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하님 캘리그라피입니다.

*<팔월>시리즈는 ‘이와오이’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입니다. 앞뒤 내용을 몰라도 글을 읽는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전력 주제: 약속





W. 멜





“결혼해줘 하지메.”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왜 그 때, 오이카와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 넘겼는지에 대해. 





#





PSP 게임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잠깐 했던 게임이었으니 사실은 무척 오랜만에 잡아 보는 게임기였다. 그래픽도, 게임 방식도 어딘가 촌스럽지만 어렴풋하게 스테이지별 보상이 기억났기에 추억을 되살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바닥에 베개를 깔고 손을 닿는 곳엔 감자 칩이 있었으며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막상 일상에서 배구를 제외하니, 꼭 바람 빠진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24시간이 48시간으로 늘어나 버린 듯한 지겨운 감각.

욕실 쪽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그쳤다. 평소에도 샤워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녀석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을 떠는 것 같았다. 슬쩍 시계를 보니 30분은 족히 넘은 듯했다. 바닥에 흐트러진 감자칩 몇 개를 집었다. 입에 넣었다. 짭짜름한 맛이었다. 


“아, 죽었잖아.”


GAME OVER 란 문구가 울적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증기의 열기가 여기까지 풍겨왔다. 구태여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괜히 상대해 봤자 피곤할 뿐이다. 그래도, 또 습관처럼 옷자락 하나 안 걸치고 나왔을 녀석을 위해


“야. 속옷은 입고 나와라.”


한 마디 거들어 줬다.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기계적으로 ‘예’를 눌렀다. 이차원의 못생긴 캐릭터가 또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뭔가…조용했다. 


“옷은 다 입었어?”


어쭈구리. 오늘은 다 쌩까버리겠다 이거지.

이번 판만 끝내면 꿀밤이라도 쥐어 박아 줄까 생각했던 나는. 오이카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을 듣자마자


“결혼해줘 하지메.”


말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점프 키를 눌러야 했다. 점프를 해서 함정처럼 깊게 파인 구덩이를 넘어 서야 했다. 기껏 다시 시작한 게임이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네모난 화면 안에선 금세 ‘GAME OVER’란 문구가 다시 떠올랐고, 나는 멍한 눈으로 그것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랑 결혼해줘.”


내 귀가 잘못 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고 있었다. 녀석은 옷을 반듯하게 입고 있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 위로 수건을 대충 얹어 둔 채, 집에서만 입는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상태 그대로. 내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툭, 소리가 났다. 손에 쥐고 있던 게임기가 바닥으로 추락한 소리였다. 천천히 오이카와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처럼, 이번 역시도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감았다, 떴다. 사고 회전이 서너 발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엔 또 무슨 농담이냐.”


피식- 김빠진 웃음소리도 냈다. 망할 입이 말이다. 


“그거지? 어릴 때 장난처럼 말했던 거.

“…….

결혼을 약속 하자느니, 평생 같이 하자느니, 네 놈 신랑이 되어 달라느니.

“…….”

그때 같은 장난의 연장선이라면 좀 봐줘라. 우리 나이가 몇 인데.”

“…….”

“아씨……. 게임 재미없어 졌다. 자꾸 지기만 하고.”

“…….”

“나 간다. 나중에 보자.”


입은 멀쩡하게 떠들고 있었으면서 눈은 녀석을 마주보지 못했다. 허겁지겁 엎드린 몸을 일으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은 과장했다 싶을 만큼 팔을 크게 저으며 걸었고 녀석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가 엎드려 누워있던 자리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샤워하고 옷도 똑바로 입고, 대꾸도 안 하고, 바보처럼 베실베실 웃지도 않고,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대뜸 가버린다는 날 잡지도 않고. 

오이카와는 거짓말을 더럽게 못 했다. 거짓말만 했다 하면 말을 더듬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뺨을 검지로 문지르다 이내 시선까지 피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식은땀은 둘째치고 말도 더듬지 않았으며 양 팔은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내 눈을 올곧게, 흡사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거짓말이나 농담 따먹기를 한 게 아니라면,


“내가……뭔가 잘못 했나?” 


짚이는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결정된 사항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오이카와에게 털어 놓은 기억이 없었다. 언젠가는 말할 생각이었지만.

오늘을 일찍 들어가 보겠다며 아주머님께 대충 둘러대고 나왔다. 현관을 지나 대문을 나서니 불이 환히 켜져 있는 오이카와 방이 보였다. 라인이라도 남겨둘까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이내 다시 넣었다.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배구 국가 대표 면접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중요한 시점에 말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지도 모르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나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가서 배구공이라도 만질까. 아님 이번 기회에 영어나 독일어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해볼까. 라는 둥의 사사로운 걱정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 날 오이카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어학 공부를 하는 건 어쩐지 적성에 안 맞고 며칠 내내 배구공은커녕 아령 한 번 잡지 못해 전신에 좀이 쑤시던 차였다. 결국 새벽같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같이 챙기던 배구화와 운동복이. 겨우 며칠 사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물질이 씹히는 기분이랄까. 

생경한 감각도 잠시, 나는 금방 그것들을 우겨 넣은 크로스백을 들쳐맨 채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찹찹한 새벽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키며 조깅하듯 가볍게 발걸음을 디뎠다. 익숙한 길, 익숙한 공기, 익숙한 풍경. 겨울 방학이 한창이라 거리가 한산했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때’와 같았다. 익숙한 갈래 길 또한 곧장 이어졌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오이카와네, 왼쪽으로 꺾으면 학교. 어느 쪽으로 갈 지에 대한 고민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현 3학년들 중 국대를 목표로 하는 오이카와 말고는 이 새벽녘에 아무도 학교로 향하지 않겠지만, 워낙에 아침잠이 많은 녀석이니. 오랜만에 머리끝까지 덮어 쓰고 있을 이불을 힘껏 걷어차 줄 심산이었다. 


“어머, 하지메구나. 오랜만이네.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토오루라면 벌써 나갔거든.”


라는 아주머니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알겠다고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못 본 새에 부지런해졌나 싶다가도 이게 나 없다고 마구잡이로 연습량을 늘렸나 싶어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가벼운 조깅에 가까운 발걸음이었다면 이번엔 전력 질주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냥 화가 났을 뿐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하늘이 노오랗게 보이고 머리는 산소 부족이라며 시끄러울만치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는데. 허벅지가 멈추질 않았다. 발이 멈추질 않았다. 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것도 일조하긴 했다. 오버 워크로 쓰러져 버리는 오이카와 따윈 상상도 하기 싫었으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배구화와 체육관 바닥이 미끌리는 소리로 가득한 체육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여, 이와이즈미. 역시 왔구나.”

“간만이다? 애들 금방 스트레칭 끝났다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몸 풀어라.”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였다. 기대도 안 한 녀석들이 코트 구석에서 나를 반기고 있으니 어쩐지…


“얘 봐라? 오랜만에 우리 얼굴 본 게 그렇게나 기뻤냐? 아주 펑펑 울지 그래.”

“누, 누가 운다고-”

“어쭈~ 눈 빨개진 거 같은데~”

“아, 니들이랑 말 안 해. 은퇴하고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들이 말이야.”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린데? 소식 다 들었다.”


바쁘게 배구화 끈을 묶고 있던 손이 멈췄다. 


“너. 해외 팀에서 스카웃 나왔다며?”


한숨이 나왔다.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긴. 당연히 코치 한테서지.”

“……아 진짜.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타일렀는데.”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어 매고 면티로 갈아입고 난 후에야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에게 정신 팔린 나머지 잊고 있던 주변 환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헀다. 쿠니미, 킨다이치, 와타리, 쿄타니, 야하…바. 어라.


“오이카와는?”


체육관 전경을 빠르게 훑어 내리며 오이카와의 이름을 꺼내자 하나마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오이카와? 걔를 왜 여기서 찾냐?”

“왜긴……. 국대 면접 내일부터 아니었어? 체력 테스트 준비해야 할 거 아냐.”

“국대 선발 일정은 잘 모르겠지만……. 나랑 마츠카와랑 그저께부터인가 연습 나왔는데 오이카와는 코빼기도 안 보였어.”


시야가 흔들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척추에서부터 흘러 내렸다. 오이카와에 관한 안 좋은 촉은 틀린 기억이 없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체육관 구석구석을 훑고 있으니 누군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걔가 괜히 오이카와냐?”


마츠카와였다.


“우리 중에서 누구보다 배구를 사랑하는 놈이 그 녀석이잖냐. 분명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연습하고 있겠지. 센다이시 체육관도 있고 공원이나 야외 운동장도 있으니까.”


알고 있었다. 3학년이 정식으로 은퇴하면 구태여 이 체육관에서 연습 해야 할 의무가 없어진다. 어디서든 연습을 강행할 수 있었고 연습 시간 또한 자율이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결혼해줘 하지메.’


불길한 예감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랑 결혼해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녀석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고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마츠카와를 돌아 봤다. 


“……감독님 어디 계셔.”


‘GAME OVER’ 란 게임기의 음성이 귓전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





달렸다.


‘한 발 늦었구나, 이와이즈미.’


앞으로 평생을 달려갈 거리를 오늘 하루 동안 달리는 듯 했다.


‘바로 얼마전에, 오이카와가……국가 대표 자리를 포기했다. 포기하고 싶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더구나.’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버린 걸까. 


‘너도 알다시피 오이카와는 배구에 뛰어난 센스가 있었음에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제 센스를 갈고 닦는, 끊임없이 노력할 줄 아는 탁월한 수재였으니까. 비록 춘고에서 치러졌던 카라스노와의 경기는 패배로 끝났지만, 그 때의 오이카와는……. 그래. 마치 갓 피어난 꽃이었어. 이제 막 피어난 수려한 꽃 한 송이.’


부실에 처박혀 있나 싶어 문손잡이를 돌리면 굳건히 잠긴 문은 도통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 바로 옆에 달린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나는 그 때의 오이카와를 잊지 못했고 오이카와 자신 역시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 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나는……. 갑자기 배구를 포기하겠단 선언을 해버린 오이카와에게 당황하고 말았단다.’


아무도 없었다. 


‘눈빛이 죽어 있었어. 꼭……. 사자(死者)가 입만 뻥긋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녀석을 말릴 틈도 없었어. 겨우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로 더 이상 배구를 못 하겠단 오이카와를……. 차마 억지로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 이유 역시 알 길이 없었고.’


교실로 향했나 싶어 발길을 서둘렀다. 산처럼 쌓인 계단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보다 이와이즈미. 독일 팀에서 들어온 스카웃 제의에 대해선 결심이 섰나?’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허벅지에 바위가 내리 앉는 감각이었다. 


‘기한은 내일까지니 되도록 빨리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전에도 말했듯이 어학 쪽은 현지에서 어학원을 중계 받을 수 있다 하니 가기로 결정했으면 급한 짐만 꾸려서 바로 출국할 수 있게 하고.’


교실에도 없었다. 녀석의 교실도, 내 교실도. 텅 빈 책상과 텅 빈 의자만이 반겨주고 있었다. 


‘널 스카웃한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고? 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왜 그 쪽 팀에서 오이카와가 아닌 널 택했냐에 대한 거겠지.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건 카라스노와 있던 시합 직후. 역으로 그 의도를 추측해보자면……. 뛰어난 세터보단 강렬한 인상의 스파이커를 필요로 했단 뜻이 되겠군. 경기의 승패를 떠나서 각 팀 개개인의 역량을 파악한 뒤 프로 팀이 스카웃하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까.’


“이……망할카와! 어디로 증발한 거야!!”


‘그러고보니……. 그 날 교무실에서 너와 스카웃 건에 대해 상담하고 널 보내고 난 뒤 곧장 오이카와가 들어 오긴 했지. 아마…국가 대표 준비 서류나 추천서 얘기를 하려고 불렀던 것 같은데.’


도서관, 버스 정류장, 자주 가는 빵집, 좋아하는 카페. 망할. 이 녀석이 갈 만한 데가 또 어디 있더라. 


‘이와이즈미. 너의 해외 스카웃 건. 오이카와한테도 제대로 설명했겠지?’


배구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오이카와가 옆에 있어서, 오이카와가 토스를 올려 주니까. 그 공만을 칠 생각이었다. 춘고 시합을 패배로 끝낸 이후 나는 녀석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는 내 자랑스런 파트너이자, 누구보다 뛰어난 세터니까. 앞으로 팀이 갈라 진다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맞붙으면 꺾어 버릴 테다.’


팀이 갈라진다, 라니. 대체 무슨 배짱으로 말했는지. 애초부터 오이카와가 세터가 아니면 스파이크 칠 마음도 없었으면서. 녀석과 내가 가야 할 길이 다르단 것을 그때부터 어렴풋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녀석은 배구가 주가 되는 길을, 나는 배구가 주가 아닌 길을. 배구를 제외한 오이카와는 추호도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배구를 제외한 나는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한 품 정도 큰 아버지의 정장을 입은 채 발벗고 뛰어 다니며 취업을 준비하는 내 모습이나, 갑갑한 넥타이를 끌러 낸 채 서류 더미 속에서 파묻혀 밤이 늦도록 일에 시달리는 내 모습이나 체육 교사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배구공을 품에 낀 내 모습이나 배구 동호회에서 우연처럼 만난 마츠카와, 하나마키와 함께 오랜만에 땀 흘리며 친선 경기를 뛰다 맥주 한 잔을 걸치는 내 모습이나. 애시 당초 스포츠 추천을 써가면서 까지 대학을 갈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나날이 배구에 몰입해 막 피어난 꽃 같았던 오이카와가 성숙해지는 걸 곁에서 바라보는 걸로도 충분하다며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는-


‘그보다 이와이즈미. 독일 팀에서 들어온 스카웃 제의에 대해선 결심이 섰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배구를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오이카와가 국가 대표가 된다 하더라도, 같이 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나날이 멀어져 가고 있음에도, 하물며 팀이 갈라선다 하더라도, 녀석과 배구를 하고 싶단 마음이 간절했나보다. 그렇기에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망할 오이카와!!!”


너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센다이시 체육관은 시끌시끌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시에서 열어 주는 배구 교실 탓이었다. 내 허벅지만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이와……쨩?”


오이카와가 있었다. 

이마를 타고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거칠게 닦아낸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배구 교실인지 뭔지는 관계없었다. 중요한 건 내 눈앞에 오이카와 있단 사실이었고, 녀석은 국대 준비를 나몰라라 한 채 여기에 있었고, 아까부터 불나도록 연락했던 내 전화란 전화는 죄다 씹어 먹었고, 멍청한 얼굴로 저기 있었고, 저기에…… 있었다. 

거칠어진 호흡과 머리끝까지 뻗쳐 오른 홧병 탓에 코에서 저절로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멍청하게 선 채 입만 벙긋거리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무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보자하니까 저게 진짜-


“어이. 어딜 토끼려고.”


다행히 오이카와는 바로 도망치진 않았다. 그 자리에 발바닥을 본드칠한  사람마냥 주춤주춤 탓에 곧장 붙잡을 수 있었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

“감독한테 다 들었어. 뭐? 국대를 포기해? 배구를 못 하겠다고? 나랑 지금 장난 쳐?”

“…….”

“너가 배구를 안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해? 그리고. 배구 못 하겠단 인간이 배구 교실엔 왜 있어. 니가 들고 있는 배구공은 뭔데!

…….”

“오이카와…. 니가 아주 겁대가릴 말아 먹었구나. 내 연락은 죽어도 안 받고 대꾸도 안 하고 내 말은 다 씹어 드시겠다?

…….”

“말해. 뭐든 말해 봐. 입이 뚫렸으면 헛소리든 변명이든 뭐든 좋으니까. 내 말에 대답 좀 해보라고!!


녀석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고 있었다. 며칠 전이랑은 달랐다. 결혼 같은 말도 안되는 소릴 들어도 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상관이야?”


그런데도.


“내가 국대를 포기하든 말든. 배구를 그만두든 말든. 그게 이와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어이.”

“관계없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냐? 시비 걸어? 싸우자고?”

“그러는 이와쨩이야말로!!”


왜. 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을 얼굴을 하고 있냐고, 이 망할카와.


“해외 팀에서 스카웃 들어 왔다며?

“…….”

잘 됐네! 이와쨩은 졸업하면 더 이상 배구 안 할 것 같았는데. 정말 잘 됐어. 무려 해외에서. 그 머나먼 곳에서도 배구 할 수 있게 돼서.”

“너……. 겨우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냐? 내가 해외 팀에서 스카웃 제의 받아서?”

“겨우? ‘겨우’라고 하는 거야, 지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치던 오이카와는. 내가 잠시 힘을 뺀 사이 순식간에 붙잡힌 멱살을 풀어냈다. 


“니가 아닌 내가 스카웃 제의를 받아서 그래? 어? 그럼 너 줄게. 너 해! 니가 다 해!! 니가 국가 대표를 하든 해외 팀에 가든 나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너는 제발-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순간 체육관 내를 쩌렁쩌렁 울린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나는 미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가 국대를 하든 해외를 가든 상관없다고? 어떻게 그래? 어떻게…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냐고!!”


내 손을 뿌리쳐 낸 녀석의 표정은 잔뜩 구겨지다 못해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눈시울을 시작으로 빨개진 코끝과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나는…나는……다르단 말이야…….

“…….”

이와쨩이, 이와쨩이 해외로 가버린다니까. 그럼 영영 못 보니까…이와쨩이 옆에 있길 바랐으니까. 설사 이와쨩이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렇더라도 내 옆에 있길 원했으니까! 이와쨩 없는 나 따윈. 하지메가 없는 나 따윈…….”


나지막한 울음으로 변해갔다. 


“싫어…. 싫다고……. 상상도 하기 싫단 말이야.”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제 눈물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양 손 안에 눈물 번진 얼굴을 묻었고 


 “가지마. 가지마아, 하지메……. 옆에 있어줘. 나, 나, 나 뭐든 할게.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메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게. 배구 관두고 하지메의 신부든 뭐든 될 테니까……. 따라 갈 수 있게 해줘. 여, 옆에 있을 수 있게 해줘. 흡, 부탁이니까…!”


말문이 목구멍 아래에서 턱 막혀버린 나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디뎌 


“……바보냐.”


거칠게 들썩거리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서툴게 안아 주었다. 


“나는……. 네가 계속 배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하지메가. 하지메가 옆에 없으면 다 소용 없단 말이야. 배구를 포기함으로써 하지메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나는 배구 그만 할 수 있어. 언제까지고…언제까지고 하지메 옆에 있을 거란 말이야…!”

“멍청아. 그래서 다짜고짜 결혼해달란 소릴 한 거야?”


품 안에서 얌전히 훌쩍 거리기만 하는가 싶더니 대뜸 고개를 든다. 아아, 엉망진창인 얼굴. 눈물 콧물이 다 번져 있으니 못난이가 따로 없다. 


“그 방법밖엔…생각이 안 나서…….”

“얼씨구. 그럼 내가 오냐 하고 넙죽 받아 줄 거라 생각 했냐?”

“그치만……. 그치만!”

“백 년은 이르다, 임마.”


온갖 못생김으로 치장한 오이카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젠 오이카와 전매 특표 ‘못 생긴 이와쨩’이란 별칭은 오히려 오이카와에게 어울릴 듯싶었다. 벌써 팅팅 부르터 흡사 붕어 눈깔 같은 녀석의 눈두덩이를 쓸어내렸다. 짠 냄새가 났다.


“국가 대표 타이틀부터 따고 프로포즈해라. 그럼 생각 좀 해볼 테니까.”

“너무, 너무해…….”

“아, 엄-청 못 생겼다.”

“너무해!!!”

“정 못 믿겠으면 거울이라도 보여주랴? 너 지금 엄청나게 엉망진창이다.”

“안 돼!!”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녀석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어, 좌우로 넓게 뻗었고 


“아아악!! 아프잖아, 이와쨩!!!”


짝-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오이카와의 양 뺨을 세게 내리쳤다. 


“해외? 그거 아직 결정 난 거 아니거든? 누구 마음대로 판단해, 이 멍청카와.”

“진심으로 때렸다고……. 아파…엄청 아, 아…!”

“안 간다, 안 가. 너 하는 꼬라지 보고 있으면 한 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겨우 며칠 안 봤다고 이 모양 이 꼴이니 마음 편히 놀러나 갈 수나 있을라나 몰라.”

“하지메……!”

“아주 평-생 감시해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라.”

“으아앙-! 나, 나…! 하지메가 제일 좋아! 제일 좋아해, 하지메-”

“아아 달라붙지 마라, 어? 그 지저분한 콧물부터 어떻게 하……야! 이 망할 오이카와!!”


엉엉 울며 내 품으로 파고드는 오이카와의 머리통을 간신히 밀어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입으로는 버럭버럭 고함치는 와중에도 내 가슴팍 어딘가는 뜻 모를 두근거림으로 벅차올라


‘결혼해줘 하지메.’


언젠가 들었던 오이카와의 약속 아닌 약속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결혼하자, 토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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