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너 컨디션 좋아 보인다고!'

그 말이 내내 걸렸다. 잘못 씹힌 생선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 마냥 영 찝찝했다. 모래 한 줌을 입에 털어 넣은 것 마냥 텁텁했다. 오이카와를 버젓이 냅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을 뿐인데.
가장 따뜻한 색의 수채화를 풀어둔 것 같은 하늘은 붉게 물들어 다정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해는 느즈막히 저물어 갔고 허허벌판인 운동장에는 적적한 바람이 휘몰아 쳤으며 길게 기울어진 그림자 끝은 안개빛 마냥 뿌옇게 변질되어 있었다. 뚜벅거리는 발걸음 뒤에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허리춤을 살짝 거들먹거리면서 입을 동그랗게 모아 휘파람을 휘휘 불며 나를 뒤쫓는 녀석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오이카와는 시끄러웠다. 노을이 예쁘다느니, 전깃줄 위에 까만 새들이 엄청 많다느니, 길가 한복판에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꽃이 귀엽다느니, 걷다말고 몸을 푹 수그리고는 안녕같은 시덥잖은 인사를 건네느니.

"야, 두고 간다."

반 협박조로 말하고 있음에도 헤벌쭉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 이 녀석은 바보중의 바보이리라.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지 속에 든 알맹이는 똑같아 보였다. 쓸데 없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고 대꾸하다 자꾸 뒤쳐지는 오이카와 덕에, 빨리 가자고 말 거는 것조차 지쳐버렸다. 털을 쭈뼛 세우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고양이의 어디가 그리 예쁘다고 눈을 빛내는지 모르겠다.
잠깐, 동물한테는 얘가 보이나?
생각에 잠겨 있을 틈도 없이 오이카와는 몸을 반대편으로 틀었다. 기지개 켜듯 찌뿌둥한 팔을 쭉 뻗어 올리고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렸다. 입가에 걸린 상쾌한 미소는 바로 어제와 그저께 보았던 그것과 쏙 빼닮아 가슴이 쿵 소리를 냈다. 하늘을 향하던 말간 눈이 천천히 돌아 이내 나 하나만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 예쁜 색이었다. 황혼을 담아낸 듯한 붉음이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다가도 그 홍채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쇳덩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고 한 시간 넘게 낑낑 거린 것도 아니고 마라톤을 한창 달리다 마의 구간이라 불리는 35km 부근을 막 지난 것도 아니고 연습 게임 다섯 판 중에 세 판을 지는 바람에 벌칙으로 서브 백 번을 때린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숨이 찼다. 속이 더부룩했다. 귓바퀴로 김이 새는 듯했다. 쿵쿵거리는 떨림이 모세혈관을 휘저었다. 오이카와는 날 보며 웃었고 내 손을 잡았고 그 손을 끌어 제 뺨에 가져갔다. 녀석의 차가운 뺨이 피부결을 타고 흩어졌다. 손난로처럼 여기는 걸까. 오이카와는 내 손을 보물마냥 소중히 잡아들고 뺨을 살살 부볐다. 뜨끈한 내 손이 얼음장같던 오이카와의 것과 감화되어 미적지근하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나는 오이카와를 쳐내지 못했다. 얄팍한 피부 아래로 벌렁벌렁거리는 심장 박동이 낯설어서 였을까. 눈두덩이를 반달처럼 접으며 미소 짓는 오이카와가 미치도록, 내장이 녹아내리도록 사랑스러워서였을까.

"있지."

그것도 아니면,

"데이트 하자."

체리빛으로 오물거리는 입술에

"이와쨩."

네 턱이 꺾여 버리도록 키스를 퍼붓고 싶어서였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허공에 손 뻗은 채 멍 때리고 있는 바보 멍청이 고등학생으로 보이겠지요~?"

아, 젠장.
재빨리 손을 떼버린 나는 발가락에서부터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죄없는 길바닥을 신발로 퍽퍽 걷어차면서 말이다. 다행히 주변에 지나다닌 사람은 없었지만. 소리치는 바람에 목덜미 한 가운데 쭉 뻗은 핏대를 큼큼 가다듬고 뒷목을 쓸어 내렸다. 오이카와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백발백중 노렸어, 저거.
결국 배꼽 잡고 웃고 있는 오이카와 머리통에 꿀밤 두 어개를 쥐어주었다. 덕분에 아프다고 고래고래 불평을 내지르는 통에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혹 났잖아!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리던 오이카와는 여전히 내 뒤에 있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야."
"사과 아니면 이와쨩이랑 말 안해!"
"이미 말하고 있잖아."
"이제부터 정 말 말 안할 거야."
"옆에서 걸어."

구태여 돌아보진 않았다.

"허어어ㅡ. 오이카와씨 감동... 이따만큼 감동 먹었어!!"

망할카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했기 때문이이라. 떨려오는 음성이 들렸다. 통통 튀어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가벼웠다. 나는 앞만 보았다. 무뚝뚝한가? 그럴 지도 모른다. 밀물처럼 터져 나오는 벅차오름을 표현할 길이 없었고 표현하는 방법조차 서툴렀다. 그렇기에 나는,

"칫. 오이카와씨가 손 잡아 주는 거 무지 비싼데. 이와쨩은 평생 감사한 줄 알아!"

조심스럽게나마 손을 뻗어 주었다. 공중에 홀로 붕 떠버린 손 하나는 다른 하나를 마주 잡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손이었다.




#




이전의 오이카와가 우유빵 하나에 울고 우유빵 하나에 웃었다면, 지금의 녀석은 우유빵 하나에 대한 집착을 온데만데 흩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와쨩!!! 이거 봐!! 완전 동그랗고 투명해! 게다가 알록달록거려! 보여? 보여?? 무지개! 와아, 무지개야!!"

성가셨다. 자기 허벅지의 절반쯤 올까말까한 꼬맹이들 셋이서 비눗방울 가지고 노는 걸 보더니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 영락없는 어린 애였다. 저기서 뛰노는 애들 틈에 끼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만큼. 두둥실 떠오른 비눗방울을 톡 건드려 터뜨리기도 하고 팔짝팔짝 뜀박질하며 저 멀리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좇아가기도 했다. 더 나아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비눗방울 빨대를 꼭 쥐고 있는 아이들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제 입김을 훅 불어 넣기도 했다. 저절로 비눗방울이 불어져 나오는 그 진귀한 광경에 입을 모아 환호하는 아이들 앞에서 개폼을 잡는 오이카와를 끌고 오느라 애를 좀 먹었지만 말이다.
그 뿐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해도 저물고 날도 쌀쌀해진 마당에 갑자기

"아이스크리이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외친 것이었다.

"그럼 근처 편의점이나 가서ㅡ."
"안 돼!!"
"뭐가."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콘이 좋단 말이야아."

사람 소매 붙들고 말끝을 길게 늘리며 눈가를 초롱초롱 빛내는 망할 버릇은 어디서 배웠는지. 그보다 취향 확고 하잖아? 마계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에도 맥도날드가 있나 당시에는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이 근처에 없잖아. 그냥 가까운데 가서 적당히,"
"싫어! 싫어싫어싫어! 맥도날드 바닐라 아이스크림콘!!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살인적인 애교가 안통하니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는 있는 떼 없는 떼 바락바락 쓰는 말썽카와였다. 차라리 밟고 지나갈까,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무시할까 하는 생각이 3초쯤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오이카와라고, 나름대로 챙겨주려 애썼던 것 같다. 깊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팔다리를 동동 거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슬쩍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러고 있는 오이카와를 아무도 못 보겠지만 귓구멍이 앵앵거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결국 녀석의 손을 들어주는 결말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헤헤 잘 먹겠습니다!"

언제부터 일방적으로 휘둘리게 된 건지.
마왕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진지 오래였다. 처음 만났을 때야 마력이니 뭐니 했지만 길 한복판에서 공중부양을 하는 일도 없었고 대뜸 파란 불꽃 같은 걸 피워내는 일도 없었고 아우라라던가 특수한 기운이라던가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끔가다 개나 고양이가 으르렁 대는 것만 빼면, 오이카와는 지극히 평범했다. 오히려 인간이라 칭하는 쪽이

"야야. 다 묻히고 먹냐?"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에? 묻었어?"
"입 옆에. 수염도 아니고 칠칠맞게."

오이카와 입가를 손수 닦아내주다 문득 남들 눈에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싶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 오이카와는? 그러다 생각하길 접었다. 허공에 떠 있는 아이스크림을 보든 그게 점점 먹혀져 없어지든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잘못 보셨겠죠. 그 말이 처음부터 준비된 멘트마냥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똥같은 게."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이스크림에 코가 박히도록 집중하고 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며 실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샐쭉 웃는 녀석을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데이트? 이것도 데이트인가. 오이카와 혼자만이 즐거워하는 데이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며 다짜고짜 오락실로 끌고 가서는 여자 애들이나 꺅꺅대며 찍을 법한 스티커 사진기 안으로 쏙 들어간 것이다. 돈은 있냐. 정면의 카메라를 향해 온갖 기괴한 포즈를 취하는 오이카와를 가볍게 밀어내고 지갑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돈을 넣으니 기계적인 여자 음성이 나왔고 오이카와는 눈알을 반짝이며 내 팔뚝을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덕분에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은 모양새가 된 우리는, 오이카와는 빙그레 웃으며 제 뺨을 내 뺨에 붙여 보였다.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이와쨩 표정 풀어!! 사진에까지 못 생기게 나온다구!"

셋, 둘, 하나라는 음성이 빠르게 이어지자 카메라를 향해 상큼도 100의 웃음을 머금고 있던 오이카와가 입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눈가는 실컷 웃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쫑알쫑알거리고 있었다. 붙잡힌 팔이 억세게 쥐어졌고 뺨에 닿는 체온이 미지근했으며 정수리에는 단단한 것이 닿아 왔다. 아, 뿔인가보다. 그러자, 풋 하는 짧은 웃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내 웃음 소리에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 쪽을 봤다. 평소엔 여우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완연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동그란 눈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

"예의상 눈은 감아라."

입맞춤을 속삭여 주었다. 찰칵거리는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꽤 느긋하게, 느릿하게 입을 맞추고 입술이 떨어질락말락하는 그 짧은 거리에서, 서로의 긴장된 숨결이 따뜻하게 와닿는 그 5mm 사이에서, 끊임없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속삭였던 것 같다.
뿔이 달리고 눈이 벌겋다는 외견이 다르다고 해서 네가 오이카와가 아닌 건 아니었다. 너는 여전히 오이카와였고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스티커 사진에 나 혼자만이 멀뚱멀뚱 찍혀 있을 때에도, 그걸 보며 부루퉁해진 얼굴로 꾸미기 펜을 비장하게 집어 들고는 내 텅빈 옆자리를 네 그림으로 채워 넣을 때에도, 삐뚤빼뚤한 선들이 어설프게나마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말하고 있을 때에도, 촌스럽게 꾸며진 그 사진들을 반은 네 것 또 반은 내 것으로 나눌 때에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네 웃음을. 찬란한 오후의 햇살 같은 네 미소를. 순수하게 즐거움으로 북돋아 있던 네 목소리를.
마냥 가볍지만은 입맞춤을 건넨 이후, 솔직히 어색해질 줄 알았다. 오이카와야 그렇다치고 내 쪽이 어색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 따위 싸그리 날려 버리듯 오이카와는 오락실을 나오기 무섭게 향긋한 빵냄새에 이끌려 홀린 사람처럼 발걸음을 돌렸고 나는 녀석의 뒤를 쫓아 다니느라 바빴던 것 같다. 빵집에 들어서자마 우유빵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물론이요, 비둘기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날아 보라고 팔을 휘휘 저어가며 보채는 것 정도는 장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차 옆에 멀뚱히 서서는 창문을 몇 번 두드리다 제 얼굴을 갖다대며 찹쌀떡마냥 짓뭉개 뜨리는 것까지.

"살다살다 너같은 새끼는 처음이다!!!"

이젠 키스한 게 후회스러울 정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흐응~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여전히 좋은 걸.
원래 같았으면 진작에 집에 도착해 씻고 밥 먹고 이불 위에서 뒹굴며 점프 잡지를 보고 있어야할 까마득한 시간. 목줄이라도 묶지 않는 한, 눈 만난 발발이 새끼마냥 뛰어 다닐 말썽카와를 통제할 자신이 없어진 나는 다시 한 번 망할카와의 뒷목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을 서둘렀다.

"뭐, 찐~한 뽀뽀까지 받았으니 오늘은 이쯤 할까!"

이 새끼가.
홧김에 발뒤꿈치로 등딱지를 한 대 걷어 차주니 억 소리가 난 이후로 잠잠해졌다. 거대한 마네킹을 질질 끌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딱히 힘이 들진 않았다. 남자치곤 가벼운 편? 아니. 마왕치곤 가벼운 편? 다른 쪽으로 생각을 굴리려 해도 결국 도돌이표마냥 오이카와에게로 관심사가 돌아왔다. 이런 나 자신이 지긋지긋하다가도 오이카와 없는 자신을 상상하긴 죽어도 싫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없는 마왕.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없는 오이카와.
문득, 오이카와가 보고 싶어졌다. 내 손에 단번에 붙들려 버린 마왕따위가 아니라 진짜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입학식과 졸업식같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그 흔한 사진조차 찍은 기억이 없었다. 사진같은 걸 찍을 시간과 돈으로 나는 곤충을 잡으러 뛰어 다녔고 오이카와는 제 몸만한 배구공을 다루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눗방울이나 술래잡기 같은 애들 장난에는 졸업한 지 오래였다. 오이카와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빵집에도 어느 순간부터 따라가질 않았고 정신 차려봤을 때는 이미 그 곁에 하나마키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 마주 보고 정겹게 대화한 적은 얼마만이던지. 만약, 만약 마왕인 이 녀석이 아닌 진짜 오이카와가 오늘 하루를 나와 같이 보냈더라면, 나는 또 한 번, 너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만약이라는 불가항력에 매달려 보았다.
밤이 깊었다. 어제와 같은, 별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검은 융단에 수놓은 보석들이 눈부시도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오이카와 역시 탄성을 자아냈다.

"이와쨩 저거 보고 있어? 별이 엄청 예뻐."
"어."

내일이면 볼 수 있다. 진짜 오이카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발빠르게 교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을 뛰쳐나가서 오이카와네 집으로 달려 가리라. 반쯤 감긴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하품을 쩍쩍하면서 날 반겨주는 네 손을 붙잡아 말하리라.
좋아. 눈꼽 낀 모습도 좋아. 코트 위에선 완벽을 추구하는 주제에 그 곳만 벗어났다하면 덜떨어진 모습 보이는 것도 좋아. 맞아. 나 피했어. 널 피해다녔어. 네가 너무 소중했으니까. 온실 속에서 화초를 키우듯이 널 아주 소중히 여기고 싶었으니까. 까딱하면 내 손 안에서 부러져 버릴 것 같은 너를, 그리고 나를 막고 싶었으니까. 그럼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깜박거리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허우적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구진 않을까. 그래. 마치 네가 나에게 고백한 그 날 오후처럼.

"이와쨩이랑 같이 보는 하늘이라서 그런가~ 훨씬 더 반짝반짝 거리는 것 같아!"

그럼 '이 녀석'은?
이 녀석과 오이카와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남들 눈에는 안 보인다지만 오이카와 눈에도 안 보이려나. 도플갱어, 같은 건가. 잠깐만. 진짜 도플갱어면... 서로 만나선 안되는 거 아니야? 만나면 불행이 닥친다던가 한 쪽이 안 좋은 일을 겪는다 던가... 당장 내일 아침이면 오이카와를 보러 가야하는데??
한 쪽 매듭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른 매듭이 꼬이기 시작했다. 과부하가 걸려 버린 머리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머리채를 벅벅 문지르다 오이카와를 놓아 주었다. 새파란 대문 옆에 '이와이즈미'라는 문패가 버젓이 놓여 있음에도, 어쩐지 문을 열 기력도 초인종을 누를 기력도 남아 있질 않았다. 내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한 발로 깡총깡총 뛰어다니던 오이카와는 여전히 의미불명이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걸까. 이 쪽은 너 하나로 가득차서 어제 오늘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데.

"...그래. 어차피 안 보이겠지."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 나부랭이 인걸.

"응? 뭐라 했어, 이와쨩?"
"별로."

주머니를 들쑤시니 짤그락거리는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대문을 열었다. 익숙한 앞마당이 펼쳐졌다. 푸르른 잔디밭 위로 말간 불빛이 스며 들었다.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야."

저 녀석한테도 집이 있을텐데.

"너. 언제까지 '이 쪽'에 있을 셈이냐?"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영영 머무르는 건 곤란했다. 내일이면 맞부닥치게 될 오이카와 문제만 해도 머리가 복잡했다. 하물며 내 눈에만 보이니 정신병자 취급받는 건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진지한 의문이었다. 그런데도

"평~생 여기 있을 건데??"

내 등을 꽈악 껴안으며 부비적거리는 이 녀석의 돌아오는 대답은 장난스럽기 짝이 없었다.

"장난하지 말ㅡ. 어딜 만지냐, 이 망할카와!!!"
"배꼽?"
"맞아야 정신 차리지?!"
"아픈 거 싫다구우~ 폭력은 아주아주 나쁜 거에요!"

일순, 대답을 얼버무리려고 화제를 돌린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인가 싶었다. 그야, 오이카와는 멍청이고 사소한 거 하나에도 눈을 반짝반짝거리고 내 옆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에 겨워하는 것 같았고 매 순간순간 내 옆에 달라붙지 못해 안달나 있었고. 그럼에도 그 웃음 사이에 가시처럼 돋아 있는 위화감이 때때로 낯설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화려한 장미를 꺾으려다 손끝에 뾰족한 가시들이 닿는 바람에 손을 떼어버린 것처럼. 더 다가갔다가는 장미를 닮은 불그죽죽한 핏방울을 손가락 아래로 떨굴 것 같아서.
그래도 꺾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더이상 제자리에 머물고 있을 순 없었고 변하지 않는 건 없었고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할 것이 있었다.

"오이카와."
"응?"
"...여태껏,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한 게 있었어."

물이 가득 잠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아 넣었다. 물결이 벌어진 입 안으로 코로 들어와 숨을 옥죄여 왔고 고막에는 찰박거리는 정적만이 닿았다. 숨이 막혔다. 폐에 가장자리에서부터 물이 차올랐다. 기도가 꿀렁거리며 산소를 요했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물은 냉정했다. 내 머리를 물 속으로 누르고 있는 건

"네가 있던 세계에도"

누구?

"내가 있었어?"

등에서 오이카와의 숨결이 느껴졌다.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녀석의 갈비뼈가 여실히 느껴졌다. 내 허리를 두른 채 깍지 낀 손끝에는 기다란 손톱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질도 제대로 안 되어 끝이 쩍쩍 갈라지고만 사뭇, 거친 손톱이.

"생각할 법 하잖아. 너는 네 입으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 했고 이 곳에는 네가 아닌 오이카와가 예전부터 있었어. 존재해 왔다고. 즉, 반대로 말해서 네가 있던 세계에도 내가 있을 수 있단 소리 아니야?"
"......"
"...왜 대답을 못 해. 네가 마왕이면 내가 악마든 마족이든 뭐든 될 거 아니야. 네 아니요도 못하는 멍청이가 됐냐? 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네 입으로 마왕이라고 일컫던 그 때부터 어렴풋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너. 무슨 목적으로 여길 온 거야?"
"...말했잖아. 이와쨩이랑 데이트 하려고ㅡ."
"그럼 끝났잖아. 하룻동안 질리게 데이트 해주고 어울려 주고 충동적이긴 했지만 키스까지 했어. 이이상 뭘 바라는데?"

뭔가 말해보려고 입을 열었던 오이카와는 내 쏘아붙임으로 인해 다시금 입을 꾹 닫았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마. 허리를 가로막고 있던 손깍지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현관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일렁거렸다.
우리 사이는 딱 거기까지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하룻밤 같은 사이.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사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실같은 것이 찰나를 끝으로 끊어지려던 때,

"응."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뭐가."
"내가 있던 세계에도 말이야."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쓰게 웃고 있었다. 텅 빈 손바닥을 제 품으로 갖고 가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살갑게 접어 올리던 눈웃음은

"이와쨩이 있었어."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정말이냐,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그 이와이즈미는 어쩌고 여기에 왔냐. 그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널 기다리고 있을텐데, 왜? 왜?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분수처럼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짓고 있던 쓸쓸한 웃음의 진의를 물을 수 없었다.

"하지메!!!"

벌컥 열려 버린 현관문 너머에서 창백한 얼굴로 날 다급히 부르던 엄마가

"여보!! 하지메 이제 왔어요! 얼른, 얼른 나갈 준비해요!!"
"엄마? 아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날 끌어 안으며

"하지메... 미안하구나. 설명할 틈이 없어. 바로 나가야 해. 가야해. 당장 가야 한단다."
"어디, 어디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병원."

내 머리를 쓸어 내렸기 때문이었다.

...싫은 감각이었다.


*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이와쨩!"

처음엔, 오이카와에게 극적인 심경 변화라도 찾아온 줄 알았다. 온천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머리통에서 나사 서 너개쯤 풀려 버린 오이카와가 저를 놀래키기 위해 화려한 변신이라도 시도한 줄 알았다. 변신이라기엔 좀 촌스러웠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 위에 올라탄 자세 그대로 그를 내려 보며 눈알을 반짝였다. 만개한 장미를 유리 구슬 안에 가둬 둔 듯한 붉디 붉은 눈망울안에는 또렷하게 제 모습을 담고 있었다. 깜박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의 실루엣을 비춰 내렸다. 반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이렇게 갑자기 덮쳐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도 뿔까진 오버 아니냐. 그렇게 생각한 이와이즈미는 호기심 어린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오이카와의 정수리 부근에 두 갈래로 뾰족히 솟아오른 그것들을 톡톡 건드려 보기 시작했다. 마치 수천년의 풍파를 견뎌낸 바위마냥 울퉁불퉁하면서도 단단하기 짝이 없는 그 촉감은 손에 착착 감겨 왔고 그것이 영 나쁘진 않았다. 머리띠 같은 거 아닌가. 호기심을 참다 못해 결국,

"아악!! 악!! 아파, 아파, 아프다구!!! 당기지마!!"

잡아 당겼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벗겨지냐. 요새 머리띠는 퀄리티만 좋은 줄 알았더니."
"머리띠 아냐!! 진짜야!"
"...뭐?"
"진짜 뿔이란 말이야, 이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이와쨩!"

마치 제 신체의 일부를 쥐어 뜯은 마냥 인상을 찡그리던 오이카와는 풍선마냥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훽 돌려 버렸다. 아, 귀여워라. 순간 이와이즈미는 손바닥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위험했다. 생각한 그대로 입밖으로 뱉어낼 뻔했다. 오이카와를 그대로 복사 붙여 넣기 한듯 한 말투와 행동거지와 외견이 이제는 이와이즈미의 이성을 통째로 쥐고 흔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흥!! 마력의 원천을 이와쨩처럼 험하게 다루는 인간은 또 없을 거야!"

오이카와는 무릎께를 탁탁 털며 일어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고 옷자락에 흠이 생기진 않았나 요리조리 돌려 보다 여전히 바닥에 나자빠진 상태로 저를 어벙벙하게 올려다 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건, 이와이즈미가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연습 시합 때, 한창 경기를 뛰고 있을 때, 좋은 서브 토스가 올라 왔을 때, 상대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 입꼬리였다.

"마력?"
"에헴! 이 오이카와씨는 무려 마 왕 이니까."

풉.
웃을 생각 따위 전혀 없었는데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름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제 매끈한 턱을 문지르며 말하는 꼴이 촌극에서 튀어나올 법한 늙은 임금님을 빼다박은 말투였기 때문이리라. 허파에 바람을 들이킨 마냥 배꼽까지 잡고 바닥을 구르며 깔깔 웃어대는 이와이즈미 덕에 오이카와의 얼굴은 이미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하도 웃는 바람에 눈가에 물까지 고여버린 이와이즈미는 웃느라 제 명치까지 뻐근해져 왔다. 당장 그 옆에 마츠카와나 하나마키라도 있었다면 오이카와는 평생 놀림감이었다. 나이를 열 아홉이나 먹고 키도 멀대같은 녀석이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중2 병이라도 걸린 건지. 미친 척 정신 놓고 그 행세를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수 있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낸 이와이즈미는 바지 뒤쪽으로 손을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사진이라도 몇 장 남길 셈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호쾌하게 웃어 가뿐해져 버린 마음이 손마디마디 끝까지 퍼져나가 좀처럼 휴대폰을 찾을 순 없었지만.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꽉 깨문 오이카와는

"나 마왕이야, 이와쨩."

한껏 내리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푸핫! 잠꼬대는 길바닥에서 말고 침대에서나 해라, 멍청카와. 덕분에 좋은 거 알게 됐네. 니가 때아닌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다고 다른 녀석들한테는 내가 일러 둘테니까,"
"정말이야."
"그러니까 잠꼬대는,"
"정말의 정말의 정말이야."

고개를 푹 떨군 채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보자, 그제야 이와이즈미는 입가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수직으로 간절함이 뚝뚝 낙하하는 음성이었다. 오이카와가 힘껏 말아쥔 주먹 끝은 사시나무마냥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흙이 묻었을 골반을 툭툭 털어 내며 그 역시 몸을 일으켰다. 머슥해져버린 분위기에 검지로 볼을 긁적이던 이와이즈미는

"그래서. 지구 멸망이라도 하러 인간계에 나들이 왔냐."

오이카와 옆을 스쳐지나가며 투박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흘러내린 크로스백을 다시금 어깨로 걸쳐 올리고 아까는 한참 찾아도 안 보이던 휴대폰이 바지 앞주머니에 있음을 뒤늦게 확인하며 이와이즈미는 앞으로 나아갔다. 성의 없어 보이고 정성이 부족한 듯한, 동시에 서툴기 짝이 없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존중을 담아낸 언구에 오이카와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일순 쓸쓸함이 그림자마냥 드리워진 표정을 짓던 오이카와는 금세 헤벌쭉 웃으며 벌써 저만치 떨어져 앞서 나가고 있는 이와이즈미의 뒤를 쫓았다.

"아니!"
"그럼 뭔데."
"이와쨩이 보고 싶어서?"
"죽는다."
"데이트 하고 싶어서?"
"콱 뒤져."
"아잉~ 그러지 말구우우~"

달빛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깜깜한 두 사람의 밤길 위에는 유성우마냥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마왕..."

축축한 물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피부결이 바짝 말라붙은 사막마냥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이와이즈미는 거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을 더듬어 수건 걸이에 걸려진 폭신한 수건을 집어 들었다. 물기를 닦아내는 내내 오이카와가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아니. 어제 저녁부터 계속, 계속 오이카와란 이름이 도돌이표마냥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제 팔뚝에 자연스레 팔짱을 겹쳐오고 뺨을 부비대는 오이카와의 감촉이 소스라칠만큼 선명했다.
사실, 다짜고짜 자신을 가리켜 마왕이라 일컫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백퍼센트 신뢰하진 않았다. 오컬트쪽으로 새로운 취미라도 들였나 보지 라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오이카와에게서 처음으로 거리감을 느낀 것은 그 늦은 밤, 이와이즈미가 제 집 대문을 열었을 무렵이었다.

'왜 따라와.'
'이와쨩 집에서 자려고!'
'하? 니네 집은 폼으로 있냐? 콱 안 돌아가?'
'어차피 이와쨩 말고 다른 사람들은 날 못 알아 보거든요~ 흥이다~"

허리 부근에 찰싹 붙은 오이카와는 마치 고목에 들러붙어 앵앵대는 매미 꼴이었다. 그런 오이카와가 또 헛소리를 하겠거니 하는 마음에 그 밉살스런 뿔을 손잡이마냥 힘껏 움켜쥐어 밀쳐 내면서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댔다. 아프다고 발악하는 주제에 허리를 붙든 손을 절대 놓지 않던 오이카와와 저리 가라며 짜증아닌 짜증을 뿜어대던 이와이즈미는

'하지메, 혼자서 뭐하니?'

활짝 열린 현관문 너머로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동시에 몸을 굳혔다. 못 볼 걸 들킨 사람들마냥 후다닥 정자세를 취한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머니를 등진 채 빠르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의 어머니는 짧게 미소 지었지만 그 눈에 담긴 것은 오로지 이와이즈미 혼자였다. 그건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사 도중, 온천 여행을 떠나버린 그의 안부를 묻던 아버지 또한 자신의 옆에 버젓이 서있는 오이카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마왕님의 위력이 어때? 대단하지?'

콧방귀까지 뀌어가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오이카와 입을 빌리자면, 이와이즈미 자신을 제외하고는 마왕인 오이카와를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고 했다. 그 쯤되자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제 눈 앞에 멀쩡히 서 있는 오이카와가 제가 알던 오이카와랑은 별개의 존재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어이!"

수건을 목에 걸친 이와이즈미는 걸걸한 음성으로 목청을 높였다. 성큼성큼 내딛어지는 걸음걸이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소리를 듣긴 한 건지 세상 모르고 쿨쿨 잠에 빠져 있던 오이카와는 입가에 분필이 묻은 마냥 일자로 쭉뻗은 침자국을 다시며

"우움.. 이와쨔앙은... 항상 못생겼구나."

누가 뭐래도 그가 오이카와임이 분명함을 실감나게 하는 잠투정을 했다. 그러자 이와지즈미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 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렁거렸고, 곧이어

"아팟!!!"

바닥에 대자로 널부러진 오이카와의 옆구리를 힘차게 걷어차버리는 이와이즈미였다.

"작작 쳐 자라."
"이와쨩 폭력배."
"폭력배한테 먼지나도록 맞아볼래."
"아니요."

이러는 거 보면 영락없는 오이카와인데.
바락바락 대들다가도 저의 (살기 어린) 말 한 마디면 금방 꼬리를 내리는 건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가벼운 티셔츠 위로 교복을 걸치기 시작한 이와이즈미는 아직도 바닥에 누운 채 공룡 인형을 만져대는 오이카와에게 툭, 말을 내뱉었다.

"야."
"오이카와씨~ 라고 불러 주면 대답해줄게."
"진짜 죽고 싶냐."
"아뇨. 네, 이와이즈미씨. 말씀하세요."

내가 아는 오이카와랑
너는
다른 사람?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물음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혓바닥이 움직이고 성대가 그대로 음을 자아내면 그만이었는데. 어째선지, 입이 벌어지질 않았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제가 알던 오이카와가 그와는 전혀 다르단 사실을.

'우리, 사귀는 거 맞아?'

절박한, 동시에 어딘가 부서져 버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던 그 눈이 전혀 다르단 사실을. 제 손을 맞잡고 싶어 마냥 우물쭈물거리기만 하던 그 손아귀가 '저것'과는 전혀 다르단 사실을.

"아무 것도 아냐."
"피이. 시시하게."
"학교 갔다올테니까 집에 있든지 땅으로 꺼지든지 하늘로 솟던지 마음대로 해."
"정말 마음대로 해도 돼?"
"어. 사고만 치지 마라."
"그럼 나도 학교 갈래!"
"똥같은 놈."
"...그 소리 좀 그만두면 안될까."

넥타이를 매던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가 '너'한테 똥같단 소리 한 적, 있었냐?"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품에 끌어안은 인형의 팔다리를 스프링마냥 늘려댈 뿐이었다. 바닷물을 맨발로 밟고 난 뒤에 발바닥에 남은 찝찝함같은 것이 혀끝을 감돌았지만 이와이즈미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아니, 추궁할 수 없었다. 고작 인형의 단추 구멍만한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오이카와의 모양새가 꼭 청산가리라도 입안에 털어 넣은 듯한 씁쓸함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죽어가는 생선의 눈깔을 닮은 듯한 그의 눈이 끝없는 망망대해를 쳐다 보듯 초점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문으로 끝나야할 문장들이 많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을 인내심이 있었다. 구차한 호기심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저 오이카와'의 허망한 시선 끝이 머무르는 종착점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누워 자빠져서 뭐하냐. 학교 간다며."

제 눈 앞에 마왕이 되어 나타난 오이카와는 기분 변화가 급격했다. 비유하자면 롤러코스터. 방긋방긋 웃으며 이와이즈미 신경을 툭툭 건드리다 그가 버럭 화를 낼때면 꼬리를 말고 쪼르르 내달리다가도 뜬금없이 입을 꾹 다물고 예의 그 표정을 짓곤 했다. 모래알을 씹는 듯한 쓸쓸한 얼굴 말이다. 변화무쌍한 오이카와의 태도에 휘둘리고 있는 건 오히려 이와이즈미였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구분할 길이 없었다. 농담처럼 환하게 웃음짓다가도 때로는 이와이즈미보다 예리했다. 등교길, 세 갈래로 갈라진 길 한 가운데서 오른 편으로 몸을 돌리려던 이와이즈미의 옷깃을 오이카와가 잽싸게 붙든 것이었다.

"학교 가는 길은 저 쪽이잖아?"

습관이었다. 오전 7시 31분은 이와이즈미가 언제나 늦장을 부리는 오이카와를 재촉하러 오이카와네 집으로 쳐들어 가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아, 오이카와가 여기 없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정작 이와이즈미가 되묻고 싶었던 것은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라는 질문이었다.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를 빼다 박은 것같다가도 미묘하게 어긋나고 마는 대화의 흐름에 뒷골마저 뻐근해져왔다. 어디까지를 오이카와로 봐야하고 어디까지를 타인으로 구분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아, 우유빵 냄새! 이와쨩! 우유빵! 우유빵이야!! 가는 길에 우유빵 사러어어 가자아아~"

태연히 제 손을 꼬옥 붙드는 오이카와로 인해, 만개한 해바라기마냥 저와 눈을 맞추며 활짝 웃어 보이는 오이카로 인해, 우유빵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내뱉으며 저를 보채는 오이카와로 인해, 제 심장이 물밖으로 막 뛰쳐오른 생선마냥 마구 펄떡거리던 것을 피부결 아래로 생생히 느껴야 했던 이와이즈미였다. 맞잡은 손바닥은 타오르는 모닥불마냥 홧홧거렸고 그 불길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달큰한 마쉬멜로우는 원래의 형태를 잃고 부드러운 액체로 변모해버린지 오래였다. 따뜻하고 폭신하며 말랑거리던 그 감각은 이와이즈미쪽에서 굳건히 쌓아 올려 두었던 서투름의 장벽을 단숨에 녹이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하나만을 위해 꾹 참고 떨어뜨려 놓았던 발걸음 하나는 또다른 오이카와로 인해 가까워지고 말았다.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코끝이 부닥쳐 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와 동시에, 늪지대 위를 걷는 것마냥 땅바닥 아래로 발이 푹푹 빠지는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바위 덩어리가 무거웠다. 타인에게 마음을 쉬이 내주는 것 같은 죄책감. 타인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했지만 결국 그는 이와이즈미가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와이즈미 자신은 시시때때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다.

'이와쨩 나 안 좋아해?'

그 저주의 말에 이제와서 속죄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그 오이카와랑 대화하는 것조차 무의식중에 피해버리던 자신이 또다른 오이카와랑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 받는게 그저,

"미안해서."
"으응? 뭐라 했어?"

오이카와는 책상 위에 양 손을 올려 제 턱을 받치고 있었다. 자기가 꽃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아까부터 헤실헤실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 눈에는 그저 멍청해 보였을 뿐이지만. 수학 시간이 한창이었다. 복잡한 수식들이 칠판에 한가득 채워져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눈에 차질 않았다. 뭐, 그의 신경은 제 빈 옆자리에 앉아 심심해심심해를 연발하고 있는 오이카와에게 쏠려 있었으니 집중이 안되는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를 곁눈질하던 이와이즈미는 필기 노트 한 켠에 조그만 낙서를 그리기 시작했다. 작고 동그란 얼굴이었다. 삐죽한 머리칼을 그려댔다. 조막만한 눈코입을 점찍듯 그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오이카와의 얼굴 위에 돋아 나있는 뾰족한 뿔을 슥슥 그려 넣었다. 그 아래로 삐뚤빼뚤한 글씨를 써내리기 시작했다.

'너는
오이카와?
아니면 마왕?'

마왕이라 단정짓기엔, 지극히 평범했다. 평범하게 두 발로 걸었고 남들과 똑같이 말을 하고 얌전히 우유빵을 먹고 여느 때처럼 '이와쨩'을 불러 주었다. 외견상의 모습(뿔이라던가, 적안이라던가, 괴상한 옷차림이라던가)만 제외하면 누가 보아도 그는 오이카와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물론, 그가 이와이즈미에게만 보인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안타까웠지만.
코끝에서 나오는 한숨이 꽤 묵직했다. 그런 그를 내리 신경쓰고 있었는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어깨 위로 톡톡 손을 얹었다. 밖에선 아는 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저게 또. 눈썹을 크게 꿈틀거리며 쉬는 시간에 한 소리해야겠다 마음 먹던 이와이즈미는 슬쩍 눈알을 돌리다

"푸흡ㅡ."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아야만 했다. 아, 안된다. 웃으면 안된다. 아무리 오이카와가 손으로 돼지코를 만들었어도, 다른 손으로는 입술을 마름모꼴로 한데 끌어 모았어도, 그 틈새로 보이는 가지런한 이가 형광등 불빛으로 하얗게 번쩍거렸어도, 그대로

'이와쨩 이거 봐봐! 짱 웃기지~'

라 말한 것이

'이어쯍 으구 브브! 쭝 우끄즈~'

라 들렸어도,

"푸핫! 푸하하하!!! 저게 뭐, 뭐, 푸흐, 으하하!!"

웃어서는 안 됐다.
오이카와 덕에 또 한 번 배꼽이 빠지도록 폭소를 자아낸 이와이즈미는 그대로 복도행 신세가 되었다. 빈 옆자리에 대고 깔깔대며 웃고 싶어질 만큼 내 수업이 지루하던가요, 이와이즈미군? 이라는 교사의 따끔한 충고와 더불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와이즈미만 혼이 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졸지에 그를 반의 놀림감으로 만들어 버린 오이카와 또한 그가 복도로 쫓겨난 시간 내내 이와이즈미에게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물론, 잔소리만으로도 모자라 멱살까지 잡혀 이와이즈미의 양손에 데롱데롱 매달려 버린 꼴이 되었던 사실은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자.
수업이 마무리되고 교무실까지 불려가 주구장창 학생의 마음가짐을 교육받은 이와이즈미는 만일 지금이 점심 시간이 아니었다면 다음 수업이고 뭐고 오이카와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칼을 갈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뱃가죽이 등에 눌러 붙은지 오래였고 그를 증명하듯 우람한 천둥 소리가 위에서 풍악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 허파에 바람 난 인간."
"여! 수학한테 대차게 까였다며."

북치고 장구치듯 이와이즈미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였다. 저 두 사람의 놀잇감이 되느니 차라리 공복을 채우겠다 다짐한 이와이즈미는 대답 없이 둘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뭐야. 오이카와 없어서 풀 죽은 줄 알았더니."
"나 여기 있는데~ 안 보이나? 맛층, 진짜 안 보여?"

저 망할카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입을 삐죽이는 마츠카와의 눈 앞에 손바닥을 갖다대고 휘휘 내젓질 않나.

"오랜만에 놀아 주려 했더니~"
"맛키 이와쨩이랑만 놀지 말구 나랑도 놀자아~"

팔짱까지 끼며 개구쟁이마냥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하나마키의 옆구리를 쿡쿡 쑤셔대질 않나.
결국, 참다 못한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뒷목을 질질 끌고 복도 저 편으로 발길을 서두르니 남은 두 사람의 눈에는 이와이즈미가 저 혼자 쇼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픽, 나직하게 웃던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

멀어져가는 이와이즈미의 등짝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인다!"
"어??"

얼떨결에 이와이즈미는 물음표로 끝나는 대답을 내뱉고 말았다. 그 귀에는 마츠카와의 목소리가 제대로 닿질 않았다. 오히려, 제 손아귀에 붙들리고 난 이후부터 떽떽대는 오이카와로 인해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좀 닥쳐봐, 이 사고뭉치. 낮게 내리깐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새삼스레 부정맥같은 것을 실감하고 있을 때면

"너 컨디션 좋아 보인다고!"

빙그레 말아 올린 입꼬리 너머로 들리는 음성이 이와이즈미의 뒤통수를 크게 내리쳤다.

좋아 보인다? 내가? 마왕인지 뭐시긴지 모를 이딴 녀석한테 휘둘리고 있는 내가, 좋아 보인다고? 이 녀석은... 오이카와랑 다른데. 엄연히 별개의 존재인데. 내가, 내가 이런 영문 모를 녀석하고 같이 있어서,

"좋아 보인다고?"










*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아침 댓바람부터 기분이 저조했다. 그 이유인즉, 첫째는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수차례 자다 깨기를 반복해서였고 둘째는 비몽사몽 칫솔질을 하다 무심코 세차게 긁어내리는 잇몸으로 인해 뿌연 양칫물이 불그죽죽하게 물들어서 였으며 셋째는

"아오!"

바닥에 대자로 벌러덩 누운 채, 드르렁드르렁 속편히 코를 골고 헤 벌린 입 사이로 침까지 줄줄 흘리며 잠을 청하고 있는 오이카와 때문이었다. 그의 심한 잠투정 때문에 밤새 뒤척였던 이와이즈미는 거울 너머로 턱까지 늘어진 다크서클을 들여다 보다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잠버릇도 잠버릇이지만 문제는 오이카와였다.
가글거리다 퉷, 하고 뱉어낸 양칫물이 붉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투명한 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굴러 떨어져 구멍 틈으로 사라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입안을 헹구고 세수를 했다. 얼음장 같은 물이 볼을 쓰다듬었다. 찰박거리며 튕겨져 나간 물방울들이 소매 끝을 적셨다. 턱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꺼풀을 천천히 끔뻑거리며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거울 속에 비추어진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언뜻,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오이카와의 인영이 살풋 그려졌다.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끝이 살짝 구부러진 밝은 갈색의 머리칼, 진주를 연상시키는 뽀오얀 피부결, 쌕쌕 거리며 (침까지 질질 흘리는) 입술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오이카와가 오이카와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가 무슨 트리케라톱스냐고."

오이카와의 정수리 부근에 떡하니 돋아나 있는 두 갈래의 뿔이 이와이즈미를 하룻밤내내 뒤숭숭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 뿐일까. 어젯밤 저를 빤히 쳐다보며 눈살을 고이 접어 보이던 눈동자는 체리를 집어 삼킨듯, 빨간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시뻘겠다. 게다가 발목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시꺼먼 로브에 흰색 부츠라니. 지독한 패션 센스였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를 처음 봤을 땐 이 새끼가 달밤에 코스프레 하고 앉았나 라며 모르는 사람인척 무시하려 했다. 오이카와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와쨔앙, 하며 제 품 속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때는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사귀기 시작한지 정확히 38일째가 되는, 아주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나 온천 여행 간다!!"

도시락 반찬으로 싸왔던 계란 말이가 톡, 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달짝지근한 맛의 계란말이였다. 짭짜름한 것도 밍밍한 것도 아닌, 적당히 달짝지근한 맛의 계란말이. 엑스자로 엇갈린 젓가락은 계란말이를 주워낼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정지한 상태를 유지했다.
초승달마냥 방긋 접어 올린 오이카와의 눈이 일순 이와이즈미를 향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가 제 쪽이 아닌 젓가락 끝만을 들여다 보고 있자 둥그렇게 올라가 있던 오이카와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굳어져 갔다. 옥상 한 가운데서 아빠 다리를 한 채 주먹밥을 흡입하고 있던 하나마키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 뜨며 마치 제 일인냥 제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잘 됐네 잘됐어 감탄사를 남발하다 제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툭툭 옥상 바닥을 두드렸다. 싱글벙글한 오이카와를 보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게 꼭 하나마키뿐만인 것은 아니었다. 매점에서 메론빵과 소세지빵, 그리고 초코 우유를 사들고 온 마츠카와는 비닐 포장을 거칠게 뜯어내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먹음직한 메론빵을 큼지막하게 베어물던 그는 초코 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특유의 높낮이 변화 없는 톤으로 입을 열었다. 제 옆에서 묵묵히 도시락통만 노려 보는 이와이즈미와 웃고 있는 오이카와를 번갈아 보면서 말이다.

"대박이네. 니네가 드디어 갈 때까지 가는구나. 그럼 나 20살 되기도 전에 청첩장 받아 볼 수 있는 거야?"
"맛층 그거 아니야~?"

마츠카와는 이 일로 한참을 골려줄 참이었다. 이제는 학교 공인 커플이라 불리는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단 둘이서 온천 여행까지 간다니, 새삼 놀랄 노자였다. 한 술 더 뜬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어깨 동무까지 하며

"이야~ 온천 좋지~ 뜨끈한 물에 몸을 푸욱 담그는데 천장에는 끝이 안 보이는 까만 밤이, 그 사이로는 달과 별이 그림처럼 수놓아져 있는 거지. 그리고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두 사람에게 남은 건 오직! 불타오르는 섹,"
"맛키 거기까지!!!"

그를 놀렸던 것이다. 하나마키 팔을 툭 밀쳐낸 오이카와는 제 뺨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옥상 바닥에 철푸덕 소리를 내며 앉은 오이카와 품에 안긴 도시락통은 민트색 보자기로 칭칭 둘러져 있었다.

"가족끼리 일박 이일로 가는 거라구우. 이와쨩이랑 관계 없단 말이야."

오이카와는 도록 눈알을 굴리며 슬슬 이와이즈미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 생신 기념으로 떠나는 온천 여행은 자그마치 일주일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입에 자크를 꾹 잠근 채 내색 하나 보이지 않다가 출발하기 하루 전 날에야 통보 아닌 통보를 던진 것이었다. 모두의 앞이라는 이유를 가장한 채 특별히 이와이즈미를 겨냥하면서 말이다. 50일도 채 안된 제 사랑스러운 연인에게조차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이유? 별 거 없었다. 그저 심술이 났을 뿐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 오이카와가 기억하는 이와이즈미는 무뚝뚝함의 결정체였다. 비유하자면 석고상, 흠 없는 목석.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좀 더 웃을 줄 알았고 장난삼아 (정말 아팠지만) 꿀밤도 놓을 줄 알았고 실없는 농담 하나에도 망할카와 죽여버린다 같은 간담이 서늘한 말대꾸를 주절주절 늘어 놓곤 했다. 좋아해와 사랑해 사이의 애매모호한 애정전선을 엉망진창으로 흐려 놓은 것은 순전히 오이카와의 고백 탓이었다.

'좋아해.'

귓불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물들일 정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그 말 한 마디는 두 사람 사이를 쩌적, 하고 두동강내는 듯했다. 고작 한 걸음. 이와이즈미의 흙묻은 운동화까지 고작 한 걸음이었건만, 그 한 걸음이 도저히 떼어지질 않았다. 쇳덩어리가 뒷목을 짓누르고 있었는지 고개는 점점 숙여져 갔고, 대답 대신 들려 오는 부산한 바람 소리는 절로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죄없는 입술만 깨물며 왜 말해서, 왜, 왜 말해 버려서, 그렇게 자신을 탓하고 있으면

'왜 이제 말하냐, 이 굼벵카와. 누구 애간장 다 태워먹으려고 작정이라도 했어?'

믿기 힘든 목소리가 반향음처럼 돌아왔다.
얼마나 기뻐했던가. 뻘쭘하게 서서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와이즈미에게 달려들어 얼마나 소리내 울었던가. 꺽꺽 대는 해괴한 목소리와 눈물 범벅 콧물 범벅으로 똘똘 뭉쳐 이아쨔앙, 이아쨩, 조아해, 좋아, 너무 조아해, 뭉게진 발음으로 얼마나 많이 목놓아 울었던가.
그 뒤로, 행복한 날들만이 반짝반짝거릴 줄 알았다. 그토록 원하던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어 마냥 뜻깊은 날들만이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갓 연애를 시작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예상을 단박에 뒤엎어 버리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개 들자면, 첫째, 손을 잡지 않았다. 이 부분은 사귀기 전이나 후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잡아 주겠지, 잡자고 하겠지 그렇게 속으로 기대만 한 게 이미 한달이 넘었다. 사람마다 좋아함의 깊이가 다를 수 있다고, 손을 잡는 것조차 누군가에겐 무척 용기를 내야하는 뜻깊은 일 일수 있다고, 일단 참고 기다려보자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켜보기 위해 오이카와는 무던히 노력했다. 노력하고 있었다. 둘째,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설마 싶었다. 설마 거창하게 데이트라 이름 붙인 주말 나들이까지 나와서 눈 한 번 안 마주칠 줄은 몰랐다. 말만 꺼냈다하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내리깐채로 이 쪽을 보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소외당하는 느낌이었나? 오이카와의 불길한 직감은 대화에서까지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평소처럼 말을 주고 받다가도 그 사이에 오이카와 자신이 끼어드는 일이 생기면 이와이즈미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차라리 '도망'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쯤되면 인내심도 한계였다. 사귀기로 한 이후 손도 안잡고 눈도 안마주치고 말도 안섞으려 하니 누가 봐도 오해할만 했다. 감정이 식은 걸까? 그럼 싫다고 말을 하던가. 처음부터 안 좋아했다고, 너한테 별다른 감정 없다고 똑바로 말하던가. 그 애매한 태도가 오히려 오이카와를 가슴아프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이와이즈미는 모르는 걸까.
각설하고, 이와이즈미의 이러한 신물나는 태도에 질려 버린 오이카와는 이번엔 제 쪽에서 먼저 으름장을 내놓기로 했다. 그게 온천 여행이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일박 이일이었다. 갑작스레 하룻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이와이즈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떤 얼굴을 할까, 어떤 아쉬운 기색을 내비칠까. 오이카와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로, 누구랑 가는 거냐며 정색하고 화를 내는 이와이즈미를 볼 수 있길, 격노심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질투심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눈길을 볼 수 있길, 섭섭한 티를 팍팍 내며 가지 말라 보채는 이와이즈미를 볼 수 있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깝게 됐네."

마츠카와가 웃음끼 섞인 말을 던졌다.

"뭐가?"
"...계란말이."
"그러게."

손으로 대충 먼지를 털어냈지만 입에 넣기엔 영 찜찜했다. 결국 그것을 도시락통 한 구석에 따로 모셔 놓는 이와이즈미였다. 흐응, 콧소리를 내던 마츠카와는 흘끗 오이카와 쪽을 보았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쉬던 오이카와는 언제 그리 신났냐는 듯 풀 죽은 기색이 가득했다. 힘없이 도시락 뚜껑을 열고는 젓가락질을 깨작가렸다. 결국 중계는 내 역할이냐,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터치했다.

"애인님이 하루씩이나 자리를 비운다잖아. 옆구리 시리겠다고."

고슬고슬한 밥을 들어 올린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마 오이카와는 숨도 내뱉지 못한 채, 타액으로 녹아내린 밥알을 식도 앞 가장자리에서 일시 정지 시킨 채 귀를 쫑긋 세웠으리라.

"글쎄."

그 뒤로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통 기억나지 않았다. 깡통 로봇으로 변신한 마냥 기계적으로 팔꿈치와 손가락을 구부려 밥알을 입 안에 쑤셔 넣었고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하나마키와 단어를 주고 받았다. 문장이 되지 못한 그것들은 그저 단어가 되어 허공으로 먼지 몇 톨이 되어 흩어질 뿐이었다. 해가 길게 기울어져 옷을 갈아입기 위해 부실에 가보니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한 발 먼저 부실에 들어서 있던 그는 홀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크로스백을 바닥에 내려놓던 오이카와는 사뭇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에 가서 월요일 밤 늦게 돌아올 거야."
"그래."
"학교도 빠질 거야. 선생님께 말씀 드려놨어."
"어."

이와이즈미는 돌아보지 않았다. 짙게 그림자진 등만 내보인채 분주히 교복 단추 풀어내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혀로 입을 축이며 이와이즈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짝사랑이라면 지긋지긋했다. 혼자 하는 감정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어떻게 사귀게 됐는데,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비참해지려고 시작한 사랑이 아니었는데.

"내 말 제대로 듣고 있긴 해?"
"듣고 있어."
"반응이 왜 그래?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없어. 그보다 옆으로 좀 가라. 방해 돼."

방해.
그 단어를 듣자마자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인내심? 이성? 마음? 뭐든 좋았다. 뭐든, 뭐든 좋으니 한바탕 쏟아낼 분출구가 필요했으리라.

"이와쨩 나 안 좋아해?"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만일 '그래'라는 대답이라도 듣게 된다면, '안 좋아했어' 따위의 대답을 듣게 된다면,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온 마음이란 이름의 석탑이 단숨에 형태를 잃어 버리고 비참한 소음을 터뜨리며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걸 다 감내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용암이 위장 안을 꿀렁거리며 내장을 녹여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뜨끈한 열기가 정수리까지 한껏 차올라 치익, 소리를 내며 귓구멍으로 간신히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하루라도... 하루라도 이와쨩 안 보면 가슴이 꾹 하고 저려오고 보고 싶어서 안달나고 이와쨩 얼굴만 그려보다 잠드는데."
"야. 얘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돼."
"이러고 있으면... 이러고 있으면 나 혼자 이와쨩 좋아하는 것 같잖아. 나 혼자만 설레고 섭섭하고 나 혼자만 좋아하고 실망하고 나 혼자만 사랑하고 화내는 것 같잖아."

그토록 보고 싶던 이와이즈미의 두 눈은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당혹감ㅡ. 기가 찼다. 뭐가 그리 당황스러웠을까. 여태껏 눈 한 번 안 마주치려고 가진 노력이란 노력은 다 했으면서, 자신과 마주하기 싫어 꽁무니빼고 도망다니기만 했으면서. 이제와서 뭐가 그리 놀라운 걸까.

"오이카와, 내 말은"
"핑계 대지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싫어진 거지? 말 안해도 뻔히 보여. 사귄지 한 달이 넘었는데 데이트 나갔다 하면 한참이나 떨어져서 걷고 내가 뭘해도 시큰둥 해하고. 전엔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했으면서 이젠 내 얼굴도 안 보려하고."
"......"
"우리, 사귀는 거 맞아?"

오이카와는 그대로 부실을 뛰쳐 나갔다. 이와이즈미와 한 공간에 있기를 포기한 사람 마냥 대놓고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주말 연습 내내 이와이즈미를 무시하는 오이카와 덕에 야하바와 스파이크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와이즈미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온천 갔다와서 진주빛 피부가 되어 돌아 올게! 라며 생긋 웃고는 홀연히 사라진 오이카와의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외로운 연습이 끝나자, 밖은 이미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을녘에 부는 단풍잎을 닮은 바람은 때때로 시퍼런 칼날을 품어 이와이즈미의 볼끝을 스쳤다. 손톱 끝이 시렸다. 피부결 아래의 뼈마저 시렸다. 가을이 이렇게 추웠던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이와이즈미는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좋아해.'

오이카와에게 고백 받았던 날의 날짜, 요일, 몇 시 몇 분 몇 초를 기억하고 있었다. 푹 숙인 고개 사이로 파르르 흔들리는 긴 속눈썹을 기억했다. 오이카와의 꽉 움켜쥔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던 그 찰나를 기억했다. 앵두마냥 잔뜩 불거진 뺨과 귀와 목덜미를 기억했다.
좋아했다.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오이카와를 좋아했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오이카와를 사랑했다. 저 혼자만 걷는 외로운 길인 줄 알았던 그 곳이 오이카와 곁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선 채로 잠이 들었나 싶었다. 쨍쨍한 대낮에 뒷뜰에서 선 채로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다. 그토록 좋아하던 상대방이 알고보니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라는 행복한 결말은 머리털 하나하나가 벼락을 맞은 듯 쭈뼛거릴 정도로 달콤한 것이었다. 벼랑끝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던 이 위태로운 길이 마치 알록달록한 솜사탕으로 채워진 꽃길처럼 변모한 것 같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적응이 되다 싶다가도 어디까지 표현해야 할 지를 몰랐다. 그대로 안으면 되는 걸까? 오이카와를 힘껏 안아 들어 눈, 코, 입, 그리고 뺨에 차례대로 입이라도 맞춰야 하는 걸까? 이대로 벽에 몰아 붙여 입술이 불어 터져 붕어 입술이 되어 버릴 만큼 키스를 흩뿌려도 되는 걸까? 학교가 파하는 대로 그 여리여리한 팔목을 휘어잡아 옥상이든 부실이든 체육 창고든 아무도 없는 빈 교실이든 박차고 들어가 거추장스러운 자켓과 조끼, 와이셔츠를 뜯어내듯 벗겨 버리고 우유빛으로 탐스럽게 빛나는 살결 위에 경건한 입맞춤을 내리 꽂으면 되는 걸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제 아래에서 울며 불며 매달리고는 하지메, 하지메를 외칠 오이카와를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함부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교 섞인 웃음이 오롯이 저만을 향했으면 좋겠다. 차라리 두 손 두 발을 칭칭 동여매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었다. 오이카와가 정말 보고 싶을 때에만 남들 몰래 주머니 속 오이카와를 꺼내 살그머니 입을 맞추고 부끄러운 기색을 여실히 내비치는 그 얼굴을 사랑스럽게 들여다 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자신의 것이었다. 누구도 뭐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누구도 탐낼 수 없는, 오이카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생각이 그쯤까지 피어 오르니 이와이즈미 자신조차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사람 하나를 좋아할 수가 있나. 좋아한다 라고 단순히 단정짓기엔 분수처럼 끓어오르는 독점욕과 소유욕, 그리고 무한한 질투심이 정도란 걸 지나치고 있었다. 이 쯤되면 집착이었다. 혹여나 오이카와가 이런 제 본심을 알게 되는 날엔,

"끔찍하겠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스산한 바람을 타고 검붉은 단풍잎이 흩날렸다. 괜한 마음에 오이카와를 멀리한 것이 아니었다. 싫어진 건 더더욱 아니었다.

"나때문에 도망가버리면 안되잖냐."

손을 잡으면 깍지를 끼고 싶었고 깍지를 끼면 옆에 바짝 붙고 싶었고 옆에 바짝 붙으면 포옹도 아무렇지 않게 할 것 같았다. 그 뒤에 펼쳐질 그렇고 그런 일들도 파죽지세로 치뤄질 것만 같았다. 연갈색으로 물들어진 눈동자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제 시꺼먼 속내가 그대로 내비칠 것 같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때와 장소를 안가리고 다짜고짜 키스를 퍼부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소중했다. 소중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자신만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기에, 예쁜 도자기처럼 애지중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같잖은 욕정에 휘둘려 그의 순결함을 짓밟는 일따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어쩌다,

'이와쨩 나 안 좋아해?'
'우리, 사귀는 거 맞아?'

이런 결말로 변해 버렸을까.
잔뜩 엉켜버린 실타래같은 지금 상황이 거지같아 이와이즈미는 제 머리를 한 손으로 벅벅 긁었다. 냉전도 이런 냉전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아무리 변호해봤자 지금의 오이카와에겐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으리라. 오이카와가 돌아오는 월요일까지 오이카와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로등이 깜박였다. 거리는 칠흑으로 물들었고 그 위론 별이 총총 수놓아진 은하수가 우주마냥 펼쳐져 있었다. 씁쓸한 마음 한 구석과 달리 유독시리 아름다운 밤하늘에 괜시리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지금쯤 온천수에 몸 담그고 실컷 놀고 있겠네, 그 녀석."

싸움 아닌 싸움을 진탕해버리고 홀연히 떠나버린 오이카와였지만 놀러가서까지 심란해하는 모습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와이즈미 자신이 이렇게 바라고 있어 봤자 어차피 근심 걱정만 태산처럼 쌓다 돌아 오겠지만 말이다.
이와이즈미는 슬슬 발길을 재촉했다. 이이상 늦어졌다가는 어머니께 된통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오이카와 하나로 가득찬 머리통을 애써 진정시키고 팔 다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와쨔앙!!!"

정체모를 인영 하나가 제 몸을 덮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식간에 길바닥 위로 나자빠진 이와이즈미는 욱씬거리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자는 꽤 묵직하게 제 몸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넘어지기 직전 들렸던 목소리 톤하며, 코 끝에 닿는 희미한 쿨워터향 하며, 별빛을 받아 힐끗힐끗 반짝이는 연갈색의 짧게 웨이브진 머리칼 하며, 아주 익숙할 따름이었다. 이와이즈미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어떤 사람의 것과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이와쨔앙ㅡ."
"...오이카와?"

몸을 힘껏 부벼대는 꼴이 영락없는 햄스터였다. 덩치만 큰 햄스터. 목소리도, 행색도, 외견마저도 그 모든 것이 이 정체불명의 인영을 오이카와라 시사하고 있었지만 이와이즈미는 자기 입으로 내뱉은 그 말 마저 믿기 힘들었다. 오이카와가 왜 여기에? 그보다 온천은? 냉전 상태 아니었어? 의문이 거기서만 끝났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너... 이 뿔은 뭐냐? 게다가 옷은 또 왜 이래. 달밤에 코스프레?...그럼 모른 척 해줄테니까, 그냥 네 갈 길 가라."

아까부터 가슴팍을 찔러대는 두 개의 뿔은 물론이요, 오이카와의 어깨 부근에서부터 치렁치렁 늘어진 천같은 것이 담요처럼 덮여져 기분이 영 깨름칙하던 이와이즈미였다. 그러자, 오이카와(로 추정되는 인물)는 훽하니 고개를 치켜 들며 방긋 웃었다. 이와이즈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이와쨩."

그 자신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오메가버스au
*마츠하나 언급 O
*알파 이와이즈미 X 알파인척 하는 오이카와




W. 멜






발걸음이 떨어질때마다 향이 짙어졌다. 코를 자극하는 금단의 열매가 손짓하고 있었다. 다급해지는 마음에 어느새 숨이 가쁘도록 뛰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발이 멈춘 곳은 배구부실이었다.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매일 밥먹듯이 오던 곳이었다. 문틈새로 비져나오는 매혹. 어느 멍청이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가. 손바닥으로 옮은 긴장감이 땀으로 흘러내렸다. 손잡이를 당기고, 문이 열리면, 지독한 페로몬의 냄새가 날개돋듯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던,

"....이와쨩.."

오이카와. 아니라고, 아닐거라고 믿었는데.

"설명 좀 해봐."

약통을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지 말좀 해보라고, 멍청아!!!!"

오이카와는 눈동자에 초점을 잃고 달뜬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날 알아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벌게진 얼굴 아래로 흠뻑 젖은 옷자락이, 벌어진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열기가, 방탕하게 벌어진 그의 고간이, 그 모든 것이, 그가 '오메가'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알파(Alpha). 인간 중에서도 소수만이 선택받은 이종족.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알파들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우월감과 과시욕. 그것들은 베타들로 하여금 알파를 우러러 보게 만들었고, 존경하게 만들었다. 알파가 가는 길은 특별했다. 그 누구도 알파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건 본능이었다. 그들에게 거역하는 순간 덮쳐올 공포와 오한은 모든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끝없는 동경과 전율 사이, 알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했다.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룰, 그리고 운명.

사립 아오바죠사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했다. 알파가 세명이나 되는걸로 모자라, 그 세명이 전부 같은 학년, 같은 배구부였으니까. 뭐, 그 뿐만은 아니었다. 알파 중에 오이카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꺅꺅 거리는 여자들이 넘쳐났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이카와는 알파였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신체에, 독보적인 배구 센스, (쓸데없이) 상큼한 미소. 그 녀석은 우리들의 중심이었다. 우리들의 주장이었다.

"오메가 새끼."

복도까지 들려오는 욕지꺼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니, 정확히는 마츠카와가. 마츠카와는 몸을 떨고 있는 하나마키의 귀를 가려주었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아아, 알만 했다. 오이카와, 마츠카와 그리고 나. 우리들은 알파였다. 그에 비해 하나마키는,

"박아달라고 울어봐. 어? 어?? 히팅싸이클 있잖아?"

오메가(Omega).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알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오메가가 따라다녔다. 보이지 않는 신분제의 밑바닥 중 맑을 기미가 없는 흙탕물. 논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오메가가 있었고, 차별과 멸시는 그들이 안고가야할 운명이었다. 알파와는 또다른 운명. 그럼에도 알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오메가. 그 지독한 모순 사이에서 오메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여자한테도 박아달라 하냐?? 남자 맞아?"
"킥킥, 야 운다 울어. 울면 박아줄거라 생각하니봐~"
"걸레 같아~~"

차별과 박해.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베타(beta)라 칭해지는 보통 사람들이 오메가를 걸레짝 마냥 취급하는것은 당연했다. 오메가들 역시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히팅사이클이 돌아올때면 교배, 성행위, 또는 섹스라는 본능에 매달리는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아아, 알파라고 다를 건 없었다. 우리 또한 오메가를 먹잇감으로 여길뿐이니. 그렇다고 알파가 반드시 오메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다. 페로몬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달아오른 오메가를 찾아내 성관계를 맺을 순 있어도, '같이'가 의무는 아니었다. 그건 오메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성욕을 달래줄 '누군가'가 굳이 알파일 이유는 없었다. 곁에 있는게 베타라 한들, 가족이라 한들, 친구라 한들, 욕구만 만족시켜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둘째는,

"귀닫고 무시해."
"하지만...."
"괜찮아."

각인(刻印). 알파와 각인을 하게되면, 어느 누구도 오메가를 건드릴 수 없었다. 알파의 것이기 때문에, 알파의 소유이기 때문에, 알파의 반려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츠카와는 각인을 새겼다. 하나마키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 알파의 각인이 없는 오메가따위, 들짐승 속에 던져진 어린 아이일뿐이니까. 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징그러웠다. 애정이 흘러넘치다 못해 서로를 아끼는게 이미 잉꼬부부 수준이라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도 간혹, 오늘처럼 오메가에 대한 능욕이 계속되는 날이면 마츠카와는 이빨을 곤두세웠다. 썩을 베타들 때문이라는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알파지만 오메가를 대면해본적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오이카와, 멍 때리지마."

눈 앞의 이녀석이 신경쓰이는 것 뿐일까. 오이카와는 기본적으로 가벼운 남자였다. 알파임에도 모두에게 친절한(컨셉의)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가끔씩 기시감이 뿜어져나왔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지금이 그러했다.

오이카와는 옆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오메가를 짓밟고, 괴롭히고, 추행하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바보같기는. 괜한 오지랖이다. 알파인 네가, 내가, 우리가 건드려봤자 상황은 악화될 뿐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을텐데.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뒤통수를 한대 후려쳤다.

"아파!!!!"

네가 거들어봤자 변하는 건 없다고, 멍청카와.

"이와쨩 너무해!!!!! 이 오이카와씨 뒤통수 깨지면 이와쨩이 책임질거야?!"
"더 맞고 싶냐."
"꺄앗! 무서워, 맛층~"

그래. 이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너와 나는 주어진 길 위에 나란히 서있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평탄한 아스팔트길. 그 단단한 길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단 하나의 틈도 없을거라며, 나는 믿고 있었다.




#




먹을 풀어놓은 하늘은 빛을 잃고 있었다. 출입문 너머로 먹구름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젠장. 우산 챙겨나올걸. 오이카와는 신발 하나 갈아신는 것마저 꾸물거리고 있었다. 아, 쥐어패고 싶다. 빨리 안하면 비가 쏟아질텐데.

"맛키 없으니까 하는말인데."
"말하지마."

알고 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왜?!"
"오메가에 대한거잖아."

톡, 토옥. 빗줄기가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신발을 신다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나 싶더니만. 비와 섞여 풍기는 젖은 흙의 냄새. 코를 간질이는 물 비린내.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오이카와의 손에는 곱게 접힌 종이가 들려있었다. 시덥지 않은 고백일 것이다. 그것이 진짜 오이카와를 향한 건지, 아니면 알파 오이카와를 향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선뜻 종이를 버리지 못했다. 알파주제에 베타를 신경쓰고 있었다. 어차피 걸림돌밖에 안되는 것들. 일일이 상대해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네가 그것들의 타겟이 되고 있는 건 알고 있냐, 오이카와.

오메가 대접이 극과 극이니, 그들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내비치지 않고 사회와 단절된 삶은 택하는 오메가. 차별받고, 박해받고, 사회에서 매장당하더라도, 이를 견뎌내고 세계의 흐름에 몸을 내던지는 오메가. 마지막으로, 적당한 알파를 물색해 각인을 뜯어내려는 오메가. 오이카와는 그 타겟으로 삼기에 아주 적절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와쨩은 오메가 어떻게 생각해?"
"별 생각 없는데."
"헤에-"

처음엔,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 정성이 담긴 초콜렛도, 애정이 스며든 편지도, 불러내서 직접 전하는 고백도, 전부. 물론 사귄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단지 당사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미안하다며 정중히 거절할뿐. 그 귀찮은 짓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하는 사이에 먼저 지친 건 내 쪽이었다. 내가 먼저 그만하라 했다. 쓸데 없이 감정 낭비하지 말라고. 네가 무슨 입장인지 아냐고. 그렇게 한 명 한 명 신경쓰다 네가 잘못되면 어떡할거냐고. 네가 몇 안되는 알파라는 걸 자각은 하고 있냐고. 그 때, 오이카와는 막연히 웃었다. 쓸쓸하면서도 시원섭섭하다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곱게 접힌 종이는 갈갈이 찢어졌다.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 있던 또다른 마음도 갈갈이 찢어졌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찢고, 찢고, 또 찢은 종이조각들을 망설임 없이 허공에 놓아주었다.

"나는 있지, 불쌍한 거 같아."

또다. 허무만을 품고 있는 눈동자다. 이질감이 풍기는 눈동자다.

"사회로 나가면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받고, 괴롭힘당하고, 심지어 성희롱은 일상다반사잖아."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오이카와는 신발을 갈아신었다. 운동화에는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 같았다.

"언제 히팅 싸이클이 돌아올지 몰라. 억제제는 임시 방편일뿐이잖아? 그거 부작용도 장난 아니라던데."

이상했다. 개소리를 하고 있는 오이카와. 평소랑 미묘하게 다른 오이카와. 오메가를 신경쓰는 오이카와. 의구심이라는 이름의 화살은 하나면 충분한 것을. 오이카와 스스로가 그것들을 자아내고 있었다. 뭘 숨기고 있는걸까. 뭘 말하고 싶은걸까.

"차라리 자살하는게 편하지 않을까."
"너."

이상해. 요새 왜그래? 사춘기라도 왔냐?

"하나마키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마라."

머리가 생각하는대로 내뱉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빌어먹게도 나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알파, 오메가 운운하기 이전에, 작은 인간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의문을 털어놓을수 조차 없는 인간. 분위기에 맞춰 튀어나온 말이 뭐였더라.

"...미안."

저 썩을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나마키 얘기를 한듯하다. 아, 하필이면. 아니야. 말나온 김에 끝내자.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전부 해버리자. 가슴이 들썩이도록 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등뒤로 들이치는 비바람이 서늘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충 말하고 싶진 않았다. 제대로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오메가든 알파든, 똑같은 사람이다. 차별받을 이유따윈 없어. 적어도 난 안 그럴거니까."

사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나에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있는가? 방금까지도 하나마키를 언급한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던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나도 날 모르겠다. 어느 쪽이 정답일까. 어떤게 올바른 것일까.

"오이카와. 알파 주제에 오메가 걱정하냐?"

어느 쪽이 정답이든, 난 너에게 묻고 싶었다. 네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장난삼아 던진 의문에 담긴 진의를, 네가 눈치채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뇌용량 터진다."
"너무해!!!"

빌어먹을. 빌어먹을빌어먹을빌어먹을 나 자신. 빠득-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걸 듣고는 히스테릭한 얼굴로 변한 오이카와가 먼저 달려갔다. 발빠르게 달려나가봤자, 오늘의 날씨는

"비..."

보아하니 오이카와도 우산이 없는 듯 했다. 이럴 땐 방법이 없다.

"뛰어."
"앗, 이와쨩!! 같이 가!"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뛰어가던 우리들은, 친구였다. 와이셔츠를 적시는 빗방울마저 '같이'라는 단어 아래에 상쾌해지던 우리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돌이켜보면, 오이카와는 주기적으로 아팠다. 그게 한달이든, 두달이든, 반년이든.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 자신이 후회스러울뿐이다.

"야. 괜찮냐?"

안색이 창백한 날이면 밥먹듯 화장실로 향하던 녀석이었다. 텅 빈 위장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헛구역질. 등을 흠뻑 적신 식은땀 줄기. 고통을 쥐어짜내는 신음소리. 너의 온몸이 아프다 말하고 있었음에도,

"윽... 아냐. 아무것도 아냐. 속이 안좋아서 그래. 먼저... 우욱, 가있어."

너는 숨쉬듯 거짓말을 내뱉었다. 괜찮다는 거짓으로 똘똘 뭉쳐 너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냐. 나한테 솔직히 털어놓을 순 없는 거냐? 내가 너랑 친구 일이년 하는 것도 아니고, 척보면 척인데 그딴 허접한 거짓말이 통할거라 생각해?

"그따위 말 잘도 믿겠다. 등 대봐."

어물쩡 넘어가려하는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오이카와는 둘째치고, 나는 어쩌고 싶은건지. 규칙적으로 오이카와의 등을 두드리다 뻗쳐오르는 화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퍽- 앗차, 힘 너무 줬나. 손바닥과 등근육이 만나 강타하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리하지말라고."
"으윽.. 미안, 이와쨩."

변기를 붙잡고 있는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서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면 될텐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될텐데. 너는 왜.

"좋게 말할 때 병원가라."
"....응."
"앞에 묘한 공백은 뭐냐?"
"병원 갈게. 걱정시켜서 미안."
"...알면 됐고."

이상 기류를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내가 아니었다. 하물며 마츠카와나 하나마키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문'.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오이카와의 뒤를 쫓아다니던 보이지 않는 그림자. 짝사랑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를 뒤쫓는 양날의 검. 베타들의 들리지 않는 수군거림. 나는 그런 것들에 서툴렀다. 아니, 사실은 관심이 없었다. 베타따위 알바 아니었으니까. 나에게 중요한 건 (빌어먹을) 오이카와, 배구부 녀석들, 가족 정도였으니까.

그 날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에, 지저귀는 새 한마리 날아다니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바 없는 등교길에는 사람 하나 없었고, 오이카와는 연락두절이었다. 망할 오이카와, 주장이라는게 늦잠이나 자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너 때문에 아침 연습 시작 늦어지면 죽여버-

[전화 되냐?]

별 일이었다. 마츠카와가 메일을 보낸 것 말이다. 대뜸 전화를 하거나, 일주일 후에야 답장을 보내는 그 마츠카와가, 먼저 메일을 보냈다. 가라앉은 공기. 차가운 휴대폰 액정. '오이카와' 라 적혀있는 문패. 버튼을 눌렀다. 두개의 소리가 들려왔다. 통화음이 이어지는 소리와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 고요한 아침 거리를 헤치는 두개의 소리가 어울리고, 하늘거리다, 닿아내린다.

"어. 무슨 일인데."

먼저 닿은 것은 마츠카와였다. 신호음 하나가 끊어지기도 전에 받던 마츠카와는 한참이나,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겼나 싶어 귀를 떼려던 찰나,

[...너 지금 학교냐.]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은 잡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나혼자 이공간에 동떨어진 감각이었다.

"아니. 이제 가려고."
[오이카와는?]
"안그래도 지금 초인종-"

다음은 초인종. 비죽 뻗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나올 오이카와를 기대했다. 언제나처럼 싱긋- 웃어제끼며 느긋하게 걸어나오는 오이카와를 한대 쥐어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깜박하고 두고 나온 도시락에 다시 집에 들어갈 오이카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내 기대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나온 것은

"어머, 하지메구나~ 토오루라면 벌써 등교했단다. 헛걸음하게 해서 어쩌나.."
"아, 아닙니다."

어머님이었다. 김이 빠졌다. 불현듯 느껴졌던 기시감은 우연이었나. 그보다 쿠소카와 이자식, 나한테 말 한마디 안하고 학교에 가버려? 오냐, 학교에서 보이기만 해봐. 죽여버릴테다.

[이와이즈미.]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빠졌다. 아직 통화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면, 오이카와 어머님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주었다. 어느 쪽을 들어야 할까.

"아참~ 하지메, 이거 토오루한테 전해줄래?"
[오이카와 말이야.]
"평소엔 항상 들고다니던 약인데, 오늘따라 놓고 갔더구나. 학교에서 만나면 전해주렴."
[아무래도 오메가 인것 같다.]

갈라져 있던 길이 하나로 이어졌다. 지나치게 조용했던 거리가 하나둘 소음을 토해냈다. 시끄럽다. 귀를 앵앵거린다. 두통이 밀려온다. 어질거리는 의식 사이로 딱딱한 것이 손끝에 닿아왔다. 약통. 하얀 약통.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눈이 침침해졌나. 아니,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듣고 있어?]
"....어."

듣고 싶지 않다. 아니, 들렸다. 분명 마츠카와가 뭐라고 한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뭐라고 했던거 같은데.

[단순한 소문이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새하얀 약통을 뒤덮은 알파벳. 구불거리고 흔들리는 시야속에서 확실히 보인 것은 'The Only for Omega'. 그렇게 못이 박혔다.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나부터 열가지가 전부,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가 오메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페로몬...향이.."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이 향이, 유혹을 흩뿌리는 이 향이, 오메가가 뿜어대는 그것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폐로 스며드는 페로몬 향이 이성을 어지럽혔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끊을 수 없는 마약이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나를 먹어줘, 나를 찾아줘, 그리고 나를 탐해줘.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다.

페로몬 냄새가 유독 강렬하다.
억제제가 내 손에 있다.
오이카와는 집에 없다.

"설마...."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소문으로 물결치고 이었다.

'그 오이카와가 오메가?'
'알파 아니었어?'
'와, 대박이네. 그럼 지금까지 우릴 속인거야?'
'하등 생물주제에-'
'알파의 탈을 쓰고 잘도-'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시선들이 펼쳐졌다. 그 시선에, 입놀림에, 일일이 반응할 시간따윈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을 겨를이 없었다. 짙어지는 페로몬 향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금단의 과실. 그 끝이 가리키는 것은 배구부실이었다. 땀이 차오른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잡소리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지껄이는 베타놈들따위 신경꺼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에겐, 나에겐-

벌컥-

"....이와쨩..."

네가 중요했다.

"설명 좀 해봐."

다행히 다른 알파한테 노려진건 아닌 것 같았다. 마츠카와와 나말고도 이 근처의 알파들은 얼마든지 있었을테니. 말그대로 독안에 든 쥐. 대답해, 오이카와. 왜 거짓말을 한거냐. 왜 알파라고 한거냐.... 왜 우릴 속였어.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지 말 좀 해보라고, 멍청아!!!!"

눈물에 젖어 있었다. 땀에 젖어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채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비명 하나 못지른채 그렇게, 너는 그렇게 혼자서 계속,

"너... 오메가였어?"

버텨왔던거냐.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제와서 책망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이카와는 빌어먹을 오메가였고, 히팅 싸이클에 걸렸고, 내 손엔 억제제가 들려 있었다.

"우릴 속였어?"
"그 약... 읏,흐읏.."
"지금까지 알파인척 하면서, 오메가를 위하는 마냥 행동한거냐고-"

울먹거리지마. 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지마. 애달복걸하지마.

"묻고 있잖아!!!!"
"...미안..미안... 하앙,미안.. 이와쨩..."

부실 안을 진동하는 페로몬 향에 나도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지금 오이카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미안하다 말하는 사이에도 흥분을 못 참고 신음소리를 내지르는 오이카와가 어딘가 고장났다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걸 인내하고 견뎌내야할 내가,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뜨거워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근데 나 지금.. 흣, 죽을것 같아. 이와쨩 알파지? 알파 맞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네가 발버둥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다. 내쪽으로 반쯤 기어오던 네가 뭘 원하는지 쯤은, 알고 있다.

"나... 나 좀 도와줘. 나 좀 살려줘.. 나 오메가 맞아.. 오메가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찔하도록 풍겨오는 오메가의 향, 페로몬 내음,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손짓. 여기서 널 안으면, 널 갖게 되면, 넌 후회할까? 아아, 생각따위 하고 싶지 않다. 붙잡고 있는 이성을 후려치고 싶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을 부대끼고 싶다. 젖어있는 옷자락을 찢어버리고 우윳빛 살결에 이를 박고, 성감대를 있는대로 빨아대고 싶다. 젠장, 정신을 놓을 것 같다.

"알파가 없으면 안돼... 부탁이야, 이와쨩.. 나 좀 박아줘. 나 박히고 싶어. 질척질척 소리나게.. 박혀서.... 이와쨩이, 아읏, 하라는대로.. 하읏, 다할테니까...."

종아리에 닿아오는 손이 뜨겁다. 뜨겁다 못해 데일것 같다. 이걸 놓치면 세상이 끝난다는 표정으로 내 다리를 꽉 쥐던 오이카와는 그 달뜬 숨을 피부위로 내뱉었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들고 부실 문을 닫았다. 덜덜 떨려오는 손가락이 몇번이고 헛손질을 했다. 잠궜다. 이대로 오이카와를 내버려두느니, 다른 녀석들에게 눈이 풀린 오이카와를 보여주느니, 차라리.. 차라리-

"....젠장,젠장,젠장."

머리를 헤집었다. 변명하자. 방법은 이뿐이었다고. 너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고. 네가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라면, 너의 처음은

"후회하지마라."

'나'이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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