든 짐을 현관 앞에 내려 두며 혀를 내두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린 사야카가 현관을 향해, 더 정확히는 보쿠토를 향해 쪼르르 발길을 옮긴다.
“으응 아냐아냐. 사야까는 꼬따로 삼촌 기다리고 있었는 걸!”
와아, 감탄사를 연발하며 녹안을 반짝이는 사야카가 보쿠토의 한 짐 가득한 선물들을 내려다보며 깡충깡충 뛰어 오른다. 결국 보다 못한 보쿠토가
“으쌰. 우리 사야카 그 새 얼마나 많이 컸나?”
한 팔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든다.
“사야까 이~따 만큼 컸어!”
“으하- 그새 꽤 무거워 졌네. 쿠로오, 아카아시, 이 몸 왔다고 헤이 헤이 헤이! 나 반기는 건 사야카 뿐이야?!”
뒤늦게 심통을 부린 보쿠토가 사야카를 안아든 채 익숙하게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제야 식탁에서 일어나 보쿠토 몫의 접시와 포크를 챙기던 아카아시는 당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올해는 좀 늦으셨네요. 차 밀렸어요?”
“어어. 휴가 시작철 이라고 어지간히 막히더라. 그래도! 무사히 사야카 선물은 사수했으니까. 신나지, 사야카?!”
“꺄아아- 꼬따로 삼촌이 최고야!”
보쿠토의 품에 안긴 채 물 만난 고기마냥 신바람을 부르던 사야카는 벌써부터 기대로 꽃 피워진 눈을 하고 있었다.
“어. 왔냐.”
“뭐야 쿠로오. 그 실망한 표정은. 니 선물도 사왔으면 했어?”
“……별로.”
조금 전 헤벌쭉한 표정과는 명백히 다른, 싹 굳어진 얼굴을 한 쿠로오가 소리 나게 의자를 밀치고 일어선다. 이 묘하게 짜증 섞인 소음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걸 눈치챈 건 케이크 조각을 덜어내고 있던, 아카아시 뿐이었다.
“어디 가요, 쿠로오씨.”
보쿠토의 등장 전후로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쿠로오가 등을 보이자마자 걱정기 어린 음성 하나가 쿠로오를 향한다. 그러나,
“우와아아! 선물! 사야까 선물! 우아…크레…끄레…? 삼쫀 이게 뭐야?”
“크레파스야. 종이에다 대고, 요-렇게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거!”
“꾸레빠…스?”
“크 레 파 스!”
“꾸! 레! 빠! 쓰!”
“아이 그게 뭐야. 자자, 여기 삼촌이 종이 줄 테니까-”
까르르 자지러지는 사야카의 웃음소리와 제 딸과 알콩 달콩한 기색이 역력한 보쿠토로 인해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쿠로오다.
“담배 좀.”
이미 보쿠토와 사야카의 깔깔대는 대화에 묻혀 버린 아카아시의 나지막한 질문. 그 대답을 들릴 듯 말 듯 작게 잇던 쿠로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베란다로 향한다. 한 발 늦게 그런 쿠로오를 발견한 보쿠토가 사야카의 앙증맞은 손바닥에 보라색 크레파스를 쥐어주며 멀어져 가는 쿠로오를 불러 세운다.
“어, 쿠로오! 치킨 사왔는데 안 먹어?”
쿠로오는 대답하지 않는다.
“야!! 쿠로오!”
낭창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야카 또한 쿠로오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내 말 무시하지 말라고!”
이미 베란다 밖으로 나간 후 유리문을 세게 닫아 버린 쿠로오였다. 얼핏 보이는 뒷모습에서 매년 돌아오는 연례행사를 지레짐작한 아카아시 또한 자리에서 일어선다.
“잠깐만 여기 있어요, 보쿠토씨. 사야카.”
“뭐야. 쟤 왜 저래 아카아시.”
“뭐……. 늘상 있는 일이니까요. 걱정 말아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매년 사야카의 생일에만 방문 해오는 보쿠토로 인해. 1년의 단 하나뿐인 자신과 아카아시의 하나뿐인 딸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도쿄에서부터 여기까지 몸소 발걸음 해주는 보쿠토로 인해. 매일 같이 함께 있어주는 자신보다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보쿠토에게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네주는 사야카로 인해. 쿠로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오늘이 이따금씩 미워지곤 했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 미운 건
“옹졸하고 비겁하고 속 좁은 나 자신이지만.”
불 붙인 담배 끄트머리를 물고 폐부 깊이 들이 마시자 그리웠던 니코틴과 타르의 기운이 세포 하나하나 깊숙이 파고든다. 폐의 수명이 닳아 없어짐과 동시에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던 스트레스가 단숨에 해방되는 기분. 후, 내뱉은 뿌연 날숨엔 응어리가 져 있었다.
“알고는 계시네요.”
“……뭐야. 언제 나왔어.”
“방금 전에.”
“하여간 귀신 같이 안다니까.”
“부대껴 산 지 몇 년 차인데요. 다 알죠.”
결혼 직전까지 피우던 줄담배를 결혼 직후, 사야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며 칼같이 금연을 외쳤던 쿠로오다. 그 단호함과 아이를 향한 열성에 놀란 아카아시가 돌연 웃음보를 터뜨린 것을 제외하면 쿠로오의 금연 소식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다만, 금연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싶을 때가
“나…진짜 못 됐지.”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뭐가 못 됐어요.”
“이상하게 저 녀석 앞에서만 서면 표정 관리가 안 돼.”
“그게 뭐 어때서요.”
“쟤는 그래도 날 친구로 알 텐데. 나는 쟤를…….”
연애는 물론이고 결혼까지 한 와중에도 쿠로오는 여전히 보쿠토의 낌새만 보이면 그를 의식하기 바빴다.
“바보 같은 사람.”
“누구더러 바보래.”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한 순간이나마 짝사랑했던 사람을 불나게 의식하는 누구누구씨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바보가 떠올라서요.”
“그게 한 순간이었냐. 나한텐…….”
깊게 빨아들인 숨으로 인해 입에 물린 담배가 단숨에 절반 가까이 타들어간다.
“아직도 애라니까, 이 사람은.”
“질투가 많은 거라 해줄래?”
“옹졸하고 비겁하고 속 좁죠.”
“그게 남편한테 할 소리인가.”
“전부 쿠로오씨가 자기 입으로 한 말 이거든요?”
주면 주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받아치는 아카아시 덕에 쿠로오가 픽 실소를 터뜨린다. 베란다 손잡이에 기대어 있던 쿠로오 옆으로 아카아시 또한 발걸음을 옮긴다.
“정-말 바보예요.”
그리곤 쿠로오의 입가에 걸쳐져 있던 하얀 막대기를 덥썩 뺏어들곤 능숙하게 제 입으로 가져간다. 놀란 쿠로오가 어, 야! 외치며 그를 말릴 새도 없이 뻐끔뻐끔 내뱉는 담배 연기가 길게 피어오른다.
“전 이미 당신 꺼잖아요.”
“…….”
“사야카도 당신하고 제 아이고.”
“…….”
“질투할 게 뭐가 있어요.”
“…….”
“결국 사야카의 진짜 아빠는 당신이고”
“…….”
“제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당신인 걸요, 쿠로오씨.”
무심한 듯 내뱉는 말들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쿠로오의 가슴팍에 내리꽂힌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멀리 내다보는 시선에 희끗하게 확신 어린 행복이 서려 있다. 담배가 걸쳐져 있는 중지와 검지가 묘하게 새끈하다.
“……맞아. 그랬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계절, 이 하루, 이 시간은 쿠로오에게 있어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발 늦은 성장통이었다. 그것은 수 년 전부터 쿠로오 홀로 앓아오던 지독한 열병의 일종이었지만 이제 그는
“우리, 결혼했지.”
혼자가 아니었다.
“미안. 내가 분위기 다 망쳤네.”
“아셨으면 됐어요.”
“으아~ 보쿠토 얼굴 진짜 어떻게 보냐. 그냥 확 내쫓을까.”
“그러시던가요. 대신 사야카가 찢어져라 울 걸요.”
“……그건 안 돼지.”
이젠 다 타들어간 담배를 난간에 지져 끈 아카아시가 싱긋 웃으며 쿠로오를 돌아본다. 정말이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미소였다.
“그건 그렇고. 사야카가 담배 냄새 맡으면 엄-청 화낼 텐데.”
“아.”
“게다가. 생일 선물이라고 한 박스씩 준비 해 놓은 동화책들, 얼른 개봉박두 안 하면 사야카 사흘 내내 삐져 있을 텐데.”
“아!!!”
“담배 냄새 다 지우고 들어와요 테츠로.”
뒤늦게 머리통을 벅벅 긁으며 후회의 발악을 시전하는 쿠로오다. 베란다에 묻은 담배 냄새와 함께 마지막 성장통의 내음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