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짧은 신호음 뒤로 조명이 번쩍인다. 새하얀 배경지를 두 개의 인공조명이 에워싸고 있다. 중앙엔 오늘의 주인공이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컷, 컷. 잠시만요.”


셔터를 누르고 있어야할 사진사는 손사래를 친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반사판을 들고 있던 보조 스텝이 멀어진다.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보쿠토군, 표정은 좋은데. 표정은 정말 좋은데. 포즈를 좀 어떻게…….”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인다. 쩍 벌려 앉은 다리 간격을 좁히고 슈퍼맨마냥 뻗은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역시 이게 좋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화보 촬영이었다. 나날이 눈덩이처럼 부풀어가는 인기에 발맞춰 유명 잡지사의 표지 모델 제안이 들어온 탓이었다. 바로 몇 주 전 같았으면 텅텅 빈 스케줄 표만 노려보다 시간 때우기로 영화만 돌려보거나 숙소에서 빈둥거렸을 그는 하루가멀다하고 쏟아지는 스케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엄연히 잡지 간판인데.”


보쿠토의 슈퍼맨 포즈를 영 탐탁지 않아 하던 사진사 대신 아카아시가 말을 잇는다. 사진사가 다른 결과물을 보러 모니터 쪽으로 스텝 몇몇을 불러 모으는 사이, 아카아시는 물병과 마른 수건을 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를 뒤따른 여성 두 명의 손엔 꽤 큼직한 메이크업 박스가 들려 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번듯한 코디네이터 하나 없던 보쿠토였건만 이제는 쉬는 시간마다 코디와 옷매무새를 갖춰주는 전용 스텝진이 있었다. 땀방울 맺힌 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기름종이. 지워진 메이크업 위로 보송보송한 파우더가 내려앉는다. 촬영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의 모공을 가득 채운 땀방울은 조명의 열기를 실감케 한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탁한 먼지 냄새와 피부에 직격탄으로 쏟아지는 인공 불빛, 분주하게 오고가는 수많은 걸음걸이. 혼자만이 그 분위기에서 동 떨어진 듯 아카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왜?”


그의 말동무가 되는 것뿐이었다.  


“보기 그렇잖아요.”


수건을 받아 든 보쿠토가 눈살을 찌푸린다.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어디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데?!”


플라스틱 물통을 마저 건네려던 손이 잠시 머뭇거린다. 수건을 건네다 손톱이 스친 탓이었다. 짧게 닿은 피부 결에서 열이 끓어오른다. 물통의 주둥이 부근으로 손아귀를 옮기고 시선을 바닥에 깐다. 물통의 무게감이 일순 사라진다. 애꿎은 입술만 깨문다. 


“……보통 패션 잡지 하면, 그런 요란한 포즈보단 우아하고 정적인 포즈를 선호하잖아요.”


표정 관리가 안 된다는 표현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도통 얌전히 있지 않는 눈알이 옆으로 구른다. 열이 오른 뒷목을 감싸고 눈 맞춤을 피한다. 


“그런가?”


최근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조차 자각하기 어려웠다. 눈을 뜨면 보쿠토에게 끌려 다녔고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까지 보쿠토가 웃고 있었다. 함께, 란 단어가 너무 당연해서 그랬을까. 가짜의 거죽을 썼다한들 이것이 ‘연애’란 사실에 자만해 있었던 걸까. 보쿠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다른 사람일 수 없다며 오만을 부렸던 걸까. 아님, 이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나도 사랑해.’


보쿠토가 말하는 사랑이란 의외로 달콤했다. 부풀은 풍선이 사랑스러운 온기를 함박 머금고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옆얼굴이 꼭 모르는 사람의 것 같아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홀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걸 뼈저리게 자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다.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도 아니었고 오래도록 만난 사이도 아니었다. 개월 수를 세는 것조차 부끄러운, 짧은 시간. 


“그럼 케이지 너가 해볼래?”


보쿠토 코타로란 이름이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스며든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 아뇨. 저는 그냥 조언 삼아 한 말이고 굳이 저를-”

“괜찮다니까~ ”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만류하며 뒷걸음질을 치려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채 제 옆으로 끌고 온다. 메이크업 마무리 단계를 거치자 스텝진이 멀어진다. 멀리서 준비 다 됐냐는 메인 디렉터의 메아리가 울린다. 화들짝 놀란 아카아시가 붙들린 손목을 떨치려 하지만 보쿠토의 악력이란 그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 몰라? 오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가 언제쯤 오겠어.”


제 옆으로 아카아시를 바짝 붙인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귀에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인다. 쟨 누구야. 디렉터의 수군거림엔 날이 서있다.


“감독님~ 제가 오늘 긴장을 많이 해서 포즈가 잘 안 잡히네요.”


옷깃을 잡아 끄는 손가락이 간절하다. 그러나 제발이란 바람이 보쿠토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다. 


“이 친구랑 몇 컷 찍어 봐도 될까요?”


아카아시는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다. 타들어갈 듯 양 옆에서 쏟아져 나오는 태양빛이 눈부시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광량에 손바닥을 들어 시야를 가려내자 두 인공 태양 사이로 거뭇한 인영들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디렉터의 불만스런 태도로 인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개중엔 한쪽으로 비스듬히 뻗쳐오른 머리털도 있었다. 보쿠토의 막무가내 성질을 모를 리 없는 쿠로오가 디렉터에게 양해를 구하려던 참이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 사이의 관계성이라던가, 이번 한 번만 봐달라던가, 대신 B컷으로 해 화보집엔 싣지 말아 달라 던가 등의 여러 말들이 오갔으리라.


그 짧지만 짧지 않은 찰나. 아카아시는 조금 전 쿠로오와 나누었던 대화의 서두를 떠올렸다. 


‘보쿠토씨 말입니다.’


한창 촬영 준비로 목청이 터지고 동분서주로 바쁜 현장 분위기 속, 조곤조곤한 목소리 톤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쿠로오와 아카아시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한 팔로 다른 팔을 감싸며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왜. 분주히 코디를 받고 있던 보쿠토를 한 발 자국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쿠로오는 건조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반면 아카아시는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입안은 바짝바짝 마르고 쓸데없는 헛기침만 튀어 나왔으며 정작 꺼내고 싶은 말은 목구멍 아래에서 윙윙 돌았다.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나 해서요.’


결국은 뱉었다. 확인 사살이었을까.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을 남에게 다시 한 번 묻고 말았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만의 하나, 천만의 하나라는 가정은 쉽게 무너졌다. 마저 말을 이으려던 쿠로오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곤 자리를 옮기잔 제스처를 취했다. 사람 없는 텅 빈 휴게실, 쿠로오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사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부터 열애 중이었어, 저 녀석.’


정해진 답을 들었을 때의 상실감. 차마 배신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었다. 신뢰를 밑바탕 삼았을 때 되돌아올지 모르는 가능성이 배신 아니던가. 손깍지를 쥐고 있던 손가락들이 미미하게 떨렸다.   


‘근데 그런 것치곤 꽤 오래 됐다? 4년이 넘었는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 못 죽어 안달이야, 글쎄.’


4년. 그 현실성 없는 숫자에 심장이 침몰했다.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이 짧은 연애 햇수를 뜻하길 바란 적이 있었다. 흔해 빠진 격언처럼,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란 법은 없었으니까. 


‘뭐, 한 편으론 흐트러짐 하나 없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대단한 것 같기도 해. 그 녀석, 배우 마음먹기 전부터 만난 사이라던데 나 같으면 으레 헤어졌지. 하물며 애인이 배우 같은 한 사람 몫 밥 벌이도 하기 힘든 일 한다 하면 처음엔 열심히 응원해 줄지언정 얼마 못 가 한 쪽이 지쳐 떨어진다던데. 그 둘은 그런 기색도 전혀 안 보였다 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은 성공했잖아? 소위 ‘천생 연분’이라 불리는 족속들이다 이거지. 나 같으면 도저히 무리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큰거리던 눈시울이 부끄러웠다. 울고 싶다는 일방적인 욕구 그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럴 자격 따윈 없고 앞으로도 결코 주어지지 않을 텐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친구도 참 대 인배야. 계약 연애? 보통 사람이 그딴 걸 허락할 리가 없잖냐.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애인이 게이 스캔들에 휘말릴 거라는데도. 선뜻 괜찮다 하는 건 물론 그 대가로 스케줄 없을 때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숙소 하나 내달라 하는 게 전부니. 속이 깊은 건지, 그냥 보쿠토 바보인 건지. 그냥 끼리끼리 잘 만났네 싶다, 나는.’

‘…….’

‘말이 좀 많았네. 근데 그건 왜?’  


쿠로오는 의아한 얼굴로 턱을 갸웃거렸다. 곧장 뻔한 말이 돌아왔다. 


‘별로…….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 일 아니니까.’


아카아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어서. 누구를 위해.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입단속 철저히 할 것. 계약을 비롯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 보고 들었던 모든 걸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 


비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쿠로오는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을까. 보쿠토와 자신이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서로를 좋을 대로 이용해 먹는 관계라는 것? 보쿠토에겐 번듯한 이성 애인이 따로 있었다는 것? 


‘이 시점에서 발각됐다간 너나 나나 보쿠토나 전부 끝장나니까.’


오케이 사인은 금방 난다. 디렉터는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사진사의 입장에선 뻣뻣한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좋은 찬스였기 때문이다. 신이 난 보쿠토가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후 아카아시 옆으로 바짝 붙어 선다. 


“뭐가 좋겠어? 어깨동무? 포옹? 아님 안고 빙글빙글 돌아볼까?”


입안이 까끌 거린다. 찰싹 달라붙은 팔뚝 언저리에서 열기가 끓어오른다. 따뜻한 체온. 사람의 평균 체온이 36.5도라면 이 사람의 체온은 37도쯤 되는 거 아닐까. 아카아시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척추를 올곧게 세운다. 그걸 걱정의 낌새로 파악한 보쿠토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고개를 들이밀며 말이다. 


“너무 걱정 마. 케이지 정도는 가뿐히 들 수 있으니까.”


환한 전깃불 아래 춤추듯 서로를 얼싸안던 한 쌍의 인영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간다. 선악과. 즉, 금단의 열매. 그 달콤한 속삭임이 가라앉은 마음을 뒤흔든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모른 척 했더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가져 오는 결말조차도 같은 도착지를 말한다. 사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이 있었다. 


“표정 풀어.”


큰 손이 뒤통수를 감싼다. 뻗친 뒷머리를 마구 헤집는다. 활짝 웃는 옆얼굴이 조명을 받고 빛을 발한다. 보쿠토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플래시가 번쩍인다. 꽁꽁 얼어붙었던 눈매가 한결 누그러진다. 


차분해졌다, 도 아니고 침착해졌다, 도 아니었다. 다만 착잡했다. 표정을 풀라고 말한 장본인인 주제에 표정이 제일 굳어 있다. 그냥 알 수 있다. 동그랗게 뜬 금안에 생기가 없고 눈꺼풀 가장자리가 미미하게 떨린다. 왜 이제야 알아챘나 싶을 만큼 뻣뻣한 웃음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사람도 긴장하고 있구나. 편안하지 않구나.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구나. 거기까지 생각의 타래가 퍼져나가자 남는 건 거의 없다. 그저, 사랑스런 연인을 품에 안아들던 보쿠토의 순수한 웃음이 지금의 가식과 비교될 뿐이다. 


“둘 다 왜 그리 딱딱해.”


의미심장한 눈초리가 두 사람을 향한다. 


“듣자하니 니들 이 바닥에서 유명하던데. 좀 더 평소답게 굴어 봐. 렌즈 의식하지 말고. 차라리 카메라 없다고 생각해.”


보쿠토는 멋쩍게 웃고 아카아시는 한 걸음 떨어진다. 머리카락에 닿아있던 다부진 손가락은 멀어지고 텁텁한 공기는 이상한 간격을 만든다. 보쿠토는 양 손으로 제 양 뺨을 짝 소리 나게 내친다. 주저할 틈 없이 뺨은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위협적인 소음에 놀란 아카아시가 흠칫하는 것도 잠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돌아온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다시 한 번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어디서 배워먹은 사려인지. 저로 인해 아카아시가 불편할 거란 생각이 어디서 샘솟았는지. 불편하지 않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시켰는지.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건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배후로 돌아간다. 양 팔로 아카아시의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따뜻한 숨이 드러난 목덜미와 귓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바짝 곤두선 귓바퀴 위로 나직한 숨소리가 들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쿠토의 것이기에 아카아시는 훅하고 호흡을 들이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지한다. 괜찮아. 다독이는 속삭임이 뱀의 유혹처럼 홧홧하다. 덩달아 귓전이 뜨겁다. 팔뚝을 타고 내려간 보쿠토가 파르르 떨고 있는 아카아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겹쳐 잡는다.짤막한 머리칼 사이로 콧날을 파묻어 체취를 들이마신다. 


“정면을 보지 않아도 돼. 옆을 봐. 비스듬하게 아래를. 그렇지.”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이렇게 가까워 본 적이 없다. 곧이어 온갖 끔찍한 사고들이 머리를 뒤덮는다. 


언제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았던가. 바디 워시는 뭘 썼지. 손톱 관리는 했던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왔지. 세수하고 거울은 봤나. 눈곱이나 뾰루지의 존재 유무를 확인 했어야 했는데. 


그러다 손발에 힘이 빠진다.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첫사랑에 빠진 중학생도 아니고 사랑으로 가슴 부푼 고등학생도 아니었건만. 그는 최소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싶었다. 머리와 마음이 한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좋아하면 안 된다는 이성의 지시를 따라 마음이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자로 긋 듯 마음이 멈춰 섰으면 좋겠다고.


“지금 딱 보기 좋아요~”


다시금 플래시가 터진다. 살짝 구겨진 얼굴로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감춘다. 이 순간이 영겁이 되기만을 바란다.



* * *



손아귀에 얼음을 쥐었을 때. 제일 처음 느껴지는 건 통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즉, 얼음을 만진다고 곧장 상쾌하고 시원하며 추워지진 않는다. 오히려 그들보다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건 바로 통각이다. 피부가 벗겨지고 벌겋게 부풀며 개중 예민한 것은 무르다 못해 살갗이 허옇게 바스라진다. 우스운 것은 그 다음이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아픔이 지나치면 다음 차례엔 시원함이 찾아온다. 상쾌함이 찾아온다. 결코 통증을 잊은 것이 아니다. 피부는 물렀고 아픔은 여전하다. 다만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이란 생경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고 아득해진다. 비로소 아픔에 익숙해진 것이다. 고통은 첫 번째뿐. 두 번째, 세 번째, 혹 그 이후는 최초의 것처럼 오롯하게 통증을 호소하진 않는다. 


보쿠토 코타로의 연인, 아리노 사키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아카아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리노 사키예요.”


다정한 사람. 물결치는 웨이브 진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와 커피 잔을 내려놓는 우아한 손짓에선 기품이 흘러넘친다. 머리카락 색을 쏙 빼닮은 고동색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길게 늘어져 그늘을 드리우고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는 눈매에선 상냥함이 뚝뚝 떨어진다. 


“홍차는 내키지 않으신가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있어야 할 빈 옆자리를 흘겨보며 의구심을 피워낸다. 


“아, 아니요. 약간 긴장이 돼서요. 오늘은 따로 스케줄이 없다 들었는데 보쿠토씨가 다짜고짜 데리고 온 곳이…….”


객관적으로 보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제 시간과 노력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에게 가짜 애인 행세하는 것을 허용케 하며 


“후후. 제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코타로한테 부탁해서요.”


이제 와 그 당사자를 만나본다? 대 인배? 말도 안 된다. 따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결국 그럴 듯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리라. 애초에 그런 얄팍한 감정 하나에 몸과 마음 다 바치려는 바보가 요즘 세상 어디에 있나. 무엇보다 보쿠토와 있을 때의 얼굴, 저와 있을 때의 얼굴이 극명히 다르다.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가름 할 줄 알아야 했다. 


“아카아시군은 의외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인가 봐요. 의심하려 들어 봤자 소용없는데.”


머그 잔 손잡이 부근을 매만지던 손톱이 움찔거린다. 김이 피어오르는 붉은 색 액체 위로 사뭇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비친다. 생긋 웃는 그녀의 실루엣 뒤로 다소 평범한 주거 공간이 펼쳐져 있다. 탁 트인 거실 너머로 햇살이 비쳐 오는 베란다, 와인색 카펫과 집안 곳곳을 장식하는 두 사람의 사진들, 냉장고 앞에 붙어진 서툰 글씨들과 ‘함께’란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2인용 생활 용품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카아시의 이목을 끌었던.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포스터 이미지. 렌즈를 향해 선명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예비 신혼부부를 방불케 했다.   


“……무슨 얘길 듣고 싶으신 건가요.”


찻잔을 감싸 안은 손가락이 곱다. 왼손 약지가 은빛으로 일렁인다. 칠흑같은 구덩이 속을 재차 확인한 기분이다. 


“아뇨, 뭐……. 특별한 이윤 없고. 그냥, 제 역할을 맡는 사람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보아 하니 침착하고 차분하고 위기 상황도 나름대로 잘 대처할 것 같고.”


맹목적인 사랑이란 게, 정말 가능한 걸까. 진실을 놓치고 있는 아둔한 자는 오히려 자신이었나. 


“솔직히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 겉보기와 달리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애가 워낙 외로움을 잘 타서 말이야.’


묘하게 익숙한 문장. 첫 대면에 곧장 보쿠토와 비슷한 이미지일 거라 여겼다. 그 만큼 밝고 건강한 사람이란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엇비슷한 눈짓,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어투,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먼발치에 어필하기까지. 


“테츠로한테만 맡기기에는 어딘가 불안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니 오히려 안심이 됐어요.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들을 만 한 입장이던가. 기계적으로 움직인 팔다리가 찻잔을 들어 입에 들이 붓는다. 화끈한 기운이 입천장을 덮치고 혀를 덥힌다. 모래알 굴러다니듯 혀가 까끌 거린다. 


“오래 봐왔어요. 그 만큼 좋아하고 사랑하고 또, 아끼고 있어요. 남들이 우리를 두고 뭐라던가요? 천생연분? 우리라고 처음부터 편하게 사랑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적, 울고 싶은 적, 다 내려놓고 싶은 적, 헤아릴 수 없이 많았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그래,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놀음에 빠진 스스로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질투에 눈이 먼 우둔한 자가 사랑에 취한 여인네를 이유 없이 의심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경우는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코타로는 저를 선택했고, 저 역시 마지막까지 그 사람 옆에 서 있길 약속했죠. 이유는 간단해요.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우리는 ‘함께’여서 행복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물론 다소의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행복이란 최종 목표를 훼방하진 못 하겠죠.” 


아카아시는 비로소 눈을 감는다. 화상을 입은 여린 살점이 텁텁한 뒷맛을 내놓는다. 이 여자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자신을 왜 불러 들였는지 알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우리 관계를 얕보지 마세요. 넘볼 궁리조차 하지 마세요.”


대못을 박는다. 이것이 네가 지켜야할 선이라며 날선 으름장을 놓는다. 


“어찌 됐든 코타로는 저를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주제 :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




W. 멜




바람결에 버들나무가 나부꼈다. 길게 뻗은 마른 잎사귀가 강변 위로 몸을 던졌다. 강변을 따라 굽이치는 강물이 하늘의 색을 닮아갔다. 지평선과 해가 맞닿아가는 이별의 시각.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강의 풍경을 쿠로오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석재 난간에 기대 몸을 살풋 앞으로 기울인 채, 입가엔 절반 넘게 타들어간 담배를 꾹 머금은 채. 


사실 큰 강은 아니었다. 스미다, 아라카와 같은 유명한 이름이 붙은 것 또한 아니었다. 개천이라기엔 어딘가 모자라고 강이라기엔 과분한. 기껏해야 근방의 동네 아이들이 무더운 한 계절을 식히기 위해 물놀이를 하러 오는 정도의. 이름 없는 하천 중 하나였다. 


“여, 사회인.”


쌀쌀한 바람에 발맞춰 머리칼이 칠흑빛으로 물결 쳤다. 귓가에 머무는 음색이 퍽 그리웠다. 소리의 근원지엔 팔을 크게 붕붕 휘두르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어른 부엉이가 있었다. 자연스레 턱 끝이 돌아갔다. 얇고 길쭉한 담배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던 재가 단숨에 형체를 잃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 인마.”


투덜거리는 어조와 달리 쿠로오의 입가엔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에 화답하듯 보쿠토는 한 손에 달랑거리는 검은 색 비닐봉지를 흡사 전리품처럼 흔들어 보이며 낄낄 웃었다.  


“아아. 뭐 좀 사온다고.”

“니가 불러놓고 말이야.”

“미안미안~”


보쿠토를 훑어 내린 쿠로오는 근 몇 년 만에 재회한 오랜 친구의 사정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대학 이름과 문양이 수놓아진 점퍼라던가, 얼마 전에 구입한 것처럼 보이는 새 운동화라던가, 학창 시절보다 조금 더 높아진 눈높이나 한층 비대해진 체격 조건이라던가. 예나 지금이나 배구만을 오롯이 양식 삼아 쑥쑥 자라나는 보쿠토를 보고 있자니 대학은 둘째 치고 평범하게 취업 준비를 해 평범하게 회사에 들어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멋쩍게 느껴지는 쿠로오였다. 


“……우리 맹금류는 여전한가 보네.”

“우왓- 여기 엄청 오랜만이네!”


무시냐. 쯧, 짧게 혀를 찬 쿠로오는 두 모금 쯤 남은 담배를 아낌없이 들이켰다. 아직까지 현역 선수로 뛰고 있을 제 벗을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남은 불씨를 난간에 지진 쿠로오 옆으로 보쿠토가 바짝 다가섰다. 


“악!!”


120%의 파워를 자랑하는 손바닥이 친구의 굽은 등짝을 철썩 소리 나게 내리치는 건 덤으로 말이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통의 눈물을 쏙 뺀 쿠로오는 나직하게 욕설을 읊조렸다. 정작 가해자란 사람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정글짐 오르는 꼬마 아이 마냥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렸지만. 구겨진 캔 깡통 닮은 얼굴을 한 쿠로오가 입을 비죽 내밀어 바코드 찍는 소리를 냈다. 


“삐빅, 전치 4주 나왔습니다.”

“하늘 봐봐~ 노을이랑 하늘이랑 진짜 그림 같다.”

“병원 진단서도 손수 끊어다 드리는 특급 서비스.”  

“아!! 저기선 꼬맹이들 논다!”

“오야오야, 맹금류들은 날 때부터 귀가 먹었나~?”


그제야 보쿠토는 쿠로오를 돌아봤다. 시원시원하게 말려 올라가는 입 꼬리와 굽이치듯 휘어진 눈살 너머로 탠저린 색 노을이 펼쳐졌다. 


“아니!”


이 풍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면, 보쿠토는 그 풍경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 


“옛날 생각나서~”


칙칙한 회백색을 머금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말이다. 


“……어련 하시겠어.”


쿠로오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추억의 일기장이라도 들춰보듯 쉴 틈 없이 굴러다니는 데이지 색 눈알은 얇게 부서지는 강물을 뒤좇았다. 강변을 따라 우거진 풀숲은 마른 모래를 닮은 색이었고 얕게 첨벙이는 물방울은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한데 뒤얽혀 무수한 화음을 이뤘다.


“우리들도 저러고 놀았잖아.”


고무줄처럼 축 늘어진 보쿠토가 난간에 뺨을 댔다. 한기 어린 기운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잠시, 쿠로오는 망설임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코웃음까지 치면서 말이다. 


“고등학생이나 된 주제에 말이지.”

“마음만은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거든?!”

“그 정신 연령. 지금도 안녕하시고?”


결국 버럭 발끈해버리는 건 보쿠토, 낄낄 웃음이 터진 건 쿠로오였다. 억울한 마음에, 우울한 기분에 보쿠토의 검지와 검지가 맞부딪히며 핀잔을 내는 사이, 쿠로오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덩치 산만한 사내놈들 끼리 물놀이 하는 게 뭐 좋았다고.”


정말 그랬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체육관 바닥이 땀으로 홍수가 될 만큼 함께 뛰었으면서, 진절머리가 나도록 익숙한 낯짝을 한데 부대끼고 긴긴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으면서. 기껏해야 가벼운 일탈 정도로 치부되었던 물놀이는 쿠로오에게 있어 이미 뿌연 안개 빛이었다. 그러다 어렴풋한 인영 하나가 스쳐 지났다. 마냥 싫지만은 않았나. 쿠로오는 슬프게 웃었다.


“나는 되게 재밌었어.”


로켓 펀치 발사하듯 뻗어나간 한 손엔 비닐 봉 다리가 보기 좋게 흔들렸다. 네모 납작한 비닐이 열심히 앞뒤로 흔들렸다. 살짝 드러난 내용물은 샛노란 비닐 포장지와 캡 모자를 쓴 유치한 유아용 캐릭터로 둘러 싸여 있었다. 낯익은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흔히 보이는 싸구려 불꽃놀이 세트였다. 


“찜통 같이 더웠을 땐 런닝 하다 말고 다 같이 뛰어 내렸잖아. 다이빙이라기엔 어딘가 모자랐지만 일단 내가 선두 주자로 뛰기만 하면…….”


귓전을 두드리는 단어들이 멀어졌다. 스피커의 볼륨을 낮추듯 느릿하지만 명확하게. 구름 낀 해질녘 하늘, 메마른 강변의 색, 멀찍이서 들리는 물장구 소리에 불꽃놀이까지 가미되자 테두리조차 희끄무레했던 조각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갔다.


“아카아시 기억해?”


어렴풋했던 인영이 선명한 윤곽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어, 가볍게 넘겨짚으려는 대답과 달리 쿠로오의 가슴 한 켠은 찌릿한 통증을 자아냈다. 어차피 어긋난 인연, 이제 와 구구절절 토로해봤자 뭐 달라지나 싶었다. 


“대충? 합숙 때 잠깐 보고 만 사이였고, 대화도 거의 안 했고. 걔 말수도 적은 편 아니었냐.”


결국은 쓰게 웃었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입안 쪽 여린 살점을 잘근잘근 씹었다. 


“거의 기억 안나.”


풍덩 소리가 크게 났다. 아이 하나가 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푸하하 웃었다. 참새를 닮은 재잘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해. 네 입장에선 잠깐 있다 사라진 교환학생 정도였으니까.”


얼굴 트고 친해지기엔 반년은 너무 짧았고. 중얼거리는 그의 혼잣말에 쿠로오가 미간을 좁혔다. 댐의 바닥 깊이 가라앉아 있던 순간순간들이 기포처럼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둑의 가장자리까지 차오른 그것들이 툭 터져 나오려는 찰나를, 쿠로오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처음엔 나도 그랬어. 운동부 특기자 라길래 엄청나게 대단한 녀석이 온 줄 알고 기대했는데, 감독 옆에 웬 샌님이 서 있는 거야. 연습은커녕 친해지기도 글렀다 싶었지.”

“맞아. 척 봐도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살았을 법한 비실비실한 녀석이 니네 세터라길래 꽤 놀랐었지.”

“겉보기랑 달리 실력이 대단했지! 그 짧은 시간동안 무려 이 몸과 콤비를 맞춰 시합에 나갈 정도였으니까!”

“얼씨구. 꿈도 크다. 걔가 너한테 맞춰준 거겠지.”


잔잔한 웃음이 났다. 멀찌감치 떨어진 강가에서 물방울이 자잘하게 튀어 올랐다. 무지개 그리듯 곱디 고운 포물선이었다. 


“아~ 언제였더라? 왜, 하루는 니네가 먼저 물속에 들어가 놀고 있었잖아.”

“……그랬던가?”


확신에 차지 않은 물음표가 되돌아오자 보쿠토가 발끈했다. 석재 난간에 의지한 채 강변을 향해 한껏 기울어 있던 몸은 금세 제자리를 찾아 보도블록 위로 착지했다. 


“그랬어! 나랑 아카아시 보고 같이 놀자 들어와라 뭘 돌아서 오려 하냐 그냥 거기서 뛰어내려라 실컷 꼬신 건 너였잖아!”


아하하하, 의미 없이 웃고 만 쿠로오의 심경은 복잡했다. 처음부터 아무 인연이 없었다면. 혹은 아예 절친한 선후배로 남을 수 있는 사이였다면. 안녕, 잘 지내 같은 안부 인사 정돈 건넬 수 있는 관계였다면.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섞어봤다면. 의지가 있었다면. 용기가 있었다면. 만약이란 단어가 수차례 그의 신경을 긁었다. 


“무고한 사람 죄인 취급하지 마시지. 싫다는 애 뒤에서 밀어뜨리고 죽을 뻔하게 만든 놈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보쿠토는 막힘없이 대꾸하는 쿠로오에게 짐짓 놀랐는지 헤에, 콧소리를 냈다. 


“뭐야. 잘 기억하고 있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자조 섞인 본심은 단단한 둑을 무너뜨리며 조금씩 터져 나왔다. 


“그럼. 물에 빠진 애가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어 보이는데 누가 안 당황하겠어.”


보쿠토가 말하는 처음과 쿠로오가 말하는 처음은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다. 


첫 만남은 자주 가는 편의점에서였다. ‘Japanese Basic Conversation(일본어 기초 회화)’이란 촌스런 타이틀의 책자에 얼굴을 깊게 파묻은, 근방에선 못 보던 교복을 입고 있던 남학생. 유학생인가. 어찌 보면 짧게 납득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다. 모든 건 출입구가 비좁은 탓이었다. 쿠로오는 오른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야만 했고 상대 또한 똑같이 오른쪽을 향했다. 놀란 쿠로오가 이번엔 왼쪽을 향하자 마찬가지로 놀란 상대가 왼쪽으로 붙었다. 다음엔 오른쪽. 상대도 오른쪽. 미안하단 말 대신 결국 웃음이 터졌다. 얼굴을 가로막은 책자를 뺏어 들곤 지나가겠습니다, 똑똑히 눈을 맞추며 말을 건넸다. 덜컥 가라앉은 가슴이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한 건 아마 그 때부터였다. 신록을 품은 녹안이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던 순간, 쿠로오는 심장 부근이 뻐근해졌다. 


“수영 못 한단 얘기는 못 들었단 말이야…….”

“본인은 또 얼마나 놀랐겠냐. 잘못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그래서 였을까. 쿠로오는 재회의 순간이 좀처럼 믿겨지질 않았다. 애시 당초 재회의 가능성을 조금도 염두 해두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가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잊을 만 하면 꿈속에 나타나 마음을 헤집는 한 쌍의 에메랄드나 나날이 짙어지는 감정의 타래나,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잊혀 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 뒤로 내가 곧장 안 뛰어들었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코트 건너편에서 다시금 마주한 두 개의 신록은 여전히 깊은 색을 발했다. 자신을 기억하고 말고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 순간의 쿠로오는 온전히 넋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튀어 나올 듯 쿵쾅대는 심장을 방치한 채, 운명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 구나, 말도 안 되는 삼류 로맨스를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그리면서 말이다. 


“그때 멋있었어, 쿠로오.”


보쿠토가 나직하게 말했다. 난간 위에 양 팔을 한 데 겹치곤 그대로 턱을 괴었다. 


“뭐가.”

“아카아시 구하러 잠수했을 때. 너 꼭 동화 속 왕자님 같았다고.”


말이라도 못하면. 픽픽 실소가 터지는 걸 막지 못한 쿠로오가 우스갯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걔를 위기에 빠뜨린 너는 마녀냐?”


보쿠토는 잠시 입을 멈췄다. 무언은 긍정의 표시냐 대답하려던 쿠로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의 말을 잇는 보쿠토 덕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왕이면 마왕으로 해줘.”


아주 기가 찼다. 


“그래도 다행이었어. 아카아시가 금방 정신 차려서.”

“여러 가지 의미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남자한테 홀라당 첫 키스를 내줄 뻔했으니까.”


손바닥이 목덜미를 가렸다. 불규칙한 맥박 수와 홧홧한 기운이 곧장 전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 정도의 불거짐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하하하! 맞아. 이마 박치기였지?!”

“응급처치 하고도 애가 정신을 못 차리 길래 인공호흡……. 하, 다짜고짜 박치기를 당했다고.”

“나는 너무 미안해서 무릎 꿇고 땅바닥에 머리만 처박고 있었는데. 글쎄, 그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니까?”


어쩐지 이마가 들쑤셨다. 그 날 이후 동그만 혹과 함께 울긋불긋한 피멍이 올랐던 이마가 다시금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내 말이. 너무 아파서 울고 싶었다고.”


미안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을 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의 쿠로오는 그런 기대를 했다. 물거품만 끓어오르는 수면에 당황한 것도,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남은 문장이 ‘구해야한다’뿐인 것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것도,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아카아시를 망설임 없이 품에 안은 것 모두, 그가 혼자 해낸 일이었기에. 나름대로의 보상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정당한 대가였다. 


“아카아시도 많이 놀랐던 거겠지.”


굳은 낯빛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을 때, 쿠로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보쿠토 네가 미안하다며 아카아시한테 사죄하고 우리한테 사죄하고 울고불고 난리치다 차라리 불꽃놀이 하자 안 그랬으면……. 그냥. 그냥 모르겠다. 나한텐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라서.”


무안해 하지 않으려고. 점잖게 보이려고. 그 나름대로 최소한의 표정관리를 했으리라. 하지만, 말을 걸 용기가 위축된 건 사실이었다. 티가 많이 났나. 싫어졌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친 순간을 도무지 부정할 수 없었다. 


“슬슬 배고프네. 일단은 밥부터 먹자. 안 그래도 오랜만인데 니 얘기를 안 듣고 갈 수 있겠냐. 관리 중일 테니 술은 안 되겠지?”


결국 합숙 마지막 날까지 형식적인 인사치레만이 오고갔다. 남들은 눈물 콧물 쏙 빼던 송별회의 피날레에도 불편한 기색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카아시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공항에 배웅을 나가자는 보쿠토의 제안을 쿠로오는 완곡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했다. 부외자인 자신이 끼어들어 봤자 특별한 의미도 없을 테고.


“쿠로오 말이야.”


‘마지막’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 건 오히려 쿠로오 자신이었다. 냉정하게 멀어져 가는 시침과 분침 사이로 온종일 시선을 쏟아냈다. 비행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심란한 기분은 물밀 듯 차올랐고, 먹먹했던 후회들만이 끊임없이 되새김질되었다. 애꿎은 휴대폰 플립만 열었다 닫기를 수십 차례.


“아카아시를 어떻게 생각해?”


나를 어떻게 생각해?


마지막으로 쥐어짜낸 용기가 어디에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메일 주소는커녕 전화번호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키패드로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이 전해질 리 없었다. 


“근처에 괜찮은 야키니쿠 가게 생겼는데, 거기로 갈래?”


그럼에도 메일은 도착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모르는 메일 주소, 모르는 발신인, 그리고 모르는 언어. 무지의 삼박자가 그것을 삭제시키게끔 했다. 보낸 이가 본인이란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스팸 메일의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래서 삭제했다. 마침내 게워낼 수 있었다. 


“어설프게 말 돌리지 말고.”


보쿠토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제 보니 약속 장소를 이 굴다리로 정한 이유나, 자꾸만 좋지 않은 기억을 들쑤시려는 보쿠토가 심히 꺼림칙했다. 아카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말 한 마디가 불쏘시개의 역할을 도맡았다. 


“……너야말로 뭐하냐. 아까부터 사람 심기 건드리는 말만 내뱉고. 시비 거는 거 아니면 관둬라.”


냅다 윽박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와 안 좋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쿠로오의 노력을 코웃음 치듯 보쿠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요새는 한국어 공부도 하나봐. 왜? 거기 가려고?”


쿠로오가 눈에 띄게 움찔 거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흘끗 내려간 보쿠토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의 발치엔 아무렇게나 방치해둔 종이봉투가 있었다. 애시 당초 서점을 들렀다 오는 길에 보쿠토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만난다 한들, 구입한 책들의 제목이 보이지 않게끔 미리 손을 써뒀어야 했다. <처음 시작하는 한국어 기초 문법>, <Welcome KOREAN Basic>, <표준 한국어 기초>. 일렬로 늘어진 제목들이 뻔히 들어오자 마침내 쿠로오는 눈을 감았다. 


“별 거 아니야. 회사 거래처가……. 한국이라 그래.”


변명도 참 가지가지였다. 필터링은 고사하고 입이 움직이는 대로 뱉어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저 단순무식한 사고회로가 순순히 납득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던 쿠로오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쿠로오 네 생일이 다음 달이었지? 그럼 좀 빠른 감이 있긴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방긋방긋 웃으며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옆얼굴은 두툼한 점퍼에 손을 꽂아 넣은 채였다. 이 자식이 이젠 내 말을 귓등으로 듣기로 작정했나. 쿠로오가 뿌득뿌득 이를 갈도록 열이 난 이유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놓고 쿠로오의 존재를 무시하듯 휴대폰을 뺨에 갖다 댄 보쿠토의 행동거지 또한 한 몫 거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 갈란다. 말귀도 못 알아먹는 애랑 밥상 같이 할 이유가 없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까마득한 시절. 망설임 없이 삭제했던 메일이 한 통 있었다. 


“생일 선물, 안 받을 거야?”


잊어버리고, 지워 버리고, 게워 내려 했던 무수한 노력을 비웃듯 멋대로 마음 한 켠을 독차지한 메일이 한 통 있었다. 


“받아 봐. 너한테 온 전화니까.”


좋아했어요.


그 뜻 모를 문장 하나가 하루고 이틀이고 몇 년이고 가슴께를 깊숙이 맴돌아 마침내 오늘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쿠로오는 자신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는 ‘나도’라는 대답은 불필요했고, 부적마냥 품에 안고 산 여권과 항공권은 사실상 쓸모가 없었다. 이제와 알아버렸다 한들, 때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그때와 지금의 감정이 같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고 항상 그렇듯


“……여보세요.”

[쿠로오씨?]


우리들의 타이밍은 보기 좋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꼭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W. 멜







“어쩔 수 없죠.” 


그것은 나의 입버릇이다. 눈을 피하고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차며 뒷목을 감싸 쓸어내린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불복종할 이유는 없다. 화를 내봤자 바뀌는 건 없고 아까운 시간과 감정만 소모할 뿐이니. 그럼 그런 거라고, 원래부터 그런 거였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때마다 선배는 묘한 눈으로 나를 훑는다. 일일이 따지는 것도 아니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괜찮다는 내 낯빛을 구석구석 살피곤 한다.


“다녀오세요. 오랜만에 뵙는 거잖아요.”


끈질긴 시선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춤거리며 발을 떼지 못하는 선배의 등을 내가 힘껏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배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미안해. 


돌아올 대답은 어차피 뻔했기에 나는 또 ‘괜찮아요’라는 대답을 대신할 것을 준비한다.


“사랑해요. 제 생각 많이 하고요.”


닫혀가는 문 틈새로 힘없이 웃는 선배의 얼굴이 지나간다. 반 뼘쯤 낮아진 다갈색 눈동자가 문에 가로막혀 완전히 사라진다. 닫힌 문에게 손을 흔든다. 끝없이 인사를 건네준다. 다녀오라고. 가기만 하지 말고, 꼭 다시 돌아오라고. 


“……밖이 생각보다 쌀쌀하네. 목도리라도 둘러줄 걸.”


그것이 나의 사랑 방식이었다. 


“저녁 메뉴는……. 나베나 할까.”


저녁 무렵엔 돌아온다 했던 것 같다. 마침 나베 재료들도 사두어둔 참이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말고 먹음직한 전골 요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선배 옆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얼마 전에 구비한 코타츠는 두 사람이 쓰기엔 조금 큰 사이즈였다. 보온의 용도나 둘이 나란히 이불을 뒤집어 써 가만히 귤을 까먹는 용도로 쓰기엔 아깝다 생각한 차였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베와 코타츠, 그리고 선배와 함께 보내는 첫 겨울이라니. 꽤나 낭만적인 겨울 아닌가.


“버너…버너……. 버너를 어디다 뒀더라.”


한창 이삿짐을 풀던 도중 안 쓸 것 같다며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둔 건 확실한데. 살짝 까치발을 들자 정리되지 않은 내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높은 찬장에 겨우 검지가 닿던 몇 달 전에 비하면 짧은 시간 동안 키가 확 컸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안은 어지러웠다. 선배가 즐겨 먹는 소유라면 두 박스, 선배가 자주 챙겨주는 길 고양이들을 위한 통조림, 식단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찬장 깊이 숨겨 두었던 우유 빵 한 꾸러미. 그것들을 치워 내니 새까맣게 코팅된 플라스틱 가방이 드러난다. 눅눅한 먼지와 기름 냄새는 덤으로 말이다. 


“아직 쓸 수 있으려나.”


가스통을 열어 조금 녹이 슨 부탄가스를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고 점화 버튼을 꾹 눌러본다. 그러자 파란 불꽃이 균일하게 피어오른다.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단 화력이 미미하긴 했지만. 


버너를 식탁 위에 얹어두자 식탁 가장자리에 샛노란 프리지아로 장식된 화병에게 눈이 갔다. 막 프러포즈했을 당시가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백은커녕 좋아하는 마음조차 죄악감으로 느껴지던 풋풋했던 시절은 이제는 옛 일기장의 낱장과도 같다. 프리지아 꽃다발을 건네주며 함께 살자는 말을 꺼냈을 때 선배의 얼굴은 여전히 생생하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 초승달을 그리던 입가, 꽃다발을 품에 안고 그것을 꼭 닮은 행복한 웃음을 얼굴 가득 걸다, 갑자기 제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사랑스러운 사람. 덩달아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주곤 작게 물었다. 앞으로도 함께 해줄 거죠. 선배는 울다 웃기를 반복하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도’가 아니고 ‘평생’이야, 아키라. 직접 내 말을 지적해주던 선배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바라보다 이내 잘게 떨리는 어깨를 조심스레 마주 안아주었다. 


“러브 하우스……. 까진 아직 멀었나?”


올 겨울을 넘기면 연애 햇수만 7을 넘긴다. 같이 동거를 시작한지는 꼬박이 1년 가까이가 되고. 오랜 연애였다. 그간 악착같이 함께 모은 돈으로 1LDK 방을 사고 나니 결혼식은 꿈도 못 꾸게 되었지만. 선배는 혼인 신고서 한 장에도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물론 서류를 작성할 당시엔 서명하려 펜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 애꿎은 종이 몇 장을 날려 먹었지만, 쩔쩔 매는 옆모습이 귀여워 웃어 넘겼던 것 같다. 


“보자……. 남은 건 재료 손질이랑 냄비 정도인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앙증맞은 자석들이 덕지덕지 붙은 냉동실 칸. 딸기 모양 자석 밑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토오루가 못 먹는 것들!’의 타래가, 눈에 띄는 냉장실 정중앙 엔 ‘아키라와 토오루의 음식 저장 창고. 두 사람 이외엔 건드리지 마시오 - ㅅ -’라는 귀여운 경고 문구가, 냉장고 구석구석엔 균형 잡힌 식단을 갖추기 위한 재료들이 나열된 전단지들이. 


어디든, 무엇이 되었든, 선배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기, 양배추, 깻잎, 숙주, 청경채, 팽이버섯, 그리고 육수.”


‘맛있는 나베 만들기’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팅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먹기는 많이 먹어봤지만 직접 만들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하면 선배보고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라 할 심산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와이즈미 선배니까, 저녁 시간 전까지 미리 언질만 해두면 맛있는 걸 먹여주겠지. 내가 만든 실패한 전골 요리 같은 것보다 훨씬 좋은 걸.


“아쉽기는 아쉽겠지만.”


야채 종류는 흐르는 물에 씻어 내고, 식기 세척기에 모셔져 있는 도마를 펼치며 칼을 들었다. 양배추를 손질하려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싱크대에서 고개를 들면 곧장 보이는 손바닥 만 한 창가엔 조그만 라디오가 있었다. 부엌만 들어갔다 하면 불난리를 치고 119를 외치는 선배 덕에 부엌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될 수 있었지만, 저것만큼은 아니었다. 


맛층이 생일 선물이라고 준 거야. 졸업했다고 학교 까먹지 말라고 특별히 민트 색으로 골라준 거다?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다니까. 


“어쩔 수 없지.”


남이 준 선물을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요리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게 썩 나쁘진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주부터 듣기 시작한 음악 채널은 곡 선정이 꽤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 라디오의 전원을 켜자 자잘한 잡음과 익숙한 멜로디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피아노 전주였다.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깻잎과 손질된 소고기와 배추를 한 데 겹쳤다. 일정한 크기로 잘라 냄비 안에 가지런히 포개 넣었다. 만개한 장미꽃마냐 냄비를 가득 채운 전골 재료들을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육수 만들기는 금방이었다. 남은 일이라곤 같이 먹어줄 상대를 기다리는 것뿐. 아직 두 시조차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식재료를 너무 일찍 준비했나 싶어 무안한 마음에 볼을 긁적였다.   


우연이었다. 휴대용 버너와 함께 찬장에 처박아 두고 싶었던 라디오를 켠 것은 정말 우연에 불과했다. 아님, 단순한 변덕이었을 지도. 라디오 채널을 켜자마자 처음 들린 노랫말이 마음에 든 것도, 그것을 들으며 밀린 우편물을 정리하던 것도, ‘제 42회 아오바죠사이 고교 졸업 동문회’란 이름의 편지 봉투 위로 선배의 이름이 적힌 걸 본 것도, 멀리서 들려오는 선배의 부름에 무심코 그것을 구겨버린 것 또한, 하나같이 우연의 산물이었다. 


왜 그랬을까. 


기껏해야 동문회 안내지였는데. 선배가 좋아하고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자리가 있다는 걸 일러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는데. 선배가 지나가다 눈여겨 본 뮤지컬 공연의 티켓 예매를 한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 날짜가 동문회 일시와 겹쳤던 것?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 보러 가면 그만이니까. 어쩔 수 없죠, 특기인 입버릇으로 얼버무리면 그만이었으니까. 


“……Because you don’t know what it means to me.”


당신은 그 사랑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었다. 애절함이 흠씬 묻어나는 음색에 나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To remind how I still love you…I still love you.”


왜 그랬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정말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 한 건 아닐까. 인정하면 편하다. 받아들이면 편하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내가 순순히 인정할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다고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것. 


“……선배?”


다름 아닌 당신에 관한 것이었다. 



* * *



아키라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쫓겨 나간 현관 앞. 급하게 나오느라 얇은 청재킷 하나밖에 걸칠 수 없던 그는 재킷의 깃을 빳빳하게 세웠다. 고개를 들어 언뜻 훔쳐본 하늘은 꽤나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뽀오얀 입김이 절로 나오는 찬 공기 틈으로 손바닥을 마주 비벼 그 사이에 따뜻한 숨을 호호 불어 넣었다. 


가라 해서 나오긴 나왔지만, 정작 당사자의 낯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온 신경은 꽉 닫힌 문을 향해 바짝 곤두서 있는데 막상 가야 할 길은 그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즉,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뛸 듯이 기뻐야 했음에도. 


어딘가 먹먹한 마음 한 구석을 애써 감싸 안고 철제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던 차. 정겨운 야구 응원가가 재킷 주머니에서 울려 퍼졌다. 암울하던 토오루의 안색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필시 ‘아키라♡’란 세 글자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어디야 망할카와.]


아쉽게도,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그가 바라는 이의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아……. 이와쨩.”


순간 허탈해진 토오루는 맥 빠진 한숨을 쉬었다. 다리 힘마저 풀렸는지 내려가는 계단 두 개를 한 번에 밟아 버렸다. 


[어디냐니까. 나 이제 막 공항 입국해서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야.]


하마터면 위험천만 했을 상황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토오루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애꿎은 204호 우편함 뚜껑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휴대 전화를 잡고 있는 손끝이 추위에 바르르 떨렸다. 


“미안. 나 이제 막 집 나왔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어?”

[이 굼벵카와가!]


오랜만에 듣는 욕지거리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미안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양보니 배려니 따위의 단어를 입에 담을 입장이 아니란 걸 토오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삿포로로 발령받은 이야기나, 마츠카와가 혈혈단신으로 교토에 자리를 잡았다거나, 하나마키 혼자 미야기 현에 남아 꽃집을 시작했다던가.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 제 친구들과 ‘함께’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그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근 일 년 동안 잘 지낸다 연락 한 번 없었던 자식이라 그런가, 얼굴 한 번 보기 더럽게 힘들다?]

“하하.”

[쿠니미가 잘해 주냐?]


택시 잡아야겠지. 여기서 하네다까지 얼마나 나오려나? 걸리는 시간은? 그런 자잘한 걱정을 하며 큰 도로 쪽으로 나가려던 토오루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

[왜 대답이 없어.]

“…….”

[설마……. 쿠니미 이 자식을 진짜.]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치며 수화기에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그건 아니라고. 아키라는 내 생각 정말 많이 해준다고. 매일 매일 사랑한다 말해준다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거지는 일체 안 하고 나를 값비싼 도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며 나한테는 오히려 과분하다 싶은 사람이라고. 그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속마음을 와르르 쏟아내자 토오루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낯부끄러운 마음과 씁쓸한 기분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문제. 문제랄 것은 없었다. 충분히 행복했다. 이 이상의 기쁨은 없을 만큼 둘이서 함께 보내는 소소한 일상들이 퍽 즐거웠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때라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죠. 그래. 그 말을 할 때마다 였다. 


본인은 티를 안 냈다 자부할 지라도,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미간이나 눈을 마주치길 피하는 버릇에서 불편한 기색 역력히 드러났다. 아키라의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토오루는 언제부터 적응하고 말았던 것일까. 


[오늘도 네 낯짝 보기는 글렀구나.]


생각해보면 참 단순했다. 국가 대표로 선발된 카게야마가 연락도 없이 두 사람의 집을 무턱대고 찾아 왔을 때나, 마츠카와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라디오를 자랑했을 당시나, 오늘 같이 이와이즈미가 삿포로에서 먼 발길을 내어줄 무렵이나, 미야기에 하나마키를 비롯한 후배들을 보러가자고 말을 꺼냈을 때나, 하다못해 지나가던 여자들이 토오루를 향해 추파를 던졌을 때마저. 아키라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먼발치로 돌리곤 했다.


[그나저나 내일 동문회 소식은 들었어? 마츠카와 녀석은 출장 근무라 안 된다 그랬고 나나 하나마키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애초에 그것 때문에 도쿄 온 거기도 하고.]


이건 뭘까. 왜 이리 어렵게 생각했던 걸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겼던 걸까. 이렇게나 단순하고, 또 사랑스러운데. 


“……아니.”


똑똑한 아이니까. 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아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아키라를 멋대로 규정짓고 있던 건 대체 누구였는지. 


[안내장 안 갔어? 일주일 전쯤엔가 배부했다던데.]


그것 또한, 분명한 아키라의 사랑 방식이었음을. 


“미안 이와쨩. 나 역시 못 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 어?]

“이번 주말은 내내 아키라랑 보낼 거거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랑한다 말해줄 거야. 질리도록 안아주고 귀엽다고 말해주고 곁에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야 너 그러고 전화 끊지 마라. 끊지 마. 전화 잡고 있-]

“그러니까 미안. 이번 연말엔 꼭 연락할게.”


전화를 끊어낸 손길이 가벼웠다. 되돌아가는 걸음걸음이 깃털처럼 사뿐하고, 큰 짐을 덜어낸 듯한 어깨는 새로운 사랑을 발견한 꼬마 아이마냥 기쁨으로 너울거렸다. 철제 계단을 타고 오르며 나는 시끌시끌한 소음은 더 이상 소음이 되지 못했다. 집을 막 나섰을 당시, 떨쳐내기 힘들었던 앙금의 이유가 확실해졌다. 귓가에 희미한 노랫소리가 닿았다. 비록 작고 가느다란 탓에 눈치 채기는 어렵지만, 분명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덜컥 열린 현관문의 낡은 경첩 소리나, 코끝을 확 감싸 안는 신선한 야채들 냄새나, 그것들을 정성껏 손질하고 있는 선 고운 옆모습이나, 굉음에 놀라 빠르게 깜박이는 한 쌍의 눈꺼풀이나, 그것들 하나하나하가


“……선배?”


행복한 결말을 노래하고 있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으슬 거리는 추위에 아카아시는 한 팔로 다른 팔뚝을 감싸 안는다. 뺨을 덥히는 술기운. 나쁘지 않은 취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 속도. 운동화 앞코에 차이는 자잘한 돌부리들. 애꿎은 신발 끝을 노려보고 있던 시선은 힐끗힐끗 옆으로 돌아간다. 그와 걷는 속도를 맞추며 느리게 발을 떼고 있던 남자는 반쯤 눈꺼풀을 내리 깔고 있었다. 일자로 꾹 다물어진 입과 두툼한 니트 가디건 주머니 사이로 꽂아 넣은 손, 간간이 찌푸려지는 미간 사이. 굳이 언어화 하지 않아도 전신에서부터 풀풀 풍기는 유쾌하지 못한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이 조금 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하, 듣자듣자 하니까 어이가 없네. 어디서 골 빈 늙다리 잡종견이 지 분수도 모르고 짖어대나.’

‘케이지, 엄연히 제 사람입니다. 눈앞에 애인이 버젓이 있는데 성희롱같은 발언. 가당치도 않네요. 알면서 그러신 겁니까?’

‘모르고 그랬다 해도 문제고, 혹여 알고 그런 거라면…….’

‘당신. 단단히 잘못 짚었어.’


까드득, 어금니까지 곱씹으며 말하는 보쿠토 덕택에 술이 확 깬 마츠모토는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왁자지껄하던 회식 자리는 어느 새 침묵을 고수했다. 냉수마찰을 한 것 마냥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초리들이 오롯이 그를 향했다. 그제야 마츠모토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푹 조아린 고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줄줄 뱉어지는 사과의 말, 구십 도로 꺾인 허리. 결국에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 건 오히려 아카아시였다. 도통 화를 풀려 하지 않는 보쿠토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어 먼저 가보겠다 인사말로 자칫 살벌해질 수 있는 상황을 어영부영 마무리하기까지 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거예요.”


보다 못한 아카아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린다. 굴욕이나 수치심으로 인해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야 하는 건 되려 아카아시였다. 그런 아카아시의 심정을 대변하다 못해 상대에게 살기마저 번득인 보쿠토로 인해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말이다. 


“도게자(土下座: 땅 위에 직접 앉아 엎드려 절하는 것)까지 받아낼 심산이었습니까.”


음산하다 못해 시퍼런 냉기를 품고 있던 금안이 아카아시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보쿠토의 아랫입술이 부루퉁 튀어 나온다.  


“싫은 건 싫은 거야.”

“동업자잖아요. 영영 얼굴 안 볼 사이도 아닌데 무작정 화부터 내면 어떡합니까.”

“내가 안 보고 살겠다 잖아.”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싫으면 안 보고 불편하면 피해 다니고. 좋을 때는 저 좋을 대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 싫을 때는 멋대로 선 긋고.”


쉴 틈 없이 보쿠토의 폐부를 푹푹 찔러댄다. 느릿거리던 발걸음은 우뚝 멈춰 서고 소리 없이 이를 갈던 어금니는  


“어린 애도 아니잖아요.”


이유 모를 패배감에 콱 짓눌릴 듯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화를 냈는데.”


주머니 안쪽에서 꽉 다물린 주먹은 손톱의 날을 세운다. 말랑한 손바닥의 살점을 파고들며 자신의 부당함을 주장한다. 


“애시 당초 원인 제공자가 누구였는데. 다 너 생각해서 한 소리잖아. 넌 니가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너 욕보인 거잖아. 니가 희롱 당한 거라고. 니가 화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새낀데!”


덩달아 발길을 멈춘 아카아시가 짧게 구불거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노곤에 지친 눈이 하늘을 향한다. 무언가를 발견하곤 놀라 동그래진 토끼 눈이 은근한 별빛을 띤다. 이내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그것은 꼭, 화가 난 사람이라기보다 


“당연히 화나죠. 기분 나빴죠.”


흘러넘치는 행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 같았다. 


“누구누구씨가 하도 살벌해서 화낼 타이밍까지 놓쳐 버렸거든요. 어쩌겠어요.”


당사자가 싱글거리고 있으니 정작 울화통이 터지는 건 보쿠토다. 둥그런 운동화 앞코가 신경질적으로 돌멩이를 걷어찬다. 떼굴떼굴 옆으로 굴러가던 그것은 돌담에 몸을 부딪히곤 잘게 부서진다. 못다 표출한 화가 성대를 타고 윽박지르듯 튀어 나간다. 막무가내로 폭발하는 격화를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아카아시는 재빨리 그와의 거리를 좁혀본다. 


“자자. 에너지 낭비는 그 쯤 하고.”

“낭비? 너 지금 낭비 랬냐?”

“제가 보기엔 그래요.”

“케이지.”

“괜히 힘 빼지 말아요. 사과는 충분히 받았잖아요.”

“아 진짜!”


여전히 씩씩 거리며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 안아 본다. 불규칙하게 펄떡이는 맥박 하며 근육으로 다부진 어깨선 하며 이마 위로 툭 불거진 핏대까지. 가까이서 그를 만져보고 살펴보고 숨결을 함께 해보니 생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의 행동 패턴엔 익숙해졌다 나름대로 자부했음에도 말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오색빛깔 무지개? 변화무쌍한 카멜레온? 브레이크가 고장 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F1용 레이싱 카? 그것도 아니면, 까도 까도 알맹이가 계속 나오는 양파 정도이려나. 


보쿠토와 양파라니. 문득 아카아시는 손으로 입을 가린다. 전신에서 만발하려는 웃음꽃을 간신히 틀어막는다.


정반대의 사람. 순간의 감정에도 치우치지 않고 이성과 논리를 앞세우기 급급한 자신과 달리 놀라울 만큼 제 감정에 솔직한 사람. 전혀 다른 본질. 얼떨결에 어린 애 같다는 표현을 쓰고 말았지만 그 순수함을 결코 부정만 할 수는 없는. 


“그렇게 땅만 보고 있지 말아요.”


가슴이 벅차오른다. 희로애락에 충실한 그와 함께 하니 덩달아 감화된 기분이다. 무언가가 변하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변했을 지도 모른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저와 극명히 다른 그에게 아카아시는 진즉부터 휘둘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늘이 저렇게 예쁜 걸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은하수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 따윈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 


팍 구겨진 캔 깡통을 연상케 하는 보쿠토의 얼굴이 아카아시의 손가락을 옮겨간다. 놀람에 확장되는 흰자위와 저절로 벌어지는 동공보다도 와아, 라는 감탄사가 먼저 튀어 나간다. 


시가지에서 한참 벗어난 오랜 골목길엔 진즉에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았다. 철문 앞을 차지하고 있어야 할 녹슨 입간판은 골목 어귀를 굴러다니고 있고 전조등이나 가로등이라 불리는 인공조명은 오래도록 사람 손이 타지 않은 깨진 전구를 달고 있어 빛을 발할 수 없었다. 주인을 모르는 자전거들과 뺨을 스치는 밤바람 사이에서 스산한 공기가 느껴질 법도 헀건만, 이 어둡고 음산한 거리의 풍경은 오히려 밤하늘을 돋보일 수 있는 방향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것은 바다였다. 바다 중에서도 유독 짙은 색을 띠는 심해를 닮아 있었다. 네이비 색 벨벳 융단을 온몸에 두른 바다의 품속으로 별빛이 모래알처럼 쏟아졌다. 손바닥 만 한 구름 두어 조각은 하늘을 가득 수놓은 무수한 항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탓에 은회색으로 반짝였고 어떤 별은 유달리 찬란한 빛으로 번쩍여 푸른 사파이어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이라 치부할 순 없었던 것이, 그 많던 하늘을 반으로 가르며 지나치는 유선형의 별빛 무지개 탓이었다. 


“예쁘다.”


은하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만 있던 보쿠토가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조금 전까지 그의 목울대 가득 끓어오른 격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남은 것이라곤 별빛이 수놓인 해바라기 색 눈동자뿐. 


어느 새 두 사람은 같은 빛을 눈 안에 새기고 있었다. 한참이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걸음이 조금씩 떼어지고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은하수의 끝을 좇아 천천히 달음박질을 시작한다.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별빛을 좇아. 앞서 뛰어 가는 사람이 있기에 당연히 뒤를 쫓아가는 것처럼. 마지막의 마지막엔 골목길을 냅다 질주하며 감탄이 물씬 녹아든 소리를 있는 힘껏 내지르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서야 비로소 발을 멈춘 보쿠토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낸다. 보쿠토는 여전히 은하수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겨우 뒤를 쫓아온 아카아시는 양 무릎에 손을 꽂아 내리곤 거칠어진 숨을 헉헉 몰아쉰다. 


“갑자기 달려가는 게 어디 있습니까.”

“너무너무너무 예쁘다. 하늘.”

“그러니까 말……. 했잖아요. 아, 진짜 죽겠다.”


그냥 스태미너 괴물인가. 거뜬히 오백 미터는 넘게 달려 온 것 같은데 땀이 조금 나고 호흡은 약간 흐트러졌을 뿐인 보쿠토를 보자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 아카아시다. 기분도 풀어줬겠다, 땀도 한 바가지로 흘렸겠다, 밤공기는 적당히 선선하겠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까 싶던 아카아시가 호흡을 가다듬고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편다.


“별이 가득해.”


촘촘히 박힌 보석마냥 빛나는 별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별들의 노래는 은하수가 불러일으키는 파도를 건너 두 사람의 뺨을 어루만진다. 희미한 콧노래가 다정한 음표의 속삭임에 발맞춰 흘러나간다. 눈을 감고, 허밍에만 집중해본다. 그런 아카아시에게 빙그레 웃음 지은 보쿠토는 아예 양 손을 허리 위로 얹는다. 어깨를 당당히 편 채,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흡사 영어 교과서를 또박또박 읽는 어투로, 아카아시의 허밍에 가사를 끼얹는다.


“트윙클 트윙클 리틀 스타~ 하우 아이 원더 왓 유 어.”


푸흐- 우리말도 아니지만 영어와는 더더욱 거리가 먼 유창한 발음과 올곧은 노래 솜씨에 아카아시가 배꼽을 움켜쥔다. 실실 터지는 웃음을 손바닥으로 애써 가려보지만 눈에 띄게 들썩거리는 어깨는 미처 막을 수 없다. 반주 역할을 하던 허밍이 사라졌으니 그만 부를 법도 한데.


“업 오브 더 월드 쏘 하이! 라이크 어 다이아몬드 인 더 스카아이.”

“아 그게 뭐예요.” 

“트윙클 트윙클 리틀 스타. 하우 아이 원더 왓 유 어!”

“하하, 너무 웃겨서 배 아파-”

“……아씨. 너 때문에 못 부르겠잖아!”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는지 깔깔 웃다 이젠 눈물까지 훔친다. 골목 어귀만 아니었으면 아예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다녔을 지도 모르겠다. 별들이 휘장을 치고 있는 밤하늘 아래, 아카아시는 별빛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가수 안 하길 천만 다행이네요.”

“뭐? 야!! 내 노래 실력을 비웃냐!”

“이런 게 컬쳐 쇼크 구나.”

“케이지!!!”


수치심에 살짝 불거진 볼. 발끈한 탓에 핏줄이 볼록하니 도드라진 목덜미. 그의 실루엣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별빛. 


“보쿠토씨한테도 별이 수두룩해요. 막, 주변이 반짝반짝해요. 딱 보쿠토씨가 부른 노랫말 같아요.”

“……칫. 못 불렀다며.”

“언제 제가 그런 식으로 말했던가요? 가수 안 하길 다행이라 한 거지.”

“그거나, 그거나!”

“기왕이면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해주세요. 아, 별똥별 떨어진다.”

“뭐? 어디! 어디에 별이 떨어져!!”

“뻥이에요.”

“…….”

“사람이 이렇게까지 단순할 수도 있군요.”


결국은 또 웃음이 나온다. 자신이 공룡이라도 된 것처럼 양 손을 사납게 치켜든 채 제 뒤를 쫓는 보쿠토의 눈에서, 아카아시는 별을 본다. 무수한 별들이 부르는 노래와 음표와 오선지가 새겨진 황금빛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단순히 별들 때문일까. 그가 빛나는 걸까. 그라서 빛나는 걸까. 그이기에 빛나는 걸까. 금세 옷깃을 붙잡혀 가벼운 헤드락을 당하는 와중에도 아카아시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따뜻한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고 떨어지지 않는 유성우에게 소원을 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쯤이죠?”


엎치락뒤치락 하며 물 대신 땀으로 샤워를 하는 사이 항복의 깃발을 흔든 아카아시가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차가운 담벼락을 등받이로 삼아 함께 쪼그려 앉아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게.”


무성의하게 대꾸하는 보쿠토를 가만 보고 있자니 사태의 심각성이 되려 강조된다. 


“그러게, 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잖아요.”

“택시 타고 가면 되지.”

“여기까지 택시가 올 것 같습니까. 가게 문도 다 닫았고 사람은 없고 차까지 없는데.”

“별은 많잖아.”

“……초 긍정적이시네요.”

“우리 케이지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버리고 갑니다.”

“네 바짓단 질질 끌면서 엉엉 울어 버릴 거야.”


미아는 경찰에 신고해야죠, 라고 답하려던 아카아시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구깃해진 면바지의 앞주머니로 검지와 중지를 아등바등 집어넣는다. 쪼그려 앉은 자세 탓에 플립이 힘껏 눌렸을지 모르는 폴더 폰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흔한 케이스나 휴대폰 고리 하나 없는 단촐한 통신기기의 뚜껑을 열고 키패드를 꾹꾹 눌러본다. 찾는 번호는 존재하지 않고 맥 빠지는 한숨은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쿠로오 번호 찾아?”

“네. 있는 줄 알았는데 깜박하고 저장 안 해뒀나봐요.”

“어차피 전화해봤자 소용없을 걸. 여자 촬감(촬영 감독)이 촬영 전부터 쿠로오 눈독 들이고 있었거든. 스타일 좋고 매너 좋다고.”

“헤에……. 의외로 인기가 있나봐요, 쿠로오씨.”

“그렇다니까. 아마 지금쯤 술이 떡이 돼서 빌빌 거리고 있을 테니 운전도 못하고 전화도 쓸모없고 그렇겠지. 아, 근데 내 번호도 없어?”

“그 쪽 번호가 왜 필요해요. 매일같이 얼굴 맞대고 사는데.”

“쳇. 통화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멋진데.”

“전화기에서까지 보쿠토씨 목소리 듣고 싶진 않네요.”

“애인한테 이렇게까지 매몰찰 수 있어? 코타로는, 흑흑, 상처 받았어.”

“가식적이야. 진짜 연애도 아닌데.”

“흥칫뿡이다!”


공기가 들어가 빵빵하게 부푼 볼. 의미 없는 잡담. 지나가는 찰나 하나하나가 모여 반짝임이 된다. 훽 돌아간 고개는 더 이상 밤하늘을 보고 있지 않다. 어둠이 깔린 거리의 풍경을 훑는다. 깜깜함에 익숙해진 시야가 깜박, 깜박깜박, 깜박깜박깜박 거린다.


“어, 이 근처는…….”


벌떡 일어선다. 골목 한 가운데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동그래졌던 눈이 확신에 찬다. 한 손으론 주먹을, 다른 한 손으론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친다. 언제까지 노숙자 마냥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어야 하나 싶었던 아카아시도 무거워진 엉덩이를 뗀다. 


“나 여기 알아.”

“예? 정말요?”

“응. 자주 왔던 거리네.”

“다행이네요. 그럼 일단 큰 대로변 쪽으로 나가서,”

“멀지 않은 데에 숙소도 있어.

“숙소요?”

“예전에 소속사가 투자한답시고 준 별장 같은 거야.

“헤에…….

지금은…. 다른 사람한테 넘겼지만, 잘 아는 사람이니까 괜찮아. 밤도 늦었는데 설마 노숙하라고 하겠어. 너 잘 데 하나 정돈 내주겠지.”

“그……럴까요?”

“응. 일단 가자. 저 앞에 모퉁이만 돌면 곧장이니까.”


그런 때가 종종 있다. 


“이야 진짜 간만에 연락하네. 전화 받자마자 소리부터 치는 거 아닌가 몰라.”


머리로는 이것이 ‘정답’임을 알면서도 몸은 소스라치게 놀라 온힘을 다해 거부하려 하는 것. 


“네 일도 있고 영화 촬영도 있고 해서 당분간 연락 못한다고 못을 박아두긴 했는데. 애가 워낙 외로움을 잘 타서 말이야.”


팽팽하게 당겨진 낚싯줄을 육지로 끌어올리기는커녕 그것에 점점 끌려가고 있는 듯한 미묘한 감각. 


“밤샘 촬영이라도 하고 돌아가는 날엔 폭 안겨서 좀처럼 떨어지려 하질 않거든. 물론 그것도 귀엽지만.”


손에서 놓아버리면 그만 인 것을 살점에 핏방울이 배어나올 만큼 힘껏 쥐고 있는 이유. 


“그러고 보니 케이지 너는 처음 보려나? 응. 그렇겠네. 있다가 제대로 소개를……. 아, 여보세요?”


그의 곁을 따라 걷던 발걸음이 차츰 느려진다. 안면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지. 


“미안, 미안. 늦게 연락해서. 회식이 쓸데없이 길어졌거든. 응. 지금 가고 있어. 아 근데 나 혼자 가는 건 아니야. 쿠로오? 걔는 지금쯤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대고 있을 걸. 쿠로오 말고 있잖아. 내가 전에 말했던 애. 응. 응. 아, 곧 도착한다.”


머릿속은 백짓장을 닮아간다. 


모퉁이를 꺾은 골목길은 더 이상 컴컴하지 않다. 일정한 간격에 맞춰 빛나는 인공조명이 환하다. 은하수는 더 이상 은하수가 아니었고 별은 가로등 불빛 앞에서 노래를 그만두며 밤하늘은 더 이상 ‘밤’이 되지 못한다. 서서 꿈이라도 꿨던 걸까. 아카아시는 마침내 발을 멈춘다. 한참 뒤처져 오고 있는 아카아시를 발견한 보쿠토가 뭐라 뭐라 소리친다. 떨어진 거리가 얼마나 될까. 여섯, 아니 여덟 걸음 쯤. 


보쿠토의 뒤를 비추는 건 더 이상 별빛이 아니었다. 이제는 백열등에서 퍼져 나온 쨍한 볕이 보쿠토의 등 뒤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 역광에 표정이 가려진다. 한 팔을 붕붕 휘두르고 있는 보쿠토의 실루엣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웃고 있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아카아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코타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으앗, 뭐야. 깜짝 놀랐잖아!”


남청색으로 도색된 대문이 벌컥 열린다. 초인종을 막 누르려던 보쿠토의 그림자가 뒷걸음질을 친다. 문틈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간 인영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밖이 시끌시끌하길래 바로 알았지. 아아, 코타로! 왜 이렇게 얼굴보기 힘들어졌어!”


폭 안긴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함께 물결치는 머리카락. 윤기 있는 머리칼을 따라 그려지는 유려한 몸선. 폴짝 뛰어 올라 안긴 탓에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허벅지나, 뒷목을 감은 얇은 팔목이나, 그 자그마한 체구를 깃털 들 듯 가볍게 안아 들어 손수 눈을 맞추는 보쿠토나. 


“하하. 미안하다니까 자꾸 그러네. 어디 보자~ 못 본 사이에 얼마나 예뻐졌나.”

“몰라! 코타로가 없어서 엄-청 외로웠단 말이야.”

“오구오구 그랬어요.”

“얼른 달래줘.”

“어떻게 달래줄까요 우리 공주님.”

“알면서 자꾸 그럴래!”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저 환한 전깃불에 감사한 기분이 든 적이 있던가. 


“……아주 중요한 걸 빼먹은 거 같은데요 우리 왕자님.”


별빛을 잡아먹었던 저 불빛과 그것이 비쳐주는 실루엣에. 목 놓아 울고 싶은 기분이 든 적이 있던가. 


“사랑해요.”

“말만?”


픽, 터지는 실소와 함께 한데 겹쳐지는 두 그림자에. 뒷걸음질을 치고 싶던 적이 있던가. 


첫 인상은 깡패, 무법자, 최악. 대뜸 자신과 연애를 해달라 협박 같은 으름장을 놓던 사람. 자신의 최선을 위해 위험천만한 도박에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내걸던 사람.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돌아보지 않는 사람. 실망한 티를 잘 내지 않는 사람. 컨디션이 롤러코스터 같은 사람. 아이 같은 웃음이 조금은 예쁘던 사람. 매사에 솔직한 사람. 일방통행 사고밖에 하지 못하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 즉흥적인 거짓말을 어려워하는 사람. 불의를 참고 넘기지 못하며 할 말은 꼭 하고 사는 사람. 먹을 걸 좋아하고 노래는 못하고 영어는 더더욱 잼병인 사람. 주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던 사람. 


자신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사람. 돌아서면 제 모든 걸 잊어버릴 것 같던 사람. 막연하게나마 아닐 거라 믿었던 사람. 


‘하지만, 하지만 좀……. 결별 발표는 그러니까……. 남자랑 사귀다가 헤어졌다는 뜻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저 때문에 무리하게…커밍아웃 하신 거잖아요. 이걸로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보쿠토씨는 사실 그 쪽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다음 연애를 위해서라도 좀더. 좀더…….’


걱정을 핑계 삼아 의중을 알고 싶었던 사람.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해.’


그 걱정을 코웃음 쳤던 사람. 쓸데없는 기우라며 되려 저를 걱정해주던 사람.


“나도 사랑해.”

“얼마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별도 따다줄 만큼?”

“별은 코타로가 따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사키가 하는 거 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뇌리를 스쳐 지나는 그의 수많은 표정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거짓을 토로한 적이 있던가. 생판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을 향해 웃어 보이는 저 얼굴이 진짜라고 느껴진 적이 있던가. 그러니까 보쿠토는.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던 거네요.”


마음이 없던 건 보쿠토고, 마음이 생겨난 건 아카아시다. 변하지 않은 건 그고, 변한 건 자신이다. 


“……이거. 엿 같은 상황인 거죠.”


그를 좋아한다. 왜 이제야 알아차렸나 싶었을 만큼 좋아서 미칠 것만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미어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다. 얻어맞은 뒤통수가 얼얼하고 꽉 감아쥔 주먹 위로 핏줄이 도드라진다. 


“씨발 진짜.”


눈이 시큰거리고 코끝이 따끔거린다. 울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푹 떨군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친다. 뜨뜻한 사랑을 발하는 한 폭의 풍경화에게서 몸을 돌린다. 


돌아선 밤하늘은 눈물 나게 어둡고, 혼자 걷는 거리 위론 별이 쏟아진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배경은 프라하(체코)입니다. 

*부상 소재

*전력 주제: 후회




W. 멜




‘Vítejte v České republice.’

‘Benvenuti in Repubblica Ceca.’

‘Welcome to Cesky Republic.’

[체코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체코어, 라틴어, 그리고 영어까지 각 국의 언어로 쓰인 환영 인사가 공항의 출국 게이트를 반긴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고향이라 불리는 체코답게 공항 곳곳에선 벌써부터 각양각색의 악기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전자 바이올린과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이 어우러진 소규모 음악회를 비롯해 공항 구석구석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 알림 책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국제 음악 페스티벌이 한창인 6월의 시작. 체코 전역 어디를 뒤져봐도 음악을 찾을 수 없는 곳은 없었다. 


한 편 공항의 출입구를 나서는 사내의 등에는 악기 케이스 계의 명품이라 불리는 어코드(Accord)산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사내의 키가 작은 편은 결코 아니었음에도 케이스가 그의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아 악기의 정체는 첼로 아니면 콘트라베이스 중 하나일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온통 낯선 풍경으로 가득 찬 하늘과 땅을 내다보며 혀를 내두른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큰 한숨을 토한다.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현지 시간으로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역시 괜히 왔나.”


저물어가는 일몰로 가득 찬 불그스름한 하늘은 꼭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10kg 에 육박하는 첼로와 첼로 케이스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힘껏 짓누르며 등을 떠미는 듯하다. 케이스의 끈을 다잡는다. 촉박한 비행 일정에 맞춰 급한 대로 필요한 옷가지만을 욱여넣은 20인치 캐리어의 손잡이 또한 꽉 잡는다. 


반쯤은 오기로 반쯤은 충동적으로 구매한 항공권이었다. 그것도 왕복이 아닌 편도 티켓을 말이다. 가서 만날 수만 있다면, 이란 바람 하나로 비행기에 몸을 맡긴 그였다. 매일 같이 손질과 조율을 빼먹지는 않았지만 그의 방 한 구석에서 먼지만 상대하고 있던 첼로는 오랜만에 그의 어깨에 매달린 것이 기뻤는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여기……. 이 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유려한 영어 회화가 지나가던 행인을 붙잡는다. 손에 쥐어진 것이라곤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와 검색대를 빽빽하게 차지하고 있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페스티벌’의 팸플릿뿐이다. 아카아시가 들고 있는 팸플릿을 대충 훑어 본 행인은 아카아시의 행색을 살핀다. 세계 일주를 하는 여행객치곤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이는 수트케이스. 그에 비해 등에 매고 있는 악기 케이스는 빼어난 윤택이 흐름과 동시에 무척이나 거대하다. 게다가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음악 축제시기에 찾아와 공연장을 가려 하는 동양인이라 하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즉, 그에게선 누구보다도 분명한 ‘음악가’의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 루돌피눔(Rudolfinum) 가시려고 하는구나. 체코는 처음이세요?]


루돌피눔. 팸플릿의 1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아카아시는 입안에서 그것을 끊임없이 곱씹는다. 


[네.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가는 길을 몰라서요.]


친구란 단어에 저절로 말끝이 흐려졌지만 아카아시는 개의치 않는다. 


[친구 분이 너무했네. 보통은 공항까지 데리러 나오지 않나요?]

[말없이 왔거든요. 깜짝 놀래켜 주고 싶기도 했고.]

[아하.]


행인은 턱을 문지르며 주위를 살핀다. 근방을 배회하고 있던 공항 경비원을 불러 세워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체코어로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좋은 답변을 얻었는지 화색이 된 행인은 곧장 아카아시에게 가는 길을 설명한다. 


[119번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메트로로 한 번 갈아타야 해요. 1부인 2시 공연은 못 봤겠지만 파이널 공연은 8시부터 시작이니……. 아, 지금 오는 저 버스를 타고 가면 저녁 공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절묘한 타이밍에 119번 버스가 도로로 미끄러진다. 그새 어디서 구했는지 펀칭이 된 일회용 교통권을 아카아시에게 선뜻 건네준다. 음악이란 수라의 길을 택한 아카아시를 위해 행인이 마련해준 나름대로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막 올라타려던 아카아시가 행인에게 짧지만 깊은 묵례를 건네며 감사의 뜻을 전한다. 


[당신에게 뜻 깊은 음악 여행이 되기를. 가는 길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음악 여행’이란 단어에 아카아시가 일순 표정을 굳힌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풀고 부드러운 미소를 말아 올린다. 버스 기사는 느긋하게 액셀을 밟는다. 


버스 안은 이미 만원이었다. 페스티벌 기간인데다 퇴근 시간대가 겹쳐서 더 그랬을까. 빽빽한 사람 밀림 사이로 겨우 빈자리 하나를 찾은 아카아시는 어서 앉지 않고 뭐하냐는 눈으로 자신을 훑는 옆자리의 여성 앞에서도 망설임을 쉬이 거두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가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첼로였다. 정작 아카아시 자신은 서 있기를 택했던 것이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프라하의 야경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귓전에는 뜻을 알 수 없는 외지어가 남발했고 주변엔 속이 니글니글해지는 버터 냄새가 가득했으며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곤 이목구비부터 동양인과는 전혀 다른 유럽 계 외국인들뿐이었다. 덕분에 일본 본토에서조차 생전 없던 멀미가 처음 와 본 타지에서 들끓듯 피어오를 것 같았다. 


일순 버스가 급커브를 감행한다. 반은 사람, 또 반은 짐으로 이루어져 있던 콩나물 지옥은 커브 길에서 버스가 가속을 붙일 때마다 같이 기울어진다. 행여 첼로가 앞으로 기울어져 바닥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맞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아카아시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는다. 


“아…….”


오른 손잡이였기 때문에 오른 손이 나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뒤늦게 뻗은 팔이 오른 쪽임을 알아챈 아카아시는 손을 멈춰 세웠다. 왼손으로 케이스의 끈을 꽉 붙든다. 무의식중에 뻗어 나간 오른손을 탓해본다. 악력 테스트 하듯 주먹을 쥐었다 펴보기를 여러 번. 어떤 식으로 힘을 실어 보아도 완전히 쥐어지지 않는 손아귀에 아카아시의 입에선 자조 섞인 웃음이 튀어나온다. 


첼리스트로서 가망이 없다는 낙인이 찍힌 지 햇수로만 벌써 3년이었다. 이제쯤이면 왼손으로 연필을 쥐는 것이나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것이나 왼손으로 물건을 잡는 것에 익숙해질 법도 했다. 사실은 익숙해져 있었다. 엄연한 왼손잡이라 해도 그에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오늘같이 방구석에서 처박혀 있던 첼로를 등에 안고 길을 나서는 특별한 날엔 사용하길 자제하고 있던 오른손이 제멋대로 나가곤 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중증이지.”


가벼운 접촉 사고였다. 사실은, 보다 큰 사고로 번질 수 있었던 부류의 것이었다. 그것을 접촉 사고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아카아시였으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 날은 꼭,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보쿠토와 첼로를 전공하는 아카아시는 콩쿠르의 일정이 촉박하지 않은 때엔 언제나 함께하곤 했다. 보쿠토가 활을 잡고 즉흥적으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하면 그에 발맞추듯 아카아시 또한 어디선가 의자를 끌고 와 능숙한 손놀림으로 현을 매만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실력이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가문 대대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전문적으로 다루던 집안들이었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현악기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고 타고난 재능 또한 남달랐던 것이다. 한 번 콩쿠르에 나갔다 하면 대상과 우승을 휩쓸고 다녔다. 신동이나 천재라는 별칭은 심심치 않게 두 사람을 따라다녔으며 막 10대에 들어설 무렵엔 세계적인 명문 음악 학교에서 물 밀 듯 초청장이 쏟아졌다. 다만 양 쪽 부모들 모두 


‘음악적 시야와 감각은 넓게 가지되, 고등 교육까지는 국내에서 익혀라. 해외는 이 곳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은 뒤 나가도 늦지 않다.’


라는 입장들이 완고했기에 보쿠토와 아카아시 모두 해외 유학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학 이전에 두 사람은 각자의 악기와 음악을, 또한 궁합이 잘 맞는 서로를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지만. 


둘의 연주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즉흥’이었다. 각자가 손에 쥔 바이올린과 첼로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연습실은 물론 길을 걷다 문득 연주가 하고 싶어져 악기를 꺼내들었고 심지어는 공원에 비치된 공중 화장실에서까지 보쿠토가 바이올린을 꺼낼 때면 아카아시의 한숨 소리가 천장을 뚫었다고 하더라. 이런 실정이니 음악, 더 나아가 예술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후쿠로다니 사립 학원에서조차 쉬는 시간마다 두 사람의 연주를 보기 위해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조차 발걸음을 아끼지 않았다. 


각자의 활과 현이 맞닿는 순간 ‘악보’란 평면 속에 갇힌 음표는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라 사방을 채웠다. 


보쿠토의 바이올린은 흡사 장미였다.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피치카토는 양지 바른 흙 위로 톡, 톡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새싹이었고 음을 길고 세밀하게 떨리게 하는 비브라토는 뻗어 올라가는 줄기를 따라 자라나는 가시들이었고 현을 힘 있게 눌러 세 개 혹은 네 개의 음이 화음처럼 동시에 울려 퍼져 오르는 아르페지안도는 붉게 만개한 장미를 떠올리게 했다. 


반면 아카아시의 첼로는 새벽 밤하늘이었다. 장미와 같이 특정한 사물로 칭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음줄로 연결된 레가토를 보쿠토의 바이올린이 열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아카아시의 첼로는 밤하늘에 고고히 솟은 달빛처럼 부드럽게 이어갔다. 현악기의 연주기법 중에서도 유독 강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스타카토는 온도 낮은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들이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은은한 느낌으로 가득 피어올랐다. 


이러한 연주 느낌의 차이 때문인지, 두 사람의 합주는 꼭 새벽녘에 이슬을 머금은 장미를 연상케 했다. 맑고 잔잔하면서도 정열의 기운을 선연히 품고 있는 장미의 봉우리. 그렇기에 ‘환상의 콤비’라는 말은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한 단어처럼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왔다. 


‘아~ 손이 심심해.’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하교 길. 보쿠토는 따분하단 얼굴로 손깍지를 낀 채 뒤통수를 받쳤다. 아카아시는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보쿠토의 다음 대사는 물론, 약 1분 안에 취할 행동거지까지. 


‘뭔가 없을까. 강렬하고, 색채 강하고, 그러면서 어려운 곡.’


아카아시는 발길을 서둘렀다. 연주에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까진 좋았지만 여기는 파란 불이 켜진 횡단보도 한가운데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스친 아카아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단어나 내뱉었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요.’

‘야야. 손가락 터져 죽으려고?’

‘그 만한 연습곡은 없잖아요.’


악마의 피아노가 리스트라면 악마의 바이올린엔 파가니니가 있었다. 겨우 얼마 전에 곡 해석을 끝마치고 악보 익히기에 돌입한 아카아시의 입장에선 아직까지 난이도가 있는 곡이었다. 물론 보쿠토의 심심한 욕구를 채우기엔 안성맞춤이겠지만 말이다. 


‘그것보다 왜 이렇게 서둘러. 빨리 갈 필요 없잖아.’


사실은 그랬다. 횡단보도 맞은편의 파란 불은 깜박이지도 않았다. 쓸데없는 기우인가 싶다가도 제 뒤를 따라오고 있어야할 보쿠토를 돌아보니 


‘설마 여기서 하자는 말은 아니겠죠.’


이미 바이올린 받침을 끼워 맞춘 뒤였다. 


‘설마가 괜히 설마 겠냐. 뭐해, 첼로 안 꺼내고.’

‘제 발 도로 한 가운데서 이러지는 맙시다. 게다가 횡단보도잖아요. 의자도 없는데-’

‘빨간 불까지 한참 남았잖아. 조금만 하고 바로 가자.’


이 사랑스런 연인의 황소 같은 면모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자동차 하나 없는 도로를 훑은 아카아시는 결국 진짜 조금만이에요, 작게 읊조리며 첼로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의자로 삼을 만 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자신의 첼로 케이스와 보쿠토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한 데 겹쳐 의자답지 않은 의자를 급하게 마련해보았다. 엉덩이가 불편하긴 했지만 아예 못 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바이올린 받침에 턱을 댄 보쿠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카아시 또한 긍정의 눈빛을 보내며 활을 현 가까이에 가져갔다. 


스퍼트를 낸 사람은 보쿠토였다. 고도의 바이올린 테크닉이 요구되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의 도입부가 붉은 빛을 닮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오케스트라 역은 아카아시가 도맡았다. 그를 보조하는 음이 중후한 화음을 표출하며 바이올린과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연주에 몰두한 보쿠토의 바이올린은 흡사 꾀꼬리가 천상의 노래를 지저귀는 것과도 같았다. 횡단보도 한 가운데서 연주에 몰두한 두 사람의 기이한 행태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가던 길을 멈춰 섰다. 


문제는 다음 순간이었다. 도로 위에 피어난 음악회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승합차 한 대가 날쌘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 연주를 시작했다 하면 주변의 소음을 듣지 못할 만큼 연주에 집중하는 보쿠토와 달리 전신으로 음을 캐치하는 버릇이 몸에 배긴 아카아시는 누구보다 빨리 이상 현상을 눈치 챘다. 초록불은 비로소 깜박이기 시작했고 한창 통화에 집중하고 있던 차의 운전주는 브레이크를 미처 밟지 못했으며 차가 향하는 곳엔 쉴 틈 없이 활을 움직이고 있는 보쿠토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카아시의 선택지엔 다른 것이 없었다. 차후란 있을 수 없었다. 주인의 손에서 벗어난 첼로는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굉음에 놀란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땐 이미 아카아시가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뒤였다. 그제야 두 사람을 발견한 차주가 뒤늦게나마 핸들을 돌린 덕에 도로변에 홀로 나자빠진 첼로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아카아시!!!’


아카아시의 오른 손은 무사하지 못했다. 


“또 욱씬 거리네. 보호대라도 차고 올 걸 그랬나.”


사이드 미러에 세게 부딪힌 탓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벨레슬레빈 역입니다. 메트로로 갈아타실 고객님께선 이번 역에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만원으로 가득 찬 버스가 술렁인다. 착석한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 동시에 일어나고 자신들의 짐과 가방들을 챙겨든다. 사람들의 분위기로 보아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야 함을 직감한 아카아시는 왼손으로 첼로 케이스를 들쳐 멘다. 버스는 멈추고, 지하철역을 찾는 것은 그의 생각만큼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린 인파를 따라 이동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눅눅하기 짝이 없는 지하 냄새에 코를 틀어막은 아카아시는 지하철 문이 닫힘과 함께 문 뒤에 이마를 기댄다. 


사고 이후, 아카아시는 더 이상 첼로를 잡을 수 없었다. 손목 인대는 파열 됐고 악력 또한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카아시가 스스로를 책망해본 적 따윈 단 한 번도 없었다. 보쿠토가 무사했다. 그는 바이올린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카아시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경솔해서.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아카아시가……. 미안해. 미안해. 미안.’


보쿠토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른 손에서 시작해 팔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아카아시를 붙잡고 보쿠토는 한참이나 오열했다. 자신의 팔다리가 멀쩡함을 끊임없이 탓했고 섣부르게 굴었던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렸다. 아카아시는 괜찮다고, 당신이 무사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자신의 몫만큼 바이올린을 사랑해달라고 되려 그를 위로했음에도 보쿠토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정거장은 구시가. 구시가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 쪽입니다.]


보쿠토가 바이올린에, 나아가 음악 자체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 사고 직후였다. 버릇처럼 지어 올리던 해맑은 미소는 얼굴에서 싹 지워지고 틈만 났다 하면 연습실에 혼자 틀어박혀 밤이고 낮이고 손에서 현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꼼꼼히 챙겨 바르던 왁스는 쓰레기통에 처넣어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방치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미처 다듬지 못한 수염과 퀭하게 가라앉은 눈, 움푹하게 들어간 볼은 보쿠토란 고유의 빛을 잃었다. 정열의 장미를 발하던 그의 바이올린은 흡사 불 타 없어진 황무지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고 손가락 끄트머리에선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잠시만요! 죄송하지만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빨리 가봐야 해서요!]


음악에 반쯤 미쳐 버린 듯한 몰골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렸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해치면서까지 음악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고. 그러다 당신부터 망가진다고. 


“……겨우 도착했네.”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꼭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쿠토는 바이올린을 놓지 않았다. 원래도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사고 직후부턴 아카아시가 아닌 자신이 후유증에 시달리듯 바이올린에 집착했다. 콩쿠르 일정이 잡히는 족족 무대에 오르는 길을 택했으며 콩쿠르가 아니고선 보쿠토의 얼굴 자체를 보는 것마저 힘들어질 정도였다. 부모라고 그를 말리 지는 못했다. 닥치는대로 콩쿠르에 나가겠다는 보쿠토의 결심은 완고했고 나간 횟수만큼 우승을 쓸어왔다. 개 중엔 보쿠토의 거대한 장래를 눈여겨 본 심사위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고, 보쿠토가 부모들이 극명하게 반대한 해외 유학의 순례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보쿠토 코타로’ 연주자 대기실이 어디인가요?]


아카아시는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쿠토를 구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다친 손 따위는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재활에 재활을 거듭한다면 활을 쥐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고, 나아가 언젠가는 다시금 보쿠토와 합주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지인입니다. 무대 오르기 전에 아주 잠깐. 잠깐만 인사드리려고요.]


그러나 말 못할 후회는 잠식되듯 조금씩, 조금씩 아카아시를 좀 먹어 갔다.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를 섭렵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이후부턴 연락이 거의 닿지 못했다. 그의 몸이나 마음이 바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적게는 8시간 많게는 10시간씩 시차가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연락 한 통 없는 통신 수단을 밤새 붙들고 있는 아카아시 입장에선 충분히 이골이 났던 것이다. 결국 보쿠토가 해외로 떠나간 지 약 1년 째 되는 어제. 아카아시는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매일같이 손을 봐주고 있던 첼로를 오래간만에 품에 안고, 보쿠토가 애용하던 왁스를 챙기고, 여벌의 옷 몇 점과 최소한의 세면도구만 챙긴 채, 편도 티켓과 여권을 들고 무턱대고 하네다 공항을 향했던 것이다. 


“저는요. 보쿠토씨의 바이올린을 굉장히 좋아해요. 내내 좋아해왔어요.”


웅장한 기둥 장식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공연장 내부를 수놓고 있었다. 붉은 색의 실크 로드가 깔린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올라선다.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로브로 가려진 비상구의 문을 열어 보니 복도식으로 늘어선 대기실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첫 번째 경연이 막 시작된 참이었는지 쩌렁쩌렁한 박수갈채가 복도를 뒤 흔든다. 


“콩쿠르를 장난처럼 여기던 당신이었죠. 사실은 조금 안도했어요. 우연이라곤 하지만 이 불의의 사고가 당신의 음악에 본격적인 불을 붙인 것 같아서. 그래요. 사실은 기뻤어요. 저는 당신의 음악을 사랑했으니까. 당신의 음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랐으니까. 그만큼, 당신이란 사람 그 자체를 사랑했으니까.”


걸음을 떼면 뗄수록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간다. 등에 짊어진 첼로가 이것이 네 후회의 무게라며 호되게 다그친다.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고 긴장으로 굳은 어깨가 뻣뻣하며 마른침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의 식도를 넘어간다. 정확히 네 번째 문 앞을 지나치려던 순간. ‘보쿠토 코타로’란 여섯 글자에 아카아시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벌겋게 충혈 된 흰자위를 크게 확장 시킨다. 


“제가 언제부터 후회를 했는지 아세요. 당신을 구하고 오른손이 불구가 된 자신조차 탓하지 않던 스스로를 언제부터 채찍질 했는지 아세요.”


문을 연다. 


“당신이 비행기에 올라탔단 소식을 당신의 어머니께 전해들었을 때였어요.”


굳건히 닫혀져 평생 열리지 않을 줄 알았던 문이 활짝 열린다. 


“유학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조차 없는 이별.”


보쿠토는 짐짓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문 너머로 얼굴을 비춘 사람이 아카아시란 것에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 마냥 창백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연인……이라고 생각한 건 저 뿐이었나요.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저를 사랑한 것 아니었나요. 아님, 처음부터 저 혼자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요. 당신과 제가 특별한 사이라고, 그런 말도 안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나요. 네. 그렇겠죠. 그랬던 거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제게 말 한 마디 없이, 상담 하나 없이 유학을 결정해버리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니가 왜 여기 있어.”


보쿠토는 반가워하고 있지 않았다. 잔뜩 풀어헤친 머리칼하며 못 본 새 한층 더 사나워진 인상하며 아카아시를 보자마자 확 좁아진 미간하며. 그것은 먼 곳에서 자신을 만나러 발길을 건네준 상대를 반가워하는 얼굴이 아닌, 분명한 적개심이었다. 놀란 반응은 둘째 치고 안부 인사 정돈 건네줄 줄 알았던 아카아시였기에 그라고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게 제 얼굴을 보자마자 할 소리입니까?”

“병원은 어쩌고. 재활 훈련은 어쩌고.”

“휴대폰 확인을 아예 안하나 보네요. 티켓 사진 찍어서 보내뒀는데.”

“다 때려 쳤어? 왜? 해야지. 내가 없어도 해야지! 그래야 네가 하루빨리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아니야.”

“저란 인간은 아예 안중에도 없나보네요.”

“돌아가.”

“보쿠토씨.”

“좀 있음 내 차례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고. 쓸데없는 잔소리로 나 들쑤시러 온 거면 당장 돌아가.”

“하. 당신이란 사람은.”

“좋게 말 할 때 꺼져 있으라고.”


아카아시는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이제 와서 왈칵하고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왜 자신이 이런 거지같은 대우를 받고 있어야 하나. 거미줄같이 번져간 생각의 타래가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시큰거리는 목울대를 간신히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수차례 들이켰다. 왜 안 나가고 있냐는 따끔거리는 시선이 자신을 쏘아보는 듯했다. 겨우 가다듬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금 당신 꼴, 진짜 별로예요.”


악보를 훑으며 가상 속의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보쿠토의 손놀림이 일순 멈춘다. 


“제가 무슨 심정으로 여기까지 온 줄은 아세요.”

“…….”

“그때, 연주하지 말자고 계속 말릴 걸. 음악에 미쳐가는 당신 몰골 보면서 뺨 두세 대는 후려갈길 걸.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해 볼 걸. 당신의 음악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해 볼 걸. 그럼 뭔가 바뀌었을 지도 모르는데.”

“…….”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당신이 음악에 빠진 뒤에야 저는 처음으로 음악에 질투를 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이란 사람 본질을 사랑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첼로를 내려치고 싶은 적은 난생 처음이었어요. 살면서 그렇게까지 뭔가를 부숴버리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결코 없는데. 이 빌어먹을 첼로가, 음악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눈앞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고요. 재활이고 나발이고 저는. 저는!”

“…….”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왜 가라고 해요. 당신 하나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꼴 보기 싫은 첼로를 등에 업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이 미쳐버린 음악이란 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흠씬 비웃으러 와줬는데.”

“…….”

“음악가랬어요. 제 첼로 케이스를 본 사람이 저보고 음악가랬어요. 웃겼죠. 저는 음악이 싫어 죽겠는데. 당신을 뺏어간 음악이 미치도록, 끔찍하게 싫어졌는데. 어떻게 활을 켰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아요. 집에 신주단지처럼 모셔 놨던 CD들을 몽땅 갖다 버리고 오디오를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고 첼로까지 내던지려 했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더는 음악을 못하게 되자 미쳐 버린 줄 알았겠죠. 그게 아니었는데.”

“…….”

“그런데도 이 망할 악기는 끝끝내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게 유일무이한 당신과의 추억 덩어리라서. 이것만 보고 있으면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당신의 함박웃음이 저절로 떠올라 버려서. 도저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아카아시는 참지 못할 눈물 한 방울을 내보였다. 애증, 분노, 사랑, 질투, 슬픔이란 복잡한 감정들이 한 데 복잡하게 뒤얽힌 눈물 하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급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보쿠토가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 얹었다간 한계에 도달한 격화가 화산처럼 폭발해버릴 듯 싶었다. 그러나 보쿠토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아닌 음표로 가득 찬 악보만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묵묵부답으로 있을 뿐이었다. 


이 이상의 혼잣말은 꼭 말이 안 통하는 벽에 대고 윽박지르는 것 같아 아카아시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뭔가 생각났는지 그 자리에서 다짜고짜 여행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등을 짓누르는 첼로가 짜증났을 법도 하건만 아카아시는 아랑곳 않는 눈으로 옷가지를 뒤졌다. 얼마나 오래 뒤졌을까. 손바닥에 꼭 쥔 무언가를 보쿠토의 발치로 굴려 보냈다. 보쿠토가 자주 썼던 아리미노(ARIMINO)제 왁스였다. 


“이거 전해주러 온 거였어요. 그 꼴 사나운 머리, 어떻게든 정리 좀 해보라고.”


그가 쓰던 것은 아니었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새 것이었기 때문이다.


“별 말은 안 할게요. 어차피 제 멋대로 정의 내리고 제 멋대로 시작한 관계였으니까. 정리는 저만 하면 되는 거겠죠.”


아카아시는 못내 씁쓸한 얼굴을 하며 돌아섰다. 보쿠토는 제 구둣발을 채는 왁스를 집은 것도, 그렇다고 그를 잡은 것 또한 아니었다. 



* * *



대기실 문을 닫고 나오기 무섭게 눈알 가득 물빛이 차올랐다. 울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슬픔을 삭이고 인내했지만 오늘처럼 비참하긴 또 처음이었다. 돌아가, 그렇게 말하던 보쿠토의 옆모습만이 고장 난 필름처럼 반복재생 되었다. 뺨을 타고 뚝뚝 흐르는 물을 구태여 말리진 않았다. 손목시계를 재차 확인했다. 공항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아무도 남아 있지 나선형 계단을 홀로 내려가다 괜한 오기가 발동한 건 바로 그때였다. 체코에 오는 중대사마저 충동으로 결심한 자신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 잘난 연주를 안 듣고 가자니 짜증이 확 솟구친 것이었다. 캐리어를 끄는 방향을 바꿨다. 서둘러진 걸음 속도는 관람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안내 데스크가 보이자마자 백 미터 달리기로 변모했다. 아직 입장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고 티켓을 구매하고 나선형의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오르며 장내에 들어서기까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음은 3번 연주자, 보쿠토 코타로.]


때마침 다음 차례는 보쿠토였다. 행여 연주에 방해가 될까 재빨리 자리에 착석한 아카아시는 급한 마음으로 공연 팸플릿을 훑었다. 국제 콩쿠르, 라는 것까진 좋았는데 하필이면 체코어로 기재된 안내 책자를 집어온 탓에 글을 읽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언어의 장벽에 좌절하는 것도 잠시,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연주 순번을 살피던 아카아시의 눈에 익숙한 증명사진과 익숙한 곡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Informace>

umělec : Kotaro Bokuto

1 Určený jeden :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2 Volný : Paganini, Violin Concerto No.2, Op.7 ‘La Campanella’


“라……캄파넬라?”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그럼에도 영문의 활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파가니니라는 이름이 있었고 라 캄파넬라는 곡이 버젓이 쓰여 있었다. 설마 싶은 그의 마음에 못질을 하듯 안내 방송이 뒤를 이었다.


[지정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자유곡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 캄파넬라’입니다. 큰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뭔가 없을까. 강렬하고, 색채 강하고, 그러면서 어려운 곡.’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고 직전, 보쿠토와 함께 연주했던 합주곡이자 아카아시 본인이 마지막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곡. 겨우 10분 남짓한 그 곡을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채 사고는 터져 버렸고 아카아시는 더 이상 첼로를 켤 수 없었다. 


“……설마.”


아카아시는 떨리는 눈으로 무대를 내려 보았다.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을 배경삼은 오케스트라 사이로 보쿠토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고 직후부터 눈을 찌를 듯 길렀던 앞머리는 더 이상 보쿠토의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보란 듯이 왁스로 삐죽빼죽 머리를 올려 세워뒀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의 색을 되찾은 사람처럼 말이다. 아카아시는 또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울음이 가슴을 있는 힘껏 북돋고 있었다. 


얌전하게 찍힌 증명사진을 비롯해 이제까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보쿠토의 기이한 외견에 잠시 웅성거리던 관객들은 보쿠토가 활을 잡음과 동시에 침묵을 유지한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지휘자와 눈빛을 주고받는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올리고, 곡이 시작되기까지의 겨우 몇 초 전. 긴장과 걱정이 범벅이 되어 있던 황금색 눈알이 흐릿하게나마 웃음빛을 띤다.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울림과 함께 시작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제 1악장은 들판에 봄빛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물론 바이올리니스트의 색채감 및 표현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 곡은 연주자가 현을 켜는 첫 순간에서 작품성이 좌우되곤 했다. 아카아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근래 그가 기억하는 보쿠토의 음악은 황폐한 가시밭과도 같았다. 그런 그에게 표현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곡이 지정되었다. 실패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보쿠토의 독주가 시작되기 무섭게 실패의 걱정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아카아시를 비롯한 모든 관객들은 호흡을 멈췄다. 


침울하면서도 선명하게 저물어가는 노을빛 하나가 천사들의 그림으로 수놓아진 천장 안에서 강하게 울려 퍼졌다. 강변을 타고 저물어가는 노을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진 않았다. 칼날을 품은 시린 바람은 저물어 사라져가는 태양을 채찍질하며 봄을 나무랐다. 울긋불긋한 단풍을 새겨 넣은 듯한 저녁 하늘엔 작별 인사를 고하는 해에게 바삐 눈물을 건네는 철새들이 있었다. 마침내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그의 흔적들을 뒤늦게나마 추모하는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울림이 뒤따랐다. 


어느 덧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그 나름대로의 작별 인사라는 걸 그가 온몸으로 표출해내는 것 같았다. 본디 화려하고 웅장해야 할 장조가 단조처럼 느껴지기만 한 것은 비단 아카아시 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이마가 뜨거운 조명 아래 무대 곳곳에 물방울을 흘렸다. 그것에 눈물 또한 섞여 있었을 지는 보쿠토 본인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빨려 들어갈 듯한 첫 번째 연주가 끝나자 누군가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 박수를 쳤다. 이윽고 뒤를 따라 일어선 관객들이 공연장이 떠나가라 박수갈채를 보냈다. 아카아시 혼자만이 그 자리에 멍청히 앉아, 눈물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곡을 준비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를 교체하는 사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수분을 섭취하고 있는 보쿠토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아카아시는 홀린 사람처럼 팔을 들었다. 마치 허공에 첼로가 놓인 것처럼, 버젓이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투명한 현에 네 손가락을 올리고 활을 잡았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보쿠토였다. 풍부한 음색이 가미된 장미는 더 이상 빨갛지만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바짝 말라비틀어진 장미에 가까웠을까. 보다 섬세하고 날카로워진 테크닉에 반비례 하듯 슬픔을 흠뻑 머금고 있던 장미는 허리를 굽히고 꽃잎을 떨궜다. 


오케스트라의 차례가 돌아오자 아카아시는 활을 움직였다. 그에 지지 않을 투명한 음색을 펼쳤다. 그는 여전히, 새벽을 닮은 밤하늘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른 장미에 새벽녘 이슬을 건네며 상처로 일그러진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새벽은 아침의 상징이라며, 해는 곧 떠오를 것이라며, 밤은 오래 가지 않는다며, 저가 전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활에 담았다. 그 정성에 보답하듯 보쿠토 또한 슬픔 속에 피어난 기쁨을 담은 답가를 보냈다. 


어느 덧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두 사람의 합주로 경계를 좁히고, 그 곳엔 누구도 끼어 들 수 없었다. 10분이란 연주 시간은 찰나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우람한 박수갈채는 또 한 번 공연장을 뒤흔들었다. 



* * *



마침내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국제 음악 콩쿠르 및 페스티벌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아쉽게도, 바이올린 부문에서 ‘보쿠토 코타로’란 이름은 총합 3위에 머물렀다. 참신한 곡 해석이란 일부 심사위원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작곡자의 본 의도에서 멋대로 벗어나 슬픈 단조 형식으로 연주했단 혹평이 많은 감점을 낸 것이었다.


그래도 보쿠토는 웃었다. 마치 마음속의 짐을 훌훌 털어낸 사람처럼 해맑게 웃으며 카메라와 함께 달려드는 기자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음악과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나에겐 내내 끝을 맺지 못한 곡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죄악감이었고 절박함이었으며 내가 음악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애증이라 부를 수도 있는 이 마음을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야, 진정한 의미의 음악을 발견한 기분이다.]


그것은 연주가로서의 보쿠토 코타로가 남긴 마지막 코멘트였다. 해당 콩쿠르를 끝으로 보쿠토 코타로란 연주가의 이름은 세계 그 어떤 콩쿠르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동쪽의 어느 섬나라엔 오늘도 변함없이, 새벽녘에 피어난 장미를 빼닮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가 울려 퍼지고 있다고 한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윤회와 업보’를 키워드로 해 동양과 현대를 오고 갑니다. 

*원작기반, 동양풍, 사망 소재, 토끼와 용,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W. 멜




눈앞이 먹먹하다.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처음 듣는 다정함. 바람결을 타고 멀리까지 풍겨오는 퍽 온화한 공기.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쿠로오는 자기도 모르게 수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자세를 낮춘다. 


“그건 싫어!”


거죽과 뼈만 앙상히 남은 그의 발톱사이엔 푸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카아시 가고 나면 혼자 남겨질 텐데. 외로워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더 살라고? 그런 거 싫어. 아카아시 없는 삶은 훨씬 짧았으면 좋겠어.”


십여 년 전의 언젠가. 푸르름을 선사해주기만 한다면 제 마음 한 켠을 내주겠다던 아카아시의 터무니없는 약조를, 쿠로오는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 받을래, 그 선물.”

“제가 싫다면요.”


거대한 바다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체가 될 뻔하기를 수십 번, 황야를 빼닮은 사막을 가로지르다 탈진으로 생사를 오가길 수백 번, 시체인 줄 알고 들개나 새들을 비롯한 짐승들에게 뜯어 먹힐 뻔한 것이 수천 번. 포기하고 싶고 그만하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루가 일 년과 같고 한 달은 십 년을 맞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못했다. 쉬이 그만둘 수 없었다. 


‘당신이 그리 해주시기만 한다면, 대가로 제 마음 한 조각을 내드리겠습니다.’


전부가 아니어도 좋았다. 단 한 조각이라도 좋았다. 아카아시라는 이름 하나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나온 길이었고 떠나갈 길이었다. 


“내가. 당신이 죽지 않고 오래 살길 바란다면요.”


보라. 각고의 고생 끝에 손아귀에 쥐게 된 푸르름의 상징을. 떠올려라. 푸른 나비들이 사방을 수놓았던 밀림의 한복판을. 그려라. 이것을 품에 안았을 때 제게 활짝 웃어줄 아카아시의 얼굴을. 


“그래도 안 받으실 겁니까?”


쿠로오가 이를 깨문다. 시퍼렇게 날이 선 송곳니가 위아래로 맞물리며 자연스레 낮은 포효를 읊조린다. 


“그래도 아냐.”


웬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너무 작고 조그맣고 연약해, 한 손에 쥐면 펑 하고 살점이 터져버릴 만큼 작은 동물이 말이다. 쿠로오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아카아시 하나만 생각하며 갖은 고생을 하고 온 자신이었다. 엄연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었고 그 대가로 그의 곁을 조금만 내달라 부탁하려 했던 쿠로오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었던가? 쿠로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카아시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쿠로오는 물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10년 만에 자신이 찾은 아카아시는. 꼭 모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초하다 못해 고고하기까지 하던 무표정의 옆얼굴은 잔잔한 웃음으로 만개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동물과 함께 그의 주변 공기는 순수한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애걸복걸 구애하다 못해 제 발로 떠남을 택할 때조차 뒤도 돌아봐주지 않던 아카아시였다. 제게는 단 한 번도 지어주지 않던 웃음이었고 결코 보여주지 않던 상냥함이었다. 쿠로오는 이것을 참을 수 없었다. 토끼 한 마리가 생뚱맞게 튀어나와 그의 곁을 독차지한 것 같았다. 아카아시라고 밉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쿠로오란 이름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한 아카아시가 원망스러웠다. 


저 작은 것은. 아카아시를 위해 뭔가를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그를 위해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수해본 적이 있을까. 없겠지. 없었겠지. 왜냐면,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아카아시는 너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아닌, 네게 반했던 걸 테니까. 그래서 생각했다. 


“사실은 붙잡고 싶어. 가지 말라고 떼쓰고 싶어. 어리광 피우고 싶어. 근데……. 알아. 아카아시는 그래도 갈 거잖아. 가야하는 거잖아. 많이 기다려왔으니까. 나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달라 하는 건 결국 내 욕심에 지나지 않잖아.”


미웠다. 


“아카아시는 벌써 수 천 년 동안 나를 기다려 줬잖아? 아 물론 나만을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그치만! 그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나를 만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아카아시를 기다릴래. 네가 없어져 버린 이 생에서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야. 분명 다음이 있을 테니까. 다시 태어나서 다음 생의 아카아시를 찾을 거야. 나에겐……. 분명 그게 더 행복한 일 일거야.”


미웠다. 미웠다. 미웠다. 미웠다. 


화가 치밀었다. 질투라 불러도 좋았다. 추악한 감정이라도 좋았다. 뭐든 좋았다. 저 작은 생명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었다.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 지난 10년 간 자신이 내내 겪어왔던 고통을 저 작은 것에게도 안겨주고 싶었다. 


“……너한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하다못해 눈길 한 번이라도 내 쪽을 향하길 바란 것뿐인데.”


그것은 충동. 충동에 가까운 욕구. 폭발적으로 불어난 악의 감정. 


“내 기다림의 대가란 게 겨우 이런 거였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일은 이미 터진 후였다. 사방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혀끝엔 달큰한 피 맛과 물컹한 살코기의 육즙이 닿았으며 눈앞엔 아카아시가 있었다. 


“대답해,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보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멍한 눈을 한 채,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윽고 녹빛 동공이 부들부들 떨렸다. 뺨에 튄 핏방울에 손을 갖다 댔다. 뜨끈한 체온이 여전했다. 수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금세라도 꺾일 것 같았다. 표정을 잃은 낯빛이 차츰 색을 띠웠다. 


“너……너……!”


적개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가시처럼 표독을 세웠다. 분노로 치민 녹안엔 불꽃이 튀어 올랐고 사람의 것으로 둔갑하고 있던 피부는 녹빛 비늘이 오소소 돋아났다. 비단 같은 윤기가 흘러야 할 비늘은 잔뜩 뒤틀어져 흉측하게 솟아오른다. 쿠로오에게 날을 세우듯 말이다. 고왔던 눈두덩의 흰자위는 피 색으로 물들고 사람의 것 같았던 손톱들은 세 갈래로 뜯겨져 나와 범의 송곳니만큼 거대한 발톱이 되었다. 점찍듯 퍼져 나가던 검붉은 안광은 어느 새 아카아시의 전신을 뒤덮는다. 이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본래 청아한 기를 풍기던 아카아시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검붉은, 불길한 기세를 뿜어낸다. 그가 즈려 밟고 있던 꽃들은 바짝 메말라 시들어 버리고 그들 곁을 지나치던 상냥하던 봄바람은 을씨년스럽게 바뀌어 흡사 칼날처럼 쿠로오의 뺨을 때렸다.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천둥 번개를 수반한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바짝 말라 비튼 대지는 쩍쩍 갈라지며 유례없는 지각변동을 몰고 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거대한 기의 덩어리에 둘러싸인 쿠로오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영웅이 된 줄로만 알았다. 삭막한 전쟁터에서 금의환향한 줄로만 알았다. 환히 웃어 줄 줄 알았다. 기쁘게 반겨줄 줄 알았다. 


“네가 감히…….”


이상은 몽상의 단편일 뿐. 현실은 달랐다. 전혀 달랐다. 


“네 까짓 게 감히!!”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무섭게 번개와 천둥이 연이어 하늘을 울린다. 또렷한 살기를 띤 녹안이 쿠로오를 노려본다. 그의 뺨 위로 톡, 톡 시린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스산하던 바람이 기어코 비를 몰고 온 것이다. 단순한 빗방울이 아닌, 거대한 폭풍으로 자라날 법한 비바람을 말이다. 


뒤늦게 쿠로오가 자세를 낮춘다. 말을 아낀다.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며 그에게 수그린다. 입에 물고 있던 살덩이를 조심히 내려둔다. 


적개심으로 불붙어 있던 시선이 쿠로오의 행동거지를 따라간다. 진즉에 숨이 멎은 목덜미엔 선명한 송곳니 자국이 있었다. 단번에 꿰뚫린 급소였다. 쉴 틈 없이 재잘거리던 입은 꽁꽁 얼어붙었다. 행복으로 만개한 눈웃음이 샐쭉 말려 올라갔다. 그 상태 그대로, 작은 토끼는 숨을 그쳤다. 


아카아시는 멀찍이서 그것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그렇게 지켜보다, 손을 들었다. 양 손바닥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작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달달 떨렸다. 힘이 풀린 다리는 더 이상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릎이 꺾였다. 그의 살갗이 닿은 풀잎에서부터 땅이 황폐화 되어 갔다. 그리고 기었다. 마른 들판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뜨끈한 피가 뭉텅뭉텅 터져 나오는, 아직까지도 따뜻한 살결이 생생한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보쿠토씨, 이름을 불러 보려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히끅 거리는 비음만 터져 나왔다. 검붉던 눈가엔 물빛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니야.”


마침내 운다. 서럽도록 운다. 목 놓아 운다. 끝을 모르는 오열을 토악질한다. 꺽꺽대는 곡조를 따라 하늘이 무너지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용이 겪은 슬픔에 천지가 설움으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쿠로오는 뒷걸음질을 친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이런 결말을 원한 게 아니었기에. 서러운 마음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토로할 곳 없는 외로운 마음은 결국 제 초라한 발톱 끝자락으로 향했기에. 


“나는 그저……!”


벼락이 쳤다. 날카로운 비명이 대지를 갈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무릎베개를 해주던 느티나무 위로 곧장 벼락이 떨어졌다. 쩌적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진 나무는 흉측한 몰골이었다. 사방팔방에 벼락이 내리쳤다. 보쿠토가 좋아하던 토끼풀밭부터, 숲의 변두리에 뿌리를 내린 버들나무까지. 불은 금방 붙었다. 타는 냄새가 숲 전체를 숲 전체를 뒤덮었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타올랐다. 그 무렵 끊어질 줄 모르던 용의 곡조가 뚝 그쳤음을 쿠로오가 뒤늦게 인지했다. 품엔 피범벅이 된 시신을 안고 허망한 눈으론 쿠로오를 좇던 아카아시가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당신과 했던 약속. 이제야 기억났네요. 제가 부탁했던 푸르름이란, 지금 당신의 발치를 굴러다니는 저것인가요?”


푸른빛으로 가득 찼던 나비의 날개 위론 핏방울과 빗방울이 튀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그를 비웃듯 한 쪽 입 꼬리만 말아 올려 보았다. 


“그럭저럭 예쁘네요.” 


쿠로오는 꼬리를 말았다. 뼛속까지 겁에 질린 목소리가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 나왔다.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화가 나서 그랬어.”

“…….”

“나는 계속 너 하나만 바랐는데. 저 새끼는 아무런 대가 없이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게, 그게 너무 싫어서 그랬어. 정말이야. 추방을 해도 좋고 네 눈앞에서 꺼지라 하면 꺼질 게. 더 이상 좋아하지 말라는 건……너무 힘들겠지만 노력해볼게. 좋아하지 않으려고 해볼게. 그러니 제발. 제발…….”

“…….”

“미워하지만 말아줘.”


아카아시의 눈가 주변엔 자꾸 힘줄이 돋아났다. 입은 비뚜름해지려 하고 미간은 좁아지려 하고 인상은 사나워지려 하고 있었다. 즉, 표정 관리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경련 일 듯 도저히 안 올라가는 입가를 좋을 대로 내버려두었다. 뻣뻣하게 굳은 낯빛과 시린 눈매를 세워 쿠로오를 쏘아봤다. 쿠로오가 어떤 변명들을 늘어놓든 귀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대가를 드릴 차례인가요.”


황폐화 된 토지 위를 굴러다니던 자갈들이 일어났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그것들은 아카아시의 손날을 따라 둥그런 형태가 아닌 길고 날카로운 꼬챙이의 형태로 변모했다. 어림잡아도 수십 개는 족히 넘을 가시들이 단 한 개의 목표를 향해 이를 세웠다. 


기억하라. 그 꽃은 오직, 청렴한 마음을 통해서만 피어난다는 것을. 


제 신념과도 같던 말을 거역해도 좋은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무렵엔 때는 이미 늦고 말았지만. 꼬리를 만 호랑이가 벌벌 떨고 있어야할 자리는 사지가 꼬챙이로 들쑤셔진 살점들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본래의 형체조차 모를 만큼 엉망으로 찢겨져 나간 육신 앞에서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천지가 쩌렁쩌렁 진동하고 있음을 몸소 체감했다. 


불처럼 들끓는 복수심과 적개심에도 모자라 불필요한 살생까지 감행해버린 아카아시였다. 거의 피어날 듯 했던 연꽃은 시들고 고운 주홍빛을 띠던 여의주는 탁한 회백색으로 물들어 반으로 쪼개졌다. 그것의 변화와 죽은 보쿠토를 번갈아 보던 아카아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토했다.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어쩌면, 이라 생각한 것이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과 여의주를 함께 두면, 이라 생각한 것이 있었다. 


“……이미 늦었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늘에선 날벼락이 내리치고 땅에선 지반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아카아시는 죽은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반쯤 떠 있는 눈꺼풀을 고이 감겨주고, 그 작고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아 한참을 목 놓아 우는 것뿐. 그렇게, 설움으로 복받친 용의 울음소리만이 천지를 수놓았다. 



* * *



이것은 이야기. 시대를 따라 스쳐 지나간 무수한 전설 중 겨우 하나. 


용은 삶의 반려로 택했던 토끼를 잃었고 호랑이는 운명이라 믿었던 용에게 죽임을 당했다. 천지는 노하고 여의주는 망가졌으며 유일했던 귀천의 기회는 박탈당했다. 자의든 타의든 용은 대지에 남는 길을 택했다. 죽은 토끼를 품에 안은 채 말라 죽는 길을,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을, 다음 생에서야말로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 할 수 있기를. 


그것은 최초이자 최후의, 용의 바람이었다. 



* * *



눈을 뜨면 울고 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천장이 있었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 내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건지 꿈에서 깨어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침을 삼켰다. 눈꺼풀을 깜박여 보았다. 손끝을 들썩거려 보았다. 바윗덩어리도 이만큼 무거울 수 있을까. 가까스로 들어 올린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끝난 줄 알았던 악몽의 연장선이 선명하게 수놓아졌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차올랐다. 


바람은 이루어졌다. 고대하던 이를 만났다. 비참한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보내고 말았던 어여쁜 이를 다시 만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왜 몰랐나 싶을 만큼 운명 같던 사람. 시대와 세계를 뛰어 넘어 다시 만나게 된 해바라기를 닮은 미소. 


‘기념이라면 그럴 듯한 선물이 있어야 겠네요. 선물로는 뭐가 좋겠어요?’


사실은, 해바라기를 주려 했다. 꽃을 꺾어 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그의 눈앞에다 해바라기를 피워주려 했다. 손짓 하나에 무럭무럭 자라나 해를 향해 방긋 웃는 꽃 봉우리를 가리키며 봐요, 당신을 닮은 꽃이에요, 쫑긋 솟아오른 귀에 대고 속삭이려 했다.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발자국 위에 쌓인 눈이 편평하지 않은 것처럼. 옴폭하니 들어간 그곳을 파헤쳐보니 피 묻은 발자욱이 선연한 것처럼. 겨울이 언제까지고 겨울일 수는 없는 것처럼. 봄이 오는 소리에 발맞춰 소복이 쌓여 있던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처럼. 영원한 망각은 없는 것처럼. 


“아, 깼다.”


파묻어 두었던 슬픔은 예고 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예고라면 내내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인간으로써의 새 생을 시작한 직후부터. 질리도록 내 발치를 졸졸 따라 다니며 경고를 했던 것이다. 그것을 지우려고. 묻으려고.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거부한 건


“‘또’ 그 악몽이구나.”


오히려 내 쪽이었다. 


“작년 이 맘 때도 밤잠 설쳤지, 아카아시.”


어질 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 팔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이 한참을 헤맸다. 아직도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꿈속, 이라기 보단 심해에 가까웠을까. 빛 무리 하나 없는 심해는 그 어떤 꿈보다도 어둡고 춥고 외로울 테니. 


“어떻게 아세요, 같은 질문이라면 그만둬. 아카아시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있으니까. 뭐든……. 알고 싶기도 했고.”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주변을 밝혔다. 낯익은 락커. 선반을 가득 채운 배구 화들. 일렬로 정리정돈 된 서포터들과 스포츠 타올.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드링크 병. 칙칙한 땀 냄새를 가리기 위해 선반 구석에 자리한 오래 된 방향제. 새카만 밤하늘을 채우던 구름이 흩어져 갔다. 부실의 널찍한 창틀 아래로 볕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백한 거였잖아. 내가 첫 눈에 반해 버려서.”


달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것은, 은은한 비단결을 떠올리게 하는 상냥한 빛이었다. 결이 고운 달빛 사이로 황금색 눈이 반짝였다. 밤하늘을 장식한 초승달 같은 눈웃음이 부끄러운 기색을 영 감추지 못했다. 뺨은 발갛게 물들고 뒷목은 긁적이고 호를 그린 눈가는 살풋 떨리는 탓에 온전히 나를 향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더는 울지 마, 아카아시.”


더는 울지 마. 


그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 뺨을 닦아냈다. 손등에 축축한 기운이 흥건했다. 왜라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몸과 마음이 온힘을 다해 말 못한 감정들을 쏟아내려는 것 같았다.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고 그 틈새로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뭔지 모를 절박한 기분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건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건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언젠가 그랬듯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풀린 다리는 머리를 따라주지 못했다. 물빛이 흐려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더듬더듬 손을 이끌었다. 납작한 배에서부터 탄탄한 가슴과 어깨를 쓸었다. 말리지 않았기에, 나 또한 멈추지 않았다. 손은 목덜미에서 멈췄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선 따뜻한 체온이 가득했다. 쿵쿵 거리는 맥박이 선연했다. 손이 분주히 움직이며 목 주변을 전체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깨끗했다. 상처는 없었다. 멀쩡했다. 살아 있었다. 엄연히, 살아 있었다. 


송곳니에 꿰뚫린 상처는. 핏줄기가 철철 흘러넘치던 바람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졌다. 어디까지 울어야 속이 시원할 작정인지 눈가에선 또다시 수분이 펑펑 솟구쳐 올랐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 감각이 전신을 헤집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은 기어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등을 보듬는 손길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연이은 악몽의 이유도, 내 울음의 이유도, 당신을 갑자기 끌어안은 이유까지도. 다만,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던 것 같다. 


한참을 울었을까.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추하게 울어버린 탓에 슬슬 내가 얼굴을 묻고 있던 그의 교복 자켓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이것도 나름, 선물이라면 선물 일까나.”


들릴 듯 말 듯한 조그만 웃음이었건만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으니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왔다. 무슨 소린가 싶어 궁금하다가도 붕어의 것 마냥 팅팅 부었을 눈두덩을 보이고 싶지 않아 되려 파묻은 얼굴에 힘을 주었다. 


“기억 안나? 오늘 내 생일이었잖아.”

“……아?”


의미 없는 감탄사와 함께 엉망진창이었을 얼굴이 그에게서 저절로 떨어졌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몰골이 말이 아닐 것 같아 급한 대로 흉할 낯짝을 손바닥 아래로 감췄다. 늘어진 눈물 콧물 자국부터 급하게 닦아냈다. 피와 울분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이성이 느릿느릿 현재를 돌이켰다. 고장 난 필름이 영화의 장면들을 띄엄띄엄 이어 붙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습 끝나고 다 같이 파티하려고 했는데 연습 도중 아카아시가 코피 쏟고 비틀 거려서 시합이고 파티고 나발이고 다 중단됐잖아.”


연습? 파티? 시합?


“안색은 창백하지 코피는 줄줄 쏟고 있지 힘 다 빠진 목소리로 자기는 괜찮다 하지.”


아. 웃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싫다는 애 업고 응급실이라도 뛰어 가야 하나.”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죽은 듯이 자는 네 모습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화난 보쿠토씨는 본 적이 없는데. 


“내 생일에 쓰러질 뻔한 널 부실까지 업고 오는 내내. 네 상태 하나 제대로 체크 못한 내가 쓰레기 같았어. 바로 지난주부터. 그 망할 노인네를 만난 이후부터. 네 상태가 이상해졌단 걸 진즉에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 노인네의 멱살을 잡고 흔들든 때려눕히든 무슨 짓을 해서든.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마음이 간질거렸다. 여태껏 남을 몰아세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보쿠토씨가 나에게 머리끝까지 화를 내고 있단 사실에, 마음이 살랑였다. 


“머저리는 나였어. 정작 울고 싶은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다고.”


온전히 나란 사람을 위해 걱정을 토해내는 이 사람이. 숨을 붙이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사람이. 


“부탁이니까 제발! 사람 간 떨어지게 좀 하지 마.”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해요.”


이번엔 내가 안을 차례였다. 무릎걸음으로 그의 곁에 천천히 다가가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상처 받은 눈을 하고 있는 여린 짐승을 품에 안고 보듬었다. 


“걱정 끼치게 해서 미안해요. 덜컥 울어 버려서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보쿠토씨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옷깃을 끌어다 꾸욱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놓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늦어서 미안해요. 생일 축하해요.”


일순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나 긴 기다림을 거쳐 왔던가.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가슴께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푸흐, 낮게 웃는 소리가 간질거렸다. 


“한참 늦었잖아, 이 지각 쟁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낮에는 노련한 뙤약볕 아래에서 시원한 그늘을 찾아 그와 함께 봄을 보내고 밤에는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따스한 온기가 남은 창가를 거닐다 그의 품에서 잠이 드는. 오래도록 돌아왔지만, 


“제가 마지막 축하이길 바랄게요.”


나의 바람은 늦지 않게 이뤄진 것이었다. 


“보쿠토- 아카아시 상태는 어때?”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 바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보다. 


“아까 시합 중에 아카아시 코에서 피 터지 길래 나까지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도 이제쯤이면 슬슬 괜찮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래에서 애들이 케이크 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불러 오려고-”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부실 문과 함께 활짝 열려 왔다.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말을 하다말았다. 그것은 필시, 한 데 엉겨 붙어 있는 나와 보쿠토씨의 모습을 보아서. 


“……아, 하. 파티는 내일 하자고 전해놔야 겠네.”


‘시합’이란 게 연습 시합을 말한 거였나. 아아,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분명 실전을 코앞에 둔 마지막 연습 시합이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쿠로오씨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고. 

끓는 듯한 설움이 전혀 없었다면 오히려 거짓이리라. 꿈에서 들었던 호랑이의 목소리와 지나치게 흡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등 뒤로는 소름이 돋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잔뜩 수축한 혈관 탓에 손발이 시려오고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연은 맺어졌고, 만나야 할 사람은 이미 만났으며 남은 것은 오직 시간뿐이로구나. 살생의 기억은 피에 남았고 복수귀는 뼈에 사무쳐 마침내 오늘을 갖고 왔구나.’


가슴에 칼자국을 남긴 노파의 어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야 하나 둘 납득이 갔다. 그는 호랑이었고 호랑이는 그였다. 그는 서슴없이 살생을 저지른 자였고 시대를 뛰어넘은 살인자는 바로 그였다. 겉모습이야 어찌 됐든,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일들 잘 봐. 끼어 들어서 미안했다.”


본질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용서 하셔야 합니다.’


똑같은 존재였다. 


‘용서를. 용서를 하십시오.’


미워하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온전히 그만을 미워할 수 있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회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찬스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행하고서야 비로소 지난 업보에서 해방 되실 수 있습니다.’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것이 아닌, 서서히 그 목을 옥죌 수 있는 천재일우의 찬스였다. 지난 생처럼 단숨에 죽여 버리는 멍청한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살가죽을 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만을 불어 넣고 싶었다. 


‘끓듯 차오르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엄한 감정에 눈이 멀어선 아니 됩니다. 결코, 지난 일을 반복 하셔선 아니 됩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흠씬 두들겨 패다 홧김에 모가지를 부러뜨려도 성이 안 찰 것 같았다. 주체 못 할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역류해 머리통 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를 하셔야 합니다.’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머리가 아팠다. 깨질 듯이 아팠다. 메아리처럼 머리통을 꽝꽝 울리는 노파의 어귀가 시끄럽다 못해 찢어질 성 싶었다. 뇌의 어딘가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귀가 아프고 눈앞이 화끈거렸다. 


“기다려요.”


결국엔 불러 세웠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말았다.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보쿠토씨가 뭐라 뭐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마치 라디오의 잡음마냥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뗐다. 발걸음의 끝엔 놀란 눈을 한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니, 쿠로오씨가 있었다.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놀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얼떨결에 그를 안는 꼴이 되었다.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던 쿠로오씨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던 그의 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마냥 허공에만 머물러 있었다. 등 뒤에서 날 선 투덜거림이 들리는 듯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뭣하면 소중히 끌어안은 이 목덜미를 단숨에 조를 수도 있었다. 죽이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왜, 라고 작게 중얼 거리는 입이 사뭇 떨리고 있었다. 뺨을 묻은 목덜미가 터질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성질은 똑같구나.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왜 그랬을까. 이유는 정말 모른다. 그냥,


“안아주고 싶었어요.”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어쩌면 그를 맨 처음 만났던, 아득히 먼 옛날부터.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윤회와 업보’를 키워드로 해 동양과 현대를 오고 갑니다. 

*원작기반, 동양풍, 사망 소재, 토끼와 용,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보쿠토 생일 축하해 >.< !




W. 멜




눈을 뜨면 울고 있다.


긴 악몽을 꾼 것 같아 이부자리를 뒤척거리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등줄기가 옷자락을 푹 적시고 있었다. 


꿈의 내용을 떠올리려 할 때면 그것은 벌써 희뿌연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지만, 끔찍한 꿈이었단 선명한 감각 하나는 내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열병 같은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매년 9월과 함께 꼬박꼬박 찾아오는 악몽 따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부터 가을을 제일 싫어했다. 달력이 9월로 넘어갈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악몽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는 순간,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그것의 기억이 옅어져 갔기에 나는 누구에게도 내 고충을 털어 놓을 수 없었다. 처음엔 화들짝 놀래 하며 매년 가을마다 나를 병원에 데려가던 부모님조차 해가 넘어갈수록 나의 출처 없는 악몽에 지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을 수 없는 신기루를 남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야 할 때. 마침내 그것을 ‘과도 망상’이라 도장 찍혔을 때.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워, 잠이 오는 것이 무서워 몇 날 몇 일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우다 그것이 꼭 나흘 째 되던 밤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때. 이제는 한해를 무사히 보내기 위한 관례처럼 악몽을 그저 몽(夢)으로 넘기게 되었을 때. 


나는. 당연하지 않던 것을 당연하게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던 나였다. 열일곱 번째 맞이한 8월이 끝나감과 동시에 올해도 시작이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게 다였다. 특별할 게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했다. 


안일했다. 


올해 가을은 유독 잠자리가 사나웠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뿌옇게 흐려지기 마련이던 꿈결이 그럴 듯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울었어. 꿈에서도.”


누군가를 품에 끌어안은 채 목 놓아 우는 스스로가 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손발이 마비되듯 벌벌 떨렸고 구멍 난 가슴엔 아픔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듣는 사람의 억장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릴 정도였다. 끝을 모르는 통곡 소리는 기어코 하늘을 두 쪽으로 쪼개고 지반을 갈라 세웠다. 


그것뿐이었다. 


품에 안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토록 오열하고 있었는지. 왜 그런 꿈을 반복해 꾸고 있는 것인지. 나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여태껏 악몽이 어떠한 내용인지조차 기억 못하던 내가 그것을 확실히 짚어볼 수 있게 된 시기는,


“그……점쟁인지 뭔지 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였지.”


너무 울어 지끈거리기까지 시작한 관자놀이부터 짚는다.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지난주의 기억부터 더듬거려 본다. 첫 대면부터 인상이 퍽 곱지 못했던 노파를 그려본다. 



* * *



그 날은. 인터하이 준준결승 앞이라는 나름대로 중요한 시기였다. 


대전 상대로 네코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감안하면서도 나와 보쿠토씨, 쿠로오씨는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우연히 역에서 만났다. 우에노에 볼 일이 있었던 우리와는 달리 그저 산책 삼아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쿠로오씨 곁엔 늘상 따라붙던 켄마가 보이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게임기를 붙들고 있는 통에 일요일 대낮인 지금까지도 푹 잠에 빠져 있을 거라는 쿠로오씨의 빈정거림에 나는 못내 부러움 섞인 눈을 했던 것 같다. 


가을이란 계절 안에선 숙면은커녕 눈 붙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못 했으니까. 


어쩌다보니 동행을 하고 함께 JR에 올라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보쿠토씨와의 연애 진도 알아맞추기, 낯부끄러웠던 첫 고백의 순간 떠올리기, 오늘 입은 속옷 색깔 맞추기, 지난 발렌 타인에 쿠로오씨가 선물 받은 초콜릿 개수, 합숙 때 다같이 먹었던 바베큐, 어렴풋한 진로, 괴물 리시브, 괴물 부엉이. 마지막엔 서로의 볼과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며 누가 누가 더 못생겼나 같은 대결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고 있으면 과연 어느 쪽이 선배고 고등하교 3학년이고 18살인지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았다. 


피로로 지친 눈두덩을 쓸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목적지엔 금방 도착했다. 간만에 연습 없는 주말을 최대한 만끽하자며 방방 뛰어 다니는 보쿠토씨의 뒷덜미를 낚아채 스포츠 용품 가게에 들러 부족한 서포터를 구비하고, 대뜸 오코노미야끼가 먹고 싶다는 보쿠토씨를 달래러 사방팔방 식당을 찾아 헤매고, 구석진 골목에서 내내 배고픈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길고양이에게 참치 캔을 선물하려 쿠로오씨의 지갑을 선뜻 열리고, 허겁지겁 허기를 달래는 고양이를 둘러싼 건장한 장정 셋이 흐뭇한 미소를 짓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는 보쿠토 네 생일이지 않냐는 화두를 던지고, 자신의 생일조차 까먹고 있었다는 듯한 주먹이 손바닥을 내리치고, 납득하곤


‘그럼 생일 선물!’


그 한 마디와 함께 나와 쿠로오씨의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한 보쿠토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있긴 할까까. 가장 가까운 게임 센터로 들어가 스티커 사진기 안에 우리를 구겨 넣은 보쿠토씨는 땡전 한 푼 없을 줄 알았던 바지 주머니를 뒤져 꼬질꼬질한 500엔을 기계에 넣곤 우리에게 웃으라 했다. 어깨동무까지 하며 최대한 친한 척을 해보이곤 해맑게 웃어 보였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 날벼락인가 싶다가도 3, 2, 1을 외치는 정면의 카메라 앞에서 입 꼬리부터 올리고 말았다. 그것도 잠시, 얼굴 몰아주기를 하자는 쿠로오씨의 깜짝 제안에 번갈아가며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어보고, 서로의 우스운 꼴에 허파에 바람 들린 사람처럼 깔깔 웃다 몇 컷을 날려 먹고, 처음 찍은 몇 장을 제외하곤 잔뜩 흔들려 초점이 엇나간 사진들을 보쿠토씨만이 억울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기념사진으로 간직하려 했는데……. 최고의 생일 선물이 될 뻔 했는데…….’


아쉬운 대로 그나마 잘 나온 사진 서너 장을 조그맣게 오려 나눠 가졌다. 그럼에도 쿠로오씨는 제 잘생김이 반의 반도 나오지 못한 것 같다며 툴툴 거렸지만 나는 꽤 만족하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순간을 어엿한 형태로 남긴 거였을 테니. 


‘쿠로오. 아카아시. 이대로 돌아가긴 좀 아쉬우니까.’


다음 순간이었다. 


‘우리, 점이나 볼래?’


게임 센터의 맞은 편, 허름한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낡은 천막 한 가운데엔 ‘점(占)’이란 글자가 검은 매직으로 굵직하게 쓰여 있었다. 꼭 뭔가에 홀린 사람마냥 발길을 돌리고 있는 보쿠토씨에게 쿠로오씨가 한 마디 거들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점을 믿냐는 말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보쿠토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싫다, 돌아가자, 귀찮다는 반응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라도 발동 했는지 그곳에서 멀어지고 싶어 했던 우리를 되려 질질 잡아 끌었다. 저 무식한 힘은 못 당하겠다며 쿠로오씨가 혀를 내두르는 동안 그럼 복채는 보쿠토씨가 내는 걸로 하자며 그에게 통보하다시피 한 나는 벌써 천막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 다음이었다. 


길쭉한 테이블과 의자 몇 개, 카드 혹은 거울 같은 소도구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천막 내부는 내가 들어섬과 거의 동시에 뭔가가 부서지고 넘어지고  요란한 소음이 나는가 싶더니 이뤄 말할 수 없는 아수라장의 상태로 나를 반겼던 것이다. 묘한 향을 풍기고 있던 향로는 바닥에 엎질러져 희뿌연 재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엎어진 테이블 아래엔 뒤로 넘어간 플라스틱 의자 몇 개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요, 용서를…….’


어느 노파가 있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움푹 팬 볼우물을 가진 채 검버섯이 잔뜩 돋아난 손등을 덜덜 떨고 있던 노파가 있었다. 곱게 빗어 하나로 묶고 있던 백발의 머리칼은 놀라 넘어진 탓에 보기 흉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지그시 감겨 있던 눈은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임을 여실히 말했지만, 그 눈꺼풀 틈으로 살짝 보이는 흰자위는 섬뜩하리만치 서슬 퍼런빛을 띠고 있었다. 


난데없는 굉음에 놀란 보쿠토씨와 쿠로오씨가 뒤따라 들어서는 것도 잠시, 노파는 우리로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발은 물론 땅바닥에 고개가 닿을 만큼 푹 조아린 채 내 발치 앞까지 엉금엉금 기어와선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절을 했던 것이다. 


‘오오, 자비를. 못 알아 뵌 이 비천한 늙은이에게 부디 자비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선 보쿠토씨와 쿠로오씨가 내내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는 노파를 부축하려 해보지만 그 자리에서 도통 꿈쩍도 안 하는 게 노인이 아닌 바위덩어리를 드는 것 같다는 보쿠토씨의 힘겨운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돌아올 뿐이다. 분명한 것은, 


‘용서 하십시오. 용서를. 용서를 하셔야 합니다.’


노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향해, 내 발밑을 향해 곧장 절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행하고서야 비로소 지난 업보에서 해방 되실 수 있습니다. 끓듯 차오르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엄한 감정에 눈이 멀어선 아니 됩니다. 결코, 지난 일을 반복 하셔선 안 됩니다. 오오, 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용서를. 참된 이해와 진실한 깨달음을.’


거 노인네 힘 한 번 더럽게 세네,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노파를 겨우 들쳐 멘 쿠로오씨 덕에 바닥에 납작하게 파묻혀 있던 노파의 얼굴이 겨우 들어 올려졌다. 두려움에 파르르 떨던 탄력 없는 눈꺼풀이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보쿠토씨와 쿠로오씨를 발견했을 때, 노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느끼듯 서글픈 곡조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 아아, 어찌 할고. 이 일을 어찌 할고. 연은 맺어졌고, 만나야 할 사람은 이미 만났으며 남은 것은 오직 시간뿐이로구나. 살생의 기억은 피에 남았고 복수귀는 뼈에 사무쳐 마침내 오늘을 갖고 왔구나.’


두 사람의 만류에도,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봐도, 노파는 이유 모를 울음을 한참이나 토해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노파를 의자에 앉히고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 덮어준 뒤 뒤숭숭한 마음으로 천막을 벗어날 무렵, 


‘용서 하셔야 합니다. 용서를. 용서를 하십시오.’


우리들의 귓전에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용서’라는 단어뿐이었다. 


이상한 할머니 였어. 보쿠토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카아시 아까부터 안색 엄청 안 좋은데 괜찮아? 잠깐 쉬었다 갈까? 내 낯빛을 살피던 쿠로오씨가 걱정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답하려던 입은 물리적으로 벌어지기만 할 뿐, 목구멍 안을 맴맴 돌던 단어는 결국 언어화되지 못했다.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 노파의 엎드려 구부러진 등과 ‘용서’를 강조하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왜 이리 잊히지 않는지. 따귀를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왜 이리 얼얼한지. 


지금 돌이켜보면 꿈을 잊으려 한 것은 내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기억해내선 안 된다, 떠올리지 말라는 무언의 사슬이 내내 나를 쥐고 흔들고 있었던 걸 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망각을 취함으로써 내 정신을 온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바로 그 날부터 였다. 수십 년 째 나를 지독히 괴롭혀 왔던 악몽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 말이다. 



* * *



태초에 해와 달, 그리고 천지(天地)가 있었다. 


해는 달을 사랑했고 달은 해를 사랑했다. 그러나 슬픔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는 자신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야 달이 차오르는 것에 큰 상실감을 느꼈다. 달 또한 자신이 사라져야만 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크나큰 슬픔을 느꼈다. 


두 사람의 가여운 사랑을 보다 못한 천지(天地)는 한 가지 약조를 하게 된다. 돌아오는 일천 년 이후, 황혼녘을 수놓는 유성우가 대지를 뒤엎을 때 해와 달이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약속했던 천 년 후, 하늘을 다홍빛으로 물들인 일몰과 함께 천지를 찾은 유성우들은 이제 막 떠오르는 달의 손을 잡고 저물어가는 해를 향해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두 개의 사랑이 처음으로 하나가 된 순간, 하늘은 오색빛깔의 무지개로 뒤덮어지고 두 사람의 둥그런 그림자를 담은 대지는 찬란한 빛을 띠었다. 


놀랄 만 한 일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한 데 겹쳐진 둘의 그림자는 여타의 칠흑색이 아닌, 백색을 가졌던 것이다. 이윽고 지표면에서부터 꽃이 만개하듯 볼록하게 튀어나온 그것은 매끈하면서도 동그란, 분명한 ‘알’의 형태를 띠었다. 생명은커녕 허허벌판의 황무지 같던 대지는 첫 이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해 사방에서 물과 공기와 양지 바른 토양을 끌고 왔다. 이를 내내 지켜보고 있던 하늘 또한 유성우로 가득 채워진 제 몸 위로 오로라를 얇게 걸쳐 입으며 비구름을 몰고 왔다. 


행복했던 ‘함께’도 잠시, 유성우의 축포가 사라짐과 동시에 서서히 서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 해와 달은 아쉬운 마음을 도닥이고 다음 약조를 기한다. 사랑의 결실과도 같은 알에서 새 생명이 부화할 땐 너나 할 것 없이 온 사랑을 다해 키워내기로. 올바른 용기, 순수한 사랑, 희망찬 기쁨 등의 순결한 마음으로 가득 차오른 새 생명이 성체가 되는 순간, 다시 한 번 이 곳에서 만나기로. 대지에서 태어난 생명이 하늘로 귀천(歸天)하는 순간,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지켜봐주기로. 


개기 일식이 끝난 지 수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알은 부화의 조짐을 보였다. 두툼했던 껍질이 갈라지고 삑삑 대는 새된 울음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 그 무렵 온천지가 쪼개지며 개벽이라 부를 만 한 것이 도래했는데 그 쩌렁쩌렁한 진동과 소음들은 마치 새 생명의 울음소리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것은 용()이었다. 정확히는 용의 새끼였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목청이 터져라 제 어미와 아비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비옥한 토지와 앙증맞은 시냇물과 뭇 초록 식물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빈 허물과도 같던 알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라곤 손톱 만 한 주홍빛 구슬-훗날, 용은 이를 가리켜 ‘여의주’라 불렀다-뿐이었다. 


구슬의 꽃을 피워라. 그 때가 와야 비로소 너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 기억하라. 그 꽃은 오직, 청렴한 마음을 통해서만 피어난다는 것을. 


억겁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천지가 온통 새 생명들로 발돋움할 무렵, 용에게 남은 믿음이라곤 가슴에 새겨진 격언과 여의주 안에서 겨우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연꽃뿐이었다. 


이야기는 용이 성체가 가까워지던 시기에서 출발한다. 오랜 세월 홀로 살아온 덕분에 저절로 술법을 익혀버린 용은 말을 하고, 제 이름을 지어보고, 두 발로 걷고, 손을 쓸 줄 알게 되고, 옷을 만들어 입고, 나아가 사람이란 종족과 엇비슷한 외견까지 취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 용에게 첫 눈에 반해버린 한 생명에서부터 비롯된다. 


범이라 불리는 족속들은 본디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범은 개 중에서도 유독 저 홀로의 방랑을 좋아해 무수한 숲과 개천을 정복자의 마음으로 개척하던 중에 용이라 불리는 기이한 존재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사람으로 둔갑한다 하긴 했으나 거죽 밑에 가려진 고귀함을 단숨에 간파해버린 범의 눈물겨운, 끈질긴 애정공세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불행히도,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범에 비해 용의 마음엔 흔한 미동조차 없었다. 범 대하길 들판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풀 보듯 대하고 범의 달콤한 속삭임을 새의 시끄러운 지저귐 정도로 여긴 것이다. 


하루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범이 허심탄회한 토로들을 솔직히 늘어놓았다. 당신의 마음을 흔들고 싶다, 어떻게 해야 나를 보아 주겠느냐, 단 한 번만이라도 이쪽을 봐주면 안 되겠냐는 그 간절한 바람 덕택일까. 긴 침묵 끝에 용은 입을 열었다. 


‘푸른.’


범은 눈을 끔벅였다.


‘푸르름이 갖고 싶습니다.’


용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닮은 저 푸르름을 선물해 오신다면 당신께 제 마음 한 조각을 기꺼이 내드리겠습니다.’


범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푸른, 이라니……. 하늘은 신의 것. 하늘의 색은 곧 신의 색. 너도 알고 있잖아. 온 천지를 뒤져도 하늘과 바다를 제외한 푸른 것은 절대 구할 수 없다는 걸. 차라리 적(赤)이나 녹(綠)을 달라 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구해다 줄게.’


용은 작게 웃었다. 


‘그래선 합당하지 않지요. 붉은 꽃, 녹음 진 수풀 같은 이 주변에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순수한 푸르름을 제게 안겨주십시오. 당신이 그리 해주시기만 한다면, 대가로 제 마음 한 조각을 내드리겠습니다.’


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의 마음과 푸르름. 푸르름과 용의 마음. 범에게 있어 보다 귀한 것을 고르라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범은 마음을 다잡았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푸르름을 찾아 길고 긴 여정을 떠났다. 


그 범이 여정을 떠난 지 십여 년. 봉우리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연꽃을 들뜬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용의 머릿속에서 범은 물론 그 존재마저 까맣게 잊히고 만 어느 날. 


‘와- 꼬리가 엄청 길어! 완전 신기해! 용님, 용님. 이거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그래도 되죠? 으하, 신난다!’


용의 둥지 바로 근처까지 놀러온 한 묘(卯)로 인해 결말이 정해져 있던 세 사람의 운명이 180도 뒤바뀌게 된다. 



* * *



“보쿠토씨. 지금 뭘 하고 계시는지 10자 이내로 설명해보시죠.”


팔짱을 낀 채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아카아시 덕에 화들짝 놀란 보쿠토가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른다.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큰 귀를 쫑긋 세운 채 좌우로 크게 돌리고 있던 보쿠토는 제 품에 안고 있던 것이 행여 들통 날까 마른침만 꼴깍 삼킨다. 땅바닥을 쿵쿵 내리치는 아카아시의 긴 꼬리가 그의 불쾌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지만 보쿠토라고 고집이 없진 않았던 것이다. 


“그……그게……! 요, 요, 요기 근처에 엄-청 때깔 고운 돌멩이 하나가 굴러 다니길래, 뭐냐, 그, 아카아시한테 선물 해주려고!”

“…….”

“여의주……랑 착, 각 하지 않았어! 색이 완전 비슷한데 그, 그거랑 전-혀 다르니까!”

“…….”

“저얼대로! 절대로 여의주 안에 핀 꽃이 보고 싶어서……몰래 보려고 한 게……아닙니다.”

“…….”

“…….”

“뭐해요. 더 말해보세요. 그래서요.”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요.”


그 순간 보쿠토의 눈알에 그렁그렁한 물 기운이 그득 맺힌다. 제 억울함을 호소하듯 혹은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듯 눈물 기 가득한 눈으로 아카아시를 올려다 본다.


“몰래 엿보려 해서 미안해. 거짓말 하려 해서 미안해. 잘못 했어. 그, 그거 훔치려 한 거 아니야……. 조금 있으면 꽃이 필 것 같아서. 그냥. 나는 그냥……! 흑, 흐에엥~”


결국 팡 터져버린 울음보로 인해 죄인이 된 기분이 드는 건 되려 아카아시였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 닦으랴 코에서 흐르는 콧물 닦으랴 하는 통에 그의 품에서 벗어난 여의주는 데굴데굴 굴러가 아카아시의 발치를 향한다. 갓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손톱 만 한 크기의 그것은 벌써 아카아시의 한 손으로도 다 쥐어지지 않을 만큼 꽤 크기가 커져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 고고한 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 있는 연꽃 또한 마찬가지로 말이다. 


“자자. 이제 뚝 그치세요. 여의주는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닭똥 같은 눈물이 흥건하게 쏟아진 탓에 토끼만의 조그만 손바닥이 도저히 눈물을 감당할 수 없게 않자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가뿐히 안아 든다. 손수 만든 옷의 소매를 들어 그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준다. 


“그치만……. 그치만 아카아시가 그랬잖아. 꽃이 피면 가야 한다고. 저 꽃이 피면 어디론가 가버린다 그때 분명 말했잖아.”


아이가 어미의 품속을 파고들 듯 그의 옷깃을 꼬옥 붙잡은 보쿠토가 서러우리만치 눈물을 토한다. 히끅거리는 울음소리와 들썩이는 어깨가 그의 슬픔을 대변한다. 


“나는 그게 너무 슬펐단 말이야. 거기 꼭 가야 해? 안 가면 안 돼? 여기 있자. 나랑 계속 여기서 살자. 가지 마. 가지 마, 아카아시. 내가 토끼풀이 잔뜩 나는 텃밭 찾았단 말이야. 꽃도 잔뜩 피었고, 새들도 많고, 물도 깨끗하고, 너무 예쁜데. 정말 아름다운 들판인데……. 아카아시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가야 해. 가지 마. 가지 말자, 응?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묵묵히 보쿠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회백색 머리칼 사이로 튀어 나온 큰 귀 한 쌍이 그의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린다. 아카아시는 무거운 한숨을 토한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만난 지 꼬박 여섯 달이 지난 참이었다. 제 발목 크기는 되었을까 걱정마저 들었던 아기 토끼는 여섯 달이 지난 지금, 아카아시의 무릎 언저리를 맴돌 만큼 훌쩍 자라나 있었다. 용이란 신분을 가진 자신과 여타 동물들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미처 체감하기도 전, 보쿠토는 틈만 났다 하면 아카아시 곁을 맴돌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처음엔 마냥 귀찮기만 하던 보쿠토가 언제쯤부터 ‘없으면 허전한’ 존재가 되었는지. 수 천 년의 시간동안 홀로 살아왔던 세월의 개수에 비하면 이 여섯 달은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훅 지나쳐 있을 찰나였건만. 그림자마냥 제 뒤를 졸졸 쫓아왔을 때, 선물이랍시고 독버섯을 파헤쳐 와 활짝 웃으며 흙 묻은 손으로 쥐어 주었을 때, 제 꼬리를 베개 삼아 낮잠을 청할 때, 뿔이 신기하다며 그것을 꼭 만져보고 싶다는 것을 핑계로 목마를 태워 달라 졸랐을 때, 오래 간만의 산책이라며 방방 뛰어 오르다 돌부리에 걸려 화려하게 자빠졌을 때, 엄마 아빠가 자주 하는 거라며 대뜸 제 뺨에 입술 도장을 남겼을 때, 당황한 나머지 보쿠토를 멀찍이 내던져 버렸을 때. 가만 생각해보면 추억이랄 게 없진 않았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동안의 추억보다 고작 반년이란 시간동안 보쿠토와 울고 웃은 기억이 깊게 남았을 뿐. 다만, 놀라운 속도로 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보쿠토에게 ‘작별’을 이해시키기란,


“안 갈 거지? 여기 있을 거지, 아카아시!”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 여기 누워 봐요. 보쿠토씨가 제일 좋아하는 무릎베개예요.”


사시사철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 솔솔 부는 바람결을 타고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빛이 스며든다. 울다 지친 보쿠토를 무릎에 뉘인 아카아시가 나무에 등을 기댄다. 훌쩍거림은 잦아 들었지만 여전히 보쿠토의 오동통한 뺨은 축축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보쿠토씨.”

“……응.”


목이 멘 보쿠토가 침울한 어조로 답한다. 


“보쿠토씨한테는 엄마 아빠가 있죠?”

“……응.”

“몇 번인가 저도 저번에 뵈었었죠. 참 귀여우신 분들이었어요.”

“가지 마.”

“저에게도 부모님이 있어요.”

“가지 마…….”

“보고 싶죠. 만나보고 싶죠. 그리고 불안하죠. 내 부모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이대로 괜찮은지. 저는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보쿠토는 입을 다문다. 이유 모를 울컥한 기분이 목울대 가까이 차올랐지만 가만히 듣기만 하기로 한다. 


“돌아가야죠.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죠. 정말 셀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을 혼자 기다려 왔어요. 전혀 외롭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겠죠. 주변엔 아무도 없고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조금만 마음을 내어주면 언제나 저보다 먼저 생을 끝내갔으니까요. 저는 관찰자예요. 내가 사랑했던 것들의 죽음을, 사랑하는 것들의 죽음을, 사랑할 것의 죽음을 그저 방관하는 수밖에 없죠.”

“…….”

“보쿠토씨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죠. 저처럼 오랜 시간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영원에 가까울 시간동안 저와 함께 동고동락하고 싶다고.”

“…….”

“불멸이란 의외로 잔인해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거든요. 기껏해야 조그만 흙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찰나의 시간을 가슴에 묻어 두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뿐.”

“…….”

“보쿠토씨께 그런 비운을 맛보게 할 순 없어요.”


아카아시는 덤덤한 얼굴로 말한다. 만남에 기뻐하고 이별에 슬퍼하는 그 정도의 감흥이 아닌, 모든 것에 통달한 얼굴로 타인의 삶과 죽음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엔 조금쯤 행복했을까요.”


그려질 듯 말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카아시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어느 새 울음을 그친 보쿠토가 호기심으로 그득한 눈망울을 깜박인다. 


“보쿠토씨를 만났으니까요.”

“……!”

“제게는 눈 깜짝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쿠토씨에겐 평생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 저로 가득했겠죠?”


처음엔 동그란 토끼 눈을 짓고 있던 보쿠토가 차츰 함박 웃어 보인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러곤 곧장 짤막한 팔을 뻗어 아카아시를 힘껏 끌어안는데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순간 아카아시의 뒤통수가 나무를 세게 들이 박는다. 아프단 소리가 나올 새도 없이 보쿠토는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한다. 


“아카아시가 없었으면! 나는 내가 아니었을 거야. 아카아시가 너무 좋아. 너무너무 좋아. 멀리 멀리 가버려도 나 잊으면 안 돼. 절대 잊으면 안 돼!”

“하하, 아파요 보쿠토씨. 그리고 안 잊어요. 절대로. 잊어다간 아주 잡아먹어 버리겠단 눈을 하고 있는 토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여기!”

“……말세네요 정말.”


그렇게 한참을 아카아시의 품속에서 부비적거리고 있던 보쿠토가 잊고 있던 사실을 생각해냈는지 고개를 번쩍 든다. 


“맞아!”


보쿠토가 저런 식으로 귀를 높이 쳐올릴 땐 호기심이 발동하거나 무언의 사고를 치기 직전이거나 장난할 거리가 생각 났을 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카아시는 불안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그를 불러본다. 


“왜요?”


보쿠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양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거리는 웃음을 흘린다.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내내 웃거나 배꼽 잡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슬슬 답답해진 아카아시가 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큰 귀를 붙들고 낮게 읊조리려던 찰나,


“오늘이 내 생일이야, 아카아시!”


생일? 


난생 처음 들어본 단어에 생소한 기분이 든 아카아시가 머릿속을 헤집으며 ‘생일’이란 단어의 어원이 뭔지 열심히 뒤지고 있을 무렵, 아카아시의 난감한 얼굴을 재빠르게 캐치한 보쿠토가 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태어난 날 말이야, 태어난 날. 오늘부로 나는 태어난 지 딱 1년 째 되는, 어엿한 성인 토끼란 말씀.”


태어난 날. 그 낯선 울림에 잠시 말문을 잃었던 아카아시가 이제야 알겠단 얼굴로 답한다. 


“아하, 자신이 태어난 날은 매해 돌아오니까 그걸 기념해서 생일이라 하는군요. 처음 알았어요.”


보쿠토가 턱을 갸웃거린다.


“엣……. 그럼 아카아시는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 몰라?”

“언제 태어났는지 조차 까마득한데 생일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제 입장에선 생일을 기억하는 보쿠토씨가 더 신기한 걸요.”


잠시 둥그런 턱에 손바닥을 받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보쿠토가 이내 눈을 반짝인다. 


“오늘을 우리의 생일이라 하면 되겠다!”

“……예?”

“아카아시는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이 생일이잖아. 그럼 이제부턴 오늘이 우리 둘의 생일인 거야. 매년 우리가 태어난 오늘을 기념하는 거지! 와아! 생일 축하해 보쿠토! 생일 축하해 아카아시!”

“어째서 항상 자기 멋대로 인겁니까, 당신이란 사람은.”


어쩐지 자축 세레모니가 되어버린 한 가운데, 아카아시가 이마를 짚는다. 그런 아카아시의 반응에 일순 기가 죽어버린 보쿠토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카아시는……오늘이 생일인 게 싫어?”


아카아시는 그저, 보쿠토가 당연한 것을 물을 때마다 난감했을 뿐.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저으며 보쿠토를 고운 잔디밭 위로 내려둔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다란 몸을 엎드리고 양 손등 위로 턱을 괸다.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 좋아요. 기념이라면 그럴 듯한 선물이 있어야 겠네요. 선물로는 뭐가 좋겠어요? 아, 보쿠토씨 여의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저거 선물로 드릴까요?”


마치 안부 인사 건네듯 여의주를 선뜻 선물로 주겠단 아카아시로 인해 보쿠토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에, 엑? 저거 중요한 거 아니었어? 저걸 줘도 돼?”

“그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아니……. 근데……. 뭐랄까. 내가 받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저건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청렴한 마음가짐으로 있었는지 대한 척도에 불과해요. 귀천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턴 무거운 짐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도…….”


자꾸만 말꼬리를 흐리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보쿠토로 인해 아카아시가 양 손을 쫙 펼친다. 보쿠토의 양 뺨을 잡아채듯 강하게 내리치며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제 곁에 있던 물건이에요. 수 천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 어떤 것도, 저것만큼 제 곁을 오래 머물지 못했어요.”

“…….”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

“제 삶이었던 것, 그 자체를 당신께 선물하고 싶단 뜻이에요.”


그 마지막 말에 보쿠토는 이뤄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만다. 영겁에 가까웠던 시간들을 제게 선물하고 싶단 말의 뜻이 무엇을 내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보쿠토였기에, 그의 입장에선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카아시는 한창 토끼풀밭을 굴러다니던 여의주를 집어 보쿠토에게 안겨준다. 


“저만큼 오래 산 녀석이에요. 불로장생까진 아니더라도, 곁에 두는 것 자체만으로 수명이 배로는 늘어날 걸요.”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다음 생일까지는 함께 챙기고 갈 수 있을까. 


여의주 안, 하나둘 벌어지기 시작한 연꽃의 꽃잎을 빤히 들여다보며 속으로 남은 햇수를 가늠하기 시작한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에게선 확고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건 싫어!”


네? 라고 아카아시가 반문할 여지도 주지 않는다. 


“아카아시 가고 나면 혼자 남겨질 텐데. 외로워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더 살라고? 그런 거 싫어. 아카아시 없는 삶은 훨씬 짧았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안 받을래, 그 선물.”

“제가 싫다면요.”

“…….”

“내가. 당신이 죽지 않고 오래 살길 바란다면요.”

“…….”

“그래도 안 받으실 겁니까?”


아카아시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그럼에도 보쿠토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올곧은 황금색 눈이 제 신념을 또렷하게 빛내고 있다. 


“그래도 아냐.”

“…….”

“사실은 붙잡고 싶어. 가지 말라고 떼쓰고 싶어. 어리광 피우고 싶어. 근데……. 알아. 아카아시는 그래도 갈 거잖아. 가야하는 거잖아. 많이 기다려왔으니까. 나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달라 하는 건 결국 내 욕심에 지나지 않잖아.”

“…….”

“아카아시는 벌써 수 천 년 동안 나를 기다려 줬잖아? 아 물론 나만을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그치만! 그 오랜 시간 끝에 결국 나를 만났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아카아시를 기다릴래. 네가 없어져 버린 이 생에서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야. 분명 다음이 있을 테니까. 다시 태어나서 다음 생의 아카아시를 찾을 거야. 나에겐……. 분명 그게 더 행복한 일 일거야.”


그 말을 끝으로. 보쿠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이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강렬한 바람은 풀밭을 가득 채우고 있던 꽃잎과 풀잎을 허공으로 날아 올렸다. 코끝에 희미한 피비린내가 나는 것도 잠시, 아카아시의 뺨 위로 섬뜩한 액체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사방에 튄 검붉은 것이 무엇인지 머리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아카아시는 제 눈앞에서 섬뜩하게 빛나고 있는 송곳니부터 또렷하게 인식하고 말았다. 날이 시퍼런 송곳니를 타고 비 오듯 흘러내리는 끈적한 액체 류는 누가 보아도 선연한 핏방울이었다. 그리고 그 송곳니가 꿰뚫고 지나간 자리엔,


“보쿠토씨?”


시체처럼 축 늘어진 살덩어리가 물려 있었다. 


“……너한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하다못해 눈길 한 번이라도 내 쪽을 향하길 바란 것뿐인데.”


벌벌 떨리는 눈이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 그에게 선명히 보이는 것이라곤 시퍼런 송곳니에 물려 찍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토끼 한 마리와


“내 기다림의 대가란 게 겨우 이런 거였니.”


핏물로 시뻘겋게 물든 풀밭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생전 처음 보는 푸른 나비의 날개 죽지, 


“대답해, 아카아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격화, 울분, 슬픔, 증오의 감정들뿐이었다.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관람 차는 느리다. 풍경은 느긋하게 바뀌어 간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정지 화면마냥 유리창을 가득 채운다. 손톱 만 한 틈새로 고개를 빼꼼 내민 실바람은 두 사람의 뺨을 스쳐 지난다.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사이였잖아요, 우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재차 찾아온 침묵 앞이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의 전혀 다른 지향 점을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침묵 안에서 그들은 이전처럼 서로를 어색해 하진 않았다. 여태껏 자신들이 내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짐들을 조금 털어내서 그랬을까. 그 가뿐한 기분이 온화한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아카아시는 소리 없는 실소를 터뜨린다. 웃음이 나오려는 입을 손등으로 가까스로 막아 본다. 눈앞의 보쿠토만을 신경 쓰며 전전긍긍하기 바빴던 제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언뜻 사나워 보일 수 있는 무표정 아래 감춰진 멍청함. 그렇게 마냥 단순한 것 같다가도 의외로 폐부를 찌를 줄 아는 사람. 한없이 진지하다가도 이상한 곳에서 승부 근성을 내비치는 사람. 팔랑 귀처럼 보이다가도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관이 누구보다 또렷한 사람. 즉, 이상한 사람. 


평생을 걸쳐 이해하기 힘들 사람일 것이라며 아카아시는 무심결에 단정 내리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어찌 됐든 그런 사람이 제 연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한다 속삭여주고 달콤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고 함박 웃어주고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비록 서로 나아가야할 길은 극명하게 다를 지라도, 최종 목적지를 향해 오롯이 눈을 빛내는 이 사람이 조금은 사랑스러워 졌다고. 가짜 연인이란 타이틀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순간, 모든 허물을 벗고 사람 대 사람으로 이 사람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이 사람과 ‘친구’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고. 첫 눈에 마냥 해괴하게 보였던 헤어스타일이 조금쯤은 멋있어 진 것 같다고.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려웠던 이 사람의 행동거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그리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작게 웃고 만다.


“아……?”


지금, 웃은 거야?


곁눈질로만 아카아시를 힐끗 훔쳐보고 있던 보쿠토가 사뭇 놀란 티를 낸다. 그가 기억하는 아카아시는 언제나 무표정이거나 조금 화난 표정이거나 화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었나, 턱을 갸웃거리며 지난날을 더듬어보지만 결국 보쿠토의 머릿속에서 인상 깊게 남았던 건 


‘아카아시는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


정도의 문장이었다. 


“왜, 왜요?”


잔잔한 호숫가 위에 자그마한 돌멩이가 물결을 일렁이게 한 것처럼. 부드러운 거품으로 가득 채워진 카푸치노의 첫 한 모금처럼. 민들레 위에 앉은 나비가 날갯짓을 잠시 멈췄다 눈 깜짝할 새 날아간 것처럼. 


“어……. 아니. 아니야. 아무 것도.”

“뭡니까. 사람 무안하게.”


지나가는 찰나, 그가 짧게 지어 올린 미소가 보쿠토의 가슴께를 콩콩 두드린다. 열이 화끈 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 뱉고 본다. 


“그, 그! 웃, 웃, 웃으니까 보기, 보기 좋다고. 어. 어! 완전 좋아. 야 사람이 좀 웃고 살지 그러냐!”


이 말을 하려 한 게 아닌데!


보쿠토가 양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고. 그, 너 웃는 게……. 웃으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잖냐…….”


이 방정맞은 입을 당장이라도 꿰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한 편, 당최 의중을 모르겠는 보쿠토의 혼잣말에 아카아시가 이내 혀를 내두른다. 이제는 면역이라도 된 모양인 듯하다. 얼마 전 같았으면 바로 꼬투리부터 잡고 늘어졌을 테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가만 보고 있으면 혼자 콩트를 하는 사람마냥 우습기도 우스웠으니 말이다. 


“웃는 게 잘 어울린다, 그 말이 하고 싶으셨나 봐요.”


보쿠토가 눈을 질끈 감는다. 


‘웃으니까 훨씬 낫네.’


그 순간 왜 솔직해지지 못한 건지. 그냥 말해 버리면 그만 인 것을, 왜 어렵게 빙빙 돌려 말했는지. 왜 아카아시로 하여금 말뜻을 유추하게 부추기고 말았는지. 그와 십 년 가까이 함께한 쿠로오마저 너는 돌려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틈만 났다 하면 꾸짖음을 당하던 보쿠토였기에. 그는 자신의 이상 기류를 이해하고 납득할 겨를이 없었다. 


“고마워요.”


얼마만의 내뱉는 진심일까.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표정 관리에 힘쓰지 않고, 제 솔직한 기분을 언어화 해본 것은. 


애초에 계약 연애가 아니더라도, 아카아시에겐 제 마음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친부를 일찍 여읜 이후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 제게 눈길도 주지 않던 친모를 위해 그는 언제까지나 착한 아들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의무든 의무가 아니든 그녀의 곁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제가 짊어진 평생의 업보인 것 마냥 당연시 여겼다. 돈 벌이에 혹사시키는 몸과 달리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녹여내기 위해서라면 아카아시는 언제 어디서든 가면을 쓰고 있어야 했다. 친모 앞에서 착하고 성실한 아들로 보여야만 했고 거액의 빚을 뒤집어 쓴 자신들을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구더기마냥 보는 친지들에겐 예의 바른 아이로 보였어야 했으며 고액의 수당을 준다 해놓고 월급은 물론 야근 수당마저 떼먹은 채 제 때 급여를 챙겨 주지 않던 공장장에겐 똑똑하지 못한 척하는 을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더욱, 사람 관계에 있어 확실한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결코 타인을 진심으로 좋아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아카아시는 몸소 배워 왔던 것이다. 이제 와서 계약 연애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어 봤자 그의 입장에선 써야할 가면 하나가 늘어났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설마 ‘거짓’이란 이름 아래 ‘진실’을 토로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이것만은 진심이에요.”


초승달을 연상케 하는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이 오롯하게 보쿠토를 향한다. 무방비했던 가슴이 일순 덜컥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다. 다급히 시선 돌릴 곳을 찾아 해맨 동공이 무릎 위에 얹어 두었던 휴대폰을 향한다. 라인의 새 알림으로 가득 찬 화면에 또다시 놀라 손아귀에서 통신 기기를 놓칠 뻔 한다.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는 휴대폰을 잡기 위해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꼴이 우스웠는지 아카아시는 토끼 눈을 하다말고 순수한 웃음꽃을 만개시킨다. 


“뭐, 뭐야. 웃지 마! 웃지 말라고!”

“푸흐, 미안해요. 근데 그게……. 방금 전 보쿠토씨 표정이랑 몸짓이 너무 웃겨서, 아하하하.”

“아 진짜!”


그런 아카아시로 인해 못내 부끄러워진 보쿠토는 제 손바닥 만 한 통신 기기로 홧홧해진 안면을 가려본다. 그러다 새 알림을 띄우는 화면을 향해 저절로 눈길을 돌린다. 언제 부끄러움을 탔냐는 듯 멀쩡해진 얼굴로 타자를 친다. 간간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인다. 금세 제게서 관심을 돌려버린 보쿠토에게 못내 섭섭함을 느꼈는지 아카아시의 고운 눈썹 한쪽이 비뚜름하게 치켜 올라간다. 


“우리들 말이에요.”


응? 엄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화면을 터치하고 있던 보쿠토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최고 높이를 지나 느릿느릿 지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관람 차 밖을 멍하니 응시해본다. 순수했던 진심에서 작별해야 할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저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친구, 로 남을 수 있을까요.’


아카아시는 차마 꺼내지 못한 뒷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킨다. 관람 차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놀이 기구 근방에 모인 인파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타기 전보다 훨씬 늘어난 인구수에 자조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 올린다.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가끔씩 안부인사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와 있는 것이 즐겁다. ‘함께’란 것이 이토록 즐겁다는 걸 내내 잊고 지낸 기분이었다. 겉포장이 어떻든 주위의 시선이 어떻든 오늘처럼 자신의 기분에 대해 솔직해질 수 있는 날이 있었다. 짐을 덜어 놓을 수 있는 때가 있었다. 속 편히 웃을 수 있었다. 그 솔직한 미소가 제게 어울린다 하였다. 


어쩌면 우연을 가장해 찾아온 최고의 인연이 그 일지도 모른다고, 


“아, 쿠로오한테 못 들었어?”


아카아시는 제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계약이 끝난 순간부터 우리는 결별했단 설정이야.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해관계나 각자의 사정이 안 맞아서 결국 헤어졌다는 거지.”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보지 않고 말한다. 


“뭐, 노이즈 마케팅 덕택에 유명해질 건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판이 너무 커져서 말이야. 이 정도로 업계를 뒤집어 놨는데 계약이 끝난 이후에도 나 때문에 문제 생기면 너도 좀 그럴 거 아니야. 자칫하다간 우리가 숨기고 있었던 게 다 들통 나는 최악의 상황도 올 수 있고.”


이별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보쿠토의 대답으로 인해 


“계약만 끝나면 지금 갖고 있는 네 개인 정보들 다 삭제할 거야. 언론사에도 돈 찔러 둬야지. 너한테 불똥 안 튀기게.”


아카아시는 문득 목이 멘다. 


“아마 그 이후에 지금처럼 우리가 서로 얼굴 맞대고 있을 일은……없지 않겠어?”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린 제 머리통이 멍청하게만 느껴진다. 


“무엇보다, 나는 네 연락처도 모르는 걸.”


선이 그어진다. 보이지 않는 선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고.”


목울대 아래에서 들끓는 무언가가 아카아시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게 한다. 뒤통수를 가격 당한다. 일말의 기대감으로 희망차 있던 기분을 구렁텅이 밑으로 집어 던진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마비되어 가는 사고회로를 가까스로 붙들어 매며 이 끔찍한 시나리오의 끝을 더듬거려 본다. 덜덜 떨리려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는다. 


“잠…시만요.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잘 사귀고 있다가 갑자기 헤어졌다 발표하면 분명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 이유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 떨림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애초에 이건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이기도 하니까. 처음부터 결말 같은 건 정해져 있었거든.”


제 낯빛이 창백하게 굳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아카아시는 쉴 틈 없이 입을 움직인다. 


“하지만, 하지만 좀……. 결별 발표는 그러니까……. 남자랑 사귀다가 헤어졌다는 뜻이잖아요.”

“응. 그런데?”


당황한 탓에 말이 점점 급해지는 아카아시와 달리 잠시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보쿠토가 덤덤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럴수록 혼란에 빠지는 건 오히려 아카아시 쪽이다. 


“어떻게 보면 저 때문에 무리하게…커밍아웃 하신 거잖아요. 이걸로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보쿠토씨는 사실 그 쪽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다음 연애를 위해서라도 좀더. 좀더…….”


다음 연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카아시의 가슴 한 켠이 저릿하게 아파오기 시작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초점이 눈앞을 흐린다. 보쿠토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모르는 여성과 함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모르고 지나칠 만 한 사소한 것에 서로가 서로를 닮은 함박웃음을 지어 올린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놓치지 않게끔 깍지마저 끼어 본다. 관계를 증명하는 은반지가 각자의 약지에서 빛나고, 사랑이란 순수한 감정에 벅차올라 이따금씩 대로변 한 가운데서 멈춰 서고, 서로에게 사랑스러운 눈을 빛내다 결국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몇 바퀴씩이나 빙글빙글 돌아 버리고, 이내 입을 맞추고, 서로의 귓가에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사랑한다 속삭인다. 또한, 그 마음엔 일말의 거짓조차 없다. 그럼에도 아무도 두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되려 그 사랑에 축복을 가미한다. 


꼭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다정한 둘의 모습이 그려지자 아카아시는 순간적으로 제 손으로 왼 눈을 가린다. 한 쪽 눈두덩이 시큰거리고 코끝이 알싸해졌기 때문이다. 그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쿠토의 곁을 지키는 모습을 상상했을 뿐인데 눈물까지 핑 고여 버린 스스로에게, 아카아시는 짐짓 놀래하고 있었다. 다만,


“풉, 나 지금 우리 케이지한테 걱정 받은 거야?”


보쿠토는 코웃음을 치고 있을 뿐이다. 히죽 웃고 있는 입과 달리 그의 눈은 웃음기 하나 없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걱정도 팔자네.”

“…….”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해.”

“…….”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오히려 너라고.”

“…….”

“게이라고 낙인 찍혀서 여자들한테 바람 맞고 엉엉 울면서 우리 탓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간수 똑바로 해.”

“…….”

“우린 계약이 끝나는 순간부터 너와 관련된 모든 걸 삭제시킬 예정인데 정작 네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

“…….”

“내 말 뜻 알아먹겠어? 이미지 관리 철저히 하란 뜻이야.”


아카아시는 말을 잃는다. 뭔가를 말하기 위해 벌어졌던 입은 내뱉을 단어가 사라진 탓에 느리게 뻐끔 거리기만 한다. 산탄총으로 전신을 꿰뚫리는 기분이 이런 걸까, 백짓장으로 변모해 가는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오른 생각 한 줄이 억장을 무너뜨린다. 


“게다가, 내 연애사가 너랑 관계있을 이유가 없잖아.”


총구에서 마지막으로 발사된 총알은 


“내가 너를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낸다. 


“너도 나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카아시 혼자의 힘으로 도저히 메꿀 수 없는 그 구멍은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간단히 끝맺음 할 수 있는 거지.”


단순히 그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래서 나는 내 위장 연애 상대로 널 택한 거야.”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영화나 방송 쪽 관계자면 나중 일이 귀찮아 질 수 있으니까. 상대가 일반인이어야 사람들 눈에서도 빨리 잊힐 테고.”


눈물조차 멎은 눈이 초점 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귓가에 꺅꺅 거리는 환호성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한다. 어느 새 지상에 코앞까지 가까워진 관람 차는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 무리를 선명하게 비춘다.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귀로 캐치한 보쿠토는 환한 웃음을 뒤집어쓴다. 무표정에 가까웠던 얼굴은 온데 간데 사라져 있었다. 


그것이 꼭 생전 처음 보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져 아카아시는 좀처럼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 * *



“다들 잔은 채우셨죠?”


시끌벅적했던 이자카야 내부가 한 사람의 외침으로 돌연 조용해진다. 잔이 채워져 있음을 증빙하는 맥주잔들이 곳곳에서 소리 없이 허공을 오른다. 


“그럼, 영화 <불온한 피>의 대히트를 기념하며! 건배!”


시원시원한 건배사를 외치며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사람은 조감독 ‘마츠모토 료’로, 이번 영화를 제작하며 마음고생을 가장 많이 한 장본인이었다. 


2퍼센트 부족한 영화 시나리오였건만 최고급 배우들로 선정해 오라는 감독의 고집 때문에 조감독이란 커리어에 맞지 않게 섭외에서부터 배우들 설득까지 오롯이 저 혼자의 몫으로 해냈기 때문이다. 차라리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일까. 겨우 감독 눈에 들 만 한 배우들을 섭외했다 싶었더니 촬영 막바지엔 조연으로 참여하고 있던 배우의 스캔들이 터져 버린 것이었다. 단순한 열애 소식이나 아예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었으면 오히려 잘 됐다고 해당 배우에게 의미 없는 칭찬을 했을 지도 모른다. 의미가 있든 없든 영화 홍보 마케팅의 일환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태는 스캔들이 터진 직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커져 나갔다. 그것이 단순한 스캔들도 아닌, 커밍아웃 스캔들이란 어마 무시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딴 배우를 캐스팅 해왔냐며 노발대발한 감독 뒷바라지 하랴, 영화 자금 원조 및 투자를 당장 중단하겠다는 투자자들의 일방적인 통보에 대응하랴, 최악의 경우엔 영화 제작 자체가 무산 될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해당 배우 매니저와 소속사에게 고소 절차를 밟겠노라 연락 넣으랴, 본디 스트레스가 끝을 보이기 마련인 촬영 막바지까지 가서도 혼이 쏙 빠질 만큼 바빴던 것이다. 


이렇듯 극한을 뛰어넘는 스트레스가 몇 날 몇 일이고 지속되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마츠모토의 전신을 지배할 무렵, ‘전화위복’이란 사자성어는 예기치 않게 그를 찾아왔다. 사람들의 흥분으로 가득 찬 문의 전화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폭주했으며 임시로 개장해둔 영화 공식 SNS는 폭탄처럼 밀려드는 문의로 서버가 급격히 다운되기도 했고 언론사는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 떼들처럼 물 밀 듯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VIP 시사회 예매 일엔 사이트가 마비되었으니 반신반의의 호기심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노이즈 마케팅의 얼마나 대단한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던 차. 시사회 직후 관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영화의 흥행성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개봉 당일 1일차 관객 수 및 평점이 영화계 신기록을 매 순간 돌파하기는 물론 오스카 영화제 수상작에 노미네이트 될 만 하단 평론가들의 호평이 줄지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영화는 성황리에 개봉을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일본 내, 나아가 세계적인 스케일로 신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었다. 그 덕분에 독보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주연 배우들 뿐만 아닌, 단순히 조연으로 출연했던 배우 ‘보쿠토 코타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영화 및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을 당시의 영상들이나 그의 인품, 연기력을 언급하는 이야깃거리가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보쿠토 코타로’란 이름이 ‘탑배우’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정작 그 발화점이 되게끔 해준 장본인은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오오, 이번 영화에 획을 그은 주인공들이 바로 저기 있었네~?”


빈 맥주잔을 높이 치켜 든 채 비틀비틀 걸어 다니던 마츠모토가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맥주를 홀짝이던 보쿠토와 아카아시를 발견한다. 저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마츠모토로 인해 보쿠토가 눈살을 찌푸리며 옆에 앉은 아카아시에게 물러서란 손짓을 건넨다. 


“이야, 많이 취하셨네요 마츠모토씨.”


맨 정신엔 일처리가 똑 부러진 사람이었으나 술만 들어갔다 하면 고삐 풀린 고주망태가 되는 사람이 바로 마츠모토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보쿠토였기에, 제 나름대로 아카아시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생맥주 700cc 한잔에 초점을 잃은 마츠모토도 마츠모토였지만 보쿠토는 그의 생각 없는 취중 언사로 인해 아카아시가 어떤 모욕을 들게 될지 몰라 내심 조마조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풀린 동공으로 아카아시를 훑어보는 마츠모토를 막아서려 보쿠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보쿠토군~ 지금 애인이라고 감싸고 도는 거야? 나도 네 그 잘난 애인님 얼굴 좀 보자고~”


많이 취하셨네요, 그의 어깨를 부축하는 척하고 반대편으로 방향을 돌리려 하자 다짜고짜 보쿠토의 손길을 쳐낸 마츠모토가 혀 꼬인 발음으로 외친다. 


“야 나 안 취했거든. 안 취했다고! 니 애인 아카아신지 아카시안지 뭔지 좀 보자니까 왜 그러냐? 싫어? 본다고 얼굴 닳는 것도 아닌데~”


평소 같았으면 꼬박꼬박 예의를 갖춰 말했을 마츠모토였지만 알코올이 들어간 그를 뜯어 말릴 수 있는 방도는 좀처럼 없을 것 같았다. 보쿠토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아카아시를 빼낼 구실을 생각해내는 동안 조금 전까지 보쿠토가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갖다 붙인 마츠모토는 아카아시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는다. 척 보기에도 불쾌하단 낯짝을 하고 있던 아카아시가 어떻게든 그와 거리를 두려 했음에도 말이다. 


“아 뭐야. 아카아시 잔 비었잖아. 이 멋쟁이 형이 따라줄까? 아님 형이랑 커플 샷?”

“…괜찮습니다.”

“빼지 말고~ 받아, 받아.”


아카아시가 도와달란 간절한 눈빛을 보쿠토에게로 돌리며 울며 겨자 먹기 신세로 빈 맥주잔을 마츠모토에게 내민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큰 한숨을 내쉰 보쿠토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어……. 가까이서 보니까. 너 좀, 예쁘장하게 생겼다?”


게슴츠레 눈을 뜬 마츠모토가 아카아시의 선이 고운 옆얼굴을 훑고 있었다. 제 몸을 바짝 밀착 시킨 채 투박한 손으로 아카아시의 허벅지를 쓴다. 순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감각에 휩싸여 팔뚝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쟤가 잘해 주니? 밤일도 잘해? 아니 뭐, 내 말은……. 니네 둘 다 남자 잖냐. 그럼……거기로 하는 거야? 안 아파?”


아카아시의 귓전에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지만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한다. 


“하하, 그래도 너 정도 비주얼이면 할 맛은 나겠다. 저 새끼 못 하면 이 형한테 연락해. 테크닉 하나는 자신 있거든.”


생전 처음 듣는 성희롱적인 발언에 아카아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그 확연히 드러난 표정 변화 덕에 보쿠토 또한 얼굴이 굳긴 매한가지.


“아주……앉아 있지도 못하게 해줄게.”


아카아시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과 보쿠토가 마츠모토의 팔을 낚아채 그를 강제로 자리에서 일어서게끔 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동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비정기적 연재 (내킬 때, 뽕 찰 때, 원고 탈주하고 싶을 때 이어 씁니다)

*꼭 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엠프렉 소재








W. 멜




“잇세이.”


식탁 의자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있던 토오루가 말꼬리를 늘린다. 그의 앞에는 벌써 네 개 째 비워진 푸딩의 포장 용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려 특대 사이즈나 되는 그것들을 네 개나 비운 후에야 배가 불렀는지 일회용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던 토오루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다. 


“나 살 쪘어?”


이유라 함은 그것이었다. 


“빠빠, 빠빠 뿌우딩.”


이번 달 들어 벌써 생후 21개월 차가 된 아카네는 어느 덧 단어와 단어를 이어 붙여 어눌하게나마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카네의 입가 주변에 잔뜩 묻은 푸딩의 흔적을 턱받이로 닦아 내던 잇세이는 토오루의 투정 어린 질문에 잠시 곁눈질만 한다. 


“……그닥?”


대답하기 앞서 미묘한 공백이 길어지자 토오루의 눈썹이 보기 좋게 찡그려진다. 


“왜 망설여? 왜 의문형이야? 진짜 찐 거야? 그래 보여?!”

“아니……. 좋아. 지금이 딱 보기 좋다고.”

“……나 놀리는 거지. 쪘으면 쪘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보기 좋다니까?”

“그거나, 그거나! 결국은 살이 올랐단 소리잖아!”


저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진 토오루는 내친 김에 식탁을 작게 내리치며 자세를 바로 한다. 집에선 언제나 헐렁한 티셔츠와 품 넓은 청바지를 애용하는 토오루였지만 요 두 달 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그의 식욕을 막을 방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임신 3개월 무렵 극심한 입덧에 시달리던 토오루는 드레싱 없는 샐러드, 말린 오징어, 복숭아를 제외한 음식엔 입도 대지 못했다. 심지어 그 흔한 물조차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해대기 일쑤니 잇세이 입장에선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때 아닌 겨울철 딸기가 먹고 싶다거나 홋카이도 기념품인 초콜릿 쿠키가 먹고 싶다거나 오사카 3대 명물 맛집 출신의 타코야끼가 먹고 싶다며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면 차라리 좋았을 일이다. 밤새 헛구역질에 시달리곤 먹은 것이 없어 신물만 토해내는 구토는 지난 두 달 간 잇세이를 뜬 눈으로 지새게 만들었다. 토오루 머리맡에 대야를 준비해 두지 않는 이상 다음 날 아침 무렵엔 침대 시트가 토사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역한 기운은 계속 올라오는 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없으니 최후엔 제 손가락들을 목구멍 너머로 욱여넣으며 구토를 유도하려는 토오루를 목격한 순간, 잇세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해치려 들지 말라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아픈 게 낫다고, 왜 네가 이토록 힘들어야 하냐고, 토오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잇세이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게 3개월 차 였다. 


막상 힘들었던 입덧 기간이 지나자 토오루는 그간 입덧으로 인해 먹지 못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해치우기 시작했다. 흡사 걸신들린 사람마냥 말이다. 임신 중 유독 복숭아를 많이 찾아 냉장실 한 칸을 가득 채워 두었던 복숭아는 사흘이면 사라지기 일쑤고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사이 간식 때를 어찌나 칼같이 잘 맞추는지. 입에 뭔가를 물고 있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처럼 빛깔 좋은 입술은 쉴 틈 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왜, 얼마 전에 이와쨩이랑 맛키랑 아카네 보러 놀러 왔잖아.”

“잠깐만. 나 시간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이따 들으면 안 될까?”


벽에 걸린 시계를 통해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실히 체감한 잇세이가 급한 대로 버터 바른 토스트를 입에 문다. 


“하? 내 말은 듣기 싫단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자, 아카네. 다 먹은 접시랑 포크, 숟가락은 아빠 줘야지요.”

“쩝시! 뽀끄! 수까락! 빠빠 쭤야지이요.”

“응응. 줘야지.”


목적 없이 허공을 휘두르던 아카네의 미키 마우스 무늬의 접시, 포크, 숟가락을 조심히 빼들어 싱크대에 옮겨 둔다. 


“잇세이!!”


앙칼진 토오루의 부름은 외면한 채 말이다. 토스트의 절반가량을 한 번에 입에 넣는 바람에 목이 막힌 잇세이가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조그만 팩 우유의 포장을 뜯어 벌컥 벌컥 들이킨다. 


“그래, 그래. 들어줄게. 그때 나 출장 가고 없었잖아. 걔네가 나대신 보러 와준 거 아니었던가?”


한 시름 놨단 얼굴을 한 뒤 넥타이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토오루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흥!”


실컷 토라진 토오루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부풀린 뒤였다. 시간은 없지만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잇세이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잘못은 어디까지나 잇세이의 몫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작게 어깨를 으쓱인 잇세이가 빠르게 토오루의 뒤편으로 돌아간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뽀오얀 빛을 띤 목덜미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다. 셋팅이 안 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티셔츠 아래로 슬금슬금 손이 미끄러진다. 살집이 오동통하게 오른 가슴 골 사이를 지나친다. 


“예뻐 죽겠어 우리 토오루.”

“뭐, 뭐, 뭐하는 거야. 아카네가 다 보고 있잖아. 손 빼!”


두 아빠들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빤히 지켜보던 아카네가 잇세이의 윙크 한 번에 고사리 만 한 손바닥으로 제 눈두덩을 가린다. 역시 아이의 습득력은 남다르다고, 하룻밤 내내 가르친 보람이 있다며 잇세이가 속으로 씩 웃는다. 반면,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잇세이!”


화들짝 놀란 토오루는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안 보인다. 


“토오루의 귀여운 짓은 나만 독점하고 싶으니까.”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제 아빠들의 사랑 표현을 귀로만 감상하던 아카네가 이내 방긋 웃어 버린다. 까르르 터지는 해맑은 웃음소리에 맞춰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잇세이의 손에는 다정함이 한가득 이다. 어느 덧 가슴께를 지나 배꼽 근처에 머물던 손가락은 주위를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그 안에 자리하고 있을 새 생명에게 조심스레 안부 인사를 건넨다. 


“이 쯤…에 있으려나,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는.”

“모모쨩이 언제부터 아가씨로 정해진 거야?”

“뭔가……. 그런 느낌이 나. 아빠의 감.”

“모모쨩 다 들었지? 이제 꼬추 달고 태어나면 잇세이 아빠 얼굴에 먹칠할 수 있는 거야.”

“모모, 토오루 아빠 좀 그만 괴롭혀. 토오루 아빠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거든.”

“애 다 듣는다니까?!”


다만, 이 다정한 손길에 비하면 잇세이의 입과 혀는 배려가 전혀 없다. 버럭 소리치는 토오루의 귓바퀴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고 그 귓전 가까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낮게 읊조리며 혀로 끊임없이 농간하는 탓이었다. 어느 새 목덜미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른 토오루의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진다. 흡사 잇세이에게 순순히 목덜미를 내주는 순결한 어린 양처럼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자기. 이제 화 풀어라, 응?”


마지막으로 오동통한 살점이 부푼 아랫배를 가볍게 문지른 후 뺨에 뽀뽀를 남긴 잇세이가 선언하듯 말한다.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손길과 녹을 것 같이 달콤하던 입술의 감촉이 멀어지자 못내 아쉬웠는지 토오루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몰라. 회사가 그렇게나 좋으면 얼른 가버리던지.”


그런 토오루의 어깨를 잡아 끌어 잇세이가 다시금 입을 맞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정말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 말에 아침 새벽부터 죄인이 되는 건 


“오전에 거래처랑 정말 중요한 미팅 있거든. 얘기는 나중에 들어줄게. 미안.”


결국 토오루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잇세이 곁으로 다가간 토오루는 식탁 의자에 아무렇게나 놓인 정장 자켓을 집어 든다. 한창 연애하기 바빴던 고등학교 시절엔 교복이 안 어울린다며 시도 때도 없이 놀리곤 했건만 정작 옷걸이의 주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정장 한 벌 걸쳤을 뿐인데 사회인은 물론 한 회사의 CEO 쯤 되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잇세이 덕에 토오루는 매일 아침, 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며 펄떡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곤 했다. 마지막으로 약간 헝클어진 넥타이를 예쁘게 동여맨 토오루가 넥타이의 끝을 확 잡아당긴다. 얼떨결에 토오루 쪽으로 끌려간 잇세이의 입술 위로 말랑한 감촉이 와 닿는다. 


“……최대한 빨리 와. 끝나자마자 달려 와. 정시 퇴근에서 1초라도 늦어지면 용서 안 해. 회식 잡혔으면 딱 1차만. 2차까지 가는 순간 그 날로 별거 할 줄 알아. 부장인지 사장인지 면전에 욕하고 바로 뛰쳐나와.”


이제는 퇴근조차 자유롭지 못한 잇세이였지만 어째 그의 입에선 미소가 도통 떠나가질 않는다.


“그랬다간 우리 밥줄 끊겨.”

“내가 벌면 돼. 잇세이는 집에서 아카네 보고 있어.”

“홀몸도 아니면서? 됐다. 차라리 내가 공사판을 가고 말지.”

“그러다 잇세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보험금은 그럭저럭 나올 거야.”

“잇세이!”


푸핫, 자신의 농담조에 일일이 진지하게 대꾸하는 토오루가 귀여웠는지 잇세이는 기어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별 걱정도 많다며 작게 웃음 짓곤 아직까지 눈꺼풀 위로 조막 만 한 손바닥을 얹어둔 아카네에게로 발걸음을 돌린다. 딸아이에게 양 갈래 머리를 시켜주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던 잇세이였건만 아쉽게도 아카네는 아직까지 머리카락이 짧아 한 갈래로 묶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뭐, 정수리에 앵두처럼 솟아나 달랑 거리는 머리끈은 그것대로 사랑스러웠지만 말이다. 


“뺘?”


제 손을 거둬내는 잇세이로 인해 까맣던 시야가 밝아지자 아카네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휘둥그레 떠본다. 그런 아카네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잇세이가 행복함으로 가득한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젖살이 둥그렇게 오른 뺨, 볼록하게 튀어 나온 이마, 사과 머리가 달랑이는 정수리까지. 


“갔다 올 게요, 우리 공주님.”


그럴 듯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현관까지 잇세이를 따라 나온 부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배웅한다. 


“빠빠. 빠빠 시져. 시져……. 시져어! 으앙-”


게다가 잇세이가 현관을 나가려 할 때면 그 순한 아카네가 일순 그렁그렁한 눈을 하며 울음보가 터뜨리려 했으니 이 만하면 말 다했다. 그때마다 아카네의 등을 토닥이며 겨우 달랜 토오루가 눈짓으로 잇세이를 재촉한다. 가지 말라고 아등바등 손아귀를 뻗는 제 자식에게서 떨어지는 것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관문은 금세 닫힌다. 뚜벅이던 구둣발은 차츰 멀어져 간다. 아카네를 안아들고 있던 팔은 그녀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인 후 바닥에 내려둔다. 능숙하게 그녀를 달래는 토오루로 인해 제대로 울지도 못한 아카네는 울음 대신 딸꾹질을 히끅거리며 거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장난감 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뒤뚱거리며 어설픈 걸음마를 떼며 온 아빠들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던 시절은 뒤로한 채 이제는 제자리 뛰기는 물론 마음만 먹으면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 아카네가 장난감 자동차에 몸을 싣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이, 토오루는 심란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연다. 온갖 종류의 과일과 야채가 먹기 좋게 손질 되어 냉장고를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토오루가 한 입에 먹기 좋게끔 밤새 잇세이가 손질해둔 것들이었다. 그 중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복숭아에게로 손을 뻗던 토오루였지만 주저하는 마음이 없진 않다. 냉장고를 뒤적이는 손에서 시선을 멀리해본다. 결혼 직전까지만 해도 근육으로 탄탄했던 팔뚝이 살로 탈바꿈 되어 여과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고개를 내려 보면, 한 때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각선미로 유명했던 다리가 유려한 선을 잃고 군살들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아이를 품고 있는 복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냥……먹지 말까.”


불과 수 일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입덧의 후유증과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식욕 탓에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토오루였다. 그런 그가 이토록 먹는 것을 망설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 살쪘냐?’


사건의 발단은 고작해야 나흘 전. 갑작스레 규슈 지방으로 1박 2일 출장 일정이 잡힌 잇세이를 대신해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가 아이를 봐주러 두 사람의 신혼 방에 놀러온 것이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애초에 아카네 돌보기는 토오루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집에 토오루를 놔두고 간다는 죄책감이 없지 않았던 잇세이가 먼저 이와이즈미, 하나마키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입덧으로 한참 고생하던 무렵 두 사람을 재회하는 바람에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기분이 없지 않던 토오루 입장에선 반갑고 또 감사하기도 했다. 


‘이거 봐. 여기 뱃살 늘었잖아.’


감격의 상봉이란 첫 대면에 이와이즈미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임신 중이니까 당연하잖아, 라고 장난으로 되받아치려던 토오루였지만 어느 새 하나마키까지 가담해 살집이 오른 제 팔뚝을 꼬집으며


‘아카네 때는 이만큼까지 살이 오르진 않았던 거 같은데.’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오자 웃어넘기려던 토오루의 낯빛은 보기 좋게 굳어져 갔다. 


‘운동 부족이겠지.’

‘임산부라도 기초 체력은 필요할 걸~?’

‘위험한 시기는 지났다 했으니까 슬슬 운동 좀 하고 살아라, 굼벵카와.’


결국 기분이 팍 상한 토오루로 인해 하루 내내 그의 투정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툐류. 툐류 빠빠!”


제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토오루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의 허벅지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키가 깡총깡총 발을 구르며 자신을 부르고 있으니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을까. 


“응, 아카쨩. 아빠는 왜요? 벌써 배가 고파졌어요? 아니면 기저귀에 쉬야 했어?”


토오루는 무릎을 굽혀 아카네와 눈높이를 맞춘 후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묻는다.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나지 않는 물개 박수만 열심히 치며 치열이 고른 젖니가 다 보이게끔 해맑게 웃기만 한다. 혹시나 기저귀를 갈아야 하나 싶어 기저귀 안쪽을 들춰보지만 어째 깨끗하기만 하다. 그냥 놀아달라는 건가, 맥 빠지는 한숨을 쉰 토오루가 아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가볍게 안아 든다. 잇세이표 특제 복숭아 꿀 절임 또한 잊지 않고 말이다. 


품에 안겨 자꾸만 재롱을 부리는 아카네와 함께 거실 한 가운데에 엉덩이를 붙인다.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켠다. 오전이라 그런지 영화 채널은 광고만 그득하고 드라마나 예능 채널은 전에 몇 번씩이나 봤던 것들뿐이었으며 뉴스는 토오루의 취향이 아니었다. 한참을 채널을 돌리다 결국 리모컨이 멈춰선 곳은 


“아……. 중계하고 있네.”


프로 배구 채널이었다. 


습관적으로 복숭아를 집어 입에 넣는다.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혀를 녹일 만큼의 달달한 뒷맛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턱을 괴어 본다. 맞은 편 벽에 걸린 티브이 바로 옆에 위치한 달력이 미처 잊고 있던 시기를 상기 시킨다. 지금쯤이면 준준 결승인가, 입으로는 짧게 중얼 거리고 눈으로는 코트를 훑어본다. 경기는 4세트의 종반. 오랜 랠리가 길어지자 양 쪽 팀 모두 지친 기색으로 공을 겨우겨우 받아치고 있었다. 그 중 왼쪽 코트를 예의 주시하던 토오루가 눈썹을 팍 찡그린다. 


“세터란 녀석이 저게 뭐야. 토스 자체가 서투네. 저 4번의 최고 도달점은 훨씬 높아 보이는데 토스가 따라가질 못하잖아.”


프로 배구 계에서 준준 결승 즈음 되면 서로 맞붙게 되는 팀은 대체로 익숙한 얼굴들이기에, 경기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인 영 어렵진 않았다. 하물며 프로 계에 입문한 직후부터 장래를 촉망받고 순식간에 모두의 선망 대상이 되었던 오이카와 토오루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프로 쪽에선 못 보던 얼굴……. 뉴 페이스인가? 아 싫다~ 정말.”


한창 현역으로 뛰고 있을 때만 해도 그는 무척이나 예민하던 사람이었다. 팀의 구성원 변화, 시즌마다 바뀌는 경기장 체크, 콤비를 맞추던 스파이커의 컨디션 체크까지 꼼꼼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시합 전날엔 상대 팀 경기 녹화 비디오들을 주의 깊게 살피느라 꼬박 밤을 새는 버릇마저 있었다. 팀의 숙련도, 스파이커가 선호하는 코스, 세터의 버릇, 서브의 다양성 등 비디오 한 편만 보면 그의 머릿속은 잘 짜인 그물망마냥 퍼져 나가며 상대 팀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파악하곤 했다. 애초에 배구에 재능이 있었던 데다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노력마저 아끼지 않는 수재였으니 감독들 입장에선 그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 날 뿐이었다. 


“그것도 몇 년 전 얘기지.”


스스로를 비웃듯 코웃음을 친다. 


원래 예정대로 라면 토오루의 프로 팀 복귀는 약 1년 후였다. 그 무렵엔 아카네가 세 살이나 되었으니 그녀를 보육원 혹은 어린이 집에 맡길 심산이었다. 비록 아카네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들고 저와 잇세이의 맞벌이로 인해 아카네가 외로움을 많이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토오루는 어찌 됐든 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배구공을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이다. 상대 팀의 기세를 죽일 초강력 서브를 날리고, 자신의 토스를 통해 스파이커에게 블로킹을 무너뜨리게끔 하고, 여섯이서 함께 난관을 돌파하고, 승리의 기쁨을 제 손으로 거머쥐고, 


“툐류 빠빠!”


자신만의 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카네의 부름에 토오루가 천천히 눈을 내린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다. 비치는 것이 있었다. 아이의 동그란 눈 안엔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관리 되지 않은 머리칼, 살집이 올라 희미해진 이목구비, 볼록하게 나온 아랫배와 오동통한 팔뚝까지. 


“빠빠 뽀뽀.”


토오루는 굳은 안색을 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신혼 초기 무채색으로 가득했던 집안은 아카네의 출산과 더불어 알록달록한 벽지로 뒤바뀌어 있었다. 흰 색으로 깔끔하게 도배 되었던 집안의 문이란 문들은 싸구려 캐릭터가 수놓아진 구구단 전지, 동물 이름으로 가득한 포스터로 도배 된 지 오래고, 본디 세탁 용품 외엔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던 베란다는 아카네가 좋아하는 장난감 집과 장난감 상자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집안 구석구석엔 크레파스나 색연필, 심지어는 미처 지우지 못한 유성 펜 낙서들이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욕실 앞을 굴러다니는 장난감 블록들 옆엔 유아용 변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후 20개월부턴 조금씩 배변 유도를 시도해보고 기저귀를 떼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모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아까네 뽀뽀 해주세요.”


문득 토오루는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뜨끈하면서도 울컥한 기운이 목구멍 너머로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왈칵 하고 터져 나올 울음을 겨우겨우 삼켜낸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코끝을 손등으로 쓸고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최대한 물어뜯어 본다. 


“빠빠…?”


그러나, 미처 막지 못한 물줄기 하나가 있었다. 푸석해진 뺨을 타고 또르륵 굴러 떨어진다. 아카네가 볼 새라 재빨리 눈물을 거둬보지만 그 새를 못 참고 불거져 버린 흰자위는 채 감출 틈이 없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그것이 무적의 주문이라도 된 마냥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가까스로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응.”


어딘지 모르게 서글픔이 느껴지는 어조.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아카네였지만 그녀라고, 그녀이기에, 토오루의 눈물을 보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불안함에 떠는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에 젖을 것처럼 물 기운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가 느꼈던 슬픔이 그대로 아카네에게 옮겨진 것 마냥 말이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뒤늦은 후회를 뼈저리게 체감한 토오루가 조심스레 말문을 꺼내 본다. 


“토오루 아빠는 여기 있어요.”

“…….”

“쭉, 우리 공주님 옆에 있을 거예요.”

“…….”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는 아카네를 기어코 거세게 끌어안아 버린다. 


“미안.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나쁜 생각해서 미안해.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너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리거나 하지 않아.”


그제야 아카네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터뜨린다. 정작 제일 울고 싶은 당사자를 대신해 집안이 떠나가라 쉴 새 없이 서러움을 토악질한다. 그 슬픔에 동화 되었는지 토오루의 눈가가 다시금 물결로 일렁인다. 


“아카네를……. 너를 만나게 된 걸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너는 내 행복이고 내 기쁨이고 내 전부인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너인데. 그랬는데. 그게 맞는데…….”


결국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작고 동그란, 그러나 토오루에게 있어선 너무나 큰 아카네의 뒤통수를, 토오루는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그간 뭔지 모르게 서러웠던 감정, 서러운 감정, 서러울 감정들을 한데 끌어 모아 폭발시키며 한참을 오열했다. 사방에 널브러진 오색빛깔의 장난감들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복숭아 꿀 절임과 알록달록한 벽지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두 사람 분의 곡소리는 쉽게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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