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하님 캘리그라피입니다.
*<팔월>시리즈는 '이와오이'를 주제로 쓰는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입니다. 앞뒤 내용을 전혀 모르셔도 글을 읽는데 문제가 되진 않아요~
*전력 주제: 오해
*하나하키




W. 멜




눈이 떠진 이유에 특별난 것은 없었다. 첫째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이 내가 애용하는 극세사가 아니어서 였고 둘째는 매트리스가 허리를 잘 받쳐주지 못해 척추가 뻐근해진 탓이었고 셋째는 한껏 뒤틀린 채 통증을 호소하는 뱃속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였다. 우리 집 천장이 이렇게 촌스러웠던가. 익숙치 않은 잠자리와 낯선 천장이 우리 집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란 걸 깨닫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악 소리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용수철처럼 상체가 튕겨져 올라왔다. 재빨리 눈을 아래로 내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옷은 제대로 갖춰 입은 채였다. 티셔츠는 물론이고 바지까지도. 혹시 몰라 양팔을 엑스자로 모았다.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갔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혀 모르는 공간이었다. 낯선 책장, 낯선 침대, 낯선 인형, 낯선 체취. 어제 뭘 했지? 난 왜 여기 있지? 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 새하얀 머릿속에 묻고 물어봐야 답이 나올리 없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친숙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배구공..."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원룸 한 켠을 가득 채우고 배구 용품 때문에. 눈에 익은 배구공과 배구화가 익숙한 누군갈 떠올리게 할 무렵,

"여. 깼냐?"

하지메가 보였다. 하지메의 얼굴이 아닌 목소리 뿐이었지만 분명한 하지메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지메의 목소리였다.

"이와, 쨩...? 에... 정말?"

검지로 발바닥을 세게 꼬집었다. 알싸하게 아팠다.

"그럼 가짜겠냐."

꿈이 아니었다. 얼마만에. 얼마만에 듣는 하지메의 목소리였던가. 속이 간질거렸다. 오랜만에 듣게 된 그 목소리로 인해 감상에 젖었나? 곧 보게 될 익숙한, 익숙하지 않은 얼굴에 감회감이 새롭게 들기라도 했나?

"나. 왜 이와쨩이랑 있는 거야? 여기 이와쨩이 사는 데야? 어라? 왜? 왜??"

아니. 전혀 달랐다. 나는 당황했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게 아니었다. 급하게 이불을 걷어냈다. 나갈 채비를 할 셈이었다. 이 낯설고 낯설지 않은 이질적인 공간을 박차고 나갈 셈이었다. 더 정확히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내 백팩을 들쳐매고 이 곳을 당장 뛰쳐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거... 내 옷 아니잖아!!!"

말아올라간 티셔츠 소매와 정중앙에 떡하니 그려진 고질라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님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었다. 분하고 부끄럽지만 그것을 차마 벗어던지진 못한 채, 협소한 원룸을 부엌과 침실로 구분짓고 있던 미닫이문을 향해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참다못한 하지메가 아예 문을 열어 젖혀 제 얼굴을 드러낸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쫑알쫑알 말도 많다."
"이와쨩 내 옷 어쨌어? 벗겼어? 그러고 자기 옷 나한테 입힌 거야? 변태야? 이와쨩은 변태입니까!!"
"두 달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하지메는 이런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묵묵히 제 양 손에 들려 있던 테이블을 바닥에 내려둘 뿐이었다. 밥 두 공기와 콩나물국과 김치 몇 점. 말간 콩나물국 냄새에 마른 침을 꿀꺽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무늬없는 벽면을 노려보았다. 하지메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하지메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벌써 두 달이나 되었나 싶었다.

"속은 어때."
"속은 무슨 속."
"어설픈 거짓말이라면 집어치워라."
"이와쨩이야말로 무슨 헛소리야."
"정신 놓기 직전까지 무지막지하게 술을 들이붓고선 막판에는 그것들 다 토했잖냐."

반문할 요량이었다. 언제 내가 술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냐며, 게다가 토하긴 뭘 또 토했겠냐며.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신랄하게 반문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척추를 꼿꼿하게 펴기 무섭게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일그러지듯 휘어보였고 하지메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빙글거리는 건 내 쪽이던가. 방향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이마와 어깨에서 지긋한 통증느껴질 즈음엔 이미 내 얼굴은 매트리스가 아닌, 바닥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보니 머릿속은 징징 울렸고 속은 수분이 부족하다며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고 뒤틀릴 것 같은 위장은 바로 알코올 때문인 것이었다. 비록 숙취때문에 거꾸로 나자빠지고 말았지만 나는 재빨리 정자세를 갖췄다. 그 뿐일까. 여유로운 척 손부채질까지 했다.

"기억도 안나나보네."

하지메는 전혀 신경 안쓰는 듯 했지만. 어쩌다보니 침대에서 벗어나게 됐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밥숟갈을 뜨다만 하지메는 나에게도 수저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얌전히 해장이나 하고 가라. 니 놈 옷은 세탁기 돌려놨으니까 걱정 말고."

홱 잡아챈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끝으로 들었다. 고개를 숙였다.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끝만을 노려보았다. 잘 먹을게라는 대답을 아주 작게 중얼거리고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고슬거리는 밥알을 몇 개 깨작거리다 콩나물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마가 따끔따끔거리는게, 뚫어질 듯한 하지메의 시선이 그 곳에 닿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시했다. 밥상을 향해서만 눈을 내렸다. 콩나물국의 말간 빛을 숟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칼칼한 액체가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갔다. 한 번. 하지메의 맛이 났다. 두 번. 하지메의 향이 풍겼다. 먹으면 먹을 수록 내 몸이 온통 하지메로 뒤덮여, 금방이라도 풍선처럼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두 달 만에 본 하지메는 두 달 전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오히려, 일 년 전과 지금이 무척 다르다 할 수 있겠다. 고등학생 시절의 하지메는 나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작았다. 그것을 늘 자신의 콤플렉스로 여기던 하지메였다. 우유를 매끼 한 팩씩 갈아치우고 틈틈히 키 크는 스트레칭까지 하면서 키에 집착하던 하지메였다. 그런 하지메가. 179에서 부동을 유지할 줄 알았던 그 눈금이. 눈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 건, 하지메가 대학에 들어간 직후의 일이었다. 뒤늦은 보상을 받긋 180을 가뿐히 넘기고 내 키마저 넘어선 -나는 대학생이 되었어도 키가 자라질 않았다. 괘씸할 노릇이었다.- 것이었다. 전에는 나보다 아래에 놓여 있던 눈높이가 이제는 동등한, 혹은 더 높다는 것은 지금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지메의 신장이 훌쩍 변해버린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메와 나를 비롯한, 잇세이와 타카히로는 졸업 이후로도 종종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학이나 취직. 어느 쪽을 택했든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모임을 가지곤 했던 것이다. 변하지 말자, 즐거웠던 추억을 잊지 말자에서 시작된 그 짧은 만남들이. 어쩌면 나에겐, 방아쇠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이와쨩 손에서 태어날 수 있는 요리는 튀김 두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밥상이나 엎어줄까?"
"정~말 맛있다. 그치, 고질라쨩?"

티셔츠에 그려진 애꿎은 고질라에게 말을 걸면서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하지메를 마주 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숟가락을 한 번 들때마다 뒤틀리던 속은 차츰 가라앉았다. 진정되면 진정될수록 바늘로 쑤시는 듯했던 편두통역시 입을 다물었고 텅 비어 있던 머릿속이 느릿하게 사고를 굴리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어제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고 지난 두 달간의 악몽이 스멀스멀 발밑에서부터 기어오르고 있었다.

"왜 그래? 너 안색이 안 좋,"
"나. 나 화장실 좀."

가라앉을 줄 알았던 역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기어 올랐다. 벽을 짚은 손이 경련하듯 부르르 떨렸다. 다급하게 열어제낀 문고리 너머엔 지난 두 달 간 몇 번이고 붙들고 붙들었던 변기가 있었다. 그 배경이 우리 집이 아닌, 하지메의 집이었을 뿐. 아주 익숙하게 무릎이 꺾였다. 고개가 변기 안으로 숙여졌고, 나는 눈을 감았다. 식도를 타고 꾸물꾸물 올라오는 액체 속에 무엇이 섞여있을지 알고 있었다. 시큼한 끝맛과 함께 애액들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꿀렁거리며 터져나오는 그것들은 언제쯤 멈출까. 이 끝모를 토악질에서 나는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코끝에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진절머리나도록, 아주 지긋지긋하게 맡아봤던 향이었다.
나는 꽃을 토했다. 빌어먹을 꽃을 토하고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변기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로, 내 입은 쉴틈 없이 샛노란 꽃들을 토해냈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쯤 끝날 일인지. 아마 나는. 남은 평생 동안 이것들을 토해내다 이것들에 파묻혀 홀로 죽어갈 것임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민들레."

내 입에선. 노오란 민들레꽃이 우수수 떨어져 나온다. 누군가를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지메란 이유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자 끝사랑이란 이유로.




#




나의 짝사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에 따라 사소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사소한 일이었다.

"내가 분명 봤다니까. 어떤 귀여운 여자애가 이와이즈미한테 팔짱낀 채 걸어다니는 거."

잇세이는 반쯤 남은 맥주잔을 단 번에 들이키며 말했다. 타카히로는 안주를 추가로 주문하고 있었고 나는 설마 하지메가? 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작 화제의 중심에 있던 하지메는 가볍게 웃기만 하고 도통 입을 열질 않았지만.

"백발백중 여자친구야. 그치, 이와이즈미?"

마른 오징어 다리를 씹었다. 질겅거리는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딱딱한 표면이 타액에 녹아 흐물 거릴 때면 맥주를 들이부었다.
아오바죠사이를 졸업한지 어언 일 년.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모임을 가졌다. 고등학교 때야 매일같이 부대끼던 얼굴이었지만 대학생 혹은 사회인의 타이틀 아래에서 만난다는 것은 꽤 생소한 일이었다. 땀냄새에 절은 채 사소한 장난 하나로 자지러지던 그 때와 달리, 지금은 각자가 밟고 걸어나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렇다고 진지한 얘기 뿐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과제와 시험. 취업과 진로. 그리고 연애. 마지막은 언제나 그런 부류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지곤 했다.
맥주 끝맛이 씁쓸했다.

"잘못 본 거겠지~ 이와쨩의 사촌 동생이나 여자 사람 친구를 맛층이 잘못 본게 분명해."
"얼씨구.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나."
"그야 이와쨩같이 못생긴 사람한텐 애인이 생길 수가 없으니까!"
"한 번만 더 입 나불거려봐라, 이 망할카와. 확 패버린다."
"거봐거봐!! 저렇게 입이 험한데! 폭력적인데! 어떻게 애인이 생겨!"

하지메는 주먹을 높이 들어올렸다 다시금 내렸다. 진심으로 때리려 했던 모양이다. 무섭게시리.

"그러는 오이카와 너야말로. 슬슬 옆구리 안 시리냐?"

오뎅탕을 추가로 주문한 타카히로는 금세 새 맥주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앞에 놓인 잔이 비어 있었다. 나는 스스로 잔을 채우려는 타카히로를 저지하고 병을 뺏어들었다.

"글쎄에. 이 오이카와씨, 요새 삘이 딱 꽂히는 애가 엎달까아."
"아서라~ 니가 그런 소리하면 우린 뭐가 되냐."
"애인 없는 이와쨩이랑 동급?"

빈 잔이 황금빛의 액체로 채워져 갔다. 부드러운 거품이 컵 가장자리를 웃돌 때 즈음 나는 병을 거뒀고 이번엔 타카히로가 내 잔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힐끔, 내 맞은 편에 앉은 이와이즈미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다 이와이즈미한테 한 대 맞겠다."
"실제론 안 때리니까 상관 없어."
"너 지금 뒤통수 맞기 딱 좋거든? 야야. 그럼 삘 안꽂히는 애들이라도 소개자리 주선 해봐봐."

별로. 귀찮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려 했던 나는 문득 옆구리가 따가워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헤에~ 이와쨩한테 소개시켜 달라하는 건 어때?? 나랑은 달리 여 자 친 구 가 버젓이 있다잖아~ 그 친구의 친구 소개해달라 하면 되지! 안그래, 이와쨩?"

살풋 웃으며 건배하듯 잔을 들어올리자 하지메를 제외한 두 사람이 나를 따랐다. 그새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미간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저러면 또 못생겨지는데.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 나는 은연중에 또다시 하지메를 골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진동 울리는 거 같은데. 이와이즈미 네 전화 아니냐?"

바로 그 전화가 오기전까진 말이다.
방금전까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던 너였다.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눈에 띄게 젓가락을 틱틱거리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던 너였다. 그런 네가. 전화 한 통에 퍽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 누가 알았을까. 여긴 너무 시끄럽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널,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여자친구네."
"그러게."

잇세이와 타카히로가 짐짓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친구. 하지메와 여자친구. 참, 실감나지 않는 단어였다. 농담이라던가 장난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잇세이가 추긍했을 때 부정하는 것도 수긍하는 것도 없이 말없이 웃고 있던 하지메는.

"정말이야...?"

그 때 즈음부터, 내 입은 더이상 웃음짓질 못했다. 경련이 일듯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웃어보려 해도 얼굴은 점점 무표정에 가까워졌고 속이 불에 타들어가듯 홧홧거리기 시작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이 바로, 내가 무언가를 토악질해대기 시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술을 잘못 마신건가 싶었다. 안주로 먹었던 파전이나 야채들이 위장 안에서 잘못된 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게, 그 무렵의 나는 새싹을 토하고 있었으니까. 방금 땅에서 움튼 듯한 조그만 새싹들을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것들을 토하기만 하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뜻모를 구토는 고열과 몸살까지 동반해 나를 괴롭혔다. 침대와 화장실을 오고가며 쉬고 토하고 자다 토하고 누워 있다 토하기를 어언 일주일. 입밖으로 튀어나오던 파릇파릇한 새싹은 어느새 손톱만한 봉우리로 변해 있었으며 마침내 만개하듯, 샛노란 민들레가 속에서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꺽꺽대며 토해냈다. 꽃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감각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워 울면서 토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마음 편히 자지도 못했다. 새벽녘이면 발작하듯 토하고 싶단 감각이 몸을 덮쳤고 침대 시트를 꽃으로 얼룩지게 한 적도 적지 않았다. 토하고 토하고 또 토해도, 긁어내고 긁어내고 또 긁어내도. 끝이 없었다.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병원도, 약처방도, 달인 한약마저도 소용없었다. 내장을 뒤집어 질만큼 끝없이 뱉어낼 뿐이었다. 원인 불명이란 타이틀만을 거머쥐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내 생활마저 온전치 않은 지금, 학교는 고사하고 친구들의 얼굴 보는 것마저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원인 불명의 구토 증세가 그 이후로도 쉴 틈 없이 날 옭아매진 않았다. 이유인즉, 확실해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따라 컨디션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꽃으로 범벅이 되어가는 방바닥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가벼운 기침을 할때마다 한두 송이씩 손바닥에 떨어지는 민들레를 가엾게 여길만큼, 여유가 있던 날이었다. 전신을 휩쓸던 열도 꽤 가라앉았고 근육 하나하나를 찢어내는 듯한 몸살도 잠잠해져 있었다. 꽃이 튀어나올까봐 외출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야 있어야만 하는 내 처지가 불쌍했던 나는 책장을 뒤적거렸다. 옷장 안 쪽,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상자들을 뒤적거렸다. 아오바죠사이 vs 카라스노. 일 년 전까지만해도 밤새 질리도록 봤던 그 비디오가 오늘 갑자기 떠오른 건 무슨 이유였는지. 민들레의 쌉싸름한 맛이 감도는 입안에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 나왔다. 귀에 익은 휘슬 소리가, 우렁찬 함성 소리가, 낯익은 경기복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3-2로 끝끝내 카라스노에게 져버린 경기를 흥미롭게 경기를 관전하던 내가 갑작스레 토악질을 시작한 건 비디오를 재생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믿고 있어, 캡틴.]

하지메가 보였다. 화면 너머에 하지메가 있었다. 하지메란 걸 인식하기 무섭게, 잠잠하던 토악질이 다시금 발작하듯 시작된 것이었다. 입을 가린 손 틈새로 민들레가 후두둑 수직으로 떨어졌고 오장육부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경기는 시작되었고 하지메의 모습 따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아니야. 아닐 거야. 절대, 아니라고."

귀에는 여전히 하지메의 목소리만이 웅웅거렸다. 앵무새처럼. 고장난 라디오처럼. 믿고 있다는 말만이 메아리쳤다. 속이 기분나쁘게 울렁거렸고 가슴팍이 터질듯 쿵쾅거렸다.
소꿉 친구였다. 까무룩한 코맹맹이 시절부터 십대의 마지막을 같이 보낸 친구였다. 어릴 땐 매일같이 장수풍뎅이를 잡으러 간다며 싫다는 날 끌고 갔고 홀린듯 배구에 빠져든 날 뒤따르며 배구부에 들어왔고 든든한 스파이커였고 팀을 이끄는 에이스였고 툭하면 쩌렁쩌렁 소릴 질렀고 배구공으로 때리는 일따위 허다했고 어느 하나 멋진 구석 없었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내가 분명 봤다니까. 어떤 귀여운 여자애가 이와이즈미한테 팔짱낀 채 걸어다니는 거.'

"욱, 우웩ㅡ."

'백발백중 여자친구야. 그치, 이와이즈미?'

"우욱. 제발... 제발 그만!!"

잔뜩 쉰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했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고 흡사 뭍으로 내던져진 물고기마냥 펄떡거리고 있었다. 목이 따가웠다. 속이 뜨거웠다. 머리는 하지메의 목소리와 얼굴만을 반복 재생했고 뺨은 이미 눈물 비슷한 액체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 이 빌어먹을 민들레를 토해내는 이유가 하지메 때문이라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절대 납득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이와쨩을 좋아해서 이런 거라면."

볼가를 타고 물줄기 하나가 흘렀다.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거리자 샛노란 꽃 서너 개가 다시금 입밖으로 터져 나왔다. 타액에 흠뻑 젖은 그것들은 아주 작았다. 한 줌 움켜쥐면 금세 바스러져 버릴만큼 작고 또 작았다. 이런 작은 것 때문에, 길가에 흔하게 피어나는 꽃 하나 때문에,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눈 한 번 제대로 감을 수 없었다.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그것들을 손으로 쥐어 보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여리고 연약해, 도리어 울컥한 기분에 휩싸였다.
친구야. 작은 친구야. 갓 피어나 내 입밖으로 나왔던 너는 진정으로 행복하니. 내 몸 속을 헤집고 내 마음을 너덜거리게 만들고 자유를 갈망하며 날 괴롭혀오던 너는, 정말로 행복한 기분이니. 감사는 할게. 네 덕에 내가 하지메를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는지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나는 말이지. 네가 미워.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어떤 이유로든 내가 하지메를 좋아하게 되었다 쳐도, 너무 비참한 타이밍이라 생각해본 적 있니. 너 자신이 내게 너무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니.

'백발백중 여자친구야. 그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말이야. 내가 아니어도 돼. 내가 아니어도 괜찮대. 거긴 내 자리가 아니래. 내가 있을 곳은 친구란 이름 뿐이래. 이제와서 좋아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란 소리야.
차라리 좀 더 일찍 알려주질 그랬어. 내가 아플 거란 신호를. 아주 조금만 일찍. 그랬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텐데. 하지메 생각만 하다가 하루를, 이틀을, 일주일을 꼬박 앓을 일은 없었을 텐데.
작은 꽃아. 나 말이야. 휴대폰을 안 본지 몇 주나 됐는지 모르겠어. 처음엔 널 토해내는 걸 모두의 앞에서 보여주기 무서워서 그랬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아프다고 말하고 싶어. 혼자 끙끙 앓기 싫다고 모두에게 솔직히 털어넣고 싶어. 하지메에게 전부 말해주고 싶어. 하지메 너 때문에 이렇게 아팠다고. 네 여자 친구따위 때문에 이렇게나 속이 문드러졌다고. 근데 있지. 무섭더라고. 이제와서 하지메가 무서워졌어. 하지메에게서 돌아올 대답이 무서워졌어.
싫어하면 어쩌지? 같은 남자 끼리, 소꿉친구 주제에, 여지껏 좋아하는 티 한 번 안내본 사내 자식이, 그것도 버젓이 애인이 있는 사람이잖아. 싫다고 할까봐 무서워. 경멸하는 눈으로 날 훑어내리다 뒤돌아설 게 무서워. 친구로써 밖에 남을 수 없는데 그 '친구'란 이름마저 뜯겨져 나가게 될까봐. 무서워.

"...나는 바보야. 구제불능에, 멍청이에, 겁쟁이에, 나약해 빠진."

그래도 좋아. 하지메가 좋아. 좋아서 어쩔 도리가 없어. 이제껏 불순한 마음 없이 하지메를 대해왔던 나 자신이 신기할 따름이야.
기침과 열기는 가라앉질 않았다. 시합 비디오는 꺼진지 오래였고 나는 옆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바닥이 차가웠다. 반쯤 벌어진 입에선 꽃이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눈을 감았다. 그대로, 숨을 멈추고 싶었다. 호흡을 멈추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휴식기에 접어들었던 독감이 다시금 활개치듯, 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오고가며 열을 토했다. 이번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혼자 남은 방안에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으며 먼발치에 던져 두었던 휴대전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민들레에 파묻혀 죽는 게 빠르지 않을까. 나는 그리 여기며 우는 것마저도 그만 둔 채 먹먹해져 가는 가슴을 혼자 움켜쥐다 얕게 잠들곤 했다.
눈을 뜨면 꽃이 보였고 눈을 감으면 하지메가 보였다. 꿈 속의 하지메는 다정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토오루라 불러 주었고 걸레짝이 된 내 몸을 으스러지게 안아 주었고 사랑한다 속삭여주었다. 그 행복에 겨워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면 난 여전히 차디찬 바닥에 혼자 누워 있었고 하지메 따위, 찾아 볼 수 조차 없었다. 그럴 때면 손바닥 깊이 얼굴을 묻은 채 오열을 시작했다. 더는 싫어서. 희망 고문하듯 반복되는 나날들이 싫어서. 악몽도 이런 악몽이 있을 수 없어서. 좋아해라 말해도 나도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차가운 현실이 싫어서. 그대로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얼마나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솔직히, 세아린 적은 없었다. 눈을 떠도 지옥이었고 눈을 감아도 지옥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내게 한 줌의 희망처럼 주어진 연락이 찾아온 날이 있었는데,

[맛층]

다름 아닌 잇세이였다. 며칠 전부터 주기적으로 웅웅거리던 휴대폰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그 화면 너머로 둥둥 떠오른 이름이 하지메면 어쩌지, 라며 연락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상대방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는지, 하루에 적어도 여섯 혹은 일곱 번을 꼬박꼬박 부재중을 남기곤 했다. 꽃과 잠에 취해 사리분별이 되지 않았던 나는 부재중이 쌓이기 시작한지 정확히 37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통화야 37건이고 확인하지 않은 라인과 메일함은 아주 가관이었다. 개중엔 하지메란 이름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부재중 통화를 한껏 쌓아올린 잇세이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하지메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하지메였으면 나는 다시 전화걸지 않았을테니까, 라고 내심 안심하면서 말이다. 통화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여보... 세요?"
[씨발, 야. 오이카와 전화 받았다.]

욕설 섞인 잇세이 목소리가 통화 너머로 들렸으니 말이다. 집에 틀어만 박혀 사람을 만나지 못한지 얼마나 오래 됐는지. 그 욕설마저도 정겹게 들렸다면 나는 필시 심하게 아프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오이카와. 너 뭐야. 그동안 어디서 뭐하고 있었어.]

꽤 화가 난 어투였다. 알만 했다. 지난 몇 주간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나는 일절,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라인은 안 읽지, 전화는 안 받지, 너 사는데는 모르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갑갑했는지 알아?!]
"...미안. 콜록, 휴학계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어."
[오늘까지 연락 안왔으면 니네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경찰서에 실종신고라도 할 참이었다, 이 멍청아. 휴학을 했으면 했다고 문자 한 통이라도 남기던가.]
"미안해."
[목소린 또 왜 그래. 독감이라도 걸렸냐? 지독하다, 지독해. 쌍으로 잘하는 짓들이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뿌옇게 끼어있던 안개가 점차 개여가는 감각이었다. 여전히 눈은 따가웠고 입안이 시큼한 위액들과 쌉싸름한 꽃맛으로 텁텁거렸다. 그래도 나는 확인해야 했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쨩은?"

입밖으로 내뱉기 무섭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와이즈미가 제일 빡 돌았었지. 너 연락 안된다고 온데만데 다 뒤지고 니네 집 본가 찾아가고 밤새 니 걱정하고. 사람 좀 그만 놀래켜라, 진짜.]

날 찾긴 찾았구나. 그래. 하지메한텐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겠지. 걱정되니까 겠지. 친한 친구가 연락 없이 홀연히 사라졌으니까 겠지. 난 하지메에게 있어, 그저 친구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기침은 점점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쿨럭이는 소리와 함께 동그란 핏방울이 하나둘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 위로 노란색이 덮어졌다. 놀란 나머지 미처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연신 콜록거리자, 잇세이 역시 내 안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야야. 괜찮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오이카와!!]
"나... 나.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독감 맞아. 심한 독감에 걸렸는데, 좀처럼 안 떨어지네."
[아아. 그럼 넌 내일 오지마라. 그냥 집에서 쉬고 있어. 우리가 찾아가든 할테니까.]

손바닥에 민들레 꽃잎이 묻어났다. 그 옆엔 선명한 핏자국까지 묻어 있었다. 상태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이대로 상처 받고 말라비틀어져 가는 건 나라는 것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훔쳐냈다. 어차피 상처 받을 거라면, 그 끝이 나 혼자일뿐이라면, 후회없이 몸과 마음을 부딪힌 후에야 생을 끝내고 싶었다. 삶의 끝이 꽃으로 둘러싸인다는 것. 황홀하지 않은가. 민들레같은 수수한 꽃이 아닌, 장미나 백합같은 화려한 꽃이 나와 더 잘 어울렸겠지만. 길동무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나도 갈래. 거기 이와쨩도 오지? 민폐끼친 사과라도 할 겸 얼굴이나 보게."
[...그래. 우리도 니 얼굴 까먹을 것 같으니까.]

마지막 도박에 내 마음을 맡겼다.




#




'내일 야하바랑 쿄타니가 대학생된 기념으로 가게 빌려서 파티하려 했거든. 이 주 전부터 준비하던 거였는데 네 놈이랑 연락이 안돼서 한창 난리가 나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랑 하나마키는 파티준비하고 이와이즈미는 너 찾아 다니고.'

거울을 봤다. 비쩍 마른 몸이었다. 그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 몸에 남은 것이라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흉물스런 가죽뿐. 탱탱하게 빛나던 피부가 거칠거렸다. 덥수룩하게 돋아난 수염이 턱을 뒤덮고 있었다. 볼우물이 움푹 패이다 못해 홀쭉해져 있었고 그 탓에 광대가 기이할만치 도드라져 보였다. 뺨을 쓸어 내렸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 수염을 정리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푸석한 피부를 가꾸고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를 끝마쳤다. 안경과 마스크를 얼굴에 뒤집어 썼고 품이 한참 헐렁해진 바지를 벨트를 이용해 억지로 고정시켰다.
토악질이 멈췄다. 거짓말처럼 멈췄다. 내 굳은 결심에 반응하듯 오늘은 내내 속이 편안했다. 밖을 향했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뙤약볕이 쏟아져내리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눈에 익은 민들레들이 길가에 한아름씩 피어나 있었고 개중엔 벌써 씨앗을 흩뿌리기 위해 다시금 봉우리로 변모한 것도 있었다. 나는 그것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어차피 지긋지긋했다. 휴대폰을 열었고 메일함을 확인했고 약속 장소라는 펍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게를 통째로 빌렸다는 말처럼, 그 곳에서 날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널찍한 테이블 몇 개와 굴러다니는 의자. 선물 꾸러미처럼 몇 박스 놓여진 술병들이 전부였다.

"이상하네. 좀 늦게 왔는데."

혼자여서 차라리 다행인가. 쓰게 웃어버린 나는 소주 몇 병과 맥주 하나, 그리고 테이블에 놓여진 와인잔을 들고 의자에 착석했다. 와인잔에 마셔보는 건 난생 처음인데. 은연중에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비웃어버릴 하지메가 생각났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내저으며 마스크를 벗어놓았다. 오늘에서야 겨우 가라앉은 역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절대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혼자 마시는 술은 막연히 외롭고 또 외롭기만 할 줄 알았다. 도를 넘어섰다고 막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 아픔과 내 푸념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서 마냥 외로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게 필요했던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지난 몇 주를 하지메 하나 때문에 나홀로 울어 제끼며 상처 입기만을 반복했건만

"이와쨩이 보여. 꿈인가."

정작 내 눈으로 직접 하지메를 보자마자,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속이 뒤틀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아주 오랜만에 보는 하지메는 꽤 야위어 보였다.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다. 눈이 피로에 절어 있었다. 내 걱정을 하긴 했구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 속이 미칠듯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염산을 입안에 직접 들이부은 것 같았다. 녹아내린 내장이 혈관을 타고 세포 하나하나를 제 손으로 쥐어 뜯는 것 같았다. 알코올에 젖은 머리는 다행히 그 고통마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토하고 싶다는 욕구 하나만은 분명했다. 눈을똑바로 들었다. 핑핑 도는 머리통 탓에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질 않았지만, 그 너머엔 분명히

"...잠깐 못 본 새에 왜 이렇게 말랐냐."

하지메가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악몽도 아니었다.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저 목소리는 분명,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하지메의 것이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꿈 속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그런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아, 토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불처럼 끓어오르는 꽃들을, 내장들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고개를 떨궜다. 눈을 피했다. 이 진절머리나는 통증의 원인인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날 꿰뚫어 보듯, 너는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내 이마가 뚫어져라, 나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네가 아무 말이 없었기에. 화도 내지 않고 내 몸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코빼기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잇세이와 타카히로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오히려 숨이 막혔다. 와인잔을 단번에 들이켜 비워낼 때면 다시금 투명한 액체로 와인잔을 채웠다. 채우고 비우기의 반복이었다.
너는 말리지 않았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널 보지 않았고 너는 날 보고 있었다.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날 잡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날 붙잡지 않을 줄 알았다. 그야, 너에겐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나는 널 좋아했고 너는 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테니까.

"...토할 것 같아."

하지메와 내가 눈이 마주쳤던 건 찰나에 불과했다. 메스꺼운 속과 꽃이 터져나올 것 같은 입을 손으로 가까스로 틀어막은 내가 벌떡 몸을 일으킨 그 찰나. 하지메는 일자로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내가 먼저 피하고 말았다. 도망치고 말았다. 누가 쫓아올 새라 화장실이라 쓰여진 팻말쪽으로 미친듯이 달려갔을 뿐이고 그대로 문고리를 걸어 잠그었다. 구토는 멈추지 않았다. 변기에 한차례 쏟아지는 노란색이 역겨울 지경이었다. 쌉싸름한 향마저도 지독했다.
결국은 바뀌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바뀐 건 없었다. 하지메를 직접 본다고 해서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 둘이 남았을 때의 적막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술이 없다면 더했을까. 차라리 술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야 했을까.

"오이카와!!!"

더 바라진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할 찬스라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꺾여버릴 마음. 변기물에 씻겨져 내려갈 불쌍한 마음. 그런 가엾은 감정의 끄나풀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 문 당장 열어, 멍청아!!!"

정말. 그 뿐이었다.

"저리가... 저리가!! 오지마!!!"

희망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하는 척, 선심쓰는 척, 동정 베푸는 척, 곁에 남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무심했으면 좋겠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금처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건드리지 않고 날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혼자 잠수타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렇게 사라질 거면!! 그게 네 대답이 될 수 있냐? 나한테까지도 말 못할 얘기야?! 귀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냐, 이 망할카와!!"

좋았을 텐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큰 소리 치지 말라고!!"
"그래!!! 나 몰라. 니 말대로 아ㅡ무 것도 몰라!! 너 새끼가 입 틀어막고만 있으니까 절대 알 리가 없지. 알 방법이 없지!! 그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속이 편하냐? 두 달이나 잠적한 새끼가 대뜸 연락해서는 거지꼴해서 나타나면 내 속이 썩어가겠어 안 썩어가겠어!!!"
"그러니까 이와쨩, 은. 윽, 우욱ㅡ."

민들레가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화장실 바닥을 노란색이 뒤덮어 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가슴이 비상하게 쿵쿵거렸고 머릿속은 술기운으로 어지럽혀진지 오래였다. 덕분에 이성이라는 카테고리가 뚝, 끊기기까지는

"이와쨩 따위... 이와쨩 따위 정말 싫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내가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는데. 왜 내가 휴대폰 던져두고 연락이란 연락 다 무시했는데! 왜 내가... 내가. 못생긴 이와쨩 생각하다 밤새 울고 토하고 울고 토하고를 반복해야 하냐구..."

엎질러진 물과 같았다. 꽉 막혀 있던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감정 덩어리가 폭포수마냥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쨩 따위 싫어 죽겠어. 여자친구가 생기면 다냐고. 애인이 생기면 나 같은 건 돌아보지도 않는 거냐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나, 이제서야 깨달아 버렸단 말이야. 이와쨩 하나 때문에 울고 웃는 나 자신이 최악이란 거. 이와쨩도 미워 죽겠지만 그보다 더 미운 건. 더 끔찍한 건!!"
"......."
"하루라도 이와쨩 생각을 안하고는 못 사는 나 자신이었어."
"...문 열어라. 부숴버리기 전에."
"나 따위 싫지? 꼴도 보기 싫지? 나도 내가 싫어. 이런 나자신이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가. 가버려. 어디로든 꺼져버리라고!!"

딱, 거기까지였다. 밉고 억울하고 화가난 심정을 그대로 눈물과 오열로 쏟아내고 말았던 내 기억은 거기서 칼로 베인듯 뚝 끊기고 말았다.
나는 다시 토하고 있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내 토악질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변기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어차피 질리도록 보았던 샛노랑. 이제와서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얌전히 민들레에 파묻혀 죽을 날만 기다리면 되었던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던 구토가 그친 것은

"어제처럼 또 그러네. 병원은 갔어?"

상냥하게 등을 쓸어내려주는 누군가의 손길 때문에.

"만지지마..."
"빈 속에 술만 주구장창 처넣으니까 그렇지."
"만지지 말라고!!!"

홧김에 그 상냥하던 손을 쳐내고 말았다. 신경질적으로 내 뒷켠에 서있던 하지메를 돌아보았다. 어제의 대부분이 기억난 탓에 기분이 진흙탕을 구르고 있던 나와 달리 하지메는 그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저 눈은 진심이 아니라는 거. 동정심이라는 그럴듯한 겉포장으로 내 마음을 농락할 뿐이라는 거.

"뭐야. 아직도 기억 안나냐?"
"...뭘. 뭘 말이야."
"너가 날ㅡ."
"좋아한다는 거? 그래. 나 이와쨩 좋아해. 똑똑히 기억나. 죽을만큼 좋아해. 그리고! 그 마음만큼 이와쨩을 싫어하게 됐어. 널 좋아하는 나 자신까지도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고!"
"어이. 사람 말 끝까지 듣,"
"나 말이야. 이와쨩 같은 사람 한 트럭으로 갖다줘도 절 대 사절이니까. 이와쨩이 여자를 사귀든 남자를 사귀든 괴물딱지랑 사귀든, 나는 하나도 관심 없으니까!!"

그 때였다. 하지메의 시선이 일순 낮아진 것은. 살점 하나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내 어깨죽지가 그 팔에 휘감긴 것은.

"이 바보."

낮은 울림과 함께 꿈에서까지도 허락받을 수 없었던, 하지메의 품 속에 날아들듯 순식간에 안겨 버린 것은.

"중요한 부분은 다 까먹어 버렸잖아, 멍청카와."

안지마. 안아주지마. 다정해지지마. 착각한다고. 착각해 버린다고. 선심쓰듯 베푼 네 우정이 내 마음이랑 같을 거라 오해해버린다고.

"...놔. 이거 풀어, 이와이즈미."
"안놔. 절대 안놔. 어떻게 붙잡은 넌데. 어떻게 찾아낸 네 진심인데."

왜?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해주는 거야?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야? 진심도 아니면서. 입발린 말로 위로 비슷한 걸 건네려는 것뿐인 주제에.

"알량한 동정이라면 집어치워. 놓으라고 했어."
"내가 내 손으로 널 놓을 것 같아?"
"이와이즈미! 네가 네 입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작작 좀 해... 사람 마음 갖고 노는 짓따위,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날 가슴 깊이 끌어 안고 있던 하지메는 그제야 날 놓아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놓아준 게 아니라, 어깨만 힘껏 붙든 채 내 눈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어제도 제대로 말했지. 내가 반한 건 너였다고."
"...뭐?"
"계속 말하려 했어. 쭉 좋아해왔다고. 내 마음 속엔 줄곧, 너 하나 밖에 없었다고."
"무슨. 무슨 소리야. ...몰라. 하지마. 말하지마. 그대로 입다물어. 아무 것도 말하지마."
"아니. 말해야겠어. 나도 억울하니까. 너한테 반해있던 건 내 쪽이었어. 세이죠 졸업 이후로도 계속 너한테 고백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 그런 날 위해 그 녀석들이 줄줄 읊어낸, 있지도 않은 그럴듯한 거짓말이 도리어 너랑 나 사이를 이 사단으로 치닫게 만든 거야."

거짓말.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여자친구 전화라고 그랬잖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분명 여자친구라고ㅡ.
그게 거짓말이란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하지메?

"자꾸 헷갈리게 하지마. 부탁이니까... 오해하게 하지마."
"그래!! 너는 너대로 오해하고 나는 나대로 널 오해하고. 길게 돌아왔어. 두 달이나 걸렸어. 나는 나대로 썩어 문들어지고 너는 너대로 이렇게... 이렇게나 말라서."

하지메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진 눈은 내 몸을 머리끝에서부터 쭉, 훑어내리고 있었다.

"일방통행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겨우 맞닿았잖냐. 나도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한다잖아. 제발. 제발 그만하자. 내 마음 좀 믿고 받아줘라, 응?"

토하고 싶었다. 여전히 토하고 싶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하지메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왈칵, 하고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변기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 민들레만 죽도록 토해내고 싶었다.

"나, 토해. 자주 토해. 지금도 토하고 싶어. 신기한 거 알려줄까? 내 입에서 꽃이 나온다? 민들레가 막, 입밖으로 토해져서 나와."
"알아."
"...놔줘. 이거 놔줘. 이대로는 이와쨩 옷 버려. 온통... 샛노란 민들레가,"
"싫어."

하지메는 날 놓지 않았다. 안으면 안았지, 놓아줄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세게 안은 탓에 오히려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메의 냄새가 훅 풍겼다. 쌉싸름한 민들레와는 다른, 향긋한 라벤더향. 그 향이 미치도록 달콤해서, 내 숨통을 조여올만큼 향긋해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신 안놔. 안놔줘. 몇 번을 네가 싫다고 해도 좋아. 날 좋아하는 너 자신이 싫다 했지. 그런 널, 내가 좋아해. 내가 사랑해. 전부다 사랑해줄게. 혼자 아파했던 시간들 내가 다 보상해줄테니까."
"꽃... 꽃을 토해버릴 지도 몰라. 나는 분명 말했어."
"오이카와. 아직도 저게 꽃으로 보여?"

하지메의 반문에 들이킨 숨을 훅, 멈춰버렸다. 설마 싶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침부터 내내 토했다고 생각한 변기통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어."

누런 빛을 띄는 위액들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독했던 일방 통행은 진즉에 끝이 났음을. 그것은 한참 전부터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말할 거야. 니가 필름이 끊겨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 줄거야."
"이와, 쨩."
"먼저 반해버리고 사랑한 건 내 쪽이야. 너 하나에 죽고 못 사는 건 오히려 내 쪽이라고. 나때문에 아프지마. 나때문에 울지마. 좋아해. 좋아하고 또 좋아해, 토오루."

사고회로가 정지한 것 같았다. 심장은 터질듯 쿵쾅거렸고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라벤더 향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눈 앞이 민들레로 수놓아진 꽃길로, 노오랗게 물들 것 같았다.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있다며. 여자랑 같이 팔짱 끼고..."
"거짓말인게 당연하잖아, 이 멍청카와!!"

한 순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더이상 나오지도 않을 것 같았던 눈물들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이와, 이와쨩은 바아아보야!!"

그렇게 소리내서 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누구 앞인지도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하고 그저 허망하게, 서럽도록 목놓아 울었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히끅, 얼마나 힘들었는데!!"

뼈만 남은 주먹이 힘없이 하지메의 어깨를 건들였다. 하지메는 얌전히 맞기만 하고 있었고 나는 터져나오는 억울함과 분통함을 눈물로만 쏟아내기 급급했다. 보다못한 하지메가 눈물로 젖은 뺨에 뽀뽀를 남기고 들썩거리는 뒷목을 휘감아 쪽쪽 입을 맞춰주며

"울지마. 안 그래도 못생긴게 더 못생겨졌네."
"이와쨩이 더 못생겼으면서!!!"

웃음기 섞인 핀잔을 얹어줄 때까지 말이다. 그새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바락바락 소리 치니까 내 꼴이 우습기라도 했는지 날 향해 씨익 웃어보이던 하지메는

"진짜? 그렇게 못 생겼냐, 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질문을 던졌다. 내 입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하지메를 향해 나는 마지못해

"거짓말이야."
"그럼 그렇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일 멋있어."

귓가가 새빨갛게 물들어지도록 말이다.




=====


*민들레 꽃말-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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