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이야~ 사람 엄-청 많다.”
“보쿠토씨.”
“나 코찔찔이 일 때 말곤 도통 놀이공원에 와본 적이 없거든. 진짜 오랜만이다.”
“보쿠토씨.”
“헐 대박, 저거 보여? 저어기 아기가 쓰고 있는 거! 하트 머리띠!! 움직일 때마다 달랑달랑 움직여! 케이지 우리도 저거 하자.”
“보쿠토씨!”
세 번의 부름 끝에 아카아시를 돌아본 보쿠토의 눈이 마치 멀리 소풍을 나온 강아지의 눈을 떠올리게끔 한다. 놓치지 않도록 깍지를 낀 손에 잠시 시선을 던지던 아카아시가 다시 보쿠토를, 그리고 그를 둘러싼 풍경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는다.
“놀이공원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놀이공원.”
그럼 왜 불러 세우냐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보쿠토에게 상황 설명을 하자니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한 아카아시다.
“하다못해 모자나 선글라스 정도는 써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찰칵거리는 셔터 음과 심심치 않은 환호성이 오롯이 저들을 향하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몇몇 모이기 시작하자 무슨 볼거리인가 싶어 유원지로 들어서려던 인파들이 호기심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되려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에이~ 뭐 어때. 놀러 나온 건데.”
그랬다. 영화 포스터 촬영이 끝난 직후 짧고 간단한 작별인사를 고한 보쿠토는 다짜고짜 아카아시의 팔을 낚아채 누군가 막아설 틈도 없이 촬영장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뿐일까. 면허도 없고 차도 없다는 변명을 들먹인 그는 메이크업이나 머리 셋팅 하나 가릴 생각조차 없이 JR에 올라 타버린 것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SNS를 통해 제법 유명인사가 된 보쿠토를 제일 먼저 알아본 어린 학생들이 꺅꺅대며 부리나케 그에게로 달려 들었고 그 여파가 널리 퍼져 그들이 있던 전차 한 칸이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개미떼마냥 보쿠토에게 달려들어 열렬한 환호성을 외치는 이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촬영장에서 아카아시씨를 감쌌단 얘기 들었어요. 그 이후로 완전히 팬이 되어 버린 거 있죠?’
‘아, 옆에 계신 분이 아카아시씨?!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잘생기셨어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이번에 보쿠토씨가 나오는 영화 친구들이랑 꼭 보러 가기로 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나오는 영화라면 분명 영화도 좋은 내용일 테니까요.’
‘예쁜 사랑 하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보쿠토씨 너무 잘생겼어요! 사랑해요!’
‘아카아시씨도 멋져요!’
순식간에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응원을 받아버린 두 사람은 요코하마에 위치한 유원지에 도착하기까지 자신들의 팬이 되어버린 일반인들을 응대하기 바빴다. 싸인 할 종이가 없어 유성매직으로 손등에 이름을 쓰는 것은 물론, 포옹과 악수가 곁들어졌던 그 곳은 소규모 팬 미팅을 방불케 했다.
의외였던 부분은 아카아시 또한 사람들 눈 안에 든 존재라는 점이었다. 생전 처음 과분하다 싶을 만큼 타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버린 아카아시는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싸인 해달라는 어린 친구나, 한 번만 안아 봐도 되냐며 뺨을 붉히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을 상대로 식은땀만 뻘뻘 흘렸을 뿐이다.
또한 더욱이 큰 문제는,
“쿠로오씨한테 놀러 간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뛰쳐나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 깜짝 나들이가 엄연한 ‘스케줄 펑크’라는 점이었다. 앞서 나가기 바쁘던 보쿠토가 뒤를 돌아보며 히죽 웃는다.
“아. 알고 있었어?”
순수 100퍼센트 바보인 건지. 아니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움직이는 건지.
“그 쪽 주머니에서 아까부터 전화가 걸려 오고 있으니까 알죠.”
작게 한숨 쉰 아카아시가 눈짓으로 보쿠토의 얇은 외투 주머니를 가리킨다. 그 안에 몸을 사리고 있는 통신 기기가 어찌나 열렬하게 진동하고 있는지
“귀찮게 시리.”
뒷목까지 긁적이며 자신에겐 관심조차 안 주는 주인에게 불굴의 일편단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쿠로오 이겨먹거든.”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젠 다 틀렸다. 놀이기구를 다 타보든 하나만 정해 10번을 넘게 타든 사람들 주목을 즐기며 연예인 병에 걸리든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싸돌아다니지 않는 한 이 사람은 돌아갈 생각 따위 추호도 하지 않으리라.
아카아시가 체념한 얼굴을 한다. 가자는 대로 가고 하자는 대로 하기로 한다. 이끌어 가는 손에 몸을 맡긴다. 피리 부는 사나이마냥 두 사람의 뒤를 거대한 무리의 인파가 거리를 두고 졸졸 쫓아간다.
표를 끊고 입장을 한다. 오색빛깔 풍선들을 한 아름 품에 안은 다람쥐 캐릭터가 뒤뚱뒤뚱 걸음을 옮긴다. 자잘한 폭죽에서 시작된 작은 불꽃들이 청량한 하늘을 밝히고 동화 속에서 튀어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거리에선 경쾌한 퍼레이드 음악이 흘러나온다. 깔깔 대는 웃음보를 터뜨리는 개구쟁이 아이들, 드높은 하늘을 향해 무지갯빛 비눗방울을 불어내는 꼬마 아가씨, 화려한 옷가지로 치장한 채 자신들의 매력을 뽐내는 장난감 인형들, 한 폭의 풍경화마냥 산의 초록빛 능선과 어우러지는 놀이기구들, 즐거움으로 한층 들떠 오른 공기까지.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튀어 나온다. 토끼 눈을 연상케 하듯 휘둥그레진 녹안이 주위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다. 앞서 뜀박질하다시피 달려 나가던 보쿠토 또한 걸음이 느려진다. 동화 속 세상에 발을 내디딘 이방인들처럼 느릿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감상하기 바쁘다.
그 또한 찰나에 불과했지만.
물 만난 고기는 금세 제자리를 펄쩍펄쩍 뛰며 앞장을 선다. 입구 근방을 장식하고 있던 놀이 공원 내부 지도는 아카아시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이대로 무작정 돌아다니는 게 정말 괜찮은 건지, 겹겹이 쌓이는 걱정거리가 밀물처럼 아카아시를 덮쳐온다.
다행히 두 사람은 놀이기구를 많이 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놀이기구를 찾아 똑같은 거리 근방을 맴돌며 방황한 것 또한 아니었다. 타본 놀이기구는 기껏해야 범퍼카, 롤러코스터, 회전목마 정도. 그 외엔 길거리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보쿠토가 그토록 염원하던 하트 모양 머리띠를 머리에 얹어 보고,
“와, 되-게 안 어울리네요.”
“너라고 잘 어울릴 것 같냐,”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표정 좀 푸시죠. 일단은 연인이니까.”
“헤……이헤이헤이!”
“또 그겁니까.”
비눗방울이 나오는 장난감 총을 충동적으로 구매해 신나게 쏘아보고,
“이건 예쁘네요.”
“케이지 만 하겠어.”
“그거 욕이죠.”
“칭찬이거든?”
“아하. 특정인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다 보니 제가 실수를 했네요.”
“야!……가 아니고 케이지!!”
캐릭터 조각상 옆에 나란히 서 셀카를 찍고,
“너무 들러붙지 마라. 땀 냄새 나니까.”
“와, 보쿠토씨 카메라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죠? 이렇게 얼굴 크게 나오는 사람 난생 처음 봐요.”
“죽는다 진짜.”
“사랑해로 알아 들을 게요.”
“……스릉흐. 스릉흔드그.”
솜사탕을 먹고,
“묻었어요.”
“어? 어디.”
“입 옆에.”
“아…이제 됐어?”
“아뇨. 이젠 코 옆에 묻어 있어요.”
“……됐니?”
“사실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안 묻어 있었어요.”
“……너 진짜…….”
“사랑한다고요?”
“……오냐. 아주 사랑해 죽겠다 이 자식아.”
츄러스를 먹고, 와플을 먹고, 소프트콘을 먹고, 소시지를 먹고, 닭 꼬치를 먹고,
“너무 먹기만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어때. 먹는 게 남는 거지.”
“이러려고 놀이공원 온 거예요?”
“일일이 시끄럽네. 너도 맛있어 했잖아. 그럼 장땡인 거지.”
“허어…….”
먹고, 먹고, 지겹도록 먹었을 뿐이다.
이젠 소풍을 나온 건지 먹방 투어를 나온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을 무렵 해는 지평선과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이고 아카아시의 무릎과 발바닥은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잠깐만요.”
자석의 N극과 S극 마냥 도통 떨어질 줄 몰랐던 손깍지가 풀려 버린다. 하트 모양 선글라스 밑에 가려진 황금색 동공이 휘둥그레지며 아카아시를 돌아본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인파는 어느 새 놀이공원의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인원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약간 힘들어서……. 조금만 쉬었다 가요.”
한 손에 피카츄 얼굴의 풍선을 들고 있던 아카아시가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근처 화단으로 걸음을 옮긴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고운 미간을 찡그린다. 고된 노동으로 팅팅 부르텄을 발바닥을 주무르기 위해 운동화를 벗는다.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해 사두었던 생수 통은 바닥을 보인지 오래다.
이제쯤이면 힘들다던가 지친다던가 돌아가자던가 등의 힘든 기색을 내비칠 법도 하건만 아카아시는 잔뜩 피로에 지친 낯빛만 하고 있을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즉, 말을 아끼고 있던 것이었다.
신나게 돌아다닐 대낮엔 속삭임에 가까운 대화가 가능했다 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사방이 카메라였다. 휴대폰이란 이름의 카메라, 눈이란 이름의 카메라. 그들 앞에서 솔직한 속내를 내비칠 순 없는 입장인 게 바로 아카아시였다. 이것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우스꽝스런 역할극의 한 장면. 산소 결핍과 극한의 피로를 느끼는 와중에도 아카아시는 제 이성을 붙잡으려 피땀 나게 애를 썼다. 그가 예상치 못한 거라곤
“많이 아팠어?”
보쿠토의 다음 행동이었다.
한 쪽 무릎을 꿇는다. 거추장스런 기념품들은 잠시 바닥에 내려둔다. 손을 뻗는다. 줄무늬 양말이 감싸고 있는 발바닥을 잡아 끈다. 엄지발가락에서부터 새끼발가락까지를 부드럽게 감아쥔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그것들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옴폭하게 들어간 발 안쪽을 세게 누르는가 하면 물집이 잡힌 발뒤꿈치 주변을 살살 매만진다. 안마에 능숙한 손은 어느새 발목을 타고 올라가 부종으로 팅팅 부은 종아리를 어루만진다.
“미안. 무리하게 해서.”
정말 미안한 눈을 한다. 슬프게 휘어지는 눈웃음이 위를 향한다. 일말의 거짓 없는 눈빛이 아카아시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다.
“잠……깐.”
“여기 근육들이 많이 뭉쳤네. 내가 안마 하나는 자신 있거든.”
아카아시는 목소리를 낮춘다. 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속삭임이 보쿠토의 귓전에 닿는다.
“뭐하는 거예요. 사람들 다 보잖아요. 부끄러운 짓 그만하고 당장 일어나요.”
그러나 보쿠토는 완고하다.
“조금만 만질게. 싫어도 좀 참아 봐.”
슬슬 열이 오르는 건 오히려 아카아시였다. 끝을 모르던 피로는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남은 것은 다리와 발끝에 머무르는 낯선 이의 뜨끈한 체온. 그곳에서 시작된 열기였을까. 보쿠토의 손길이 닿는 족족 만개하듯 퍼져 나가는 열기는 목덜미를 붉히고 뺨을 화끈거리게 하고 귓불마저 홧홧하게 한다.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제 눈앞의 보쿠토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려 하면
“대박…….”
“진짜 멋있다.”
“너무 로맨틱하잖아…….”
보쿠토를 향해 탄성을 자아내는 시선들이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 즈음 아카아시는 정신을 차렸다. 부끄러움과 설렘으로 크게 쿵쾅거렸던 심장이 소리 없이 가라앉았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의 심정이 난생 처음 공감됐다.
발끝에서부터 다정하게 느껴지던 손길은 거짓으로 치장되고 엉덩이를 붙인 화단가는 가시방석을 방불케 한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공기만이 주변보다 10도 쯤 가라앉은 듯하다.
그런 아카아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쿠토가 등을 보인다.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낮춘다.
“뭐해? 업혀.”
차라리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면. 보고 싶은 장면, 느끼고 싶은 감정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꾸욱 누른 채, 그 기분에 영영 사로 잡혀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 케이지가 정 못 걷겠으면 이 애인님이 한 몸 희생해야지. 안 그래?”
정말 좋았을 텐데.
나직한 한숨을 뱉는다. 도무지 올라가지 않는 입 꼬리를 억지로 말아 올려 본다.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들에 화답하듯 보쿠토의 목에 팔을 두른다.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목덜미에 고개를 묻는다. 규칙적으로 요동치는 심박 수를 가만히 느껴본다. 그와 자신, 두 심장의 온도차에 귀를 기울여 본다.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케이지랑 관람 차 타러 갈 건데 길 좀 비켜줄 수 있을까요?”
가만 생각해보면, 보쿠토는 단순히 일탈을 목적으로 놀이공원을 찾은 것 같진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놀러 가고 싶었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유원지를 피서지로 고르진 않았으리라. 이를 테면 인적 드문 바닷가나 산 속. 아니면 오키나와를 비롯한 가까운 해외도 나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혹 정말 유원지에 가고 싶다 하더라도 출발부터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멍청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막상 놀이공원에 도착해서도 타본 놀이기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한 몇몇 기구들 뿐. 그러니까 이건 꼭,
“미안 꼬마야. 싸인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보다시피 여기 잘생긴 형아를 업고 있어서 남는 손이 없네.”
‘놀러’ 온 게 아니라
“다음번에 형아 보면 꼭 싸인 해달라고 해. 형이 잘 까먹거든.”
보쿠토 코타로의 ‘홍보’ 차 온 것 같았다.
* * *
“즐거운 시간 되세요.”
관람 차 문이 닫힌다. 기어가는 속도보다 더디게 풍경이 스쳐 지난다. 직원들의 제지로 기구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멀찍이서 아쉬운 눈길을 쏟는다. 그런 그들을 향해 보쿠토씨가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크게 팔을 흔든다. 느릿느릿 고도를 올리는 관람 차 밖의 풍경이 새삼스레 주위를 환기 시킨다. 어지간한 퍼레이드조차 이만한 규모의 인원을 불러 모으진 못하리라. 맞은편에 앉아 언제까지고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보쿠토씨를 빤히 바라보다, 맥 빠지는 한숨을 뱉는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거북이 같은 속도인 줄 알았건만 어느 새 사람들인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동화 속 세상이 점점 멀어진다. 조금 전 찰나들이 전부 꿈인 것 마냥 멀게만 느껴진다.
“……하긴.”
초승달마냥 곱게 휘어져 있던 눈매가 보기 좋게 뻣뻣해진다. 뭉친 제 어깨를 주무르고 세상만사에 흥미 없어진 얼굴을 한다.
오가는 대화는 전혀 없다. 남은 건 간간이 덜컹이는 관람 차의 뒤틀리는 소음 뿐. 일말의 기대가 힘없이 꺾인다. 왠지 모를 실망감이란 기분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다. 그에게로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둔다. 입술을 깨물고 애꿎은 창틀을 어루만진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휴대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손가락에 불이 붙도록 화면을 터치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는 말을 섞기는커녕 얼굴 마주하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했던 인간상이었다. 한 때는 그가 말이 없어지기만을, 그의 입이 굳건히 닫히기만을 간절히 바란 때도 분명 있었다.
“…….”
그러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 침묵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나약했다. 숨통은 턱턱 막히고 침 한 방울 삼키는 것마저 상대의 눈치를 보게 되며 무슨 행동을 취하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나는 분명 그 기로 앞에 서 있었다.
“……?”
잠깐 고개를 든 보쿠토씨가 한 쪽 눈썹을 으쓱이며 답한다. 언제나 쓸데없이 말이 많던 사람이기에 그의 대답 없는 시선이 낯설기만 하다. 머리를 굴린다. 겨우 트여진 말머리를 어물쩍 끝마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스스로가 내뱉은 말임에도 나는 순간 내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싶었다.
“이렇게 오버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질문이 보기 좋게 핵심을 비껴 지나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걸 묻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연기의 ‘연’자도 모르는 저지만……. 생판 남인 사람들 앞에서 그럴 듯하게 잘만 연기하시던데요 뭘.”
어째서 비꼬는 식의 말투가 튀어 나가는 건지. 당신의 능숙한 거짓말 앞에서 나까지 깜빡 넘어갈 뻔했다고. 연기 너무 잘한다고. 정말 좋았다고. 그런 칭찬 비슷한 것을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
그는 답하지 않는다. 대꾸 없이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줄곧 내 신경을 건드리던 톡톡 화면을 두드리는 소음은 거두어진 지 오래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턱이 손바닥 아래 받쳐져 있다. 저 선명한 금안이 자신을 보고 있으면 표면은 물론 속내까지 단번에 꿰뚫리는 기분이다.
“어릴 때 말이야.”
먼저 시작한 건,
“집에 돈이 많았어.”
보쿠토씨였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더럽게 많았어. 남들은 유치원이다 초등학교다 책가방 메고 학교 다닐 때 나는 멀찍이서 구경만 했어. 애초에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까. 홈스쿨링이다 뭐다 하면서 집에서 개인 교습만 받았거든.”
어라? 순전히 자기 자랑 아닌가.
“그래서 그런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어. 공부나 일이나 대인 관계나 돈 앞에선 개나 소나 비슷한 족속들처럼 보였지. 실제로도 그랬고.”
아무리 들어도 자기 자랑하는 건데.
“그러던 하루는, 우연히 연극을 볼 기회가 생긴 거야. 난생 처음 감상해본 문화 체험 비슷한 거였는데 거기에 깊이 감명을 받아 버린 거지. 극단을 통째로 샀고 단숨에 주연 자리를 꿰찼어. 뭐, 자잘한 불평불만이 나오긴 했지만 나오는 족족 다 잘라냈으니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고.”
……아니. 애시 당초 저게 ‘자랑’이란 걸 자각도 못하고 있나본데.
“결론은. 대차게 말아 먹었어. 조명은 눈부신데 머리는 새하얗고 말은 안 나오고 몸은 뻣뻣하고. 단기간 연기 교육을 과외 받았다지만 겨우 몇 주 만에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무리였던 거야.”
그제야 나는 보쿠토씨를 향해 똑바로 앉아 보았다.
“그때가 열다섯은 됐나? 그만큼 어설펐던 첫 무대, 첫 연기는 객석을 가득 채운 비웃음 섞인 질타와 조롱과 야유 속에서 일찍 막을 내렸어. 그 무렵 고스란히 받아냈던 힐난과 비난을 나는 아마 평생 못 잊어. 잊고 싶지도 않고.”
농담조로 꺼낸 줄 알았던 이야기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음을 절실히 체감한 순간이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구나. 급하게 커튼이 쳐진 무대 뒤에서 서럽게 엉엉 울며 처음 깨달은 게 그거였어.”
한 평생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란 없는 법이건만.
“그리고 불이 붙은 거지. 나에게 돈과 집안과 배경을 제외하고 남는 게 뭔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면 부끄러움, 질투, 열등감에서 비롯된 불순한 시작이었어. 그래. 인정해. 어찌 됐든 그 때 내 실력이 형편없었던 거니까. 그래서 집안의 원조란 원조는 다 끊었어. 밑바닥 중 밑바닥부터 차고 올라 겨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이토록 흔들림 없는 눈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앞으로 고작 한 걸음이야. 그 쯤 남은 기분이 들어. 그걸 넘어서는 순간 ‘나의 시대가 왔다!’는 기분에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 알겠어? 완전히 연기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 배우란 직업에 내 평생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이용했다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고 치졸하다 해도 할 말이 없어. 나는 누구보다 주목 받고 싶었으니까. 허접했던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내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결코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욕심이 많아. 눈에 띄고 싶고 각광받고 싶고 다들 나를 봤으면 좋겠어. 그 순간의 희열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기쁨이 너무 짜릿할 것 같거든.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지만.”
이토록 눈부신 사람을 한평생 만나본 적도, 대면해 본적도 없었다.
“너는 그런 적 없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을 터다.
“저는…….”
대하기 거북하다. 뭔가 싫다. 첫인상이 딱 그랬다. 그건 분명, 나와는 극명하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 사람이 지독하게 낯설었기 때문에. 가난과 궁핍에 찌들어 꿈이나 이상이나 그런 허무맹랑한 것들에 매달리고 있을 틈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에겐 코 묻은 돈이나 다름없는 그 몇 푼에 울고 웃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짐 덩어리 같던 마음의 일부를 조금 덜어내기로 한다.
“워낙 어릴 때여서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 좋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좀처럼 내비치지 않았던 과거의 일부를 조금 들춰내보기로 한다.
“하지만 보쿠토씨처럼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조그만 회사가 금세 부도 위기에 처했거든요. 아버지의 부재와 가계에 떠넘겨진 빚더미는 어머니와 저를 노동판으로 내몰았고 어머니는 당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겨를도 없이 뼈 빠지게 일을 해야만 했어요.”
깍지 낀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부딪힌 손톱들이 서로를 세게 짓누른다.
“마음의 병이란 게……. 몸까지 병들게 한 거예요. 어머니는 쓰러졌고, 빚더미에 뒤이은 병원비가 고지서를 강타한 거죠. 그 뒤론 잘 모르겠네요. 정신없이 돈만 벌었던 것 같아요.”
힐끗 옆 눈을 흘기니 관람 차는 어느 덧 꼭대기를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리 깨끗하지 못한 유리창 너머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보쿠토씨가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 필요 없어요. 싸구려 동정이라면 애초에 꺼내지도 말아요. 그냥. 그냥 이런 인생도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 평범해요. 돈 벌고, 빚 갚고, 어머니 모시고, 그냥 그 뿐인 거예요.”
관람 차가 내려간다. 점점이 찍혀 있던 인파가 갈수록 선명해진다. 가면을 써야할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징조였다.
“나의 시대가 왔다, 라고 했죠. 그럼 그건 보쿠토씨의 시대인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살고 저는 제 시대를 살 거예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씨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사이였잖아요, 우리.”
처음부터 그런 사이였다. 일개 아르바이트생과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배우. 자신의 목표를 향해 거리낌 없이 나아가는 사람과 그저 현재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 사는 세계가 달랐고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아무리 섞이고 싶어도 물과 기름처럼 아예 근본부터가 다른, 우리는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