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님 리퀘



“실례합니다~”

목재로 된 미닫이문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서적에서만 풍기는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무로 된 책장, 칸칸을 빼곡하게 채운 서적들. 도서실로 들어서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때는 봄.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왔다. 크림색 커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오후 세 시의 햇볕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알록달록한 새의 지저귐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어디 보자.”

오이카와는 눈에 띄는 책장 앞을 서성이며 눈높이에 맞는 책들의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훑어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다. 자신도 모르게 신바람이 난 오이카와가 헛기침 몇 번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독서’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철부지 아이가 장난을 준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처럼. 오이카와의 두 눈은 반짝반짝한 빛을 띄었다. 

오이카와는 얼핏 보아 제일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의 중간 즈음되는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펼치곤 그 사이에 이목구비를 깊이 파묻었다. 종잇장과 눈알이 부딪힐 만큼 거리감이 없었으니 그 안에 적힌 활자가 읽힐 리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의 목적은 책이 아니었다. 

양 손에 펼쳐 든 책으로 얼굴을 가린 자세 그대로, 오이카와는 게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떨리는 숨소리가 크게 나버릴까 호흡까지 꾸욱 참아낸 채. 이윽고 책장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오이카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 모서리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귀에 들리는 건 잔잔한 바람 소리, 커튼이 나부끼는 나긋나긋한 울림. 별 다른 반응이 없자, 오이카와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쿠니미쨩?”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았다. 책장에 몸을 바짝 붙이고 얼굴의 절반을 내밀었다. 

어딘가 들뜬 기분이었다. 봄이라서. 벚꽃이 만개해서. 그런 식상한 이유가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문께로 벚꽃 잎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내리 앉았다. 그 솜털 같은 몸짓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심장이 뻐근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나무를 등진 도서실 구석, 쿠니미는 한 폭의 그림을 배경 삼아 단잠에 취해 있었다. 

“어~이.”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쿠니미를 부르는 오이카와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관찰력 좋고 잠귀 밝은 쿠니미가 인기척을 전혀 못 느낄 만큼 곤히 잠들어 있단 사실이었다.

“진짜 자는 건가?”

쿠니미는 기본적으로 낮잠이 많은 타입이었다. 부 활동을 제외하면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조차 깨어 있는 쿠니미를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자기 앞가림을 전혀 못하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연비 좋고 효율 좋고 늘 냉정한. 멀지 않은 과거, 오이카와는 자신이 보아온 쿠니미를 단칼에 정의한 적이 있었다.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을 사실이라 말했는데 무엇이 바뀔 수 있겠는가. 문제는,

“정말, 내가 들어갈 틈 하나 안 주는구나.”

그가 쿠니미를 단순한 후배 이상으로 보게 된 것에 있었다. 

이층짜리 단출한 책장을 베개 삼아 잠든 쿠니미의 곁으로 오이카와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이카와 못지않게 잡티 하나 없는 상아색 피부.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 앞머리. 윤기마저 감도는 칠흑빛 머릿결.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옅은 그늘. 규칙적으로 쌕쌕거리는 숨결. 호흡을 따라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와 가슴. 

참 고운 얼굴이었다. 

아빠 다리로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댄 쿠니미 앞으로 오이카와가 무릎을 굽혔다. 굽힌 무릎 위에 양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었다. 그가 잠이 많아 좋은 점이라 함은, 이렇듯 쿠니미의 얼굴을 거리낌 없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단 점이었다. 

“잠만보야, 쿠니미쨩은.” 

반면, 짝사랑 상대가 온종일 잠에 취해 있는 터라 변변한 대화의 실마리 한 번 잡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뾰로통해진 오이카와는 잘 뻗은 검지로 쿠니미의 볼을 쿡쿡 찔러댔다. 몰캉한 볼은 찔리면 찔리는 대로 푹푹 들어갔다. 번듯한 이목구비에 고정된 시선을 살짝 내리니 그의 허벅다리 부근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책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여기서도 잘 줄은 몰랐는데.”

봄바람이 상냥한 숨결을 불어넣자 창틀 안 쪽으로 벚꽃 비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제히 낙하하는 벚꽃 잎들과 함께 쿠니미가 읽고 있던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영화 속 주인공 같아. 쿡쿡 대는 개구 진 웃음이 바람결에 새어 나왔다. 스쳐 가는 듯한 행복한 기분도 잠시. 오이카와는 쿠니미가 읽고 있었을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알에 부릅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자세가 자세다 보니 거꾸로 펼쳐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한눈에 읽기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남은 수단은 하나 뿐이란 걸 오이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큼, 흠. 쿠니미쨩이 뭘 읽고 있나 궁금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쿠니미쨩이 조, 조, 좋……. 하여간 그런 불순한 동기로 가까이 가는 건 절 대. 절대 아니니까…….”

쥐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쿠니미 옆에 안착하려는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쉴 새 없이 쿵쾅 이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겨우겨우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지만 그와 오이카와 사이엔 여전히 한 뼘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한 줌의 핑크빛 꽃잎이 둘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고개가 돌아갔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이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따라 혈류가 거꾸로 치솟았다. 화끈한 열기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쭈뼛 세웠다. 이러다 심장 마비나 호흡 곤란으로 당장 죽어 버리면 어쩌지. 눈앞이 점멸해 나가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 기억이 나질 않자 오이카와는 문득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던 것이다. 걱정도 잠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새끼손가락이 달팽이 기어가듯 거리를 좁혀 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쿠니미 쪽으로 기울어진 몸은 마침내 옷자락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남청색의 와이셔츠 소매가 맞닿아 바스락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채 그대로 호흡을 멈춘 오이카와는 최대한 조용히, 느리게 옆 눈을 흘겼다. 바람이 멈추지 않아 종잇장이 쉴 틈 없이 팔랑거리는 탓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었다. 

“고래?”

나부끼는 책장 하나를 잡아 앞뒤를 살폈다. 역시나 고래였다.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손바닥 한 면을 쫙 펼쳐 쿠니미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좌우로 세게, 약하게, 빠르게, 느리게 흔들어 보았다. 쿠니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샐쭉 웃었다. 

“잠깐만 책 좀 볼게.”

특유의 개구 진 미소가 폭발하기 직전의 설렘과 긴장감을 살짝 가려 주었다. 다행히 쿠니미는 책을 세게 잡고 있진 않았다. 뭐, 책 표지에 껌 딱지처럼 달라붙은 엄지와 검지만큼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손수 떼어내야 했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것 이외엔 별 다를 게 없었다.

“허먼 멜빌. 백경(白鯨).”

헤에, 이런 책을 좋아하는구나. 꽤 두꺼운 책이긴 했지만-무려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를 자랑했다- 쿠니미가 읽는 거라면 자신도 읽어봐야 하지 않겠냐며 속으로 떵떵거리던 오이카와는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눈앞이 핑핑 도는 듯했다. 분명 일본어로 쓰인 게 맞는데, 일본어가 아닌 듯했다. 차라리 암호문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미간에 인상을 팍 주며 문장 하나하나를 꾸역꾸역 해석하다 얻어낸 결론은 이런 어려운 책을 이해하는 쿠니미가 대단하다는 것뿐. 세 페이지나 넘겼을까. 오이카와는 문득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묵직해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어……!!”

혹시나 싶었다. 설마 싶었다. 책에서 떨어진 눈알이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정수리를 확인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굽었던 척추가 자동적으로 곧추섰고 쿠니미의 뺨이 닿은 어깨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 신경이 바짝 날을 세웠다. 불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이 미묘한 공기 속에서, 상황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망할 오이카와!! 수업 끝나면 교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이와이즈미였다. 도서실을 쩌렁쩌렁 울리다 못해 학교 전체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외마디 고함에 오이카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워워- 진정해, 에이스. 어차피 캡틴 여기 있을 거 뻔히 아는데 왜 소리를 지르냐.”

“그러다 고혈압 오르겠다. 일단은 진정 좀 해.”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덤으로 말이다.

오이카와는 사고를 빠르게 굴려야 했다. 쿠니미와 자신이 함께 있는 걸 보이는 것까진 상관없었다. 부 활동 시작 시간까지도 아직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엔 노기가 없었다. 그저 제 말을 무시하고 도서실로 튀어온 자신을 문책하러 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상대하는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쿠니미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르고 쓸데없이 화병만 많은 이와이즈미였다. 쿠니미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몰골을 보고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 고함 소리에 쿠니미가 깨기라도 한다면.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제 얼굴을 발견해버린다면. 쿠니미 자신이 들고 있어야 할 책이 제 손에 들려 있다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무조건 피한다. 조용히 시킨다. 쫓아낸다.”

그 세 문장을 자기 암시하듯 되뇐 오이카와는 책장 사이로 얼핏 스친 낯익은 실루엣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마츠카와였다. 이와이즈미가 아닌 것에 속으로 쾌재를 외친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에게 온갖 눈짓 발짓을 섞어가며 제 절박한 상황을 표현했다.

쉬이- 조 용 히! 자 고 있 어. 자 고 있 다 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설명을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고 말이다. 다행히 마츠카와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치 즈 햄 버 그 10 개. 알겠지? 10 개 야. 

협상의 대가는 잔인했지만.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이며 다시 한번 10을 강조하는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는 이를 갈았다. 그래도 다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오이카와는 한 시름을 놓게 되는데, 

“야. 오이카와 좀 늦을 거라던데.”

“뭐?! 여기서 더 늦어? 왜! 연락 왔어?”

“소리 낮춰. 일단 도서실이잖아.”

“어……. 응.”

“나한테 라인 와 있더라고. 쿠니미가 좀 다쳤대. 그래서 양호실 들렀다 곧장 부실로 간다고……. 아,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진 말라 더라. 금방 간대.”

이와이즈미의 반응을 비롯해 혹여 하나마키가 자신이든 쿠니미든 발견하면 어쩌나 싶어 오이카와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1초가 1시간 같고 1분이 하루 같았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오, 진짜. 늦으면 1분당 운동장 10바퀴라고 전해라.”

이와이즈미의 서슬 퍼런 협박을 끝으로 세 사람의 발소리는 멀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구부정한 어깨와 풀린 낯짝은 이제 슬슬 쿠니미를 깨워야겠다는 의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머리에 꽃잎 붙었어요, 선배.”

쿠니미가 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 엑, 엑?! 쿠니미쨩??”

언제부터?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내 얼굴 봤어? 내가 하는 짓거리들 다 본 거야? 맛층한테 묵음으로 소리쳤던 것도? 전-부? 다 보고 있었던 거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건 더듬거리다 얼떨결에 내뱉은 ‘쿠니미’란 이름뿐이었다. 즉,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지나치게 의식하고 말았다. 쿠니미의 새끼손가락은 어느새 오이카와의 것과 살짝 닿아 있었다. 당황해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 오이카와와 달리 쿠니미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실눈을 떠보니, 그의 길쭉한 손가락 끝엔 핑크빛 솜털이 붙어 있었다. 쿠니미가 멀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뿐이었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이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전신을 훑어 내리던 따가운 시선이 이내 그의 손아귀에 갇힌 서적을 향했다. 책이 왜 선배 손에? 의문도 잠시. 쿠니미는 발그레한 홍조를 띤 오이카와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런 눈치로 말했다. 

“선배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열이라도 있나? 그 큼지막한 손이 또다시 저에게로 향하자 오이카와는 다시금 눈꺼풀을 질끈 감아 내렸다. 눈꺼풀 안 쪽에 보이는 것이라곤 새까만 어둠뿐이었건만 언뜻 쿠니미가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다. 환청 같은 옅은 웃음소리도 함께 말이다. 

“푸흐, 너무 솔직한 반응이라 오히려 신선하네요.”

뒤늦게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가림막 너머의 쿠니미는 그의 머릿속에서 줄곧 그려왔던 모습 그대로, 정말 웃고 있었다. 휘어진 눈꼬리,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 온화한 얼굴.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고백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건데요?”

“뭐, 뭐!! 아니! 나는 그, 게 아니고……!”

“이러다간 선배가 먼저 졸업장 떼겠어요.”

그랬다간 제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귓전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갔다. 불에 탈 듯 벌게진 귓불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4월의 화창한 봄날.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 사랑은 봄바람을 타고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좋아해요.”


*김미루(@meru_0421) 썰 기반입니다.


목재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닫혔다. 이자카야를 알리는 얇은 천막이 앞뒤로 흔들렸다. 천이 젖히자 상쾌한 바깥바람이 쿠니미를 반겼다. 쿠니미는 달뜬 뺨을 식히려 손을 들었다. 알코올로 달궈진 볼과 손바닥 사이엔 꽤 온도 차이가 있었다. 적당히 서늘한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가며 뺨을 어루만진 지 몇 차례. 쿠니미는 아예 이자카야 출입구 바로 옆 자리에 쭈그려 앉아 버렸다.

술집 안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몇 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거였더라. 쿠니미는 뺨에 얹어둔 손등을 떼어내 숫자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즐거울 만도 한가.”

활짝 만개한 웃음꽃들이 듣기 좋았다. 동시에 그들과 비슷한 온도로 웃을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쿠니미를 감싸 안았다. 탄식하듯 반사적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희희낙락한 웃음소리에서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아! 쿠니미쨩 여기 있었구나~”

그때, 쿠니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돌아간 눈이 반쯤 열린 문어귀에서 꼿꼿하게 멈춰 섰다. 한참 찾았잖아. 꿈이 아니라는 듯 문 틈 새로 삐져나온 이목구비와 선명한 음색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쿠니미쨩도 진짜 오랜만이네.”

배시시 웃던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빈 옆자리로 바짝 다가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던 오이카와의 옆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본 쿠니미는 그에게로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술집의 온도를 그대로 가져온 오이카와는 신이 난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맛층 턱수염 기른 거 봤어? 영상통화로 볼 땐 엄청 놀렸는데 실제로 보니까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란 거 있지. 맛키는 결혼 준비로 바쁘다면서 얼굴이라도 잠깐 비추고 간 게 어디야 싶고. 이와쨩은 가업으로 이은 두부 장사가 엄청 성황리래, 대단하지?”

쿠니미는 형식적으로만 고개를 까딱였다. 

“미안. 나 혼자만 떠들고 있었네.”

한참 동안 입을 움직인 후에야 오이카와는 술기운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쨩은 어때? 잘 지내는 거지?”

화살은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쿠니미는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답 없이. 그저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어색한 정적에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오이카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던 후배의 속내가 읽히질 않자 천하의 오이카와 역시 당황하고 만 것이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려 할 무렵이었다.

“하지 마요.”

쿠니미의 무게중심이 오이카와 쪽으로 기울어졌다. 길게 뻗어 난 손가락들이 한껏 일그러진 입술 사이를 톡 건드렸다. 

“예쁜데.”

입술에 닿은 서늘한 감촉, 가까워진 숨결, 읽을 수 없는 표정, 한 톤 낮아진 목소리.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님 연속적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져서 그랬을까. 놀라 확장된 동공은 이내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눈알은 바닥에 꽂혔고 낯부끄러운 열기는 술기운을 대신해 오이카와의 얼굴을 붉혔다.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오이카와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쿠니미쨩 진짜 다 컸네! 이렇게 내 걱정도 해주고!”

자신은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람처럼 오이카와는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했다. 목소리는 높아졌고 팔을 높이 들어 쿠니미의 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툭, 툭 내리쳤다. 그러니까,

“…그러게요.”

쿠니미가 그 손을 낚아채갈 줄은, 오이카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벌써 다 컸는데.”

못 본 새 악력은 어찌나 세진 건지 슬쩍 힘을 줘 손을 빼내려 해도 쿠니미의 손아귀는 돌덩이 마냥 요지부동이었다. 이레귤러의 연속이잖아! 속으로 잔뜩 울상이 된 오이카와는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는데.”

“저기, 쿠니미쨩 이거 좀… 놓고 말하자, 응?”

“왜 자꾸……. 자꾸만.”

취했구나. 오이카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쿠니미, 대답 없이 물끄러미 저만 쳐다보던 쿠니미, 거침없는 스킨십과 묘한 말만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쿠니미. 만취라는 결론을 도출하니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던 쿠니미의 행동거지가 납득되기 시작했다. 

그 쿠니미쨩이 술에 취했다니! 오이카와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붙잡힌 손과는 달리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얄궂은 웃음이었다. 키가 한 뼘쯤 더 커지고 성대가 굵어지고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어도 ‘쿠니미 아키라’란 본질은 그때 그 시절에서 거의 변하질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가 덩치만 큰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동경(あこがれ)이라고 하죠, 보통은.”

쿠니미의 실상을 파악하곤 생글생글 지어 올린 눈웃음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한 건, 그가 다음 말을 꺼낸 직후부터였다.

“처음엔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동경이나 존경의 의미라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렸을 때니까. 그래서… 착각한 건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얼굴 근육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꽉 잡힌 손에서 체온이 공유됐다. 서늘한 손이 따스한 손과 한데 겹쳐져 온도가 뒤섞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소리 없이 뻐끔거리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이 잡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을 대뜸 제 목덜미로 가져갔다. 화들짝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뜬 채 쿠니미 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맞닿은 손바닥에선 불규칙적으로 쿵쾅 이는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보 같죠, 나.”

“……쿠니미쨩?”

“이젠 그만 할 때도 됐는데. 안 이럴 때도 됐는데.”

“…….”

“왜 이럴까. 왜.”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쿠니미의 얼굴은 점점 오이카와에게 가까워져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이카와는 뒷걸음질을 치다 나무문에 뒤통수를 작게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도망갈 곳이나 숨을 장소가 없다는 게 오이카와에겐 마치 패닉처럼 작용했다. 

“사실은 알고 있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

“…….”

“너. 너. 너. 전부 너 때문이라고.”

“…….”

“나는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자꾸만…….”

그 와중에도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은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던 지라, 쿠니미의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쿠니미와 코끝이 닿을락 말락 가까워지자, 위험 신호의 마지노선을 느낀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기, 쿠니미쨩! 너무 가깝, 가까워. 좀만 떨어져서-”

“네가.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잖아.”

오이카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쿠니미는 만취했다는 것조차 망각했는지 여태 자신이 느껴왔던 무수한 감정들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정말 그만해야 하는데. 너만 보면 의지가 약해져. 아니, 애초에 내 의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어. 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고 싶어. 평범한 선후배 관계가 됐으면 좋겠어. 동시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몇십 번씩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버려. 그러니까 나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쿠니미의 말들이 별세계의 언어 같았다. 애절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입을 놀리는 그의 눈이 얼핏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오이카와는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감지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쿠니미쨩, 너무 취한 거 같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곤 그저 서글픈 눈을 하고 있던 쿠니미에게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귓전에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니미는 그에게 반박이라도 하려는 것 마냥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나한테 아무 생각 없잖아요.”

그 순간 오이카와의 입술 위로 무언가가 겹쳐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곤 그대로 초점을 놓아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쿠니미가 쓰게 웃는 얼굴뿐이었다. 

“넌. 내가 이래도 아무 생각 없으니까……. 그만해야 되는 거죠.”

점점 작아지던 쿠니미의 목소리는 어느새 끊겨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쿠니미는 오이카와의 품 안으로 쓰러지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그의 심장박동 역시 차츰 잔잔해졌다. 오이카와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새근새근 잠든 쿠니미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은 두 사람을 다정하게 비추어 주었다. 

단 한 사람의 얼굴색만이 시뻘겋게 불거져 있었다.


건조한 입김이 탁한 회백색을 띠었다.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이 지나치게 흐렸다. 거 좀 있으면 장난 아니게 쏟아지겠구먼.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노인의 혼잣말을 곁눈질로 들은 남자는 다시금 구름 낀 하늘을 봤다. 사무치도록 시린 날씨였다. 

언제 눈이 쏟아질지 모르는 삿포로의 하늘을 우두커니 선 채 들여다 본지 몇 분. 어느새 정류장 근처엔 서넛의 사람 그림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이라는 안내와 함께 한 대의 버스가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갔다. 남자가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영하권을 훨씬 웃도는 이 추운 날씨 속에서 남자가 오래도록 기다린 버스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정차한 버스가 뒷문을 좌우로 열었다. 털모자와 패딩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꽤 두툼한 지갑이 카드 단말기를 향했다.

[카드를 한 장만 찍어주세요.]

마음이 급할 땐 되는 일이 없는 법이었다. 

언제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쿠니미의 눈썹 사이가 팍 좁아졌다. 그는 앞쪽의 운전석을 향해 조금 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를 복창했다. 친절한 운전수는 천천히 하라는 듯 흰 장갑을 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쿠니미가 버스 안 쪽으로 완전히 올라타자 활짝 열려 있던 뒷문이 천천히 닫혔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유일무이한 교통카드를 찾아 지갑 속을 헤맸다.

[반갑습니다.]

정상 승차를 알리는 녹색 불이 깜박거렸다. 다행히 이번엔 성공한 모양이었다. 쿠니미는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난데없는 소동에 진땀을 뺐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버스 내부를 둘러본 그는 이내 서서 가는 것을 택했다. 유일하게 빈자리로 남아있는 맨 뒷좌석까지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그만큼 발걸음을 옮기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까지 몇 정 거장 되지 않다는 것 또한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저기요……!”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버스 손잡이에 몸을 맡긴 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여린 음성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담한 체구의 여학생이 뺨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여학생은 쿠니미 쪽으로 다가가면서도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쿠니미는 귀찮은 상황에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곤두섰다. 못 들은 척을 할까, 모른 척을 할까. 다음 스테이지의 선택지를 고르듯 사고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불행히도, 여학생의 이어진 대답은 쿠니미의 실낱같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거……. 지갑에서 떨어진 것 같아서요.”

그녀의 양 손바닥 안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아.”

인상 쓰듯 찡그려져 있던 미간이 당혹감으로 변질됐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면부지의 사람 손안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 쿠니미의 안색은 누가 봐도 확연히 뒤바뀌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진심과 성의가 짙게 담긴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올라가 있기까지 했다. 그가 놓친 무언가를 건네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손끝이 스치고 무뚝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그러자 여학생은 전신이 불에 들끓듯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벌게진 뺨과 귓불을 식히기 위해 그녀는 그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뒷자리, 같은 교복을 입는 일행들의 재잘거림이 그녀의 등을 응원했다.  

아쉽게도 쿠니미는 형식적인 인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건네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탄 순간부터 뭇 여학우들의 주목을 받던 그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렇게 보는 건 꽤 오랜만이네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엔 손바닥보다 한참 작은, 3X4 사이즈의 증명사진이 있었다. 



* * *


‘12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사이 전국적으로 첫눈이 내릴 전망입니다.’

그 날 아침 기상 속보를 기억했다. 기상캐스터의 자주 빛 정장이나 머리스타일이 영화 필름처럼 선명했다. 아침으로 먹었던 쌀밥의 뒷맛이나 된장국에 들어간 두부의 형태는 기억 못 하면서 그녀의 가식적인 감탄사나 사소한 표정 변화는 선명히 기억했다. 티브이 화면 너머 ‘첫눈’의 수식어구는 낱낱이 기억했다. 

왜 그랬을까. 

남에겐 특별한 것이 나에겐 특별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남에겐 평범한 것이 나에겐 유별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과 ‘눈’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의미일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전혀 특별한 의미로 와 닿지 못했을 뿐이다. 돌고 도는 어느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 나는 오래도록 ‘첫눈’이란 낯 간지러운 단어를 미적지근한 온도로 흘려 넘겼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추억이란, 전혀 상관없는 것을 끌어다 멋대로 방아쇠를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나의 의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혹하게도. 



* * *


“거기서 턱을 조-금만 낮춰 볼까요? 네에, 그런 식으로. 좋아요, 눈에 힘주시고…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짤막한 신호음과 함께 인공조명이 두어 차례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개의 라이트 박스가 이루는 대각선의 교점엔 익숙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은 어색한. 약간은 뻣뻣한. 약간은 긴장된. 부자연스러운 미소 한 줌이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네, 끝났습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레 왁스로 고정시킨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울상이 된 눈알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푸핫, 야 방금 오이카와 얼굴 봤냐? 이케멘, 이케멘 노래를 부르더만~ 이케멘 다 죽었네.”

수고하셨습니다, 란 인사가 나오기도 전 하나마키가 폭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핀잔을 가만히 듣고 넘길 리 없을 오이카와가 꽥 소리를 질렀다.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던 눈썹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머리털에 힘 줄 때부터 알아봤다. 졸업사진은 남은 평생 갈 텐데- 안타깝게 됐다.”

말과는 달리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어조였다. 무심하게 태클을 걸어준 마츠카와 덕에 오이카와의 이마 정 가운데엔 깊은 빡침을 뜻하는 힘줄이 우수수 돋아났다. 이제 막 촬영을 끝마치고 장비를 접고 있던 사진사에게 오이카와가 무어라 외쳤다. 사진사는 곤란하다는 듯 볼만 긁적였다. 오이카와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졸업사진은 원래 평소대로 찍는 거다, 응꼬 야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이와이즈미까지 가세하자 마침내 오이카와가 발끈하듯 폭발했다. 

“하아? 맛키, 맛층, 이와쨩이야말로 아까 엄-청나게 이상했거든? 다들 초초초 썩은 표정으로 찍혔을 게 분명하거든?! 에붸붸붸, 다!”

오이카와는 쫙 펼친 양 손바닥을 관자놀이 옆으로 가져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몰골에 자칫 침체될 법했던 촬영장 공기가 부드럽게 녹아 들었다.

시청각 실을 통째로 빌려 마련한 임시 촬영장엔 아오바죠사이 배구 부 이외의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3학년들의 졸업사진 촬영 시즌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고, 해마다 인터하이, 봄고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배구 부는 매해 타 학생들과는 별도로 졸업 사진을 촬영해 왔기 때문이다. 늘 상 잔주름을 달고 살던 교복 바지가 매끈하게 다려져 있고,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넥타이가 셔츠의 빳빳한 카라를 정갈히 감싸 안았으며 챙겨 입기 귀찮다는 핑계로 빼입기 일쑤였던 조끼를 갖춰 입었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 교복 재킷까지 더해진 채로 말이다. 

“주절주절 시끄럽네. 눈 코 입 멀쩡하게 나오면 땡이지.”

“졸업 사진은 평생 남는단 말이야! 이 오이카와 씨의 잘생김이 반의 반의 반도 못 담겼을 게 분명한데 어떻게 안 슬퍼할 수 있어?!”

“네 놈이 유별난 거다.”

망설임 없는 반박 조에 오이카와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보였으나, 이내 알만 하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하긴~ 이케멘의 고뇌를 이와쨩이 이해할 리 없지.”

구름 낀 하늘을 사라지자 오후의 햇볕이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 바깥의 찬 공기와 따뜻한 실내를 경계 짓는 창틀에 뿌연 김이 서렸다. 창밖으로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가 비쳤다. 오전 중 잠깐 내렸던 첫눈은 그것 위로 소복이 쌓여 있었다. 겨울답지 않은 햇살과 조금은 가라앉은 공기, 교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찰과 음, 퍼석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 아래로 흩어 떨어지는 눈 덩이. 

홧홧 거리는 등 언저리에 닿지 않는 팔을 열심히 뻗어 보며 울부짖는 오이카와, 실컷 때려놓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씩씩 열을 내는 이와이즈미, 잔뜩 성이 난 그의 어깨를 붙들곤 열심히 뜯어말리는 킨다이치, 한 발자국 떨어진 채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즐거운 얼굴로 두 손 두 발 놓고 있는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평소와 다를 법 없는 풍경이 적절한 계절감을 만났다. 꼭, 잘 빚어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틀 가장자리에 등을 기댄 쿠니미는 여느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으로 뒤바뀌어가는 풍경을 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반쯤 감겨 있는 눈꺼풀이 사뭇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살은 그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보듬어 보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서였을까. 그림자가 드리워진 낯빛은 조금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 안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졸업인가.”

오래도록 교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마츠카와가 무릎을 폈다. 뻐근해진 허리께를 익숙하게 주무르곤 기지개를 켜듯 말했다. 후련하다는 어조로 말이다. 그러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일순 찬물 끼얹듯 얼어붙어 버렸다. 암암리에 금기시되던 단어와 문장이 위태위태하던 맥을 단숨에 끊어버린 것처럼. 다 같이 입을 맞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죽음을 닮은 침묵이 도래한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킨다이치였다. 시큰대는 눈시울과 훌쩍이는 콧방울은 진즉에 불거져 있었다. 울음을 참듯 애꿎은 천장만 올려보던 와타리는 이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교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닫혔다.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숨을 죽인 울음소리가 간간이 배어 들었다. 

“뭐야, 왜 니들이 울고 그러냐.”

제일 먼저 수습에 나선 이와이즈미는 벌써부터 눈물바다인 킨다이치와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긁기 바쁜 야하바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졸업하는 건 우린데 왜 너네가 슬퍼하냐, 너무 염려하지 마라, 너희라면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우리 없다고 연습 게을리했다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위로인지 농담인지 구별 못할 말들이 거리낌 없이 오고 갔다. 

그러나, 그간 꾹꾹 눌러 삼키고 있던 슬픔과 설움은 이와이즈미의 말 몇 마디를 기폭제 삼듯 터진 둑처럼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한 몇몇 후배들을 시작으로 곧 교실 전체가 울음바다로 뒤바뀌어 갔다. 보는 사람마저 서러워지도록 엉엉 우는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이와이즈미를 도우려 마침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까지 팔을 걷어 부쳤다. 

쿠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미된 신파극에서 눈을 돌렸다. 창문 유리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찬 기운이 피부 결을 타고 들어와 뼈를 긁었다. 호, 하고 입김을 부었다. 입김이 닿은 주변만 얼어붙은 수증기가 뿌옇게 발했다. 무언가를 쓰려했는지 그의 검지가 유리창 쪽으로 바짝 가까워졌다. 손가락이 유리창에 닿기 직전, 그는 손을 내렸다. 

졸업(卒業). 첫눈(初雪). ……좋아해(好き).

결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적어보지 못했다. 평범한 나날 중 하나에 불과할 오늘에 특별한 의미를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쿠니미는 그랬다. 

“오이카와 넌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빨리 와서 한 마디 좀 해줘라.”

오이카와. 머릿속으로만 맴맴 돌던 단어가 귓전을 때리자 쿠니미는 흠칫 놀란 가슴팍을 남몰래 움켜잡았다. 뿌연 공백만 남은 창가에서 영화 속 풍경으로, 그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가 남겨둔 입김이 옅어져 갔다.  

“잠깐, 잠깐만! 선생님이 사진 바로 뽑아서 주실 수 있대. 이것만 확인… 하고…….”

제 얼굴이 떡하니 찍힌 모니터를 발견한 오이카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잠시 후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인화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떡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한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눈물 콧물 줄줄 흘리던 1, 2학년들이나 그들 달래주기 바쁘던 3학년들마저도 오이카와의 사라진 뒷말이 궁금해졌는지 속속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으하하하, 이게 뭐냐?!”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하나마키였다. 배꼽까지 잡아가며 통쾌하게 웃어대던 하나마키는 인화된 사진 한 장을 집으며 말했다. 

“내 사진이 백 배 천 배 잘 나왔겠는데? 야, 나 기념으로 하나만 줘라. 우울할 때마다 꺼내 봐야지.”

오이카와의 반응은 살피지도 않은 채 이와이즈미가 다음 사진 한 장을 잽싸게 낚아챘다. 

“눈 코 입 제대로 붙어있네. 딱 니 얼굴이구만 뭘. 이건 내 꺼.”

마츠카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농담으로 해본 소리였는데, 니가 진짜 니 무덤을 팠구나. 나도 들고 간다?”

오이카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건 참다못한 오이카와가 약 3초 후 괴성을 지를 거란 일종의 신호였다. 쿠니미는 익숙하게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아악! 니들 전부 절교야!!”

공들인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로 폭발해 버리는 오이카와의 뒤통수만 쿠니미는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오이카와의 모든 순간을 눈 안에 가득 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단단히 심통이 나 뾰로통하니 부푼 뺨이 귀여웠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며 축 쳐져 있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후 사진 속 제 얼굴을 재차 확인하곤 푹 실망해 버리는 옆얼굴이 퍽 예뻤다.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낮게 깔린 속눈썹, 흐트러진 뒷머리, 영 답답했는지 마음대로 풀어헤친 넥타이, 조금 큰 손, 곱고 긴 손가락,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 끄트머리.

“쿠니미쨩이 보기에도 이상해?”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던 걸까. 돌연 오이카와의 화살이 쿠니미에게로 돌아갔다. 줄곧 제 쪽은 보지도 않던 눈이 예고도 없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쿠니미의 얼굴엔 당혹감이 짙게 흘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그는는 허겁지겁 눈알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왼쪽 가슴 언저리가 쉴 새 없이 펄떡거렸다. 꼭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 같았다. 

“자, 봐봐.”

그런 쿠니미의 반응이 생소했는지 혹은 그의 얼굴을 읽어낼 수 없는 까닭이었는지,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여덟 걸음쯤 떨어져 있던 거리가 이젠 반걸음조차 안 됐다. 머리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이성이 감전당한 듯싶었다. 

숨은 어떻게 쉬더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떤 거였지. 예전엔 어떻게 이 사람을 상대했지. 

뜨끈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역류해 올랐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피하고자 하는 마음,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자 은연중에 쿠니미는 자신의 팔로 상반신을 감싸 안았다. 꼭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역시… 이상한가?”

쿠니미의 반응을 ‘거절’로 읽어내서였을까. 한 풀 꺾인 어조가 자신감을 툭 잃었다. 큰 손바닥이 뒷목을 감쌌다. 곤란하다는 듯 지어 올린 웃음이 쿠니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급해진 건 쿠니미였다. 

“아, 그……. 저기!”

순간적으로 오이카와의 팔목을 낚아챌 뻔한 쿠니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그의 소매 부근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려다 이르게 포기를 선언하곤 부러 그것을 피해 돌아가려는 사람처럼. 

쿠니미가 붙잡은 덕분에 오이카와는 반쯤 돌아선 상반신을 다시 돌려세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궁금함을 한껏 머금었다. 반면 자신이 잡아 놓고도 놀란 쿠니미는 소리 없이 입만 뻥긋거렸다. 그를 돌려 세운 것까진 좋았지만, 무어라 말머리를 꺼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100미터 달리기를 방금 끝마친 사람처럼 호흡은 가빠지고 맥박은 용수철 마냥 튀어 오르고 산소 결핍의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했다. 

언제나 그렇듯, 쿠니미는 그의 앞에만 서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까지 이상하진 않은 것 같, 아요.”

간신히 대화 주제를 떠올려낸 쿠니미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쿠니미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무언의 정적이 오히려 민망했다. 덕분에 귓불이 점점 뜨거워졌다. 길게 길러 넘겨 버린 앞머리가 이때만큼은 귀를 잘 가려주길, 쿠니미는 간절히 바랐다. 

짐짓 휘둥그레져 있던 눈이 조금씩 제자리를 되찾았다. 뒤이어 눈꼬리가 활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어설픈 미소가 미미하게 남아 있던 입술이 시원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

그는 활짝 웃었다. 연갈색을 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살이 포물선 형태로 접혔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턱과 한 톤 높은 음조와 말간 웃음이 오롯하게 쿠니미를 향한 순간이었다. 

“자. 쿠니미쨩도 줄게.”

오이카와는 자신의 소매를 붙들고 있던 쿠니미의 한 손을 잡아끌었다.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만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쿠니미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 뒀다. 난생처음 비를 맞은 꽃 마냥 놀람과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던 쿠니미는 한 발짝 늦게 그것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손바닥 안엔 웬 증명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그것은 여태 오이카와가 기대하고 실망하고 속상해하길 반복하게 만든 원인이 분명했다. 

“기념 선물.”

눈앞의 오이카와를 상대하기 바빠 미처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그것을, 쿠니미는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역시 어색했다. 그가 짓는 최고의 웃음을 본 직후여서 그랬을까.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의 미소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 오이카와 씨가 특별히 쿠니미쨩만 챙겨 주는 거야.”

‘고마워’란 말과 함께 최고의 웃음을 선물 받았다. 특별, 이란 말이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제와 말을 번복할 순 없었다. 쿠니미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소중하단 걸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멍청아. 척 들어도 네 기분 생각해서 한 소리인 걸 왜 모르냐.”

어느새 오이카와 곁으로 다가온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프다며 우는 소릴 낸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보던 쿠니미는 씁쓸한 웃음만을 남겼다. 

정말… 제가 가져도 되나요?

재차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 목울대 아래로 가라앉았다. 감사 인사조차 건넬 틈이 없었다. 어정쩡하게 벌어져 있던 입은 저절로 닫혔다. 손등엔 누군가의 감촉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피부 곳곳에 열꽃이 피어날 것 같았다. 

손안에 쥐어진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이상했다.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감지 않으려고 힘을 꽉 준 눈매가 어설펐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환한 웃음과 이것.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아닌 것. 웃으면 웃는 대로 세상 모든 종류의 꽃이 만개했다 져버리는 듯한 착각이 이는 것과 결코 그렇지 않은 것. 

쿠니미는 옅게 웃었다. 

한쪽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위치 따윈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쿠니미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오이카와의 증명사진이 마음에 들고 말았다. 언젠가는 잊힐 단편적인 웃음보다, 영겁에 가깝도록 유지될 어설픈 미소가 좋았다. 비록 렌즈를 향한 형식적인 웃음일 지라도, 그것은 언제까지고 오로지 쿠니미 한 사람만을 가리켜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 * *


몇 년 전 그때처럼 쿠니미는 증명사진 속 오이카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꽤 오랜만이었다. 요 몇 년 간 취업 준비, 졸업 준비에 정신이 없다 보니 사진 한 장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고, 다섯 번의 내정 끝에 취업처도 간신히 정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이카와 생각이 전혀 안 났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겠지만. 

쿠니미에게 있어 그것은 부적과 다름없었다. 증명사진만이 아니었다. 그것에 담긴 계절의 한 때, 숨 죽여 참는 울음소리, 함께 있을 수 있던 마지막 교실 풍경, 심장 언저리를 간질거리게 하는 추억. 그 모든 것이, 사진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꽤 닳았네.”

이 부적을 쿠니미는 지갑 깊숙이, 가슴 깊숙이 봉인한 채 이따금씩 꺼내 보곤 했다. 그때의 기억과 풍경을 조심스레 떠올리곤 예나 지금이나 불규칙하게 쿵쾅 이는 가슴 언저리를 꾹 짓누르곤 했다. 그렇게 어딘가 어색한 이목구비를 한참을 어루만지다 지갑 속에 다시 넣어두었다. 증명사진의 가장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고 얇게 앉은 코팅이 벗겨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쿠니미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증면사진을 만져보았다. 뭉근한 손놀림으로 오이카와의 굳은 입꼬리를 매만졌다. 언제 보아도 그때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인 오이카와에게 

“잘 지내요?”

의미 없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차임벨을 눌렀다. 목적지에 다다른 버스는 곧 바퀴를 멈췄다. 보도블록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았다. 차가워, 감탄사도 내뱉을 겨를도 없이 저절로 뒷목이 꺾였다. 

첫눈이었다. 



“매번 감사합니다, 형씨. 조심히 들어가십쇼!”

차임벨 소리가 맑게 울렸다. 살짝 밀어낸 목재 문이 작게 덜컹였다. 샴페인을 담은 길쭉한 쇼핑백이 남자의 손목을 타고 달랑달랑 흔들렸다.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온 추위가 뺨을 스쳐 지났다. 남자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따뜻한 가게 안에서 30분이 넘도록 진열장을 살펴만 보고 있었으니 한기가 제법 낯설 만했다. 가던 길을 잠깐 멈춘 남자는 목 언저리를 칭칭 감싸 둔 와인색 머플러를 매만졌다. 한파가 들어올 틈이 없도록 단단히 매듭짓자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했다.

먹먹한 겨울 하늘은 별 한 점 내보이지 않았다. 꼭 오래도록 들춰보지 않은 일기장 위로 쌓인 먼지더미 같았다. 올해도 눈 보긴 글렀네. 남자는 짧게 혀를 차곤 발걸음을 서둘렀다. 목에 두른 머플러는 구둣발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까지 막진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걷는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어디선가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느리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구세군’이라 쓰인 자선냄비 곁. 빨간색 점퍼를 입은 노인이 종을 흔들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인조적인 것인지 모를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종소리에 맞춰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번잡한 소음으로 가득 찬 거리 안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들리기란 쉽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났다. 무언가의 코스프레라도 한 것처럼 붉은색과 흰색으로 무장한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누볐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는 언젠가의 봄처럼 핑크빛을 띠진 않았다. 굵직한 뿌리에서부터 타고 올라 얇은 가지 끄트머리까지 꼼꼼히 감긴 전구는 무수한 빛의 무리를 뽐냈다. 꼭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또 교회나 성당 같은 것이 어딘가에 있었는지 성가대의 합창이 환청처럼 까마득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보기 좋게 눈살을 찌푸렸다. 탄식처럼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거리와 순진한 얼굴로 함박 웃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통신 수단을 꺼내 들었다. 소매 아래 감춰져 있던 맨손이 찬 공기에 닿아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급하게 나온다고 장갑을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자주 찾는 가게에서 좋은 술이 들어왔다며 오늘 안에 꼭 와달라는 연락만 없었어도, 그는 이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주말을 집구석에 틀어박혀 평범하게 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괜히 나왔어.”

그럴듯한 소리를 내자 얼어붙은 입김이 곧장 뿌옇게 흩어졌다. 머플러에 턱을 푹 내리꽂은 남자는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끌벅적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먼 전원 버튼만 눌렀다가 떼어냈다. 무채색의 바탕화면이 꺼졌다, 켜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규칙적으로 놓인 보도블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에 있을 오거리만 건너면 즐비한 주택가가 바로 코앞이었다. 

그 몇 분 사이 남자는 버튼을 누르는 기계적인 손동작에도 신물이 난 듯했다. 남자는 다른 관심사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뒤적였다. 몇 도쯤 올라간 주변 공기와는 전혀 다른 노래를 듣기 위해 음악 어플을 실행시키자 이번엔 이어폰이 없음을 깨달았다. 장갑과 함께 깜박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화면을 터치하는 손가락은 매 순간 느려졌다. 잔뜩 얼어붙은 손가락 끝과 터치스크린은 제 주인의 말을 들으려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턱턱 막히는 숨통을 환기시키려고 뒷목을 꺾었다. 

그 순간 마츠카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거리 한가운데, 매해 돌아오는 기념일마다 휘황찬란한 장식들을 감싸 안는 구상나무가 트리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채 넓은 아랫단에는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가 비치되었고 풍성한 잎사귀들 사이사이엔 가로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거대한 빛 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렸으며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은 끄트머리엔 사람 머리 만한 별 장식이 번쩍번쩍한 금빛을 발했다. 

그것이 안겨주는 웅장한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츠카와는 무의식 중에 휴대폰 카메라를 높이 들어 올렸다. 조잡스러운 셔터 음이 여러 번 났다. 만족할 만큼 찍었다 싶다가도 마츠카와는 그 아름다움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성탄절이니 캐롤이니 산타니 그에겐 전부 내키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트리만큼은 남다른 의미였을까. 

그림 같은 풍경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선 채 쳐다보고 있던 마츠카와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지 느릿느릿 발걸음을 뗐다. 오거리 맞은편 너머에 위치한 주택가 쪽이 아닌, 트리의 중심을 향해서. 

“여기, 빈자리인가요?”

한 사람 남짓 들어갈 법한 화단 턱을 가리키며 마츠카와가 물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좌우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무리는 빈자리와 마츠카와를 번갈아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엉덩이를 붙이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앉았다. 

마츠카와는 문득 김 빠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시끄러운 캐롤이나 성탄절을 알리는 종소리, 떼로 움직이는 산타클로스 무리를 보아도 꿈쩍도 않던 가슴이었다. 마냥 무덤덤하기 만할 줄 알았던 그것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감화라도 됐던 걸까. 트리를 본 이후부터 그의 가슴께는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뒤늦게 찾아온 감성적인 것이 시비조로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았다. 

“쓸데없이.”

왼쪽 가슴이 묘하게 욱신거렸다. 제법 큰 손은 코트 안을 파고들어 스웨터에 잔주름이 질 만큼 아픈 부위를 세게 틀어쥐었다. 

어라, 어째 코끝까지 찡했다. 위험신호였다. 안구 안 쪽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뜨끈한 기운이 차오를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마츠카와는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나머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빠르게 잠금 화면을 풀고 조금 전 찍었던 사진을 재차 확인하러 사진첩을 열었다. 

그런 날이 있다. 묘하게 잘 풀리지 않는 날. 악재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힘든 작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사람을 뒤흔들게 만드는 날은 꼭 있기 마련이다. 마음 편히 늘어지고 싶은 주말에 가게를 찾아달란 연락, 급하게 나온다고 챙기지 못한 장갑과 이어폰,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왔다는 한파, 유독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귀청을 울리는 소음, 그리고 지금. 

“허……. 이런 기능이 있었어?”

마츠카와에겐 오늘이 딱, 악재가 겹치는 날이었다. 

‘3년 전 오늘’이란 문구를 어색하게 만들 만큼 사진 속 마츠카와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칼, 와인색 머플러, 추위로 빨갛게 물든 콧방울. 

“내년엔 새해 운세 포기할까.” 

현재와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단 점이었다. 

“보나 마나 대흉(大凶) 찍혀 있을 거 같은데.”

사진 속 마츠카와의 옆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남자는 그와 똑같은 색의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꼭 지금처럼, 성대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웃고 있었다. 상큼한 미소를 활짝 지어 올리는 것이 일상처럼 능숙해 보이는 남자와 달리, 마츠카와는 미소를 지은 건지 안 지은 건지 모를 만큼 옅게 웃고 있었지만. 

“……미치겠네.”

꽉 움켜쥔 가슴팍은 조금 전보다 훨씬 괴로운 통증을 수반했다. 머릿속으로만 막연히 그리고 있던 얼굴을 사진이란 매개체로 다시 보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조심조심 손가락을 움직였다. 추위에 마비된 손끝이 딱딱한 화면을 더듬거렸다. 그의 엄지는 사진 속 남자의 초콜릿색 머리칼에서 좀처럼 떼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만지고 있으면 춥고 서늘한 감각이 언젠가는 결 좋은 머리카락 느낌으로 변하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올리며. 

활짝 휘어진 눈꼬리와 방긋 올라간 입술선, 진주빛 피부를 타고난 남자의 얼굴에게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선을 던지고 있었을까. 새하얀 알갱이가 액정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무언가의 알갱이는 평평한 화면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검지 손톱 만한 작은 것은 오이카와의 뺨에 몸을 내던지곤 언제 자신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흔적을 지워 없앴다. 

겨우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은 마치 느린 속도로 재생되는 영화 같았다. 초점을 잃은 멍청한 눈을 하고 있던 마츠카와가 퍼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무렵이었다. 그의 주변은 이상하리 만치 웅성거렸고 누군가의 외마디 말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눈이다!”

그 한 마디가 마츠카와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그를 꿈에서 일깨우듯 또 다른 눈송이가 그의 입술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따뜻한 입술에 맞닿은 눈은 그대로 형체를 잃었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만이 눈송이의 존재감을 알렸다. 

사방에서 감격에 겨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찰각대는 셔터 음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구나, 누군가가 지나가듯 외쳤다. 마츠카와는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마음 편히 늘어지고 싶은 주말에 가게를 찾아달란 연락, 급하게 나온다고 챙기지 못한 장갑과 이어폰,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왔다는 한파, 유독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귀청을 울리는 소음, 그리고 지금. 

성대하게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 우연처럼 마주한 빛바랜 기억의 낱장, 때맞춰 내리는 눈, 화이트 크리스마스. 

‘내년 크리스마스엔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신사 참배를 갔을 때 한껏 진지해진 옆얼굴로 손바닥을 맞대는 오이카와를 보며 의아해진 마츠카와가 먼저 말문을 꺼냈었다. 뭘 소원으로 빌었길래 그렇게 진지하냐고. 

사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성실한 답변을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시즌엔 더 잘하게 해달라던가, 좀 더 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해달라던가의 내용이겠거니 싶었다. 

그런 그였기에, 단순히 ‘내년 크리스마스엔 눈이 오면 좋겠다’고 답하던 오이카와를, 마츠카와는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오지 않았지.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그렇게나 손꼽아 기다리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보니, 정작 그의 곁엔 소원을 빈 당사자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너는. 일부러 뒷말을 숨겼겠지. ……나 혼자만 바보 만들어 놓고.”

마츠카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건 산타클로스가 보내주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미쳤다고 해도 좋고, 눈에 취해 감수성이 폭발한 거라 해도 좋고, 구질구질하다며 손가락질당해도 좋았다. 자신은 크리스마스의 마법에 걸렸다고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의 주문을 외웠다.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외운 번호를 꾹꾹 누르다 말고 잠시 실소를 터뜨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통화 연결 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의 당연한 물음을 듣는 순간 마츠카와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전화번호를 바꾼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자신을 기억했다면, 첫마디는 ‘여보세요?’가 아닌 오랜 침묵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겨우 전화 한 번 한 게 뭐 대수라고 성대가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오랜만이야.”

여보세요, 누구세요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던 수화기가 굳게 다물렸다.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이내라며 마츠카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 일은 아니고……. 여기, 눈 오거든.”

잘 지내냐를 차마 뱉지 못한 입이 딴 소리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잘 지내냐, 고 물었을 때 ‘잘 지낸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대로 말문이 턱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는 눈송이를 소록소록 날리는 하늘 너머 멀리 시선을 던졌다.

“너, 눈 좋아하잖아.”

한참의 침묵 끝에 오이카와는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랬었나.]

그마저도 냉정한 어조였다.  

“그랬어.”

[그래? 잘 됐네. 여기는 눈 안 와.]

마츠카와는 서글프게 웃었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끊어도 되는 거지?]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돼…….”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전화를 더 붙잡을 수 있는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대화가 좀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뾰족한 방도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금세 그칠 줄 알았던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얇게 퍼져 쌓인 눈송이처럼 그의 머릿속도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내 마츠카와는 입술을 달싹였다. 운세에 대흉이 나오든 두고두고 오늘을 후회하든 평생의 행복을 오늘과 맞바꾸어 다 반납하든 상관없으니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는 틈은 달라고. 눈을 쏟아뜨리는 하늘에게 빌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꺼진 통화만이 뚜, 뚜 소리를 반복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거신 전화는 전원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전파가 닿지 않는 장소에…….]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휴대폰 플립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전화하랴, 숨 가쁘게 달리랴, 사람 찾으랴.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목을 칭칭 둘러싸고 있던 목도리가 땀에 차 습했다. 아예 무릎 위로 양 손을 얹고 거칠어진 입김을 몰아쉬던 이와이즈미는 애꿎은 것에 분풀이 하듯 목도리를 잡아 뺐다. 삼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는 것도 잠시. 아직 발걸음하지 않은 세 번째 갈래 길 너머로 이와이즈미는 다시금 뜀박질을 시작했다. 


겨울이란 계절의 이름도 끝을 맺어간다지만. 2월의 밤은 여전히 쌀쌀하다 못해 뼛속에 한기가 들어설 정도였다. 이 날씨에 길바닥 어딘가를 나뒹굴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오이카와!!”


말썽의 발단은 언제나 오이카와였다. ‘친구’가 낯설어지고 ‘우정’이 부끄러운. ‘연인’이 익숙하고 ‘사랑’이 당연한. 사랑해, 가 아침 인사처럼 튀어나오고 좋아해, 가 약간은 낯 간지러운 그들은. 자타가 공인한 오랜 커플이었다. 이렇듯 쉴 틈 없이 깨를 볶고 사랑을 속삭여야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추운 겨울날 온갖 분노를 폭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싸웠다. 요 근래 싸우지 않은 날의 횟수를 꼽으라면 양 손으로 헤아려 볼 수 있을 만큼, 두 사람 사이에 부는 칼바람은 도통 잦아 들지 않았다. 이유라고 특별나지 않았다. 침대의 창가자리를 두고, 샤워를 오래 한다고, 하루 종일 삐졌단 티를 낸다고, 말 한 마디 져주려고 하질 않는다고, 예전이랑 다를 거 하나 없다고, 툭하면 예전 일을 들먹인다고. 


싸운 것까진 좋았다. 딱 거기까지 였다면, 어느 한 쪽이 숙이고 들어가 화해를 이룩하면 그만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그것은 오롯하게 이와이즈미의 몫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만하자.’

‘뭘 그만해. 할 말이라면 아직 태산처럼 남았어.’

‘나! 이와쨩이랑 싸우려고 연애하고 싸우려고 같이 살고 싸우려고 살 섞는 거 아니야. 연애는 나 혼자 하니? 나만 연애해? 나 왜 만나? 요즘 이런 생각들만 해. 이게 행복한 걸까. 진짜 연애가 맞을까.’

‘……후, 또 그 소리야? 이제는 좀. 알아줄 때도 됐잖아. 오래 사귀었잖아. 이런 것도 이해 못해주면 연애는 어떻게 하고 사랑은 또 어떻게-’

‘이와쨩도 알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한 순간부터 연애는 한 풀 꺾인 거라고.’

‘그 이상……. 입 열지 마.’

‘싫은데. 내가 왜?’

‘하지 말라 하면 좀, 하지 마.’

‘헤어져.’


격에 다다랐던 싸움을 한 순간 허무하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다. 처음엔 효과가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미안하단 사과를 읊조렸고 상처 받았을 오이카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것을 손쉽게 얻어낸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나마 승리자가 된 것 같았다. 더 큰 사랑이란 기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 ‘처음’이 어려웠을 뿐. 두 번째, 세 번째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이와이즈미의 언성이 조금만 높아지면 오이카와는 ‘헤어져’를 무기 삼아 꺼내들었다. 그것을 비장의 카드 삼아 기세등등해진 오이카와를 대하는 이와이즈미는 오죽했을까. 처음엔 미안했고 두 번째는 껄끄러웠고 세 번째엔 한숨이 나왔다. 작작 좀 해라. 셀 수 없는 횟수만큼 이별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돌아왔을 무렵 마침내 이와이즈미는 짜증을 섞었다. 크게 상심한 오이카와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고 이와이즈미는 그마저 좋게 보질 못했다. 


결국 도피처로 삼은 것이 하나는 가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홧김에 쏟아 붓는 술이었다. 머리가 알딸딸해질 만큼 빈속에 알코올을 들이키고 나면 쌀쌀한 거리를 홀로 배회했다. 개중 눈에 띄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다, 홀린 듯 동전을 넣고 손에 익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가진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대꾸 없는 발신자에게 차츰 윽박을 지르곤 했다. 오이카와냐, 어디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야, 너 자꾸 이럴래, 어디까지 날 속상하게 만들 건데 등. 처음부터 끝까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그리고 잔소리. 잔소리로 귓전이 따가울 때 즈음 오이카와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곤 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된 ‘미안해’는 가슴 먹먹한 ‘잘못 했어’로 이어져 마지막엔 울음으로 제 서러움을 호소했다. 


전부 거짓말이고 농담이었단 말이야, 섭섭해서 홧김에 아무렇게 내뱉고 만 거라고, 헤어지지 말자, 그러지 말자,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 말 그대로 믿은 거 아니지, 나랑 진짜 끝내려 한 거 아니지, 내 생각 전혀 안 난 거 아니지, 내가 안 보고 싶어진 거 아니지. 나는 보고 싶어. 이와쨩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보고 싶단 말이야. 


결국엔 ‘보고 싶다’였다. 그마저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폭언은 공중전화 속 50엔이 전부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버거웠고, 그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도중에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있다 애꿎은 머리칼만 잔뜩 헝클어뜨려야 했다. 


오늘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집에 돌아오고 보니 있어야할 사람이 없었고 ‘토오루’가 아닌 ‘하나마키’란 이름의 부재중 전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술 먹고 푸념을 듣는 것까진 좋았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라져 있었다고. 언제 걸려올지 모를 전화 한 통에 의지할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길로 곧장 제 연인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진짜.”


한참의 공방전 끝에 찾아낸 오이카와는 흔한 공중전화박스 바로 옆, 어두침침한 그림자 속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차라리 안에 들어가 있지. 힘껏 뛰었는데도 손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추위였다. 이 날씨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친 채 거리를 떠돌았을 오이카와를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저절로 울화통이 치미는 것 같았다. 


“코트라도 입고 나오던가. 이러다 감기 걸리면 뒷수습은 누가 해주는데.”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그런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이와이즈미가 한 손에 들고 뛰었던 목도리를 오이카와의 휑한 목 언저리에 둘러 주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이와…쨩?”


술도 못하는 게 들이 붓기는 또 얼마나 들이 부었는지. 목도리를 둘러준다 자세를 낮췄더니 스멀스멀 풍겨 오는 술 냄새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붕어를 생각나게 하는 퉁퉁 부은 눈두덩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겨우겨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곤 또 한 번,


“이와쨩!!!”


눈물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시간 홀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주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펄쩍 안겨 들 듯. 오이카와는 저와 눈높이를 맞춘 이와이즈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곤 그의 가슴팍 한 가운데 울음이 터진 꼴 사나운 안면을 깊이 묻었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이와이즈미가 뒤로 벌렁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어 버리고 말았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대체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단 말이야. 흑, 으앙-”


허,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이와이즈미는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안기며 엉엉 우는 오이카와의 머리통에 꿀밤 한 대를 힘껏 쥐어주려다, 이내 포기했다. 벌겋게 부은 눈가와 대비되는 낯짝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가 가시다 못해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등을 묵묵히 쓸어내려 주었다. 손바닥을 통해 지독한 냉기가 전해져 왔다. 이와이즈미는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었던 말들과 혈류가 거꾸로 솟구쳐 오를 만큼 격해져 있던 울화를 삼켜내고 가라앉혔다. 사실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분노 따윈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분풀이보단 오이카와의 심신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를 발견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의 안위부터 확인하고 마는 자신에게 이와이즈미는 진즉에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절실해 보였다. 벼랑 끝으로 내몰려 낭떠러지 아래의 까마득한 어둠에 잔뜩 겁을 먹은 사람처럼. 그것은 이와이즈미의 옷자락을 꾹 붙든 손아귀에 도드라진 핏줄로 증명되어 있었다. 그러니 항복해야 할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단 좀 비켜봐.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거 안 부끄럽냐.”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그러쥔 이와이즈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부정적인 말에 오이카와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싫……어.”

“오이카와.”

“싫어.”

“안 비켜?”

“싫다니까!!”


고집불통. 이와이즈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뒷머리를 벅벅 긁적이다, 오이카와에게 등을 보였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무언의 손짓을 보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의 행동거지에 오이카와가 머뭇거릴 때면 이와이즈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마음 따위 훌훌 털어낸 것 같은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뭐해? 안 업히고.”


그제야 오이카와는 수분으로 불어터진 눈가를 살짝 휘어 보였다. 허락만을 기다린 사람마냥 그의 다부진 등 위로 넙죽 업혔다. 건장한 성인 장정 하나를 든 탓에 이와이즈미의 무릎이 순간적으로나마 부르르 떨렸다. 그마저도 잠시, 튼실한 팔 근육은 오이카와가 미끄러지지 않게끔 그의 허벅다리 뒤쪽을 세게 감싸 안았다. 


“헤헤 이와쨩 등 오랜만이다아~”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버둥버둥 거리지 좀 마, 이 망할카와.”

“이와쨩 나 많이 무거워?”

“말이라고 하냐.”

“이와쨩 나 많이 사랑해?”

“말이라고 하냐.”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한 높낮이 없는 음성에 오이카와가 부루퉁 입을 내밀었다. 어깨 부근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바닥이 단숨에 이와이즈미의 목 언저리로 이동했다. 


“……성의가 없어. 매정해! 차가워! 미워 죽겠어!!”


목덜미를 쥔 손아귀에 퍽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인 압박을 받은 이와이즈미의 숨통이 급박한 SOS신호를 보냈다. 불행히도 오이카와는 완고했다. 


“뭐……. 윽, 오이카와!! 맞고 싶냐?! 야, 숨, 숨 막-”

“나 사랑하냐구!!”

“당연한 거 자꾸 꼬치꼬치 캐물을래?! 이 손, 손부터 놓고 말해라, 앙?!”

“진심과 열정과 정성을 다해서 말해 달라구우!!!”

“어, 좋아 죽겠다! 사랑해서 돌아가시겠다!! 눈앞에 아주 황천길이 보일만큼!!”


어찌나 오래 잡고 있었는지,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그마저도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면 정말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덜미를 붙들고 있을 심산이었나 보다. 부족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쉰 이와이즈미는 일순 뒤통수를 힘껏 젖혀 오이카와의 이마에 왕방울 만 한 혹이 날 만큼 박치기를 할까라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관두고 말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붕어 눈깔 저리가라 할 정도의 눈탱이 밤탱이 꼴을 한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단 극명한 쾌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려한 낯짝이 못난이가 되는 과정을 상상하다 이내 푸하하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곧장 와 닿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거렸다. 


내일이면 또 하찮은 이유를 들먹이며 싸울지 모른다. 습관처럼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현관을 뛰쳐나갈지 모른다. 그런 오이카와를 뒤쫓아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 어느 순간 무료해질 지도 모른다. 의미 없다고, 부질없다고 생각할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그림자만 남겨 버린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쫓아가리라. 술에 취해 행방불명 된 채로 울고불고 화를 내다 마지막엔 저를 찾고 그리워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이유인즉,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술버릇




W. MELL




얇은 종잇장이 팔랑이며 넘어간다. 탁한 회색빛의 그것은 깨알 같은 활자들로 뒤덮여 있다. 콧대에서 살짝 미끄러진 금테의 둥근 안경을 쓸어 올린다. 일직선으로 피어오른 연기의 근원은 한 쪽으로 삐뚜룸하게 말려 올라간 입가다. 자주 애용하는 담배 향이 높지 않은 천장을 향해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신문의 정치 분야를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던 마츠카와는 맞은 편 벽을 향해 슬쩍 눈길을 준다. 1과 2 사이를 가리키고 있는 시침에 거짓은 없다. 고운 미간이 간격을 좁히고 잘 보고 있던 신문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접게 만든다. 피로에 지친 눈에게서 안경을 거둬내자 콧대에 알싸한 통증이 감돈다. 소파 깊숙이 달라붙어 있던 엉덩이를 떼자 내내 꼬고 있던 한 쪽 다리에서 경련이 인다. 쥐가 나 주춤거리는 것도 잠시, 각을 맞춰 접은 신문과 안경을 협탁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 둔다. 깍지 낀 손을 높이 올려 가벼운 기지개를 켜본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탓에 몸의 근육과 뼈, 관절들이 늘어지는 소리를 낸다. 수명이 다한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 벌겋게 부풀어 올랐을 콧대를 주무르고 있자 이번엔 반쯤 남긴 식은 커피가 시야에 들어온다. 따뜻했던 온기는 사라지고 향은 날아갔으며 원두의 쓴 맛과 맹물이 침전물처럼 남았을 그것. 머그잔 안 쪽에 눌러 붙은 커피 찌꺼기를 빤히 쳐다보다, 거리낌 없이 그것을 치워낸다. 


머그 잔은 두 개였다. 식은 커피 또한 두 개였다. 소파는 2인용이었고 방 안 곳곳엔 2인분의 생활용품들이 존재했다. 


그는 본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실 신문의 글자 따윈 눈에 차지도 않았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살피며 현관문이 열리기만을, 초인종이 울리기만을 그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면 늦는다 연락이라도 하던가.”


머그컵 안 쪽에 눌러 붙은 누리끼리한 커피 찌꺼기를 빡빡 문지른다. 젖은 손을 털고 식기 세척기를 가동시킨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지쳤는지 마츠카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 이후, 그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를 안지 않으면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것도 인형이나 베개 같은 물건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를 끌어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다니. 신종 불면증인가 싶다가도 그의 머리칼이나 목덜미에서 풍기는 체취에 코를 박고 있으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드는 스스로가 있었다. 


아쉬운 대로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 식기 세척기가 돌아가는 사이 마츠카와는 거실의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 두 번째 칸을 눈으로 훑는다. 취미로 모은 클래식 음반이 벌써 한 줌에 다 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나 있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CD를 골라 중고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무렵

쿵. 


그의 모든 행동거지가 정지한다. 단순한 윗집 소음이라기엔 귓가에 생생히 와 닿았던 특유의 둔탁함.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워 소리의 근원지를 탐색하던 마츠카와는 정확히 두 번째, 현관문에 소리 나게 부딪히는 무언가를 향해 빠르게 발을 옮긴다. 


“으항~ 늦었찌~”


맨 처음은 코를 찌르다 못해 마비시킬 지경에 이른 술 냄새. 그 다음은 어깨를 가득 짓누르는 묵직함. 팔다리에 힘이 풀려 축 늘어진 거대한 인영. 


현관문을 당기자마자 제 품으로 풀썩 쓰러진 오이카와를 얼떨결에 안아 들게 된 마츠카와는 일순 그런 생각을 했다. 


“너…….”

“헤헤. 맛쯩 오래, 히끅, 기다려쪄?”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이미 자정을 넘겨버린 시각. 행여 옆집에 민폐가 된 건 아닌지 복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츠카와는 쥐죽은 듯 고요한 멘션 전방을 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물론,


“왜 늦었어.” 


오이카와 토오루 한정으론 전혀 안심하지 못했지만. 품에 안겨진 건 우연이었지만 마츠카와의 허리에 허벅다리를 두른 건 엄연한 고의였다. 내친김에 그의 목에 팔까지 두른 오이카와는 영락없는 고목나무 매미 꼴이었다. 정작 그를 내내 기다린 사람의 속에선 화르륵 불길이 일었지만 말이다. 


“왜 늦었냐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심상치 않다. 짤막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듯한 화를 애써 가라앉혀 본다. 


“수울……. 마셨어.”


어차피 상대는 고주망태였다. 투덜거려봤자 어디까지 알아먹을 지조차 미지수였다. 결국은 어깨를 크게 들썩일 만큼의 한숨을 내쉰다. 오이카와가 떨어지지 않게끔 엉덩이를 양 손으로 받쳐준다. 다행히 현관에서 침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우리 토오루, 주량이 얼마나 됐더라.”


말뜻을 이해 못했는지 정말 주량을 세어 보려던 건지 오이카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본다. 턱을 받치고 있던 검지가 금세 굽어진다. 눈살이 보기 좋게 휘어지고 푸흐흐, 웃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덜미에 힘껏 고개를 묻는다. 잇쎄이 냄새 조아아. 흡사 고양이처럼 애교가 가득 담긴 앙탈이 뒤를 잇는다. 


“내가 미친다 진짜.”


오이카와의 주량은 기껏해야 맥주 세 모금. 소위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취기가 오르는 타입이었다. 잘 취한다, 사실 거기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식을 하든 동창회를 가든 친구를 만나든 금세 취해 버리고 마는 이른바 ‘알코올 쓰레기’의 표본이 바로 그였으니 건강상으로든 미관상으로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문제는, 


“잇쎄이 여기. 수염 났다. 막, 까칠까칠해. 여기……. 뽀뽀하고 싶어. 할래.”


알코올만 들어갔다 하면 튀어 나오는 스킨십 본능이었다. 


턱을 타깃 삼아 폭격기마냥 쪽쪽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도 불구하고 마츠카와의 표정은 짙게 굳어 있다. 오이카와가 다니는 회사의 평판이나 대우나 복리 후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회식이라 이름 붙일 만한 자리도 일 년에 한 번 될까 말까한 정도의. 단지, 차마 술을 거절 못하는 오이카와가 그때마다 알코올을 들이 붓는 데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잔뜩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행방불명이 된 넥타이, 주름 진 정장 바지에서 시작해 발그레한 홍조, 누구에게든 달라붙지 못해 안달 난 몸짓, 평소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애교.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이 분통 난 속이 풀릴지. 음주로 무방비해진 오이카와를 상대했을, 혹은 슬쩍슬쩍 곁눈질 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었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버리는 자신이 옹졸하게 여겨지다가도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디에도 내보이고 싶지 않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고 저 혼자만이 감상하고 싶다는 끓어 넘치는 소유욕은 언제나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물론 이 치졸한 이성과 탐욕스런 감정의 대결은 늘 그렇듯 오이카와 토오루란 이름에서 비롯되었지만. 


“잠깐만, 잠깐만. 뽀뽀 됐어. 이제 충분해.”


턱 끝, 뺨, 콧망울, 이마, 그리고 입술로 진한 입맞춤을 날린 오이카와 덕에 마츠카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만두란 말에 잠시 시무룩한 얼굴을 한 오이카와지만 금세 기운을 차린다. 


“그러엄……. 잇쎄이도. 잇쎄이도 토오루 뽀뽀 해줘.”

“조금만 있다가. 착하지, 우리 여보?”

“지금 해줘어, 응?”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자각은 하고 있는지. 나직한 한숨을 뱉은 마츠카와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의 아래턱을 당긴다. 실크같이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이로 살짝 깨물자 기다렸다는 듯 말캉한 혀가 환대인사를 외친다. 진한 알코올 향과 간간이 기름진 튀김 맛이 난다. 담배 냄새 나. 반면 오이카와는 불평하듯 읊조린다. 덕분에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인지 오이카와는 조금씩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어댄다. 화는 이제 차후의 문제였다. 당장 시급한 사안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그의 이성이었다. 


“불편한 건 없어? 토할 거 같진 않고?”


이성이 뿌리 뽑혀 나갈 듯하다. 어금니로 입 안 쪽을 씹어댄 상태에서 입을 여니 저절로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대로 있다간 취한 사람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일지. 마츠카와는 식은땀이 비죽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뒤, 품에 안긴 제 연인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떨어지기 무섭게 오이카와가 어린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이 있는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면서 말이다. 


“아냐! 툐류 여기 시러. 누워 있기 시러!”

“잠시만. 꿀물 갖고 올게. 그대로 자면 속 버리니까.” 

“잇세이 가지 마, 응? 여기 있어. 여기! 툐류 옆에. 나 꼬옥 안아줘어.”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편이 빠를까. 전신의 혈액이 특정 지점으로 쏠리고 있는 걸 몸소 체감한 마츠카와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 절실하다. 


“……좀 봐줘라.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결국 항복 선언을 외친 건 마츠카와다. 점점 더 목청 높여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는 오이카와를 위해 스스로 협의 점을 찾은 것이다. 두 명이 눕기엔 약간 비좁은 싱글 침대. 마츠카와는 제 품으로 파고드는 오이카와의 뻗친 뒷머리를 조심히 어루만진다. 


“이제 됐어?”

“응.”

“술 깨면 난리 나겠네.”

“응…….”

“자는데 옷 안 불편해?”

“우웅…….”

“벗기면 벗겼다고 화낼 것 아냐.”

“맛층…….”

“아주 앉지도 못하게끔 혼쭐을 내놔야 해. 그래야 술의 ‘ㅅ’자도 안 꺼낼 테지.”

“사랑해.”

“……바-보. 얼른 자.”


만취한 제 연인을 마주 안은 마츠카와는 그 등을 보드랍게 쓸어내린다. 나도, 라는 짧은 중얼거림은 달빛과 함께 잘게 흩어진다. 유독 달이 밝은 밤이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꼭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W. 멜







“어쩔 수 없죠.” 


그것은 나의 입버릇이다. 눈을 피하고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차며 뒷목을 감싸 쓸어내린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불복종할 이유는 없다. 화를 내봤자 바뀌는 건 없고 아까운 시간과 감정만 소모할 뿐이니. 그럼 그런 거라고, 원래부터 그런 거였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때마다 선배는 묘한 눈으로 나를 훑는다. 일일이 따지는 것도 아니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괜찮다는 내 낯빛을 구석구석 살피곤 한다.


“다녀오세요. 오랜만에 뵙는 거잖아요.”


끈질긴 시선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춤거리며 발을 떼지 못하는 선배의 등을 내가 힘껏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배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미안해. 


돌아올 대답은 어차피 뻔했기에 나는 또 ‘괜찮아요’라는 대답을 대신할 것을 준비한다.


“사랑해요. 제 생각 많이 하고요.”


닫혀가는 문 틈새로 힘없이 웃는 선배의 얼굴이 지나간다. 반 뼘쯤 낮아진 다갈색 눈동자가 문에 가로막혀 완전히 사라진다. 닫힌 문에게 손을 흔든다. 끝없이 인사를 건네준다. 다녀오라고. 가기만 하지 말고, 꼭 다시 돌아오라고. 


“……밖이 생각보다 쌀쌀하네. 목도리라도 둘러줄 걸.”


그것이 나의 사랑 방식이었다. 


“저녁 메뉴는……. 나베나 할까.”


저녁 무렵엔 돌아온다 했던 것 같다. 마침 나베 재료들도 사두어둔 참이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말고 먹음직한 전골 요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선배 옆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얼마 전에 구비한 코타츠는 두 사람이 쓰기엔 조금 큰 사이즈였다. 보온의 용도나 둘이 나란히 이불을 뒤집어 써 가만히 귤을 까먹는 용도로 쓰기엔 아깝다 생각한 차였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베와 코타츠, 그리고 선배와 함께 보내는 첫 겨울이라니. 꽤나 낭만적인 겨울 아닌가.


“버너…버너……. 버너를 어디다 뒀더라.”


한창 이삿짐을 풀던 도중 안 쓸 것 같다며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둔 건 확실한데. 살짝 까치발을 들자 정리되지 않은 내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높은 찬장에 겨우 검지가 닿던 몇 달 전에 비하면 짧은 시간 동안 키가 확 컸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안은 어지러웠다. 선배가 즐겨 먹는 소유라면 두 박스, 선배가 자주 챙겨주는 길 고양이들을 위한 통조림, 식단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찬장 깊이 숨겨 두었던 우유 빵 한 꾸러미. 그것들을 치워 내니 새까맣게 코팅된 플라스틱 가방이 드러난다. 눅눅한 먼지와 기름 냄새는 덤으로 말이다. 


“아직 쓸 수 있으려나.”


가스통을 열어 조금 녹이 슨 부탄가스를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고 점화 버튼을 꾹 눌러본다. 그러자 파란 불꽃이 균일하게 피어오른다.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단 화력이 미미하긴 했지만. 


버너를 식탁 위에 얹어두자 식탁 가장자리에 샛노란 프리지아로 장식된 화병에게 눈이 갔다. 막 프러포즈했을 당시가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백은커녕 좋아하는 마음조차 죄악감으로 느껴지던 풋풋했던 시절은 이제는 옛 일기장의 낱장과도 같다. 프리지아 꽃다발을 건네주며 함께 살자는 말을 꺼냈을 때 선배의 얼굴은 여전히 생생하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 초승달을 그리던 입가, 꽃다발을 품에 안고 그것을 꼭 닮은 행복한 웃음을 얼굴 가득 걸다, 갑자기 제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사랑스러운 사람. 덩달아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주곤 작게 물었다. 앞으로도 함께 해줄 거죠. 선배는 울다 웃기를 반복하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도’가 아니고 ‘평생’이야, 아키라. 직접 내 말을 지적해주던 선배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바라보다 이내 잘게 떨리는 어깨를 조심스레 마주 안아주었다. 


“러브 하우스……. 까진 아직 멀었나?”


올 겨울을 넘기면 연애 햇수만 7을 넘긴다. 같이 동거를 시작한지는 꼬박이 1년 가까이가 되고. 오랜 연애였다. 그간 악착같이 함께 모은 돈으로 1LDK 방을 사고 나니 결혼식은 꿈도 못 꾸게 되었지만. 선배는 혼인 신고서 한 장에도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물론 서류를 작성할 당시엔 서명하려 펜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 애꿎은 종이 몇 장을 날려 먹었지만, 쩔쩔 매는 옆모습이 귀여워 웃어 넘겼던 것 같다. 


“보자……. 남은 건 재료 손질이랑 냄비 정도인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앙증맞은 자석들이 덕지덕지 붙은 냉동실 칸. 딸기 모양 자석 밑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토오루가 못 먹는 것들!’의 타래가, 눈에 띄는 냉장실 정중앙 엔 ‘아키라와 토오루의 음식 저장 창고. 두 사람 이외엔 건드리지 마시오 - ㅅ -’라는 귀여운 경고 문구가, 냉장고 구석구석엔 균형 잡힌 식단을 갖추기 위한 재료들이 나열된 전단지들이. 


어디든, 무엇이 되었든, 선배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기, 양배추, 깻잎, 숙주, 청경채, 팽이버섯, 그리고 육수.”


‘맛있는 나베 만들기’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팅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먹기는 많이 먹어봤지만 직접 만들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하면 선배보고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라 할 심산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와이즈미 선배니까, 저녁 시간 전까지 미리 언질만 해두면 맛있는 걸 먹여주겠지. 내가 만든 실패한 전골 요리 같은 것보다 훨씬 좋은 걸.


“아쉽기는 아쉽겠지만.”


야채 종류는 흐르는 물에 씻어 내고, 식기 세척기에 모셔져 있는 도마를 펼치며 칼을 들었다. 양배추를 손질하려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싱크대에서 고개를 들면 곧장 보이는 손바닥 만 한 창가엔 조그만 라디오가 있었다. 부엌만 들어갔다 하면 불난리를 치고 119를 외치는 선배 덕에 부엌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될 수 있었지만, 저것만큼은 아니었다. 


맛층이 생일 선물이라고 준 거야. 졸업했다고 학교 까먹지 말라고 특별히 민트 색으로 골라준 거다?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다니까. 


“어쩔 수 없지.”


남이 준 선물을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요리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게 썩 나쁘진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주부터 듣기 시작한 음악 채널은 곡 선정이 꽤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 라디오의 전원을 켜자 자잘한 잡음과 익숙한 멜로디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피아노 전주였다.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깻잎과 손질된 소고기와 배추를 한 데 겹쳤다. 일정한 크기로 잘라 냄비 안에 가지런히 포개 넣었다. 만개한 장미꽃마냐 냄비를 가득 채운 전골 재료들을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육수 만들기는 금방이었다. 남은 일이라곤 같이 먹어줄 상대를 기다리는 것뿐. 아직 두 시조차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식재료를 너무 일찍 준비했나 싶어 무안한 마음에 볼을 긁적였다.   


우연이었다. 휴대용 버너와 함께 찬장에 처박아 두고 싶었던 라디오를 켠 것은 정말 우연에 불과했다. 아님, 단순한 변덕이었을 지도. 라디오 채널을 켜자마자 처음 들린 노랫말이 마음에 든 것도, 그것을 들으며 밀린 우편물을 정리하던 것도, ‘제 42회 아오바죠사이 고교 졸업 동문회’란 이름의 편지 봉투 위로 선배의 이름이 적힌 걸 본 것도, 멀리서 들려오는 선배의 부름에 무심코 그것을 구겨버린 것 또한, 하나같이 우연의 산물이었다. 


왜 그랬을까. 


기껏해야 동문회 안내지였는데. 선배가 좋아하고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자리가 있다는 걸 일러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선배가 지나가다 눈여겨 본 뮤지컬 공연의 티켓 예매를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 날짜가 동문회 일시와 겹쳤던 것?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 보러 가면 그만이니까. 어쩔 수 없죠, 특기인 입버릇으로 얼버무리면 그만이었으니까. 


“……Because you don’t know what it means to me.”


당신은 그 사랑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었다. 애절함이 흠씬 묻어나는 음색에 나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To remind how I still love you…I still love you.”


왜 그랬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정말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 한 건 아닐까. 인정하면 편하다. 받아들이면 편하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내가 순순히 인정할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다고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것. 


“……선배?”


다름 아닌 당신에 관한 것이었다. 



* * *



아키라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쫓겨 나간 현관 앞. 급하게 나오느라 얇은 청재킷 하나밖에 걸칠 수 없던 그는 재킷의 깃을 빳빳하게 세웠다. 고개를 들어 언뜻 훔쳐본 하늘은 꽤나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뽀오얀 입김이 절로 나오는 찬 공기 틈으로 손바닥을 마주 비벼 그 사이에 따뜻한 숨을 호호 불어 넣었다. 


가라 해서 나오긴 나왔지만, 정작 당사자의 낯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온 신경은 꽉 닫힌 문을 향해 바짝 곤두서 있는데 막상 가야 할 길은 그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즉,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뛸 듯이 기뻐야 했음에도. 


어딘가 먹먹한 마음 한 구석을 애써 감싸 안고 철제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던 차. 정겨운 야구 응원가가 재킷 주머니에서 울려 퍼졌다. 암울하던 토오루의 안색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필시 ‘아키라♡’란 세 글자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어디야 망할카와.]


아쉽게도,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그가 바라는 이의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아……. 이와쨩.”


순간 허탈해진 토오루는 맥 빠진 한숨을 쉬었다. 다리 힘마저 풀렸는지 내려가는 계단 두 개를 한 번에 밟아 버렸다. 


[어디냐니까. 나 이제 막 공항 입국해서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야.]


하마터면 위험천만 했을 상황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토오루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애꿎은 204호 우편함 뚜껑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휴대 전화를 잡고 있는 손끝이 추위에 바르르 떨렸다. 


“미안. 나 이제 막 집 나왔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어?”

[이 굼벵카와가!]


오랜만에 듣는 욕지거리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미안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양보니 배려니 따위의 단어를 입에 담을 입장이 아니란 걸 토오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삿포로로 발령받은 이야기나, 마츠카와가 혈혈단신으로 교토에 자리를 잡았다거나, 하나마키 혼자 미야기 현에 남아 꽃집을 시작했다던가.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 제 친구들과 ‘함께’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그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근 일 년 동안 잘 지낸다 연락 한 번 없었던 자식이라 그런가, 얼굴 한 번 보기 더럽게 힘들다?]

“하하.”

[쿠니미가 잘해 주냐?]


택시 잡아야겠지. 여기서 하네다까지 얼마나 나오려나? 걸리는 시간은? 그런 자잘한 걱정을 하며 큰 도로 쪽으로 나가려던 토오루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

[왜 대답이 없어.]

“…….”

[설마……. 쿠니미 이 자식을 진짜.]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치며 수화기에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그건 아니라고. 아키라는 내 생각 정말 많이 해준다고. 매일 매일 사랑한다 말해준다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거지는 일체 안 하고 나를 값비싼 도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며 나한테는 오히려 과분하다 싶은 사람이라고. 그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속마음을 와르르 쏟아내자 토오루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낯부끄러운 마음과 씁쓸한 기분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문제. 문제랄 것은 없었다. 충분히 행복했다. 이 이상의 기쁨은 없을 만큼 둘이서 함께 보내는 소소한 일상들이 퍽 즐거웠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때라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죠. 그래. 그 말을 할 때마다 였다. 


본인은 티를 안 냈다 자부할 지라도,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미간이나 눈을 마주치길 피하는 버릇에서 불편한 기색 역력히 드러났다. 아키라의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토오루는 언제부터 적응하고 말았던 것일까. 


[오늘도 네 낯짝 보기는 글렀구나.]


생각해보면 참 단순했다. 국가 대표로 선발된 카게야마가 연락도 없이 두 사람의 집을 무턱대고 찾아 왔을 때나, 마츠카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라디오를 자랑했을 당시나, 오늘 같이 이와이즈미가 삿포로에서 먼 발길을 내어줄 무렵이나, 미야기에 하나마키를 비롯한 후배들을 보러가자고 말을 꺼냈을 때나, 하다못해 지나가던 여자들이 토오루를 향해 추파를 던졌을 때마저. 아키라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먼발치로 돌리곤 했다.


[그나저나 내일 동문회 소식은 들었어? 마츠카와 녀석은 출장 근무라 안 된다 그랬고 나나 하나마키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애초에 그것 때문에 도쿄 온 거기도 하고.]


이건 뭘까. 왜 이리 어렵게 생각했던 걸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겼던 걸까. 이렇게나 단순하고, 또 사랑스러운데. 


“……아니.”


똑똑한 아이니까. 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아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아키라를 멋대로 규정짓고 있던 건 대체 누구였는지. 


[안내장 안 갔어? 일주일 전쯤엔가 배부했다던데.]


그것 또한, 분명한 아키라의 사랑 방식이었음을. 


“미안 이와쨩. 나 역시 못 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 어?]

“이번 주말은 내내 아키라랑 보낼 거거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랑한다 말해줄 거야. 질리도록 안아주고 귀엽다고 말해주고 곁에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야 너 그러고 전화 끊지 마라. 끊지 마. 전화 잡고 있-]

“그러니까 미안. 이번 연말엔 꼭 연락할게.”


전화를 끊어낸 손길이 가벼웠다. 되돌아가는 걸음걸음이 깃털처럼 사뿐하고, 큰 짐을 덜어낸 듯한 어깨는 새로운 사랑을 발견한 꼬마 아이마냥 기쁨으로 너울거렸다. 철제 계단을 타고 오르며 나는 시끌시끌한 소음은 더 이상 소음이 되지 못했다. 집을 막 나섰을 당시, 떨쳐내기 힘들었던 앙금의 이유가 확실해졌다. 귓가에 희미한 노랫소리가 닿았다. 비록 작고 가느다란 탓에 눈치 채기는 어렵지만, 분명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덜컥 열린 현관문의 낡은 경첩 소리나, 코끝을 확 감싸 안는 신선한 야채들 냄새나, 그것들을 정성껏 손질하고 있는 선 고운 옆모습이나, 굉음에 놀라 빠르게 깜박이는 한 쌍의 눈꺼풀이나, 그것들 하나하나하가


“……선배?”


행복한 결말을 노래하고 있었다. 






*동동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비정기적 연재 (내킬 때, 뽕 찰 때, 원고 탈주하고 싶을 때 이어 씁니다)

*꼭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엠프렉 소재








W. 멜




“잇세이.”


식탁 의자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있던 토오루가 말꼬리를 늘린다. 그의 앞에는 벌써 네 개 째 비워진 푸딩의 포장 용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려 특대 사이즈나 되는 그것들을 네 개나 비운 후에야 배가 불렀는지 일회용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던 토오루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다. 


“나 살 쪘어?”


이유라 함은 그것이었다. 


“빠빠, 빠빠 뿌우딩.”


이번 달 들어 벌써 생후 21개월 차가 된 아카네는 어느 덧 단어와 단어를 이어 붙여 어눌하게나마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카네의 입가 주변에 잔뜩 묻은 푸딩의 흔적을 턱받이로 닦아 내던 잇세이는 토오루의 투정 어린 질문에 잠시 곁눈질만 한다. 


“……그닥?”


대답하기 앞서 미묘한 공백이 길어지자 토오루의 눈썹이 보기 좋게 찡그려진다. 


“왜 망설여? 왜 의문형이야? 진짜 찐 거야? 그래 보여?!”

“아니……. 좋아. 지금이 딱 보기 좋다고.”

“……나 놀리는 거지. 쪘으면 쪘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보기 좋다니까?”

“그거나, 그거나! 결국은 살이 올랐단 소리잖아!”


저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진 토오루는 내친 김에 식탁을 작게 내리치며 자세를 바로 한다. 집에선 언제나 헐렁한 티셔츠와 품 넓은 청바지를 애용하는 토오루였지만 요 두 달 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그의 식욕을 막을 방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임신 3개월 무렵 극심한 입덧에 시달리던 토오루는 드레싱 없는 샐러드, 말린 오징어, 복숭아를 제외한 음식엔 입도 대지 못했다. 심지어 그 흔한 물조차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해대기 일쑤니 잇세이 입장에선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때 아닌 겨울철 딸기가 먹고 싶다거나 홋카이도 기념품인 초콜릿 쿠키가 먹고 싶다거나 오사카 3대 명물 맛집 출신의 타코야끼가 먹고 싶다며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면 차라리 좋았을 일이다. 밤새 헛구역질에 시달리곤 먹은 것이 없어 신물만 토해내는 구토는 지난 두 달 간 잇세이를 뜬 눈으로 지새게 만들었다. 토오루 머리맡에 대야를 준비해 두지 않는 이상 다음 날 아침 무렵엔 침대 시트가 토사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역한 기운은 계속 올라오는 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없으니 최후엔 제 손가락들을 목구멍 너머로 욱여넣으며 구토를 유도하려는 토오루를 목격한 순간, 잇세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해치려 들지 말라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아픈 게 낫다고, 왜 네가 이토록 힘들어야 하냐고, 토오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잇세이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게 3개월 차 였다. 


막상 힘들었던 입덧 기간이 지나자 토오루는 그간 입덧으로 인해 먹지 못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해치우기 시작했다. 흡사 걸신들린 사람마냥 말이다. 임신 중 유독 복숭아를 많이 찾아 냉장실 한 칸을 가득 채워 두었던 복숭아는 사흘이면 사라지기 일쑤고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사이 간식 때를 어찌나 칼같이 잘 맞추는지. 입에 뭔가를 물고 있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처럼 빛깔 좋은 입술은 쉴 틈 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왜, 얼마 전에 이와쨩이랑 맛키랑 아카네 보러 놀러 왔잖아.”

“잠깐만. 나 시간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이따 들으면 안 될까?”


벽에 걸린 시계를 통해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실히 체감한 잇세이가 급한 대로 버터 바른 토스트를 입에 문다. 


“하? 내 말은 듣기 싫단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자, 아카네. 다 먹은 접시랑 포크, 숟가락은 아빠 줘야지요.”

“쩝시! 뽀끄! 수까락! 빠빠 쭤야지이요.”

“응응. 줘야지.”


목적 없이 허공을 휘두르던 아카네의 미키 마우스 무늬의 접시, 포크, 숟가락을 조심히 빼들어 싱크대에 옮겨 둔다. 


“잇세이!!”


앙칼진 토오루의 부름은 외면한 채 말이다. 토스트의 절반가량을 한 번에 입에 넣는 바람에 목이 막힌 잇세이가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조그만 팩 우유의 포장을 뜯어 벌컥 벌컥 들이킨다. 


“그래, 그래. 들어줄게. 그때 나 출장 가고 없었잖아. 걔네가 나대신 보러 와준 거 아니었던가?”


한 시름 놨단 얼굴을 한 뒤 넥타이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토오루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흥!”


실컷 토라진 토오루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부풀린 뒤였다. 시간은 없지만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잇세이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잘못은 어디까지나 잇세이의 몫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작게 어깨를 으쓱인 잇세이가 빠르게 토오루의 뒤편으로 돌아간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뽀오얀 빛을 띤 목덜미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다. 셋팅이 안 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티셔츠 아래로 슬금슬금 손이 미끄러진다. 살집이 오동통하게 오른 가슴 골 사이를 지나친다. 


“예뻐 죽겠어 우리 토오루.”

“뭐, 뭐, 뭐하는 거야. 아카네가 다 보고 있잖아. 손 빼!”


두 아빠들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빤히 지켜보던 아카네가 잇세이의 윙크 한 번에 고사리 만 한 손바닥으로 제 눈두덩을 가린다. 역시 아이의 습득력은 남다르다고, 하룻밤 내내 가르친 보람이 있다며 잇세이가 속으로 씩 웃는다. 반면,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잇세이!”


화들짝 놀란 토오루는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안 보인다. 


“토오루의 귀여운 짓은 나만 독점하고 싶으니까.”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제 아빠들의 사랑 표현을 귀로만 감상하던 아카네가 이내 방긋 웃어 버린다. 까르르 터지는 해맑은 웃음소리에 맞춰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잇세이의 손에는 다정함이 한가득 이다. 어느 덧 가슴께를 지나 배꼽 근처에 머물던 손가락은 주위를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그 안에 자리하고 있을 새 생명에게 조심스레 안부 인사를 건넨다. 


“이 쯤…에 있으려나,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는.”

“모모쨩이 언제부터 아가씨로 정해진 거야?”

“뭔가……. 그런 느낌이 나. 아빠의 감.”

“모모쨩 다 들었지? 이제 꼬추 달고 태어나면 잇세이 아빠 얼굴에 먹칠할 수 있는 거야.”

“모모, 토오루 아빠 좀 그만 괴롭혀. 토오루 아빠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거든.”

“애 다 듣는다니까?!”


다만, 이 다정한 손길에 비하면 잇세이의 입과 혀는 배려가 전혀 없다. 버럭 소리치는 토오루의 귓바퀴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고 그 귓전 가까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낮게 읊조리며 혀로 끊임없이 농간하는 탓이었다. 어느 새 목덜미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른 토오루의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진다. 흡사 잇세이에게 순순히 목덜미를 내주는 순결한 어린 양처럼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자기. 이제 화 풀어라, 응?”


마지막으로 오동통한 살점이 부푼 아랫배를 가볍게 문지른 후 뺨에 뽀뽀를 남긴 잇세이가 선언하듯 말한다.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손길과 녹을 것 같이 달콤하던 입술의 감촉이 멀어지자 못내 아쉬웠는지 토오루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몰라. 회사가 그렇게나 좋으면 얼른 가버리던지.”


그런 토오루의 어깨를 잡아 끌어 잇세이가 다시금 입을 맞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정말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 말에 아침 새벽부터 죄인이 되는 건 


“오전에 거래처랑 정말 중요한 미팅 있거든. 얘기는 나중에 들어줄게. 미안.”


결국 토오루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잇세이 곁으로 다가간 토오루는 식탁 의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정장 자켓을 집어 든다. 한창 연애하기 바빴던 고등학교 시절엔 교복이 안 어울린다며 시도 때도 없이 놀리곤 했건만 정작 옷걸이의 주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정장 한 벌 걸쳤을 뿐인데 사회인은 물론 한 회사의 CEO 쯤 되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잇세이 덕에 토오루는 매일 아침, 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며 펄떡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곤 했다. 마지막으로 약간 헝클어진 넥타이를 예쁘게 동여맨 토오루가 넥타이의 끝을 확 잡아당긴다. 얼떨결에 토오루 쪽으로 끌려간 잇세이의 입술 위로 말랑한 감촉이 와 닿는다. 


“……최대한 빨리 와. 끝나자마자 달려 와. 정시 퇴근에서 1초라도 늦어지면 용서 안 해. 회식 잡혔으면 딱 1차만. 2차까지 가는 순간 그 날로 별거 할 줄 알아. 부장인지 사장인지 면전에 욕하고 바로 뛰쳐나와.”


이제는 퇴근조차 자유롭지 못한 잇세이였지만 어째 그의 입에선 미소가 도통 떠나가질 않는다.


“그랬다간 우리 밥줄 끊겨.”

“내가 벌면 돼. 잇세이는 집에서 아카네 보고 있어.”

“홀몸도 아니면서? 됐다. 차라리 내가 공사판을 가고 말지.”

“그러다 잇세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보험금은 그럭저럭 나올 거야.”

“잇세이!”


푸핫, 자신의 농담조에 일일이 진지하게 대꾸하는 토오루가 귀여웠는지 잇세이는 기어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별 걱정도 많다며 작게 웃음 짓곤 아직까지 눈꺼풀 위로 조막 만 한 손바닥을 얹어둔 아카네에게로 발걸음을 돌린다. 딸아이에게 양 갈래 머리를 시켜주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던 잇세이였건만 아쉽게도 아카네는 아직까지 머리카락이 짧아 한 갈래로 묶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뭐, 정수리에 앵두처럼 솟아나 달랑 거리는 머리끈은 그것대로 사랑스러웠지만 말이다. 


“뺘?”


제 손을 거둬내는 잇세이로 인해 까맣던 시야가 밝아지자 아카네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휘둥그레 떠본다. 그런 아카네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잇세이가 행복함으로 가득한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젖살이 둥그렇게 오른 뺨, 볼록하게 튀어 나온 이마, 사과 머리가 달랑이는 정수리까지. 


“갔다 올 게요, 우리 공주님.”


그럴 듯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현관까지 잇세이를 따라 나온 부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배웅한다. 


“빠빠. 빠빠 시져. 시져……. 시져어! 으앙-”


게다가 잇세이가 현관을 나가려 할 때면 그 순한 아카네가 일순 그렁그렁한 눈을 하며 울음보가 터뜨리려 했으니 이 만하면 말 다했다. 그때마다 아카네의 등을 토닥이며 겨우 달랜 토오루가 눈짓으로 잇세이를 재촉한다. 가지 말라고 아등바등 손아귀를 뻗는 제 자식에게서 떨어지는 것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관문은 금세 닫힌다. 뚜벅이던 구둣발은 차츰 멀어져 간다. 아카네를 안아들고 있던 팔은 그녀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인 후 바닥에 내려둔다. 능숙하게 그녀를 달래는 토오루로 인해 제대로 울지도 못한 아카네는 울음 대신 딸꾹질을 히끅거리며 거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장난감 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뒤뚱거리며 어설픈 걸음마를 떼며 온 아빠들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던 시절은 뒤로한 채 이제는 제자리 뛰기는 물론 마음만 먹으면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 아카네가 장난감 자동차에 몸을 싣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이, 토오루는 심란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연다. 온갖 종류의 과일과 야채가 먹기 좋게 손질 되어 냉장고를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토오루가 한 입에 먹기 좋게끔 밤새 잇세이가 손질해둔 것들이었다. 그 중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복숭아에게로 손을 뻗던 토오루였지만 주저하는 마음이 없진 않다. 냉장고를 뒤적이는 손에서 시선을 멀리해본다. 결혼 직전까지만 해도 근육으로 탄탄했던 팔뚝이 살로 탈바꿈 되어 여과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고개를 내려 보면, 한 때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각선미로 유명했던 다리가 유려한 선을 잃고 군살들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아이를 품고 있는 복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냥……먹지 말까.”


불과 수 일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입덧의 후유증과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식욕 탓에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토오루였다. 그런 그가 이토록 먹는 것을 망설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 살쪘냐?’


사건의 발단은 고작해야 나흘 전. 갑작스레 규슈 지방으로 1박 2일 출장 일정이 잡힌 잇세이를 대신해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가 아이를 봐주러 두 사람의 신혼 방에 놀러온 것이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애초에 아카네 돌보기는 토오루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집에 토오루를 놔두고 간다는 죄책감이 없지 않았던 잇세이가 먼저 이와이즈미, 하나마키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입덧으로 한참 고생하던 무렵 두 사람을 재회하는 바람에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기분이 없지 않던 토오루 입장에선 반갑고 또 감사하기도 했다. 


‘이거 봐. 여기 뱃살 늘었잖아.’


감격의 상봉이란 첫 대면에 이와이즈미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임신 중이니까 당연하잖아, 라고 장난으로 되받아치려던 토오루였지만 어느 새 하나마키까지 가담해 살집이 오른 제 팔뚝을 꼬집으며


‘아카네 때는 이만큼까지 살이 오르진 않았던 거 같은데.’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오자 웃어넘기려던 토오루의 낯빛은 보기 좋게 굳어져 갔다. 


‘운동 부족이겠지.’

‘임산부라도 기초 체력은 필요할 걸~?’

‘위험한 시기는 지났다 했으니까 슬슬 운동 좀 하고 살아라, 굼벵카와.’


결국 기분이 팍 상한 토오루로 인해 하루 내내 그의 투정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툐류. 툐류 빠빠!”


제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토오루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의 허벅지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키가 깡총깡총 발을 구르며 자신을 부르고 있으니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을까. 


“응, 아카쨩. 아빠는 왜요? 벌써 배가 고파졌어요? 아니면 기저귀에 쉬야 했어?”


토오루는 무릎을 굽혀 아카네와 눈높이를 맞춘 후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묻는다.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나지 않는 물개 박수만 열심히 치며 치열이 고른 젖니가 다 보이게끔 해맑게 웃기만 한다. 혹시나 기저귀를 갈아야 하나 싶어 기저귀 안쪽을 들춰보지만 어째 깨끗하기만 하다. 그냥 놀아달라는 건가, 맥 빠지는 한숨을 쉰 토오루가 아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가볍게 안아 든다. 잇세이표 특제 복숭아 꿀 절임 또한 잊지 않고 말이다. 


품에 안겨 자꾸만 재롱을 부리는 아카네와 함께 거실 한 가운데에 엉덩이를 붙인다.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켠다. 오전이라 그런지 영화 채널은 광고만 그득하고 드라마나 예능 채널은 전에 몇 번씩이나 봤던 것들뿐이었으며 뉴스는 토오루의 취향이 아니었다. 한참을 채널을 돌리다 결국 리모컨이 멈춰선 곳은 


“아……. 중계하고 있네.”


프로 배구 채널이었다. 


습관적으로 복숭아를 집어 입에 넣는다.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혀를 녹일 만큼의 달달한 뒷맛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턱을 괴어 본다. 맞은 편 벽에 걸린 티브이 바로 옆에 위치한 달력이 미처 잊고 있던 시기를 상기 시킨다. 지금쯤이면 준준 결승인가, 입으로는 짧게 중얼 거리고 눈으로는 코트를 훑어본다. 경기는 4세트의 종반. 오랜 랠리가 길어지자 양 쪽 팀 모두 지친 기색으로 공을 겨우겨우 받아치고 있었다. 그 중 왼쪽 코트를 예의 주시하던 토오루가 눈썹을 팍 찡그린다. 


“세터란 녀석이 저게 뭐야. 토스 자체가 서투네. 저 4번의 최고 도달점은 훨씬 높아 보이는데 토스가 따라가질 못하잖아.”


프로 배구 계에서 준준 결승 즈음 되면 서로 맞붙게 되는 팀은 대체로 익숙한 얼굴들이기에, 경기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인 영 어렵진 않았다. 하물며 프로 계에 입문한 직후부터 장래를 촉망받고 순식간에 모두의 선망 대상이 되었던 오이카와 토오루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프로 쪽에선 못 보던 얼굴……. 뉴 페이스인가? 아 싫다~ 정말.”


한창 현역으로 뛰고 있을 때만 해도 그는 무척이나 예민하던 사람이었다. 팀의 구성원 변화, 시즌마다 바뀌는 경기장 체크, 콤비를 맞추던 스파이커의 컨디션 체크까지 꼼꼼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시합 전날엔 상대 팀 경기 녹화 비디오들을 주의 깊게 살피느라 꼬박 밤을 새는 버릇마저 있었다. 팀의 숙련도, 스파이커가 선호하는 코스, 세터의 버릇, 서브의 다양성 등 비디오 한 편만 보면 그의 머릿속은 잘 짜인 그물망마냥 퍼져 나가며 상대 팀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파악하곤 했다. 애초에 배구에 재능이 있었던 데다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노력마저 아끼지 않는 수재였으니 감독들 입장에선 그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 날 뿐이었다. 


“그것도 몇 년 전 얘기지.”


스스로를 비웃듯 코웃음을 친다. 


원래 예정대로 라면 토오루의 프로 팀 복귀는 약 1년 후였다. 그 무렵엔 아카네가 세 살이나 되었으니 그녀를 보육원 혹은 어린이 집에 맡길 심산이었다. 비록 아카네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들고 저와 잇세이의 맞벌이로 인해 아카네가 외로움을 많이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토오루는 어찌 됐든 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배구공을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이다. 상대 팀의 기세를 죽일 초강력 서브를 날리고, 자신의 토스를 통해 스파이커에게 블로킹을 무너뜨리게끔 하고, 여섯이서 함께 난관을 돌파하고, 승리의 기쁨을 제 손으로 거머쥐고, 


“툐류 빠빠!”


자신만의 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카네의 부름에 토오루가 천천히 눈을 내린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다. 비치는 것이 있었다. 아이의 동그란 눈 안엔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관리 되지 않은 머리칼, 살집이 올라 희미해진 이목구비, 볼록하게 나온 아랫배와 오동통한 팔뚝까지. 


“빠빠 뽀뽀.”


토오루는 굳은 안색을 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신혼 초기 무채색으로 가득했던 집안은 아카네의 출산과 더불어 알록달록한 벽지로 뒤바뀌어 있었다. 흰 색으로 깔끔하게 도배 되었던 집안의 문이란 문들은 싸구려 캐릭터가 수놓아진 구구단 전지, 동물 이름으로 가득한 포스터로 도배 된 지 오래고, 본디 세탁 용품 외엔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던 베란다는 아카네가 좋아하는 장난감 집과 장난감 상자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집안 구석구석엔 크레파스나 색연필, 심지어는 미처 지우지 못한 유성 펜 낙서들이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욕실 앞을 굴러다니는 장난감 블록들 옆엔 유아용 변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후 20개월부턴 조금씩 배변 유도를 시도해보고 기저귀를 떼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모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아까네 뽀뽀 해주세요.”


문득 토오루는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뜨끈하면서도 울컥한 기운이 목구멍 너머로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왈칵 하고 터져 나올 울음을 겨우겨우 삼켜낸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코끝을 손등으로 쓸고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최대한 물어뜯어 본다. 


“빠빠…?”


그러나, 미처 막지 못한 물줄기 하나가 있었다. 푸석해진 뺨을 타고 또르륵 굴러 떨어진다. 아카네가 볼 새라 재빨리 눈물을 거둬보지만 그 새를 못 참고 불거져 버린 흰자위는 채 감출 틈이 없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그것이 무적의 주문이라도 된 마냥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가까스로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응.”


어딘지 모르게 서글픔이 느껴지는 어조.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아카네였지만 그녀라고, 그녀이기에, 토오루의 눈물을 보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불안함에 떠는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에 젖을 것처럼 물 기운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가 느꼈던 슬픔이 그대로 아카네에게 옮겨진 것 마냥 말이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뒤늦은 후회를 뼈저리게 체감한 토오루가 조심스레 말문을 꺼내 본다. 


“토오루 아빠는 여기 있어요.”

“…….”

“쭉, 우리 공주님 옆에 있을 거예요.”

“…….”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는 아카네를 기어코 거세게 끌어안아 버린다. 


“미안.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나쁜 생각해서 미안해.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너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리거나 하지 않아.”


그제야 아카네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터뜨린다. 정작 제일 울고 싶은 당사자를 대신해 집안이 떠나가라 쉴 새 없이 서러움을 토악질한다. 그 슬픔에 동화 되었는지 토오루의 눈가가 다시금 물결로 일렁인다. 


“아카네를……. 너를 만나게 된 걸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너는 내 행복이고 내 기쁨이고 내 전부인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너인데. 그랬는데. 그게 맞는데…….”


결국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작고 동그란, 그러나 토오루에게 있어선 너무나 큰 아카네의 뒤통수를, 토오루는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그간 뭔지 모르게 서러웠던 감정, 서러운 감정, 서러울 감정들을 한데 끌어 모아 폭발시키며 한참을 오열했다. 사방에 널브러진 오색빛깔의 장난감들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복숭아 꿀 절임과 알록달록한 벽지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두 사람 분의 곡소리는 쉽게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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