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울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니라님 연성 기반입니다.
*FHQ

*꼭 BGM과 같이 감상해주세요.







W. 멜




먼지가 자욱하게 가라앉은 책장에는 낡아빠진 책들이 제멋대로 꽂혀져 있었다. 벽의 곳곳에 자리한 램프들은 파란 빛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창백한 조명은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동물의 가죽 비슷한 것들을 비추고 있었다. 침소로 추정되는 그럴듯한 침대는 이미 거미줄로 화려하게 꾸며져 퀴퀴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인간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를 두개골들이 하나의 장식물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자잘하게 굴러다니는 모래알과 흙먼지가 검게 뒤엉켜 음침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었다. 그 뿐일까. 햇볕 한 줌 용납하지 않던 그 이질적인 공간은 이틀째, 누구누구씨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해 지독한 아수라장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무로된 등받이에 깊이 등을 뉘인 채, 멍하니 천장만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그저. 마지못해 호흡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초의 탄생이 있던 이후, 이와이즈미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처럼.

'가까이 오지마.'

마왕 사냥. 마왕의 뿔을 손에 넣으면 가문이 번창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은 인간들이 눈에 불을 켜며 마왕의 모가지를 노리던 무렵이었다.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고작 한두 달전. 인간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한창 활발했을 무렵이었다.

'썩 꺼지라고.'

단순한 총격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칼날이야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저 머릿수로만 밀어 부치려는 인간들 따위, 손아귀에서 그려내는 불꽃 한 웅큼이면 꽁무니를 내빼고 도망치는 우매한 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날 내려다 보지마, 비천한 생물 주제에.'

그 날만큼은 조금, 달랐다. 그 날은 평범한 인간의 무리가 아니었고 은탄과 성수로 중무장한 사냥꾼들이 눈을 번득이며 들이닥쳤고 나는 맨몸이었고

'너. 다쳤냐?'

그대로 중상을 입었어야만 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 윽!"

인적 드문 숲지대를 깊이 파고든 후에야 겨우 사냥꾼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복부에 박힌 은탄환은 어림잡아 대여섯. 재생은 고사하고 출혈조차 멎지 않았다. 몸에 두르고 있던 천이 검은 색이 아니었다면 누구든 이 피칠갑에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으리라.

'이렇게까지 상처가 심할 줄은 몰랐는데.'

너는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범주 내에서도 머리에 나사 몇 개는 풀린 듯한, 괴상한 축에 속해 있었다. 너는 몸에 두르고 있던 묵직한 갑옷들을 하나둘 벗어던졌고 제 몸집만한 대검을 먼발치에 내팽개쳤다.

'손 대지마. 만지지 말라고, 인...간.'
'만신창이인 주제에 입만 살았네.'

찌익, 천이 뜯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몸을 통째로 꿰뚫어 버릴 듯한 고통이 서너번. 척추 부근이 저절로 뒤틀렸고 반쯤 벌어진 잇새로 고통으로 일그러진 외마디 비명이 튀어 나왔다. 너는 흡사 불덩어리와도 같았던 은탄환들을 네 손으로 직접 뽑아냈고 그 빈자리를 채우듯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얇은 천자락 하나로 익숙하게 지혈을 시작했다.

'...무섭지 않아? 이 오이카와씨는 마왕... 인데.'
'사람이고 동물이고 마왕이고 다치고 아파하는 건 하나같이 똑같은 법이야.'
'그런 말도 안되는,'
'마왕이면 어떻고 사람이 아니면 어때. 눈 앞에서 송장 치우긴 싫다.'

너는 거리낌이 없었다. 남들이 내 뿔에 대한 탐욕과 갈망의 눈으로, 또다른 이들이 내게서 풍겨져 나오는 재액과 재앙으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나를 바라 볼 때, 너는 그 어떤 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너는 진심으로, 나를 치료해주려 하고 있었다.

'다친 몸으로 깝치다 죽지나 마라. 꿈자리 사납다.'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이었다. 마왕이든 인간이든 관계없다며 대뜸 내 곁으로 파고 들었고 내 피가 멈춤과 동시에 한치의 미련도 없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

'...후회하게 될 거야. 나와 얽히게 된 것에 대해. 나에게 관여한 것에 대해. 나를 죽이는 게 아닌, 오히려 살려 돌려 보낸 것에 대해. 분명 후회할 거야, 이름 모를 인간.'

다시금 갑옷을 갖춰 입고 대검을 등쳐업은 채 성큼성큼 멀어져 가던 너는. 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는지 금세 고개를 돌리며

'이와이즈미 하지메.'
'뭐?'
'다 쓰러져가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주는 게 어떠냐, 이 말씀이다.'

싱그러움이 가득 머금어진 미소를 한껏 지어올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쿵쾅거렸다. 느릿느릿 재생되고 있는 살결에서는 네 손길이 남긴 따스한 촉감이 생생했다. 봄 바람 비슷한 것이 뺨을 스쳤고 전신에 생기가 감돌았다. 코를 통해 스며드는 희미한 꽃내음이 생소했다.
아마. 첫사랑이었다. 첫 눈에 반해 있던게 분명했다. 네가 고작 인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얼마 가지 못해 바스라지는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처럼 시들어갈 허무한 존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슴 한복판이 벅차오름으로 잔뜩 일그러질 만큼, 심장이 통째로 뜯겨져 나갈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을 만큼, 당장이라도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네 뒷모습을 꼭 끌어 안아 버리고 싶을 만큼,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이 두 다리를 질질 끌어 네 뒤를 좇고 싶을 만큼, 나는 네게 빠져버렸다. 영겁에 가까운 그 시간들을 오직 너라는 사람 하나를 위해 버텨낸 사람마냥. 홀리듯, 너에게 빠져 들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너는, 제국을 지킨다는 둥의 어엿한 기사 노릇을 하고 있던 인간들 중 하나였다. 아무렴 어떤가. 네가 기사든 한 나라의 왕이든 땡전 한 푼 없는 거지든,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란 인간의 본질을 좋아했고 그 숭고하면서도 순결한 영혼을 사랑할 뿐이었다. 그건 네가 어디사든 누가 되었든, 결코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네가 속해 있는 수호대의 작전 본부에 놀러 나갔으며-대체로 변신술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둔갑을 취했다- 너는 이런 날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기척을 느낄 때면 너는 그저

'또 왔냐.'

라며 처음 헤어졌을 때와 같은, 초원의 푸르름을 닮은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처음, 내 안에서 단순히 '이상한 인간'으로 치부되었던 너는. 하루가 다르게 나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들을 들끓게 해주었다.

'이와이즈미, 이와이즈미, 이와이즈미.'
'귀 안 먹었다. 그만 좀 불러.'
'있지. 이와이즈미는 너무 길지 않아?'
'내 이름에 불만 있냐?'
'이와... 이와... 아! 이와쨩은 어때? 이와쨩, 이와쨩, 이와쨩. 입에 착착 감겨!!'
'그 입 찢어 버린다.'
'후에~ 이와쨩은 너무너무 폭력적이랍니다! 이래갖고 어떻게 기사님 중의 기사님이 되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랍니다!'
'자기도 마왕인 주제에.'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손꼽아 기다려졌다. 해가 떠오를 때면 네 얼굴을 볼 수 있단 생각에 몸이 벌떡 일으켜졌고 해가 저물 때면 너와 작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단 생각에 손발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듯했다. 황량하게만 느껴졌던 갈대 벌판이 황금으로 물들며 찬란하게 빛났고 바로 얼마전까진 관심도 없던 작은 텃길에 피어난 조막만한 들꽃마저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너를 만나서 내 세상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너로 인해 내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으며 너라는 이유 하나가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었다.

'좋아해.'

그렇기에 나는. 내 마음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었다. 불가능했다. 나날이 활짝 만개해가는 벚꽃처럼, 나는 너에게 내 사랑을 토로했고 너는

'이제 말하냐. 속 터지는 줄 알았다.'

라며 내 몸이 달콤함에 으스러지도록, 꽈악 끌어안아 주었다. 나의 전부, 나의 삶, 나의 희망. 너는 가볍게 웃어보이며 내 전부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대장이 밀회? 여자와의 밀회라면 우리도 조용히 눈 감,'
'여자 따위가 아니니 이렇게 말을 꺼내지.'
'뭐?'
'마왕말이야, 마왕. 이 세계가 낳은 재앙 덩어리. 그것과 매일같이 만나고 있다고.'
'...설마. 그럴 리 없어. 대장님은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나'로 인해 네가 있을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나'로 인해 네가 곤란한 처지에 놓여져 있었음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나와 얽히게 된 것에 대해. 나에게 관여한 것에 대해. 나를 죽이는 게 아닌, 오히려 살려 돌려 보낸 것에 대해. 분명 후회할 거야, 이름 모를 인간.'

내가 했던 말을 나 자신이 후회하게 될 줄은, 당시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이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나약한 종족이란 것쯤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인 너 또한 그 숨을, 그 당돌하던 패기를, 당차게 빛나던 옆모습을, 사랑스럽게 날 내려다보던 그 눈빛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한 톨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란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 이와쨩이 죽어 버린다 해도. 이 오이카와씨는 기다릴 거야. 계속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그 말 그대로, 나는 기다릴 셈이었다. 십년, 백년, 그리고 천년. 무수히 흘러가는 시간의 틈새 속에서 나는 또다시 네 윤회를 기다릴 셈이었다. 그 숭고한 영혼이 이 땅에 다시금 내려앉기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셈이었다.

'뭘 가만히 있어, 이 멍청카와!!'
'그치만... 그치만!'
'도망치라고!!! 너까지 죽고 싶냐?!!'

잊혀지질 않았다. 도무지 잊혀지질 않았다. 네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너의 대검이 네 몸을 관통했을 때. 핏덩이를 토악질해대며 얼어붙은 날 향해 고함을 질렀을 때. 네 주변의 잔디들이 네 흥건한 핏줄기로 시뻘겋게 물들어 버렸을 때. 저 먼발치에서 한 때는 너와 함께한, 한 때는 너를 대장으로 모시던 이들이 차게 식은 눈으로 널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을 때.

'다신 이와쨩 보고 싶다 안할게. 더이상 여기 놀러 오지도 않을게. 멀리서 얼굴만 보고 갈테니까.'
'굼...벵이가. 하여간. 더럽게... 말 안들어요.'
'제발. 제발. 내 곁에 남아 있어줘. 날 혼자 두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죽지마. 죽지말고... 평생. 나랑 살자, 응?'

나 때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책임이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게 된 것도 네 감긴 눈꺼풀에 이성이 끊어진 내가 폭팔하듯 그 일대를 멸망시킨 것도 이미 주검이 되어버린 네 몸뚱아리를 붙들고 끊임없이 오열한 것도.

차라리 날 탓하지 그랬어. 너 때문에 이 꼴이 됐다고 날 죽도록 원망하지 그랬어. 나같은 거 감싸지 말질 그랬어.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 몸. 구차하게 살아 남아봤자, 그 곳엔 이미 네가 없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은 웃으면서 죽어버리면. 이 마왕님이 좋아라 할 줄 알았냐고."

오이카와는 이마에 얹어 두고 있던 손등을 아래로 떨궜다. 코끝에는 여전히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의 피, 그외의 인간들의 피. 그제야 초점을 잃고 있던 오이카와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기 시작했다. 뇌리에 번쩍이는 뭔가가 스쳐지나가듯, 오이카와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먼지낀 서적들을 들춰내고 또 들춰낸지 어언 한 시간. 표지는 물론이고 종잇장 하나하나까지 너덜거리는 흡사 고서라 불릴만한 두툼한 서적을 들었다. 금기된 주술의 목록. 그가 눈여겨 보던 부분은

"...차원 이동. 찾았다."

그 뒤로는 일이 아주 수월했다. 구축식을 그려내는 것이 약간 까다로웠을 뿐이었지 마력의 정점에 위치한 마왕에게 있어 마력의 소모는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인과율."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책에는 쓰여있지 않았던 것이다. 쿠로오 또한 그 부분을 염려하며 끝끝내 차원이동을 시도하는 오이카와를 말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했다. 이와이즈미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제 모든 것을 걸었다.

처음에 말이야. 날 찾아준 건 이와쨩이었잖아. 서슴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준 건 이와쨩이었잖아. 이런 날 찾아준 건 언제나 이와쨩이었으니까. 이와짱이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고 쓸쓸하다는 감정을 체감할 수 있었고, 이와쨩이 내 옆에서 완전히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슬픔이란 걸 배웠으니까.

둥그런 구축식에서 차오른 붉은 빛들이 전신을 감싸 안았고 손발이 희끄무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가. 이와쨩을 마중 나갈게."




#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토오루! 이런데서 뭐하고 있어?"

기껏해야 내 허벅지 높이. 한 손에는 그물망이 달린 막대기를 들고 조그만 슬리퍼를 신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너는. 이 뙤약볕에 엎어져 있던 내가 신기했는지 막대기로 나를 쿡쿡 쑤셔보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작은 아이. 작아진 너. 아아, 나는

"제대로 왔구나. 이와쨩이 있는 곳을. 제대로 찾아온 거구나."

나는 그대로 너를 끌어 안았다. 숨이 막힌다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너. 자기 모르는 새에 우유를 트럭으로 마셨냐며 왜 이렇게 거대해졌냐며 목청을 높이는 너. 내 뿔을 몇 번 만지작 거리더니 자기가 갖고 있는 공룡이란 것과 비슷하다며 눈을 빛내는 너. 그런 널 다시금 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금 주어져서, 나는 꽤나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바로

"하지메쨩~ 한참 찾았잖아! 여기서 뭐... 히엑!!"

또다른 나를 발견하기 전까진.
내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세계는 어떨까. 금서를 읽으면서 문득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 책에 따르면, 어느 세계에나 영혼이란 본질은 같되 외견이나 그 성질이 다른 것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 상상해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직접 조우하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어렴풋이 그려본 적이 있었다. 웃기지 않을까. 재미있지 않을까. 서로 농담도 주고 받고 이와이즈미 하나를 두고 장난스레 싸우진 않을까.

"...불쾌하네."

그러나, 그것은 내 오만이었고 큰 착각에 불과했다.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 '오이카와'란 존재는 내게서 너를 앗아갈 인간이라는 것. 겨우 재회하게 된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을, 아주 꺼림칙한 존재라는 것. 그렇다고 그 유쾌하지 않은 감각을 나만이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메쨩... 그 사람 누구야...? 거기 있지마. 싫어. 싫어. 이상한 사람 따라가면 안된다고 엄마가. 엄마가..."

'오이카와'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내 품에 안긴 너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시끄러운 울음에 기분이 확 가라앉아 당장이라도 저 입을 두 갈래로 찢어버리고 싶단 욕구가 끓어 올랐지만

"아아~ 또 운다. 자꾸 울면 같이 장수풍뎅이 잡으러 안간다 했지?"

어느 새 내 품에서 빠져나가 '오이카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는 너로 인해

"응... 응. 토오루 안 울게. 안 울어. 뚝 그쳤어! 저런 사람말고. 나랑 놀자. 나랑만 놀아, 하지메쨩."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기에 내가 '오이카와'를 죽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고 합당한 결과였다. 네 옆에 있어야할 건 저런 꼬마가 아닌 나여야 했으니까. 네 옆을 지켜야할 건 저런 울보가 아니라 나란 존재여야 했으니까.
그러나, 너는 웃지 않았다. 내마음을 뒤흔들고 했던 그 싱그러운 웃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너는 고작 네 몸집만한 '오이카와'의 시신을 안고 귀청이 터져나가도록 울부짖었으며 그 이후, 네가 짓는 웃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고 수십년이 지나 주름살이 그득한 얼굴이 되어서도.

"...토오루가 보고 싶어."

날 뻔히 눈 앞에 두고도 그 따위 말을 내뱉으며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그렇게 죽어갔다. 그게 처음이자, 인과율의 시작이었다. 무수한 차원이동을 반복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오이카와'가 죽거나 네가 미쳐버리거나.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는 '오이카와'를 죽이지 않으려 했음에도 '오이카와'는 죽어갔다. 내가 그 세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이카와'가 죽어버린 적도 있었다. 내 발자취가 닿은 세계의 '오이카와'는 언제나 죽음 곁에 있었다. 불치병에 걸리고,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익사 당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절벽 아래로 실족사를 당하고, 트럭에 치이고, 총격을 받았고, 독살 당했고, 테러에 휘말렸고, 화재의 중심에 있었고. 그에 비해 너는. 언제나 소리 없이 울거나 분노하거나 자괴감에 절어 있었고. 나는 언제나 그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며 다음 세계로의 이동을 서둘렀다. '오이카와'를 가만 죽게 놔두자니 네가 망가지고 '오이카와'를 살리자니 나 스스로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아무리 널 '오이카와'에게서 구원해보려 해도 속수무책처럼, 너는 무너져 내려갔다. 이쯤되니, 나 자신이 정말, 재앙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있는 곳엔 항상 네 울음과 네 고통이 뒤따랐다.

'설령 네가 그토록 바라던 이와이즈미를 만나게 되더라도, 지독한 인과율이 너를, 이와이즈미를 따라 다닐게 분명하잖아!!'
'인과율은 널 고독하게 만들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끊임없이 발악해도 네 옆에 그 누구도 남지 않게끔 할 거라고!!'

기이한 일이었다. 그제야 쿠로오가 했던 따끔한 충고가 떠오르다니. 그제야 인과율이란 게 무얼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널 원한다고 발버둥쳐도 너는 날 돌아보지 않았다. 차라리 너를 죽여버릴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이렇게나 원하고 또 원하는데,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라며 손아귀에서 칠흑으로 가득찬 마력구를 뽑아내려 한 적이 있었다.

"...이게 뭐야? 내 손이 왜. 왜"

마력의 정점을 웃돌던 나는

"투명해지는 거야?"

마력은커녕, 나 자신의 존재 유무조차도 지탱할 수 없게된 것이다. 차원이동이 마력을 갉아 먹는다던 말을, 솔직히 걱정조차 않았다. 영겁의 세월동안 이 몸에 축적되온 마력이 고작 금기 마법 몇십 번으로 바닥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번. 딱 한 번 남았단 뜻이지."

반쯤 투명해진 손바닥 너머로 희멀건 병원 바닥이 비춰졌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이젠 몇 번째인지도 셀 수 없었다. 족히 삼십 번은 넘도록, 세계를 이동한 것 같았는데. 너는 여전했다.

'너 때문이야.'

이번 세계에서도 역시, '오이카와'는 나로 인해 죽어갔고

'너 때문에!! 오이카와가 죽은 거라고!'

이번 세계의 너는. 여지껏 볼 수 없었던 증오심이 불타는 눈으로

'날 찾으러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웃기지마.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내 모든 게 무너졌다고!! 너 따위한테 말 걸지 말 걸 그랬어. 모른 척 할 걸 그랬어. 만나지 말 걸 그랬어.'

나를 노려보며

'너같이 저주 받은 놈.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네 목을 스스로 그었다. 사방에 네 피가 튀었고 내 뺨에 또한 네 피가 튀었다.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피바다 속에서 너는. 끝끝내 원망어린 눈을 거두지 않았다.
앞으로 한 번이었다. 다음 세계가 마지막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이 몸도, 길고 길었던 내 마음의 방황도, 모두 끝이 날 것이다. 고독기. 세계와 세계를 이동하는 이 찰나의 고독한 순간을 조금만 더 참으면, 또다시 널 볼 수 있다. 수 십 번의 죽음을 보고 수 백 번의 네 절규를 보고 수 천 번의 네 원망을 들었으면서도, 또다시 나는 너를 찾아 나섰다. 네 말과 행동으로 인해 진즉에 너덜너덜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너를 마중 나간다.

"아,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려."

나에게 있어 마지막이 될
이 세계의 너는
이번만큼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런
그런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어
날 향해주었으면 좋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