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짧은 신호음 뒤로 조명이 번쩍인다. 새하얀 배경지를 두 개의 인공조명이 에워싸고 있다. 중앙엔 오늘의 주인공이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컷, 컷. 잠시만요.”
셔터를 누르고 있어야할 사진사는 손사래를 친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반사판을 들고 있던 보조 스텝이 멀어진다.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보쿠토군, 표정은 좋은데. 표정은 정말 좋은데. 포즈를 좀 어떻게…….”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인다. 쩍 벌려 앉은 다리 간격을 좁히고 슈퍼맨마냥 뻗은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역시 이게 좋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화보 촬영이었다. 나날이 눈덩이처럼 부풀어가는 인기에 발맞춰 유명 잡지사의 표지 모델 제안이 들어온 탓이었다. 바로 몇 주 전 같았으면 텅텅 빈 스케줄 표만 노려보다 시간 때우기로 영화만 돌려보거나 숙소에서 빈둥거렸을 그는 하루가멀다하고 쏟아지는 스케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엄연히 잡지 간판인데.”
보쿠토의 슈퍼맨 포즈를 영 탐탁지 않아 하던 사진사 대신 아카아시가 말을 잇는다. 사진사가 다른 결과물을 보러 모니터 쪽으로 스텝 몇몇을 불러 모으는 사이, 아카아시는 물병과 마른 수건을 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를 뒤따른 여성 두 명의 손엔 꽤 큼직한 메이크업 박스가 들려 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번듯한 코디네이터 하나 없던 보쿠토였건만 이제는 쉬는 시간마다 코디와 옷매무새를 갖춰주는 전용 스텝진이 있었다. 땀방울 맺힌 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기름종이. 지워진 메이크업 위로 보송보송한 파우더가 내려앉는다. 촬영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의 모공을 가득 채운 땀방울은 조명의 열기를 실감케 한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탁한 먼지 냄새와 피부에 직격탄으로 쏟아지는 인공 불빛, 분주하게 오고가는 수많은 걸음걸이. 혼자만이 그 분위기에서 동 떨어진 듯 아카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왜?”
그의 말동무가 되는 것뿐이었다.
“보기 그렇잖아요.”
수건을 받아 든 보쿠토가 눈살을 찌푸린다.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어디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데?!”
플라스틱 물통을 마저 건네려던 손이 잠시 머뭇거린다. 수건을 건네다 손톱이 스친 탓이었다. 짧게 닿은 피부 결에서 열이 끓어오른다. 물통의 주둥이 부근으로 손아귀를 옮기고 시선을 바닥에 깐다. 물통의 무게감이 일순 사라진다. 애꿎은 입술만 깨문다.
“……보통 패션 잡지 하면, 그런 요란한 포즈보단 우아하고 정적인 포즈를 선호하잖아요.”
표정 관리가 안 된다는 표현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도통 얌전히 있지 않는 눈알이 옆으로 구른다. 열이 오른 뒷목을 감싸고 눈 맞춤을 피한다.
“그런가?”
최근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조차 자각하기 어려웠다. 눈을 뜨면 보쿠토에게 끌려 다녔고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까지 보쿠토가 웃고 있었다. 함께, 란 단어가 너무 당연해서 그랬을까. 가짜의 거죽을 썼다한들 이것이 ‘연애’란 사실에 자만해 있었던 걸까. 보쿠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다른 사람일 수 없다며 오만을 부렸던 걸까. 아님, 이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나도 사랑해.’
보쿠토가 말하는 사랑이란 의외로 달콤했다. 부풀은 풍선이 사랑스러운 온기를 함박 머금고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옆얼굴이 꼭 모르는 사람의 것 같아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홀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걸 뼈저리게 자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다.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도 아니었고 오래도록 만난 사이도 아니었다. 개월 수를 세는 것조차 부끄러운, 짧은 시간.
“그럼 케이지 너가 해볼래?”
보쿠토 코타로란 이름이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스며든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 아뇨. 저는 그냥 조언 삼아 한 말이고 굳이 저를-”
“괜찮다니까~ ”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만류하며 뒷걸음질을 치려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채 제 옆으로 끌고 온다. 메이크업 마무리 단계를 거치자 스텝진이 멀어진다. 멀리서 준비 다 됐냐는 메인 디렉터의 메아리가 울린다. 화들짝 놀란 아카아시가 붙들린 손목을 떨치려 하지만 보쿠토의 악력이란 그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 몰라? 오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가 언제쯤 오겠어.”
제 옆으로 아카아시를 바짝 붙인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귀에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인다. 쟨 누구야. 디렉터의 수군거림엔 날이 서있다.
“감독님~ 제가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포즈가 잘 안 잡히네요.”
옷깃을 잡아 끄는 손가락이 간절하다. 그러나 제발이란 바람이 보쿠토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다.
“이 친구랑 몇 컷 찍어 봐도 될까요?”
아카아시는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타들어갈 듯 양 옆에서 쏟아져 나오는 태양빛이 눈부시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광량에 손바닥을 들어 시야를 가려내자 두 인공 태양 사이로 거뭇한 인영들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디렉터의 불만스런 태도로 인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개중엔 한쪽으로 비스듬히 뻗쳐오른 머리털도 있었다. 보쿠토의 막무가내 성질을 모를 리 없는 쿠로오가 디렉터에게 양해를 구하려던 참이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 사이의 관계성이라던가, 이번 한 번만 봐달라던가, 대신 B컷으로 해 화보집엔 싣지 말아 달라 던가 등의 여러 말들이 오갔으리라.
그 짧지만 짧지 않은 찰나. 아카아시는 조금 전 쿠로오와 나누었던 대화의 서두를 떠올렸다.
‘보쿠토씨 말입니다.’
한창 촬영 준비로 목청이 터지고 동분서주로 바쁜 현장 분위기 속, 조곤조곤한 목소리 톤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쿠로오와 아카아시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한 팔로 다른 팔을 감싸며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왜. 분주히 코디를 받고 있던 보쿠토를 한 발 자국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쿠로오는 건조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반면 아카아시는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입안은 바짝바짝 마르고 쓸데없는 헛기침만 튀어 나왔으며 정작 꺼내고 싶은 말은 목구멍 아래에서 윙윙 돌았다.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나 해서요.’
결국은 뱉었다. 확인 사살이었을까.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을 남에게 다시 한 번 묻고 말았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만의 하나, 천만의 하나라는 가정은 쉽게 무너졌다. 마저 말을 이으려던 쿠로오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곤 자리를 옮기잔 제스처를 취했다. 사람 없는 텅 빈 휴게실, 쿠로오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사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부터 열애 중이었어, 저 녀석.’
정해진 답을 들었을 때의 상실감. 차마 배신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었다. 신뢰를 밑바탕 삼았을 때 되돌아올지 모르는 가능성이 배신 아니던가. 손깍지를 쥐고 있던 손가락들이 미미하게 떨렸다.
‘근데 그런 것치곤 꽤 오래 됐다? 4년이 넘었는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 못 죽어 안달이야, 글쎄.’
4년. 그 현실성 없는 숫자에 심장이 침몰했다.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이 짧은 연애 햇수를 뜻하길 바란 적이 있었다. 흔해 빠진 격언처럼,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란 법은 없었으니까.
‘뭐, 한 편으론 흐트러짐 하나 없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대단한 것 같기도 해. 그 녀석, 배우 마음먹기 전부터 만난 사이라던데 나 같으면 으레 헤어졌지. 하물며 애인이 배우 같은 한 사람 몫 밥 벌이도 하기 힘든 일 한다 하면 처음엔 열심히 응원해 줄지언정 얼마 못 가 한 쪽이 지쳐 떨어진다던데. 그 둘은 그런 기색도 전혀 안 보였다 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은 성공했잖아? 소위 ‘천생 연분’이라 불리는 족속들이다 이거지. 나 같으면 도저히 무리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큰거리던 눈시울이 부끄러웠다. 울고 싶다는 일방적인 욕구 그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럴 자격 따윈 없고 앞으로도 결코 주어지지 않을 텐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친구도 참 대 인배야. 계약 연애? 보통 사람이 그딴 걸 허락할 리가 없잖냐.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애인이 게이 스캔들에 휘말릴 거라는데도. 선뜻 괜찮다 하는 건 물론 그 대가로 스케줄 없을 때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숙소 하나 내달라 하는 게 전부니. 속이 깊은 건지, 그냥 보쿠토 바보인 건지. 그냥 끼리끼리 잘 만났네 싶다, 나는.’
‘…….’
‘말이 좀 많았네. 근데 그건 왜?’
쿠로오는 의아한 얼굴로 턱을 갸웃거렸다. 곧장 뻔한 말이 돌아왔다.
‘별로…….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 일 아니니까.’
아카아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어서. 누구를 위해.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입단속 철저히 할 것. 계약을 비롯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 보고 들었던 모든 걸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
비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쿠로오는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을까. 보쿠토와 자신이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서로를 좋을 대로 이용해 먹는 관계라는 것? 보쿠토에겐 번듯한 이성 애인이 따로 있었다는 것?
‘이 시점에서 발각됐다간 너나 나나 보쿠토나 전부 끝장나니까.’
오케이 사인은 금방 난다. 디렉터는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사진사의 입장에선 뻣뻣한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좋은 찬스였기 때문이다. 신이 난 보쿠토가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후 아카아시 옆으로 바짝 붙어 선다.
“뭐가 좋겠어? 어깨동무? 포옹? 아님 안고 빙글빙글 돌아볼까?”
입안이 까끌 거린다. 찰싹 달라붙은 팔뚝 언저리에서 열기가 끓어오른다. 따뜻한 체온. 사람의 평균 체온이 36.5도라면 이 사람의 체온은 37도쯤 되는 거 아닐까. 아카아시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척추를 올곧게 세운다. 그걸 걱정의 낌새로 파악한 보쿠토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고개를 들이밀며 말이다.
“너무 걱정 마. 케이지 정도는 가뿐히 들 수 있으니까.”
환한 전깃불 아래 춤추듯 서로를 얼싸안던 한 쌍의 인영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간다. 선악과. 즉, 금단의 열매. 그 달콤한 속삭임이 가라앉은 마음을 뒤흔든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모른 척 했더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가져 오는 결말조차도 같은 도착지를 말한다. 사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이 있었다.
“표정 풀어.”
큰 손이 뒤통수를 감싼다. 뻗친 뒷머리를 마구 헤집는다. 활짝 웃는 옆얼굴이 조명을 받고 빛을 발한다. 보쿠토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플래시가 번쩍인다. 꽁꽁 얼어붙었던 눈매가 한결 누그러진다.
차분해졌다, 도 아니고 침착해졌다, 도 아니었다. 다만 착잡했다. 표정을 풀라고 말한 장본인인 주제에 표정이 제일 굳어 있다. 그냥 알 수 있다. 동그랗게 뜬 금안에 생기가 없고 눈꺼풀 가장자리가 미미하게 떨린다. 왜 이제야 알아챘나 싶을 만큼 뻣뻣한 웃음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사람도 긴장하고 있구나. 편안하지 않구나.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구나. 거기까지 생각의 타래가 퍼져나가자 남는 건 거의 없다. 그저, 사랑스런 연인을 품에 안아들던 보쿠토의 순수한 웃음이 지금의 가식과 비교될 뿐이다.
“둘 다 왜 그리 딱딱해.”
의미심장한 눈초리가 두 사람을 향한다.
“듣자하니 니들 이 바닥에서 유명하던데. 좀 더 평소답게 굴어 봐. 렌즈 의식하지 말고. 차라리 카메라 없다고 생각해.”
보쿠토는 멋쩍게 웃고 아카아시는 한 걸음 떨어진다. 머리카락에 닿아있던 다부진 손가락은 멀어지고 텁텁한 공기는 이상한 간격을 만든다. 보쿠토는 양 손으로 제 양 뺨을 짝 소리 나게 내친다. 주저할 틈 없이 뺨은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위협적인 소음에 놀란 아카아시가 흠칫하는 것도 잠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돌아온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다시 한 번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어디서 배워먹은 사려인지. 저로 인해 아카아시가 불편할 거란 생각이 어디서 샘솟았는지. 불편하지 않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시켰는지.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건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배후로 돌아간다. 양 팔로 아카아시의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따뜻한 숨이 드러난 목덜미와 귓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바짝 곤두선 귓바퀴 위로 나직한 숨소리가 들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쿠토의 것이기에 아카아시는 훅하고 호흡을 들이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지한다. 괜찮아. 다독이는 속삭임이 뱀의 유혹처럼 홧홧하다. 덩달아 귓전이 뜨겁다. 팔뚝을 타고 내려간 보쿠토가 파르르 떨고 있는 아카아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겹쳐 잡는다.짤막한 머리칼 사이로 콧날을 파묻어 체취를 들이마신다.
“정면을 보지 않아도 돼. 옆을 봐. 비스듬하게 아래를. 그렇지.”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이렇게 가까워 본 적이 없다. 곧이어 온갖 끔찍한 사고들이 머리를 뒤덮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았던가. 바디 워시는 뭘 썼지. 손톱 관리는 했던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왔지. 세수하고 거울은 봤나. 눈곱이나 뾰루지의 존재 유무를 확인 했어야 했는데.
그러다 손발에 힘이 빠진다.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첫사랑에 빠진 중학생도 아니고 사랑으로 가슴 부푼 고등학생도 아니었건만. 그는 최소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싶었다. 머리와 마음이 한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좋아하면 안 된다는 이성의 지시를 따라 마음이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자로 긋 듯 마음이 멈춰 섰으면 좋겠다고.
“지금 딱 보기 좋아요~”
다시금 플래시가 터진다. 살짝 구겨진 얼굴로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감춘다. 이 순간이 영겁이 되기만을 바란다.
* * *
손아귀에 얼음을 쥐었을 때. 제일 처음 느껴지는 건 통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즉, 얼음을 만진다고 곧장 상쾌하고 시원하며 추워지진 않는다. 오히려 그들보다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건 바로 통각이다. 피부가 벗겨지고 벌겋게 부풀며 개중 예민한 것은 무르다 못해 살갗이 허옇게 바스라진다. 우스운 것은 그 다음이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아픔이 지나치면 다음 차례엔 시원함이 찾아온다. 상쾌함이 찾아온다. 결코 통증을 잊은 것이 아니다. 피부는 물렀고 아픔은 여전하다. 다만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이란 생경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고 아득해진다. 비로소 아픔에 익숙해진 것이다. 고통은 첫 번째뿐. 두 번째, 세 번째, 혹 그 이후는 최초의 것처럼 오롯하게 통증을 호소하진 않는다.
보쿠토 코타로의 연인, 아리노 사키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아카아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리노 사키예요.”
다정한 사람. 물결치는 웨이브 진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와 커피 잔을 내려놓는 우아한 손짓에선 기품이 흘러넘친다. 머리카락 색을 쏙 빼닮은 고동색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길게 늘어져 그늘을 드리우고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는 눈매에선 상냥함이 뚝뚝 떨어진다.
“홍차는 내키지 않으신가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있어야 할 빈 옆자리를 흘겨보며 의구심을 피워낸다.
“아, 아니요. 약간 긴장이 돼서요. 오늘은 따로 스케줄이 없다 들었는데 보쿠토씨가 다짜고짜 데리고 온 곳이…….”
객관적으로 보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제 시간과 노력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에게 가짜 애인 행세하는 것을 허용케 하며
“후후. 제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코타로한테 부탁해서요.”
이제 와 그 당사자를 만나본다? 대 인배? 말도 안 된다. 따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결국 그럴 듯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리라. 애초에 그런 얄팍한 감정 하나에 몸과 마음 다 바치려는 바보가 요즘 세상 어디에 있나. 무엇보다 보쿠토와 있을 때의 얼굴, 저와 있을 때의 얼굴이 극명히 다르다.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가름 할 줄 알아야 했다.
“아카아시군은 의외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인가 봐요. 의심하려 들어 봤자 소용없는데.”
머그 잔 손잡이 부근을 매만지던 손톱이 움찔거린다. 김이 피어오르는 붉은 색 액체 위로 사뭇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비친다. 생긋 웃는 그녀의 실루엣 뒤로 다소 평범한 주거 공간이 펼쳐져 있다. 탁 트인 거실 너머로 햇살이 비쳐 오는 베란다, 와인색 카펫과 집안 곳곳을 장식하는 두 사람의 사진들, 냉장고 앞에 붙어진 서툰 글씨들과 ‘함께’란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2인용 생활 용품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카아시의 이목을 끌었던.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포스터 이미지. 렌즈를 향해 선명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예비 신혼부부를 방불케 했다.
“……무슨 얘길 듣고 싶으신 건가요.”
찻잔을 감싸 안은 손가락이 곱다. 왼손 약지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칠흑같은 구덩이 속을 재차 확인한 기분이다.
“아뇨, 뭐……. 특별한 이윤 없고. 그냥, 제 역할을 맡는 사람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보아 하니 침착하고 차분하고 위기 상황도 나름대로 잘 대처할 것 같고.”
맹목적인 사랑이란 게, 정말 가능한 걸까. 진실을 놓치고 있는 아둔한 자는 오히려 자신이었나.
“솔직히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 겉보기와 달리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애가 워낙 외로움을 잘 타서 말이야.’
묘하게 익숙한 문장. 첫 대면에 곧장 보쿠토와 비슷한 이미지일 거라 여겼다. 그 만큼 밝고 건강한 사람이란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엇비슷한 눈짓,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어투,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먼발치에 어필하기까지.
“테츠로한테만 맡기기에는 어딘가 불안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니 오히려 안심이 됐어요.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들을 만 한 입장이던가. 기계적으로 움직인 팔다리가 찻잔을 들어 입에 들이 붓는다. 화끈한 기운이 입천장을 덮치고 혀를 덥힌다. 모래알 굴러다니듯 혀가 까끌 거린다.
“오래 봐왔어요. 그 만큼 좋아하고 사랑하고 또, 아끼고 있어요. 남들이 우리를 두고 뭐라던가요? 천생연분? 우리라고 처음부터 편하게 사랑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적, 울고 싶은 적, 다 내려놓고 싶은 적, 헤아릴 수 없이 많았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그래,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놀음에 빠진 스스로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질투에 눈이 먼 우둔한 자가 사랑에 취한 여인네를 이유 없이 의심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경우는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코타로는 저를 선택했고, 저 역시 마지막까지 그 사람 옆에 서 있길 약속했죠. 이유는 간단해요.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우리는 ‘함께’여서 행복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물론 다소의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행복이란 최종 목표를 훼방하진 못 하겠죠.”
아카아시는 비로소 눈을 감는다. 화상을 입은 여린 살점이 텁텁한 뒷맛을 내놓는다. 이 여자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자신을 왜 불러 들였는지 알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우리 관계를 얕보지 마세요. 넘볼 궁리조차 하지 마세요.”
대못을 박는다. 이것이 네가 지켜야할 선이라며 날선 으름장을 놓는다.
“어찌 됐든 코타로는 저를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