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W. 멜
'너 컨디션 좋아 보인다고!'
그 말이 내내 걸렸다. 잘못 씹힌 생선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 마냥 영 찝찝했다. 모래 한 줌을 입에 털어 넣은 것 마냥 텁텁했다. 오이카와를 버젓이 냅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을 뿐인데.
가장 따뜻한 색의 수채화를 풀어둔 것 같은 하늘은 붉게 물들어 다정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해는 느즈막히 저물어 갔고 허허벌판인 운동장에는 적적한 바람이 휘몰아 쳤으며 길게 기울어진 그림자 끝은 안개빛 마냥 뿌옇게 변질되어 있었다. 뚜벅거리는 발걸음 뒤에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허리춤을 살짝 거들먹거리면서 입을 동그랗게 모아 휘파람을 휘휘 불며 나를 뒤쫓는 녀석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오이카와는 시끄러웠다. 노을이 예쁘다느니, 전깃줄 위에 까만 새들이 엄청 많다느니, 길가 한복판에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꽃이 귀엽다느니, 걷다말고 몸을 푹 수그리고는 안녕같은 시덥잖은 인사를 건네느니.
"야, 두고 간다."
반 협박조로 말하고 있음에도 헤벌쭉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 이 녀석은 바보중의 바보이리라.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지 속에 든 알맹이는 똑같아 보였다. 쓸데 없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고 대꾸하다 자꾸 뒤쳐지는 오이카와 덕에, 빨리 가자고 말 거는 것조차 지쳐버렸다. 털을 쭈뼛 세우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고양이의 어디가 그리 예쁘다고 눈을 빛내는지 모르겠다.
잠깐, 동물한테는 얘가 보이나?
생각에 잠겨 있을 틈도 없이 오이카와는 몸을 반대편으로 틀었다. 기지개 켜듯 찌뿌둥한 팔을 쭉 뻗어 올리고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렸다. 입가에 걸린 상쾌한 미소는 바로 어제와 그저께 보았던 그것과 쏙 빼닮아 가슴이 쿵 소리를 냈다. 하늘을 향하던 말간 눈이 천천히 돌아 이내 나 하나만을 오롯이 담아냈다. 아, 예쁜 색이었다. 황혼을 담아낸 듯한 붉음이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다가도 그 홍채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쇳덩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고 한 시간 넘게 낑낑 거린 것도 아니고 마라톤을 한창 달리다 마의 구간이라 불리는 35km 부근을 막 지난 것도 아니고 연습 게임 다섯 판 중에 세 판을 지는 바람에 벌칙으로 서브 백 번을 때린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숨이 찼다. 속이 더부룩했다. 귓바퀴로 김이 새는 듯했다. 쿵쿵거리는 떨림이 모세혈관을 휘저었다. 오이카와는 날 보며 웃었고 내 손을 잡았고 그 손을 끌어 제 뺨에 가져갔다. 녀석의 차가운 뺨이 피부결을 타고 흩어졌다. 손난로처럼 여기는 걸까. 오이카와는 내 손을 보물마냥 소중히 잡아들고 뺨을 살살 부볐다. 뜨끈한 내 손이 얼음장같던 오이카와의 것과 감화되어 미적지근하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나는 오이카와를 쳐내지 못했다. 얄팍한 피부 아래로 벌렁벌렁거리는 심장 박동이 낯설어서 였을까. 눈두덩이를 반달처럼 접으며 미소 짓는 오이카와가 미치도록, 내장이 녹아내리도록 사랑스러워서였을까.
"있지."
그것도 아니면,
"데이트 하자."
체리빛으로 오물거리는 입술에
"이와쨩."
네 턱이 꺾여 버리도록 키스를 퍼붓고 싶어서였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허공에 손 뻗은 채 멍 때리고 있는 바보 멍청이 고등학생으로 보이겠지요~?"
아, 젠장.
재빨리 손을 떼버린 나는 발가락에서부터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죄없는 길바닥을 신발로 퍽퍽 걷어차면서 말이다. 다행히 주변에 지나다닌 사람은 없었지만. 소리치는 바람에 목덜미 한 가운데 쭉 뻗은 핏대를 큼큼 가다듬고 뒷목을 쓸어 내렸다. 오이카와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백발백중 노렸어, 저거.
결국 배꼽 잡고 웃고 있는 오이카와 머리통에 꿀밤 두 어개를 쥐어주었다. 덕분에 아프다고 고래고래 불평을 내지르는 통에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혹 났잖아!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리던 오이카와는 여전히 내 뒤에 있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야."
"사과 아니면 이와쨩이랑 말 안해!"
"이미 말하고 있잖아."
"이제부터 정 말 말 안할 거야."
"옆에서 걸어."
구태여 돌아보진 않았다.
"허어어ㅡ. 오이카와씨 감동... 이따만큼 감동 먹었어!!"
망할카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했기 때문이이라. 떨려오는 음성이 들렸다. 통통 튀어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가벼웠다. 나는 앞만 보았다. 무뚝뚝한가? 그럴 지도 모른다. 밀물처럼 터져 나오는 벅차오름을 표현할 길이 없었고 표현하는 방법조차 서툴렀다. 그렇기에 나는,
"칫. 오이카와씨가 손 잡아 주는 거 무지 비싼데. 이와쨩은 평생 감사한 줄 알아!"
조심스럽게나마 손을 뻗어 주었다. 공중에 홀로 붕 떠버린 손 하나는 다른 하나를 마주 잡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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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오이카와가 우유빵 하나에 울고 우유빵 하나에 웃었다면, 지금의 녀석은 우유빵 하나에 대한 집착을 온데만데 흩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와쨩!!! 이거 봐!! 완전 동그랗고 투명해! 게다가 알록달록거려! 보여? 보여?? 무지개! 와아, 무지개야!!"
성가셨다. 자기 허벅지의 절반쯤 올까말까한 꼬맹이들 셋이서 비눗방울 가지고 노는 걸 보더니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 영락없는 어린 애였다. 저기서 뛰노는 애들 틈에 끼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만큼. 두둥실 떠오른 비눗방울을 톡 건드려 터뜨리기도 하고 팔짝팔짝 뜀박질하며 저 멀리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좇아가기도 했다. 더 나아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비눗방울 빨대를 꼭 쥐고 있는 아이들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제 입김을 훅 불어 넣기도 했다. 저절로 비눗방울이 불어져 나오는 그 진귀한 광경에 입을 모아 환호하는 아이들 앞에서 개폼을 잡는 오이카와를 끌고 오느라 애를 좀 먹었지만 말이다.
그 뿐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해도 저물고 날도 쌀쌀해진 마당에 갑자기
"아이스크리이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외친 것이었다.
"그럼 근처 편의점이나 가서ㅡ."
"안 돼!!"
"뭐가."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콘이 좋단 말이야아."
사람 소매 붙들고 말끝을 길게 늘리며 눈가를 초롱초롱 빛내는 망할 버릇은 어디서 배웠는지. 그보다 취향 확고 하잖아? 마계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에도 맥도날드가 있나 당시에는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이 근처에 없잖아. 그냥 가까운데 가서 적당히,"
"싫어! 싫어싫어싫어! 맥도날드 바닐라 아이스크림콘!!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살인적인 애교가 안통하니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는 있는 떼 없는 떼 바락바락 쓰는 말썽카와였다. 차라리 밟고 지나갈까,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무시할까 하는 생각이 3초쯤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오이카와라고, 나름대로 챙겨주려 애썼던 것 같다. 깊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팔다리를 동동 거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슬쩍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러고 있는 오이카와를 아무도 못 보겠지만 귓구멍이 앵앵거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결국 녀석의 손을 들어주는 결말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헤헤 잘 먹겠습니다!"
언제부터 일방적으로 휘둘리게 된 건지.
마왕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진지 오래였다. 처음 만났을 때야 마력이니 뭐니 했지만 길 한복판에서 공중부양을 하는 일도 없었고 대뜸 파란 불꽃 같은 걸 피워내는 일도 없었고 아우라라던가 특수한 기운이라던가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끔가다 개나 고양이가 으르렁 대는 것만 빼면, 오이카와는 지극히 평범했다. 오히려 인간이라 칭하는 쪽이
"야야. 다 묻히고 먹냐?"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에? 묻었어?"
"입 옆에. 수염도 아니고 칠칠맞게."
오이카와 입가를 손수 닦아내주다 문득 남들 눈에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싶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 오이카와는? 그러다 생각하길 접었다. 허공에 떠 있는 아이스크림을 보든 그게 점점 먹혀져 없어지든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잘못 보셨겠죠. 그 말이 처음부터 준비된 멘트마냥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똥같은 게."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이스크림에 코가 박히도록 집중하고 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며 실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샐쭉 웃는 녀석을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데이트? 이것도 데이트인가. 오이카와 혼자만이 즐거워하는 데이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며 다짜고짜 오락실로 끌고 가서는 여자 애들이나 꺅꺅대며 찍을 법한 스티커 사진기 안으로 쏙 들어간 것이다. 돈은 있냐. 정면의 카메라를 향해 온갖 기괴한 포즈를 취하는 오이카와를 가볍게 밀어내고 지갑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돈을 넣으니 기계적인 여자 음성이 나왔고 오이카와는 눈알을 반짝이며 내 팔뚝을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덕분에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은 모양새가 된 우리는, 오이카와는 빙그레 웃으며 제 뺨을 내 뺨에 붙여 보였다.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이와쨩 표정 풀어!! 사진에까지 못 생기게 나온다구!"
셋, 둘, 하나라는 음성이 빠르게 이어지자 카메라를 향해 상큼도 100의 웃음을 머금고 있던 오이카와가 입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눈가는 실컷 웃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쫑알쫑알거리고 있었다. 붙잡힌 팔이 억세게 쥐어졌고 뺨에 닿는 체온이 미지근했으며 정수리에는 단단한 것이 닿아 왔다. 아, 뿔인가보다. 그러자, 풋 하는 짧은 웃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내 웃음 소리에 놀란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 쪽을 봤다. 평소엔 여우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완연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동그란 눈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
"예의상 눈은 감아라."
입맞춤을 속삭여 주었다. 찰칵거리는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꽤 느긋하게, 느릿하게 입을 맞추고 입술이 떨어질락말락하는 그 짧은 거리에서, 서로의 긴장된 숨결이 따뜻하게 와닿는 그 5mm 사이에서, 끊임없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속삭였던 것 같다.
뿔이 달리고 눈이 벌겋다는 외견이 다르다고 해서 네가 오이카와가 아닌 건 아니었다. 너는 여전히 오이카와였고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스티커 사진에 나 혼자만이 멀뚱멀뚱 찍혀 있을 때에도, 그걸 보며 부루퉁해진 얼굴로 꾸미기 펜을 비장하게 집어 들고는 내 텅빈 옆자리를 네 그림으로 채워 넣을 때에도, 삐뚤빼뚤한 선들이 어설프게나마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말하고 있을 때에도, 촌스럽게 꾸며진 그 사진들을 반은 네 것 또 반은 내 것으로 나눌 때에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네 웃음을. 찬란한 오후의 햇살 같은 네 미소를. 순수하게 즐거움으로 북돋아 있던 네 목소리를.
마냥 가볍지만은 입맞춤을 건넨 이후, 솔직히 어색해질 줄 알았다. 오이카와야 그렇다치고 내 쪽이 어색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 따위 싸그리 날려 버리듯 오이카와는 오락실을 나오기 무섭게 향긋한 빵냄새에 이끌려 홀린 사람처럼 발걸음을 돌렸고 나는 녀석의 뒤를 쫓아 다니느라 바빴던 것 같다. 빵집에 들어서자마 우유빵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물론이요, 비둘기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날아 보라고 팔을 휘휘 저어가며 보채는 것 정도는 장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차 옆에 멀뚱히 서서는 창문을 몇 번 두드리다 제 얼굴을 갖다대며 찹쌀떡마냥 짓뭉개 뜨리는 것까지.
"살다살다 너같은 새끼는 처음이다!!!"
이젠 키스한 게 후회스러울 정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흐응~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여전히 좋은 걸.
원래 같았으면 진작에 집에 도착해 씻고 밥 먹고 이불 위에서 뒹굴며 점프 잡지를 보고 있어야할 까마득한 시간. 목줄이라도 묶지 않는 한, 눈 만난 발발이 새끼마냥 뛰어 다닐 말썽카와를 통제할 자신이 없어진 나는 다시 한 번 망할카와의 뒷목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을 서둘렀다.
"뭐, 찐~한 뽀뽀까지 받았으니 오늘은 이쯤 할까!"
이 새끼가.
홧김에 발뒤꿈치로 등딱지를 한 대 걷어 차주니 억 소리가 난 이후로 잠잠해졌다. 거대한 마네킹을 질질 끌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딱히 힘이 들진 않았다. 남자치곤 가벼운 편? 아니. 마왕치곤 가벼운 편? 다른 쪽으로 생각을 굴리려 해도 결국 도돌이표마냥 오이카와에게로 관심사가 돌아왔다. 이런 나 자신이 지긋지긋하다가도 오이카와 없는 자신을 상상하긴 죽어도 싫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없는 마왕.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없는 오이카와.
문득, 오이카와가 보고 싶어졌다. 내 손에 단번에 붙들려 버린 마왕따위가 아니라 진짜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입학식과 졸업식같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그 흔한 사진조차 찍은 기억이 없었다. 사진같은 걸 찍을 시간과 돈으로 나는 곤충을 잡으러 뛰어 다녔고 오이카와는 제 몸만한 배구공을 다루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눗방울이나 술래잡기 같은 애들 장난에는 졸업한 지 오래였다. 오이카와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빵집에도 어느 순간부터 따라가질 않았고 정신 차려봤을 때는 이미 그 곁에 하나마키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 마주 보고 정겹게 대화한 적은 얼마만이던지. 만약, 만약 마왕인 이 녀석이 아닌 진짜 오이카와가 오늘 하루를 나와 같이 보냈더라면, 나는 또 한 번, 너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만약이라는 불가항력에 매달려 보았다.
밤이 깊었다. 어제와 같은, 별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검은 융단에 수놓은 보석들이 눈부시도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오이카와 역시 탄성을 자아냈다.
"이와쨩 저거 보고 있어? 별이 엄청 예뻐."
"어."
내일이면 볼 수 있다. 진짜 오이카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발빠르게 교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을 뛰쳐나가서 오이카와네 집으로 달려 가리라. 반쯤 감긴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하품을 쩍쩍하면서 날 반겨주는 네 손을 붙잡아 말하리라.
좋아. 눈꼽 낀 모습도 좋아. 코트 위에선 완벽을 추구하는 주제에 그 곳만 벗어났다하면 덜떨어진 모습 보이는 것도 좋아. 맞아. 나 피했어. 널 피해다녔어. 네가 너무 소중했으니까. 온실 속에서 화초를 키우듯이 널 아주 소중히 여기고 싶었으니까. 까딱하면 내 손 안에서 부러져 버릴 것 같은 너를, 그리고 나를 막고 싶었으니까. 그럼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깜박거리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허우적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구진 않을까. 그래. 마치 네가 나에게 고백한 그 날 오후처럼.
"이와쨩이랑 같이 보는 하늘이라서 그런가~ 훨씬 더 반짝반짝 거리는 것 같아!"
그럼 '이 녀석'은?
이 녀석과 오이카와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남들 눈에는 안 보인다지만 오이카와 눈에도 안 보이려나. 도플갱어, 같은 건가. 잠깐만. 진짜 도플갱어면... 서로 만나선 안되는 거 아니야? 만나면 불행이 닥친다던가 한 쪽이 안 좋은 일을 겪는다 던가... 당장 내일 아침이면 오이카와를 보러 가야하는데??
한 쪽 매듭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른 매듭이 꼬이기 시작했다. 과부하가 걸려 버린 머리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머리채를 벅벅 문지르다 오이카와를 놓아 주었다. 새파란 대문 옆에 '이와이즈미'라는 문패가 버젓이 놓여 있음에도, 어쩐지 문을 열 기력도 초인종을 누를 기력도 남아 있질 않았다. 내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한 발로 깡총깡총 뛰어다니던 오이카와는 여전히 의미불명이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걸까. 이 쪽은 너 하나로 가득차서 어제 오늘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데.
"...그래. 어차피 안 보이겠지."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 나부랭이 인걸.
"응? 뭐라 했어, 이와쨩?"
"별로."
주머니를 들쑤시니 짤그락거리는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대문을 열었다. 익숙한 앞마당이 펼쳐졌다. 푸르른 잔디밭 위로 말간 불빛이 스며 들었다.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야."
저 녀석한테도 집이 있을텐데.
"너. 언제까지 '이 쪽'에 있을 셈이냐?"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영영 머무르는 건 곤란했다. 내일이면 맞부닥치게 될 오이카와 문제만 해도 머리가 복잡했다. 하물며 내 눈에만 보이니 정신병자 취급받는 건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진지한 의문이었다. 그런데도
"평~생 여기 있을 건데??"
내 등을 꽈악 껴안으며 부비적거리는 이 녀석의 돌아오는 대답은 장난스럽기 짝이 없었다.
"장난하지 말ㅡ. 어딜 만지냐, 이 망할카와!!!"
"배꼽?"
"맞아야 정신 차리지?!"
"아픈 거 싫다구우~ 폭력은 아주아주 나쁜 거에요!"
일순, 대답을 얼버무리려고 화제를 돌린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인가 싶었다. 그야, 오이카와는 멍청이고 사소한 거 하나에도 눈을 반짝반짝거리고 내 옆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에 겨워하는 것 같았고 매 순간순간 내 옆에 달라붙지 못해 안달나 있었고. 그럼에도 그 웃음 사이에 가시처럼 돋아 있는 위화감이 때때로 낯설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화려한 장미를 꺾으려다 손끝에 뾰족한 가시들이 닿는 바람에 손을 떼어버린 것처럼. 더 다가갔다가는 장미를 닮은 불그죽죽한 핏방울을 손가락 아래로 떨굴 것 같아서.
그래도 꺾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더이상 제자리에 머물고 있을 순 없었고 변하지 않는 건 없었고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할 것이 있었다.
"오이카와."
"응?"
"...여태껏,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한 게 있었어."
물이 가득 잠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아 넣었다. 물결이 벌어진 입 안으로 코로 들어와 숨을 옥죄여 왔고 고막에는 찰박거리는 정적만이 닿았다. 숨이 막혔다. 폐에 가장자리에서부터 물이 차올랐다. 기도가 꿀렁거리며 산소를 요했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물은 냉정했다. 내 머리를 물 속으로 누르고 있는 건
"네가 있던 세계에도"
누구?
"내가 있었어?"
등에서 오이카와의 숨결이 느껴졌다.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녀석의 갈비뼈가 여실히 느껴졌다. 내 허리를 두른 채 깍지 낀 손끝에는 기다란 손톱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질도 제대로 안 되어 끝이 쩍쩍 갈라지고만 사뭇, 거친 손톱이.
"생각할 법 하잖아. 너는 네 입으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 했고 이 곳에는 네가 아닌 오이카와가 예전부터 있었어. 존재해 왔다고. 즉, 반대로 말해서 네가 있던 세계에도 내가 있을 수 있단 소리 아니야?"
"......"
"...왜 대답을 못 해. 네가 마왕이면 내가 악마든 마족이든 뭐든 될 거 아니야. 네 아니요도 못하는 멍청이가 됐냐? 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네 입으로 마왕이라고 일컫던 그 때부터 어렴풋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너. 무슨 목적으로 여길 온 거야?"
"...말했잖아. 이와쨩이랑 데이트 하려고ㅡ."
"그럼 끝났잖아. 하룻동안 질리게 데이트 해주고 어울려 주고 충동적이긴 했지만 키스까지 했어. 이이상 뭘 바라는데?"
뭔가 말해보려고 입을 열었던 오이카와는 내 쏘아붙임으로 인해 다시금 입을 꾹 닫았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마. 허리를 가로막고 있던 손깍지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현관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일렁거렸다.
우리 사이는 딱 거기까지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하룻밤 같은 사이.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사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실같은 것이 찰나를 끝으로 끊어지려던 때,
"응."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뭐가."
"내가 있던 세계에도 말이야."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오이카와는 쓰게 웃고 있었다. 텅 빈 손바닥을 제 품으로 갖고 가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살갑게 접어 올리던 눈웃음은
"이와쨩이 있었어."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정말이냐,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그 이와이즈미는 어쩌고 여기에 왔냐. 그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널 기다리고 있을텐데, 왜? 왜?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분수처럼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짓고 있던 쓸쓸한 웃음의 진의를 물을 수 없었다.
"하지메!!!"
벌컥 열려 버린 현관문 너머에서 창백한 얼굴로 날 다급히 부르던 엄마가
"여보!! 하지메 이제 왔어요! 얼른, 얼른 나갈 준비해요!!"
"엄마? 아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날 끌어 안으며
"하지메... 미안하구나. 설명할 틈이 없어. 바로 나가야 해. 가야해. 당장 가야 한단다."
"어디, 어디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병원."
내 머리를 쓸어 내렸기 때문이었다.
...싫은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