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님 연성기반입니다.




W. 멜






눈을 내리 깔고 턱을 한 손으로 비스듬히 괸 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노트 위에 그려진 줄과 줄 사이의 공백만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이와이즈미는 검지와 엄지로 펜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종이와 맞닿고 있어야할 검은 펜은 그의 손가락위에서 시계 태엽이 돌아가듯, 빙그르르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웅웅거리며 그의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선생의 목소리는 아예 무시하기로 결심한 건지, 그는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저 펜만을 돌리며 새하얀 백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죄없는 펜을 돌려대던 그는 드디어 무언가를 쓸 마음이 났는지, 펜 뚜껑을 쥐었다. 달칵, 조심스러우면서도 조용한 움직임이 곧이어 1mm의 여백으로 이어진다. 종이와 펜 사이의 여백, 약 1mm.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 살그머니 제 아래 입술을 깨물고는, 이내 결심했는지 손가락에 힘을 주던 찰나였다.

<난 너에게 너무 쉬워서, 필요할때만 찾아졌고.

나는 네가 절실해서, 찾아질 때마다 내 마음을 다 걸었다.>

그는 제 손가락이 아닌,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서 뭔가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질 것만 같았기에. 어젯밤부터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저 두 문장으로 인해, 이와이즈미는 밤잠까지 설쳐가던 차였다. 인터하이를 코 앞에 두고 밤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하던 터라, 쓸데 없는 피로를 남기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일찍이 잠을 청해오던 그가, 잠 못 이룬 이유.
심심풀이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자장가를 청하듯 습관처럼 떠올리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오이카와의 웃음이, 유독 어제만큼은 제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아 잠 못이루고 있던 참이었다. 이불 속에서 손만 내밀어 더듬거리다 작고 단단한 물체를 잡아, 그 안으로 끌어 당겼다. 습관처럼 메세지함을 열었다.

[이제 집이야!]
[미안, 답장 늦었네. 막 씻고 나왔거든~ 이와쨩은?]
[그렇구나아. 피곤해 죽겠다아아... 나 먼저 잘래! 잘 자, 이와쨩.]

똑같은 말, 똑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보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쓸데 없는 호기심이 화를 초래한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제 머릿속을 지배해버린 그것은 그로 하여금 검색창까지 열어 버리게 만들었다. 막상 이런 걸 검색해자니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리고 낯간지럽고 쑥쓰러워졌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 두 눈 딱 감고 해보자, 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짝사랑. 참, 마음에 안드는 단어였다. 그 세 글자가 도대체 뭐라고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짝사랑을 앓는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짝사랑에 대한 검색 결과는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 잡은 것은 어느 글귀였다.

<난 너에게 너무 쉬워서, 필요할때만 찾아졌고.

나는 네가 절실해서, 찾아질 때마다 내 마음을 다 걸었다.>

짤막한 두 문장. 그 단조로운 문장들은 시퍼런 날이 서린 화살촉이 되어 이와이즈미의 가슴 깊숙한 곳을 후벼파고, 도려내고, 박혀 들어갔다. 작게 빛나고 있는 화면 속에서 눈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한채, 이와이즈미는 그것들을 눈에 새기고 머리에 새기고 가슴에 새기다, 결국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버렸다. 그 덕분에 노곤함을 얼굴에 한껏 묻히고 아침 연습을 나갔고, 오이카와의 잔소리를 들었고, 핀잔을 들었고, 그 목소리를 들었고, 뾰로통해져버린 그 얼굴을 보았다.

이 정도면 중증이지.

이와이즈미는 실없는 웃음을 흘겨 보내다, 펜을 쥔 손에 다시금 힘을 실었다. 及川. 획 하나하나에 잔뜩 힘을 주며 간신히 적어낸 글자였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는게 몹시 낯설어 졌다. '토오루' 라는 이름이, '徹' 라는 한자가 무척 불편해졌고, 생소해지고, 심지어 거리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한 번 다름을 깨달았을 때, 토오루라는 어감이 생소하게 느껴졌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짝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지독한 폭풍우 한가운데에 알몸으로 놓여져 있음을 자각했다. 폭풍우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지레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걸 자각하게 된 순간만큼은 지금까지도 눈 앞에 생생했다.

'좋아해.'

초등학생 티를 간신히 벗어내고 중학교 교복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단어 하나는 멍하니 있던 그 하나만을 오롯이 표적으로 삼은 채,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겨왔다.

'하루도 쉬지 않고 불러낸다? 꼭 혼자 와달래. 귀찮은 거 꾹 참고 가면 새빨개진 얼굴로 좋아한다 고백하는 거 있지? 사귀어 달라고 조르고 매달리고... 어쩜 이렇게, 매번 똑같을까. 여자애들이 고백하는 건 다 지겹고, 따분하고.. 안 그래, 이와쨩?'

그때, 이와이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그따위 말 지껄이는 네 놈이 더 짜증난다, 망할카와ㅡ, 라며 한껏 인상을 찡그렸어야할 이와이즈미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서툰 제 감정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이었다. 좋아해. 입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소중하디 소중한 그 단어가 닳아 없어질까봐, 목소리조차 내보지 못했다. 말못하는 벙어리마냥 입모양으로만 작게 오물거리며 좋아한단 말을 속으로만 되뇌이고, 곱씹고, 삼켜 냈다.
멈출 기세 없이 퍼붓는 비바람 속을 꿋꿋이 견뎌내야하는 하루가 저물어갈 때 즈음이면,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했다. 오늘까지만 좋아할 것이다. 내일부터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을 끝으로 이 진절너리나는 마음을 접고 말 것이다. 제 마음속을 휘젓고 있는 이 폭풍을, 어떤 방법을 써서든 멈춰 낼 것이다. 굳게 다짐하며 눈을 붙이고 새벽같이 일어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제 마음을 보며 용기를 내고 양치를 하고 아침 밥을 꾸역꾸역 먹고 집 밖을 나서면, 그의 결심을 비웃어 내리듯, 얼음장마냥 꽁꽁 얼어붙은 제 마음을 비웃어 내리듯, 환히 웃으며 제게 인사를 건네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셀 수 없는 결심을 하면 셀 수 없는 무너짐이 있었다. 좋아하는 야구팀의 응원가를 흥얼거리던 그의 콧노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짝다리를 짚으면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사사로운 습관, 사진만 찍었다하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귀엽게 브이를 그리는 모습, 이름 모를 여학생의 고백에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투, 배구공에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듯 얇게 감겨 있는 눈꺼풀, 온전히 저만을 향한 해맑은 미소를 건네주던 그 얼굴. 눈만 감았다하면 새까만 시야 너머로 드넓게 펼쳐지는 그의 세세한 손짓, 몸놀림, 목소리, 말투, 이목구비.
짝사랑과 사랑은 한 글자 차이에 불과했지만, 의미하는 바는 하늘과 땅차이였기에, 좋아한다는 말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보는 것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는 것도, 토오루라는 이름을 손가락끝으로 써내리는 것도, 이와이즈미는 제 마음껏 해보지 못했다. 행여나 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누군가 크게 저를 다그칠 것만 같아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 마음을 굳게 잠그게 된 계기가 이것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들에게 사랑받고 제 기분에 따라 수십번 수백번 옆자리를 갈아치우던 오이카와에게 진심따위 일말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와이즈미는 만약이라는 실날같은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가느다란 희망 한줄기가 끝없는 절망으로 바뀐 건, 두 사람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눈치 못채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한 사람에게 머무르지 못하고 목적 없이 떠다니는 부유물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던 오이카와에게 특별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그의 목소리에서부터 기쁨이 흘러 넘쳤고, 구름 위를 걸어 다니듯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었다. 하지만, 설렘으로 환히 빛나는 그의 시선 끝자락이 향하고 있는 건 절대 자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에, 이와이즈미는 제 입에 굳건한 자물쇠를 채우고, 제 마음에 두터운 성벽을 쌓아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하늘마저 빗줄기를 흘려 보내는 날이면 철옹성같은 성벽을 비집고 새어나오려는 좋아함이란 감정이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그런 날이 돌아오면, 입장이고 처지고 배려고 나발이고 모든 걸 토로하고 싶었다. 솔직해지고 싶었다.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널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토오루를 좋아한다고, 아주 오랫동안, 쭉, 좋아해 왔다고. 네가 우산을 미처 챙겨오지 못한 날, 한 우산 아래에서 혹시라도 너와 어깨가 부딪힐까봐 작은 틈을 둬야하는 게 왜 나 혼자여야만 할까. 혹시라도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릴까봐, 한 번 감기에 걸리면 며칠을 끙끙 앓고 쉽사리 낫질 않았으니까, 너 몰래 우산을 기울여 주던 나를 신경써본 적은 있을까. 영화표라도 생기는 날에는 너에게 말을 걸어 볼까 이걸 핑계로 데이트같은 걸 할 수 있진 않을까 한껏 부푼 마음으로 널 찾아가면 미안, 이라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널, 내가 어떤 심정으로 바라봐야 했는지 알고는 있을까. 너로 인해 갈 곳을 잃어버린 종이 조각들을 주머니 깊숙이 처박아 둔채 잊고 지내다, 문득 손끝에 닿아온 그것들을 갈갈이 찢고 잔뜩 구기고 더이상 꼴보기 싫어져서 휴지통에 처넣었던 걸, 너는 알긴 알까.

'나, 이와쨩이 제일 소중해! 어... 엄마랑 아빠가 첫번째 두번째로 소중하고, 지금 사귀고 있는 코하네쨩이 세번째로 소중... 아, 그저께 헤어졌지. 그럼 이와쨩은 세번째로 소중한 사람 시켜줄게! 알았지?'

가끔 농담삼아 던진 그 말들이, 내 진심을 얼마나 조각조각내고 뭉개뜨리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지 너는 알고는 있을까. 소꿉 친구라는 이유로든,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든, 어떤 형태로든 내가 네 옆에 남고 싶었다는 걸 너는 알고는 있을까. 누군가와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고 섭섭해하고 슬퍼하고 잊지 못하고. 절친한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네 곁을 서성이며 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절대 궁금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안 해줬으면 하는 이야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 놓던 너는, 단 한번이라도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려 했던 적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내 감정을, 내 마음을, 내 진심을, 단 한번이라도 궁금해한 적이 있긴 있었을까. 날 생각하느라 눈을 감는 시간이 늦어진 적이 있긴 있었을까.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에, 이와이즈미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칠판에 쓰여진 흰 색 글자들이 지렁이마냥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걔 중에는 익숙한 글자가 보이기도 했다.

'及川 徹'

피곤해서 헛게 보이는 건가, 그게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건가ㅡ, 졸음이 밀려 들어오는 눈꺼풀을 두 손으로 비비던 이와이즈미의 공책에는 힘주어 적힌 오이카와라는 단어만이 있었을 뿐, 토오루라는 글자는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늘어지는 하품을 뱉어내며 기지개를 켜던 이와이즈미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교실 뒷문을 갑작스레 열어 젖히고 뛰쳐들어와 예고 하나 없이 저를 뒤에서 끌어 안아버린 오이카와를 말이다. 그로 인해 입술이 굳어 말은 커녕 그 어떤 모션조차 취할 수 없게 된 이와이즈미에게 오이카와는 가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 사귀기로.. 사귀기로 했어."

굳건할 줄 알았던 철옹성을 단 번에 무너뜨리는,

"내가 가장...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게 됐어. 이거 꿈 아니지? 이와쨩, 나 어떡하지?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맛층이랑 이렇게... 이렇게 이뤄질 줄은 진짜... 상상도 못했는데.. 나 너무 좋아서 눈물이 막.. 흡, 이제... 이제 잇세이라고 맘껏 부를 수 있는거야. 나 혼자 아파할 필요 없는 거야. 아아, 진짜... 꿈만 같아."

너의 잔인한 고백에,
쏟아지고
갈라지고
무너지고
공허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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