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오메가버스au
*마츠하나 언급 O
*알파 이와이즈미 X 알파인척 하는 오이카와




W. 멜






발걸음이 떨어질때마다 향이 짙어졌다. 코를 자극하는 금단의 열매가 손짓하고 있었다. 다급해지는 마음에 어느새 숨이 가쁘도록 뛰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발이 멈춘 곳은 배구부실이었다.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매일 밥먹듯이 오던 곳이었다. 문틈새로 비져나오는 매혹. 어느 멍청이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가. 손바닥으로 옮은 긴장감이 땀으로 흘러내렸다. 손잡이를 당기고, 문이 열리면, 지독한 페로몬의 냄새가 날개돋듯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던,

"....이와쨩.."

오이카와. 아니라고, 아닐거라고 믿었는데.

"설명 좀 해봐."

약통을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지 말좀 해보라고, 멍청아!!!!"

오이카와는 눈동자에 초점을 잃고 달뜬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날 알아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벌게진 얼굴 아래로 흠뻑 젖은 옷자락이, 벌어진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열기가, 방탕하게 벌어진 그의 고간이, 그 모든 것이, 그가 '오메가'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알파(Alpha). 인간 중에서도 소수만이 선택받은 이종족. 겉보기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알파들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우월감과 과시욕. 그것들은 베타들로 하여금 알파를 우러러 보게 만들었고, 존경하게 만들었다. 알파가 가는 길은 특별했다. 그 누구도 알파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건 본능이었다. 그들에게 거역하는 순간 덮쳐올 공포와 오한은 모든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끝없는 동경과 전율 사이, 알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했다.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룰, 그리고 운명.

사립 아오바죠사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했다. 알파가 세명이나 되는걸로 모자라, 그 세명이 전부 같은 학년, 같은 배구부였으니까. 뭐, 그 뿐만은 아니었다. 알파 중에 오이카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꺅꺅 거리는 여자들이 넘쳐났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이카와는 알파였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신체에, 독보적인 배구 센스, (쓸데없이) 상큼한 미소. 그 녀석은 우리들의 중심이었다. 우리들의 주장이었다.

"오메가 새끼."

복도까지 들려오는 욕지꺼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니, 정확히는 마츠카와가. 마츠카와는 몸을 떨고 있는 하나마키의 귀를 가려주었다. 그 얼굴이 창백했다. 아아, 알만 했다. 오이카와, 마츠카와 그리고 나. 우리들은 알파였다. 그에 비해 하나마키는,

"박아달라고 울어봐. 어? 어?? 히팅싸이클 있잖아?"

오메가(Omega).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알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오메가가 따라다녔다. 보이지 않는 신분제의 밑바닥 중 맑을 기미가 없는 흙탕물. 논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오메가가 있었고, 차별과 멸시는 그들이 안고가야할 운명이었다. 알파와는 또다른 운명. 그럼에도 알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오메가. 그 지독한 모순 사이에서 오메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여자한테도 박아달라 하냐?? 남자 맞아?"
"킥킥, 야 운다 울어. 울면 박아줄거라 생각하니봐~"
"걸레 같아~~"

차별과 박해.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베타(beta)라 칭해지는 보통 사람들이 오메가를 걸레짝 마냥 취급하는것은 당연했다. 오메가들 역시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히팅사이클이 돌아올때면 교배, 성행위, 또는 섹스라는 본능에 매달리는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아아, 알파라고 다를 건 없었다. 우리 또한 오메가를 먹잇감으로 여길뿐이니. 그렇다고 알파가 반드시 오메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었다. 페로몬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달아오른 오메가를 찾아내 성관계를 맺을 순 있어도, '같이'가 의무는 아니었다. 그건 오메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성욕을 달래줄 '누군가'가 굳이 알파일 이유는 없었다. 곁에 있는게 베타라 한들, 가족이라 한들, 친구라 한들, 욕구만 만족시켜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둘째는,

"귀닫고 무시해."
"하지만...."
"괜찮아."

각인(刻印). 알파와 각인을 하게되면, 어느 누구도 오메가를 건드릴 수 없었다. 알파의 것이기 때문에, 알파의 소유이기 때문에, 알파의 반려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츠카와는 각인을 새겼다. 하나마키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 알파의 각인이 없는 오메가따위, 들짐승 속에 던져진 어린 아이일뿐이니까. 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징그러웠다. 애정이 흘러넘치다 못해 서로를 아끼는게 이미 잉꼬부부 수준이라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도 간혹, 오늘처럼 오메가에 대한 능욕이 계속되는 날이면 마츠카와는 이빨을 곤두세웠다. 썩을 베타들 때문이라는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알파지만 오메가를 대면해본적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오이카와, 멍 때리지마."

눈 앞의 이녀석이 신경쓰이는 것 뿐일까. 오이카와는 기본적으로 가벼운 남자였다. 알파임에도 모두에게 친절한(컨셉의)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가끔씩 기시감이 뿜어져나왔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지금이 그러했다.

오이카와는 옆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오메가를 짓밟고, 괴롭히고, 추행하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바보같기는. 괜한 오지랖이다. 알파인 네가, 내가, 우리가 건드려봤자 상황은 악화될 뿐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을텐데.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뒤통수를 한대 후려쳤다.

"아파!!!!"

네가 거들어봤자 변하는 건 없다고, 멍청카와.

"이와쨩 너무해!!!!! 이 오이카와씨 뒤통수 깨지면 이와쨩이 책임질거야?!"
"더 맞고 싶냐."
"꺄앗! 무서워, 맛층~"

그래. 이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너와 나는 주어진 길 위에 나란히 서있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평탄한 아스팔트길. 그 단단한 길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단 하나의 틈도 없을거라며, 나는 믿고 있었다.




#




먹을 풀어놓은 하늘은 빛을 잃고 있었다. 출입문 너머로 먹구름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젠장. 우산 챙겨나올걸. 오이카와는 신발 하나 갈아신는 것마저 꾸물거리고 있었다. 아, 쥐어패고 싶다. 빨리 안하면 비가 쏟아질텐데.

"맛키 없으니까 하는말인데."
"말하지마."

알고 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왜?!"
"오메가에 대한거잖아."

톡, 토옥. 빗줄기가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신발을 신다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나 싶더니만. 비와 섞여 풍기는 젖은 흙의 냄새. 코를 간질이는 물 비린내.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오이카와의 손에는 곱게 접힌 종이가 들려있었다. 시덥지 않은 고백일 것이다. 그것이 진짜 오이카와를 향한 건지, 아니면 알파 오이카와를 향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선뜻 종이를 버리지 못했다. 알파주제에 베타를 신경쓰고 있었다. 어차피 걸림돌밖에 안되는 것들. 일일이 상대해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네가 그것들의 타겟이 되고 있는 건 알고 있냐, 오이카와.

오메가 대접이 극과 극이니, 그들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내비치지 않고 사회와 단절된 삶은 택하는 오메가. 차별받고, 박해받고, 사회에서 매장당하더라도, 이를 견뎌내고 세계의 흐름에 몸을 내던지는 오메가. 마지막으로, 적당한 알파를 물색해 각인을 뜯어내려는 오메가. 오이카와는 그 타겟으로 삼기에 아주 적절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와쨩은 오메가 어떻게 생각해?"
"별 생각 없는데."
"헤에-"

처음엔,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 정성이 담긴 초콜렛도, 애정이 스며든 편지도, 불러내서 직접 전하는 고백도, 전부. 물론 사귄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단지 당사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미안하다며 정중히 거절할뿐. 그 귀찮은 짓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하는 사이에 먼저 지친 건 내 쪽이었다. 내가 먼저 그만하라 했다. 쓸데 없이 감정 낭비하지 말라고. 네가 무슨 입장인지 아냐고. 그렇게 한 명 한 명 신경쓰다 네가 잘못되면 어떡할거냐고. 네가 몇 안되는 알파라는 걸 자각은 하고 있냐고. 그 때, 오이카와는 막연히 웃었다. 쓸쓸하면서도 시원섭섭하다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곱게 접힌 종이는 갈갈이 찢어졌다.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 있던 또다른 마음도 갈갈이 찢어졌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찢고, 찢고, 또 찢은 종이조각들을 망설임 없이 허공에 놓아주었다.

"나는 있지, 불쌍한 거 같아."

또다. 허무만을 품고 있는 눈동자다. 이질감이 풍기는 눈동자다.

"사회로 나가면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받고, 괴롭힘당하고, 심지어 성희롱은 일상다반사잖아."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오이카와는 신발을 갈아신었다. 운동화에는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 같았다.

"언제 히팅 싸이클이 돌아올지 몰라. 억제제는 임시 방편일뿐이잖아? 그거 부작용도 장난 아니라던데."

이상했다. 개소리를 하고 있는 오이카와. 평소랑 미묘하게 다른 오이카와. 오메가를 신경쓰는 오이카와. 의구심이라는 이름의 화살은 하나면 충분한 것을. 오이카와 스스로가 그것들을 자아내고 있었다. 뭘 숨기고 있는걸까. 뭘 말하고 싶은걸까.

"차라리 자살하는게 편하지 않을까."
"너."

이상해. 요새 왜그래? 사춘기라도 왔냐?

"하나마키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마라."

머리가 생각하는대로 내뱉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빌어먹게도 나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알파, 오메가 운운하기 이전에, 작은 인간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의문을 털어놓을수 조차 없는 인간. 분위기에 맞춰 튀어나온 말이 뭐였더라.

"...미안."

저 썩을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나마키 얘기를 한듯하다. 아, 하필이면. 아니야. 말나온 김에 끝내자.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전부 해버리자. 가슴이 들썩이도록 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등뒤로 들이치는 비바람이 서늘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충 말하고 싶진 않았다. 제대로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오메가든 알파든, 똑같은 사람이다. 차별받을 이유따윈 없어. 적어도 난 안 그럴거니까."

사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나에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있는가? 방금까지도 하나마키를 언급한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던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나도 날 모르겠다. 어느 쪽이 정답일까. 어떤게 올바른 것일까.

"오이카와. 알파 주제에 오메가 걱정하냐?"

어느 쪽이 정답이든, 난 너에게 묻고 싶었다. 네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장난삼아 던진 의문에 담긴 진의를, 네가 눈치채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뇌용량 터진다."
"너무해!!!"

빌어먹을. 빌어먹을빌어먹을빌어먹을 나 자신. 빠득-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걸 듣고는 히스테릭한 얼굴로 변한 오이카와가 먼저 달려갔다. 발빠르게 달려나가봤자, 오늘의 날씨는

"비..."

보아하니 오이카와도 우산이 없는 듯 했다. 이럴 땐 방법이 없다.

"뛰어."
"앗, 이와쨩!! 같이 가!"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뛰어가던 우리들은, 친구였다. 와이셔츠를 적시는 빗방울마저 '같이'라는 단어 아래에 상쾌해지던 우리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돌이켜보면, 오이카와는 주기적으로 아팠다. 그게 한달이든, 두달이든, 반년이든.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 자신이 후회스러울뿐이다.

"야. 괜찮냐?"

안색이 창백한 날이면 밥먹듯 화장실로 향하던 녀석이었다. 텅 빈 위장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헛구역질. 등을 흠뻑 적신 식은땀 줄기. 고통을 쥐어짜내는 신음소리. 너의 온몸이 아프다 말하고 있었음에도,

"윽... 아냐. 아무것도 아냐. 속이 안좋아서 그래. 먼저... 우욱, 가있어."

너는 숨쉬듯 거짓말을 내뱉었다. 괜찮다는 거짓으로 똘똘 뭉쳐 너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냐. 나한테 솔직히 털어놓을 순 없는 거냐? 내가 너랑 친구 일이년 하는 것도 아니고, 척보면 척인데 그딴 허접한 거짓말이 통할거라 생각해?

"그따위 말 잘도 믿겠다. 등 대봐."

어물쩡 넘어가려하는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오이카와는 둘째치고, 나는 어쩌고 싶은건지. 규칙적으로 오이카와의 등을 두드리다 뻗쳐오르는 화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퍽- 앗차, 힘 너무 줬나. 손바닥과 등근육이 만나 강타하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리하지말라고."
"으윽.. 미안, 이와쨩."

변기를 붙잡고 있는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서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면 될텐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될텐데. 너는 왜.

"좋게 말할 때 병원가라."
"....응."
"앞에 묘한 공백은 뭐냐?"
"병원 갈게. 걱정시켜서 미안."
"...알면 됐고."

이상 기류를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내가 아니었다. 하물며 마츠카와나 하나마키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문'.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오이카와의 뒤를 쫓아다니던 보이지 않는 그림자. 짝사랑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를 뒤쫓는 양날의 검. 베타들의 들리지 않는 수군거림. 나는 그런 것들에 서툴렀다. 아니, 사실은 관심이 없었다. 베타따위 알바 아니었으니까. 나에게 중요한 건 (빌어먹을) 오이카와, 배구부 녀석들, 가족 정도였으니까.

그 날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에, 지저귀는 새 한마리 날아다니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바 없는 등교길에는 사람 하나 없었고, 오이카와는 연락두절이었다. 망할 오이카와, 주장이라는게 늦잠이나 자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너 때문에 아침 연습 시작 늦어지면 죽여버-

[전화 되냐?]

별 일이었다. 마츠카와가 메일을 보낸 것 말이다. 대뜸 전화를 하거나, 일주일 후에야 답장을 보내는 그 마츠카와가, 먼저 메일을 보냈다. 가라앉은 공기. 차가운 휴대폰 액정. '오이카와' 라 적혀있는 문패. 버튼을 눌렀다. 두개의 소리가 들려왔다. 통화음이 이어지는 소리와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 고요한 아침 거리를 헤치는 두개의 소리가 어울리고, 하늘거리다, 닿아내린다.

"어. 무슨 일인데."

먼저 닿은 것은 마츠카와였다. 신호음 하나가 끊어지기도 전에 받던 마츠카와는 한참이나,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겼나 싶어 귀를 떼려던 찰나,

[...너 지금 학교냐.]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은 잡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나혼자 이공간에 동떨어진 감각이었다.

"아니. 이제 가려고."
[오이카와는?]
"안그래도 지금 초인종-"

다음은 초인종. 비죽 뻗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나올 오이카와를 기대했다. 언제나처럼 싱긋- 웃어제끼며 느긋하게 걸어나오는 오이카와를 한대 쥐어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깜박하고 두고 나온 도시락에 다시 집에 들어갈 오이카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내 기대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나온 것은

"어머, 하지메구나~ 토오루라면 벌써 등교했단다. 헛걸음하게 해서 어쩌나.."
"아, 아닙니다."

어머님이었다. 김이 빠졌다. 불현듯 느껴졌던 기시감은 우연이었나. 그보다 쿠소카와 이자식, 나한테 말 한마디 안하고 학교에 가버려? 오냐, 학교에서 보이기만 해봐. 죽여버릴테다.

[이와이즈미.]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빠졌다. 아직 통화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면, 오이카와 어머님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주었다. 어느 쪽을 들어야 할까.

"아참~ 하지메, 이거 토오루한테 전해줄래?"
[오이카와 말이야.]
"평소엔 항상 들고다니던 약인데, 오늘따라 놓고 갔더구나. 학교에서 만나면 전해주렴."
[아무래도 오메가 인것 같다.]

갈라져 있던 길이 하나로 이어졌다. 지나치게 조용했던 거리가 하나둘 소음을 토해냈다. 시끄럽다. 귀를 앵앵거린다. 두통이 밀려온다. 어질거리는 의식 사이로 딱딱한 것이 손끝에 닿아왔다. 약통. 하얀 약통.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눈이 침침해졌나. 아니,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듣고 있어?]
"....어."

듣고 싶지 않다. 아니, 들렸다. 분명 마츠카와가 뭐라고 한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뭐라고 했던거 같은데.

[단순한 소문이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새하얀 약통을 뒤덮은 알파벳. 구불거리고 흔들리는 시야속에서 확실히 보인 것은 'The Only for Omega'. 그렇게 못이 박혔다.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나부터 열가지가 전부,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가 오메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페로몬...향이.."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이 향이, 유혹을 흩뿌리는 이 향이, 오메가가 뿜어대는 그것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폐로 스며드는 페로몬 향이 이성을 어지럽혔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끊을 수 없는 마약이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나를 먹어줘, 나를 찾아줘, 그리고 나를 탐해줘.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다.

페로몬 냄새가 유독 강렬하다.
억제제가 내 손에 있다.
오이카와는 집에 없다.

"설마...."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소문으로 물결치고 이었다.

'그 오이카와가 오메가?'
'알파 아니었어?'
'와, 대박이네. 그럼 지금까지 우릴 속인거야?'
'하등 생물주제에-'
'알파의 탈을 쓰고 잘도-'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시선들이 펼쳐졌다. 그 시선에, 입놀림에, 일일이 반응할 시간따윈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을 겨를이 없었다. 짙어지는 페로몬 향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금단의 과실. 그 끝이 가리키는 것은 배구부실이었다. 땀이 차오른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잡소리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지껄이는 베타놈들따위 신경꺼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에겐, 나에겐-

벌컥-

"....이와쨩..."

네가 중요했다.

"설명 좀 해봐."

다행히 다른 알파한테 노려진건 아닌 것 같았다. 마츠카와와 나말고도 이 근처의 알파들은 얼마든지 있었을테니. 말그대로 독안에 든 쥐. 대답해, 오이카와. 왜 거짓말을 한거냐. 왜 알파라고 한거냐.... 왜 우릴 속였어.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지 말 좀 해보라고, 멍청아!!!!"

눈물에 젖어 있었다. 땀에 젖어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채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비명 하나 못지른채 그렇게, 너는 그렇게 혼자서 계속,

"너... 오메가였어?"

버텨왔던거냐.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제와서 책망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이카와는 빌어먹을 오메가였고, 히팅 싸이클에 걸렸고, 내 손엔 억제제가 들려 있었다.

"우릴 속였어?"
"그 약... 읏,흐읏.."
"지금까지 알파인척 하면서, 오메가를 위하는 마냥 행동한거냐고-"

울먹거리지마. 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지마. 애달복걸하지마.

"묻고 있잖아!!!!"
"...미안..미안... 하앙,미안.. 이와쨩..."

부실 안을 진동하는 페로몬 향에 나도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지금 오이카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미안하다 말하는 사이에도 흥분을 못 참고 신음소리를 내지르는 오이카와가 어딘가 고장났다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걸 인내하고 견뎌내야할 내가,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뜨거워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근데 나 지금.. 흣, 죽을것 같아. 이와쨩 알파지? 알파 맞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네가 발버둥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다. 내쪽으로 반쯤 기어오던 네가 뭘 원하는지 쯤은, 알고 있다.

"나... 나 좀 도와줘. 나 좀 살려줘.. 나 오메가 맞아.. 오메가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찔하도록 풍겨오는 오메가의 향, 페로몬 내음,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손짓. 여기서 널 안으면, 널 갖게 되면, 넌 후회할까? 아아, 생각따위 하고 싶지 않다. 붙잡고 있는 이성을 후려치고 싶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을 부대끼고 싶다. 젖어있는 옷자락을 찢어버리고 우윳빛 살결에 이를 박고, 성감대를 있는대로 빨아대고 싶다. 젠장, 정신을 놓을 것 같다.

"알파가 없으면 안돼... 부탁이야, 이와쨩.. 나 좀 박아줘. 나 박히고 싶어. 질척질척 소리나게.. 박혀서.... 이와쨩이, 아읏, 하라는대로.. 하읏, 다할테니까...."

종아리에 닿아오는 손이 뜨겁다. 뜨겁다 못해 데일것 같다. 이걸 놓치면 세상이 끝난다는 표정으로 내 다리를 꽉 쥐던 오이카와는 그 달뜬 숨을 피부위로 내뱉었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들고 부실 문을 닫았다. 덜덜 떨려오는 손가락이 몇번이고 헛손질을 했다. 잠궜다. 이대로 오이카와를 내버려두느니, 다른 녀석들에게 눈이 풀린 오이카와를 보여주느니, 차라리.. 차라리-

"....젠장,젠장,젠장."

머리를 헤집었다. 변명하자. 방법은 이뿐이었다고. 너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고. 네가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라면, 너의 처음은

"후회하지마라."

'나'이고 싶었다고.




*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상편과 이어지는 내용이므로 상편을 먼저 읽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인간 쿠로오 X 여우요괴 켄마




W. 멜





자잘한 상처들이 얇은 흉터가 되고, 굳어진 흉터 아래로 새살이 돋아날 준비를 마쳤을때 즈음이었다. 쿠로와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싫지만) 목욕을 하고,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익숙해질때 즈음이었다.

"쿠로."

여름은 한창이었다. 귀를 찌르듯 울어대는 매미의 노랫 가락아래, 나는 시원한 마룻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더위를 먹은 꼬리는 힘이 쭈욱 빠진채 늘어져 있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39도를 웃도는 끔찍한 더위와 습도를 품고 있었다. 덥다. 움직이기 싫다. 가만히 있고 싶다. 숨쉬는 것마저 귀찮았다. 그런 내 시야에 닫혀 있는 문짝이 들어왔다. 쿠로의 집은 의외로 컸다. 내가 처음 눈을 뜬 곳은 작은 방에 불과했다. 벽이라 생각했던 것은 쿠로가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밀자 힘없이 밀려버렸다. 그 너머로 펼쳐진 푸르른 뒷마당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꾸준한 손길이 닿아있는 잔디밭, 손톱만한 작은 꽃에서부터 내 키를 훌쩍 넘는 나무. 쿠로가 키워낸 뒷마당은 생명의 속삭임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비가 오면 가만히 마루에 앉아 빗방울에 콧잔등을 맞아보고, 해가 쨍쨍하면 쿠로를 따라 푸른 마당에 푸른 물을 끼얹어 주었다. 여름의 계절을 마루와 마당에서만 보내던 나에게 집 안쪽은 미지의 한복판이었다. 저 문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쿠로, 저건 뭐야?"

쿠로는 얼음이 동동 띄워진 보리차를 마시며 내 시선 끝자락이 닿는 문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내 직업병. 내 일이야."
"쿠로는 무슨 일을 하는데?"

사실 흥미는 없었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하든말든 내 알바 아니었다. 오늘따라 볼에 닿아오는 나무의 숨결이 시원했을 뿐이고, 기운 없이 늘어진 꼬리가 짜증났을뿐이다. 한마디로, 변덕이었다.

"옷을 만들지."
"옷..?"
"네가 입고 있는거나, 내가 입고 있는거. 대단하지?"
"글쎄."

더웠다. 일본의 여름은 왜 이렇게 더운거지. 하물며 귀와 꼬리에 난 털만 없었으면 좀 덜했으려나. 부질 없었다. 밍기적 거리고 있던 나에게 쿠로는 열심히 대답해줬다.

"영혼 없는 대답은 사양한다- 좋~아, 켄마. 내 작업실 가자. 가서 마음에 드는 옷감 골라봐. 예쁜 옷 하나 만들어줄게."

나는 쿠로에 비해 작았다. 체구도 작고, 다리도 짧고, 팔도 짧고, 뭐든지 쿠로에 비해 작고 짧았다. 큰 게 있다면, 귀나 꼬리 정도? 나는 귀찮음이 많았다. 사탕발림으로 날 움직였던 건 처음의 한번 뿐. 숨쉬는 것마저 귀찮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 세계에는 어떻게 내려왔나 싶다. 이런 사정이니, 언제나 아쉬운건 쿠로쪽이었다. 대안책으로 나온게 나를 안아 올리는 것. 처음엔 나보다 거대하고 나보다 따뜻한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는게 어색해, 몇번이고 도망치려했다. 그것도 한 두번이지, 계속 안고 있으려 하니 발버둥치는 것마저 귀찮아졌다. 이제는 쿠로의 품속에서 잠도 청할 수 있을정도로 편해졌으니 말 다했다. 이번에도 쿠로는 마루에 늘어져 있는 날 안아들었다. 혹여나 내가 떨어질까봐, 안아든 손에는 긴장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방문이 열렸다. 오색빛의 화려한 색들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발디딜 틈하나 없이 온데만데 어질러진 색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화려했다. 그러다 문득,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큰 집에 예쁜 색이 가득하고, 생명이 넘쳐흐르는데

"쿠로는 언제나 혼자야?"

나는 쿠로 이외의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데-"
"인간들은.. '가족'이라는게 있다던데."

가족. 참 와닿지 않는 울림이었다. 인간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가족도, 낳아준 부모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지금까지 물어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거 없어. 고아니까."

쿠로에게서 느껴지던, 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던 쓸쓸함 때문이리라.

"고아?"
"태어날때부터 버려진 아이."
"외톨이?"
"비슷한거야."

외톨이. 가슴 한 켠에서 쿵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붙는 것 같았다. 쿠로는 외톨이. 나도... 외톨이. 가족이 없는 쿠로. 배척당하는 나. 빛과 빛으로 연결된 인연이라는게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림자와 그림자로 연결된 인연이였다. 닮은 상처를 서로 어르고 핥아내리고 위로하는 인연의 실.

"너희들은 가족 없어?"
"가족... 이라기보단 '공동체'같은 느낌이니까."
"낳아준 부모는?"
"딱히...... 나도 신경안쓰고 그쪽도 나를 신경안써."
"외톨이네."
"비슷하지."

쿠로는 조심스럽게 날 내려주었다. 아무래도 이 아수라장인 방을 조금이라도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발끝에 닿아오는 옷감들. 형형색색의 다채로움을 자랑하는 천자락들. 생각해보면 쿠로는 매일같이 다른 옷을 입었다. 유...유..유 뭐였는데. 어쨌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날은 그에 맞춰 먹구름색의 옷을 입었다. 구름 한점 없는 화창한 날에는 맑은 하늘을 담은 옷을 입었다. 기분이 안좋을땐 우울한 보라빛 옷을 입고 하루종일 '술'이라는 것을 들이켰다. 아, 그런 날은 쿠로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불러도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냄새에, 자꾸만 내 귀를 잡아 당기려 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때가 아니면 같이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걸지도."
"뭐가?"
"내가 널 데려온 이유 말이야."

오늘은 붉은 옷이었다. 붉음. 그렇다고 피를 쥐어짜낸 쨍한 붉음은 아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 겨울, 고고하게 피어나는 한떨기의 동백꽃이 수놓아둔 붉음. 쿠로는 붉디 붉은 자신의 옷소매를 걷어부쳤다.

"나랑 비슷한 외로운 냄새가 나서, 너를 데려온 걸지도 몰라."

외로운 냄새. 나에게선 외로운 냄새가 나는 걸까? 킁킁 거리며 저의 냄새를 열심히 맡아봤지만, 역시 냄새가 날리 없었다.

"가족이란 거 말이야."

쿠로는 그런 나를 흘끗 보더니, 웃었다. 실 없다. 뭐든 귀찮아하는 내 어디가 우스운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라고 생각해."

아,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가족에 대한 얘기였나. 어차피 나랑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쓸데없이 예민한 귀만 아니었어도 귀담아 듣지 않았을거라며 나는 주의를 돌리려 했다.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서 인연을 맺고 곁에 있어주는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족아닐까."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 곁에 있어준다. 닮았다. 나와 쿠로와 닮았다. 외롭고, 상처입고, 혼자 남겨진 우리는 닮아 있었었다. 인간과 요괴라는 것을 뛰어넘어, 우리는 지독하게도 닮아 있었다.

"나랑... 쿠로같은?"
"그래."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빨강과 노랑사이의 노을이 방안을 채워가고 있었다. 쿠로의 등뒤로 물들어가는 붉은빛이 너무나 눈부셔,

"우리는 이미 가족이야."

마음 한켠에 썩어들어가고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려갔다.

"가족...."
"그보다 얼른 골라봐. 어떤 색이 좋아?"

와닿지 않는 그 울림이 내 것이 되었다. 쿠로가 나의 가족이다. 쿠로가 나만의 가족. 내가 쿠로만의 가족. 무더운 여름의 낮과 시원한 여름의 밤이 교차하는 찰나의 시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시간의 색. 나의 처음을 떠올리는 색.

"....저거."
"저거?"
"응."
"다들 화려한 걸 고르던데, 넌 이상하네."
"저게 좋아."

먹을 끼얹은 색이었다. 빛 한줄기 없는 어둠을 머금은 색이었다. 그리고 한 줌의 붉음.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간신히 눈에 띄는 붉은 별 한 줌. 눈에 띄지도,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난 이게 좋았다. 나의 처음. 축제의 색. 검은 융단위로 펼쳐졌던 홍등의 춤사위.

"...좋~아. 기합 넣어서 만들어볼까!"

그리고 쿠로가 나를 위해 만드는 처음. 그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었다.




#




딱지가 벗겨져갔다. 이제는 쿠로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었다. 발소리만 들어도 쿠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쿠로에게선 보리의 냄새가 났다. 습관처럼 마시는 보리차가 옷에 배여, 그 몸에 배여, 내 코끝을 감돌았다. 나는 쿠로의 무릎을 좋아했다. 쿠로에게 안겨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의 무릎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걸 좋아했다. 가끔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몽롱한 정신으로 그의 옷자락을 할퀴는 것마저 좋아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무릎위에 있었다. 보리의 냄새가 은근하게 풍겨왔다. 쿠로는 내 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걸 못 숨긴다고?"
"응. 내 또래들은 귀랑 꼬리까지 잘 숨기는데... 난 못해."

줄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불문율도 어겼다. 성장은 커녕 나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음에 감사해야했다. 그런데도 피에 묶여있던 불문율은 예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어겼다간 당장이라도 큰일이 생길것처럼 우리를 세뇌시켜놓고, 모든걸 깨부순 나에게는 정작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금기는 도대체 왜? 단순히 인간과 요괴가 다르기 때문인걸까? 요괴의 생과 인간의 생은 다르기에?

"난 좋은데."

쿠로는 꼬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쿠로의 손가락이 기분좋아 저도 모르게 그르릉 거리고 말았다.

"이 복슬복슬한 느낌... 최고야."
"쿠로 변태같아."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쿠로한테서."

나와 만나고 접촉하고 대화를 나눈 인간은 너뿐이니까. 쿠로한테서 모든 걸 배운거야. 있지, 쿠로. 쿠로라면, 쿠로만 있다면, 나는 여기에 계속 있어도 좋을 거 같아.

"나도 좋아."

우리는 가족이니까, 우리는 외톨이 동지니까, 우리는 비슷하니까.

"쿠로가 쓰다듬어주는 거."

쿠로는 날 혼자두지 말아줘. 혼자였을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이제 혼자는 싫어. 쿠로랑 같이 있을거야. 인간이여도 좋아. 계속 곁에 있어줘, 쿠로.

어리석었다. 그 때의 나는 어리석었다. 인간의 수명을 알고 있었으면서, 말도 안되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 쿠로가 어떤 상태였는지, 누구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는지, 그 때의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콜록콜록-"

쿠로는 잔기침이 많았다. 가끔씩은 선혈이 섞인 가래를 내뱉었다. 요즘들어선 더 심해졌다. 한 번 시작한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파리해진 입술을 애써 손으로 가렸다. 그럴때면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아파?"

아프냐고 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쿠로의 들썩이는 가슴팍 한 가운데를 쓸어내려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괜찮아. 원래 잔병치레가 많아서.... 쿨럭-, 쿨럭,윽-"
"...피 나왔어, 쿠로."

쿨럭- 토해내는 소리가 나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이렇게까지 검붉은 핏자욱은 본적이 없었다. 비릿한 혈향이 새어나왔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붉고 붉은 것이 뚝,뚝 흘러내려 내 볼에 내려앉았다. 볼을 쓸었다. 묻어나오는 피의 향연.

"곧잘 이래. 걱정하지마. 약먹으면 가라앉아."

쿠로는 거짓말에 능숙했다. 나만을 향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이런식으로 대처해온 것 같았다. 모른척했다. 필사적으로 버텨내려 했기에. 괜찮다는 가면 아래로 피를 토해내고 있었기에.

"'약'이란 걸 먹으면 쿠로 안 아파?"
"응. 안아프게 해주는 마법같은 거야."
"그럼 하나만 먹어도 충분하잖아."

입가를 닦아내던 쿠로의 손이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살짝 커진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쿠로가 먹는 약이라는 건... 음..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음... 일곱. 일곱 개나 되는데."
"푸하- 여섯이겠지, 켄마."
"아 여섯인가."

이쪽은 진지했다. 진지하게 말한거였다. 그런데도 쿠로는 화제를 돌렸다. 대답하는 걸 일부러 피했다. 쿠로의 손바닥에는 흉물스러운 핏덩이들이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루의 좁은 틈새로 피가 새어들어갔다. 들러붙고, 늘러붙어 얼룩이 생겨나고 있었다.

"인간의 수명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쿠로는 피를 묻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었다. 깨끗한 엄지로 내 볼을 닦아냈다. 쿠로의 피는 검붉고, 비릿하고, 외로운 냄새가 났다.

"100년도 안돼.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건 너무 짧고, 허무한 삶이야."

자신이 살아온 시간따위 세아려 본적은 없었다. 세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지 않는 삶. 죽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있지, 쿠로."

부질없고, 말도 안되는 이 영겁의 삶을

"쿠로는 곧 죽어?"

쿠로에게 이어주고 싶다고.




#




쿠로는 대답이 없었다. 말없이 내 볼을 문지르다 손을 씻어야 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쿠로의 등에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죽음의 냄새. 그 쓸쓸하고 외로운 뒷모습이 하루고 이틀이고 며칠이고, 잊혀지질 않았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죽음의 기척이 짙어지고 있었다.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쿠로는 이미 알고 있었을테니까. 이제와서 그걸 상기시켜봤자, 변하는 건 없었을테니까.

요괴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았다. 그저, 그의 곁을 지켜주는 것 뿐, 그의 하루를 같이 보내는 것 뿐. 이 지겹도록 긴 생명을 나눠주고 싶었다.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한들, 이 영혼을 전부 내던진다 한들, 쿠로와 같이 있고 싶었다. 쿠로가 그걸 거부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스웠다. 요괴가 인간에게 생명을 나눠준다니. 요괴가 인간을 위해 헌신하다니. 가능할리가 없었다. 애초에 불문율을 어기고 인간을 만나려는 요괴가 몇이나 있을까. 그 중에서도,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려는 요괴는 몇이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쿠로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있는 최선이었다.

"쿠로. 듣고 있어?"
"그럼그럼~"

쿠로는 바빠 보였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하아-. 중요한 건,

"커. 안맞아."

치렁하게 늘어진 소매와 천자락은 한 발자국 내딛는 것조차 방해하고 있었다. 유카타라고 했던가. 쿠로는 아무래도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맞춰 유카타를 만든 것 같았다. 옷감은 그 때 고른 것이었는데. 새까만 밤 하늘에 박힌 붉은 등. 나의 유카타로 추정되는 것은 분명 이를 품고 있었다.

"알고 있어."
"난 쿠로처럼 크지 않다고."
"곧 그렇게 될 거잖아?"

이제 됐다ㅡ. 쿠로는 뿌듯해 보였다. 허리를 동여맨 끈이 붉었다. 질질 끌리는 천자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켄마. 내가 왜 옷을 만드는 줄 알아?"
"모르겠는데."

그보다 얼른 벗고 싶어. 이거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해. 내 말은 들리지도 않나보다. 아니, 들려도 안들리척, 쿠로는 내 말을 싹 무시하고 있었다.

"네가 예전에 했던 말처럼, 인간의 생은 무척 짧아. 너같은 영겁의 삶을 사는 존재들에겐 부질없는 시간일지도 몰라."

꼬리가 답답했다. 꼬리 전용 구멍이라도 뚫어줬으면 좋으련만. 이리저리 마음에 안드는 유카타였다.

"그러니까 더더욱, 인간은 뭔가를 남기고 싶어해."

뭔가를 남기고 싶어한다니. 남기든 남기지 않든 잊혀지는 건 똑같을텐데. 미미한 시간의 차이만 있을뿐, 사라져가는 존재가 세계의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칠리 없었다.

"이 생을 짧게 끝나더라도 누군가는 기억해주기를, 잊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거야."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잊혀지기 마련이다. 쓸데 없는 욕심일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현실을 직시하라 입을 열면 되는데.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그게 나한테는 옷이었어."

마음 한 구석이 꿈틀거렸다. 피부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마음을 들쑤셨다. 유카타. 날 위해, 나만을 위해 쿠로가 정성을 쏟아 부은 유카타.

"부모도, 형제도, 하물며 친구 한명 제대로 없는 나야. 내가 죽더라도 내가 만든 옷은 남아있어. 언젠가는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면서 기억되고 싶은거야."

아, 그런 인간이 있었지. 쿠로라고, 미련스럽게 요괴를 위해 옷을 만들어준 인간. 인간과 요괴의 구분 없이 나를 받아준 인간. 가족이란게 뭔지 알려줬던 인간. 쿠로는 내가 이러길 바라고 있는 걸까.

"켄마."

나직하게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큰 귀와 함께 쓰다듬어지는게 좋았다. 너의 손길이 좋았다. 너의 보리 내음이 좋았다. 너의 뻗은 머리칼이 좋았다. 너의 모든 것이 나와 다름에도, 네가 좋았다.

"...응."
"언젠가... 네가 멋드러진 여우요괴로 성장하게되면, 꼭 입어줘."

쿠로는 먼 훗날을 보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바스라져 사라지고, 나만이 홀로 남아있을 나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때가 되면, 꼬리는 숨길 수 있겠지?"

글쎄.

"길고 긴 세월을 사는 너에게 나는 부질없을지도 몰라."

어떨까.

"그래도 이 옷을 입게 되는 날, 네가 날 기억해준다면"
"....."
"난 분명 기쁠거야."

쿠로. 너는 나에게 한 송이 꽃이었어. 우연히 만나 한계절만 피어나는 꽃. 그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내가 가야할길 조차 잊어버리고 꽃만을 바라보았어. 꽃망울이 맺히고, 꽃잎이 벌어져, 절정의 순간을 달하고 있는 너를 바라만 보았어. 비록 그 꽃이 곧 시들더라도, 그 꽃에게 내년은 없더라도, 내가 가야할 길이 사라졌더라도, 나는 그런 네가 좋았어. 화려하게 피어나는 장미가 아니라 이름 없는 들꽃이더라도, 난 너를 좋아했을거야. 쿠로. 길고 긴 세월을 사는 나에게, 인간은 부질없을 지도 몰라. 하지만, 쿠로 너는. 너만큼은. 나에게 일평생을 못잊을 존귀한 것이 되었어. 나만의 쿠로. 나만의 꽃.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줘.




#




'조금'이라는 시간은 짧았다.

"콜록, 콜록-"

쿠로의 기침 횟수가 나날이 늘어났다. 아예 하루종일 누워있는 날도 있었다. 피를 토해내고, 헛구역질을 하고, 식은땀과 고열을 반복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쿠로는 밥을 못 먹었다. 약만 입에 털어넣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쿠로는,

"약 먹으면 낫는다며."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수척해진 얼굴. 가빠진 호흡. 짙어진 어둠. 열린 마루 너머 날벌레 소리가 들렸다. 보름에 가까운 둥근 달이 밤의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아아, 기분나빠. 이게 마지막일리가 없는데. 쿠로는 아직 멀쩡한데.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데.

"후회하지..않아."

손끝이 떨려왔다. 그게 내 손인지, 쿠로의 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맞잡은 떨림이 전해져왔다. 큰 귀가 쳐지고, 꼬리는 힘없이 흔들렸다.

"너를 데려온 것도, 너와 가족이 된 것도."

슬프진 않았다. 코 끝이 찡하지도 않았다. 한낱 인간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요괴가 슬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일이었으니까.

"사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말하지마. 무리하지마, 쿠로. 힘들잖아..."

그럼에도, 나는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었다. 발끝에서부터 저릿하게 느껴지는 아픔. 피를 쏟아내며 걸어가야하는 길. 이 험한 길 끝에 네가 있을까?

"요괴를 가까이하면... 그 자체만으로, 수명이 줄어든다는 거."

​인간을 가까이 하지 마라.

지금껏 희미했던 고동이 강하게 울려퍼졌다. 악마가 심장을 쥐어뜯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망치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소리가 났다. ...왜. 왜? 왜?? 왜 이제서야 날 괴롭혀? 저기, 이봐요. 아무나 대답좀 해봐. 금기가 말하는게 이거였어?

"알고.. 있었어."

...너무하잖아. 요괴들을 위한 금기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한 금기였어? 우리가 가까이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수명이 깎여내리니까? 너무해. 너무하다고. 애초부터 공생따윈 바랄수도 없었던거야? 불가능했던 거야? 한낱 들꽃과 일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다짐따위, 부질 없었던거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꺾인 꽃. 나 때문에 꺾여버린 쿠로. 미안해. 미안해, 쿠로. 내가 아니었으면 너는 조금 더 오래 이 삶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 나 때문에 네가, 아무것도 몰랐던 나 때문에 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외로움을 달래려 한 내 욕심이... 지금을 초래한거야."
"쿠로....... 미안. 미안. 미안해..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쿠로 곁에 계속 있어서. 나 때문에 쿠로가-"
"나야말로 미안해. 내가.. 가버리면, 너는 또... 혼자가 되는데."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하는 날 위해 쿠로는 웃어주었다. 쿠로의 기나긴 손가락을 붙들고 사과하는 날 위해 쿠로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위로 받아야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눈물나도록 슬픈 사람은 내가 아닌데. 쿠로는 나보다 강했다. 그 끝을 이미 알고 있어서, 덤덤했을지도 모른다.

"켄마. 내 옷... 언젠가 꼭, 입어줘."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기대할테니까."

쿠로는
나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끝은, 생각도 안하고.



#




바람이 분다. 남자는 낡고 허름한 일기장의 마지막을 닫는다. 눈을 떠본다. 여전히 텅 빈 바람소리만이 가득하다. 세월의 바람을 맞아 닳고 닳은 바위의 둥근 모서리를 쓸어내린다. 남자가 입은 유카타는 검고 검었다. 가까이 보아야, 자세히 보아야 특유의 붉은 빛 한줌이 보일 정도였다. 남자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처럼 보였다. 어린 날의 한 때처럼 큰 귀와 꼬리를 내놓던 그가 아니었다. 꼬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매끈한 옷매무새만이 남아있었다.

"....둔갑하는 거 잘하게 됐어."

그는 성장했다. 쿠로오라는 이름의 들꽃을 잃고 나서야, 성장이 시작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길어지는 팔다리에, 그는 당황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더이상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지 않았다.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단지 그뿐이었다. 품 속에 고이 간직한 옷 한벌과 함께.

"약간 크지만, 이 유카타도 입을 수 있게 됐어."

옷에서는 냄새가 묻어나왔다. 쓸쓸하고, 외로운 보리의 냄새. 그로부터 셀 수 없는 긴 시간이 흘렀건만, 그 옷만 입고 있으면 남자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소리. 자신을 부르는듯한 환청. 머리를 쓰다듬는 익숙한 손길. 이 모든게 진짜처럼 느껴지곤 했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너와의 것은 한 계절에 불과했어."

한 계절. 한 절기. 그 찰나에 피어난 들꽃 한 송이.

"그래도 나름... 즐거웠어."

남자는 가슴 속 깊이 들꽃을 묻는다. 이름을 묻는다. 추억을 묻는다.

"고마워, 쿠로."

빛바랜 시간을 묻는다.





*리마님의 캘리그라피입니다.
*쿠로켄 전력 60분
*22차 쿠로켄 전력 주제: 막대 사탕
*요괴au
*카라스텐구 히나타 잠깐 언급합니다.
*생이 얼마남지 않은 인간 쿠로오 X 여우요괴(妖狐) 켄마





W. 멜






바람이 분다. 바람을 따라, 머리칼이 흔들린다. 흐드러지는 바람결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푸른 잔디의 내음이 흩어진다. 일렁이는 바람은 창백한 그의 피부를 훑어내리며 옷자락 사이로 파고든다. 남자의 유카타는 먹물을 한가득 부어놓은 칠흑빛 어둠이었다. 칙칙한 어둠 사이로 수놓아진 붉은 별 한 줌. 그것들은 내리쬐는 햇빛속에서도, 그늘진 음영 속에서도, 좀처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늘어진 소매가락은 남자의 손등을 가린다. 긴 소매는 바람결이 나부끼는대로 흔들린다. 사락거리는 풀 사이로 보이는 돌덩이 하나. 잿빛으로 몸을 두른 그것은 세월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 날카로운 형태를 잃고 둥글게, 둥글게 닳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무릎을 굽힌다. 긴 손가락을 뻗는다. 그 손 끝에 닿아오는 차디찬 감촉. 이내 쓸어내린다. 낡고 부셔져가는 일기장의 한켠을 열어보듯, 바위를 쓸어내린다.




#




희뿌연 장막같은 옛 기억속에서 막연히 알고 있던 것은 존재 의의였다. 요호(妖狐).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쓰는 여우이자, 마물이라 불리는 요괴. 자각과 동시에 그 피에 새겨지는 불문율.

​​​'인간'을 가까이 하지마라.

자아조차 없던 어린 나에게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앙뿐이었다. '인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에서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주어진 동아줄에 매달렸다. 자신이 어디쯤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건지, 주변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흥미조차 없었다. 계절은 돌고 돌았다. 영원할것만 같았던 밧줄에도 부스럼이 끼기 시작했다. 작은 틈으로 시작된 부스럼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왜? 왜 인간을 피해야 하나? 우리는 왜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아야하지? 인간이 뭐길래? 무조건적인 믿음은 의외로 간단히 부서졌다. 필요한 건 단지, 실날같은 의문 하나. 결국 밧줄을 놓아버렸다. 잡고 있어봤자, 누구 하나 내 의문에 대답해줄리 없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나의 성장은 그 날이후 멈춰버렸다. 나는 반토막짜리가 되었다. 인간다운 눈코입과 팔다리. 그리고 마물다운 귀와 꼬리.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토막짜리는 필요 없었다. 배척 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 세계의 이치였고, 진리였다. 사라지지 않는 여우귀와 여우꼬리에 불만은 없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비로소 풀릴 때, 다시 성장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기에. 홀로 동떨어진다는 것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름모를 들꽃 한 송이. 손가락 사이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산들바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을 때, 줄을 놓아버려 다행이다ㅡ, 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반토막짜리 나에게도 친구는 있었다. 여우요괴가 아니라 까마귀, 였지만. 쇼요는 카라스텐구였다. 나랑도 급이 달랐다. 여우요괴가 되다만 반토막이와 카라스텐구 일족의 수장의 아이. 그 타이틀 답게 쇼요가 가는 길은 하나같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쇼요.. 역시 관두자..응?"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괜찮아, 괜찮아!! 절대 모를 거야!! 요괴로 분장했구나~ 하고 믿어버릴걸?"
"하지만..."

오늘은 '인간'들의 축제가 열리는 날이래! 같이 가보자, 켄마ㅡ.

쇼요는 신나보였다. 뺨을 스치는 검은 깃털 속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를 끌고 앞장서는 조그마한 손바닥에는 웃음소리가 묻어 있었다. 쇼요는 불문율이 무섭지 않은건가? 나는 무서웠다. 불문율 자체에 의문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불문율을 아예 깨뜨려 버린다? 등골을 타고 공포가 엄습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 공포심은 살점의 일부를 뜯어낼 때의 고통과 맞먹을정도였다. 본능이 자꾸만 발걸음을 늦췄다. 쇼요를 따라 걷는 속도가 느려져갔다. 차라리 넘어질까. 발을 헛딛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되돌아가자. 인간에게 가까이 가면 안돼.

우습게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인간과 요괴라는 저울질 속에서, 나는 '인간'이란 존재를 택했다. 무작정 막아서고 마는 본능보다, 나의 치졸한 호기심을 택했다. 세포하나하나가 이를 거부하고 있었음에도, 쇼요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켄마, 너도 보이지? 오길 잘했지??"

첫번째는 붉었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 붉은 등이 거리마다 가득했다. 두번째는 시끄러웠다. 언제나 조용하던 우리들(물론 우리 여우 요괴들 말이다. 카라스텐구들은 요괴들 치곤 유달리 시끄러웠다.)과는 달랐다. 세번째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뭔가를 '먹을' 필요가 없는 우리들에게 '맛있는' 냄새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인간'은 우리랑 다르구나.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우스꽝스럽고,

"...예쁘다."

뒤늦게 한손으로 입을 가렸다. 쇼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아, 그래.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 예뻤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웃으며 떠드는 그들이 예뻤다. 검은 융단을 펼쳐놓은 하늘아래, 인간들은 그 어떤 생명보다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저마다 알록달록한 무지개를 품속에 지니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넋을 잃었다. 인간을 가까이해선 안된다ㅡ, 피를 토하며 마음 한구석을 두드리던 불문율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채 흥에 겨운 인간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쇼요마저 내버려둔채 말이다.

수많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들어가, 제일 먼저 찾아낸 것. 새빨갛고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것. 옆에 지나가는 꼬마들이 입에 베어물고 있는 것.

"어서 와라."

긴장했다. 꼬리털이 쭈뼛- 섰다. 인간이 말을 걸었다. 어떡하지? 귀랑 꼬리가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요괴라는 걸 한번에 눈치채면 어쩌지? 나는 요괴가 아니라고 해야하나?

"사과 사탕이 마음에 드나보구나."

...뭐야. 별거 없네. 귀가 쫑긋 세워지고 꼬리털을 부풀린 만큼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외의 평범한 대화에 맥이 풀려버렸다.

"사과...? 저 빨간거?"
"이걸 처음 보니?"
"응."

인간은 이상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당연한 걸 모르냐는 듯한 얼굴. 그 와중에 나는 관찰하고 있었다. 얼굴 한가득 자리잡은 깊은 주름살. 세월과 늙음의 증거. 수천년의 세월을 홀로 지세우셨다는 수장님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 신기한 나머지, 나는 그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 보았다.

"꼬마야 몇살이니? 부모님은 어디계시고?"

몇살..이라니. 그런게 의미 있나?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굳이 세어보려 한적도 없었다. 하긴, 인간의 수명은 100년도 안된다니까. 일일이 햇수를 세어가면서 살아가는구나... 인간은 귀찮겠다.

깜박하고 대답을 안했다. 인간은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음..... 기분이다! 하나 받거라! 무척 달콤하단다-"

인간은 나에게 '사과 사탕'을 주었다. 새빨갛고, 동그랗고, 반짝이는 것. 망설이고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갖다댈때,

파앙-

검은색 융단위로 펼쳐진 빛의 향연. 아삭하게 씹히는 사과와 달콤한 설탕이 자아내는 합주곡. 내 눈으로 본 인간들은 상냥했고, 황홀했으며, 감탄을 자아냈다. 오색빛깔로 일렁이는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훗날, 그 때 하늘을 수놓은 빛의 행진이 '불꽃놀이' 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쇼요."

혀끝을 움직일때마다 사과의 향과 달콤함이 곳곳에 퍼졌다. 코끝을 감도는 웃음의 냄새가 털 한올한올에 배여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사실은, 좋았다. 이렇게 좋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빨리. 인간을 보러 내려오는 거였는데. 이 굉장한 걸 보고도 나는 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산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지긴 할까? 뒤에서는 손가락질 당하고, 앞에서는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그곳으로?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 있고 싶었다.

'무척 달콤하단다~'

달콤했다. 사과 사탕이상으로, 인간들은 달콤했다. 바라지도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덥썩 손에 쥐어주었다. 이해관계, 계급, 서열, 그리고 차별. 인간은 그런걸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걸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만.. 조금만 더 인간의 곁에 있고 싶었다.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 달콤함을, 한 번더 느껴보고 싶었다.

"쇼요?"

멍청했다. 인간에게 한눈을 팔다 하나남은 친구까지 잃어버렸다.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데. 운좋게 돌아간다 한들, 쇼요는 인간들 틈에 섞여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멍청이. 멍청이멍청이멍청이. 한 손에는 베어문 사과사탕을 들고, 짧은 다리로 쫑쫑 뛰다시피 찾아다녔다. 태생부터 남다른 아이였다. 혹시라도 뭔가 트러블이라도 생긴거라면...

"어딨어... 쇼요..."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날 혼자 두지마..."

사실은 외로웠다. 혼자가 되는게 두려웠다. 아무리 인간이 달콤하다 한들, 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여기서도 나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사무치는 외로움과 공백을 채워줬으면 좋겠다. 나는 점점 더 빨리 걸었다. 어미를 잃은 새끼가 필사적으로 애정을 호소하는 마냥, 미친듯이 쇼요를 갈구했다. 아니, 꼭 쇼요일 필요는 없었다. 우연히 그 빈자리 옆에 쇼요가 존재했을뿐. 그래서 그 때의 나는 그렇게나 쇼요에게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 틈에서 쇼요를 찾고 찾고 또 찾다, 어느새 축제의 끝자락에 닿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달콤한 사과 사탕과 화려한 불꽃에 마음을 빼앗겨, 인간의 본질따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




구더기가 피부를 타고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쓰레기가 썩어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볼에 닿아오는 축축한 자욱, 날파리가 귀를 앵앵거리는 소리, 전부 처음이었다. 나는 쓰레기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시작은 순전히 그들의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야야, 이거 봐봐. 신기한 애다.'
'귀가 여우 같아!! 얘, 만져 봐도 되니?'
'으아, 말랑거려. 진짜 같아!'

내 주변을 둘러싼 인간들은 나랑 체구가 비슷했다. 인간의 아이들은 내가 신기했나보다. 쫑긋 세워진 귀가 신기했나보다. 그러려니 했다. 쇼요 말대로,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인간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절부절한 표정들이었으니까. 귀엽다? 그래, 그 비슷한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진짜야.'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딱히 요괴인걸 숨길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야, 인간들은 상냥한걸. 나에게 달콤한 걸 주었는걸. 웃어주었는걸.

'이쪽에 꼬리도 있어!!!'
'대단해!! 엄청 리얼하다!!!'

신나보였다. 쏟아지는 관심이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무관심보단 나았으니까. 그래도 꼬리를 건드리는 건 그들의 실수였다. 저들은 이게 장난일지 몰라도, 이쪽은 소중한 몸의 일부였으니.

'아파!!'

꼬리를 잡아당기던 인간 아이 손에는 털 한웅큼이 쥐어져 있었다. 소중한 나의 일부가 뜯겨져 있었다. 경계심이 잔뜩 피어올랐다. 부풀어 오른 꼬리를 뒤로 감추고 이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인간이 상냥하고 웃음을 줬다한들, 용서할 순 없었다.

'...아프다니.'
'뭐야. 귀도, 꼬리도... 설마 진짜?'

전세가 역전되었다ㅡ, 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거겠지. 아니, 처음부터 전세는 인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수가 옳은 사회, 이치에서 어긋나면 몰아세우고 마는 구조. 요괴나 인간이나, 다를 것은 없었다.

'괴물....'

방아쇠는 당겨졌다. 타겟은 오로지 나. 그들과는 다른 나. 그 작은 외침은 끝없는 메아리가 되어 바이러스가 퍼지듯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괴물이야!!!!'
'요괴다!!!'

인간들은 도망쳤다. 못볼 걸 본 마냥, 추하게 뒷걸음질 쳤다. 전부 다는 아니었다. 일부는 오히려 보란듯이 내 앞으로 다가왔으니까.

"이 쪽 보지마!! 썩 꺼져!!!!"
"너따위를 위한 축제가 아니야!!!"
"가버려!! 가버리라고!!!"

돌을 던졌다. 어떤 돌은 터지기도 했다. 터지더니 물렁하고 깨름칙하고 비린 액체가 머리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꼬옥 쥐고 있던 사과사탕은 바닥을 뒹굴었다. 달콤한 설탕 코팅 위로 흙먼지가 진득하게 묻었다. 더럽고, 더러웠다. 다시는 손에 쥐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사탕발림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믿고 싶지 않았다. 돌에 맞은 이마가 뜨거웠다. 선혈이 시야를 가렸다. 돌을 피해 뒷걸음질치다, 발을 헛딛었다. 미끄러졌다. 넘어진 곳이 아팠다. 유리조각이 살을 찢고 파고들었다. 온 몸이 아팠다. 하늘 높이 오른 새 한 마리가 단 한발의 총성에 땅에 쳐박히는 것처럼. 마음이 진흙투성이였다. 엉망진창이었다. 비웃음 소리가 가득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상처투성이로, 피투성이로, 기어가다시피 했다. 후회라니. 여기가 좋다고 마음 먹은지가 방금전이었는데, 후회라니. 손등에 혈관이 튀어나올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치가 떨릴 정도로 인간에게 질려버렸다. 돌아가고 싶었다. 차라리 혼자가 나았다. 후회했다. 이럴바에야 따라나오지 말걸. 어떻게든 산에 남아 있을걸.

"쇼요... 나 돌아갈래... 괜히 따라 나왔어.. 집에.. 집에 돌아가고 싶어... 인간따위.. 인간따위...."

쓰레기 더미는 대답이 없었다. 외로움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곳에 홀로 있었다. 인간에도 요괴에도, 어느 한쪽에도 섞이지 못한채, 홀로 있었다.

"정말 싫어."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확실히 말했다. 인간따위 정말 싫다고. 더이상 인간에게 기대해지 않겠다고.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곳으로 돌아가고 말겠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몽롱해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오야?"

감겨오는 눈꺼풀 사이로, 큰 인영이 보였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음표를 타고 날아왔다.




#




딸랑- 경종이 시원하게 울렸다. 나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경계하고 있었다. 죽어라 벽을 붙들고 있었다. 눈을 떴더니 모르는 곳에 누워있었다. 상처와 먼지, 그리고 쓰레기 범벅이었던 내 몸은 하얀 천으로 둘둘 싸여져 있었고, 심지어 뽀송뽀송하기까지 했다. 은혜를 입었다. 감사의 말을 할 생각이었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깨끗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상처들을 안아프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인간'만 아니었어도.

"어~이."

인간은 싫어. 절대 싫어. 말도 섞지 않을테야. 인간은 날 괴물취급했어. 돌을 던졌어. 절대 용서 못해. 불쾌함, 꺼림칙함, 분노가 한 송이의 꽃이 되어 만발하고 있었다. 감사의 기분따윈 사라진지 오래였다. 불행히도 사방은 막혀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가능하면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최대한 웅크렸다. 하지만, 그 인간은 내가 그러든 말든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거 정말 맛있는 건데 진짜 안먹어?"

두 손으로 귀를 쥐어 내렸다. 큰 귀는 머리를 감싸고도 남알다. 또 맞을지도 모른다. 맞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른다. 손가락질 당하고 싶지 않았다. 저런 달콤한 말로 들뜨게 하고, 밑바닥으로 추락시키고 마는 것이 인간이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손끝이 떨리니 잡고 있던 귀도 떨렸다. 잔뜩 말아둔 꼬리털 한가닥한가닥이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이름이라도 알려줘봐. 계속 어~이 라고 부를수도 없고."

반응하지마, 내 귀. 멋대로 쫑긋 솟아오른 귀 한쪽이 부끄러웠다.

"상처 투성이인걸 주워와서 다친 데 약발라주고 잠도 재워줬는데 계속 이러기냐?"

콕콕- 양심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또아리를 틀고 있던 꼬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말을 섞어도 괜찮을까? 또 나만 상처받는 건 아닐까? 그래도 은인인데. 은혜를 입었는데. 실눈을 떴다. 아주 조금, 조금만 돌아 보자. 그 인간은 키가 컸다. 수장님도 저렇게 크진 않은데. 인간이란 역시 미지의 생명체야.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코끝을 감도는 달짝지근한 내음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어디선가 맡아본, 아주 익숙한.

"아 이젠 나도 몰라- 나가고 싶으면 나가. 안말릴테니까."

인간의 손에는 빨갛고, 둥글고,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사과사탕! 조금 작지만, 그 때 먹었던 사과사탕이 확실했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들고 귀를 팔랑거렸다. 꼬리까지 좌우로 흔들렸다.

"오? 이게 좋아?"

좋았다. 비록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처음 맛본 달콤함이었으니까. 인간은 픽, 웃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보란듯이 사탕을 살살 흔들면서. 어딘가 꺼림칙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조심해서 나쁠건 없었으니까. 한걸음 한걸음, 느릴법도 한데 인간은 먼저 다가오길 기다려주었다. 인간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시선은 높아졌다. 인간 주제에, 사탕을 높이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뛰어봤자 닿지 않는 높이였다. 그래서 마냥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이러고 있으면 불쌍해서라도 주겠지.

"어라라, 점프 안해? 개나 고양이는 잘하던데."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기분 나빠. 자물쇠를 걸어두려 했던 입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깃털처럼 벌어졌다. 인간과는 절대 말섞지 않겠다던 굳은 다짐이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개나 고양이가 아니니까."
"역시 여우구나."
"동물도 아니야."
"그럼 요괴?"

대답하지 않았다. 응, 이라고 답하면 어떤 얼굴이 될까.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날 혐오할까? 아니, 라고 답하면 귀와 꼬리는? 뭐라고 변명해야하지? 나는 왜 이딴걸 고민하고 있을까?

"작은 여우 요괴씨. 이거 줄테니까 이름 알려줄래?"

혐오하지 않았다. 손가락질도, 욕지꺼리도, 돌팔매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어르고 달래지 못해 안달나보였다. 사탕. 달콤한 사탕. 받아도 될까. 이름을 알려줘도 괜찮을까. 덥썩 물기에는 조심스러웠다. 기대했다가 호되게 당한 기억이 방금처럼 생생했으니까.

"...왜?"
"이름을 알아야 편하게 부르지~ 참고로 난 쿠로오 테츠로."

인간은 당당해 보였다. 엄지까지 척 들며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의미불명이었다.

"왜 데려왔어?"
"아 그쪽?"

머리가 신기했다. 허공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난 머리카락이 쇼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건 아니었다. 인간의 머리카락에는 생명이 깃든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머리카락이-

"난....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괴물에, 요괴에..."
"그딴 건 몰라."

인간은 몸을 수그렸다. 덩달아 내 시야도 낮아졌다. 가까웠다. 아까처럼 도망치진 않았다. 나의 지독한 이 열등감에, 인간은 어떤 대답을 해줄지 궁금했다. 가늘게 웃고 있는 미소 너머에 진실이 궁금했다.

"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해. 상처투성이인 너가 우연히 보였고, 그대로 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을뿐이야."

인간은 제멋대로였다.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에게 상을 주듯, 손길이 쏟아져 내렸다. 나쁘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ㅡ,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격려해주는 것 같았다. 헤벌쭉까진 아니더라도 미소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간질간질한 느낌. 민들레가 볼을 간지럽히는 느낌.

"그래서, 이름은?"
"......켄마."

인간은 내 손에 사탕을 쥐어주었다. 사과 사탕보다 훨씬 작았다. 심지어 맛도 달랐다. 달콤한 사과가 아니라, 딸기가 혀를 감돌았으니까. 두번째로 입에 넣게 된 사탕은 새콤달콤했다. 처음 느꼈던 즐거움의 아삭함은 아니었다. 하지만, 솜털같은 빗방울에 저도 모르는 새 조금씩 젖어드는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쿠로오. 쿠로, 쿠로, 쿠로. 나를 한가득 채워버린 이름. 그 때는, 쿠로를 불러보지도 못한채 그저 입만 작게 벌렸다 닫았을 뿐이었다.






*분량이 길어져 상,하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쿠로아카 전력 60분
*뱀파이어au
*뱀파이어 쿠로오 X 혈액 과다증 아카아시




W. 멜






창문에서 내리쬐는 땡볕에 커튼을 친다. 드러난 허벅지위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 땀이 마르며 서늘해지는 감각. 피곤하다. 의자를 한껏 뒤로 제낀다. 짧은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흔들린다. 눈이 감길듯 말듯. 이마에 손을 올린다. 손이 뜨겁다. 이글거리는 여름 자락이 남아있다.

"손목에 테이핑 뭐야?"

익숙한 목소리에 단잠이 날아가려 한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안전벨트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기를 원했건만. 가늘게 눈을 뜬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호박빛 눈. 들뜬 어깨에서부터 느껴지는 하이텐션. 나참, 합숙하러 가는 길이 뭐가 그리 신난다고. 그를 상대하는 것과 그가 삐쳐버리는 것.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뭐야뭐야 궁금해!!! 궁금하다고 아카아시!!"

이럴 줄 알았어. 한숨이 절로 튀어나온다. 미미하게 찌푸려진 미간. 이마에 얹은 손이 구겨진 미간을 가린다.

"피곤합니다.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잠에 취한다. 목소리가 한껏 깔린다. 피곤과 짜증이 섞여있다. 그의 흥 소리가 의식과 무의식 너머로 들린다. 그의 기분을 신경써야하나? 도착하자마자 연습시합이 있을텐데. 컨디션이 나빠지게 둘 순 없는데. 오래간만의 네코마랑 합숙이니까. 아아, 네코마. 기분이 저조해진다. 여러가지 의미로. 결국 말해버린다.

"요즘 손목에 무리가 온것 뿐입니다. 걱정 안하셔도 되요."

손목에 무리. 무리라면 무리일 것이다. 이마위에 얹은 손. 그 손목을 칭칭 동여맨 테이핑. 코 끝에 닿아오는 희미한 피 비린내. 그리고 네코마. 제기랄. 수면 욕구가 달아난다. 앞으로 약 1시간. 죽어라 그 인간 생각만 나겠군. 억지로 눈을 감아본다. 꿈이라도 꾸고 싶다. 현실을 부정하는 꿈. 행복한 결말을 만드는 꿈. 마냥 웃을 수 있는 꿈.




#




"오랜만입니다-"
"욥! 쿠로오! 우리 왔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의 합숙. 삐걱이는 체육관 바닥의 내음. 찢어지는 매미 소리. 끈적이는 오후의 바람. 벌써 샤워하고 싶다. 차가운 물에 한껏 몸을 맡긴채,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다. 손목이 욱씬거린다. 피부에 달라붙는 테이핑이 불쾌하다. 테이핑 아래 감춰진 그것이 불에 데인듯 화끈거린다.

"지각생들 주제에 말이 많다?"

그 불쾌함의 원인. 쿠로오씨는 허리에 손을 얹는다. 언제나 처럼 입꼬리만 올리며 웃고 있다. 뜻 모를 미소. 그 꺼림칙한 미소에 얼마나 농락당해 왔는지. 시선을 피한다. 손목에 피가 안통하는 것 같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곳이 불에 데인듯 화끈거린다. 스트레칭을 하고 웜업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언제나와 같은 합숙. 언제나와 같은 연습시합. 단지 그뿐인데. 신경쓸 이유따윈 전혀 없는데.

"윽-"

리시브를 하다가도,

"보쿠토씨!"

토스를 하다가도. 손목이 아파서. 테이핑한 그곳 아래가 따끔거려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엇나간 토스는 콤비 미스로 이어져 버린다. 젠장.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 사람 따위, 쿠로오씨 따위, 널 보지도 않아. 정신차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붙잡는다. 그 손목에서부터 피어 오르는 아픔. 진짜일리 없다. 깊이 패인 상처는 그저께 아물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신적인 문제다.

"아카아시, 손목 괜찮은 거 맞아?"
"테이핑 한지도 꽤 오래 됐잖아."

기어코 타임아웃을 부른다. 걱정스러운 눈길. 저들 속에는 일말의 가식도 없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이건 자신이 안고 가야할 문제였다. 손을 내젓는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별일 아니라는 듯.

"아아, 괜찮습니다. 모기가 손목을 물었거든요."

아차. 하필이면 생각난 단어가ㅡ. 믿을까? 이 말도 안되는 말을? 식은 땀이 흐르는 와중, 정적. 부원들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할때,

"푸핰ㅋㅋㅋ 아카아시 손목에 모기라고?!!ㅋㅋ"

호탕하게 웃던 그는 뿌리는 파스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말은 안해도 누구보다 걱정스러웠을테니까. 그런 그의 기대를 와장창 깨뜨린 나의 대답은 그를 웃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웃음소리가 체육관 전체로 울려 퍼진다. 그를 따라 부원들이 하나둘씩 웃기 시작한다. 이 쪽엔 관심조차 안주던 네코마 사람들이 시선을 돌린다. 실없는 말실수를 후회하진 않는다. 부정하진 않는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어이 쿠로오!!! 들었어?!"

젠장. 후회한다. 부정하고 싶다. 마음같아서는 나불거리는 그의 입에 재갈이라도 물리고 싶다.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가 원망스럽다. 애써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 틈 하나 없이 꽉 동여맨 테이핑을 내려다 본다. 동요하지 말자. 쿠로오씨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을 원할 뿐이니.

"뭘?"

귀기울이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스스로를 세뇌시켜본다. 그럼에도, 온 신경은 쿠로오씨에게 향해 있었다.

"아카아시 손목에 모기 물렸대!!!"
"헤에~ 그 아카아시군이 모기에? 대단하잖아-"

이 쪽을 쳐다본다. 보지마. 보지마세요. 변명이었어요. 당신에게 물렸다고 할 순 없잖아요. 하고 싶은 말들이 목끝까지 차오른다. 그럼에도 입을 열지 못한다. 이유는 단 하나. ...좋아하니까. 이 마음이 넘치도록 좋아하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게 아니니까. 손목이 들쑤신다. 아물었을 상처가 들쑤신다. 그 고통은 혈관을 타고 올라와 심장에 와닿는다. 불규칙적으로 고동치던 그것은 한참이나, 한참이나 진정되지 않았다.




#




밤의 구름 사이로 달빛이 내린다. 여름색의 열기는 어느덧 가라앉고, 여름색의 밤이 찾아온다. 습한 공기. 이름모를 날벌레 소리. 아늑한 밤의 노래. 잔잔한 화음. 뒷정리를 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한 여름밤의 감상에 빠져 든다. 팔에 점점 힘이 풀어진다. 들고 있던 상자의 존재감이 없어진다.

"조심!"

갑작스런 목소리에 눈이 떠진다. 아. 가까워. 쿠로오씨는 떨어뜨릴 뻔한 상자를 받쳐주고 있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닿아있다. 닿은 부위에서부터 전기가 튀어오른다. 찌릿- 하고 통한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부끄러움의 몫은 언제나 나. 착각하고 마는 것도 언제나 나. 상자를 든 손에 힘을 준다. 그의 손길을 눈에 띄게 거절한다.

"멍 때리고 있으면 안되지~ 아카아시군?"

대답할 필요는 없다. 쓸데없는 친절에 익숙해질 필요도 없다. 그와는 그런 관계니까. 쿠로오씨를 지나친다. 마지막으로 쿠로오씨에게 피를 준건 3일 전. 아직 4일이나 여유가 있다. 괜찮다. 그와 마주할 이유는 없다. 그를 무시한채 걸어가 체육 창고의 문을 연다. 어둑한 빛 사이로 먼지 냄새가 풍긴다. 먼지가 쌓인 바닥 한켠에 상자를 내려둔다.

피곤해. 버스에서 한숨도 못잔 것이 폭풍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반쯤 감겨오는 눈을 살짝 비빈다. 하품이 나오려 한다. 누군가는 빈혈 증세 아니냐며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 아니라고 답할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덜컹-

창고의 문이 닫힌다. 새까만 어둠이 밀려온다. 놀랄 법도 하지만 오히려 침착하다. 어둠을 불러온 장본인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내가 언제부터 모기였지?"

야생의 맹수같이 빛나는 야행성의 눈동자. 아니, 현대를 살아가는 그것들에겐 야행성이란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태양이 화려한 낮에도 버젓이 두 발로 서있으니.

"적당히 둘러댄 거니까 신경쓰지 마시죠."

뱀피르(Vampire). 혹은 뱀파이어. 인간과는 다른 존재. 이질적인 무언가. 사람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이종족. 그것은 낡고 고정적인 가치관에 불과하다. 눈 앞의 존재하는 쿠로오씨를 보고 있으면, 그딴 동화같은 이야기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 뿐. 그런 그가 왜 자신에게 존재를 드러내었나. 알 수 없다. 그저, '우연히' 보았을 뿐이다.

"먹고 싶어."

쿠로오씨는 대뜸 팔뚝을 낚아챈다. 오한이 느껴질정도로 차가운 피부. 뱀파이어의 피부는 유달리 차갑다. 몇 번이나 먹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은 익숙해 지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피."

몸을 돌려버린다. 누군가가 본다면 백허그로 오해할 만한 행동거지. 붙잡은 손에 힘을 준 쿠로오씨는 테이핑 근처로 입을 가져간다. 붉은 혀를 살며시 꺼내 살갗과 이물질 사이를 훑어내리면, 그 야릇한 감촉이 온 몸 구석구석을 지배한다. 애써 동여맨 테이핑의 끄트머리를 혀로 문질러댄다.

"또 입니까? 얼마 전에도 드셨잖아요. 일주일에 한번이면 충분히-"
"먹고 싶다고."

단호한 어조. 목 언저리로 느껴지는 그의 서늘한 숨결.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거절따위 할 수 없게 만든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이렇게 된 이상 방도는 없다.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언제나처럼 따끔한 감각뒤에는 끓어넘치는 욕망이 피어오르리라. 그렇기에, 테이핑이 뜯겨져 나가길, 혹은 그 근처를 물어뜯길, 나는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축축한 혀놀림은 목언저리를 쓸어내리고 있었으니.

"잠깐, 목은 안됩니다!!"

목덜미는 안된다. 손목만으로도 충분히 괴롭다. 심할때는 아랫도리가 뻐근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 이상의 쾌감은 위험하다. 그래선 안된다. 그렇게 이성이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혀를 떼어낸 자리에는 끈적한 그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안돼?"
"안됩니다."
"왜?"

알면서 묻는 거다. 능글맞은 사람. 아니, 능글맞은 뱀파이어. 더이상 쿠로오씨에게 느끼고 싶지 않아. 아니. 쿠로오씨가 좋아. 그의 혀놀림도, 피부를 찢어 파고드는 송곳니도, 붙잡힌 손길도, 전부. 쿠로오씨니까 좋은 거야. 눈을 감는다. 이렇게 들뜨고 흥분하는데, 쿠로오씨는 아니니까. 이미 알고 있다. 흘러넘치도록 좋아하고 있다. 이쪽의 일방적인 짝사랑뿐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의 혀는 어느덧 귓바퀴를 훑고 있다. 젖어 들어가는 소리가 생생히 파고든다. 침 범벅이된 귀 위로 후- 불어들어오는 숨결. 머리카락 끝이 비죽 서고, 발가락이 오므라든다. 입이 반쯤 벌어지고 거칠어진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이번엔 날카로운 것이 닿는다. 뱀파이어의 증거라 할 수 있는 엄니이리라. 달라붙어오는 혀와 송곳니는 기어코 피를 내뱉게 한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리는 선혈이 느껴진다. 그는 마치 몇일이고 물을 못 마셔 갈증이 난 마냥 핥고, 빨고, 쓸어내린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더라? 나는 뭘 말하려 했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을 듯 팽팽하게 당겨진 이성의 끈 사이. 간신히 말을 내뱉는다.

"으읏, 목은...너무... 눈에 띄어요."

그래, 목덜미는 안된다. 좋게 포장된 말이겠지만. 내 대답에도 쿠로오씨는 멈추지 않는다. 피를 삼키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온다. 내뱉는 색기스런 한숨이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든다. 귀에서 입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지분거린다.

"모기 물렸다 하면 되지."

쪽 소리가 나도록 귓자락에 입을 맞춘다. 귀는 타액과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가만히 만져본다. 그러던 중 그가 뱉은 단어가 떠오른다. 모기. 아, 더럽게 정겹다.

"...그거 뒤끝입니까?"
"글쎄~"

찌익- 테이핑이 뜯긴다. 길고긴 테이핑 곳곳에는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혈흔. 감춰진 살갗이 드러났을 때의 부끄러움. 손목 곳곳에는 피딱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송곳니가 남기고 간 흔적들이 있었다. 새 살이 돋아 올라 희미해 진것도, 건드리면 금새 피가 비집고 나올만한 것도. 그 흉측하기 그지없는 몸의 일부를, 쿠로오씨는 정성스레 핥고 있었다.

"윽-"

당한다. 칼날이 파고든다. 살을 가르는 고통이 밀려온다. 그것도 아주 잠시일뿐. 지독하리만큼 야한 소리가 어둠을 채운다. 파리한 손목을 타고 붉디 붉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톡, 톡. 흑색의 바닥을 적색으로 물들인다. 매혹적이다. 엄니를 박은채 피의 맛을 음미하는 쿠로오나, 그에 자극당해버리는 자신이나.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척추가 한껏 휘어진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구부러진다. 동공이 풀린다. 쇳소리가 튀어나올 것같다. 그를 좀 더, 좀 더 원한다. 이 목을 내어주고 싶다. 목덜미에 이가 박히면 이보다 더 황홀하겠지? 아아, 느끼고 싶다.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고 싶다. 쿠로오씨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싶다. 눈 앞에 펼쳐진 만화경.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풍경. 피어오르는 쾌락의 날개짓. 세포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감각. 혈관에 피가 말라가는 듯하다. 어지간히 허기가 졌던걸까. 역시 뱀파이어라서? 달콤한 순간은 끝나간다. 그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린다. 손으로 거칠게 문지른다. 그러나 그마저 아까운듯, 쿠로오씨는 혀를 갖다댄다. 핥짝이는 소리가 웬만한 av보다 야하다. 마른침이 삼켜진다. 흡혈당할때보다 이쪽이 더 위험한 것 같다.

"적혈구 과다증이라는 거 말이야."

핏자국을 연신 핥아대던 쿠로오씨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손목을 흥건히 적신 피의 노래. 그리고 피의 노예. 손수건을 꺼낸다. 언제 어디서든 흡혈 당할 수 있기에 상시대기중인 손수건. 그 새하얀 손수건에는 드문드문 얼룩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았던 핏자국이 오랜 벗처럼, 남아 있었다. 손목을 대충 닦고 몸을 낮춘다. 이 근처 어딘가에 묻었을텐데.

"뒤처리는 제대로 하고 말씀하시는게 어떻습니까? 하마터면 피가 다 튈뻔 했잖아요."

혹여라도 흔적이 남아 있으면 뒷 일이 귀찮아진다. 온 바닥을 닦아낸다. 하얀 손수건은 피와 먼지로 얼룩지고 있었다.

"정~말 편리하다니까."

편리. 편리? 분주히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내 병이, 그에겐 편리한가? 그와 나의 사이는 편리한 건가?

"나는 피를 원하고, 너는 피를 원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윈윈 관계!"

웃기는 소리. 필요하고, 필요가 되었기에 성립된 관계일뿐이다. 애정따위 일말도 섞이지 않는 상호관계일뿐이다. 이쪽에서의 일방통행일뿐이다. 알아주지 않는, 아니 알아서는 안되는 짝사랑일뿐이다. 멈춘 손을 다시 움직인다. 얼추 다 닦아간다.

"안 그래?"

웃고 있는 입 사이로 번뜩이는 송곳니 두개. 그를 올려다 보다 무릎을 털고 일어선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서 돌아선다.

"...이만 나가죠. 다들 기다릴테니까요."




#




합숙의 둘째날. 찌르는 듯한 더위와 사방을 가득 채우는 매미의 울음. 눈가를 찌르는 땀방울을 거칠게 닦아낸다. 손목을 둘러싼 테이핑은 새것이었다. 언제 피가 났냐는 듯 완벽하게 상처를 가리고 있었다. 지겨운 더위. 지겨운 매미소리. 지겨운 테이핑. 무료함. 나른함. 어제의 후유증인가. 가만히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쐰다. 움직이고 싶지 않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라고?!! 혈액과다증?!!!"

그런 내 바람은 언제나 빗나갔다. 시끄럽게 조잘대는 보쿠토씨 적당히- 대답해준다. 나의 계획은 그러했다. 그런데 어쩌다 대화의 흐름이 그쪽으로 바뀐건지. 고막을 쾅쾅 울려대는 목소리에 신물이 난다.

"오버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는 적혈구 과다증입니다. 주기적으로 병원만 가면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어요."

주기적으로 병원에... 병원? 쿠로오씨의 새로운 별명인가. 되는대로 내뱉는 버릇은 고쳐야겠다. 선풍기 바람에 말라가는 땀방울이 시원하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만을 만끽하고 싶다.

"피..피 뽑는 거야??"
"네."
"크으윽 아프겠지~~ 아니 이게 아니지! 아카아시!! 그런 중요한 걸 나한테 말도 안하고 있었어?!"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안그래도 작은 그의 두뇌 용량. 쓸데 없는 걱정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손목이 따끔거린다. 약을 발라둘 걸 그랬나. 테이핑만으로는 한계였나.

"그건 그렇지만...! 쿠로오도 처음 듣지?!"
"아니, 난 알고 있었는데."

쿠로오. 이 얼마나, 애증이 담긴 울림인가. 애정이 넘친다. 좋아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증오가 넘친다. 싫어하고 싶다. 미워하고 싶다. 뒤얽힌 감정 뭉치. 의자에 기대 늘어진 팔뚝을 내려본다. 젠장. 터졌나? 붉디 붉은 혈흔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느꼈던 고통은 우연이 아니었다. 더 벌어지기 전에 테이핑을 새로 감아야한다. 바싹바싹 말라붙는 입술을 혀로 축여본다.

"저는 화장실에 좀-"

손목을 감싼다. 최대한 가려본다. 눈에 띄지 않고 싶다. 조용히 뒤처리를 하고 싶었다.

"어디가, 아카아시. 우리 찐-하게 할 일이 있잖아?"

그가 어깨를 붙잡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뭐야!!! 나빼놓고 어디가!!!"
"보쿠토는 절대 모를 일~"

어깨를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다. 뭘까. 설마 하루도 안 지난 마당에 흡혈 욕구라도 끓어오른 걸까. 아, 짜증난다. 원한다면 무조건적으로 내어줘야하는걸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감정도 없으면서. 그럼에도 그에게, 피를 줘야하는 걸까. 그는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 발걸음이 멈춘다. 화장실은 쾌쾌한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 둘만의 공간. 이 묘한 감각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 들게 한다.

"하루만에 또 피가 드시고 싶어요?"
"오늘따라 신경질적이네."

쾅-

등에 닿아오는 벽이 서늘하다. 붙잡힌 양 손목은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하물며 한 손으로 자신의 두 손을 제압하다니. 그의 완력에 놀랄 겨를은 없었다. 목덜미를 핥아내리는 혀와 쇄골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에 정신이 집중되었으니.

"있지, 아카아시."
"쿠로오...씨..!!"

그가 움켜쥔 손목 사이로 덜 아문 상처가 비명을 내지른다. 서늘한 감촉이 닿아오는 곳곳이 열꽃을 피워낸다. 벌어진 입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쿠로오의 것인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황홀스러운 기대. 이대로, 이대로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걸까?

"네 피."

좋아한다 말 한마디 못했다.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먼지처럼 부스러질 것 같았다. 애정 없는 손길로, 사랑 없는 몸놀림으로, 물어뜯기는 건-

"그만..!"

싫었다. 온몸으로 그를 거부한다. 싫다고, 일방통행은 싫다고, 자신을 봐주지 않는 쿠로오는 싫다고.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친다. 그럼에도,

"마시고 싶어."

피를 탐하는 그를 막을 순 없었다. 이대로 끝인 걸까. 몸도 마음도 갈갈이 찢겨진채, 끝나는 걸까.

"아카아시..."

발버둥 치던 손에 힘이 빠진다. 편히 눈을 감고 싶다. 적당히 목에도 모기에 물렸다는 핑계를 대고, 몸을 맡기고 싶다. 좋아하는 마음따위, 짓눌러버리면 그만이다.

"네 피를 줘...."

이걸로 만족해? 마음 속 물웅덩이는 침묵해야 했다. 흔들릴 일이 없어야 했다. 그 잔잔한 물결위로 던져진 돌 하나. 파(波). 의문은 파동이 된다. 물결을 뒤흔든다. 흔들리게 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간다.

"좀 더.."
"제발 그만하세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일순, 힘이 빠진 틈을 이용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낸다. 놀란 얼굴이라기보단, 감히 네가? 라는 듯한. 싫어. 날 그딴 눈으로 보지마. 난, 나는..

"내가!! 당신이 달라하면 몸 내줘야하는 전용 먹이입니까??"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이 빌어먹을 감정만 아니었어도, 당신 비위를 맞출 생각따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을거야. 젠장. 젠장,젠장.

"개같은 병만 아니었으면 당신이랑 얽힐일따위 없었을텐데!!!"

그 놈의 병이 뭐라고. 차라리 그의 체질을 알게 되었을때, 그 야생의 눈을 보았을때, 그를 내버려 둘걸. 건드리지 말걸. 되도 않는 감정 소모하면서 살 바에야, 그 때 죽는게 나았을걸.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씨발, 그렇게 피가 좋으면 다른 사람 찾아보던가!!! 어??"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아카아시, 너는 참 착한 아이야. 올곧은 길을 스스로 찾을 줄 알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 그래서 무섭단다. 인내라는 탑이 무너지는 날, 네가 공들여 쌓아 온 것들이 한번에 무너져 내릴까봐.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조언이, 그 경고가, 지금의 자신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할 말 다 했냐?"

감정에 휩쓸려 뱉어진 말들. 주워낼 수 없다.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으니까. 고함에 가까운 소리는 처음이다. 힘이 들었나보다. 어깨가 들썩이고, 손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래도 멈출 순 없다. 이 지긋지긋한 외사랑을 끝내고 싶으니.

"꼴도 보기 싫습니다. 눈앞에서 사라져요."
"뭔~가 착각하나 본데."

온 힘을 다해 부정했다. 그런데도 쿠로오씨는, 저 망할 뱀파이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방금전까지 내 피를 열광적으로 탐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 걸까. 쿠로오씨는 느긋해 보였다. 그 차분한 목소리와 방금까지 감정을 쏟아낸 자신의 목소리가, 차이를 만든다.

"네 말을 빌리자면 말이야. 이 빌어먹을 관계, 방아쇠를 당긴 건 내가 아니라 너거든?"

꽉 다문 이에 힘이 실린다. 그렇다. 이 빌어먹을 관계는 내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저는 적혈구 과다증입니다.'
'어때요? 먹고 먹히는 관계. 나쁘지 않은거 같은데.'

그 때까지만 해도, 뱀파이어인 그를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보진 않았으니까. 그의 말마따나 편리한 윈윈관계를 위해서였으니까. 제길. 그 때의 내가 틀렸다. 그와 손을 잡는게 아니었다. 이렇게 상처받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의 엄니에 물려 죽어버리는 게 백배는 나았다.

"그리고 너. 자기가 좀 특별한 줄 아나본데."

피식- 비뚤어진 웃음이 칼날이 되어, 비수를 꽂는다.

"너 말고도 내 엄니에 목을 들이밀 인간은 흘러 넘치거든? 죽지 않을정도로 빨아대는 거에 감사해, 이 새끼야."

이게 현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 아아, 알고 있던 현실이다.

"마침 잘 됐네. 손목만 빨고 있는것도 질렸고."

알고 있다.

"네 피맛도 짜증났고."

알고... 있다. 빌어먹을.

"잘 있어라."

망설이지도 않는구나. 그래, 당신과 나의 관계는 이런 거였어. 나는 당신을 위한 먹이 중 하나였고, 당신은 우연히 날 택한 사냥꾼. 이게 올바른 거야. 집착할 이유도 없었어. 당신과 나는 단지 피로 얽힌 관계였으니까. 필요로 하고, 필요가 되는, 윈윈이었으니까.

그의 어깨가 스쳐지나간다. 옷깃이 닿아온다. 손끝이 닿아온다. 지나친다. 그대로, 미련없이, 지나쳐 버린다. 멀어지고, 멀어진다. 빌어먹을 뱀파이어. 사랑하는 뱀파이어. 증오스런 뱀파이어. 좋아하는 뱀파이어. 눈가에 가득차오른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지칠줄 모르고 흘러내린다.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문다. 혀에서부터 느껴지는 뒤얽힌 피비린내와 눈물의 맛. 기필코 떨쳐내리라. 잊어내리라. 지워내리라. 다신 생각치 않으리라. 그가 나간 빈 공간에 홀로, 남겨진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흐드러진 적막. 그의 기척이 사라지기 무섭게,

"왜...."

흩어진다. 애써 지켜왔던 돌들이 흩어진다.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쉴새 없이 무너진다.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던것처럼. 단 한마디도 고백하지 않았다. 좋아한다 말하지 않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억장이 무너지는 건 어째서? 고백을 거절당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왜...드디어 끝났는데......"

언젠가 꿈을 꾼 적이 있다. 내가 고백하고, 그가 기뻐하고, 두팔 벌려 그가 자신을 받아 들이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꿈. 씨발. 손목이 아프다. 저릿저릿하다. 테이핑이 피에 젖어간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배어나온다. 코를 가져간다. 피비린내 사이로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목덜미에 손을 가져간다. 아직 축축하다. 타액으로 적셔진 목언저리를 쓸어내린다. 그의 흔적. 그의 입술. 그의 머리칼. 그의 손길. 그의 눈. 전부, 남아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고 싶은데도, 지워지지 않는다. 흉터처럼 남는다.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평생을 기억하도록, 흉터처럼 남는다.

손목을 붙든다. 배어나오는 핏망울 위로 눈물이 섞인다. 피는 옅어지고, 눈물은 짙어진다. 마냥 흘러내리는 그것들이 자신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마음의 웅덩이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알길이 없다.

나의 처음. 첫 사랑. 그 짝사랑은.

잔인하게
밟히고
찢겨지고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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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피부를 웃돈다. 덕분에 생각하기도 싫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픔, 고통, 눈물의 소용돌이로 가득했던 기억의 단편. 자신이 내뱉은 말자락도, 그가 내뱉은 말자락도, 고장난 필름처럼 드문거린다. 숨을 들이킨다. 그 사이로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빨려들어온다.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다. 병원을 빠져나오자마자 덮쳐오는 더위에 숨이 막힌다. 의사의 요구는 간단했다. 다음 주중으로 병원에 들러 피를 뽑아낼 것. 혈액 수치가 위험하다ㅡ고. 그럴만도 했다. 그와의 관계를 끊은지도 벌써 보름이니. 태양이 높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본다. 효과를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 끔찍한 날씨에도 혈기왕성한 사람은 꼭 한 두명씩 있다.

"피 안뽑았다!! HEYHEYHEY-!!"

환자는 이쪽이건만. 괜히 말했다 삐질지도 모른다. 적당히 무시한채 땡볕을 피해 그늘로 가던 중,

"테이핑 뗐네? 모기한테 물린거 다 나았어?"

그는 테이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손목을 향해 말한다. 테이핑. 그리운 울림. 마음 한구석, 찌꺼기처럼 남은 물웅덩이. 그 잔잔한 물결위로 퍼져나가는 파(波). 이미 부서질대로 부서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곳을 두드려봤자,

"...네. 금새 나았어요."

변하는 건 없었다. 깊게 박힌 송곳니 자국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그의 흔적도, 그에 대한 이 감정도, 희미해지리라. 비록 얼마나 울고, 아프고, 고통스러웠을지라도. 한낮의 더위에 지쳐 그늘의 품에서 늘어진다. ​여름의 잔인함에 대해 실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툭, 던져본다.

"...보쿠토씨, 뱀파이어를 믿으세요?"
"응? 갑자기 웬.."
"믿으세요?"
"뭐...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일뿐이고..... 현실적이지 않으니까-"
"저도 그래요."

손목위로 희미한 이빨 자국. 그걸 비웃듯, 말해본다.

"뱀파이어따위, 절대 안 믿어요."









*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카게히나 전력 60분
*전력 주제: 부상
*프로 배구선수가 된 카게야마 X 배구선수로써 재기불능이 되어버린 히나타




W. 멜







"앞으로 1점! 앞으로 1점!!"

5세트 종반. 26-25라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도쿄체육관 내부는 사람들의 뜨거운 함성이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스파이커도, 리베로도, 아닌 세터. 그에게 공이 올라올때면 사람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 지다가 토스가 그의 손을 떠날 때, 사람들은 환호성과 감탄을 내뱉고는 했다. 사령탑. 그것은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한 편, 빼곡한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한 손으로 난간을 짚은채 경기장 내부를 훑어보던 남자의 머리칼은 노을을 닮아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남자.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카게야마.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헤에- 박빙이잖아."

히나타 쇼요. 그는 한 때 카게야마 토비오와 더불어 괴짜 콤비, 혹은 작은 거인이라 불리며 일본 배구의 한 획을 그은 남자였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점프력, 순발력, 그리고 스태미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고, 그가 전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나아갈 대형 에이스임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그는 10번이라는 작은 거인의 번호를 등에 지고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채 프로 배구를 목표로 했다. 그 때의 그에게는 충분히 실현가능했던 목표였다.




#




시간을 되돌려 19살의 겨울. 날카로우면서도 시린 겨울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던 히나타는 목도리가 느슨한건 아닌지, 귀마개가 헐렁한건 아닌지, 이러다 감기에 걸려버리는건 아닌지, 온갖 걱정에 빠진 참이었다. 그런 그를 톡톡- 건드린 것은 카라스노 배구부 고문이자 히나타의 담임선생님인 타케다였다. 히나타가 갸우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타케다는 뿌듯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그에게 종이 한장을 보여준다. 프로 배구 입단 지원서. 한 눈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캐치한 히나타는 종이에 쓰여진 것들을 찬찬히 읽어봤다.

"프로 배구...말씀이세요?"

타케다는 자신이 있었다. 카라스노에서 배구부를 맡은지 약 3년째. 이제 어느 학교도 카라스노를 몰락한 강호라 부르지 못했고, 자신이 허리를 굽혀가며 연습시합을 해달라 간청할 일도 없어졌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눈 앞의 이 아이, 히나타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어설펐지만 부지런히,그리고 열심히 꿈을 키우던 작은 아이는 3년이 지난 지금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대형 에이스. 전국을 재패한 작은 거인. 그것은 지금의 히나타를 가리키는 단어임이 분명했다. 172.2cm. 배구 선수로써 큰 키는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네, 히나타군이라면 스포츠 추천도 가능하니까요. 내일까지니까 천천히 생각-"
"하겠습니다!!!!! 할래요!!!! 아자!!!"

3년간 여전한게 있다면, 히나타의 성장 욕구이리라.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 발전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본다는 것. 포기를 모른다는 것.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그 눈동자 너머에는 이미 프로 배구선수로써 활약하고 있는 히나타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하하, 역시나군요. 그럼 잘 됐네요. 마침 카게야마군이랑 신체검사 받으러 병원에 갔다오려던 참인데, 히나타군도 같이 갈래요?"

카게야마.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히나타는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거짓말하다 들킨 아이처럼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미묘한 반응에 타케다는 안경을 고쳐쓰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던 찰나,

"...프로 배구를 위해서라면 조금 싫은 건 참을 수 있습니다!!"
"히나타 멍청아, 다 들었거든."
"아씨 깜짝이야!!"

흐음, 별일 아닌가. 3년째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타케다는 괜한 설레발이었나 싶어 웃어 넘겨 버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와 히나타 쇼요. 둘 중 한 명을 뺀 상태에서 카라스노를 논할 순 없었다. 카라스노의 원동력, 괴짜 콤비. 그것이 프로배구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귀중한 찬스였다.

"카게야마, 너도 프로 배구 하는거야?"
"당연하지. 3년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세계의 무대에 설거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어울려 줄게~ 카게야마군."
"어울려 줄게가 아니잖아 이 멍청아!!! 어울려 주세요 겠지!!"
"싫거든~~ 아악! 야야 목도리!! 숨막, 숨막혀!!"

이제는 키가 꽤 커진 히나타를 붙잡아 들어올릴 순 없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아웅다웅거리며 배구부의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한 편, 히나타의 목도리를 손에서 놓은 카게야마는 기분이 영 찜찜했다. 어느새부터인가 자신에게 능글맞게 대처하는 히나타. 에이스가 되어버린 히나타. 나날이 스스로의 실력을 쌓아올리는 히나타. 아니, 비단 그것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이 좋네요- 저는 먼저 차로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5분후에 주차장으로 나와주세요."
"네."
"네!"

타케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 즈음, 둘은 언제 붙어있었냐는 듯 멀찌감치 떨어진다. 1미터의 간격. 그 사이를 맴도는 팽팽한 긴장감.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을듯 묘한 분위기 속에서 카게야마는 괜한 돌멩이에 발길질을, 히나타는 목도리를 추스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 묘한 공기를 먼저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히나타.

"야.. 뭔가 말이라도 좀 해봐.."

카게야마쪽으로는 시선 하나 던지지 않은채 목도리 끝의 실밥만 만지작 거리던 히나타의 양 볼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젠장, 뭐,뭐,뭘 말하면 되는데!"
"고백한 건 그 쪽이잖아!!"

'좋아해.'

여느 때처럼 부활동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던 중, 밥먹으러 가자처럼 자연스럽게 들리는 그의 말에 히나타는 자신이 잘못 들은게 아닌가 귀를 후비적 거렸다. 정작 카게야마 본인은 입밖으로 나와버린 고백아닌 고백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늦게 한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말이다. 젠장, 생각하던게 그대로 튀어나왔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카게야마의 빨개진 귓볼을 보던 히나타는 그제서야 그가 말한 좋아해가 뭘 의미하는지,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지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 라이벌, 세터, 그리고 짜증나는 녀석. 온갖 타이틀을 달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연인이라는 것까지 붙일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모를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그 마음이, 그 감정이 혼란스럽고, 낯설고, 무서웠기에, 삼일이나 되는 시간동안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피했다.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활동에 민폐를 끼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같이 있을때면 평소처럼 치고박고 싸웠으니까. 어디까지나 둘만이 있는 시간을 피했던 거니까.

그 시간 동안 히나타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에게 있어 카게야마가 어떤 존재인지. 단지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자신에게 최고의 토스를 올려주는 세터일뿐인지. 그의 고백에, 예스든 노든 확실히 대답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먼저 불렀다. 오늘에서야, 히나타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말을 더듬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단단히 결심한 듯, 히나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카게야마 역시 히나타를 돌아봤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
1초, 2초, 그리고 3초.

카게야마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쥐어짜낸채 덤덤하게 혹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거절은 안 받는다. 같이 가자, 세계 무대."

좋아해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바다처럼 빛나는 청안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때처럼, 괴짜 콤비를 탄생시켰을때처럼,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눈이었다. 어둡고 어두운 음지. 혼란과 어지러움의 파도. 얽혀버린 주홍빛 실타래. 그 위에 눈부신 햇살 한줌이 비치는 것마냥, 히나타는 활짝- 웃어버렸다.

"응!"
"그리고.... 10년이고, 20년이고... 쭉 같이"
"응!!!"

카게야마의 눈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망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 끊지마, 멍청아!!"
"좋아해, 카게야마!!"

콧등에 내려앉은 앙증맞은 눈송이 하나. 가볍게, 그리고 사르륵 녹아내리는 그 눈송이처럼 좋아한다는 말이 카게야마에게 닿아내렸다.

".....젠장할. 치사하게."

잽싸게 도망가기냐. 내리기 시작한 눈들 사이로 멀어져가는 히나타의 뒷모습.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겨울의 바람. 볼에 닿아오는 차가운 감촉들. 거친 말과 달리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




정적. 목 언저리를 스쳐지나가는 소독약 냄새.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한 감각은 어느 누구도 입을 쉽사리 열 수 없게 만들었다. 가벼운 신체 검사를 기대했던 히나타에게 '정밀검사가 필요합니다'라는 말은 낯설고도 불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느낀 건 비단 히나타뿐만이 아니었다.

"네..? 선생님, 지금 뭐라고..."

초점을 잃은 히나타를 대신해 타케다가 남자에게 되묻는다.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얀 의사가운을 걸치고 있는 남자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두사람에게 못을 박았다.

"무릎 인대 파열입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귓 속으로 들어오는 말이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차라리 꿈이었으면,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믿겨지지 않아 히나타는 그저, 그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지경이 될때까지 병원 한번 오지 않고 뭐하셨습니까? 이 정도면 증세가 분명 있었을텐데요."

증세. 증세가 뭐지? 증세가 있었나? 무릎이 아팠나? 어딘가 불편했나? 느리게 돌아가는 머릿속은 의사의 말 한마디를 이해하는데도 충분히 벅찼다. 그러던 중 단편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요새 뭔~가 무릎이 잘 붓네.'

기억속의 히나타는 무릎을 주무르고 있었다. 가끔씩 전력으로 뛰어오를때면 무릎이 깨질듯한 통증이 동반되고는 했다. 놀란 나머지 착지 미스를 몇번 하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파르르 떨렸던 무릎언저리. 모두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자신. 실제로 마사지를 하다보면, 냉찜질을 하다보면, 언제 아팠냐는 듯 무릎은 멀쩡해졌다. 그 날도, 그 전에도, 히나타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무릎을 만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거 큰 일 아니야? 병원 가봐야하지 않겠어?'
'으음... 아프다가도 얼음찜질 하면 금방 나으니까! 괜찮겠지!! 그보다 서브!! 서브 100번 하고 가야지, 츠키시마?!'
'난 너같은 스태미너바보가 아니거든? 먼저 간다.'
'도망치지마라!!!'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되었다. 무릎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스파이크 모션을 취할 때 무릎에서 시린 감각이 느껴지는 것도,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왜 진작에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연습에 빠진 나머지 몸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걸까? 그야, 쉬고 있으면 몸이 굳으니까. 연습은 계속 해야하니까.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생각에 히나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문제였어. 이게... 연습해야한다고, 더 잘하고 싶다고, 쉬지도 않고 무리하는 내 자신이 문제였어. 그럼에도 아직 희망은 있다고, 어떻게든 배구는 할 수 있을거라고. 히나타는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당장 수술 들어가야합니다. 최대한 빨리 일정 잡아주시고-"
"배구!!! 할거에요!! 프로 배구!!"

프로 배구란 말을 듣자마자 얼마나 설레었던가. 프로 팀에서도 카게야마와 한 팀이 되어 스파이크를 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뻤던가. 게다가 그 약속.

'거절은 안받는다. 같이가자, 세계 무대.'

지키고 싶었다. 같이 가고 싶었다. 제발. 불가능하진 않다고, 희망이 있다고. 그 말이 의사의 입에서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간곡하면서도 애절한 눈. 그 눈빛에 누가 흔들리지 않을까. 하지만 남자는 의사였다. 의사이기에 함부로 거짓같은 희망을 주어선 안된다고, 흔들리면 안된다며 결국 현실이 가리키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제 얘기를 뭘로 들으셨습니까. 다른 인대도 아니고 무릎 인대입니다. 배구는 구기 종목에 점프를 필요로하는 스포츠 아닙니까? 염좌만 해도 회복까지 한달은 걸릴텐데 이건.... 수술을 해도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요."
"제발... 제발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기어코 눈가에 흥건히 고인 물방울. 스포츠 선수에게 재기불능이란 말이 얼마나 가혹한지, 얼마나 그 가슴을 찢어발기는 말인지, 의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키가 작은 배구 선수들에겐 자주 있는 일입니다. 남들보다 배로 움직여야하는 그들에게 있어 인대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죠. 현실은 냉정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최대한 과격한 운동은 줄여주시고, 보호자분과 상담해서 가능한한 빨리 수술 일정 잡아 봅시다."




#




함박 눈. 펑펑 쏟아지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있던 카게야마는 자판기에서 갓 뽑아낸 코코아를 한입 들이켜본다. 단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억지로 먹으라 하면 차라리 혀깨물고 죽겠다고 말하며 완고하게 거부하곤 했다. 그런 카게야마가 코코아를 마셨다. 달다. 혀끝에서부터 입천장까지 닿아오는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 혈액을 타고 온 몸 곳곳에 달콤함을 전파하고 있었다. 싫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핑크빛으로 물든 마음 한구석처럼. 새하얀 눈이 모든 걸 축복해주는 것 같고, 볼을 스치는 칼바람은 산들바람마냥 부드럽게 느껴졌다. 첫 데이트는 어떻게 할까?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건 역시 좀... 영화를 볼까? ....커플들은 무슨 영화를 보지?! 젠장!!

달콤한 코코아 같은 고민 한자락. 머리를 마구잡이로 쥐어뜯던 카게야마는 뭔가 생각났는지 주머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든다. 6시 37분.

[카게야마군, 타케다입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 메일이 온지 꽤 시간이 흐른뒤였다. 자신은 신장과 체중, 간단한 혈액 검사밖에 하지 않았기에 금방 나왔건만, 히나타는 도중부터 타케다와 같이 어디론가 가버린 뒤로 저 메일 한 통을 남긴채 감감무소식이었다. 금새 다 마셔버린 빈 종이컵을 한 손으로 구기며 혀를 차던 찰나, 그의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 드디어 끝이냐- 한숨 돌리던 카게야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웬일인지 추욱 쳐져있는 히나타와 그를 부축하며 걸어오는 타케다였다.

"어이, 이제 끝났냐?"

씨익- 웃는 카게야마를 흘깃 보던 히나타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이제 프로배구 지원 서류 준비해야하니까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못 해."
"하? 밥 잘못 먹었어?"
"못 한다고!!!!"

잘못 본게 아니었다. 히나타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타케다는 히나타의 어깨를 꼭 붙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불길한 뭔가. 뭔가가 있다.

"...무슨 소리야."

마주한 그의 눈은
태양같이 맑은 빛이
탁해지고
희미해져
찬란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




시합은 28-28로 접어들고 있었다. 엇비슷한 실력. 체력과 정신력의 싸움. 리베로의 우렁찬 소리에 스파이커도, 세터도, 그걸 지켜보던 관중들도,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함성소리를 내지른다. 2층 제일 앞자리. 난간 손잡이에 몸을 기댄 히나타는 그리운 기억이라도 떠오른 마냥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다. 그의 시선 끝에는 카게야마. 단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카게야마는 여전하네~"

타임 아웃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주변 선수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가 뭔가 이야기하는 모습.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땀을 닦다가도 호탕하게 웃는 모습.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 버렸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의 카게야마는 부원들과 어울리기는 커녕 웃을 타이밍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했을 만큼 인간관계가 딱딱했다. 그는 천천히 변했다. 히나타와 만나면서, 히나타를 닮아가면서, 사람과 친해는 법을 배웠고, 사람을 좋아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자신일 줄 알았다. 그 옆자리에는 자신이 있을 줄 알았다.

"....후회해도 소용없나."

그 날, 병원 앞에서 히나타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판정을 받았는지, 앞으로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감당하기도 벅찼기에,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지나치며

'약속은 못 지키겠다. 미안.'

그 한마디로 끝냈다. 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서로 마주쳐도 약속이나 한 듯 무시하기 일쑤였다. 3일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졸업식이 코앞여서 부원 모두 단순한 다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뿐.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말이 무슨뜻인지 빌어먹게도 한번에 알아채고 말았다. 약속이란게 뭔지, 미안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그래서 피했다.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두 사람이 극적으로 대화를 다시 하게 된 계기는 우스꽝스럽게도, 히나타의 십자 인대 수술 다음날이었다.




#




아프다. 1분 1초가 지날때마다 살이 찢어지는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손등위로 꽂혀진 바늘을 따라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순간 웃음이 튀어나와버렸다. 졸업식이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채, 조용히 수술을 받아서 텅빈 병실에 혼자 남아있는 것. 바보같아- 징그럽게 울려대던 휴대폰은 전원을 꺼둔지 오래였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오빠만 연신 불러대던 나츠는 엄마를 따라 집에 돌아가고, 홀로 남은 병실에는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히나타!!!!"

그 때였다, 카게야마가 병실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뻔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얼굴에 달라붙어있었고,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새도 없어 보였다.

"이 멍청아!! 날 이기겠다며!!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날 이기겠다며!!! 같이 가겠다며!!"

아아, 그렇구나. 부탁드렸는데. 그 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계속 부탁드렸는데. 결국 선생님이 말하셨구나. 뭐, 이젠 상관 없겠지. 카게야마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 다리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그 녀석에게 웃어주었다. 이미 다 끝났으니, 울 필요는 없었다.

"젠장...뭐야 이게...."
"뭐야, 그 얼굴~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평소처럼.. 말한 걸까? 제대로 웃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오랜만에 카게야마랑 대화를 하려니, 예전에는 어떤 식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 어떻게 웃으면서 장난칠 수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새하얀 백짓장.

"배구를 못하게 되는 것 뿐이야."

그래, 그것뿐이야. 난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하물며 걷지 못하게 된 것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수술 후유증도 거의 없어질테니까. 그리고 배구공을 만져보는 거야. 뭐, 점프는 안되겠지만. 코치라던가 해설위원이라던가 분명 재미있을테니까-

"의사 선생님이 재활훈련만 하면 걸어다니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

카게야마의 한 마디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말을 멈췄다. 호흡을 멈췄다.

"너의 6년을 담아 바친걸!!!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냐?!! 못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그럼 그딴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얘기하질 말던가!!! 울것같은 얼굴로 포기하겠다는 말 쉽게 내뱉지말라고 멍청아!!!!"

울 것 같은 얼굴. 헤에, 이상하네. 분명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나.. 미련 가득했구나. 울고 싶었구나.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간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흐려지고,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옷자락의 끄트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버린다.

"네가 안 우니까. 네가 버티고 있으니까! 내가 화를 내야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데. 아파죽겠는데, 마냥 괜찮다 지껄이고 있으면... 지켜보는 사람 마음이 어떻겠냐고..."

후두둑-.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방울은 멈출줄을 모르고 볼을 타고 턱을 타고 흰 옷자락을 흥건히 적셔간다.

"...미안.."

코끝이 찡해지면서 복받쳐오르는 감정. 이게 진심이라는 걸, 온 몸이 있는 힘껏 말해주고 있었다.

"미안.. 카게야마..."

여전히 시야가 흐리다.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끝에 쏟아지는 때아닌 장마를 맞은 듯 흠뻑 젖어가는 새하얀 침대 시트. 카게야마가 어떤 얼굴인지 보고 싶은데, 보이질 않아. 일어나서, 달려가서, 뼈가 부서져라 껴안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죽겠어. 싫어. 아프기 싫어. 배구 못하게 된다는게 싫어. 더이상 뛸 수 없다는게 싫어. 나는-

"...아직... 배구 하고 싶어.."

반응이 없는 다리. 띄엄띄엄 밀려 들어오는 수술후의 고통. 무릎따위 아무래도 좋아. 나는 단지... 그저..

"너랑 좀더...!!!"

흐릿한 카게야마의 실루엣이 점점 커진다. 이쪽으로 오는걸까. 눈물 범벅이고 다리도 못 움직이고 엉망진창인 내 쪽으로 오는 걸까.

"배구 하고 싶었어..!!"

뒷목을 끌어당긴 카게야마의 손은 겨울을 헤쳐나와 무척이나 차가웠고, 그의 품에서는 희미한 눈의 향기와 불쾌하지 않은 땀냄새가 묻어나왔다.

"기다릴게.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사실 이 순간을 고대했을지도 모른다. 제정신이 아닌 자신을, 카게야마가 붙잡아주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 품에서 풍겨오는 눈의 향기에 취해, 카게야마에 취해,

"네가 돌아오는 걸, 코트 위에서 계속 기다릴테니까."

피를 토할듯
오열했다.




#




"삐이이-"
"아. 역시 이겼네."

30-28. 시합종료를 알리는 호각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라 환호하는 사람들. 히나타는 한쪽 귀를 손으로 틀어 막다 관중석쪽으로 직접 와 인사하는 선수들에게로 시선을 내린다. 1번. 세터이자 주장. 그때보다 더 믿음직스러워졌구나, 카게야마. 90도로 푹 숙이며 인사하던 카게야마에게 히나타는 먼저 인사를 건넨다.

"여-"
"어, 왔냐?"
"응."
"이겼어."
"응, 봤어. 카게야마군 절호조잖아~"

히나타는 웃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통, 슬픔, 그리고 눈물마저 무뎌진 성숙한 웃음이었다. 그에 승리를 증명하듯 주먹을 내세우는 카게야마. 히나타 역시 주먹을 내밀었다. 1층과 2층.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분명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은?"
"여전하지- 그래도! 이제 걸어다닐때 아프진 않으니까!"
"무리하지마."
"무리아니야!"
"기다려. 쿨다운 하고 올라갈테니까."

그래, 이제 카게야마는 어엿한 프로팀의 캡틴이니까. 나만 상대할 수는 없지. 히나타는 시야를 넓혔다. 반짝반짝 빛나는 체육관. 배구화와 코트가 닿아 부딪히는 소리. 통통- 튀기는 배구공의 탄력. 사람들의 응원구호. 그리고,

"에어 살롱 파스 냄새!"

이걸 빼 놓을 수 없지! 중학교까지 따지면 자그마치 6년이란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배구를 해왔고, 수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의 청춘이 깃든 곳. 그의 모든 것이 바쳐진 곳.

"....그립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추억의 한조각. 청춘의 조각. 저 무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피땀흘려 노력했던가.

'허접 리시브!'
'내가 있으면 넌 최강이다.'
'거절은 안 받는다. 같이 가자, 세계 무대.'

"뭐야. 배구부에 대한 기억은 전부 카게야마뿐인가?"

불만인냥 입을 삐죽이는 것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그리움과 기쁨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곳곳에 풍기는 배구의 기척. 배구의 열기. 배구의 모든 것.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그러다 마음 속 한켠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어느 목소리에,

'좋아해.'
'좋아해.'
'좋아-'

화들짝 놀라버린다.

"아악!!! 왜 떠오른거냐!!"

미안하다 했고! 같이 못간다 했고! 그 뒤로 말도 안 섞었고! 카게야마도 기다린다 했을뿐이고! 제 머리를 죽어라 쥐어뜯던 히나타는 뒤쪽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눈치챌 틈이 없었다.

"잊어! 잊어! 잊어버려! 이 멍청이!"
"뭐하냐."
"히끅!!"

훔쳐먹다 들킨 사람마냥 딸꾹질같은 소릴 내뱉은 히나타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한척을 해본다.

"카게야마~ 쿨 다운 벌써 끝났어?"
"너가 왔는데 천천히 할 순 없잖아."
"윽, 너,너,너..."

느긋한 척은 역시 무리였다. 게다가 카게야마는 의외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기에, 히나타는 더더욱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져지의 자크를 올리던 카게야마는 시선을 히나타에게 내리 꽂은 채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변한 건 없어. 나는 여전히 널 기다리고 있고."

아아. 좀 멈춰라, 심장아. 심장 소리 너무 크다고! 이러다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앞설때면,

"여전히 널 좋아해."

카게야마는 보란듯이 결정타를 날려버린다. 주전자가 김을 뿜어내는 것처럼 얼굴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오는 감각. 히나타는 자신의 두 손바닥 가득 얼굴을 묻어버린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아주 오래... 기다려야할지도 몰라."
"어."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하지만....."
"알고 있어. 네 몸 하나 감당하기에도 벅차다는 거."

알고 있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말인가. 그 믿음직한 말에 히나타는 새까만 시야를 만들어버린 자신의 손을 내렸다. 눈 앞에 보이는 카게야마. 그 눈동자의 푸른 바다에 끌려들어갈것만 같았다.

"....미안."

한결 같은 대답. 좋아하는데, 정말 좋아하는데, 같이 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대화의 단절. 그 때처럼 또다시 카게야마를 피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피어오를 때,

"멍청이가! 밥 먹으러가자!!"

단숨에 어색함을 깨부숴버리는 카게야마의 한 마디.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에 히나타는 무심코 뛰어오를 뻔했다. 무릎을 살짝 굽히자마자 날카로운 것에 베인듯한 느낌에 그제야 이제는 뛰지 못하지, 라며 뒤늦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에엑?! 아직 4시라고??"
"카레가 먹고 싶어."
"어이! 기다려!! 천천히 가!!"
"이 정도도 못따라오냐 허접아."
"이쪽은 아직 환자거든?!!!"

환자. 앞서나가던 카게야마는 돌을 씹은 마냥 인상을 구기며 멈춰섰다. 이게 아닌데, 이런걸 원한게 아니었는데. 습관적으로 빠르게 걷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히나타는 달릴 수도, 하물며 보통의 속도로 걷는 것 조차 힘들텐데 왜 자신은 히나타만 보면 아직도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건지. 고개를 휘휘 내젓던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봤다.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걷고 있어 위태롭기 그지없는 히나타.

"젠장... 맞춰줄테니까, 힘들면 말해."
"...응!!!"

히나타 옆에 나란히 선다. 히나타의 한걸음에 맞춰 그 역시 한 걸음, 그리고 한걸음. 느긋하면서도 천천히.

두 사람의 간격은 여전히 1미터.
그 때나
지금이나.









*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마츠하나 전력 60분
*24살의 마츠카와X17살의 하나마키
*첫눈에 반한 사람, 마츠카와 잇세이와 과외를 시작하게 된 하나마키의 이야기.




W. 멜





가을의 냄새. 사락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앉는 낙엽소리와 드높은 하늘은 어느덧 계절이 돌고 돌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창가에 서리는 9월. 붉은빛으로 여물어가는 하늘을 좀 더 가까이 보기위해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의자를 옮긴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탁 트인 창문 너머로 하늘이 한뼘 너머로 가까워진다. 그가 하늘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또다른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머그잔을 들이민다.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린 하나마키는 그가 들고온 쟁반위의 것을 보고 김이 빠진다.

"뭐에요- 슈크림 없어요?"

그곳에는 불행히도 슈크림이 아닌 먹음직스러운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이 놓여있었다.

"케이크라도 사주는걸 감사하게 여기는 건 어때?"
"네네~ 감사합니다~"

흥, 아메리카노 시켰으면 한 소리 하려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마츠카와는 그의 입맛을 잘 알고 있었다. 캬라멜 시럽을 듬뿍 얹은 마끼아또. 하나마키는 머그잔을 조심스레 들어 달콤하기 그지 없는 캬라멜 향을 음미하다 못참겠다는 듯 입을 댄다. 달달한 우유 끝에 풍기는 약간의 커피내음이 나쁘진 않다. 그제야 씨익 웃으며 그의 입가에 뭍은 우유 거품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는 마츠카와는 누가보아도 멋스러웠다.

"삐졌어?"
"아뇨~ 전혀~"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꺼내 그의 앞에 털썩 앉은 마츠카와는 케이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딸기를 포크로 집어든다. 그의 입에 넣어 줄까 말까 되도 않는 장난을 치면서 말이다. 그가 입을 뾰루퉁하게 내밀자 그제야 빨갛게 익은 딸기를 그의 입술에 갖다대는 마츠카와. 오물거리며 한 볼 가득 딸기를 품고 있는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다 말을 꺼낸다.

"하나마키."
"엑, 갑자기 뭐에요. 항상 히로라고 불렀으면서."
"기억나? 저 사거리-"

턱을 비스듬히 괸 마츠카와의 시선의 끝에는 창밖, 그 너머의 거리가 보인다. 새빨간 단풍잎과 샛노란 은행잎이 살랑거리는 사거리의 중심. 새록새록 떠오르는 처음의 기억. 그를 따라 턱을 괴던 하나마키의 눈이 가늘어진다.

"....기억 못할리가 있나요."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인데. 혀끝을 맴도는 딸기향. 그것이 마냥 싫지는 않다. 생각에 잠겨 가만히 그 때를 떠올리고 있으면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버리는 마츠카와가 있다. 아프잖아요- 투덜거리는 하나마키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해본다.

"저기요! 하면서 날 불러세웠잖아."
"아아아아아 안들려요 안들려!!"
"귀여웠는데 말이지."

물론 지금도. 한 마디만 던졌을 뿐인데 벌겋게 달아오른 채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붕붕 젓는 눈 앞의 이 아이가, 귀여워 미치겠다.

"전 그 때 생각하고 싶지 않다구요!"
"왜?"
"그야....."

당신에게 여자친구가 있었으니까.




#




그 해의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그래서 그런걸까, 몸과 마음이 들떴던 이유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쯤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분홍색 머리칼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을때도, 친했던 동성 친구에게 온갖 끔찍한 욕을 들었을때도, 이상하게 자기 혐오는 들지 않았다. 자존감이 높은걸까? 아니면, 포기한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려나."

혼자 걷는 봄의 거리는 예쁘다. 봄을 맞아 만개한 벚꽃들이 저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하늘하늘 흩날린다.

"아니... 아니지."

혼자 걷는 봄의 거리는 끔찍하다. 봄을 맞아 꽃놀이를 나오는 연인들이 풍기는 사랑 내음새가 온바닥에 흩날린다. 우울했다. 얼른 살것만 마저 사고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혼자 방구석에 쳐박혀 게이 야동을 보든, 만화책에 빠져 남주인공을 좋아해보든, 어느 쪽이든 좋으니 이 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로 그 사람을 보기 직전까지.

“저기요!"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의 남자 머리 위로 살짝 앉은 꽃잎은 꽤 귀여웠다.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는데 그 뒷모습이 매력적이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저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순간-

"네?"

세상이 컬러풀하게 보인다는 건...이런 걸까? 나른한 눈매. 짧은 흑색 머리칼. 얇은 셔츠 위로 보여지는 잔잔한 근육. 톱니바퀴가 맞춰진 마냥, 이 봄날의 거리에는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 당신과 내가 눈이 마주친 시간. 그것은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이어져 당신의 모든 것이 온 몸에 새겨지는 듯 했다.

"아,아,그...어..."
"맛층- 오래 기다렸어?"
"아니. 금방 왔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상황에서, 우리의 공간을 침범한 것은 다름 아닌 여자 한 명. 컬러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다시 나락으로 추락한 느낌. 산뜻한 봄 내음 사이에서 추적한 쓰레기 냄새를 맡는 느낌. 아아, 기분이 더럽다. 더러워 미치겠다. 여자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기분을 망칠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그 사람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내가 보낸 시선을 느낀건지 금방 이쪽을 봤지만.

"그 쪽은 누구..?"

예쁜 사람. 높이 올린 포니테일에 부담스럽지 않은 향수 냄새. 누가 보아도 여성스러운 차림새에, 귀여운 얼굴까지. 부족하지 않았다. 그의 여자로써 흠이 없었다. 내가 태클을 걸만한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가 치밀었다. 질투가 났다. 치졸하고, 옹졸한 질투심이.

"과외 학생입니다!!"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엄청난 바보야, 나는! 다른 말도 있었을텐데 하필이면! 주먹을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질투심과 부끄러움을 이기진 못했다.

"하하, 소개하는게 늦었지. 이쪽은 하나마키."

말도 안돼. 말도 안... 어떻게? 멍청한 나는 그 때 자신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도, '하나마키 타카히로'라는 명찰이 붙어있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입만 벌린채 서있었다.

"사실은 말이지~ 오늘 이 녀석 컨디션이 영 안 좋아서 바람 쐴겸 데리고 나왔는데, 어울려도 될까?"
"데이트 아니었어?!"
"화 내지마~ 응? 귀여운 얼굴 다 망가지잖아~"

자연스럽게 여자의 어깨의 팔을 두르는 저 사람. 이 개같은 상황을 모면시켜준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내 눈은 그 사람의 팔언저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뒤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뒤쫓아간지 10여분. 작은 카페에 들어선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니,

"잠깐 화장실-"

고맙게도 여자는 화장실에 가버렸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얼굴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반면, 이쪽에는 전혀 흥미 없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그 사람은 내가 듣고 싶었던, 나를 향한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하자는 거냐?"
"그러니까... 저기.. 과외를 해주셨으면 해서.."
"그게 처음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하는 소리야?"
"죄송..합니다."
"거절한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고, 첫 눈에 반했다는 말따위 통할리도 없었고, 내가 좋아한다 말했을때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날 기피할 저 사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날 괴롭히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았던 주제에!! 좋아하는 사람이... 날 혐오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누구때문에 데이트 방해는 물론이고 기분까지 더러워진 마당에 과외?"

고개를 절로 숙여졌다. 나는 흙과 먼지가 묻은 운동화. 저 사람은 윤택이 흐르는 가죽 구두. 그래, 당신과 나의 차이는 딱 이만큼이겠지. 뜨거운 뭔가가 목울대 끝까지 차올랐을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돈이 필요해진 참인데 잘됐네. 얼마에 할래."

그의 나른한 웃음 소리는
지독하게
나를
옭아맸다.




#




머그잔이 미적지근하게 식어갈 무렵, 딸기 케이크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마츠카와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인다. 동시에, 더이상 케이크가 없다는 사실에 입맛을 다시는 하나마키에게 무심한듯 말을 던진다.

"설마 흑심을 품고 나한테 말을 걸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부끄러우니까 그만해요...."

가을의 냄새. 하나마키는 그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 가을에 들어서면서 폴라티를 즐겨입었다. 몸에 딱 맞도록 만들어진 옷감은 그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목끝까지 뒤덮어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홍빛 머리칼에서부터 붉게 달아오른 귓볼, 오물거리는 입술, 가려진 목젖, 그리고 살짝살짝 드러난 몸선까지. ...위험하다ㅡ,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적색 경보에 마츠카와는 애써 침착하며 말을 돌려본다.

"아? 그럼 고백은 어떻게 한거야?"
"잇세이!!!!"
"선생님 호칭은 어디다 갖다 버렸어?"
"과외 그만두셨잖아요!"
"과외인가-"

그래, 과외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내가 이 녀석의 과외를 해준게 맞을까? 과외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어떤 스위치를 눌러버린 건 아닐까? 자동적으로 머리를 짚게 된다.

"내가 어쩌다 이런 어린애랑-"
"어린애 아니에요!!"

부끄럽다면서 귀를 붉힐 때가 바로 방금전인데, 어리다는 말에 발작하듯 반응하는 그 모습이 더 어린애처럼 느껴진다는 걸, 하나마키는 알고 있을까? 마츠카와는 투정부리는 아이 달래듯이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다.

"얼씨구, 오냐오냐해줬더니 큰 소리도 치고...우리 히로 많이 컸다?"
"7살차이가 뭐 별거인가요."

금방 그의 손을 쳐낸 하나마키였지만 말이다. 7살. 작지 않은 나이차이. 그리고 성별. 이 두 가지는 그 때의 계절이나 지금이나 두 사람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




때는 6월의 어느 날. 풋풋하던 새싹들은 어느덧 짙푸른 녹색으로 빛을 발하던 때. 나날이 뜨거워지는 땡볕에 나는 한창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덤으로 하나마키의 어머니가 주신 수박화채 한조각을 입에 문채. 과외는 순조로웠다. 하나마키는 예상외로 모범생이었고, 조금만 알려줘도 금새 잘 따라오는 아이였다. 숙제도 내주는대로 다 해오고, 과외를 시작한 이후로 시험 성적도 상승세라 나쁘지 않았다. 어려운 건 없었다. 전혀.

"좋아합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좋아해요."

첫 한 마디는 농담인줄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말 못할게 뭐 있나ㅡ. 라고 생각-

"좋아해. 좋아해 정말정말 좋아해!!!"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그런 감정이 아니었나보다. 눈물이 한가득 고인 눈으로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폭풍처럼 내뱉었던 너의 고백은 나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했다.

"하나마키..?"
"말하고 싶지 않았어. 7살이나 어린데다가 심지어 남자인 내가 고백해봤자, 가망이 없을거라고. 포기하라고. 포기하는게 편할거라고, 계속, 계속!!"

7살이나 어린. 그래, 이 녀석은 어리다. 어리기에 아직 헷갈려 하는 것이리라. 자신이 좋아해야해는 사람은 나같은남자가 아니라 또래의 여자아이라는 것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그 대상이 내가 된다면이라는 생각을 몇번 해본 적 있다. 불쾌할거라고, 꼴도 보기 싫을거라고, 가볍게 결론지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싫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미묘한. 단지, 저 녀석의 눈물 고인 눈이 신경쓰였을뿐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 이렇게... 이렇게 당신앞에만 있으면 가슴이 쿵쿵 거리고 스스로 주체를 못하겠는데... 어떻게 참고 견디란 거야..."

가슴 한가운데를 움켜쥐며 말하는 너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할까. 어떤 말을 해야, 네가 상처 받지 않을까. 그렇다. 난 이미 이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하나하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네가 조금더 빨리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ㅡ, 면 그건 거짓말이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 같았다. 그 백지 위로 그려지는 건 발그레한 볼을 띄고 있는 하나마키의 얼굴. 아니야. 그래선 안돼. 나는 여자친구가 있고, 이 녀석은 어리고, 남자애고, 그러니까-

"...미안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도망쳤다. 비겁하다해도 상관 없었다. 머릿속을 가즉 채운 17살의 꼬맹이를 더이상 보고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방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는 홀로 남겨진 그 녀석의 심정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혼자 남아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는 소리 따위, 들을 수 있을리 없었다.




#





"그 때 말이에요."
"응? 언제-"

다 식어버린 머그잔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던 하나마키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느새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은 마츠카와는 그의 턱을 들어 예쁜 볼 언저리에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아 그만해요. 사람들 다 쳐다본다구요."
"부끄러워? 소심해졌어?"
"당신이 대담해진거에요!!"

열이 오를때마다 목소리가 커지는 건 여전하다. 뭐, 그게 귀여운 거지만. 촉- 가볍게 입술이 닿는 곳마다 꽃이 피어오르듯 붉어지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사랑스워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은 마츠카와. 사귄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럴때면 잔뜩 긴장해 무릎을 꼬옥 움켜쥐고 있는 하나마키. 그 둘은 누가 보아도 애정이 흘러넘치는 연인이었다. 긴장하고 있는 그의 손위로 마츠카와가 손을 겹쳐온다. 자신의 것과 엇비슷한 손크기에 흐뭇하다가도, 여자보다 부드러운 살결에 흠칫 놀라던 마츠카와는 이내 그 어여쁜 손에 깍지를 끼운다. 놀라지 않게, 천천히. 맞잡은 손은 불에 데이듯 뜨겁고 뜨거워 긴장감이 옮을 것만 같았다.

"하여튼 한 마디도 지려고 안한다니까. 그래서, 언제 말하는 거야?"
"그 때.... 제가.. 처음 고백한 날.... 제 고백 듣자마자 나가버렸잖아요."

아아, 그 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그는 아직도 그 때처럼 울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하나마키를 지그시 보기만 했다.

"...그때 어디 가셨어요..?"
"....비밀."
"치사해!"

들으면 너 분명 울테니까. 널 혼자 버려두고 그대로 여자친구를 찾아가 미친듯이 몸을 섞었다는 걸 알게된다면, 너 분명 울테니까. 볼에 바람을 빵빵히 채워 흥 소리가 나도록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나마키를 달래기 위해 깍지 낀 손에 힘을 준다. 이럴 땐 달콤한 말이 특효라는 걸, 마츠카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왔잖아."
"....무슨 심경의 변화였어요?"
"심경의 변화라... 그냥, 조금 늦게 깨달은 것 뿐이야."

동그래진 눈. 살짝 벌어진 입술사이로 풍기는 캬라멜 향. 그래, 그런 네가 좋아.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걸."




#




정확히 그 날로부터 일주일 째. 알고 있었다. 가망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 다 되도록 연락 한통 없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돼. 또 울어버릴 것 같아. 어제도, 그제도, 계속... 울었는데. 차라리 말하지 말걸. 아무리 참기 힘들어도 그냥 마음속에만 담고 있을걸. 바지 자락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또 한바탕 쏟아지려고 준비중이었다. 방문이 열리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선생님..?"

지금 눈 잔뜩 부어있을텐데.! 울다 지쳐서 잠든게 하루이틀이 아니라 피부도 푸석할테고! 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분명 고백... 거절하셨을텐데. 다시는 못 볼줄 알았는데. 아니야, 착각하지 말자. 분명 돈이 필요해서 돌아오신 걸거야. 고백은 고백일뿐, 공적인 관계는 과외 선생님과 학생이니까. 헷갈리지 말자. 정리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이 마주친 5초의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자신과의 매듭을 지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대답해야한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억지로 웃어보이면서.

머릿속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리를 하고나니 한결 개운했다. 우리 둘만의 공간에서 들리는 것은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와 연필이 종이에 닿아 사각이는 소리밖에 없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마음이 편했다. 차라리 아무말도 안하고 공부만 봐주는게 편했다. 그래, 이게 올바른 관계인 거다. 내 고백따위 없었던 일로 하면 그만인 거다. 처음봤을 때처럼, 이쪽에는 흥미도 없다는 것처럼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연필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실렸다. 냉정해져야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못이 되어 가슴 한가운데를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오늘만, 오늘만 견디자. 오늘만 지나면, 분명 괜찮아질거야.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 빌어먹을 감정은 점점 더 무뎌질테니. 그렇게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고 있을때, 폭탄 선언과도 같은 말이 들렸다.

"헤어졌어."

또 다. 처음 만났을때와 같다. 이 공간에 우리 둘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시간이 멈춰버리고 우리 둘만을 감싸는 것처럼.

"헤어졌다고요?"
"그래. 두번 대답하게 하지마."

그 사람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면의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나때문에 그런걸까? 내 고백 때문에? 기대.. 해도 되는걸까?

'...미안하다.'

아니. 그건 분명 거절의 의미였다. 이제와서 기대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뭐지? 동성의 위로가 필요한건가? 온갖 생각들이 물밀듯 덮쳐왔다. 실날같은 기대심에 들뜨다가도, 그걸 부정하듯 떠오르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겹쳐왔다.

"하지만, 그..!"
"아아, 시끄러워. 이제 됐어. 이미 끝난일이니까."
"괜찮지 않아요!!"

그래. 중요한건 괜찮지 않다는 것이다. 그걸 말하는 당신도, 그리고 나도. 분명 괜찮지 않다. 어쩌면 여자쪽에서 헤어지자 했을 수도 있다. 바로 나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미치도록 올라오는 죄책감과 죄악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이 사람이 헤어지자 했을리 없어. 여자쪽에서 헤어지자 한걸거야.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내가...동성애자라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헤어지자 소리를 들은거야. 그게 얼마전 그에게 고백하고 부정당한 내 모습과 겹쳐보이자, 빌어먹게도, 공감이 되기 시작했다.

"호들갑 떨기는."
"그치만.. 그치만..! 좋아하잖아요!!"

그 여자를 좋아하잖아. 왜 헤어진거야. 정말 나 때문이야? 내가 쓸데 없는 소릴 지껄여서?

"좋아하는데... 그렇게 좋아하는데... 헤어진다는게 말이 되냐구요..."
"어이."

부럽다. 저렇게까지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애원해도, 받을 수 없는데.

"...미안해요.. 선생님 사랑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그 사람이... 부러워서 그래요.."
"하나마키."
"아니에요! 이제 더이상 말 안할게요. 저도 정리했는걸요? 정말 괜찮아요!"

아니에요. 사실은 괜찮지 않아요. 그 여자를 바라보는 마음의 절반, 아니 손톱만큼이어도 좋으니까, 날 돌아봐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제대로 있다는 걸-

"대답해, 하나마키."

오늘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잔뜩 충혈되고 부어있을 내 눈과 가늘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눈이 마주쳤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
"넌 아직 어려."

그래. 나의 또다른 컴플렉스. 나는 이 사람보다 7살이나 어렸다.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만약에 우리가 연인이 될지라도, 나이의 벽은 무시할 게 못 됐다. 알고 있어. 제대로.. 알고 있다고. 그래도-

"어리지 않아요! 알거 다 아는데-"
"살아가다보면"

그 사람은 나도 모르게 높아지는 언성을 잘 끊을 줄 알았다.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서 말하는 그로 인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좋아해도 헤어져야할 때가 있어."
"왜....?"
"으음, 예를 들면-"

손으로 턱을 문지를 모습이 멋있다. 저기에 수염을 기르면 어떨까? 분명 잘 어울리겠지? 사귀게 된다면, 그런 모습을 매일같이 볼 수 있을텐데. 차라리 여자였다면 가능성이 있었을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아... 그렇구나. 망치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감각이란 이런거겠지. 기대했던 내가 바보같아. 무슨 기대를 한거람. 눈물샘은 하루도 마를 새가 없구나.

"그 사람이 귀엽고 귀엽고 귀여워서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젠장. 불난데 기름 붓냐고. 결국 새어나오는 눈물 한줄기에 다급하게 손으로 문질러 보지만, 날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이 사람이 그걸 놓쳤을리 없다. 내 마음 다 알고 있는 주제에. 내 고백 제대로 들었으면서. 가슴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에 속이 메슥거리시 시작했다. 토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모든 걸 놓고 싶다. 더이상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상대가 남자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따라주질 않을 때."

귀가 잘못 됐다. 어딘가 잘못된게 틀림 없다. 그럴리 없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그의 입밖에서 튀어나올리 없었다. 헛소리가 들린거다.

"너 때문에 헤어졌다ㅡ. 라면 어쩔래?"

귀도 고장나고,
눈물샘도 고장나고,
내 마음도 고장난게
틀림 없다.




#




"히로 얼굴 새빨개."
"놀리지 마세요!"

잘 익은 사과 같아ㅡ,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길은 진득하다. 깍지 낀 손을 놓기는 커녕 그대로 자신의 입가에 가져가 촉- 소리가 나도록 손등에 입을 맞춘다. 손등 뽀뽀임에도 불구하고 마츠카와의 그것은 어째서 이리 야한건지.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던 하나마키는 문득 자신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치사해, 나는 엄청 떨렸는데.

"잇세이는 그 때 안 떨렸어요?!"
"무진장 떨렸지."

손등에 흩뿌려진 입술자욱은 핏줄이 그대로 비치는 손목까지 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쪽 소리가 적나라하게 나도록 입을 맞춘 마츠카와는 그의 손을 저의 가슴께로 가져간다. 규칙적이라기엔 너무나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박동에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오른다.

"지금도 떨려."

그리고 서로 말을 맞춘 마냥

"사랑해, 히로."
"사랑해요, 잇세이."

두 사람만의 가을을 맞이한다.






*리마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보쿠아카 전력 60분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헤어졌던 연인,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교복을 벗고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되었다면?
*어른이 되면서 자신감과 웃음을 잃어버린 보쿠토 X 과거의 상처를 품에 안고 어른이 되어버린 아카아시



W. 멜





"아카아시?!!"

서늘한 적막을 깨뜨리는 그 목소리는, 그의 귀에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교복을 벗은지가 몇 년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목소리는 아직까지 자신을 옭아매고 있단 말인가? 보쿠토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는지 아카아시는 다시 한번 상체를 숙인다.

"올해 상반기부터 HK기업 영업사원부 입사한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는 사내에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훈남이라며 꺅꺅 대는 여자들부터

"보쿠토군이랑 신입사원.. 아는 사이인가?"
"저 보쿠토군이랑..?"
"어쩐지 신입 불쌍하네~"

안쓰럽다는 듯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쪽은 보쿠토군. 1년 먼저 입사한 선배니까 이것저것 배우고, 보쿠토군도 잘해봐."

짖궂은 일이다. 좋게 헤어졌다면 차라리 웃으며 마주할 수 있었을텐데. 최악의 형태로 이별을 맞이해 이 순간 이런식으로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른침을 삼키고 있던 것은 비단 아카아시뿐만이 아니었다. 보쿠토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연신 잔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서로 안면있는거 같아서 두 사람 붙여준거니까."

그러나 인연이란 과거의 한때처럼 단번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선임이 나간 빈 휴게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박고 있는 보쿠토의 머리는 왁스따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욱 쳐져있다. 그 침묵을 참다 못한 아카아시가 입을 열려던 찰나, 보쿠토가 목소리를 낸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너...일부러 여기 지원한거야? 나 있는 줄 알고..?"

아카아시는 갑갑한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한다. 그의 대답이 들릴 기미가 안보이자, 드디어 보쿠토가 고개를 든다. 몇 년만에 마주하게 된 호박빛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몰랐습니다."
"아카아시...나,나는.."
"회사입니다. 자중하세요."

뒤돌아서려던 아카아시의 어깨를 잡은 것은 보쿠토. 그의 고운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진다. 하, 몇 년 전일을 아직도. 우연히 같은 회사, 우연히 같은 부서, 게다가 일 파트너까지. 우연의 연속이 아카아시의 이성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 좀봐. 나랑 얘기좀 해."
​"할 얘기 없습니다."
​"내가 있어!!"
​​
길게 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위협적인 눈동자,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내려치는 손. 이 모든 행위가 오히려 아카아시를 차갑게 만들고 있다는 걸, 보쿠토가 알 리 없었다. 아카아시는 언제 이성이 흔들렸냐는 듯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사적인 대화는 피합시다. 더이상 학생신분도 아니고-"

식은 눈으로 보쿠토를 마주하며

"우리 관계는... 정리 했잖아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선다.




#




"복사기는 이렇게 쓰면 되는..! 어..... 어..... 왜 안되지... 아까까지....됐는데..."
"용지 부족이네요."

우스운 광경이다. 후배가 선배보다 잘 알고 있으며 능숙하다는 것이 말이다. 중고등학교를 보쿠토와 보낸 아카아시에게는 익숙한 일이라는 게 흠이랄까.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시던 일 마저하세요."

그가 기억하는 보쿠토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쳐진 머리카락을 따라 쳐진 어깨. 자신감 없는 말투. 허둥거리는 모습. 한마디로, 한심... 했다. 이미 끝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는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련일까? 아니, 그럴리 없다. 그렇다면 왜? 의문을 품던 아카아시에게 주변 소리가 하나둘 들리기 시작한다.

"자료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보쿠토군. 자네 입사한지 벌써 1년이 다되어가는데.."
"......."
"일 이따위로 할건가?"
"...죄송..합니다."
"똑같은 말 반복하는 것도 지겹고,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하면 우리도 방법이 없네. 내일까지 다시 해와."

그제서야 입사 첫 날, 자신에게로 향하던 동정의 목소리가 납득이 간다.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보쿠토의 위치가 보인다. 그가 제출한 서류를 책상위에 내던진 부장은 그에게 눈길하나 건네지 않은채 말한다.

"마지막이야."

복사한 서류들을 정리하던 아카아시가 입술을 살짝 깨문다. 왜 자신이 불편함을 느껴야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미묘한 불만스러움까지. 남의 눈치를 보는 보쿠토도, 그런 그를 향해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아카아시군, 거기 서류 정리 좀 해주실래요?"
"네."

건네 받은 파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아카아시를 흘긋 엿보던 여사원들은

"얼굴도 잘생기고, 일도 척척 잘하고.."
"사내 신랑감 1순위 갱신!"
"여자친구 있을까?"
"100퍼 있을거야- 저런 좋은 남자를 어느 여자가 내버려두겠니?"

저들의 망상을 시작한다.



#




"없습니다."
"에에엑?!!"

신입사원 환영회라는 이름 아래에, 진실이 하나둘 벗겨지며 여사원들의 추적이 시작된다. 여자들 사이에 끼어 술과 질문을 동시에 받아야했던 아카아시를 지켜보던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자리, 보쿠토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녹아들지 못한채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아카아시 한 명. 빈 잔을 술로 채우던 보쿠토가 흠칫하는 이유가 있다면,

"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자신의 과거,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저 질문 때문이리라. 여자는 아카아시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다리를 배배 꼰다. 안그래도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가 허벅지의 대부분을 드러낸다. 여자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잔 속의 찰랑이는 술을 빤히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슬쩍- 보쿠토쪽을 흘겨본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화들짝 놀란 보쿠토는 기어코 잔을 엎어버린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듯하지만. 아카아시는 단번에 술을 들이킨다.

"....한 명, 있었습니다."

분주히 테이블을 닦던 손이 멈춘다. 젖어들어가는 휴지조각. 그 때를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 보쿠토는 숨을 멈춘다. 이 공간에, 오직 아카아시와 그만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얼마 사귀지도 않았으니까 없는 셈치죠."

빠득- 어금니를 꽉 깨문 보쿠토는 화풀이 하듯 테이블을 빡빡 문지른다. 분명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분하다. 너와 나는 분명 사귀었다. 정말, 정말... 좋아했는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아카아시. 그 일을 없는 셈 칠 정도로, 나는... 너에게...

핏방울이 맺히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던 보쿠토는 찡해져 오는 눈시울을 막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엉망진창으로 젖은 휴지가 잔뜩 뭉쳐져있었다. 마치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아카아시는 그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긴장감이 탁 풀린듯 눈을 지그시 감는다.

"와- 이 시계 어디꺼야? 올 블랙이라서 세련돼 보인다-"

징그럽다. 술수가 뻔히 보이는데 왜 엉겨붙어 오는 걸까.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목시계에 관심이 있는 척, 밀착해오는 여자를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밀어낸다. 세련되어 보일리 없었다. 벌써 사용한지 꽤 오래된 것이고, 사용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브랜드는 아닙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선물받았구나?! 여자??"

선물 받았다ㅡ, 라.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조적인 미소를 띠던 아카아시는 저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시계를 다른 손으로 쓸어내린다.

"...선물 받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선물할 예정이었죠."

중얼거린다.




#




힘껏 달아오른 술자리의 중심은 아카아시였다. 하지만 신입사원이라는 이유로, 훈남이라는 이유로, 솔로라는 이유로 안주없이 술을 스트레이트로 받다보니 그의 속은 뒤집어지기 일보직전. 그의 단정하던 와이셔츠는 어느새 멋대로 풀어헤쳐지고 곳곳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들이 들린다. 게다가 보쿠토의 빈자리. 그가 나간지 꽤 시간이 흘렀건만, 아무도 그의 빈자리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굉장히 거슬렸다. 이유는 모른다. 단지 그의 빈자리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아카아시는 구태여 부정하진 않았다.

"아카아시군~ 아~ 해봐~"
"죄송합니다. 속이 좋질 않네요."

반은 진심, 반은 거짓말.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변명, 보쿠토를 찾으러 나가고 싶은 것에 대한 구실.

"잠깐 바람좀 쐬고 오겠습니다."

다행히 보쿠토는 가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행? 그를 향해 걸어가던 아카아시는 안심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저 인간이 뭔데 신경쓰고, 걱정하고, 안심하냐, 아카아시. 옛날 일은 다 까먹었나봐?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 어느 쪽이 옳고 그른것일까. 하물며 술에 취한 자신이 그걸 판단할 수 있을까. 아카아시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 인기척에 보쿠토 또한 뒤를 돌아본다. 뚫어질듯한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해 주머니에 구겨 넣어둔 담배갑을 꺼낸다. 양복자켓을 한쪽 팔에 든채, 익숙한 듯 담뱃불을 붙여 깊게 숨을 들이키는 아카아시. 그리고 굳은 표정의 보쿠토.

"언제부터 핀거야."
"...후ㅡ. 괜한 참견입니다."
"그러다 폐암걸린다, 아카아시?!"

내뱉은 숨결을 따라 퍼지는 담배 연기는 사뭇 씁쓸해보였다. 검지와 중지 끝에 위태롭게 담배를 걸치던 아카아시는 싱긋- 웃어버린다.

"기분 잡치게 하는데 재능이 있으신가봐요."

그 상큼한 미소에 보쿠토의 표정이 구겨진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말을 꺼낸게 아닌데.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던 보쿠토와 달리 아카아시는 냉정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뭡니까. 할 말 있으세요? 없으면 꺼져주시겠습니까. 혼자 있고 싶거든요."
"....아카아시...차가워졌네."

보쿠토의 한마디에,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 누가 누굴 보고 하는 소리입니까."
"우리 그때만 해도-"
"그만하세요."
"아카아시!!"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ㅡ.

"구질구질한게 누군데!!!"

한번 터지기 시작한 것은

"기껏 참고 참고 또 참아서 간신히 잊었는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그걸 자꾸 들춰내는게 누군데!!!"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이제와서 무슨 낯짝으로!!!!!"

내리 꽂는다. 반도 타들어가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구고 구두로 짓밟던 아카아시는

"...언성이 높아졌네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보쿠토를 홀로 내버려 둔채 집으로 향한다. 멀어져가는 아카아시를 바라만 봐야하는 자신의 모습이 기억의 조각과 겹쳐진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뜻하는 것만 같아 보쿠토의 흐린 눈에는 의미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




"좋은 아침입니-"
"도대체 제대로 하는게 뭐야?!!!"

사무실이 떠나가라 들리는 고함소리. 그 끝에 있는 것은 익숙한 뒷모습. 왁스는 커녕 손질조차 되어있지 않은 머리카락은 그의 뒷모습처럼 힘을 잃었다. 연신 고개를 숙여가며 사과하는 보쿠토의 머리 위로 종이뭉치들이 흩뿌려진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죄송하다 말만하면 다야!!!! 일 이따위로 할거면 당장 짐싸!!"
"....부장님."
"꺼지라고!!"

내팽겨쳐진 그것들은 아카아시의 발밑까지 날아온다. 고함소리로 인해 집중된 사람들의 관심은 그 타겟이 보쿠토인 것임을 확인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린다. 홀로 바닥에 주저 앉아 흩어진 종이들을 줍는 보쿠토에게 도움을 주는 이는, 빌어먹게도 아무도 없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카아시는 저의 발밑에 깔린 종이를 주워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건네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들릴정도의 목소리로 대답한다.

"...고마..워."

심한 말이라면, 심한 말이었다. 차라리 필름이 끊겼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아카아시는 어제 밤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저주처럼 퍼부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사과해야할까? 아니, 사과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누가 먼저 시작한 일인가?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인정할 건 인정해야한다. 몇년 전, 헤어졌다. 마음의 정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경쓰인다. 지금도, 휴게실 구석에서 퇴짜맞은 보고서를 분쇄기에 넣고 있는 그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것만 봐도. 분명하다. 커피를 한모금 입에 머금은 아카아시는 처량하기 그지 없는 그의 뒷모습과 자신의 손목시계를 천천히 번갈아본다.

지쳐보이는 등과 손목시계. 애정과 증오. 관심과 무관심. 현재와 과거.

진흙탕을 구르듯 혼잡하던 머릿속은 끝끝내 현재를, 그리고 저 뒷모습을 택하기로 다짐한다. 머그잔을 든채 보쿠토쪽으로 다가간다.

"데이터 부족입니다."
"악!!!! 깜짝이야!!!!"

사람들의 무관심과 자괴감에 익숙해진 탓에, 보쿠토의 놀란 목소리가 오히려 그를 놀라게 한다.

"시끄럽습니다. 초짜인 제가 봐도 정보 부족입니다. 게다가 원문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한 듯한 저 문구들은 뭡니까. 자신이 뭘 해야하는지, 이 일이 뭘 위한 건지 제대로 생각은 하신겁니까."

얘,얘가 지금 무슨...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이해하지 못한 머리와 다르게 고개를 휙휙- 젓고 있는 보쿠토의 몸은 매우 솔직했다.

"도와드릴게요."
"아카아시... 하지만... 그..."

당황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담배를 뻑뻑 피우며 자신을 부정하던 아카아시와 눈 앞에 있는 아카아시가 과연 동일 인물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 말을 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돕겠다고 하다니ㅡ. 의구심, 미안함, 그리고 죄책감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그 결과, 그는 아카아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동정일게 뻔했다. 그리고 그걸 애정으로 받아들일 자신을 알기에, 보쿠토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착각하지마세요. 어디까지나 지금의 회사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니까요."

불행중 다행은 아카아시가 그런 보쿠토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보쿠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 미소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제가 좋아했던 건.."

자신감이 넘치던 당신이었으니까. 밝게 웃는 당신이었으니까.

"응? 뭐라고?"
"아닙니다. 10분 후에 제가 보쿠토씨 자리로 가겠습니다."

한 편, 몇 년만에 듣는 보쿠토씨라는 호칭에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버린 보쿠토를, 아카아시는 눈치챘을까?




#




3일간 밤낮으로 보쿠토에게 시달려본 게 몇년 만인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료들을 넘겨보는 아카아시에게서 언뜻 관록이 느껴진다.

"와아!!!! 아카아시!!! 대단하잖아!!"
"소리 낮추세요. 다들 업무중이잖아요."
"그치만그치만 아카아시가 너무 잘해서!!!"

3일동안 회사 분위기는 꽤나 바뀌었다.

"제가 보여드린 파트는 이해하셨습니까?"
"아? 으음... 대충... 알아들었어!"
"그러다 해고되셔도 저는 모릅니다."
"아악!!! 기다려!! 5분! 아니, 10분만!!"

첫째는 아카아시. 첫인상만으로 신랑감 1위, 훈남 타이틀을 차지해버린 그의 이미지는 보쿠토와의 단 3일만에 신부감 1위, 보모, 엄마 이미지로 바뀌게 되었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조용히!"
"부장님!!!"
"하아- 이번엔 뭔가. 무릎꿇고 빌건가?"
"아쉽지만 아닙니다! 이 보고서 체크 부탁드립니다!"
"...싫네. 또 자네에게 시간 낭비, 감정 낭비하느니 안보고 말지."
"부탁드립니다!!!! 한번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마지막일세."

둘째는 보쿠토. 지난 1년간 음울하고 소심하며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그의 이미지는 단 3일만에 최강 긍정, 단세포, 그리고 분위기 메이커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아카아시 덕분이지만 말이다. 이쯤되면 회사가 학교인지 학교가 회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엄마같은 부주장이고, 저쪽은 애같은 주장이고.

하지만, 역시 그 때로 돌아가는건 무리겠지. 청춘이라 불리는 것은 분명 끝났고, 우리는 이렇게 어른이 되었으니까.

턱을 괴고 행복했던 그 시절만을 떠올리던 아카아시의 귀에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성이 들린다.

"아카아시!!!!!! 부장님이!!! 칭찬해주셨어!!!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볼륨 낮추세요."
"헤헤헤헤- 고마워, 아카아시!!!"
"아, 달라붙지 마세요. 싫습니다."
"그러지말고~~~"

온 힘을 다해 목을 졸라오는 보쿠토는 과연 자신이 전 배구부 주장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신나게 웃어대던 보쿠토의 귀로, 아카아시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꽂힌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보는 눈이 많잖아?!'

섬뜩하게 떠오른 옛 기억의 조각.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아카아시의 목을 쥔 손에 힘을 풀게 한다.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이던 보쿠토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그렇지? 그래.. 그럼! 이따..보자."

마치 건드리지 말아야할 것을 건드린 것처럼. 어색해진 공기는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거북이같은 시침과 분침이 퇴근시간을 어서 가리키길 손꼽아 기다린지 반나절. 고대하며 기다린 것과 다르게 그의 퇴근은 7시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이쯤되면 아카아시도 진즉에 퇴근했을거라 믿었던 보쿠토는 놓칠뻔한 엘리베이터의 문을 억지로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이 거지같은 타이밍에, 욕이 나올뻔했다.

"아...지금 퇴근해?"
"네, 보쿠토씨는 뭐하다 이제 퇴근하세요?"

뭐하긴!!! 네 눈치보다가!!!! 이제!! 막!!! 가려했는데!!!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린 보쿠토는 오늘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가능하면 아카아시쪽을 보지 않으려한 그의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 아카아시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층수가 변하는 것만을 빤히 쳐다보다 문득, 보쿠토는 오늘이 기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엘리베이터 안이라면 아카아시도 피할수 없을테고. 결심한듯 양 손의 주먹을 꽉 쥔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옆모습을 돌아본다.

"아카아시! 저기! 그... 계속...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제가 먼저하겠습니다."

아카아시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앗- 할 틈도 없이 그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둘만의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좋아합니다."
"어?!"
"긍정적이고, 활기차고, 웃음이 많은 당신을 좋아합니다."

이 타이밍에 고백이라니, 반칙이잖아ㅡ. 얼굴로 피가 쏠리는 것을 느낀 보쿠토와 다르게 아카아시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른 감정입니다. 뜨거워지고, 짓눌리도록 아프고,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려서 질리도록 울어버린 그 때의 감정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부끄럽다. 그런 의미의 고백이 아니었다. 자신은 왜 항상 설레발을 치고, 의미 파악이 늦은 건지. 잠시나마 두근거렸던 스스로를 힘껏 패고 싶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숙였다. 죄스러운 마음에,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사람 대 사람으로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
"그 때의 당신을 사랑했던 저를, 그리고 지금의 당신을 좋아하는 저를."

아카아시는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5층. 아직, 늦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긴 싫었다.

"잠깐, 내 얘기도 들어줘."
"...네."

4층. 심호흡을 크게 하고-
3층. 멀찍이 떨어져있는 그의 손을
2층. 살그머니 잡아본다.

"...미안했어."
"....."
"줄곧... 줄곧,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그게 다입니까?"

1층. 아카아시는 발걸음을 옮긴다. 옮기려 한다. 그러나,붙잡힌 손에 힘이 실린다.

"아니."
"...놔주세요."
"사랑했어, 아카아시."

그 말을 끝으로, 마법처럼. 손과 손이 멀어진다. 아카아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 보고 싶었다.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 뵙겠습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




"어머어머, 저 사람이 그 보쿠토군이야?? 머리 올리니까 인물이 산다!!"
"저런 훈남이 우리 부서에 있었다고? 야야, 웃는 거 봐!! 매력이 아주..!"
"그나저나 보쿠토군이 아카아시군이랑 같이 출근하니까...그림이네..."
"그러게... 변했네, 보쿠토군."
"아니, 원래 저런 사람이었을수도 있지. 우리가 몰랐을뿐."

소란스런 사내 분위기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다. 오랜만에 왁스로 머리를 새우느라 대지각을 할뻔한 보쿠토와 그에게 전화하느라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소모해버려 기분이 저조한 아카아시가 있다. 뛰어오느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훔치던 아카아시는 피부에 와닿는 익숙한 손목시계를 가만히 쳐다본다.

"생각해보니까 이 시계, 역시 보쿠토씨보다 저한테 잘 어울리는 거 같네요."
"하?! 그거 내 생일 선물이었잖아!"

모를 줄 알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감추다 끝끝내 주지 못했던 선물이었건만, 보쿠토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아카아시를 얼마나 자극하는지도, 보쿠토는 알고 있을까?

"좋~아! 지금이라도 준다면 기 꺼 이 받아주지!!"
"더 좋은 걸 준비하려했는데, 보쿠토씨가 그렇게까지 이 손목시계를 원하신다면-"
"아니아니아니!!!! 더 좋은거!! 더 좋은거 줘, 아카아시!!!"
"싫습니다."
"도망가지 말고, HEYHEYHEY-!!"
"그 추임새 정겹네요. 이제 꺼져주시겠습니까."
"거절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이 된 두 사람의 선택.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적어도 지금 이순간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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