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머리를 기대고 있던 창이 덜컹였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이 흐릿했다. 액셀을 짙게 밟고 있는 탓에 풍경들은 차츰 형상을 잃고 옅어져 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가벼운 접촉사고라 했으니까."

숨을 내뱉을 때마다 뿌연 김이 유리창에 서렸다. 의자 위로 버려진듯 아무렇게나 던져둔 손등 위로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그런 가벼운 사고였으면 사치코가 왜 전화를 했겠어요! ...왜 다 큰 어른이 애처럼 울면서 전화를 했겠냐구요."

옆에 바짝 달라 붙은 이형의 존재가 저를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일까. 미안한 얼굴일까.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일까. 어느 쪽이든,

"토오루군. 눈을 못 뜨고 있다잖아요."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입김으로 가려진 창 너머는 반복적이었다. 주홍의 가로등 불이 하나. 그 주변을 뒤덮은 먹색의 어둠이 하나. 그 단조로운 반복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금빛의 향연이 밤하늘 위로 못박혀 있었다.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보석들처럼 반짝이며 저와 오이카와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던 그것들은, 지금으로 돌아와 이와이즈미의 눈가를 찌푸리게끔 했다.

'믿고 있어, 너희들.'

1번의 유니폼을 갖춰입고 내 등을, 내 긍지를 밀어주던 널 좋아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안심하지 않고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앞길을 마련해 나가던 널 좋아했다. 네가 있던 코트를 좋아했다. 네가 머물렀던 교실 책상을 좋아했다. 네 체취가 흠뻑 묻어 있던 옷자락을 좋아했다.

'이와쨩!'

방긋하고 호를 그리는 눈웃음을 좋아했다. 제 이름을 한 톤 높여 부르는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사내 주제에 틈만 나면 안기려고, 안으려고 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좋아했다. 어릴 때 심심치않게 주고 받던 뽀뽀 한줌을 점차 의식하게 되버린 네 얼굴을 좋아했다. 부끄럼 탈 때면 그 고운 손등을 입가에 가져가는 네 버릇을 좋아했다. 볼 한가득 우유빵을 머금고 우물거리는 네 뺨과 입술을 좋아했다.

뭐가 유성이고 뭐가 반짝거리고 뭐가 예쁘단 거냐.

쾅ㅡ. 작지 않은 마찰음이 이마를 두들겼다.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이마 정가운데가 얼얼했다. 눈가가 찔끔하고 눈물을 뽑아낼만큼 꽤 아팠다.
그토록 구구절절 좋아했던 건 지금의 오이카와였다. 저와 같은 시간선을 걸어가던, 절친한 친구이자 배구부의 주장이자 사귄지 두 달도 되지 않았던 지금의 오이카와였다. 그런 오이카와를 버젓이 두고

"이, 이와쨩? 자학은 나쁜 거에요?"

저 따위 가짜를.

불그스름한 동공을 동그랗게 확장시키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 이마에 손을 얹었다. 보다 정확히는, 손을 얹으려 했다.

"건드리지마."

탁 소리 날 정도로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을 밀쳐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바로 옆자리에 앉지 않는 이상 들리지도 않을 그 작은 중얼거림에는 분명한 철심이 박혀 있었다. 적의가 가득 담긴 언구. 차게 내쳐지는 바람에 갈 곳을 잃은 손은 힘없이 축, 쳐졌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의식적으로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지만 안타깝게도, 이와이즈미는 병원 입구에 다다라 차문을 열기 직전까지 오이카와에게 이렇다할 눈길 하나 제대로 건네지 않았다.
처음 와보는 병원이 아니었다. 정기 검진을 받으러, 신체 검사를 받으러, 틈만 나면 오버워크를 해버리고 마는 오이카와를 따라서 질리도록 와본 적이 있는 병원이었다. 그럼에도, 병원 곳곳에서 풍겨져 나오는 흉흉한 분위기는 분명.

"밤이라서 그렇겠지."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병원은 쥐죽은 듯 조용할 줄로만 알았다. 깜깜해지도록 꺼버린 조명과 어두칙칙한 복도 한가운데서 희미한 소독약 냄새만 가득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 이와이즈미의 예상을 깨부수고 정작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녹색 가운을 입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의사와 간호사들, 캐캐묵은 쇠비릿내를 빼닮은 지독한 피냄새와 그에 맞먹을만큼의 알코올 향, 아프다는 언어의 형태가 외마디 비명으로 쩌렁쩌렁 채워진 응급실 복도. 다리 끝에 쇠사슬이 배배꼬여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맴도는 것처럼. 한 발 내밀면 누군가가 고꾸라지는 비명이 들렸고 다른 한 발을 내딛으면 삐삐거리는 기계음이 단조로운 음을 때리며 골을 울렸다. 홀린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하던 이와이즈미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듣지마. 아무 것도 듣지마. 내 목소리에만 귀기울여."

두 쪽으로 찢어질 것 같은 고막을, 두 귀를 제 손으로 막아주던

"손이 두 개밖에 없어서 눈은 못 가려줘. 그러니까 앞만 보고 걸어. 움직여.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이와쨩이 가야할 길만 나아가."

마왕 덕이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텐데."
"이번엔 쳐내지마. 아팠단 말이야."
"넌 진짜ㅡ."

뒤로 꺾은 고개 너머로, 오이카와가 있었다. 험악한 뿔 한 쌍이 자라나 있었고 장미를 빼다박은 듯한 붉은 눈동자 두개가 저 하나만을 지그시 들여다 보고 있었고 그것들만 제외하면,

"손 치워."

오이카와 그 자체였다.
좋아 라는 감정의 끄나풀은 외견이 아닌, 그 본질에 핵심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차마 죄의식을 떨쳐낼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버젓이 놔두고 타인과 손을 잡았고 데이트를 했고 사진을 찍었고 나아가선 얼떨결에 키스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몇 걸음. 오이카와가 가만히 누워있을 침대까지 고작 몇 보였다. 입술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마왕과 맞잡았던 손은 진흙을 움켜쥔 마냥 찐득거렸다. 이대로, 오이카와를 마주 볼 수 있을까. 마주 볼 양심이 남아 있긴 하던가. 오이카와가 눈을 감고 있어도 지옥이었고 눈을 뜨고 있어도 지옥이었다. 어느 쪽이든 지옥이라는 결말밖에 남지 않았다면, 차라리

"눈 뜨고 있어라, 이 망할... 오이카와."

백색의 일렬로 늘어진 장막을 살포시 걷어내자, 마법처럼 귀가 찢어져라 들려오던 주변의 굉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 눈을 감고 있었다. 뽀얀 뺨과 대비되는 연갈색빛의 머리칼은 그 끝이 살짝 구불어 이마에 들러 붙어 있었다. 감긴 눈꺼풀 끝에는 남자치곤 기다란 속눈썹이 매달려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앙 다물고 있는 입술에는 미미한 핏기만이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자잘한 생채기들과 붕대, 그리고 흉물스럽게 꽂혀진 산소 호흡기를 빼놓고 보면 사람과 아주 흡사한 마네킹, 혹은 잡지표지에 한 번쯤 실릴 법한 곱상한 모델이라 칭해도 부족함은 없었다. 아주 익숙했다.

"어이."

부르면 당장이라도 몸을 벌떡 일으킬 것 같았는데.

"일어나. 여기가 학교냐? 수업 시간이야?"

수액 바늘이 꽂힌 손등을 툭툭 건드리며 여느 때처럼, 조금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는데.

"장난치지마. 야. 기껏 불렀는데 씹지 말라고."
"......."
"눈 똑바로 떠서, 나 보라고... 나 좀 보라고!!"

무릎에서 힘이 풀려 버린 건 왜일까.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은 건 왜일까. 침대 위에 힘없이 놓여진 손을 붙들어 매자,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마왕이란 놈에게선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사람의 체온이, 온정이 만개하듯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눈을 감고 있든 쿨쿨 잠을 자고 있든 울지 않을 거라던 막연한 다짐은 오이카와의 창백한 몰골을 마주하기 무섭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바빴다. 뜨뜨미지근한 눈물 줄기는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려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규칙적으로 파동을 이뤄내는 곡선들이 녀석은 아직 괜찮다고, 아직 살아 있다는 증명을 내보이고 있었는데, 붕대와 반창고 몇 개를 빼면 이렇게 멀쩡했는데.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이었는데.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그 말갔던 갈색빛 동공을 동그랗게 떠보일 것 같았는데. 어째선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주변이 찢어지는 곡소리로 가득차서인지, 그 어느 곳보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공간이어서인지, 오이카와의 부모님과 제 부모님의 울음 섞인 한숨이 마이크라도 갖다댄 듯 크게 들려서 인지, 해주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건만 그것들을 토로하며 양심을 짓누르고 있는 이 돌덩이에 대한 변명할 기회조차 저에게 주어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 모두 때문인지.

"원인을 모르겠군요."

다른 환자의 수술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는지 입가에서 마스크를 벗어내리며 오이카와의 진료 차트를 확인하던 의사는 핏덩어리들로 물들어진 의료 장갑을 벗고는 입을 열었다. 녹색으로 일괄된 수술복 곳곳에는 거뭇거뭇한 핏자국이 흉터처럼 흉물스레 튀어 있었다.

"진단 결과는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의식을 잃을 이유도, 잃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의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피냄새가 짙게 펄럭거렸다. 숨이 막혔다. 그의 것이 아니었건만 그의 살결에서 풍기는 피내음 같았다.

"사고 당시 보호자분들은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어째서인지 환자분은..."
"선, 선생님. 저희 토오루. 토오루 괜찮은 거죠? 그냥, 그냥 의식만 잃은 거죠? 금방 깨어날 수 있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좋아해.'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준 건 네 쪽이었는데. 친구와 연인, 이성과 동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벼랑끝에 다다라 있던 건 네 쪽이었는데.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밑바닥까지 쥐어짜내어 친구라는 마지막 희망을 지워버린 건 네 쪽이었는데. 말끔하게 차려둔 밥상 위로 숟가락만 얹듯. 나는 네 고백 위에 내 비겁함을 겹쳐 놓았을 뿐이었다.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었다. 내 손톱 끝자락이라도 어떻게든 닿아 보려고 애쓰는 네 손을 휘어잡아 묵묵히 이끌어 가고 싶었다. 소중하니까라는 변명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 놓으며 진심으로 날 좋아해주는 너를 피해다녔다. 무심한 척을 했다. 더 아껴주자, 조금 더 있다 사랑하자며 내 마음 하나 아끼는 걸 우선시했다.

'우리, 사귀는 거 맞아?'

차게 식어 있던 그 눈은 또렷하게 날 향하고 있었다.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원망하고 있다고, 상처 받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만, 언제쯤 의식을 되찾을지는 저희 쪽에서도 확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너와 꼭 닮은 다른 이와 함께 너와 걷던 길을 걷고 잡지 못했던 손을 잡고 생각도 못하고 있던 데이트를 하고 너와는 해보지도 못했던 사진을 찍고 키스를 하고. 한 순간이나마 네가 아닌 다른 이에게 가슴 설레했던

"이대로 의식을 찾지 못할 경우,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해두셔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를.

의사는 미련없이 발을 돌렸다. 그를 뒤따르던 간호사들은 임시 보호소마냥 마련된 오이카와의 침대 주변을 얇은 장막 하나로 가려주었다. 손등 위로 허연 뼈가 도드라질만큼 오이카와 손만을 꼭 붙들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주룩주룩 굴러 떨어지는 눈물들을 구태여 닦으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가슴 한 가운데를 향해 총구를 겨냥한 후 펑 터뜨려 버려 홍수처럼 뿜어져 나온 것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시뻘건 핏방울 대신 말간 눈물이 터져 나온 거겠지만.

"하지메. 우린 잠깐 바람 쐬러 갔다 올테니까. ...토오루를 부탁할게."

아랫입술을 앙 다물기만 한 채 곡소리 하나 내지 않는 이와이즈미가 안쓰럽기라도 했던 걸까. 그 소리 없는 오열에, 억장이 다시 한 번 무너지기라도 했던 걸까. 두 사람의 부모들은 조용히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으리라. 부모들은 동시에 그리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옮겼지만 애석하게도,

"역시 훤칠하네, 이 쪽의 오이카와씨. 날 닮아서 그런가?"

그 곳엔 둘이 아닌 셋이 남아 있었음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호기심에 병원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사고를 치고 다닐 줄 알았던 오이카와는 의외로 얌전했다. 응급실 내부를 쭉 훑어 보더니 픽 웃더니 팔짱만을 끼고 있었다. 요란한 흰 부츠를 바닥에 대고 딱딱 소리가 나게끔 부지런히 두드려 대기까지 했다.
정작 난해했던 건 그가 짓고 있던 표정이었다. 말 없이 뚝뚝 눈물만 떨구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걱정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또다른 자신을 보며 특별난 감상에 젖어 있는? 머리가 띵해질 만큼 지독한 소독약 냄새에 짜증이 나는?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되지 못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적안에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죽진 않았네?"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죽지 못해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를 내려다 보는 듯한, 그런 경멸심이 말이다.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 내리던 눈물들은 급브레이크를 밟듯 정지하고 지그시 감겨 있는 눈꺼풀을 향한 미안함으로 가득차 있던 사고 회로가 작동하기를 거부했으며 염산을 부어 넣어 매분매초 녹아내리던 내장이 잠잠해졌다.

...뭐야. 잘못. 들은 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겠지. 그렇겠지?

분주한 소음들은 들리지 않았다. 저와 오이카와. 이렇게 셋이서 백야의 공간으로 덩그러니 던져진 것처럼. 주변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잘만 돌아가던 분침과 시침이 이 때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얼어 붙은 듯 느리게만 흘러 갔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고개 너머로, 오이카와는 방긋 웃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이자 끝이 말린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살풋 접어진 눈살 사이로 가느다랗게 번득거리는 붉은 빛이

"의외다."

시퍼런 송곳이 되어 날아 들었다.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이 찬 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을 때, 오이카와는 가볍게 발걸음을 뗐다. 사람의 것치고 체온이 극히 낮았던 손. 얼음장을 방불케했던 손등과 정돈되지 않은 채로 기괴하리만치 길게 자라 있던 손톱. 바로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마왕의 신체 일부는 지금에 와서야 낯선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눈물로 젖은 뺨 정중앙에 딱딱한 손톱 끝이 닿았다. 볼을 쓸어 내리는 손길이 찼다. 오이카와는 몸을 수그렸다. 몸소 눈높이를 낮춰 주었다. 눈은 여전히 생글생글거렸지만,

"보통은. 깨꼬닥하고 다 죽어 버리는데 말이야."

그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멈출 것 같지 않던 시간이 멈추고 뭔가 뱉어 냈어야 할 입은 삽시간에 얼어 붙었다. 뺨에 닿아 있는 오이카와의 낮은 체온이 낯설었다. 등골이 오싹거렸다. 얼음물을 머리통에 끼얹은 마냥 볼이, 얼굴이, 전신이 오들오들 떨려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듯 했다. 귓가를 후벼파는 그 목소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의 것마냥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그것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얼어 붙은 머리통이 느리게 사고를 돌리기 시작할 무렵, 촉 소리가 났다. 물로 가득찬 풍선이 쇠바늘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몸을 추스리다 삽시간에 터져 버리는, 물이 우수수 떨어져 버리는 그런 소리가 났다.
오이카와는 길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새가 앉듯 가볍게, 일상의 일부를 건네듯 간지럽게, 안녕 반가워 같은 인사를 건네듯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곧장 떼어냈다. 얼어 붙은 태엽 인형에 태엽을 감은 듯했다.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두뇌가 굴러다니기 시작하고 쥐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던 심장이 거센 펌프질을 시작했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던 슬픔의 감각은 곧장 불처럼 끓어 올라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왔다. 까드득 소리가 새어 나올만큼 이를 악물었고 주먹을 꽉 쥐어낸 손 안에는 세워진 손톱이 거침없이 살을 파고 들었다.

"너. 뭐라 지껄였냐. 그리고 씨발, 뭔 짓거리야."

입술에는 여전히 서늘한 감촉이 생생했다. 소매를 들었다. 찝찝했다. 더러웠다. 싫었다. 싫은 감각이었다. 교복 소매에 입술을 문질렀다. 앞뒤로, 좌우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문지르며 피가 배어 나올만큼 문질렀다. 한참을 문질러도 그대로였다. 깃털처럼 내리앉은 촉감이 여전했다. 깃털? 만일 깃털이라면, 정말 깃털이 내리 앉았다면 그것은 분명

"뭐긴~ 저 오이카와씨 말이야. 안 죽은 게 용하다고."

적안의 악마에게서 뽑혀져 나온 새까만 깃털이리라. 맹독을 묻힌 칠흑임이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츄~ 했잖아. 애정 표현이라구요, 애정 표현. 찐한 키스도 한 사이에 이런 것도 허락 못해줘?"

안 죽어서 아깝게 됐다 같은 표정으로 입을 맞추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입술 끝에서부터 배어 들어 오는 쇳내에 침을 뱉었다. 불그죽죽한 피가 방울방울 섞여 있었다.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오래 주저 앉아 있어서 그런지 한쪽 무릎이 저릿저릿거렸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쭈그려 앉아 있었고 양손으로 턱받침으로 하고 있었고 눈꼬리를 반달처럼 휘어 둔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눈 깜짝할 새였다. 반쯤 눕다시피 제 몸을 뒤로 제껴야만 했던 오이카와는 제 멱살을 붙든 채 사납게 눈을 치껴든 이와이즈미를 그저 올려다 봐야 했던 것이다.

"이것 좀 놓는 게 어때?"
"닥쳐. 닥쳐. 입 닥쳐!! 너 뭐야. 뭐? 죽진 않았네? 의외? 뚫린 입이라고 뭐든 말할 수 있는 거냐?? 어?!"

입가가 쓰라렸다. 바늘로 콕콕 쑤셔대듯 마구 비벼댄 후유증이 뒤늦게 찾아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말을 끊지 않았다. 입가의 통각마저 마비된 사람마냥 오이카와를 빠르게 쏘아 붙이기 바빴다. 목에 핏대를 곧추 세워가며 고함 아닌 고함을 질러대는 이와이즈미와 달리, 오이카와는 극히 차분했다. 놓아 달라는 말은 정말 말뿐이었는지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가만히 그가 붙든대로 붙들려 있을 뿐이었다. 피가 맺힌 이와이즈미의 입술을 빤히 들여다 보던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럼 뭐. 안 죽었다고 신발 벗고 춤이나 췄어야 했어?"

그는 더이상. 웃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이와이즈미는 이와이즈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여태껏, 분노란 감정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적이 있었던가. 격노란 이름이 전신을 휘감아 이성을 짓밟아댄 적이 있었던가.

"헤에. 이와쨩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구나. 저기서 쿨쿨 잠만 자고 있을 오이카와씨, 점점 부러워지네."
"썩을. 야. 내 말은 말같지도 않ㅡ."
"콱, 뒈져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서는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아, 기분이 안 좋았다.

"왜 이도저도 아니게 살아 남아서는."

열 대를, 아니, 백 대를 쥐어 패도 속이 후련할 것 같지 않았다. 옷깃을 붙든 손을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고 싶었다. 동정과 연민따윈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붉은 홍채들을 이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호흡 한 번 마저 여실히 느껴지는 이 비좁은 거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지고 싶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단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악!!!"

대가리를 부딪혔다. 이마빡이 얼얼해질만큼, 두개골에 금이 갈 걸 각오할만큼 억세게 쥐어 박았다. 벌겋게 부은 두 개의 이마에서 주먹만한 혹이 고개를 내미려 할 때, 이와이즈미는

"그게!! 의식불명인 사람 앞에서 할 소리냐, 이 망할 오이카와!!!"

목청을 높였다.

"마왕이라도 좋았어.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생각했어. 넌 오이카와라 이름을 댔으니까. 겉모습이 살짝 다르다 해도 넌 여전히 오이카와였으니까. 내가 알던 오이카와랑 쥐뿔도 다르질 않았으니까. 그래. 인정해. 가슴 떨려 했어. 기뻐 했어. 너랑 나란히 걷는 것도 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도 무심코 키스를 해버린 것도, 전부 좋았어. 너니까. 오이카와였으니까. 나한테만 보이면 어때. 나만 만질 수 있는 거면 뭐 어때. 어차피 다른 놈들한테 보여주기도 아까웠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사람 답다? 인간 답다? 근데. 근데 말이야. 아니야. 넌 아니야. 넌 오이카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냥, 그냥 찌꺼기인 거야. 내가 만들어 낸!!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 항상 오이카와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그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게 만들어 버려서!"
"......."
"그 미안함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가짜에 불과하다고..."

그래. 넌 환상이야.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내 착각이 일으킨 한낱 착시였던 거야.

"아니야."

그런데 이상하지. 환상에 불과한 널 때려버린 이마가 아까부터 얼얼거려. 혹이라도 난 것 같아. 넌 또 왜 그런 얼굴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헤실거리던 네 얼굴이 왜그렇게 한껏 일그러져 있는 거야. 울고 싶은 건 내 쪽인데

"가짜 아니야. 환상도 아니고 착각도 아니야. 나는... 여기 있어."



"...여기에 있다고."

네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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