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오메가버스au
*마츠하나 언급 O
*알파 이와이즈미 X 알파인척 하는 오이카와




W. 멜






발걸음이 떨어질때마다 향이 짙어졌다. 코를 자극하는 금단의 열매가 손짓하고 있었다. 다급해지는 마음에 어느새 숨이 가쁘도록 뛰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발이 멈춘 곳은 배구부실이었다.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매일 밥먹듯이 오던 곳이었다. 문틈새로 비져나오는 매혹. 어느 멍청이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가. 손바닥으로 옮은 긴장감이 땀으로 흘러내렸다. 손잡이를 당기고, 문이 열리면, 지독한 페로몬의 냄새가 날개돋듯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던,

"....이와쨩.."

오이카와. 아니라고, 아닐거라고 믿었는데.

"설명 좀 해봐."

약통을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지 말좀 해보라고, 멍청아!!!!"

오이카와는 눈동자에 초점을 잃고 달뜬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날 알아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벌게진 얼굴 아래로 흠뻑 젖은 옷자락이, 벌어진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열기가, 방탕하게 벌어진 그의 고간이, 그 모든 것이, 그가 '오메가'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알파(Alpha). 인간 중에서도 소수만이 선택받은 이종족.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알파들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우월감과 과시욕. 그것들은 베타들로 하여금 알파를 우러러 보게 만들었고, 존경하게 만들었다. 알파가 가는 길은 특별했다. 그 누구도 알파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건 본능이었다. 그들에게 거역하는 순간 덮쳐올 공포와 오한은 모든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끝없는 동경과 전율 사이, 알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했다.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룰, 그리고 운명.

사립 아오바죠사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했다. 알파가 세명이나 되는걸로 모자라, 그 세명이 전부 같은 학년, 같은 배구부였으니까. 뭐, 그 뿐만은 아니었다. 알파 중에 오이카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꺅꺅 거리는 여자들이 넘쳐났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이카와는 알파였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신체에, 독보적인 배구 센스, (쓸데없이) 상큼한 미소. 그 녀석은 우리들의 중심이었다. 우리들의 주장이었다.

"오메가 새끼."

복도까지 들려오는 욕지꺼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니, 정확히는 마츠카와가. 마츠카와는 몸을 떨고 있는 하나마키의 귀를 가려주었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아아, 알만 했다. 오이카와, 마츠카와 그리고 나. 우리들은 알파였다. 그에 비해 하나마키는,

"박아달라고 울어봐. 어? 어?? 히팅싸이클 있잖아?"

오메가(Omega).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알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오메가가 따라다녔다. 보이지 않는 신분제의 밑바닥 중 맑을 기미가 없는 흙탕물. 논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오메가가 있었고, 차별과 멸시는 그들이 안고가야할 운명이었다. 알파와는 또다른 운명. 그럼에도 알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오메가. 그 지독한 모순 사이에서 오메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여자한테도 박아달라 하냐?? 남자 맞아?"
"킥킥, 야 운다 울어. 울면 박아줄거라 생각하니봐~"
"걸레 같아~~"

차별과 박해.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베타(beta)라 칭해지는 보통 사람들이 오메가를 걸레짝 마냥 취급하는것은 당연했다. 오메가들 역시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히팅사이클이 돌아올때면 교배, 성행위, 또는 섹스라는 본능에 매달리는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아아, 알파라고 다를 건 없었다. 우리 또한 오메가를 먹잇감으로 여길뿐이니. 그렇다고 알파가 반드시 오메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다. 페로몬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달아오른 오메가를 찾아내 성관계를 맺을 순 있어도, '같이'가 의무는 아니었다. 그건 오메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성욕을 달래줄 '누군가'가 굳이 알파일 이유는 없었다. 곁에 있는게 베타라 한들, 가족이라 한들, 친구라 한들, 욕구만 만족시켜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둘째는,

"귀닫고 무시해."
"하지만...."
"괜찮아."

각인(刻印). 알파와 각인을 하게되면, 어느 누구도 오메가를 건드릴 수 없었다. 알파의 것이기 때문에, 알파의 소유이기 때문에, 알파의 반려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츠카와는 각인을 새겼다. 하나마키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 알파의 각인이 없는 오메가따위, 들짐승 속에 던져진 어린 아이일뿐이니까. 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징그러웠다. 애정이 흘러넘치다 못해 서로를 아끼는게 이미 잉꼬부부 수준이라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도 간혹, 오늘처럼 오메가에 대한 능욕이 계속되는 날이면 마츠카와는 이빨을 곤두세웠다. 썩을 베타들 때문이라는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알파지만 오메가를 대면해본적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오이카와, 멍 때리지마."

눈 앞의 이녀석이 신경쓰이는 것 뿐일까. 오이카와는 기본적으로 가벼운 남자였다. 알파임에도 모두에게 친절한(컨셉의)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가끔씩 기시감이 뿜어져나왔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지금이 그러했다.

오이카와는 옆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오메가를 짓밟고, 괴롭히고, 추행하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바보같기는. 괜한 오지랖이다. 알파인 네가, 내가, 우리가 건드려봤자 상황은 악화될 뿐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을텐데.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뒤통수를 한대 후려쳤다.

"아파!!!!"

네가 거들어봤자 변하는 건 없다고, 멍청카와.

"이와쨩 너무해!!!!! 이 오이카와씨 뒤통수 깨지면 이와쨩이 책임질거야?!"
"더 맞고 싶냐."
"꺄앗! 무서워, 맛층~"

그래. 이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너와 나는 주어진 길 위에 나란히 서있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평탄한 아스팔트길. 그 단단한 길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단 하나의 틈도 없을거라며, 나는 믿고 있었다.




#




먹을 풀어놓은 하늘은 빛을 잃고 있었다. 출입문 너머로 먹구름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젠장. 우산 챙겨나올걸. 오이카와는 신발 하나 갈아신는 것마저 꾸물거리고 있었다. 아, 쥐어패고 싶다. 빨리 안하면 비가 쏟아질텐데.

"맛키 없으니까 하는말인데."
"말하지마."

알고 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왜?!"
"오메가에 대한거잖아."

톡, 토옥. 빗줄기가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신발을 신다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나 싶더니만. 비와 섞여 풍기는 젖은 흙의 냄새. 코를 간질이는 물 비린내.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오이카와의 손에는 곱게 접힌 종이가 들려있었다. 시덥지 않은 고백일 것이다. 그것이 진짜 오이카와를 향한 건지, 아니면 알파 오이카와를 향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선뜻 종이를 버리지 못했다. 알파주제에 베타를 신경쓰고 있었다. 어차피 걸림돌밖에 안되는 것들. 일일이 상대해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네가 그것들의 타겟이 되고 있는 건 알고 있냐, 오이카와.

오메가 대접이 극과 극이니, 그들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내비치지 않고 사회와 단절된 삶은 택하는 오메가. 차별받고, 박해받고, 사회에서 매장당하더라도, 이를 견뎌내고 세계의 흐름에 몸을 내던지는 오메가. 마지막으로, 적당한 알파를 물색해 각인을 뜯어내려는 오메가. 오이카와는 그 타겟으로 삼기에 아주 적절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와쨩은 오메가 어떻게 생각해?"
"별 생각 없는데."
"헤에-"

처음엔,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 정성이 담긴 초콜렛도, 애정이 스며든 편지도, 불러내서 직접 전하는 고백도, 전부. 물론 사귄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단지 당사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미안하다며 정중히 거절할뿐. 그 귀찮은 짓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하는 사이에 먼저 지친 건 내 쪽이었다. 내가 먼저 그만하라 했다. 쓸데 없이 감정 낭비하지 말라고. 네가 무슨 입장인지 아냐고. 그렇게 한 명 한 명 신경쓰다 네가 잘못되면 어떡할거냐고. 네가 몇 안되는 알파라는 걸 자각은 하고 있냐고. 그 때, 오이카와는 막연히 웃었다. 쓸쓸하면서도 시원섭섭하다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곱게 접힌 종이는 갈갈이 찢어졌다.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 있던 또다른 마음도 갈갈이 찢어졌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찢고, 찢고, 또 찢은 종이조각들을 망설임 없이 허공에 놓아주었다.

"나는 있지, 불쌍한 거 같아."

또다. 허무만을 품고 있는 눈동자다. 이질감이 풍기는 눈동자다.

"사회로 나가면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받고, 괴롭힘당하고, 심지어 성희롱은 일상다반사잖아."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오이카와는 신발을 갈아신었다. 운동화에는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 같았다.

"언제 히팅 싸이클이 돌아올지 몰라. 억제제는 임시 방편일뿐이잖아? 그거 부작용도 장난 아니라던데."

이상했다. 개소리를 하고 있는 오이카와. 평소랑 미묘하게 다른 오이카와. 오메가를 신경쓰는 오이카와. 의구심이라는 이름의 화살은 하나면 충분한 것을. 오이카와 스스로가 그것들을 자아내고 있었다. 뭘 숨기고 있는걸까. 뭘 말하고 싶은걸까.

"차라리 자살하는게 편하지 않을까."
"너."

이상해. 요새 왜그래? 사춘기라도 왔냐?

"하나마키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마라."

머리가 생각하는대로 내뱉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빌어먹게도 나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알파, 오메가 운운하기 이전에, 작은 인간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의문을 털어놓을수 조차 없는 인간. 분위기에 맞춰 튀어나온 말이 뭐였더라.

"...미안."

저 썩을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나마키 얘기를 한듯하다. 아, 하필이면. 아니야. 말나온 김에 끝내자.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전부 해버리자. 가슴이 들썩이도록 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등뒤로 들이치는 비바람이 서늘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충 말하고 싶진 않았다. 제대로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오메가든 알파든, 똑같은 사람이다. 차별받을 이유따윈 없어. 적어도 난 안 그럴거니까."

사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나에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있는가? 방금까지도 하나마키를 언급한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던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나도 날 모르겠다. 어느 쪽이 정답일까. 어떤게 올바른 것일까.

"오이카와. 알파 주제에 오메가 걱정하냐?"

어느 쪽이 정답이든, 난 너에게 묻고 싶었다. 네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장난삼아 던진 의문에 담긴 진의를, 네가 눈치채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뇌용량 터진다."
"너무해!!!"

빌어먹을. 빌어먹을빌어먹을빌어먹을 나 자신. 빠득-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걸 듣고는 히스테릭한 얼굴로 변한 오이카와가 먼저 달려갔다. 발빠르게 달려나가봤자, 오늘의 날씨는

"비..."

보아하니 오이카와도 우산이 없는 듯 했다. 이럴 땐 방법이 없다.

"뛰어."
"앗, 이와쨩!! 같이 가!"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뛰어가던 우리들은, 친구였다. 와이셔츠를 적시는 빗방울마저 '같이'라는 단어 아래에 상쾌해지던 우리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돌이켜보면, 오이카와는 주기적으로 아팠다. 그게 한달이든, 두달이든, 반년이든.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 자신이 후회스러울뿐이다.

"야. 괜찮냐?"

안색이 창백한 날이면 밥먹듯 화장실로 향하던 녀석이었다. 텅 빈 위장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헛구역질. 등을 흠뻑 적신 식은땀 줄기. 고통을 쥐어짜내는 신음소리. 너의 온몸이 아프다 말하고 있었음에도,

"윽... 아냐. 아무것도 아냐. 속이 안좋아서 그래. 먼저... 우욱, 가있어."

너는 숨쉬듯 거짓말을 내뱉었다. 괜찮다는 거짓으로 똘똘 뭉쳐 너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냐. 나한테 솔직히 털어놓을 순 없는 거냐? 내가 너랑 친구 일이년 하는 것도 아니고, 척보면 척인데 그딴 허접한 거짓말이 통할거라 생각해?

"그따위 말 잘도 믿겠다. 등 대봐."

어물쩡 넘어가려하는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오이카와는 둘째치고, 나는 어쩌고 싶은건지. 규칙적으로 오이카와의 등을 두드리다 뻗쳐오르는 화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퍽- 앗차, 힘 너무 줬나. 손바닥과 등근육이 만나 강타하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리하지말라고."
"으윽.. 미안, 이와쨩."

변기를 붙잡고 있는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서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면 될텐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될텐데. 너는 왜.

"좋게 말할 때 병원가라."
"....응."
"앞에 묘한 공백은 뭐냐?"
"병원 갈게. 걱정시켜서 미안."
"...알면 됐고."

이상 기류를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내가 아니었다. 하물며 마츠카와나 하나마키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문'.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오이카와의 뒤를 쫓아다니던 보이지 않는 그림자. 짝사랑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를 뒤쫓는 양날의 검. 베타들의 들리지 않는 수군거림. 나는 그런 것들에 서툴렀다. 아니, 사실은 관심이 없었다. 베타따위 알바 아니었으니까. 나에게 중요한 건 (빌어먹을) 오이카와, 배구부 녀석들, 가족 정도였으니까.

그 날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에, 지저귀는 새 한마리 날아다니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바 없는 등교길에는 사람 하나 없었고, 오이카와는 연락두절이었다. 망할 오이카와, 주장이라는게 늦잠이나 자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너 때문에 아침 연습 시작 늦어지면 죽여버-

[전화 되냐?]

별 일이었다. 마츠카와가 메일을 보낸 것 말이다. 대뜸 전화를 하거나, 일주일 후에야 답장을 보내는 그 마츠카와가, 먼저 메일을 보냈다. 가라앉은 공기. 차가운 휴대폰 액정. '오이카와' 라 적혀있는 문패. 버튼을 눌렀다. 두개의 소리가 들려왔다. 통화음이 이어지는 소리와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 고요한 아침 거리를 헤치는 두개의 소리가 어울리고, 하늘거리다, 닿아내린다.

"어. 무슨 일인데."

먼저 닿은 것은 마츠카와였다. 신호음 하나가 끊어지기도 전에 받던 마츠카와는 한참이나,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겼나 싶어 귀를 떼려던 찰나,

[...너 지금 학교냐.]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은 잡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나혼자 이공간에 동떨어진 감각이었다.

"아니. 이제 가려고."
[오이카와는?]
"안그래도 지금 초인종-"

다음은 초인종. 비죽 뻗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나올 오이카와를 기대했다. 언제나처럼 싱긋- 웃어제끼며 느긋하게 걸어나오는 오이카와를 한대 쥐어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깜박하고 두고 나온 도시락에 다시 집에 들어갈 오이카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내 기대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나온 것은

"어머, 하지메구나~ 토오루라면 벌써 등교했단다. 헛걸음하게 해서 어쩌나.."
"아, 아닙니다."

어머님이었다. 김이 빠졌다. 불현듯 느껴졌던 기시감은 우연이었나. 그보다 쿠소카와 이자식, 나한테 말 한마디 안하고 학교에 가버려? 오냐, 학교에서 보이기만 해봐. 죽여버릴테다.

[이와이즈미.]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빠졌다. 아직 통화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면, 오이카와 어머님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주었다. 어느 쪽을 들어야 할까.

"아참~ 하지메, 이거 토오루한테 전해줄래?"
[오이카와 말이야.]
"평소엔 항상 들고다니던 약인데, 오늘따라 놓고 갔더구나. 학교에서 만나면 전해주렴."
[아무래도 오메가 인것 같다.]

갈라져 있던 길이 하나로 이어졌다. 지나치게 조용했던 거리가 하나둘 소음을 토해냈다. 시끄럽다. 귀를 앵앵거린다. 두통이 밀려온다. 어질거리는 의식 사이로 딱딱한 것이 손끝에 닿아왔다. 약통. 하얀 약통.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눈이 침침해졌나. 아니,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듣고 있어?]
"....어."

듣고 싶지 않다. 아니, 들렸다. 분명 마츠카와가 뭐라고 한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뭐라고 했던거 같은데.

[단순한 소문이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새하얀 약통을 뒤덮은 알파벳. 구불거리고 흔들리는 시야속에서 확실히 보인 것은 'The Only for Omega'. 그렇게 못이 박혔다.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나부터 열가지가 전부,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가 오메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페로몬...향이.."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이 향이, 유혹을 흩뿌리는 이 향이, 오메가가 뿜어대는 그것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폐로 스며드는 페로몬 향이 이성을 어지럽혔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끊을 수 없는 마약이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나를 먹어줘, 나를 찾아줘, 그리고 나를 탐해줘.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다.

페로몬 냄새가 유독 강렬하다.
억제제가 내 손에 있다.
오이카와는 집에 없다.

"설마...."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소문으로 물결치고 이었다.

'그 오이카와가 오메가?'
'알파 아니었어?'
'와, 대박이네. 그럼 지금까지 우릴 속인거야?'
'하등 생물주제에-'
'알파의 탈을 쓰고 잘도-'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시선들이 펼쳐졌다. 그 시선에, 입놀림에, 일일이 반응할 시간따윈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을 겨를이 없었다. 짙어지는 페로몬 향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금단의 과실. 그 끝이 가리키는 것은 배구부실이었다. 땀이 차오른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잡소리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지껄이는 베타놈들따위 신경꺼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에겐, 나에겐-

벌컥-

"....이와쨩..."

네가 중요했다.

"설명 좀 해봐."

다행히 다른 알파한테 노려진건 아닌 것 같았다. 마츠카와와 나말고도 이 근처의 알파들은 얼마든지 있었을테니. 말그대로 독안에 든 쥐. 대답해, 오이카와. 왜 거짓말을 한거냐. 왜 알파라고 한거냐.... 왜 우릴 속였어.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지 말 좀 해보라고, 멍청아!!!!"

눈물에 젖어 있었다. 땀에 젖어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채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비명 하나 못지른채 그렇게, 너는 그렇게 혼자서 계속,

"너... 오메가였어?"

버텨왔던거냐.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제와서 책망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이카와는 빌어먹을 오메가였고, 히팅 싸이클에 걸렸고, 내 손엔 억제제가 들려 있었다.

"우릴 속였어?"
"그 약... 읏,흐읏.."
"지금까지 알파인척 하면서, 오메가를 위하는 마냥 행동한거냐고-"

울먹거리지마. 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지마. 애달복걸하지마.

"묻고 있잖아!!!!"
"...미안..미안... 하앙,미안.. 이와쨩..."

부실 안을 진동하는 페로몬 향에 나도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지금 오이카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미안하다 말하는 사이에도 흥분을 못 참고 신음소리를 내지르는 오이카와가 어딘가 고장났다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걸 인내하고 견뎌내야할 내가,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뜨거워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근데 나 지금.. 흣, 죽을것 같아. 이와쨩 알파지? 알파 맞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네가 발버둥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다. 내쪽으로 반쯤 기어오던 네가 뭘 원하는지 쯤은, 알고 있다.

"나... 나 좀 도와줘. 나 좀 살려줘.. 나 오메가 맞아.. 오메가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찔하도록 풍겨오는 오메가의 향, 페로몬 내음,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손짓. 여기서 널 안으면, 널 갖게 되면, 넌 후회할까? 아아, 생각따위 하고 싶지 않다. 붙잡고 있는 이성을 후려치고 싶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을 부대끼고 싶다. 젖어있는 옷자락을 찢어버리고 우윳빛 살결에 이를 박고, 성감대를 있는대로 빨아대고 싶다. 젠장, 정신을 놓을 것 같다.

"알파가 없으면 안돼... 부탁이야, 이와쨩.. 나 좀 박아줘. 나 박히고 싶어. 질척질척 소리나게.. 박혀서.... 이와쨩이, 아읏, 하라는대로.. 하읏, 다할테니까...."

종아리에 닿아오는 손이 뜨겁다. 뜨겁다 못해 데일것 같다. 이걸 놓치면 세상이 끝난다는 표정으로 내 다리를 꽉 쥐던 오이카와는 그 달뜬 숨을 피부위로 내뱉었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들고 부실 문을 닫았다. 덜덜 떨려오는 손가락이 몇번이고 헛손질을 했다. 잠궜다. 이대로 오이카와를 내버려두느니, 다른 녀석들에게 눈이 풀린 오이카와를 보여주느니, 차라리.. 차라리-

"....젠장,젠장,젠장."

머리를 헤집었다. 변명하자. 방법은 이뿐이었다고. 너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고. 네가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라면, 너의 처음은

"후회하지마라."

'나'이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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