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이야~ 사람 엄-청 많다.”

“보쿠토씨.”

“나 코찔찔이 일 때 말곤 도통 놀이공원에 와본 적이 없거든. 진짜 오랜만이다.”

“보쿠토씨.”

“헐 대박, 저거 보여? 저어기 아기가 쓰고 있는 거! 하트 머리띠!! 움직일 때마다 달랑달랑 움직여! 케이지 우리도 저거 하자.”

“보쿠토씨!”


세 번의 부름 끝에 아카아시를 돌아본 보쿠토의 눈이 마치 멀리 소풍을 나온 강아지의 눈을 떠올리게끔 한다. 놓치지 않도록 깍지를 낀 손에 잠시 시선을 던지던 아카아시가 다시 보쿠토를, 그리고 그를 둘러싼 풍경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는다. 


“놀이공원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놀이공원.”


그럼 왜 불러 세우냐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보쿠토에게 상황 설명을 하자니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한 아카아시다. 


“하다못해 모자나 선글라스 정도는 써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찰칵거리는 셔터 음과 심심치 않은 환호성이 오롯이 저들을 향하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몇몇 모이기 시작하자 무슨 볼거리인가 싶어 유원지로 들어서려던 인파들이 호기심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되려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에이~ 뭐 어때. 놀러 나온 건데.”


그랬다. 영화 포스터 촬영이 끝난 직후 짧고 간단한 작별인사를 고한 보쿠토는 다짜고짜 아카아시의 팔을 낚아채 누군가 막아설 틈도 없이 촬영장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뿐일까. 면허도 없고 차도 없다는 변명을 들먹인 그는 메이크업이나 머리 셋팅 하나 가릴 생각조차 없이 JR에 올라 타버린 것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SNS를 통해 제법 유명인사가 된 보쿠토를 제일 먼저 알아본 어린 학생들이 꺅꺅대며 부리나케 그에게로 달려 들었고 그 여파가 널리 퍼져 그들이 있던 전차 한 칸이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개미떼마냥 보쿠토에게 달려들어 열렬한 환호성을 외치는 이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촬영장에서 아카아시씨를 감쌌단 얘기 들었어요. 그 이후로 완전히 팬이 되어 버린 거 있죠?’

‘아, 옆에 계신 분이 아카아시씨?!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잘생기셨어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이번에 보쿠토씨가 나오는 영화 친구들이랑 꼭 보러 가기로 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나오는 영화라면 분명 영화도 좋은 내용일 테니까요.’

‘예쁜 사랑 하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보쿠토씨 너무 잘생겼어요! 사랑해요!’

‘아카아시씨도 멋져요!’


순식간에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응원을 받아버린 두 사람은 요코하마에 위치한 유원지에 도착하기까지 자신들의 팬이 되어버린 일반인들을 응대하기 바빴다. 싸인 할 종이가 없어 유성매직으로 손등에 이름을 쓰는 것은 물론, 포옹과 악수가 곁들어졌던 그 곳은 소규모 팬 미팅을 방불케 했다. 


의외였던 부분은 아카아시 또한 사람들 눈 안에 든 존재라는 점이었다. 생전 처음 과분하다 싶을 만큼 타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버린 아카아시는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싸인 해달라는 어린 친구나, 한 번만 안아 봐도 되냐며 뺨을 붉히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을 상대로 식은땀만 뻘뻘 흘렸을 뿐이다. 


또한 더욱이 큰 문제는,


“쿠로오씨한테 놀러 간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뛰쳐나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 깜짝 나들이가 엄연한 ‘스케줄 펑크’라는 점이었다. 앞서 나가기 바쁘던 보쿠토가 뒤를 돌아보며 히죽 웃는다. 


“아. 알고 있었어?”


순수 100퍼센트 바보인 건지. 아니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움직이는 건지.


“그 쪽 주머니에서 아까부터 전화가 걸려 오고 있으니까 알죠.”


작게 한숨 쉰 아카아시가 눈짓으로 보쿠토의 얇은 외투 주머니를 가리킨다. 그 안에 몸을 사리고 있는 통신 기기가 어찌나 열렬하게 진동하고 있는지


“귀찮게 시리.”


뒷목까지 긁적이며 자신에겐 관심조차 안 주는 주인에게 불굴의 일편단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쿠로오 이겨먹거든.”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젠 다 틀렸다. 놀이기구를 다 타보든 하나만 정해 10번을 넘게 타든 사람들 주목을 즐기며 연예인 병에 걸리든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싸돌아다니지 않는 한 이 사람은 돌아갈 생각 따위 추호도 하지 않으리라. 


아카아시가 체념한 얼굴을 한다. 가자는 대로 가고 하자는 대로 하기로 한다. 이끌어 가는 손에 몸을 맡긴다. 피리 부는 사나이마냥 두 사람의 뒤를 거대한 무리의 인파가 거리를 두고 졸졸 쫓아간다. 


표를 끊고 입장을 한다. 오색빛깔 풍선들을 한 아름 품에 안은 다람쥐 캐릭터가 뒤뚱뒤뚱 걸음을 옮긴다. 자잘한 폭죽에서 시작된 작은 불꽃들이 청량한 하늘을 밝히고 동화 속에서 튀어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거리에선 경쾌한 퍼레이드 음악이 흘러나온다. 깔깔 대는 웃음보를 터뜨리는 개구쟁이 아이들, 드높은 하늘을 향해 무지갯빛 비눗방울을 불어내는 꼬마 아가씨, 화려한 옷가지로 치장한 채 자신들의 매력을 뽐내는 장난감 인형들, 한 폭의 풍경화마냥 산의 초록빛 능선과 어우러지는 놀이기구들, 즐거움으로 한층 들떠 오른 공기까지.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튀어 나온다. 토끼 눈을 연상케 하듯 휘둥그레진 녹안이 주위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다. 앞서 뜀박질하다시피 달려 나가던 보쿠토 또한 걸음이 느려진다. 동화 속 세상에 발을 내디딘 이방인들처럼 느릿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감상하기 바쁘다. 


그 또한 찰나에 불과했지만. 


물 만난 고기는 금세 제자리를 펄쩍펄쩍 뛰며 앞장을 선다. 입구 근방을 장식하고 있던 놀이 공원 내부 지도는 아카아시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이대로 무작정 돌아다니는 게 정말 괜찮은 건지, 겹겹이 쌓이는 걱정거리가 밀물처럼 아카아시를 덮쳐온다. 


다행히 두 사람은 놀이기구를 많이 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놀이기구를 찾아 똑같은 거리 근방을 맴돌며 방황한 것 또한 아니었다. 타본 놀이기구는 기껏해야 범퍼카, 롤러코스터, 회전목마 정도. 그 외엔 길거리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보쿠토가 그토록 염원하던 하트 모양 머리띠를 머리에 얹어 보고, 


“와, 되-게 안 어울리네요.”

“너라고 잘 어울릴 것 같냐,”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표정 좀 푸시죠. 일단은 연인이니까.”

“헤……이헤이헤이!”

“또 그겁니까.”


비눗방울이 나오는 장난감 총을 충동적으로 구매해 신나게 쏘아보고, 


“이건 예쁘네요.”

“케이지 만 하겠어.”

“그거 욕이죠.”

“칭찬이거든?”

“아하. 특정인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다 보니 제가 실수를 했네요.”

“야!……가 아니고 케이지!!”


캐릭터 조각상 옆에 나란히 서 셀카를 찍고, 


“너무 들러붙지 마라. 땀 냄새 나니까.”

“와, 보쿠토씨 카메라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죠? 이렇게 얼굴 크게 나오는 사람 난생 처음 봐요.”

“죽는다 진짜.”

“사랑해로 알아 들을 게요.”

“……스릉흐. 스릉흔드그.”


솜사탕을 먹고, 


“묻었어요.”

“어? 어디.”

“입 옆에.”

“아…이제 됐어?”

“아뇨. 이젠 코 옆에 묻어 있어요.”

“……됐니?”

“사실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안 묻어 있었어요.”

“……너 진짜…….”

“사랑한다고요?”

“……오냐. 아주 사랑해 죽겠다 이 자식아.”


츄러스를 먹고, 와플을 먹고, 소프트콘을 먹고, 소시지를 먹고, 닭 꼬치를 먹고, 


“너무 먹기만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어때. 먹는 게 남는 거지.”

“이러려고 놀이공원 온 거예요?”

“일일이 시끄럽네. 너도 맛있어 했잖아. 그럼 장땡인 거지.”

“허어…….”


먹고, 먹고, 지겹도록 먹었을 뿐이다. 


이젠 소풍을 나온 건지 먹방 투어를 나온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을 무렵 해는 지평선과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이고 아카아시의 무릎과 발바닥은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잠깐만요.”


자석의 N극과 S극 마냥 도통 떨어질 줄 몰랐던 손깍지가 풀려 버린다. 하트 모양 선글라스 밑에 가려진 황금색 동공이 휘둥그레지며 아카아시를 돌아본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인파는 어느 새 놀이공원의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인원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약간 힘들어서……. 조금만 쉬었다 가요.”


한 손에 피카츄 얼굴의 풍선을 들고 있던 아카아시가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근처 화단으로 걸음을 옮긴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고운 미간을 찡그린다. 고된 노동으로 팅팅 부르텄을 발바닥을 주무르기 위해 운동화를 벗는다.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해 사두었던 생수 통은 바닥을 보인지 오래다. 


이제쯤이면 힘들다던가 지친다던가 돌아가자던가 등의 힘든 기색을 내비칠 법도 하건만 아카아시는 잔뜩 피로에 지친 낯빛만 하고 있을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즉, 말을 아끼고 있던 것이었다. 


신나게 돌아다닐 대낮엔 속삭임에 가까운 대화가 가능했다 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사방이 카메라였다. 휴대폰이란 이름의 카메라, 눈이란 이름의 카메라. 그들 앞에서 솔직한 속내를 내비칠 순 없는 입장인 게 바로 아카아시였다. 이것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우스꽝스런 역할극의 한 장면. 산소 결핍과 극한의 피로를 느끼는 와중에도 아카아시는 제 이성을 붙잡으려 피땀 나게 애를 썼다. 그가 예상치 못한 거라곤


“많이 아팠어?”


보쿠토의 다음 행동이었다. 


한 쪽 무릎을 꿇는다. 거추장스런 기념품들은 잠시 바닥에 내려둔다. 손을 뻗는다. 줄무늬 양말이 감싸고 있는 발바닥을 잡아 끈다. 엄지발가락에서부터 새끼발가락까지를 부드럽게 감아쥔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그것들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옴폭하게 들어간 발 안쪽을 세게 누르는가 하면 물집이 잡힌 발뒤꿈치 주변을 살살 매만진다. 안마에 능숙한 손은 어느새 발목을 타고 올라가 부종으로 팅팅 부은 종아리를 어루만진다. 


“미안. 무리하게 해서.”


정말 미안한 눈을 한다. 슬프게 휘어지는 눈웃음이 위를 향한다. 일말의 거짓 없는 눈빛이 아카아시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다. 


“잠……깐.”

“여기 근육들이 많이 뭉쳤네. 내가 안마 하나는 자신 있거든.”


아카아시는 목소리를 낮춘다. 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속삭임이 보쿠토의 귓전에 닿는다. 


“뭐하는 거예요. 사람들 다 보잖아요. 부끄러운 짓 그만하고 당장 일어나요.”


그러나 보쿠토는 완고하다. 


“조금만 만질게. 싫어도 좀 참아 봐.”


슬슬 열이 오르는 건 오히려 아카아시였다. 끝을 모르던 피로는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남은 것은 다리와 발끝에 머무르는 낯선 이의 뜨끈한 체온. 그곳에서 시작된 열기였을까. 보쿠토의 손길이 닿는 족족 만개하듯 퍼져 나가는 열기는 목덜미를 붉히고 뺨을 화끈거리게 하고 귓불마저 홧홧하게 한다.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제 눈앞의 보쿠토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려 하면 


“대박…….”

“진짜 멋있다.”

“너무 로맨틱하잖아…….”


보쿠토를 향해 탄성을 자아내는 시선들이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 즈음 아카아시는 정신을 차렸다. 부끄러움과 설렘으로 크게 쿵쾅거렸던 심장이 소리 없이 가라앉았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의 심정이 난생 처음 공감됐다. 


발끝에서부터 다정하게 느껴지던 손길은 거짓으로 치장되고 엉덩이를 붙인 화단가는 가시방석을 방불케 한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공기만이 주변보다 10도 쯤 가라앉은 듯하다. 


그런 아카아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쿠토가 등을 보인다.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낮춘다. 


“뭐해? 업혀.”


차라리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면. 보고 싶은 장면, 느끼고 싶은 감정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꾸욱 누른 채, 그 기분에 영영 사로 잡혀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 케이지가 정 못 걷겠으면 이 애인님이 한 몸 희생해야지. 안 그래?”


정말 좋았을 텐데. 


나직한 한숨을 뱉는다. 도무지 올라가지 않는 입 꼬리를 억지로 말아 올려 본다.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들에 화답하듯 보쿠토의 목에 팔을 두른다.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목덜미에 고개를 묻는다. 규칙적으로 요동치는 심박 수를 가만히 느껴본다. 그와 자신, 두 심장의 온도차에 귀를 기울여 본다.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케이지랑 관람 차 타러 갈 건데 길 좀 비켜줄 수 있을까요?”


가만 생각해보면, 보쿠토는 단순히 일탈을 목적으로 놀이공원을 찾은 것 같진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놀러 가고 싶었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유원지를 피서지로 고르진 않았으리라. 이를 테면 인적 드문 바닷가나 산 속. 아니면 오키나와를 비롯한 가까운 해외도 나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혹 정말 유원지에 가고 싶다 하더라도 출발부터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멍청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막상 놀이공원에 도착해서도 타본 놀이기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한 몇몇 기구들 뿐. 그러니까 이건 꼭, 


“미안 꼬마야. 싸인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보다시피 여기 잘생긴 형아를 업고 있어서 남는 손이 없네.”


‘놀러’ 온 게 아니라


“다음번에 형아 보면 꼭 싸인 해달라고 해. 형이 잘 까먹거든.”


보쿠토 코타로의 ‘홍보’ 차 온 것 같았다. 



* * *



“즐거운 시간 되세요.”


관람 차 문이 닫힌다. 기어가는 속도보다 더디게 풍경이 스쳐 지난다. 직원들의 제지로 기구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멀찍이서 아쉬운 눈길을 쏟는다. 그런 그들을 향해 보쿠토씨가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크게 팔을 흔든다. 느릿느릿 고도를 올리는 관람 차 밖의 풍경이 새삼스레 주위를 환기 시킨다. 어지간한 퍼레이드조차 이만한 규모의 인원을 불러 모으진 못하리라. 맞은편에 앉아 언제까지고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보쿠토씨를 빤히 바라보다, 맥 빠지는 한숨을 뱉는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거북이 같은 속도인 줄 알았건만 어느 새 사람들인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동화 속 세상이 점점 멀어진다. 조금 전 찰나들이 전부 꿈인 것 마냥 멀게만 느껴진다. 


“……하긴.”


초승달마냥 곱게 휘어져 있던 눈매가 보기 좋게 뻣뻣해진다. 뭉친 제 어깨를 주무르고 세상만사에 흥미 없어진 얼굴을 한다. 


오가는 대화는 전혀 없다. 남은 건 간간이 덜컹이는 관람 차의 뒤틀리는 소음 뿐. 일말의 기대가 힘없이 꺾인다. 왠지 모를 실망감이란 기분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다. 그에게로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둔다. 입술을 깨물고 애꿎은 창틀을 어루만진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휴대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손가락에 불이 붙도록 화면을 터치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는 말을 섞기는커녕 얼굴 마주하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했던 인간상이었다. 한 때는 그가 말이 없어지기만을, 그의 입이 굳건히 닫히기만을 간절히 바란 때도 분명 있었다. 


“…….”


그러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 침묵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나약했다. 숨통은 턱턱 막히고 침 한 방울 삼키는 것마저 상대의 눈치를 보게 되며 무슨 행동을 취하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나는 분명 그 기로 앞에 서 있었다. 


“……?”


잠깐 고개를 든 보쿠토씨가 한 쪽 눈썹을 으쓱이며 답한다. 언제나 쓸데없이 말이 많던 사람이기에 그의 대답 없는 시선이 낯설기만 하다. 머리를 굴린다. 겨우 트여진 말머리를 어물쩍 끝마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스스로가 내뱉은 말임에도 나는 순간 내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싶었다. 


“이렇게 오버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질문이 보기 좋게 핵심을 비껴 지나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걸 묻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연기의 ‘연’자도 모르는 저지만……. 생판 남인 사람들 앞에서 그럴 듯하게 잘만 연기하시던데요 뭘.”


어째서 비꼬는 식의 말투가 튀어 나가는 건지. 당신의 능숙한 거짓말 앞에서 나까지 깜빡 넘어갈 뻔했다고. 연기 너무 잘한다고. 정말 좋았다고. 그런 칭찬 비슷한 것을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


그는 답하지 않는다. 대꾸 없이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줄곧 내 신경을 건드리던 톡톡 화면을 두드리는 소음은 거두어진 지 오래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턱이 손바닥 아래 받쳐져 있다. 저 선명한 금안이 자신을 보고 있으면 표면은 물론 속내까지 단번에 꿰뚫리는 기분이다. 


“어릴 때 말이야.”


먼저 시작한 건, 


“집에 돈이 많았어.”


보쿠토씨였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더럽게 많았어. 남들은 유치원이다 초등학교다 책가방 메고 학교 다닐 때 나는 멀찍이서 구경만 했어. 애초에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까. 홈스쿨링이다 뭐다 하면서 집에서 개인 교습만 받았거든.”


어라? 순전히 자기 자랑 아닌가. 


“그래서 그런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어. 공부나 일이나 대인 관계나 돈 앞에선 개나 소나 비슷한 족속들처럼 보였지. 실제로도 그랬고.”


아무리 들어도 자기 자랑하는 건데. 


“그러던 하루는, 우연히 연극을 볼 기회가 생긴 거야. 난생 처음 감상해본 문화 체험 비슷한 거였는데 거기에 깊이 감명을 받아 버린 거지. 극단을 통째로 샀고 단숨에 주연 자리를 꿰찼어. 뭐, 자잘한 불평불만이 나오긴 했지만 나오는 족족 다 잘라냈으니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고.”


……아니. 애시 당초 저게 ‘자랑’이란 걸 자각도 못하고 있나본데. 


“결론은. 대차게 말아 먹었어. 조명은 눈부신데 머리는 새하얗고 말은 안 나오고 몸은 뻣뻣하고. 단기간 연기 교육을 과외 받았다지만 겨우 몇 주 만에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무리였던 거야.”


그제야 나는 보쿠토씨를 향해 똑바로 앉아 보았다.


“그때가 열다섯은 됐나? 그만큼 어설펐던 첫 무대, 첫 연기는 객석을 가득 채운 비웃음 섞인 질타와 조롱과 야유 속에서 일찍 막을 내렸어. 그 무렵 고스란히 받아냈던 힐난과 비난을 나는 아마 평생 못 잊어. 잊고 싶지도 않고.”


농담조로 꺼낸 줄 알았던 이야기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음을 절실히 체감한 순간이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구나. 급하게 커튼이 쳐진 무대 뒤에서 서럽게 엉엉 울며 처음 깨달은 게 그거였어.” 


한 평생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란 없는 법이건만. 


“그리고 불이 붙은 거지. 나에게 돈과 집안과 배경을 제외하고 남는 게 뭔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면 부끄러움, 질투, 열등감에서 비롯된 불순한 시작이었어. 그래. 인정해. 어찌 됐든 그 때 내 실력이 형편없었던 거니까. 그래서 집안의 원조란 원조는 다 끊었어. 밑바닥 중 밑바닥부터 차고 올라 겨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이토록 흔들림 없는 눈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앞으로 고작 한 걸음이야. 그 쯤 남은 기분이 들어. 그걸 넘어서는 순간 ‘나의 시대가 왔다!’는 기분에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 알겠어? 완전히 연기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 배우란 직업에 내 평생을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던 거야. 이용했다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고 치졸하다 해도 할 말이 없어. 나는 누구보다 주목 받고 싶었으니까. 허접했던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내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결코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욕심이 많아. 눈에 띄고 싶고 각광받고 싶고 다들 나를 봤으면 좋겠어. 그 순간의 희열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기쁨이 너무 짜릿할 것 같거든.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지만.”


이토록 눈부신 사람을 한평생 만나본 적도, 대면해 본적도 없었다.


“너는 그런 적 없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을 터다. 


“저는…….”


대하기 거북하다. 뭔가 싫다. 첫인상이 딱 그랬다. 그건 분명, 나와는 극명하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 사람이 지독하게 낯설었기 때문에. 가난과 궁핍에 찌들어 꿈이나 이상이나 그런 허무맹랑한 것들에 매달리고 있을 틈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에겐 코 묻은 돈이나 다름없는 그 몇 푼에 울고 웃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짐 덩어리 같던 마음의 일부를 조금 덜어내기로 한다. 


“워낙 어릴 때여서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 좋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좀처럼 내비치지 않았던 과거의 일부를 조금 들춰내보기로 한다. 


“하지만 보쿠토씨처럼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조그만 회사가 금세 부도 위기에 처했거든요. 아버지의 부재와 가계에 떠넘겨진 빚더미는 어머니와 저를 노동판으로 내몰았고 어머니는 당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겨를도 없이 뼈 빠지게 일을 해야만 했어요.”


깍지 낀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부딪힌 손톱들이 서로를 세게 짓누른다. 


“마음의 병이란 게……. 몸까지 병들게 한 거예요. 어머니는 쓰러졌고, 빚더미에 뒤이은 병원비가 고지서를 강타한 거죠. 그 뒤론 잘 모르겠네요. 정신없이 돈만 벌었던 것 같아요.”


힐끗 옆 눈을 흘기니 관람 차는 어느 덧 꼭대기를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리 깨끗하지 못한 유리창 너머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보쿠토씨가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 필요 없어요. 싸구려 동정이라면 애초에 꺼내지도 말아요. 그냥. 그냥 이런 인생도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 평범해요. 돈 벌고, 빚 갚고, 어머니 모시고, 그냥 그 뿐인 거예요.”


관람 차가 내려간다. 점점이 찍혀 있던 인파가 갈수록 선명해진다. 가면을 써야할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징조였다. 


“나의 시대가 왔다, 라고 했죠. 그럼 그건 보쿠토씨의 시대인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살고 저는 제 시대를 살 거예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씨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사이였잖아요, 우리.”


처음부터 그런 사이였다. 일개 아르바이트생과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배우. 자신의 목표를 향해 거리낌 없이 나아가는 사람과 그저 현재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 사는 세계가 달랐고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아무리 섞이고 싶어도 물과 기름처럼 아예 근본부터가 다른, 우리는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멜입니다.

이렇게 공지글을 쓰게 된 이유는 비공개 글에 대한 공개 여부 혹은 비공개 글의 비밀번호 문의가 자주 들어와서 입니다.

먼저, 웹연재분은 R-19이 아닌 경우는 절대 비공개하지 않습니다. 수위글 비밀번호는 다른 공지글에 기재해두었으니 참고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회지나 소장본, 재록본 제작에 들어간 글은 통판 기간이 끝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일부 비공개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비공개처리된 글의 비밀번호는 수위글 비밀번호와 전혀 다르니 오해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비공개 글은 제 회지를 구매해주신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일절 공개하지 않을 예정으로, 종이책으로만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일체 재판 예정이 없을 회지들을 포스타입에 유료 공개 해두었습니다. 아래 해당된 글들은 도입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토리가 유료로 열람 가능하며 티스토리에선 1화를 제외하곤 영구적으로 비공개 처리 됩니다. (일부 글은 성인 인증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1. 보쿠아카/쿠로켄 <불신 1부: 초열 지옥> : https://melting-winter.postype.com/post/994380

키워드: 논커플링, 조직물, 폭력, 잔인, 사망 소재 다수


2. 이와오이마츠 <소외> : https://melting-winter.postype.com/post/994325

키워드: 원작기반, 짝사랑


3. 보쿠아카쿠로 <미아> : https://melting-winter.postype.com/post/994402

키워드: R19, 권태, 이별, 짝사랑


4. 마츠오이이와 <탐닉> : https://melting-winter.postype.com/post/994424

키워드: R19, 양귀비 하나하키(마약 및 약물 중독 소재 다수), 교도소 배경, 아이돌 'SEIJO'



+ 최종 수정 17. 9. 7




*뚜또님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 발걸음에 긴장이 없었다면 거짓이리라. 그 지하의 끝, 군데군데 녹이 슨 철문 틈새로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들린다. 무언의 긴장 탓에 손잡이를 돌리려는 것을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면 뒤따라오던 쿠로오씨가 보다 못해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고하십니다~”


안은 꽤 넓었다. 또한 어수선했다. 이제 막 마지막 씬 촬영 끝마친 듯 촬영장 곳곳에는 조명 기구와 사다리, 고공 와이어 장비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거대한 카메라 근처엔 서넛의 사람이 모여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헤드폰을 쓰고 있던 스탭 진 중 일부는 뿌듯한 얼굴로 귓바퀴를 가리고 있던 전자기기를 집어 던지며 환호성을 외치고 있었다.


이렇듯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쯤 되는 인파로 가득 찬 촬영장 앞에서 나는 갈 곳을 잃었다. 앞서 들어간 쿠로오씨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진즉에 이 곳으로 들어섰을 보쿠토씨의 뒷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 사람의 홍수로 가득한 이 곳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던 나는 출입구 근처 벽에 등을 기댔다. 괜한 소외감에 한 팔로 다른 한 팔을 감싸 안았다. 나를 제외한 채 저들끼리 신난 분위기에 어떻게든 적응해보려 주위를 살피면 아주 느린 속도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남는 의자들은 다 이 쪽으로 갖고 와!”

“배경 지는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좀 짧을 것 같은데. CG용 배포지 남아 있을 테니까 CG팀 애들한테 남은 거 갖다 달라 봐.”

“넵.”


스탭 몇몇이 촬영장 한 켠에 공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에 뒤이어 아나운서가 말하는 듯한 또랑또랑한 음성이 귀에 닿는다. 


“배우 분들, 인터뷰 대본과 질문지는 이 쪽에 다 마련되어 있으니 답변만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리포터가 종이를 나눠 주고 있었다. 종이를 첫 번째, 두 번째로 받아 들어 눈대중으로 대본을 훑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영화의 주인공 격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이 대본을 읽든 말든 코디들 두셋이 달라붙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메이크업을 수정해주고 옷매무새를 대신 봐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제일 마지막에 종이를 건네받은 보쿠토씨는 촬영장 구석 중에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눈에 띄는 건 삐죽빼죽한 머리칼과 대본을 받았다는 흥분 감으로 번쩍이는 황금색 눈알 정도. 빙산의 일각처럼 화려히 드러내던 존재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촬영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보쿠토씨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배우 분들 담당 코디는 인터뷰 시작 전에 메이크업, 의상 체크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나가듯 들었던 영화의 장르는 범죄 스릴러였다. 피와 시체가 난무한 극 중 스토리에 주연 배우들은 믿음과 배신,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서로에게는 불신의 총구를 겨누고 일회성 조연이라 할 수 있는 배역들에겐 칼부림을 서슴지 않는다. 


보쿠토씨의 역할은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의 우두머리였다. 즉, 극 중에서 언제 어떻게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역임과 동시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있어선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영화 분위기를 웃음으로 풀어 나가는 약방의 감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촬영 시작 10분 전입니다!”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야.’

‘나한테 돌아오는 배역은 항상 그렇더라고.’

‘아직 갈 길이 먼 거지.’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제 입으로 그런 소릴 했던 사람이다. 조금은 쓴웃음을 지으며 빨대로 음료를 휘젓던 사람이다. 매니저란 사람은 당장 보쿠토씨의 배역을 구해 다니며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담당 코디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리 스캔들을 냈다 한들 보쿠토씨에게 돌아가는 질문이 몇 개나 될까. 몇 개씩이나 되기는 할까. 마이크를 건네받을 수 있을지 조차 확신이 안 서는 이 미묘한 공기 속에서 뭐가 그렇게 기뻐 헤실헤실 웃고만 있는지. 


“……머리 다 풀렸잖아, 저 사람.”


10분 내내 종이 쪼가리만 붙들고 있을 생각인지 보쿠토씨의 시선은 그곳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왁스로 단단히 고정된 줄 알았던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신경 쓰지 말아야지 머릿속으로 내내 읊조리던 다짐과 달리 발끝은 어느 새 그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조명을 등지고 있던 탓에 자연스레 그림자가 드리워지니 활자를 읽을 수 없어진 보쿠토씨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뭐하고 계십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우연치 않게 볼 기회가 생긴다 해도 감흥 없이 넘기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성공과 실패, 희극과 비극의 한 가운데엔 언제나 주인공들의 이야기뿐이었기에, 그 외의 배역들에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뭐하긴……. 인터뷰 준비하고 있지.”


그래서 그런 걸까. 단역이라 불리는 엑스트라의 고충을 알지 못했다. 알 수가 없었던 거다. 연기력도 그럭저럭, 존재감도 그럭저럭, 의욕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직업이라 부를 수 있는 촬영장에서조차 이렇다 할 입지를 가지지 못한 당신의 외로움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꼴로 인터뷰를 하겠다고요?”


무릎을 굽혔다. 눈높이를 맞췄다. 놀란 동그래진 눈이 끔벅거렸다. 셋팅이 풀린 머리카락 몇 올이 그의 눈가를 찌르고 있었다. 그 꼴이 우스워 문득 실없는 웃음이 났다. 


“왁스 챙겨 왔으면 꺼내 봐요.”

“어, 어?”

“그 엉망인 머리, 손질 좀 해주겠다고요.”


하다못해 메이크업 도구라도 있었으면 이 못난 얼굴 보정이라도 해줬을 텐데. 


손가락의 체온으로 크림 왁스를 살살 녹인 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올려 주며 아쉬운 마음을 삼켰다. 의외로 삐져나온 잔머리가 많아 손이 많이 가고 있음에도 이 사람은 전혀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낮게 깔린 눈꺼풀 밑으로 날카로운 눈매가 일말의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답변을 외듯 중얼중얼 거리는 입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풍겼고 간간히 찡그려지는 미간과 적당한 답이 생각나지 않는지 갸웃거리는 턱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차 안에서 방방 날뛰던 어린 애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다른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직업병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가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정수리에 꽂인 방망이 두 개의 끄트머리 손질을 끝마치니 그야말로,


“……부엉이?”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괴상망측하다 여겼던 이 머리스타일을 내 손으로 만지게 될 날이 오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건만. 한 번 터지기 시작한 웃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아 이내 허파에 바람 들린 사람마냥 배꼽까지 잡고 웃어 버렸다. 


“아? 왜 웃어?!”


실성에 가까운 소릴 내며 웃고 있는 나를 한 발 늦게 발견한 보쿠토씨가 기분이 상했단 어투로 되물었다. 나는 대답도 못 한 채 눈물까지 훔치며 웃어 보였고, 보쿠토씨는 그런 나를 호되게 나무라 하려다 결국엔 비슷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촬영장 구석을 채우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을 향한 시선이 돌아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를 아니꼬운 눈으로 노려보는 시선 또한 없지 않았음을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 * *



인터뷰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형식상 영화에 출연한 배우란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진행한 인터뷰였으나 마이크가 돌아가는 건 감독이나 주연 배우들뿐이었다. 쓰레기 같은 질문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쿠로오씨의 걱정도,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올까 전전긍긍하며 대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보쿠토씨의 노력마저도,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헤어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하시네요.’


감흥은 그것 하나뿐. 그마저도 분량이 차지 않아 편집해야겠단 담당 피디의 혼잣말을 생생히 듣고 말았으니. 


사소한 트러블을 비롯한 따가운 눈초리는 으레 인터뷰가 마무리된 뒤에 터져 나오곤 했다. 수고 했습니다 를 복창하며 촬영장을 떠나려는 보쿠토씨의 뒷모습에 대고 은근한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좀처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게이 배우냐 에서 시작해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그럴 줄은 몰랐다는 둥, 같이 있는 사람이 그 상대냐는 둥, 저런 사람과 같이 작업을 했다니 소름이 끼친다는 둥. 


아무리 계약 연애라 할지라도 일단 나는 이 사람과 일말의 연관성도 없는 인간이었다. 즉, 엄연한 타인이었다. 그런 나까지도 험담에 바닥을 칠 만큼 기분이 좋지 못했다면 보쿠토씨 본인의 기분은 얼마나 


‘괴물 같아.’


거지같았을까. 


그 무렵 보쿠토씨는 발을 멈췄다. 쿠로오씨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화답하던 기색을 싹 감춰 버린 채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내비치며 등을 돌렸다. 

이 사람을 말려야 겠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이 터지겠구나. 


그러한 육감이 내 뒤통수를 내리친 것 또한 그 순간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주먹이 오갈 지도 모르겠단 불안한 마음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다만, 


‘저기요.’


보쿠토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한 인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사귀는 데 그쪽들이 뭐 보태줬습니까?’


내 어깨를 잡아 끌었다. 보란 듯이 나를 옆에 세웠다. 


‘남의 연애에 신경 좀 끄세요.’


차갑게 식은 눈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우릴 괴물이라 지칭하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일부 스탭들에게 향해 있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도 정신이 없어서 스쳐 지나가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워 죽겠거든요.’


의외다 싶을 만큼 차분한 대답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벙찐 눈꺼풀을 끔벅이며 바쁘게 놀리던 입을 멈춘 스탭들도, 자기네들 세상 이외엔 흥미가 없을 줄 알았던 주연 배우들도, 출입구 손잡이를 잡고 있던 쿠로오씨도, 하다못해 조금 전 인터뷰를 끝마친 촬영 팀까지도.


‘안 그래 케이지?’


이상한 건 내 쪽이었다. 짐짓 확신에 찬 목소리와 내 이름과 싱긋 휘어진 눈매가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던가. 이건 속임수고 거짓부렁에 불과하고 이 사람은 그저 그럴 듯한 가면을 쓴 것뿐 인데. 그것이


‘…….’


할 말을 잊어버릴 만큼 놀랄 일이었던가. 


무섭도록 뛰어오른 맥박수가 목덜미까지 차올라 쿵쾅거렸다. 때 아닌 부정맥에 화들짝 놀란 주제에 그 사람의 선명한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건 바로 나였다. 


‘깔 거면 마음껏 까세요. 우린 우리 식대로 사랑할 테니까.’


그 마지막 선전포고와 함께 출입구 쪽으로 내 어깨를 이끌어가는 것엔 분명한 동경이 있었다.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떨렸던 걸까. 


‘사랑’이란 단어가 아득히 먼 어감처럼 들렸음에도. 


그 후의 일은 뻔했다. 지하에서부터 올라와 지상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쿠로오씨의 분노와 폭발이 섞인 다그침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 것이었다. 보쿠토씨는 보쿠토씨대로 그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니 제 나름대로 대응책을 마련한 것이라는데, 그것은 해결책이라기 보단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으리라. 


사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보쿠토씨의 조금 전 행동은 분명 자폭을 초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영영 안 볼 사이도 아니고 하물며 자신이 출연한 영화 출연진들에게 동성연애에 대한 제 신념을 담긴 폭탄선언을 한 것이었으니. 안 그래도 좁은 입지가 이번 기회로 말미암아 먼지 한 줌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보쿠토씨는 말이 없었다. 쿠로오씨 또한 굳은 표정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각자가 자신들 만의 생각에 골똘히 잠겨 말을 아끼는 동안, 나는 깍지 낀 손을 물끄러미 내려만 보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 끄트머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피부 결 아래 쉴 틈 없이 펄떡거리는 맥박수가 생경했다. 몸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다가도 곁눈질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람 하나 들어갈 법한 공간을 사이에 둔 채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몸서리치게 싫었던 회백색 머리칼이 반가웠고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썹 모양은 퍽 다정해 보였으며 뚱하게 내밀어진 입술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그 순간에서 끝나지 않았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선전포고를 한 쪽은 보쿠토씨였건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보쿠토씨에겐 그 흔한 호통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쿠로오씨의 자잘한 잔소리라면 모를까 오히려 촬영장 분위기 자체가 ‘보쿠토 코타로’란 이름을 중심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 같았다. 생수를 챙겨주고 감독님의 눈이 닿는 상석을 별도로 마련해주며 그곳에 ‘보쿠토’란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그뿐일까. 다음 시나리오 컨셉이 어떤지, 어떤 배역들이 있는지, 촬영 방향이라던지에 관한 이야기가 쿠로오씨를 통해 심심치 않게 오고 갔다 한다. 즉,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보쿠토의 눈치를 보곤 했는데, 마치 그의 기분을 맞추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보였다. 


후에 듣기론 커밍아웃 스캔들에서 비롯된 악의 없는 호기심과 의구심이 그 순간 기염을 토한 것이라 했다. 남의 악담에 주의를 기울이고 마는 사람의 본능 앞에서 사실 보쿠토씨의 대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이 되었든 부정이 되었든 물기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리라.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도 정신이 없어서 스쳐 지나가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워 죽겠거든요.’

‘깔 거면 마음껏 까세요. 우린 우리 식대로 사랑할 테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보쿠토씨의 기세등등한 발언이 입소문을 타고 일파만파로 퍼질 수 있었던 걸까. 로맨티스트란 타이틀은 보쿠토씨 모르게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구였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또한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놀이 공원 가고 싶다아.’


도발에 가까운 선전포고를 외친 지 정확히 일주일 째 되던 날. 영화 포스터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촬영장 한 가운데서 보쿠토씨는 뜬금없이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로 사람을 놀래키려나 싶어 손봐주고 있던 넥타이 끈을 세게 조아 버릴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끝나고 놀이공원 가자.’


개인의 소원이 이렇게나 간단히 실현될 수 있나 잠시 자괴감에 빠졌던 것 같다. 



* * *



보쿠토씨와 함께 어울린 지 일주일 안팎이란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뼈저리게 느낀 것들이 몇몇 있었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패턴이라 하는 편이 조금 더 어울리려나. 


첫째, 보쿠토씨는 기본적으로 생각이 짧다. 즉, 멀티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한 조심성이나 자각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지극히 단순한 어린 아이처럼 굴다가도 폐부를 찌르는 핵심적인 말을 종종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한다. 이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계약 연애 같은 그럴싸한 발상을 해냈는지 알다가도 모를 따름이다. 아직까지 이 사실을 들키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둘째, 보쿠토씨는 심각한 마이페이스 기질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기분파란 뜻이다. 텐션이 높은 날엔 표정 연기, 발성, 눈빛, 손짓 하나하나가 한 폭의 그림처럼 작용한다. 이는 그를 지극히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제작진들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배우란 직업에 몰두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반면 텐션이 낮은 날엔 입만 열면 국어책 연기, 불안정한 호흡, 잦은 실수들이 불똥처럼 작용해 좀처럼 잘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텐션의 높고 낮음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 신발 끈이 풀렸다던가, 물맛이 좋지 않았다던가, 와이셔츠의 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던가 등의 사사로운 이유로 기분이 좌지우지 되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환장을 하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셋째, 그럼에도 보쿠토씨는 배우란 이미지를 철저히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앞선 두 가지의 단점을 모두 커버할 만큼 이 사람은 자신의 명예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그 욕구가 누구보다 강렬했기에 남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위장 연애 같은 발상을 해냈겠지만. 보쿠토씨는 일단 공개적인 장소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나와의 다정한 관계를 연출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서슴없이 공개 데이트를 신청하며 ‘사랑’이란 단어를 유독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배우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연기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도 한참 남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문제는. 그 속임수가 너무 치밀한 데 있었다. 나조차도 이 사람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종종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이 사람의 해맑은 웃음 앞에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다. 헷갈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느 쪽이 진심이고 어느 쪽이 연기인가. 언제 진짜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걸까. 이 웃음이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그렇기에 나는 알아야만 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공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었는지.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네임드를 높이기 위해서, 명예란 욕망에 얼마나 충실한 사람이었는지. 진즉에 깨달았어야만 했다. 


공사를 철저히 구분 짓는 사람. 보쿠토씨는 내게 아무 감정이 없었음을, 나를 향한 다정과 웃음과 눈짓과 사탕발린 말이 순전히 자신이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그 모든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진실을 뻔히 알고 시작한, 철저히 거짓으로 위장된 관계였음에도 말이다. 



*동동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비정기적 연재 (내킬 때, 뽕 찰 때, 원고 탈주하고 싶을 때 이어 씁니다)

*엠프렉 소재




W. 멜




“축하드립니다.”


늙은 의사는 콧대 아래로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린다. 진료 결과가 적힌 차트를 넘겨보며 덤덤한 어조로 말한다.


“임신 10주차네요.”


누군가 한 명쯤은 손뼉 박수를 쳐야할 것 같은 축복의 언사였건만 정작 희소식을 들은 주인공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의사의 맞은편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처진 눈썹, 그에 상반되는 날카로운 눈매,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것 마냥 비죽 내밀어진 입술 선을 가진 사람 하나. 초콜릿을 연상케 하는 밝은 연갈색 머리칼, 수려한 이목구비, 우유를 빼다 박은 것 같은 뽀얀 피부, 그 화려한 외모와 매치되지 않는, 차츰 좁혀지는 미간. 


“네……?”

“네……?”


결혼 2년 차. 즉, 신혼으로 행복의 노래에 취해 한껏 깨를 풀풀 날리고 있어야 할 두 사람, 마츠카와 잇세이와 마츠카와 토오루는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껄끄러운 대답을 남기고 만다. 


“어……. 흠, 큼큼- 당분간은 알코올이나 카페인 섭취 자제하시고 음식은 가려서 드세요. 자칫하다간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니까요.”


이해를 못 하겠단 얼굴로 반문의 여지를 남긴 두 사람 덕에 당황한 건 의사 쪽이었다. 의사의 당황한 낯빛도 잠시, 그는 두터운 안경알을 벗어 내리며 잇세이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내보인다. 


“그나저나, 거기서 곤히 잠들어 있는 따님이 정말 귀엽게 생겼네요.”


보다 정확히는, 잇세이가 앞으로 들쳐 맨 포대기 안에서 쌕쌕 잠이 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을 향해서 말이다. 


예상치 못한 칭찬 세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올린 잇세이가 시선을 내린다. 잠결에 목을 제대로 뉘지 못하는 아이의 뒷목을 살며시 받쳐준다. 곱게 감긴 눈 위로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준다. 조금만 힘주면 망가질 것 같은 이 작은 생명체가, 따뜻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사랑스러운 결실이 자신들의 피를 이은 혈육임을, 잇세이는 매 순간 새롭게 자각하고 있었다. 


“보자, 일 년은 넘은 것 같고 한……. 16개월 쯤 된 것 같은데, 맞나요?”

“18개월이에요. 워낙 순해서 잘 먹고 잘 자고 키우는 데 크게 손을 안 벌렸던 것 같아요.”


의사는 아이의 생김새를 잘 살펴본다. 부드러운 눈매나 앙증맞은 입술은 아까부터 초점 없는 눈으로 ‘임신……. 임신? 정말, 임신이라고?’ 라는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 거리는 잘생긴 쪽의 아빠를 닮았고, 얼굴선을 비롯한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 등은 아이를 품에 안은 아빠 쪽을 닮아 있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든 자는 모습만큼 천사 같을 때는 없지.


아무리 순하다 한들 생후 12개월이 넘는 순간부터 걷고 말하고 울고 떼쓰기 바쁜 아이가 깨어 있지 않음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의사가 이내 토오루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 아이가 첫째면 뱃속의 아이는 둘째겠네요.”


둘째. 둘째란 단어에 말미암아 발화점에 다다른 열기는 기어코 화를 초래한다. 


“그래서…….”


허공으로 드높이 올라간 손바닥이 등짝이란 표적을 매섭게 내리친다. 


“내가 피임 잘 하라 했지 맛층!!!”


마츠카와 토오루(24)는 예정에 없던, 계획조차 하지 않고 있던, 차마 원치 않았던 둘째를 덜컥 임신해 버리고 만 것이다. 



* * *



“그럼, 천방지축 부부의 둘째 아이를 위하여!”


테이블 위로 호기롭게 맥주잔을 들어 올린 하나마키가 목청을 높인다. 맥주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차올라 있는 맥주 거품이 먹음직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뭐가 위하여야!!”


정작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칭할 수 있는 오이카와의 안색은 그리 좋질 못했다. 


“엑- 그러려고 긴급 소집 한 거 아니었냐? 축하 파티? 렛츠 파뤼~?”

“파티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쪽은 진지하다고.”


못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시던 하나마키가 어색한 공기 흐름에 제 볼을 긁적이며 제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런 그를 더더욱 뻘쭘하게 만드는 건 불쾌하단 티를 팍팍 내며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대는 토오루의 행동거지였다. 


“기뻐할 일 아니냐. 그래도 임신 소식인데.”


토오루의 바로 맞은편에 앉은 이와이즈미가 잘 데워진 사케를 홀짝이며 말한다. 


“그게 말이지……. 하아, 이와쨩 그거 나도 좀 줘봐.”


한 쪽 팔로 턱을 괸 채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던 토오루가 사케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안 돼.”


아니나 다를까, 무심결에 알코올에 의지하려 한 토오루를 제지한 건 옆자리에 앉은 잇세이였다.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술 금지랬잖아.”


사케를 향하던 손목이 단호히 붙들린다. 오이카와는 퉁명스레 대꾸한다. 


“……꽉 막혔어. 오늘 같은 날은 좀 마시게 해주면 안 돼?”

“오늘 같은 날이 뭔데. 아주 기념비 적인 날이구만 뭘.”

“잇세이 등짝에 피멍 들게 해줄까.”

“네 전직이 배구 선수란 걸 잊지 않아 줬음 좋겠는데.”


결국 토라진 토오루를 달래려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는 잇세이다. 알코올은 물론 카페인 걱정도 없으니 토오루 입장에선 마음 편히 마실 순 있겠지만


“맛없어.”


주스를 미처 입가에 대기도 전 토오루는 고개부터 돌린다. 일부러 토라진 티를 내는 건가 싶다가도 정말 먹기 싫었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단히 빈정이 상했는지 툴툴거림을 멈추진 않는다. 


“임신? 니들 생각엔 애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뚝 떨어질 것 같니? 내가 피임 잘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결국 콘돔 쓰지 말자 꼬신 건 맛층이잖아. 진짜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잇세이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다. 반찬으로 미리 주문해 둔 양상추 샐러드를 한 젓가락 집는다. 샐러드 드레싱은 죽어도 못 먹는 토오루의 극성 입맛을 고려해 순수한 야채만을 골라 집어 쉴 새 없이 떠드는 토오루 입가에 가져간다. 


“감독님한테 다음 달엔 복귀 가능하다 해뒀는데……. 음, 맛있다. 아 이게 뭐냐고 진짜. 출산 휴가 유급 휴가 이미 다 써먹었단 말이야. 하기야 그거 쓸 때도 우리 팀 애들한테 눈칫밥 엄청 먹었다고! 이런 내 고충을 맛층이 알긴 알아?”


아예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토오루 덕에 반찬들이 담긴 접시와 술잔이 작게 튕겨 오른다. 순간적으로 테이블 위로 쏟아진 알코올과 음식 찌꺼기에 놀란 이와이즈미, 하나마키와 달리, 잇세이 한 사람만이 평온한 눈으로 백팩에서 물티슈를 꺼내 흔적도 안 남을 만큼 말끔하게 닦아낸다. 


“나는 빨리 선수 생활 복귀하고 싶은데. 애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야……. 이대로는 복귀는커녕 영영 은퇴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양 손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토오루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 와중에도 아삭아삭 풀 씹는 소리가 잇새로 생생히 튀어 나온다. 테이블 청소를 끝낸 잇세이는 구석에 물티슈를 쌓아둔다. 


“오히려 잘 됐네. 이참에 다치기 십상인 프로 생활은 접어 버리고 애들이랑 알콩달콩 잘 살아 보는 건 어때.”


가슴팍에 아이를 밀착시키고 있던 포대기의 끈을 조금 느슨히 하던 잇세이가 은근슬쩍 은퇴 얘기를 꺼내 본다. 병원을 출발할 때부터 해가 기울어진 지 한참인 이 순간까지 온종일 숙면을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공주님이 잠결에 입술을 오물거린다. 


“농담이라도 그만 둬. 아카네 분유 값, 기저귀 값, 옷값만 해도 한 달 동안 돈이 얼마나 나가는지 잇세이도 봤을 거 아냐. 게다가 아카네 여기서 조금만 더 크면 어린이 집도 보내야 하는데 그거 전-부 잇세이가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아니잖아. 나도 일해야 해. 하물며 둘째까지 생긴 마당에 돈은 돈대로 더 들고 시간은 시간대로 더 드는데 어떻게 애만 보고 있을 수 있어. 배구가 아니더라도 일은 할 거야. 아니면 못 버티는 걸.”


토오루는 당장 자신의 실수나 잇세이의 잘잘못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생명으로 인해 초래된,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 부담감. 토오루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뱃속 안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생명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편, 어째 부부싸움 한복판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기분이 된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는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태명은 정했냐?”


타이밍 좋게 분위기 전환에 나선 건 하나마키였다. 


둘이 연애를 할 적에야 질리도록 본 얼굴들이었건만 허니문으로 아카네를 임신한 채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직후부턴 육아에 정신이 팔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했다. 첫째인 아카네가 아무리 순하다 할지라도 그 당시 ‘육아’란 것 자체가 처음이었을 두 초보 아빠들에겐 하나부터 열까지가 생전 처음 겪는 일들뿐이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건 드라마에 흔히 나올 법한 가출이라던가 산후 우울증 같은 최악의 경우는 겪지 않았다는 부분인데, 아마 신혼이란 이름 아래 따끈따끈한 사랑의 힘으론 트러블들을 이겨내 온 것 아니었을까. 


그런 두 사람을 근 이 년 만에 만나 볼 수 있었다. 임신 소식이든 뭐든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뜻 깊은 자리를 싸움의 장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뭘 또 정해. 전에 했던 것처럼 붕붕이로 해.”


귀찮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한 쪽 귓구멍을 파던 잇세이가 무심한 투로 말한다. 거기에 성질이 나는 건 오히려 토오루였다. 


“붕붕이? 아카네 임신했을 때 한창 자동차에 빠져 갖고 아무거나 갖다 붙인 주제에 이번에도 또 그걸 쓰자고? 절대 싫어. 안 해.”


두 번 당하진 않겠다는 토오루의 완고한 뜻에 잇세이가 떼굴떼굴 눈알을 굴린다. 돌아가지 않는 사고를 무리하게 돌리려 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통통이.”

“기각.”

“롱롱이…….”

“허, 기각.”

“말랑-”

“기각이라고!”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는지 골머리를 앓는 잇세이를 대신해 이와이즈미가 대답한다. 


“고라 어때, 고라.”


이와쨩 치곤 괜찮은 아이디어……인가?


“고라가 뭔데?”


내심 이와이즈미의 센스에 놀란 토오루가 그 뜻을 물으려 하면


“줄임말.”

“무슨 줄임말?”

“고질라를 줄여서 고라.”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고 만다. 


“아니면 고라파덕을 줄여서 고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가쨩한테 무슨 이름을 붙이려 하는 거야, 바보 이와쨩! 고질라!! 고라파덕!!!”


순간적으로 뒷목 끝까지 혈압이 오른 토오루가 빽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이와이즈미가 능숙하게 양 귀를 틀어막는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그 새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듯 마츠카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말한다. 


“치즈.”

“……치즈? 그럼 치즈쨩이야?”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아 토오루가 화색의 기미를 보일 때면 잇세이는 기다렸다는 듯


“응. 치즈 햄버그 먹고 싶으니까.”


토오루의 이상을 산산이 깨부수고 만다. 토오루가 잇세이의 등짝은 물론 정강이마저 걷어차며 ‘그럼 나도 내가 멋대로 지어도 되지?! 우유 빵 먹고 싶으니까 우유쨩이라 하면 되지??’ 라는 그럴 듯한 논리를 펼치고 있을 무렵, 하나마키가 손수 싸움 중재에 나선다. 


“워워- 진정해, 진정. 그러다 자고 있는 아카네 다 깨우겠다 이것들아.”

“흥! 먼저 시작한 건 맛층이니까 난 몰라.”

“모르긴 또 뭘 몰라. 그보다 니네들, 아카네 태명을 그렇게 대충 지었단 말이야?”


장난으로 해 본 말이었건만 정작 자신들은 아무 것도 몰랐단 식의 눈알 두 쌍이 하나마키에게 향하자 하나마키의 등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그럼 진짜 붕붕이라 불렀어? 이 귀여운 천사한테??”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뒤척이지도 않은 주제에 어느 새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며 잠을 청하고 있는 아카네와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두 남정네를, 하나마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번갈아 본다. 


“일단은…….”

“딱히 생각이 안 났으니까.”


무법자다. 그냥 무법자임이 틀림없다. 지금에야 저렇게 화내고 투닥 거리겠지만 나중엔 귀찮아져서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부를 케이스가 분명하다, 이것들. 


“그런 거 말고 좀 뭐랄까. 특별한 거 있잖냐. 태몽이라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려가며 태명 설정에 공을 들이는 자신이나, 벌써 귀찮아졌는지 자신은 쳐다도 안 본 채 아카네의 볼을 콕콕 찔러 보기 바쁜 잇세이나, 이러든 저러든 샐러드나 뒤적거리고 있는 토오루나.


“태몽? 아카네 때는 태몽 같은 거 꾼 적 없는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물가물한 첫 날 밤을 떠올리던 토오루의 어깨를 마츠카와가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그렇겠지. 나한테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 좋았던 때가 마치 어제 일인 것 마냥 어깨선을 쓰다듬는 손이 능글맞기 짝이 없다. 


“좋아서 기절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 내 테크닉이 그렇게 좋았나?”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는 노골적인 시선에 어느 새 토오루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를 연상케 하듯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이 쪽은 막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마구 뽐내는 데 비해 솔로가 서러운 인생인 맞은 편 사람들은 등목 샤워를 한 것 마냥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다. 


“애정 행각은 그 쯤 하지?”

“태어나지도 않은 애가 벌써부터 뭐가 뭔지 다 알아 듣겠다 이 커퀴들.”

“둘째도 저런 식이었겠지. 안 봐도 뻔해.”

“솔로는 아주 서러워서 돌아가시겠다? 앙?”


어느 새 제 곁으로 훅 다가와선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는 잇세이 덕에 반쯤 정신이 몽롱해져 버린 토오루는 


“우리!! 태몽 얘기하고 있었잖아!”


자칫하다간 잇세이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 대뜸 빽 소리를 질러 버린다. 간만에 선보인 애정 표현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잇세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캔 깡통처럼 확 구겨진다. 


“그래 뭐……. 이번이라고 다를 거 있겠냐. 뭘 꾸긴 했니?”

“태몽이고 태명이고 다 됐다. 그냥 아무 거나 해.”


옆구리가 시려진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솔로의 서글픈 건배사를 외치고 있었다. 저것도 친구라고, 토오루가 이를 까득거린다. 


“모모쨩으로 할 거야.”

“모모? 복숭아?”


웬 복숭아냐며 잇세이가 되받아치려 하니 토오루는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는다. 


“왜냐면! 하루는 꿈에서 복숭아가 잔뜩 나왔거든. 복숭아나무, 복숭아 강, 복숭아 구름, 복숭아 토끼까지 온 사방팔방이 전부 복숭아 길래 깨고 나서도 뭔~가 이상한 꿈이네 하고 넘긴 적이 있었어.”


아예 핏대까지 세워가며 토오루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언제쯤 주문한 메뉴가 나오냐 묻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태몽이었구나~ 싶은 거지.”


직원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곧 나올 거라고, 죄송하단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뺘……?”


제 아빠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아카네가 졸린 눈을 끔벅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눌한 발음과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여기가 어딘지 몰라 좌우를 휘휘 돌려보는 상대적으로 큰 머리통. 똘망똘망한 두 눈은 익숙한 아빠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천천히 끔벅거린다. 


“아이구~ 우리 아카네 깼구나~”

“누가 ‘우리’ 아카네야. 우리 아카네거든, 맛키.”


제일 먼저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다름 아닌 하나마키였다. 내내 품에 안겨 있어 답답했는지 살이 포동한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카네에게 냉큼 다가가 눈높이를 맞춘다. 


“빠야야-”

“으응~ 아빠 친구 타카히로에요~”

“빠야?”


턱을 갸웃거린 아카네가 제 고사리 만 한 손바닥을 쥐었다 편다. 그러자 풀린 눈을 한 하나마키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흡사 처음 보는 사물을 탐색하듯 작고 뭉툭한 손톱이 그 근방을 쓸어본다.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아……. 어떻게 이 귀여운 생명체가 니들 같은 건장한 사내자식들의 딸이란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생명의 위대함이란 정말……종잡을 수가 없어.”


그 해맑은 웃음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린 건 비단 하나마키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벌써 아카네의 오동통한 볼을 쓸어내리고 있던 이와이즈미 또한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네 녀석, 기억하고 있으려나. 나 하지메 삼촌이야.”

“겨우 그런 걸로 우리 아카네의 관심을 끌 수 있겠어 이와쨩? 아카네 여기 보세요, 울룰룰룰루~ 까꿍!”

“셋 다 시끄러. 토오루 너는 왜 또 거기 껴 있어.”

“재미있으니까?”


싱거운 대답에 잇세이가 이마를 짚는다. 우선은 포대기에 갇혀 언뜻 답답해 보이는 아카네를 내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아카네가 자칫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포대기 끈을 풀어 헤친 잇세이는 –그나마 제일 믿음직한- 이와이즈미에게 아카네를 건네준다. 


“엉덩이부터 받쳐서 안 떨어지게 해. 아직은 뒷목 꺾일 수도 있으니까 목도 잡아줘야 하고.”


그래도 첫 아이를 무사히 키워낸 지 약 2년. 제 나름대로 육아 스킬이 꽤 늘어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 잇세이다. 그의 충고를 가슴에 새긴 채 행여 사고를 치진 않을까 조심조심 아카네를 안아 든 이와이즈미의 손이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그 어깨에 볼 한 쪽을 댄 채 세상 구경하기 바쁜 아카네는 누구보다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와이즈미, 하나마키한텐 넘기지 마.”

“엑, 왜? 나도 아카네 안아 볼래!”

“너는 좀 불안해.”

“아 진짜 너무하네. 내가 무슨 바이러스 균도 아니고.”


셋의 상황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토오루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린다. 오랜만에 보는 솔직한 웃음꽃에 너나 할 것 없이 웃어 버리고 만다. 아카네를 만나고 난 뒤론 분명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던 것 같다며 토오루는 이 순간들을 머릿속 깊이,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 담는다. 


“주문하신 초밥 세트 나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 먹음직한 초밥들이 놓이든 말든 네 사람의 신경은 온통 아카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혼자 자리에 붙어있는 토오루를 제일 먼저 신경 쓴 잇세이만이 다시금 의자에 착석한다. 토오루 앞에 일렬로 늘어진 초밥들을 제 쪽으로 끌어 온다. 


“왜?”


이유는 뻔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토오루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와사비 못 먹잖아.”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무심히 대꾸한 잇세이는 밥 위에 얹어진 사시미를 들춰내 눈곱만 한 와사비를 능숙한 젓가락질로 거둬낸다. 


“용케 기억하네.”

“우유 빵에만 환장하는 초딩 입맛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윽……. 초딩 입맛이라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 제일 좋아하는 새우.”


아카네와 두 삼촌들이 가게 구석에서 방방 뛰며 놀고 있는 사이, 다정함을 한 움큼 집어 삼킨 잇세이는 와사비를 모두 빼낸 새우 초밥을 들어 토오루에게 건네준다. 다만 토오루의 안색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잠…깐만.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때깔 좋기만 한 새우의 속살이 오늘같이 끔찍해 보인 적이 있던가. 


“설마……. 이것도 못 먹겠어?”


머리로는 아니라고 외치려 했으나 몸은 저절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눈 딱 감고 삼키자, 삼켜만 내자, 스스로에게 주문 걸 듯 되뇌이는 다짐과 달리


“으…우웩!”


신 내 나는 헛구역질은 여지없이 그의 속을 괴롭히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선 탓에 의자는 뒤로 넘어가 우당탕탕 큰 소리를 낸다. 멀찍이서 놀고 있던 둘, 아니 세 사람의 눈이 화장실로 내달리기 시작한 토오루를 향한다. 


“망할. 잠깐 아카네 좀 보고 있어!”


뒤늦게 욕지거리를 낮게 읊조린 잇세이가 토오루의 뒤를 따른다. 영문을 모를 세 사람만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한껏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야생의 촉이란 녀석이 하나마키의 뇌리를 스쳐 지난다. 


“입덧……은 아니겠지?”


토오루 때문에 한껏 놀랐을 아카네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던 이와이즈미가 그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아니겠지. 아카네 때는 입덧 하나도 없었다면서. 둘째라고 그렇게나 다르겠냐.”

“어어, 그러면 좋겠는데……. 저거는 아무리 봐도-”

“기우야, 기우. 아카네도 무사히 잘 키운 녀석들이 둘째라고 별 힘이 들겠냐. 둘째라고 크게 까다로울 거 없어. 괜찮을 거야.”


‘둘째라고 크게 까다로울 거 없어.’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란 걸, 이와이즈미는 알고 있었을 런지. 









*뚜또님(@TUTOLOVETUTO) 디자인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배우 B군, ‘커밍아웃’이란 무거운 입을 열어.]

[오랜 연애의 끝, 미처 감출 수 없는 진심을 팬들이 알아주었으면 해 솔직한 심경 토로.]

[게이임을 스스로 밝힌 배우와 술렁이는 방송계, 그리고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팬들.]


툭, 소리와 함께 칫솔이 떨어진다. 양칫물을 흠뻑 머금고 있던 칫솔모가 보기 좋게 현관 바닥을 나뒹군다. 조금 전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양치를 하고 있던 사내의 안면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이게……대체…….”


새벽댓바람부터 남의 집 초인종이 부서져라 눌러대던 불청객 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씩 지어 올린다. 그 네 개의 손바닥엔 이름 난 연예 전문 신문과 특종만을 찾아 눈을 빛내는 인터넷 신문 기사 헤드라인, 업계에서 입김이 세기로 자자한 잡지 타이틀이 들려 있었다. 


“뭐긴 뭐야.”

“작전 성공이지.”

“그치~?”

“그치~?”


보쿠토와 쿠로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낄낄 웃고 떠들기 바쁜데 비해, 아카아시 한 사람만이 인상을 험악하게 굳힌다. 


“이야. 드디어 없는 스케줄 잡으려고 발로 뛰던 인생에 꽃이 피는 구나.”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발로 뛴 건 나거든? 니 매니저 일단은 나거든?”

“아이구~ 배우 매니저에 기획 이사까지 한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진 어인 일로~”

“어쭈. 그 기획 이사 월급에 훨-씬 못 미쳐서 남한테 빌어먹고 사는 부엉이는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쥐꼬리만 한 월급쟁이 주제에.”

“그 피 같은 월급 쪽쪽 빨아 먹는 기생충이.”

“니 담당 배우거든.”

“아아! 담당 갈아엎고 싶다.”


하이파이브라도 칠 것 같은 기세로 방방 떠들던 입이 금세 으르렁 거리는 험담으로 변질 된다. 이쯤 되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 되는 애꿎은 아카아시만이 애처로울 따름이다. 


깜박이는 현관 불빛이 금방 꺼질 것처럼 위태롭다. 애초에 환기도 잘 안 되는 반지하방 아래 건장한 청년이 셋이나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겨우 몇 평 되는 집이 가득 차 보인다. 대체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탄식에 찬 한숨을 내쉬던 아카아시가 이내 뒷목을 벅벅 긁는다. 별 볼 일 없는 말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정수리들을 손바닥으로 꽉 움켜쥔다. 


“잡담은 그 쯤 하시는 게 어떨까요.”


둥글게 휘어진 눈꼬리와 달리 등골을 서늘케끔 하는 음성이 꼭 맹수 앞에 놓인 먹잇감 같아 보쿠토와 쿠로오는 식은땀을 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게도 엄연히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그……게.”

“계약서 쓴 게 바로 어제 일 아니었던가요? 대체 뭔가요, 이 어처구니없는 기사 제목들은.”

“그러니까 이거는……! 악, 악! 아파! 손에 힘! 힘 빼주라 응??”


제 눈을 피하며 어영부영 대답하는 꼴이 영 시원치 않아 머리통을 쥔 손아귀에 힘을 실어 넣으니 생경한 고통에 시달린 보쿠토가 보기 안쓰러울 만큼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애시 당초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겁니까. 주거 침입 죄로 신고라도 당하고 싶은 겁니까?”

“아냐아냐아냐. 그런 의미 아니라니까아악! 아팟!”


이번엔 쿠로오가 앓는 소리를 낸다. 채 씻어내지 못한 양칫물이 찝찝하게 입안을 감돈다. 얼른 씻어내야지 싶다가도 이 무뢰한들부터 처치해야 평화로운 아침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 아카아시다. 


작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린 건 아카아시였다. 찌르르한 통증으로 뒤덮인 머리통을 붙든 두 사람을 현관에 덩그러니 내버려둔 채 바닥에 굴러다니는 칫솔을 챙겨 욕실을 향한다. 누리끼리한 물때와 곰팡이가 낀 세면대로 시선을 고정시킨 와중에도 수돗물로 헹구기 바쁜 입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보다 계약서엔 사생활 보증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을 텐데요.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일 경우엔 당장 신고할 겁니다, 이 불한당들.”


양치와 간단한 물세수를 끝마친 아카아시가 보풀이 잔뜩 일어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한 사람 있기도 비좁은 욕실을 나선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만져본다. 필요할 때 아니면 불필요한 알림을 온종일 꺼두는 안타까운 통신 기기가 간만에 제 구실을 하려 하고 있었다. 


“정말 신고하려고?”


발바닥은 현관에 딱 붙인 채 두리번거리며 집안을 살피는 보쿠토와 달리 쿠로오는 묘한 의문점을 던진다. 


“그럼 가짜로 합니까.”


확신에 찬 어조가 곧장 긍정을 답한다. 


“지금은 휴대폰 확인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뒷말을 흐린 쿠로오의 조언을 마냥 흘려 듣지 않았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런 후회를 아카아시는 언제나 한 발 늦게 하곤 했다. 스마트 폰 화면을 켜기 무섭게 쏟아지는 문자와 모르는 번호로 수두룩한 부재중 통화. 놀란 아카아시가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문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무렵, 또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종료 버튼을 누른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보쿠토와 쿠로오를 번갈아 본다. 그제야 매섭게 눈초리를 세운 두 사람이 양 손에 허리를 얹으며 기세등등한 얼굴을 한다. 


“봤지?”

“넌 이미 우리 쪽에서 유명인사라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거지.”

“물론 나랑 보쿠토는 너에 대해 일체 함구했지만……. 기자란 족속들은 다 그런 법이야.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알아내는지 신기할 노릇이라니까.”

하아, 당신네들이 어제 카페 점거했던 일이 일파만파로 퍼진 거겠죠.”


아하. 그제야 알아먹었는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친 보쿠토의 입에서 튀어나온 탄성으로 인해 맥이 빠졌다면 그것은 비단 아카아시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하튼. 당분간은 아무 랑도 만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마.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나. 자칫하다간 초장부터 밥상 뒤집힐 수 있으니까.”

“잠…깐만요. 그런 얘긴 전혀 못 들었는데요.”


병색이 만연한 어머니 얼굴이 저절로 떠오른 아카아시다. 그러나 쿠로오는 단호했다. 


“계약이라 그랬잖아. 카페 사장님께는 정중하게 휴가 신청해뒀으니 일자리 걱정은 말고.”

“아무리 그래도-”

“딱 두 달 동안만 우리랑 어울려주면 되는 거야. 오케이?”


칼 같이 제 말을 잘라 버리는 쿠로오 앞에서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말에도 일 리는 있었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계약서를 받아들인 것도, 이 막무가내인 사람들을 밀쳐 내지 못한 것도, 전부 돈 때문 아니었던가. 뼈 빠지게 일해도 벌기 힘든 액수였다. 이 두 달만 잘 견뎌내면 빚은 물론 병원비, 밀린 집세까지 한 번에 해결하고도 충분히 남으리라. 병원에는 차후에 연락을 넣어두면 그만이지 않은가.


아카아시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결심을 다잡는다. 양 손으로 짝 소리가 날 만큼 제 뺨을 내리친다. 외마디 찰과음에 놀란 보쿠토가 토끼 눈을 한다. 


“……좋아요.”


투닥 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쿠토와 쿠로오가 동시에 입 꼬리를 씨익 말아 올린다. 


“그럼, 아카아시 마음의 준비도 끝난 것 같으니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지?”


여유 있게 팔짱을 낀 쿠로오가 아카아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본다. 어쩐지 디자이너 앞에 선 모델이 되어 평가를 받는 기분이 된 듯한 아카아시가 불쾌한 티를 팍팍 낸다. 


“나가요? 어디를요?”

“엑 벌써?! 나 여기서 좀만 놀다 가면 안 돼?”


극명하게 대립되어 돌아오는 대답에 쿠로오가 어깨를 작게 으쓱인다. 언제부터 집들이 구경 온 사람이 된 건지 남의 집 신발장을 한창 뒤적이고 있던 보쿠토가 아쉬운 기색을 팍팍 낸다. 


“아무 랑도 만나지 말라 면서 요. 근데 어딜 나가자는 겁니까.”

“아하하. 우리 아카아시가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보네.”

“아악! 쿠로오 귀 잡아당기지 말라고! 아, 아,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한 손으론 보쿠토의 귓바퀴를 잡아채고 다른 한 손으론 골반에 손을 얹은 쿠로오가 아카아시에게 자신의 무해한 이미지를 어필하며 말한다. 


“두 사람 다 번듯한 일자리를 잡았으면 그에 걸 맞는 ‘일’을 해야지, ‘일’을. 보쿠토 넌 인마. 오늘부터 영화 홍보 들어간다고 감독이 했냐 안 했냐.”


물론, 일과 관련되기 무섭게 그의 말투는 본격적으로 날이 서기 시작했지만. 


“그, 그, 그 인터뷰인지 뭔지 그거 오늘이었어??”

“그으래.”


귀가 꼬집힌 탓에 45도 쯤 기울어진 각도로 머리통을 들어 올리던 보쿠토가 악을 쓰듯 말한다. 그런 보쿠토에게 못을 박듯 쿠로오는 마저 말을 잇는다. 


“게다가, 아카아시랑 스캔들 난 당일에 처음 하는 인터뷰니까 오만 쓰레기 같은 질문들 다 들어올 거다. 마음 단단히 먹어.”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 한 가운데 자신이 엮여 있음을 제대로 체감하기도 전,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의 가능성에 아카아시는 제 뒷목이 서늘해짐을 찌릿하게 느낀다. 


“설마……저보고 거길 따라가란 소리는 아니죠?”


설마 싶었다. 그건 아니다 싶었다. 애초에 약속한 건 연애를 사칭한 돈벌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저 쪽은 (조금 전부터 스캔들로 유명해진) 연예인이었고, 이 쪽은 일개 일반인 아니던가. 이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아닌데-


“빙고.”


그렇게 웃는 쿠로오가 미워 보이긴 처음이었다. 



* * *



스파크의 좁다란 뒷자석에 착석한 아카아시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연예인이 타고 다니는 차라고 벤이나 벤츠 같은 위풍당당한 차량의 외견을 기대했던 게 아니다. 도쿄 내에서도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어 미로를 연상케 하는 주택 골목 내 아카아시의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자 무리들 때문이었다. 무식하게 들이대는 카메라 렌즈와 플래시가 무섭게 느껴지긴 난생 처음이었다. 보쿠토와 쿠로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마스크, 선글라스, 캡 모자, 후드 티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아카아시의 이목구비는 진즉에 렌즈 너머로 온 세상에 까발려 졌으리라. 


운전대를 잡은 쿠로오는 능숙한 운전 솜씨로 차 앞을 가로막은 기자 무리를 헤쳐 나간다. 


“많이 좁지? 누구누구씨에 대한 투자나 지원이 적다 보니 스케줄마다 내 자가용을 쓰고 있거든.”

“나 들으라 하는 소리지.”

“그럼. 여기서 한 시간은 족히 가야 하니까 둘 다 좀만 참아. 이참에 이것저것 얘기도 맞춰 보고.”


뭘 또 맞추란 건지. 


오늘 들어 한숨만 몇 번째 쉬는 건지 헤아리기도 귀찮은 아카아시다. 슬쩍 멀찍이 떨어져 앉은 보쿠토 쪽을 살피니 창에 눈 코 입을 찰싹 붙인 채 마치 세상 구경하는 아이마냥 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까만 선팅이 된 창문 밖에서 그 안을 보는 것이 불가할 것임에도 말이다. 


대체 몇 살인 거야, 이 사람은.


마치 소독차를 뒤쫓아 가는 아이들 구경하듯 잘 가란 뜻의 손을 흔들던 보쿠토는 한산해진 골목 풍경을 금세 지루해진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는 분위기. 숨이 턱턱 막히는 좁은 공간. 이런 얼음장 같은 침묵을 좋아하지 않던 아카아시가 결국엔 먼저 말문을 연다. 


“그래서……. 무슨 설정인 겁니까, 우리.”


황금색 눈동자 한 쌍이 천천히 제게로 돌아온다. 


아, 역시 뭔가……. 거북해. 


순간 보쿠토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의 조수석 헤드만을 쳐다보게 된 아카아시다. 


애초에 계약이니 뭐니 그 이전부터 보쿠토와 단 둘이 있는 것,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영 꺼림칙했다. 그런 사람과 계약 연애를 해보겠다고, 돈에 눈이 멀어 덥썩 입을 맞춰 버린 자신에게 환멸감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기왕 하겠다고 했으니 나름대로 철저하게-


“그러게. 뭐라 할까? 어제 처음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할까? 폴 인 러브??”


이 사람. 그냥 뇌가 없는 건가. 


태산 같이 쌓인 걱정거리에 이마부터 짚는다. 


“뭐라 할까, 하고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잖습니까. 일단은 연애거든요? 연애하는 척을 해야 하거든요? 아까 봤던 기자들을 포함해서 남들을 속여 넘겨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설정이 필요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 귀찮은데. 그냥 뭐……. 적당히 얼버무려 버리자. 어차피 나는 이 바닥에서 그렇게 주목 받는 애는 아니거든.”

“지금 저랑 사귄다고 스캔들이 났잖습니까! 그래서 유명 인사가 됐고!”

“일일이 시끄럽네. 좋아. 니가 그으렇게나 우리 연애를 구체화 하고 싶다면 하는 수 없지. 어디 니 망상 비슷한 거나 한 번 들어보자.”

“망상이라니…….”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듣는 모양인지 귓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후벼 파던 보쿠토는 어디 한 번 해보란 기세로 눈을 가늘게 뜨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그 깨름칙한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아카아시는 목청을 몇 번 가다듬는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일 년 전쯤부터 제가 일하는 카페에 자주 오곤 했는데-”

“엑. 나 그렇게까지 오래 다니진 않았는데.”

“말이 그렇단 거죠, 말이. 일단 말 끊지 말고 들어나 봐요.”

“헤이헤이헤이…….”

“그나저나 그 유치한 추임새는 어디에 써먹는 겁니까. 전혀 신나 보이지 않으니까 빼세요.”

“헤이…….”

“줄이는 것도 안 돼요.”


오야오야. 저 둘, 의외로 죽이 잘 맞잖아? 


두 사람의 대화를 곁눈질로 듣고 있던 쿠로오가 백미러 너머로 투닥이는 예상치 못한 조합에 놀라 피식 웃는다. 안 그래도 혼자 감당하기 벅찬 부분이 있던 보쿠토였건만 이건 이거대로 그와 궁합이 잘 맞는, 괜찮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드는 쿠로오다. 


“그 러 니 까. 만난 지는 일 년 좀 넘게 됐는데 먼저 반해서 고백한 건 그 쪽으로 하자고요.”

“엑, 절대 싫어. 그런 설정은 죽어도 싫어! 니가 먼저 반한 걸로 해!! 나는 절대로 내가 먼저 좋아한다 말하지 않는 ‘과묵한’ 남자라고.”


과묵한 이란 부분을 힘줘 말하는 보쿠토 덕에 참지 못한 쿠로오가 낄낄대며 웃는다. 반면, 아카아시는 한참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럼 저보고 그 괴상망측한 머리 스타일에 반해 버린 이상한 사람이 되라고요? 저야말로 절대 사양입니다.”

“야! 이게 어딜 봐서 괴상……뭐?!”

“괴상망측 입니다. 보이는 그대로 머리도 나쁜가 봐요. 하, 어쩌다 이런 사람이랑-”

“너 지금 뭐랬냐. 내 머리 나쁘다 했냐? 이 머리는 어?! 우에노나 이케부쿠로만 가도 미용사 누님 형님들한테 완전 사랑 받는 머리 거든?!”

“그 뜻 아니거든요.”


이대로는 촬영장 도착 전까지 대화의 진전이 코딱지만큼도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 쿠로오 스스로 솔로몬의 왕관을 쓰기로 한다. 


“아- 됐다. 고백은 보쿠토가 먼저 했다 치고 니들 연애는 벌써 6개월 차 인 거야. 서로 지지고 볶고 아주 열렬히 사랑해서 도무지 숨길 수 없어 만천하에 고백했다. 이거면 만족하지?”

“전혀 아니거든?!”

“전혀 아니거든요?!”


언제 어색한 사이였던 것 마냥 동시 다발적으로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다가올 미래에 기대 반 걱정 반인 쿠로오다. 이렇게 싸우기만 하는 통에 사귀는 연기는 제대로 할런지.


“자자. 잡담은 끝. 목적지 도착했습니다~”


언뜻 허름해 보이는 건물 앞에 바퀴가 멈춰 선다. 다행히 촬영장에 대한 정보는 새어나가지 않은 터라 주위는 이렇다 할 인적조차 찾기 힘들었지만 문제는


“새삼스럽지만 저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일체 못 도와줍니다? 연습 따윈 없고 바로 실전 들어가는 거야, 알았지?”


그 다음이었다. 


“하아, 호칭, 호칭, 호칭……. 그 쪽 이름이 뭐랬죠?”

“여태 그것도 몰랐다고?!”

“지금이 일일이 화낼 타이밍입니까! 얼른 이름부터 말해요.”

“너부터 말하면.”

“나참, 그것보다 언제부터 아는 사이라고 꼬박꼬박 반말이십니까? 저는 제 나름대로 최대한 배려해주는 마당에 그 쪽은 처음 볼 때부터 말 깠죠?”


새삼 울컥한 기분이 들어 목소리를 낮추자 보쿠토 또한 한 쪽 눈썹을 꿈틀거린다. 


“일일이 화낼 타이밍 아니라고 한 거 바로 너거든?”


머리는 나쁜 주제에 배우긴 또 얼마나 찰떡같이 잘 배워 적재적소에 잘 써먹는지. 아카아시는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한다. 


“……아카아시 케이지.”

“보쿠토 코타로. 됐네. 케이지라 부른다.”


이토록 무미건조한 부름은 난생처음이었다. 성도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에 눈곱 만 한 설렘이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그러긴 커녕 오히려 냉수마찰을 한 기분이었다. 쿠로오가 급조했던 설정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엄지손톱을 까득 까득 깨물던 아카아시는 연습 삼아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코……코타……. 아, 도저히 안 되겠어요. 보쿠토씨면 충분하죠?”

“너 너무 대충하는 거 아냐?!”


정확히는 ‘불러 보려’ 했다. 


“거참 시끄러워 죽겠네. 둘 다 빨리 안 내려?”


보다 못한 쿠로오가 어물쩡 거리기 바쁜 두 사람을 불러낸다. 


먼저 차에서 내린 보쿠토가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며 건물 지하로 들어서는 것과 달리 아카아시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5층 상가처럼 보이는 이 건물 지하엔 티브이나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촬영장이 한가득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뿐일까. 어제 아카아시가 언뜻 듣기론 이 영화에 출연하는 주연 배우는 물론 감독, 각본가, 음향 감독까지 하나같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거물들이라 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 보쿠토가 자신의 동성연애를 고백하고 이야기를 나눠 갈 것이다. 비록 보쿠토는 조연의 조연 정도로 스크린에 눈도장을 찍는 정도지만, 이번 대형 스캔들로 인해 온갖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을 테니 좋든 싫든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단 것이다. 


아카아시는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벗는다. 탁한 시야를 가득 채웠던 선글라스를 조심히 벗어 내리고 긴장감으로 똘똘 뭉친 타액을 간신히 삼켜낸다. 


길할지 흉할지 모를 도박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사극AU

*주의: 사망 소재로 시작합니다. 

*전력 주제: 하늘




W. 멜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이 스친다. 마른 갈대밭이 바람을 타고 서로의 몸을 부대낀다. 생기 없는 풀잎들이 스산한 소리를 낸다. 누군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 죽여 흐느끼는 것 마냥 그런 서글픈 소리가 드넓은 들녘을 오롯이 채워 나간다. 새는커녕 날벌레 하나 날아드는 소리 나지 않는 고즈넉한 허허벌판. 


이 곳은 고인(故人)을 모신 상여가 거쳐 가는 길목이었다. 


짧게는 하루에 한 번. 길게는 아흐레에 한 번씩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곡소리엔 계층의 구분은 물론 차별 또한 없었다. 생전에 어떤 신분을 가졌든 어떠한 인품을 가졌든 상(喪)이란 생의 마지막 앞에선 모두가 공평할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주태광’이라 불리었던 자 또한 피해갈 수 없는 길목이 바로 이곳이었다. 


생기를 잃은 메마른 풀숲이 자연스럽지 못한 소리를 내며 갈라선다. 짚신 몇 짝이 그것들을 밟아 누르며 길을 헤쳐 나간다. 말라붙은 갈대의 색을 빼다 박은 듯한 삼베 수의 한 무리가 느릿한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들에겐 혈색이 없었다. 누구 하나 약한 소리 한 번 낼 법도 했지만 그들에게선 그 흔한 곡소리나 오열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수없는 울음으로 불거진 흰자위와 초점 잃은 허망한 눈알, 핼쑥하게 푹 가라앉은 볼, 핏기 없이 쩍쩍 갈라진 입술만이 그들의 썩어 문드러진 속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존귀한 이의 부재에 대한 슬픔과 원통함을 임종 첫날에 원 없이 쏟아내고 걸음을 겨우 내딛는 이들이란 사실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장지에 도착해 장사를 지내는 급묘(及墓) 전, 상여를 옮기는 과정인 발인을 하기에 있어 눈물을 능하게 감추는 이란 쉬이 찾기 힘든 법이었다. 대다수의 경우에 그 무거운 걸음걸이를 차마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마련이었다. 이미 흠씬 젖어 있는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다 못해 상여가 제게서 더 이상 멀어지지 못하도록 관을 붙들고 곱게 눈을 감고 있는 고인의 뺨을 조심히 쓸어내리며 울음을 터뜨리기 마련이었다. 


그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누구 하나도 슬픈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뿐일까. 본디 상주를 기준으로 끝 모를 행렬처럼 길게 늘어져야 할 조문객들의 행렬을 이들에게선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열댓 명은 겨우 될 법한 조촐한 인원이 새파란 하늘 아래 외로운 걸음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름지기 홍월(紅月)국 황제 주영실의 적자이자 명실상부한 왕위 계승권을 쥔, 제 3 황태자 주태광의 상례였음에도 말이다. 


“날이 차구나.”


일언반구조차 없던 정적을 제일 먼저 깨뜨린 이는 상여 제일 앞자리에 자리해 길을 앞장서 나가던 사내였다. 가까스로 물꼬를 튼 건조한 문장에 뒤따르던 사내들이 상심으로 가득 찬 눈을 그에게로 꽂는다. 


“이리 청명한 하늘을 가진 서리가을이 찾아 올 때면 저 홀로 넉넉한 웃음을 흩뿌리시던 분이셨지.”


이 이상은 가지 못하겠구나, 멈추라는 상투적인 말이 아닌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탓하던 그는 상주도, 하물며 고인과 혈연관계에 속한 이도 아니었다.


“이 좋은 날, 유독 어여쁘던 웃음꽃이 눈앞에 선하구나.”


천애의 고아. 그것은 태광에 의해 거둬진 탁겸을 간신들이 낮잡아 이르는 말이었다. 



* * *



타고난 인품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무뢰한을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당신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경사스러운 잔칫날에조차도 당신은 올곧은 성품을 내보일 수 있었던 걸까. 날 적부터 부모가 없어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나를, 비천한 이라 노예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손가락질하고 능욕하고 멸시 당하는 것이 당연했던 나를, 당신은 호되게 나무라며 흙먼지로 범벅이 된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무지했던 내게 글자란 것을 가르치고 배움의 기쁨을 알려 주고 활과 검술과 같은 무예를 손수 선보여 내 몸 하나 지키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이름조차 없던 내게 이름을 선사해주었다. 


‘겸아.’


그렇기에 후회했다. 


‘너는 내 한 줄기 빛이었다.’


나의 무지함을 후회했다. 은혜를 입은 것,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은 내 쪽이었어야 했다. 누군가의 지킴을 받아야 했던 건 내가 아닌 당신이었다. 


‘이 가혹하고 갑갑한 궁 안에서 너는 내 보람이었고, 내 전부였다.’


황궁 안에서 당신의 좁은 입지와 당신에게 쏟아지는 무언의 비아냥, 형태 없는 화살 세례를 짐작하기엔 너무나 무지했고, 또 어렸다. 


나날이 병색이 짙어져 가는 황제 주영실을 대신해 차기 황제로 간택된 제 1 황태자 주태영에겐 그럴싸한 구실이 필요했다. 정권 말기, 소위 ‘간신배’라 불리는 신하들을 일망타진하고 황제의 권위를 되찾으려던 그에게 있어 황족 직계 삼남인 주제에 권력 욕심이 없는 당신은 그저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약자처럼 보였으리라. 


‘최후의 최후엔 내 이리 볼 품 없고 초라해졌지만.’


반역자. 차기 황제에게 낙인찍혀 버린 비운의 별칭은 당신을 순식간에 고독 속으로 빠뜨렸다. 적막으로 가득 찬 궁내에 당신을 곱게 보는 눈은 찾아 볼 수조차 없었고 희번뜩한 눈빛들은 미처 감출 수 없는 서늘함을 띄며 당신의 뒤를 좇았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렇다 할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당신을 죽이라 명하던 차기 황제의 입을 비틀지도 않았고 저를 능멸한 형을 미워한 것도 아니었으며 가만히 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마냥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바보 같은 웃음만 내보였다. 


오늘이 되기까지도 나는 당신의 마지막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 쪽으로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당신의 뒤로 시퍼런 날을 세운 수십 개의 칼날. 당신에게 깊이 드리워지던 죽음의 문턱. 순식간에 당신과의 사이를 좁히던 섬뜩한 살기. 


당신을 불러 세울 틈도, 내 몸 하나 던져 당신을 막아설 틈도, 당신을 지켜낼 틈도 없었다. 


‘길지만은 않았던 내 생애를 통틀어, 나는 내 행동거지에 단 한 치의 후회도 없다.’


당신의 무릎은 꺾였다. 일사분란하게 꽂힌 칼날들이 당신의 배를 꿰뚫고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내 이름을 부르려 벌어진 입 밖으로 질퍽한 피가 한 움큼 흘러 나왔다. 당신에게 벌어진 일을 보고도 믿지 못한 나는 한 발 늦게 칼을 빼들었지만


‘미련……. 그래. 미련이라 부를 만 한 것이……딱 하나 있구나.’


당신을 관통한 칼날들을 전부 뿌리쳐 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주저 하지 않았다. 당신의 죽어가는 얼굴을 차마 믿고 싶지 않아, 당신과의 마지막이 이리 허무하게 끝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라,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고  미친 듯이 칼춤을 추던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주위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오롯하게 당신만을 향한 살기를 차례차례 없애 가던 칼 붙이도, 앞으로 고꾸라진 당신을 끌어안은 손도, 당신의 검붉은 낯빛마저도. 


‘겸아. 내 너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당신은 피 묻은 손으로 내 뺨을 쓸어 주었다. 당신을 잃을 지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으로 벌벌 떨던 내 낯짝을 따뜻한 손으로 보듬어 주었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당신이, 당신의 손이 생사의 문턱을 오가고 있다는 것이 채 믿겨지지 않아, 나는 폐부 깊이 차오르는 애끓는 슬픔을 미처 감출 수 없었다. 빗줄기마냥 흘러내리는 뜨뜻한 눈물 자욱이 당신의 볼자락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그런 내게 당신은 또다시 웃어 주었다.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뒤로 한 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신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살아다오.’


꺼져가는 불씨마냥 작게 속삭이던 당신의 마지막 바람에, 내 뺨을 훑던 손등을 붙잡고 서러운 울음을 토악질했다. 힘겹게 쥐어 짜낸 그 말 뒤로 이어진 지긋지긋한 각혈이 한 시라도 빨리 당신의 숨을 거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내…염치없는 바람을 네게 부탁하고 있단 걸 잘 알고 있다.’


부디 그 이상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하가 사셔야 합니다. 비천한 소인보다 저하가 살아 주셔야 합니다. 소인에겐 저하가 빛이었습니다. 저하 없이 어떻게 살아가란 말씀이십니까.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던 말들이 목 놓아 우는 오열 앞에 가로막혀 미처 전할 수 없었다. 당신을 잃고 있단 당장의 슬픔에 눈이 멀어 내 진심을 전할 틈이 없었다. 


‘네가……. 내 은을 입었으니……. 내 너를 거둬준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온 것, 쿨럭, 아니겠느냐.’


그 무렵엔 당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눈망울 가득 차오른 눈물들이 앞뒤를 다퉈 가며 시야를 뿌옇게 흐렸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네 삶을 받고 싶구나.’


그랬다. 나는 당신을 잃기 직전에 와서야 내게 있어 당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우쳤다. 


‘겸아……. 내 줄곧……네게 감춰 온 것이 있다.’


당신의 미련이 나라면, 


‘미처 네게 말 못한, 내 무덤까지 안고 가려던 비밀이 있었다.’


나의 후회는 


‘나는 너를-’


오롯하게 당신 하나뿐이었다. 



* * *



눈을 감으면 아직까지 선명하게 그려지는 태광의 마지막을 사내는 결코 잊지 못했다.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배를 관통 당했단 끔찍한 고통과 자신이 죽어가고 있단 자각마저 잊어버린 얼굴로 탁겸을 향해 무언의 고백을 입 밖으로 꺼내려 했던 태광은


“잠깐 멈춰보지 않겠느냐.”


순식간에 텅 빈 허공을 가득 채운 살기에 눈을 빛냈다. 반역자로 치부된 자신과 저들에게 눈엣가시 같던 탁겸에게로 향한 수백 개의 화살촉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날갯짓을 펄럭인 태광은 제게 정신이 팔려있던 탁겸을 돌연 힘껏 끌어안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살갗을 찢어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가, 둔탁한 감촉들이 탁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 도망을 친다면 내 너희를 못 본 척해주마.”


‘나는 너를-’


태광은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탁겸 역시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저하의 은혜를 입은 나는 공조의 죄로 몰려도 상관없으나 단순히 저하의 시종이었던 너희는……. 결백하지 않더냐.”


‘살아다오.’


태광은 최후의 순간마저도 제 몸을 바쳐가며 자신의 유언이 자신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게끔 했다. 그렇다면, 


“가거라. 말리지 않으마.”


탁겸이 택해야 할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정녕 아무도 없는 게냐.”

“…….”

“너희 모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하의 곁을 지키겠단 뜻이더냐.”


탁겸은 물빛으로 탁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훔친다. 말갛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음을 삼킨다. 


“너희의 뜻이 그렇다면, 좋다. 상여를 내려라.”


핏기 없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머리 위에 무겁게 얹어져 있던 삼베 두건을 내던진다. 삼베옷 아래 감추고 있던 칼을 빼든다. 날선 칼날에 삼베옷이 보기 좋게 베어져 나간다. 


“무기를 집어라. 칼이든, 맨주먹이든, 굴러다니는 돌멩이든, 무엇이든 좋다. 제 몸 하나 호신할 만한 것을 찾아 들어라.”


망망대해 같은 벌판의 건너편. 얕게 흐르는 시냇가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검은 형체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역적에게 동조한 이들 또한 살려두지 말란 명을 받아 앞서 진을 치고 그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기 황제의 그림자들이었다. 


“모두 똑똑히 듣거라.”


눈물을 거둬낸 눈엔 서글픈 애증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그를 따라 상여를 제자리에 조심히 내려둔 뒤의 사내들 또한 각자의 무기를 꺼내든다. 


“우리는 역적의 상을 치른 것이 아니다.”


그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슬픔으로 어그러진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군을 잃은 것이다.”


상여 안에는 새하얀 도포가 덮여 있었다. 곳곳에 핏망울이 고여 있기도 했다. 형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설픈 나무 짝은 겨우 상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전부였던 저 하늘을 잃은 것이다.”


탁겸이 자세를 낮춘다. 


“허나, 우리의 하늘은 저 곳에 버젓이 살아 있다. 여전히 푸르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칼날을 비스듬히 기울인다. 


“성군은 조금 이르게 하늘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악물고 


“이 하늘 아래 단 한 점의 부끄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는다. 


“살아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것이 성군의 마지막 말씀이셨다.”


짚고 있는 땅의 흙을 단단히 다지던 발이 허공을 내딛는다. 


“살아서 보자. 성군을 함께 모셨던 벗들이여.” 




*마츠오이 교류회 원고

*마츠카와에게 큰 형이 있습니다. 

*BGM이 있습니다. 꼭 함께 감상해주세요. (상편과는 다른 BGM입니다.)




W. 멜




빗줄기는 조금 더 굵어진다. 그 대신 빈도가 줄어든다. 물 먹은 솜 덩어리가 코팅된 천 위로 낙하한다. 완만한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절벽의 가장자리 주변으로 모여든다. 팁에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그것들은 미련 없이 추락하고 만다. 오목했던 보도블록을 평평하게 만든 물웅덩이 위에 둥그런 파동이 메아리처럼 퍼져 나간다. 한 점에서 시작해 원으로 이어지던 그것의 흔적이 채 사라지기도 전, 또 다른 빗방울들이 누가 질세라 앞뒤를 다투며 여러 겹의 메아리를 그린다. 


한 사람을 겨우 가릴 법한 작디작은 삼단 우산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인다. 가장자리 아래로 겨우겨우 보이던 초점 흐린 동공은 그늘 속에 모습을 감춘다. 빗소리로 가득한 침묵은 숨통만 조일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


장우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작은 숨소리마저 용납되지 않는다. 쓸데없는 소음은 죽임을 당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고 넘어가 줄래.”


잘게 떨리는 손아귀 위엔 뼈가 허옇게 도드라져 있다. 


“정말 지겹지도 않니?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너의 목소리 한 줌만이 따사로운 햇볕처럼 느껴졌다면. 


“비만 왔다 하면 쫄래쫄래 쫓아와서는 내 눈치만 보고 기껏 한다는 말이 류 얘기뿐이고 결혼식이 어땠다는 둥 신혼여행으론 어딜 갔다는 둥 선물로는 뭘 받았다는 둥 웨딩 앨범이 어쨌다는 둥. 내 심기 건드리는 말들 줄줄이 내뱉기만 하고. 대체 나랑 뭐 하자는 건데. 뭐 하자는 건데!”


너는 웃을까. 


“잊을 만할 때면 꼭 개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줘야 분이 풀리니? 그래서 내가 잘 됐다고, 그 사람 결혼을 인정하고 축하해 주고 훌훌 털어버리길 바랐니? 좋아. 그게 소원이라면 몇 번이고 말해 줄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줄게! 잘 됐네! 진짜 잘 됐어! 고백 안 하고 넘어가길 백 번 천 번 잘 했어.”


아니면 울까. 


“어차피 나 같은 건 꿈도 못 꿀 사람이었는데! 아주 속이 시원하다고!”


꾹 쥔 우산 손잡이가 눈에 띄게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장우산이 고개를 숙인다. 톡, 소리가 나도록 조그만 우산 위에 제 것을 얹어 둔다. 점박이 무늬마냥 찍혀 있던 물방울들이 일제히 미끄러진다. 


“그래.”


습한 날씨. 축축한 공기. 푹 젖은 바짓단. 눅눅한 날씨 한가운데 건조한 음표 하나가 오선지를 지난다. 


“정말 잘 됐어.”


그럴 줄 알았다며 되받아치려던 입이 굳게 닫힌다.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먹먹한 기운이 어금니에 짙게 머문다. 까드득, 입 안의 살점을 씹어대는 이빨 소리가 


“드디어 네가. 형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게 됐으니까.”


적개심으로 차 있었다. 


“뭐?”

“…….”

“잠깐만……. 너 방금 뭐라 했어. 맛층 지금…….”


주변 온도보다 2도쯤 가라앉은 서늘한 어조가 마츠카와의 귓전을 울린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니?”


목적어는 없었어도 마츠카와는 문장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가 아닌. 분명하게. 


“그 정도로 티를 냈으면 솔직히 말해, 모르는 쪽이 멍청한 거 아닌가?”


가림 막 역할을 하던 작은 우산이 오랜 고요 끝에 드디어 고개를 든다. 이글거리는 눈알이 기염을 내뿜으며 불타오른다. 흐릿했던 안광이 홧홧한 격화로 뒤덮어진다. 눈앞의 상대를 매섭게 나무라기 시작한다. 


“설령 내가 마음을 접었다 해도. 내가 그 사람을 포기했다 해도.”


아침부터 공들여 세팅했을 초콜릿 머리칼의 끄트머리가 축 쳐져 있었다. 묵직한 습기가 기다란 속눈썹을 짓눌렀지만 남자는 울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하물며 나도 아닌, 네가. 마츠카와 네가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다만, 상처로 일그러진 눈을 할 뿐이다. 


“……화가 나. 화가 나 죽겠어.”


깨문 입술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우산이 흔들린다. 


“여태껏 내 마음을 뻔히 알고 있었던 너나, 날 연애 대상으로조차 보고 있지 않던 류나, 류의 말 한마디에 입 한 번 벙긋 못하고 그 시간을 내동댕이 쳐버린 나 자신이나, 전부! 전부……. 화가 나. 스스로가 싫어. 내 옆에 알짱거리는 너도 싫고 겨우 첫사랑 하나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나도 싫고 이 비도 지겹고 짜증 나고!”


파르르 떨리던 손이 기어코 우산을 놓는다. 놓아 버린다. 놓쳐 버린다. 


“……미워 죽겠다고.”


튕겨 나간 우산이 아스팔트 바닥을 홀로 나뒹군다. 우산에서 해방된 두 손바닥이 얼굴을 가린다. 푹 숙인 고개 위로 비가 쏟아진다. 흠뻑 젖어든다. 


“알고 있었어. 동성이 좋아해 봤자, 나 같은 어린애가 좋아한다고 날뛰어 봤자, 결국 그 사람은……. 아냐. 아니야. 좋아하겠지. 좋아는 하겠지.”


짠 내음이 물씬 나는 물방울이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정수리 위로 따갑게 쏟아지는 물방울과 한 데 섞여 든다. 무엇이 빗물인지 무엇이 빗물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딱 ‘학생’이란 선 안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거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그 무렵, 손바닥 사이에 파묻혀 있던 얼굴이 천천히 낯빛을 드러낸다. 파리한 안색과 대조되는 불거진 흰자위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피하지도 도리질 치지도 않고 그와 빤히 눈을 맞추고 있던 장우산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행여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진심 어린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배려였다. 


“건드리지 마!”


그 배려를 짜증스럽게 쳐낸 오이카와 덕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지만. 


“차라리 속 시원히 화를 내고 싶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라고. 그 사람을 좋아하든 말든 나를 봐주든 봐주지 않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했든 말든!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잖아. 내 기분에 달린 거잖아. 근데 왜 신경 쓰니. 왜 마음 쓰는 척 해. 왜 선심 쓰는 척, 되지도 않는 동정 베풀고 앉았냐고!”

“…….”

“꼴도 보기 싫어. 차라리 꺼져 버렸으면 좋겠어. 쥐도 새도 모르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마음 같아선 손바닥이 부르터지도록 네 뺨을 후려 치고 싶어. 네가 미워. 네가 싫어. 너 같은 건…….”


분명한 표독을 띠고 있던 눈알이 순식간에 그렁그렁한 물빛으로 번져간다. 


“안 된다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던 수도꼭지가 한계를 드러낸다. 수압을 견뎌내지 못한 수도꼭지가 이내 펑 소리를 내며 터지고 만다.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어. 화도 못 내겠어. 죽도록 미운 얼굴 이다가도 또 가슴이 쿡쿡 쑤셔.”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봇물은 좀처럼 걷잡을 수가 없다.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그것에 빗물이 더해진다. 벌써 퉁퉁 붓기 시작한 눈두덩을 위로하듯 소낙비가 투박한 손길을 건넨다. 속눈썹 끝에 방울방울 맺힌 빗방울이 그를 대신해 소금기를 머금는다. 


“맛층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 사람이 보여. 안 그러고 싶은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돼. 결국엔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다고.”


장우산은 지칠 줄 모르고 고개를 숙인다. 이미 흠뻑 젖어 버린 마당에 우산이 무슨 소용이겠냐 만은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이 이상 비를 맞지 않길 원했다. 학교를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바짝 말라 있던 마츠카와의 어깨선 또한 축축한 건 매한가지임에도. 


“하지 마.”


아니나 다를까. 그새 체온이 훅 떨어진 차디찬 손이 우산을 쳐낸다. 이번엔 마츠카와 또한 고집을 부린다. 


“써.”

“하지 말라고.”

“쓰라고.”

“이젠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니?”

“감기 걸려.”

“말했지. 내가 감기에 걸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

“신경 좀 끄라고!!”


그제야 마츠카와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토한다. 우산에서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헤집는다. 벅벅 긁어내린다. 주름 진 미간은 저절로 사나운 인상으로 이어진다. 아오, 짧은 탄성이 들끓는 감정을 작게 대변한다. 


오이카와는 부릅뜬 눈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코앞의 시야마저 가릴 만큼 비는 촘촘히 내리고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현기증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긴장을 푸는 순간 무릎이 푹 꺾일 것 같은. 그래도 오이카와는 주먹 쥔 손에 핏대를 세워가면서까지 마츠카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것 마냥. 마츠카와에게만큼은 스스로가 ‘무죄’ 임을 증명하듯. 


가시를 뾰족이 세우며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오이카와에 비해 마츠카와는 조용하다. 폭풍전야마냥 스산한 빛을 띠는 눈매가 가늘어진다. 


“너 말이야.”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만다. 


“참 잔인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마츠카와의 손을 떠나 내동댕이쳐진 장우산은 조금 전 오이카와가 던져둔 삼단 우산 옆을 따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제 비를 맞고 있는 건,


“니 마음은 그렇게나 소중한 주제에 내 마음은 별 것도 아닌가 봐. 니 가슴 후벼 파는 말은 절대 허락 안 하면서 남의 가슴 후벼 파는 말은 잘도 내뱉는구나.”


오이카와뿐 만이 아니었다. 


“니 마음만 마음이냐?”

“…….”

“감정이 있는 건 세상에 너 하나 뿐이야?”

“…….”

“나는 사람도 아니야?”


순간적으로 움찔한 오이카와의 어깨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마츠카와는 제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묻는다. 까드득, 하는 섬뜩한 소음이 잇새로 튀어나온다.  


“형을 닮은 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냐 묻고 있잖아.”


뒤통수를 쾅 얻어맞은 감각에 오이카와가 처음으로 시선을 떨군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속에서 겹쳐 보이는 건 류세이와 잇세이가 아닌, 자신과 잇세이. 


그래도 오이카와는 뻔뻔해지는 길을 택한다.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이 장대비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한 쌍의 시선 너머에. 그 안에 비치는 것이. 누구도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걱……정이라도 했나 봐.”


으슬 거리는 추위 탓에 드문드문 떨리는 말머리가 애써 화제를 돌린다.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제는 빗물과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야 그렇겠지. 친형이 동성애자가 되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와, 알았어. 이제 이해했어. 그래서, 그딴 식으로 말한 거구나.”


칠흑 같던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내린다. 이마에 들러붙은 그것은 특유의 구불거림을 잊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매달린 물방울이 매끈한 콧날을 타고 미끄러진다. 


“걱정 마. 난 내 처지 잘 알아. 만약. 아주 만약, 그때의 내가 류의 경고를 무시했더라면. 무턱대고 고백을 했더라면. 내 마음을 우선해 대뜸 좋아한단 말부터 꺼냈더라면.”


입술에 생기가 사라진다. 소나기를 흠뻑 맞은 성대가 설움으로 복받친다.


“……뻔하지. 뻔한 결말이야. 눈에 선해. 알아. 안다고.”


숙여져 있던 고개가 번쩍 올라간다. 눈망울 한가득 차오른 울음이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할 자격도 없는 건 아니잖아.”


서럽게 토악질해댄다.  


“좋아하는 건 내 자유잖아…….”


수분을 잔뜩 빨아 당긴 운동화가 바윗덩어리마냥 무겁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느릿느릿, 묵직한 무릎과 다리를 옮겨낸다. 팔을 든다. 비에 젖은 와이셔츠가 반쯤 투명해져 뽀얀 살결을 비친다. 


“잘 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내가 류를 포기해서 잘 됐단 말이야? 고백도 못 한 내가 멍청이고 이기적인 거고 나쁜 거였니? 나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류가 결혼한단 얘기 듣고도 안 울었다고. 내 나름대로 배웅도 해줬다고. 결혼식은 못 갔어도, 속으로 제대로 응원했다고. 류가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고. 류의 행복이 내가 될 수 없다면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셈이었다고.”


주먹을 쥔다. 내리친다. 실없는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내리친다. 


“결국은……! 버텨 냈잖아. 지금까지 잘 견뎌왔잖아. 어떻게든 잘 참았잖아. 여태껏 안 울고 잘 버텨왔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잡음 없이 좋게 좋게 끝낼 수 있었잖아.”


퍽, 퍽.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그를 내친다. 


“근데 넌 왜 그러니. 왜 날 비참하게 만드니. 내 노력들 왜 다 헛수고로 만들어. 내가 이렇게…이렇게 흉한 몰골로 울어 제끼는 게, 그렇게나 보고 싶었니? 어?”


마츠카와는 그를 제지하지도, 막아서지도 않는다. 


“말할 생각 추호도 없었는데. 그때도 울지 않았는데. 다 괜찮았는데. 류 얘기도 그냥.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됐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졸업이고 네 지긋지긋한 낯짝이랑도 끝이고, 류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는데!”


가만히 맞고만 있을 뿐이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에 그래. 내 일정이 엉망진창으로 틀어진 건, 전부 너 때문이라고.”

“…….”

“제발. 나 같은 애는 내버려두고. 니 갈 길 알아서 가면 안 될까?”

“…….”

“나한테 상관 하지 좀 말라고. 어디로든 꺼지라고.”

“…….”

“부탁이니까…….”


의미 없는 주먹질을 반복하던 느린 손이 멎어 간다. 꾹 쥔 주먹과 창백한 손등과 그 위에 고인 빗방울이 발작하듯 떨리고 있었다. 뭉텅이로 흘러내리는 물 자욱에서 지긋지긋한 눈물 냄새가 났다. 


“형이니까.”


한동안 대꾸조차 없던 마츠카와의 입이 조금씩 달싹인다. 


“나는 형이 아니니까.”


빗물이 그의 눈가를 타고 흐른다. 


“난 그 말이 싫었어.”


건조했던 눈가가 차츰, 불그스름하게 젖어간다. 


“줄곧.”


아마. 오이카와는 예상조차 못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만약 오이카와에게 선견지명 비슷한 것이 있었다면 이다음에 벌어질 마츠카와의 행동을 진즉에 알아채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을 테니까. 


“……관계있다면 어쩔래.”


남자치곤 가느다란 손목. 톡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뼈대. 한 쌍의 그것을 단숨에 낚아챈 마츠카와가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는 오이카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한다. 


“놔.”

“가만히 듣고만 앉아 있으니까 내 귀는 꽉 막힌 줄 아나 봐.”

“놓으라고.”

“뭐? 동생이니까 말려? 동성애자가 뭐가 어째?”

“손 놓으라고!”


뼈가 으스러질 만치 꽉 붙잡힌 팔목이 보기 안쓰럽게 발버둥을 친다. 그에 아랑곳 않는 입이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웃기지 마.”


낮게 포효하는 음성에 갈피를 잃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바닥에 접착제를 붙인 마냥 얼어붙은 다리는 뒷걸음질조차 허용치 않고 붙들린 팔들이 일방적으로 끌려간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가까스로 닿는 타인의 뺨이, 그 투박한 피부 결이, 축축한 냉기가 낯설어


“언젠가 말한 적 있지.”


마침내 오이카와는 제 눈을 질끈 감는다. 스스로는 차마 뿌리쳐낼 수 없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닫고


“너랑은 친구 하기 싫다고.”


귀를 막고 싶었다. 


“반했다면 어쩔래.”


쏟아지는 빗소리에 제 몸뚱어리 하나를 온전히 내던지고 싶었다. 


“내가 너 좋다 하면 어쩔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라고 오이카와는 간절히 바랐다. 


“네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네가 날 봐줬음 좋겠다고. 형이 아닌 나를. 순수하게 나만을 바라 봐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너 어떡할래.” 


중심이 기울어진다. 땅 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줄 알았던 다리가 기우뚱, 앞으로 쏟아진다. 


“첫눈에 알았어. 네가 날 ‘나’로 보고 있지 않구나. 나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겹쳐보고 있구나. 처음엔 싫었어. 귀찮았어. 짜증도 났어.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일일이 따지고 싶었어.”


얕게 불거져 있던 콧날이 널찍했던 가슴팍 한가운데로 모습을 감춘다. 


“근데. 그 사소한 몇 마디가……. 도무지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 다른 애들하곤 하하 호호 잘만 웃고 떠들다 가도, 나만 발견했다 하면 정색하고 눈을 피하다 결국엔 어색하고 입 꼬리만 올리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말이 다 안 나오더라.”


두툼한 수갑에서 해방된 손목엔 시퍼런 멍이 남아 있었다. 뒤로 돌아간 큰 손이 연갈색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또 다른 손이 추위에 떨고 있는 등을 감싸 안는다. 


“그 날 말이야. 오늘처럼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와 네가 우연처럼 형을 대면하게 됐던 날.”


깨진 도자기를 어루만지듯 그것을 조심조심 끌어안는다. 


“아무리 모른 척 넘기려 해도, 소용이 없었어.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 섬세한 손길에 놀라 되려 토끼 눈을 하고만 오이카와는 이내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는다. 


“……그렇구나. 내가 아니었구나. 형이었구나. 형이란 사람을 내내 가슴에 품고 있었구나.”


가슴팍 정중앙에 어정쩡하게 걸쳐져 있던 손바닥이 천천히 옷깃을 잡아 끈다. 


“형 앞에선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나한테는 물론이고, 모두의 앞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 말투. 표정. 생기. 그것들을 가만 보고 있으니까.”


억세게 쥔 손아귀를 따라 옷감이 잔뜩 주름지고 있었다. 


“갑자기 확 열이 끓더라.”


눈두덩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눈물 꽃이 낙화한다. 


“네가 형에 대해 일말의 감정을 갖든 갖지 않았든, 솔직히 잘 됐다 생각했어. 이제는 해방됐다 생각했어.”

“그만……해.”

“내 모습에서. 내 얼굴에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생각해버리고 마는 네가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거든.”


이러지 마, 거절을 말하려는 입과 달리 눈에선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진다. 상냥하게 뒷목을 보듬던 손바닥이 순간적으로 힘을 싣는다. 


“……좀 봐줘라.”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창백한 입술이 도장을 찍는다. 흐느끼듯 읊조린다. 


“이제쯤 되면 이 쪽을 돌아 봐줄 때도 됐잖아.”


이번엔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그를 안은 팔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놔…줘.”

“형은 널 보지 않아.”

“맛층 제발.”

“결혼도 했고, 애까지 낳았어.”

“말하지 말라고…….”


구겨진 캔 깡통마냥 우그러든 옷자락이 탁한 울음으로 얼룩진다. 


“너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단 말이야.”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던 실이 맥없이 끊어진다. ‘너 없이도 잘 지낸다’는 문장의 어디가 그토록 서러웠는지, 마침내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내가 잘해줄게. 행복하게 해줄게. 네 전부가 되어 줄게.”


하나뿐인 동아줄에 매달린 마냥 마츠카와를 붙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그의 등 뒤를 향한다. 


“내가, 너의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줄게. 그러니까…….”


줄어들기는커녕 쏟아지는 빗소리에도 지지 않는 오열 감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왜.”


꺽꺽거리는 곡조가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훼방 놓는다. 


“왜 그걸, 흐으…….”


그새 쩍쩍 갈라진 음조가 저절로 쇳소리를 낸다. 


“왜 맛층이 말해주는 거냐고.”

“좋아해.”

“나는 말이야. 널 기다린 게 아니었어. 여태껏 내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사람은. 네가 아니었다고.”

“좋아해, 오이카와.”

“그 말을 해주길 원한 건 네가 아닌데. 다른 사람인데. 전혀 다른데!”

“널 좋아해. 네가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꽉 붙든 손아귀가 어느새 마츠카와의 등을 내리치고 있었다. 고개는 한층 더 깊게 묻은 데 비해, 때리는 강도는 점점 더 거세진다.


“맛층이 아니라고 하잖아! 싫다 하잖아!”


눈물범벅. 콧물 범벅. 빗물 범벅. 


“알아.”


그리고, 울음 범벅. 


“그럼 왜……. 왜! 왜!!”


엉망진창인 몰골이 목에 핏대를 세운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기세의 매서운 눈매가 허공을 노려본다. 부릅뜬 원망 사이로 피눈물이 흐른다. 그런 흉한 몰골마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젖은 머릿결 틈으로 코를 묻는다. 진한 눈물 냄새와 더불어 희끗하게 풍겨오는 샴푸 냄새. 좋아하는 향. 기분 좋은 체취. 


“그렇게 울고, 화내고, 때리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마음껏 토해내.”

“아니라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우는 네가 죽도록 싫다가도, 이게 네 처음이자 마지막 슬픔이라면 용서할게.”

“아니라고…….”

“울어. 울어도 돼.”


귓가에 대고 곧장 읊조리는 속삭임이 비겁하다. 그를 극렬히 부정하고 싶은 머리와는 달리 ‘울어도 된다’는 말 한마디는 꼭 마법의 주문처럼. 눈물샘을 통제 불능으로 만든다. 원망과 애증이 한 데 뒤얽혀 있던 물빛 눈동자가 점차 순수한 슬픔으로 번져간다. 


오열이란, 참 간사한 부류에 속해 있다. 단순한 눈물로 끝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것은 전신으로 슬픔을 터뜨리는 것인지라. 하물며 오이카와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닌 몇 해에 걸쳐 겹겹이 쌓여 있던 것인지라. 그것을 온전히 토해내고 무너뜨리기까진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그것의 첫 단추를 흉하게 뜯어내 버리곤  그 곁에 있길 자처한 마츠카와는


“그리고 날 봐.”


또, 얼마나 긴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날 나로서 봐줘.”

“……바보야.”

“있는 그대로의 날 봐.”

“진짜 바보 멍청이야.”

“널 좋아하고 있는 내 모습을, 그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울고 있는 건 오이카와뿐만이 아니었다. 마츠카와라고 울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다만, 오이카와가 내내 짐짝처럼 움켜쥐고 있던 마음 덩어리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 제 것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목울대 아래 삼켜낸 슬픔이 삭여지는 소리를 낸다. 


“……많이, 기다려야 할 거야.”

“괜찮아.”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알아주었으면 할 뿐이다. 


“내가 맛층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몰라. 네 얼굴 보고 있다가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펑펑 울어 버릴지도 몰라.”

“괜찮아. 내 앞에서만 울면 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 있었다는 걸. 네가 다른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사랑했듯 나 역시도 오롯이 너만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내가 힘들게 할 거야.”

“다 감당할게.”

“절대 좋은 사람이 못 될 거야.”

“전부 각오하고 있어.”

“화도 잘 내고 신경질도 잘 내고 툭하면 나쁜 소리도 많이 할 거고 맛층 기대엔 전혀 못 미칠 거고 나도 모르게 상처 줄 지도 모르고. 예쁜 짓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할지도 몰라.”

“지금도 충분히 예뻐. 괜찮아.”


훅, 숨을 들이켠다. 속사포로 늘어놓던 단점들, 염두해주었으면 좋겠는 충고들이 모두 일시 정지한 채, 가만히 입안을 맴돈다. 속절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무거워진 눈꺼풀이 마침내 몸을 뉘인다. 마지막 물줄기가 눈의 가장자리를 타고 굴러 떨어진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잇세이.”


줄곧 바라 왔던 염원이 타인의 입을 통해 성취될 때의 서글픔, 애달픔, 설움. 누군가를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던,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비참함. 동경과 첫사랑의 경계선. 그 모든 감정들이 한 데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소낙비 사이로 추락해 쓸려간다. 그렇게 지나간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비란 없는 법이지만, 한 날 한 시에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은 찾기란 불가능이다. 어디에든 비는 내린다. 


그 비를 같이 맞아줄 이가 곁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마츠오이 교류회 원고

*마츠카와에게 큰 형이 있습니다. 

*BGM이 있습니다. 꼭 함께 감상해주세요. 




W. 멜




일기 예보엔 우산 그림이 제법 많았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풍기는 물에 젖은 흙냄새. 촉촉하면서도 습기를 흠뻑 머금은 바람의 숨결. 민트 색으로 페인트칠 된 창틀이 보다 짙게 물들고 있었다. 


“결국 쏟아지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창문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던 오이카와가 낮게 중얼거린다. 턱을 괸 채 바깥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는 것도 잠시, 하교 방송을 알리는 스피커와 함께 낯익은 음색이 그를 반긴다. 


“가자.”


오이카와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했다. 운동화 밑창이 물에 젖는 것도 싫었고 우산을 써도 아랑곳 않고 옷깃을 적시는 빗방울이 싫었고 특유의 눅눅한 물 냄새 또한 싫었다. 무엇보다


“정-말. 질리지도 않나 봐.”


비가 오는 날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그가 싫었다. 


“오늘은 우산 제대로 챙겨 왔거든?”


귓전에 닿은 익숙한 목소리에 돌연 팍 찡그려진 미간을 오이카와는 감추지 않는다. 


“알아.”

“이와쨩은.”

“말해 뒀어.”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


비가 올 때면 사람이 180도 바뀌는 것 같았다. 평소엔 언제 어디서 자신이 뭘 하든 어떻게 하든 신경조차 안 쓰던 사람이 비만 왔다 하면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 졸졸 쫓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제 발. 혼 자 가게 해주면 안 될까?”

“싫어.”


맥 빠진 한숨을 토한 오이카와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친다. 책가방 깊숙이 넣어 두었던 삼단 우산을 꺼내 보인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말이다.


“봤지? 우산 제대로 있다고.”

“그래도 같이 가.”

“맛층 너 진짜-”

“가자고.”


결국 백기를 드는 건 언제나 오이카와였다. 아무리 강력한 스파이크를 연속으로 쳐내도 철벽마냥 그것들을 모조리 막아서는 블로킹을 상대하는 기분이랄까. 스트레스도 이 정도면 한계치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당장 오이카와의 머릿속에선 마츠카와를 순순히 돌려보낼 만한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질 않았다. 


“알았어.”


활짝 펼친 우산이 빗방울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제법 굵게 쏟아지는 빗물 세례에 얇은 천이 진동한다. 작은 우산 하나를 뒤따른 장우산 하나가 뭉툭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날개를 펼친다. 흑백으로 가득한 그것은 성큼성큼 빗속을 헤치며 작은 우산의 옆을 지킨다. 


“너무 붙지 마. 물 튀니까.”

“응.”


먹먹한 소음 사이에서 오고 가는 대화는 지독히 건조하다. 발자국 하나를 내딛을 때마다 참방이는 물방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제. 너가 전에 말한 빵집 가봤어.”

“…….”

“우유 빵 맛있더라.”

“…….”

“다른 건 안 먹었어. 너가 먹어보란 것만 먹어 봤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다고.”


작은 우산이 걸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보폭을 맞추기 위해 장우산 또한 뒤늦게 속력을 내보지만, 주변에 물장구까지 튀겨가며 시작된 발걸음은 어느 새 달음박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따라오지 마!”


앞뒤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허벅다리에 맞춰 옆으로 맨 크로스백이 오이카와를 툭툭 건드린다. 눈에 거슬리는 그것을 한 손으로 붙잡아 아예 전력질주를 시작해버리고 마니 이번엔 


“같이 가자고.”


도망치기 바쁜 어깨 자락을 세게 붙들어 맨 마츠카와가 있었다. 행여 놓칠까 교복 와이셔츠에 잔주름이 잔뜩 새겨지도록 그를 붙잡고 있던 마츠카와는 턱 끝까지 올라온 거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고 있었다. 


“……맛층은.”


눈빛을 다 잡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을, 그 안에 담긴 결심을 다 잡고 있었다. 


“꼭 비만 오면 이러더라.”

“…….”

“내가 그렇게 걱정되니? 내가 뭐 죽기라도 한 대?”

“…….”

“아 좀 놓으라고. 아파 죽겠으니까.”


마츠카와는 조용히 오이카와를 응시한다. 붙잡은 손을 놓지도, 힘을 풀지도 않는다. 뚫어질 듯 꽂히는 시선에 날 선 짜증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우산 위로 곧장 추락하는 빗줄기가 시끄럽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뭐가.”

“너. 언제까지 나 피할래.”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비만 오면 나 피해 다니잖아.”

“내가 언제.”

“지금도 나 안 보고 있잖아.”


그제야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린다. 언제까지고 말간 초콜릿색을 띠고 있을 줄 알았던 그의 동공은 이미 짙은 고동 빛으로 얼룩져 날카로운 표독을 품고 있었다. 


“보고 있어.”

“안 본다고.”


확고한 대답에 오이카와가 일순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그 라고 고집을 부리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계속 말장난만 할 거면 나 먼저 갈래.”


남색 우산 아래, 언뜻 보기에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던 오이카와가 신경질적으로 마츠카와를 쳐낸다. 어깨를 옥죄던 족쇄는 쉽게 떨어져 나간다. 


“딸 이래.”


미련 없이 돌아설 줄 알았던 발길이 우뚝 멈춰 선다. 


“류세이 형, 딸 낳았대.”


차마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 마츠카와 입에서만큼은 결코 나오지 않았으면 했을 이름. 하루고 이틀이고 일 년이고 삼 년이고, 언제까지고 감출 수 있으리라 믿었던 마음. 이뤄질 수 없는 소망. 마츠카와 잇세이 한 사람 만큼은 몰랐으면 했던 진심. 


“알고 있었어. 오이카와 네가……. 나랑 형을 겹쳐 보고 있었던 거.”


오이카와 토오루는 마츠카와 잇세이의 형, 마츠카와 류세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  *  *



류세이는 교사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키타이치로 진학한 나의 첫 담임이었다. 


류세이는……. 조금 이상한 교사였다. 깡패를 연상케 하는 험악한 외견은 처음뿐이었다. 얼굴과 매치되지 않는 시원한 눈웃음을, 습관처럼 지을 줄 아는 교사였다. 사사건건 학생들을 골탕 먹이는 교사였고 앙갚음이란 학생들의 살벌한 복수에도 호탕하게 웃으며 어울려줄 줄 아는 교사였고 주먹다짐을 권장하는 교사였으며 일방적인 구타는 용서하지 않는 교사였다. 즉, 선생과 학생이라는 벽을 만들지 않는 교사였다. 


‘류세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류’라 불리게 되고부터 류는 급속도로 격식을 없애며 학생들 속에 녹아들었다. 류, 라는 부름은 우리들 사이에서 너무나 당연한 호칭이었고,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꼭 나이 많은 형 같은 친근한 선생. 내 안에서 류의 이미지란 딱, 거기까지였다. 


그랬어야 했다. 


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렇게 느꼈던 때가 언제였더라. 


고백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불려 나갔다. 뒤뜰이든 옥상이든 교문 앞이든 편지를 통해서든 남의 입을 통해서든 어떤 방법을 써서든. 고백을 받았다. 나를 좋아한다며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뺨을 붉히며 부끄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짓으로 떠들어대곤 했다. 


배구부의 주전 세터가 되었다. 볼 컨트롤도, 테크닉도, 체력도, 성장 속도마저도 독보적이었다. 명실상부한 팀의 사령탑이 되어 있을 무렵엔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쟤는 타고난 수재라고. 장차 배구 계에 큰 획을 그을 아이라고. 


항상 그랬다.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수려한 외모에 혹해 교제를 위한 고백을 마다하지 않았고 뛰어난 배구 센스에 이렇다 할 결과를 원했고 배구 부를 겸하면서 공부까지 잘한단 이유로 모범생의 틀을 씌워 왔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끔. 


“피곤해 보이네 토오루.”


축축한 비 냄새가 났다. 우산이 없는 두 손은 갈 길을 잃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마실래? 내가 애용하는 특제 피로 회복제.”


한 사람도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우산이 내게 손짓했다. 자양강장제라 쓰인 조그만 유리병이 투박한 손바닥 안에 감겨 있었다. 어두침침한 먹구름 아래 유일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 * *



“……헤에, 잘 됐네.”


빗줄기가 한 층 더 굵어진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발에 성난 바람이 힘을 보탠다. 시커먼 하늘 틈새로 간간이 빛이 번쩍인다. 하늘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뭐가.”


불만 섞인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축하한다 전해줘.”

“니 입으로 말해.”

“류를 닮은 딸이면 무지 귀엽겠네.”

“결혼식도 안 온 주제에.”

“류는 참견 쟁이니까. 쓸데없이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형이 섭섭해하는 거 알긴 알아?”

“있지 맛층. 비 쏟아지잖아. 천둥번개도 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제발. 좀 빨리 가면 안 될까, 응?”


남색 우산이 앞으로 숙여지며 자연스레 그늘을 만든다.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다갈색 눈동자 한 쌍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간다. 


“넌 여전한가 봐.”


비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 *



류는 학생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었다. 어린 학생들 각각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성적에 따라서도 외모에 따라서도 집안 배경에 따라서도 학생을 차별하는 법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공평했고 또 균등했다. 


그 점이 더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류 또한 여학생들의 고백을 이따금씩 받곤 했다. 바로 거절해 버리곤 했지만 줄줄이 이어지는 고백 세례는 해를 거듭해 갈수록 류를 알게 모르게 괴롭혔던 것 같다. 고백의 이유는 알 만 했다. 험악한 인상이란 첫 이미지는 싱그러운 웃음 아래에서 씻은 듯 사라지고 언제나 학생 하나하나를 대충 대하고 넘기는 법이 없었고 아닌 척하면서도 그들의 성장 통을 세심하게 관찰하곤 했으니까. 즉, 이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게 동성이든 이성이든 간에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류가 아무리 남다른 사람일지라도 그에겐 그 나름대로의 절대 방어선이 있었다.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다. 어찌 됐든 ‘교사’라는 것.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있게 대우하고 있는 인격체들은 어디까지나 ‘학생’이라는 것. 류는 그 선을 철저히 지켜왔다. 이슬비 젖듯 류에게 천천히 잠식당한 내 마음이 갈 곳을 잃은 것 또한 


“지금 하려는 말.”


그 때문이었다. 


“안 하는 게 좋을 걸.”


내 짝사랑은 짧았고, 또 깊었다. 끝끝내 ‘말’이란 형태로 내뱉지 못한 불쌍한 감정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졸업했다. 이도 저도 아닌 불완전한 마음은 목구멍 아래로 깊이 잠겨갔다.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속설 따위 내겐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낯선 거리감은 류와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고백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을 이별로 마무리하지 않아서, ‘또 봐’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그런 류를 언젠가는 무덤덤한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성숙하지 못한 때 한 순간이나마 좋아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들 블로커를 했습니다. 마츠카와 잇세이입니다.”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이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언제나 류 혹은 류세이로 기억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불려지길 원했고 소원대로 불러주었다. 그렇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눈웃음에 가려진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나 은근하게 다부진 몸 선이나 하다못해 애인의 유무나 생일이나 가족 관계 같은 중대한 일조차 모르고 있었다. 


“……카와.”


어떻게 보면 사랑. 또 어떻게 보면 동경. 어쩌면 나는, 동경과 사랑의 사이를 헷갈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


눈매가 닮아 있었다. 조금 짧게 꼬불거리는 머리칼이 닮아 있었다. 비죽 튀어나온 무뚝뚝한 입가가, 흥미를 돋우는 것을 보면 살그머니 씩 웃고 마는 눈웃음이, 때때로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차분한 표정이. 


“내 얼굴 뚫어지겠다.”


이마를 가볍게 튕기는 손가락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무슨 얘기 중이었지?”

“이와이즈미- 얘는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력이 퇴화하냐.”

“2학년이 되고 한층 더 꽃을 피운 이 오이카와씨의 미모력을 얘기하고 있었나?”

“진지하게 알츠하이머 검사 좀 받아보자 오이카와.”

“맛층 진짜 너무한 거 알아?”

“근처에 빵집 새로 생겼다며. 거기 갔다가 다음엔 어디 갈까 생각하고 있었잖아, 바-보.”

“아…하! 아하. 그래, 그래. 그랬지. 그럼 어디 갈까?”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탄탄면.”

“있지. 뭔가 이상하지 않아? 선택지 없지 않아?!”

“만두 추가.”

“아악 알았어, 알았어! 우유 빵 사고 라면 먹으러 가면 되잖아!”


그제야 마츠카와는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마구 헤집어 흐트러뜨려 놓았다, 에 가까웠지만.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한없이 익숙하다가도 묘하게 낯설었다. 내가 기억하는 류세이보다 앳된 얼굴이 교복을 입고 나와 대화를 하고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만 치부했던 것 같다. 마츠카와가 류를 닮은 것도 류의 이목구비가 비치는 것도 사소한 행동이나 손짓에서 류가 떠오르는 것마저도. 전부 내가 멋대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나 좋을 대로 마츠카와를 류로 겹쳐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마츠카와와 류의 관계성이란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내 기억 속의 류는 언제나 어른스럽고 큰 사람이었고 


‘지금 하려는 말.’

‘안 하는 게 좋을 걸.’


머나먼 존재 같았으니까. 



* * *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

“마음이라면 이미 접었어.”

“…….”

“오래전에 포기했다고.”

“…….”

“근데 왜 자꾸 그 이름 들먹이니. 왜 나 쫓아오니.”

“…….”

“왜 날 가만 내버려두지 못해 안달이 나셨냐고요.”


물비린내가 지독하다. 하늘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빗줄기는 굵어지면 굵어졌지 가늘어지진 않는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 빗물이 웅덩이를 만든다. 개 중 일부는 하수구로 몸을 내던진다. 이미 빗물로 가득 차 있던 하수구는 그것들 전부를 받아내진 못한다. 흙탕물이 분수처럼 낮게 솟아오른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마츠카와가 천천히 시선을 내린다. 바짓단이 젖고 있었다. 운동화 또한 젖고 있었다. 젖고 있는 건 오이카와뿐만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딱, 오늘 같은 날이었지.”


이렇다 할 요동조차 없는 건조한 음성에 오이카와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

“우리는 우산이 없었고.”

“…….”

“급한 대로 근처에 있던 우리 집에 갔고,”

“그만.”

“형을 만났지.”


장우산이 걸음을 뗀다. 거리가 좁혀진다. 작은 우산의 손잡이를 꾸욱 움켜쥐고 있던 손등 위로 큰 손 하나가 다가간다. 허옇게 도드라진 손등은 기어코 뒷걸음질을 친다. 



* * *



“아아. 어째 흐리다 싶었더니만.”


팔을 쭉 펼쳐내자 오목한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고였다. 운동장 위로 점점이 떨어지던 물방울은 금세 후드득 소리를 내며 난데없는 소나기로 돌변했고 


“엑, 나 우산 없는데. 맛층은?”

“나도.”


우산은커녕 쓸 만한 가림막 조차 없었다. 


“아악 짜증 나! 빵집 못 가게 생겼잖아!”

“뛰어가면 못 할 것도 없지.”

“싫어! 아침마다 드라이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비 맞으면 머리 세팅 다 망가질 거고 옷도 다 젖고 축축해지고…….”

“그래서?”

“이 아름다운 미모가 망가져 버린단 말이야!”


심통이 빵빵하게 난 얼굴로 먹구름을 쏘아보는 오이카와를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났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끔 하는 녀석. 그게, 내가 기억하는 오이카와였다. 


“일단 오늘은 포기하자.”


오이카와는 귀여웠다. 인정한다. 남자치곤 귀여운 편이었다. 날씨 하나에 방방 날뛰는 것도 귀엽고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뛰어난 자부심 또한 귀엽고 오늘처럼 당혹감에 찬 얼굴이나 뾰로통해진 몰골도 꽤 귀여웠다. 다만,


“너네 집이……. 걸어서 가기엔 좀 멀었지? 언덕 하나는 넘어야 했던 것 같은데.”


녀석에겐 버릇이 있었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 자주는 아니고, 이따금씩. 내가 잊을 만할 때마다 그것을 상기시키듯.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 갈래?”


멍한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여기서 한 블록만 가면 되거든. 가서 비 그칠 때까지만 있다 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니면 우산 빌려 줄 테니까. 그거 쓰고 가던가.”


그 시선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면 오히려 거짓 이리라. 입학하고 배구 부에 막 입부할 당시엔 그림자마냥 날 좇는 그 눈이 마냥 싫어 오이카와를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차라리 이유나 알자 싶어 말문을 틀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방긋 화답해주는 오이카와 때문에 반쯤 열린 입이 저절로 닫히곤 했다. 때때로는 거리감까지 느껴졌다. 이 이상 알려고 들지 말라는 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었다. 오이카와 본인은 전혀 티를 안 냈다 자부하고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집에 아무도 없을 텐데. 괜찮지?”


툭, 어깨를 건드리기 무섭게 화들짝 놀란 오이카와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분명 내가 말한 내용의 반도 이해 못 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한 지 약 1년. 이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오이카와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에 잠기는지, 내게서 누굴 비춰 보고 있었는지. 이제는 반쯤 포기해 버린 시점이랄까.


“가방 머리 위로 들어. 최대한 비 안 맞게 조심하고.”


태풍이 올라온단 소식도 오늘이 장마의 시작점이란 이야기도 없었다. 갑작스레 우리를 찾아온 소나기였고 그 굵기가 심상치 않았을 뿐이다. 비는 폭포수같이 쏟아졌다. 흙탕물을 발로 걷어찼다. 사방으로 튄 물방울이 내 뒤를 쫓아오던 오이카와에게로 흩어졌다. 뭔가 바락바락 대는 볼멘소리가 났다. 


비가 싫지 않았다. 뺨에 튀는 빗방울이 시원했다. 후덥지근했던 여름 냄새를 말끔히 씻어내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와 함께하는 지금이 즐거웠다. 잡히는 쪽이 지는 것 마냥 은근하게 승부욕이란 불을 지피는 이 단거리 경주마저 즐거웠다. 정작 오이카와는 이 짓궂은 날씨에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지만 말이다. 


“으아 다 젖었잖아아-”

“열심히 전력질주 한 결과지 뭐. 그 덕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고.”

“그야 맛층이 앞서 달리니까……! 물도 다 튀기면서!”

“그러게 빨리 좀 달리지 그랬어, 캡틴.”

“미워 죽겠어.”

“남의 미움을 먹고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이러는 거 보면 ……를 빼다 박은 것 같다니까.”


순간 내 귀가 잘못됐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면,


“뭐해? 안 들어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당연하다는 듯 나를 부추기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순간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뭔가가 내 발길을 붙들려했다. 이성이, 머리가, 불길한 촉이 전신을 들쑤셨다. 문구멍에 열쇠를 맞추려는 내 손을 저지하려 하고 있었다. 


“어라. 지금……. 열쇠 헛도는 거 아니야?”


아무도 없을 텐데. 


“안에 누가 있나 본데?”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난 부모님이 돌아오기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삿포로에 발령 난 이후 명절이 아니면 얼굴도 보기 힘든 형은 온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들어가자. 실례합니다~”


꺼져 있어야 할 부엌의 불이 켜져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복도까지 묵직한 짐과 캐리어가 늘어져 있었다. 낯익은 구두 한 켤레가 현관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형?”


설마 싶었는데.


“어! 오랜만이다, 잇세이?”


조금 짧아진 머리카락.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풍겨오는 비누 향. 시원시원한 웃음소리. 여전한 얼굴. 이 정도면 쌍둥이 아니냐며 닮은꼴 소리를 질리도록 듣고 자란 얼굴. 


“올 거면 온다고 연락 한 통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왜 잊고 있었을까. 형이 교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키타이치에서 근무를 했다는 것. 오이카와가 키타이치 출신이라는 것. 


‘이러는 거 보면 ……를 빼다 박은 것 같다니까.’


그것들이 전부 내가 아닌, 형을 향한 시선이라는 것. 오이카와가 줄곧 감추기 급급했던 마음들, 시선들, 감정들은 전부 나의 형을 가리켰다는 것.


“이 녀석 봐라. 니가 그러면 내가 꼭 특별한 일 있어야만 집에 오는 사람 같잖아.”

“실제로도 그렇잖아.”

“뭐……. 그간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바쁘긴 했지.”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젖은 바짓단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발걸음을 떼는 족족 물기 흥건한 발자국이 복도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하다못해 반기는 기색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요, 동생님.”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섰나 보다. 나와는 달리, 형은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불평을 토로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적당히 손사래를 치며 형에게 가벼운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형이 픽 웃는 소리가 났다. 


그래. 저게 형이었다. 아무리 닮은꼴이라 할지라도 형과 나는 달랐다. 잘 웃지도 않았고 말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형만큼 오래 산 것도 아니었으며 사람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볼 줄도 몰랐다. 나와는 극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전혀 다른 인격체였다. 


“좋은 소식 있거든.”


욕실부터 들렀다. 마른 수건 두 개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 하체를 다 덮고도 남을 큰 타월 하나를 품에 안았다. 젖은 머리를, 뺨을, 목을, 옷을 가만히 닦고 있자 궁금증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그나저나 우리 동생님 몰골이 말이 아니네. 비 쫄딱 맞았어?”

“응. 우산 없었거든.”

“형님 부르지.”

“형님이 계실 줄은 몰랐지.”

“서프라이즈 컨셉이야.”

“뭐래.”


적당히 물기를 닦아내고 욕실을 나서자 잊고 있던 존재가 퍼뜩 떠올랐다. 즉, 오이카와는 형에게 어떠한 감정이 있었고 나에게서 형을 겹쳐 보고 있었고 내게 형이 있는 줄은 몰랐을 거고 내 지레짐작이 맞다면,


“맛층 말이야.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지 않아?”


엿 같은 삼자대면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점이다. 



* * *



“형?”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기. 찝찝한 습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 


“어! 오랜만이다, 잇세이?”


불쾌한 감각. 


“올 거면 온다고 연락 한 통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기운.


“이 녀석 봐라. 니가 그러면 내가 꼭 특별한 일 있어야만 집에 오는 사람 같잖아.”


어딘가 낯익은 음성. 희끗하게 풍겨오는 익숙한 체취. 예리하게 곤두선 촉. 절대 빗나간 적이 없는 육감. 


“실제로도 그렇잖아.”

“뭐……. 그간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바쁘긴 했지.”


반가운 기분과 동시에,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버벅 거리는 사고는 촉이라 불리는 야생적인 감각보다도 느리게 움직였다. 기다란 복도 끝, 형광등 아래의 역광에서 흐릿하게 비치는 실루엣. 


“하다못해 반기는 기색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요, 동생님.”


동생. 동생과 형. 형과……동생? 


“좋은 소식 있거든.”


얼핏 들린 김 빠진 웃음소리에 오한이 돋았다. 사나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미소.


“그나저나 우리 동생님 몰골이 말이 아니네. 비 쫄딱 맞았어?”

“응. 우산 없었거든.”

“형님 부르지.”

“형님이 계실 줄은 몰랐지.”

“서프라이즈 컨셉이야.”

“뭐래.”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 톤의 고저. 생긋 휘어지는 눈가. 직접 보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지는 얼굴. 꿈에서나 그려보았던,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었던 사람. 


“맛층 말이야.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지 않아?”


끝에 가선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말았다. 그래도 티는 안 났으리라. 워낙 작게 중얼거렸으니까. 그래도 마츠카와는 귀신같이 내 말을 알아챘는지 금세 고개를 내밀었다. 뒷목에 걸친 수건, 조금 전보단 덜 젖어 보이는 머리칼, 류를 닮은 이목구비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뭐야~ 손님이 있었어? 누구? 여자 친구?”


불행히도, 내 의문에 답변을 내준 사람은 마츠카와 아닌 또 다른 인기척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특정인을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는, 낯익은 뉘앙스는. 


“아니거든. 뭐해, 안 들어오고.”


나를 헷갈리게 하기 충분했다. 


“이걸로 대충 닦고 있어. 생각보다 많이 젖었……. 아, 차라리 욕실 가서 몸 좀 녹이고 있어라. 갈아입을 옷 빌려 줄 테니까.”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었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수건이 머리를 덮었다. 문지르는 손길이 투박하긴 했어도 사납진 않았다. 제 나름대로의 배려를 욱여넣은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 맞네. 손님께 얼굴도 안 비추고 뭐 하고 있었니, 나. 잇세이는 부엌에서 물 좀 끓여 줄래? 지인 분께 맛있는 홍차 얻어 왔거든.”


가까워지는 발걸음. 크레셴도로 점점 크게 귓전을 울리는 음성. 내게 오다 말고 우뚝 멈춰 선 걸음. 차츰 확장되는 동공. 


“토오루?”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류?”


그 순간만큼 아찔했던 찰나는 내 남은 평생을 다 걸고 결코 없었으리라.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모든 시간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채 이 좁은 공간 안에 류세이와 나만이 오롯하게 숨을 쉬고 있었던 것 같다. 또 다른 마츠카와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이다. 


“이야~ 오랜만이다!”


류는 한 달음에 달려왔다. 


“둘이 친구였구나. 아~ 잇세이도 아오바죠사이 간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그렇지. 친구일 수도 있겠구나. 와, 근데 토오루 진짜 많이 컸네. 지금 신장 몇이야? 180 넘지 않았어?”


몇 년 만에 보는 동창을 훑어 내리듯. 간만에 보는 조카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는 삼촌처럼. 


“진짜…류? 내가 아는 류 맞아요?”


피부에 눌러붙는 눅눅한 습기를 단숨에 해치우는 시원시원한 웃음이 시야를 환히 밝혔다. 


“그럼 가짜겠냐.”

“류…세이. 류!!”

“오랜만이야, 토오루.”


그 사람이 류라는 걸 내 머리로 온전히 자각했을 땐.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류. 류! 류!! 보고 싶었다고, 이 바보 선생!”

“바보 선생이라니……! 엑, 그보다 차가워-”


180 가까이 되는 거구의 남성이 품에 안겨 봤자 기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도 류는 웃었다. 반갑게 웃어주었다. 마치 말 잘 듣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듯 자꾸만 품속으로 파고 드려는 내 머리를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었다. 비에 홀딱 젖은 흉측한 몰골이었음에도


“바보 선생 맞잖아!”


류가 반문할 틈은 주지 않았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얼마나 키타이치 찾아갔는데! 류 보려고 담벼락 넘고, 경비 아저씨한테 들켜서 쫓겨날 뻔하고, 나보다 한참 어린애들 눈총 받아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번씩 키타이치 주변만 맴돌았는데.”


괜한 설움이 복받쳐 고개를 들었다. 꾹 부여잡은 와이셔츠에서 류의 체취가 났다.


“말도 없이 전근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왜 말 안 해줬어. 왜 귀띔도 안 해줬냐고. 왜…….”


눈가가 저절로 시큰거리고 코끝이 알싸해지고 있었다. 류는 웃고 있었지만, 얼핏 곤란하단 표정이 엿보인 것도 같았다. 어떻게 좀 해봐, 라는 시선이 옆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게서 눈을 피하는 류에게서,


“그나저나 토오루 넌 또 왜 물에 빠진 생쥐 꼴인 거야. 둘 다 우산 없어서 여기까지 뛰어 왔구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애써 화제를 돌리려 애쓰려는 류에게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반가웠던 거야. 우리 잘생긴 토오루 얼굴이 아주 울상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토오루 쫓아다니는 여자 애들이 보면 기겁을 하겠다, 응?”


뭔가가 잘못됐다. 


“여전히 배구는 잘하고 있고? 혹시나 우리 잇세이가 괴롭히거나 하진 않지? 만약에 그런 일 생기면 나한테 다 말해. 저 녀석, 험악하게 보이긴 해도 나한텐 꼼짝 못 하거든.”

“어이.”

“사실이잖아? 동생 군.”


류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차츰 돌아갔다. 쌍둥이라 해도 믿을 법한 똑 닮은 외견. 다른 부분이라곤 류는 잘 웃고 마츠카와는 잘 웃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래서 였을까. 마츠카와가 살짝씩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 사람이 떠오르곤 했다. 겹쳐 보고 싶지 않아도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감격의 상봉은 그쯤 하고. 이 짐들은 다 뭐야, 형. 선생 잘리기라도 했어?”


어딘지 모르게 가시 돋친 말투가 틱틱거렸다. 재회의 기쁨이 뜻 모를 아쉬움으로 이어지면서 기꺼이 제 품을 내주었던 류가 멀어져 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이 류의 동태를 눈으로 좇는다. 류의 주변에서만 빛이 일렁이는 것 같다가도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은 오롯이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부류의 것이었다. 

발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운동화 바닥은 물론이고 양말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벗고 싶었다. 벗어던지고 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벗어내어 이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아니.”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결혼하거든.”


류의 웃음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집에는 보고 하러 왔어. 저기 널브러진 짐들은 청첩장이랑 예물이랑 이것저것…….”


그런 식으로 즐겁게 말하는 류세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만났다는 반가움보다는 거절당했단 절망감으로. 소리 없이 꺼져 가고 있던 불씨가 타오를 수 있는 기회는커녕. 


“예비 신랑 준비물이라 하면 알아 듣기편하려나~”


그것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도록, ‘말’이라 불리는 양동이 물을 한 바가지로 뒤집어쓴 것 같아서. 웃음으로 가장된 손찌검을 몇 차례고, 몇 차례고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아서. 


“……토오루?”


나는 표정을 잃었다. 



=======



*분량상의 문제로 부득이하게 상, 하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뚜또님(@TUTOLOVETUTO) 디자인 입니다.
*배우와 대학생의 계약 연애/위장 연애
*모브녀 요소 많습니다.




W. 멜



“딱 두 달만.”


식은 커피 안에 담긴 얼음이 퐁당 녹아내리는 소리.


“일종의 거래라고 생각하면 돼. 계약 기간 동안엔 철저히 일에만 집중하고 계약이 끝나면 생판 모르는 사이 하는 거지.”


감미로운 커피 향. 


“계약이 끝난 이후 뒤탈이라던가 사생활 잡힐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이 쪽 업계에선 입지가 두터운 사람들인지라 엄연한 거래처에게 속 좁게 굴 순 없거든. 뭣하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이 말이지. 다만 우리는…….”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놓인 손바닥만 한 명함과 서류 몇 장.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찬스를, 하루빨리 성취하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이건,


“금전적으로도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천운의 기회. 


“어때. 해볼 생각 있어?”


혹은,


“계약 연애.”


최악의 도박에 마음을 기울이고 만 

나의 시작점이었다. 



* * *



경쾌한 차임벨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활짝 열린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음에도 인파로 붐비는 어느 카페 안. 이제 막 들어선 두 명의 여성은 앉을 자리마저 찾기 힘든 카페 내부를 눈으로 훑어 보다 이내 테이크아웃을 결심한다. 활자로 빽빽한 메뉴판을 찬찬히 살피던 두 사람을 향해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계산대로 다가온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수려한 외모와 낮고 부드러운 음성, 뚜렷한 이목구비는 뭇 여성들의 뺨을 붉어지게 만들고도 충분하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 걸기를 주저하는 여성들에 비해, 남자는 이 상황이 익숙한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고 만다. 오랜 망설임 끝에 겨우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킨 그녀들은 결제를 명분으로 어떻게든 남자와 살결을 스쳐보기 위해 서로 아웅다웅한다. 


오랜 그라인더를 켠다. 원두가 갈리고 은은하면서도 익숙한 커피향이 감돈다. 검정 앞치마에 ‘아카아시’란 명찰을 달고 있던 남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샷을 내린다. 고동빛 에스프레소가 투명한 샷 잔 가득 차오른다. 


“주문하신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듣기 좋은 음색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픽업 대 근처에서 서성이던 여성들도, 멀찍이서 질투에 찬 시선으로 그를 훔쳐보던 남성들도, 어떤 식으로든 아카아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소위 ‘훈남’이라 불리는 호칭은 이 근방에서 아카아시 하나를 두고 부르는 말이었다. 훤칠한 외모와 더불어 과묵하면서도 깍듯이 접대할 줄 아는 그의 예의 바른 서비스 정신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개인 카페를 순식간에 소문의 중심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곳 카페의 인기 요인이 오로지 아카아시에게서만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야야- 지금 들어오는 사람! 아이돌 ‘SEIJO’ 리더 이와이즈미 아니야??”

“헐 대박. 실물 맞는 듯? 야 미친! 말 걸어 볼까? 싸인? 아니면 사진?!”

“미쳤냐. 여기 사진 촬영 금지인 거 잊었어? 이만큼 눈 호강하기 좋은 데서 니 발로 쫓겨 나가고 싶냐.”


바로, 연예인이 일반인마냥 들락날락한다는 점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어 마시던 그녀들은 대화를 끊지 않는다. 


“하긴……. 헐! 야 저기 구석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 그…유명한 잡지 있잖아! VOGUE 얼굴 마담 아니야?”

“맞네 맞아~ 대박사건이다, 진짜. 얼굴이 내 주먹보다 작은 거 같은데?”

“이야, 역시 이 카페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니까.”


제법 큰 시내에 나가거나 SNS에 조금만 취미를 들였어도 ‘훈남’에서 그치지 않고 ‘연예인’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아카아시는. 나름대로 지금의 일자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도쿄의 최저 시급인 932엔을 훨씬 웃도는 시급 1500엔이란 노동의 값비싼 대우가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였고 또한 세 번째 이유였다. 어떻게 보면 지당한 대우였고 또 어떻게 보면 조금쯤은 부족한 시급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점심시간을 제외하곤 대체로 저 혼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아르바이트이긴 해도 연예인들 혹은 방송 업계 스태프들의 까다로운 입맛이 활개 치는 이 근방에서 일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24시간 동안 삼교대 근무라는 육체적 노동에 이어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접대 행위 비슷한 걸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정신적 노동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카아시는 꾸준히 일을 계속해 왔다. 몇 년 째 꾸준히 갚아 나가던 가정의 부채도 앞으로 몇 달이면 끝물을 볼 수 있었고 병실을 밥 먹듯 드나드는 홀어머니의 간병 또한 조금 더 여유롭게 봐줄 수 있었던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장기간 근무 덕에 방송 업계 사람들에겐 아카아시의 얼굴은 꽤 유명한 축에 속했다. 아카아시란 이름은 몰라도 아카아시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은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으아아, 더워!”


그리고 그것은,


“여름 다 끝난 9월 맞냐. 아주 찜통이다, 찜통.”


이 남자에게도 예외 없이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사실 아카아시의 기억력은 좋은 편에 속하질 않았다. 하루에도 수 십 수 백 명이 넘는 얼굴들을 마주하다보니 머리에선 저절로 ‘쓸데없는 정보’와 ‘쓸데 있는 정보’를 구분 짓게끔 해 정보 처리의 효율성을 높이게끔 명령한 반면


“어서 오세요.”


도무지 잊히지 않는 인상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었다. 


“여기. 시-원한 거 열 잔.”


시끄러운 인간. 


아카아시에게 있어 남자의 첫 인상은 딱 그러했다.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고 들어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사로잡아 버리는 이 사람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열 잔 말씀이시죠?”

“내가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닌데……. 단골 메뉴 정돈 기억 해주면 안 되나?”


전형적인 진상이었다.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반말을 툭툭 내뱉고 껄렁하게 구는 말투하며 카운터에 소리 나게 지폐 뭉치를 내려놓는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우와, 표정 싹 굳었네? 나 때문에 기분 나빠진 거야? 어?”


주특기와도 다름없던 표정 관리가 좀처럼 먹히질 않는 아카아시였다. 진땀을 뻘뻘 흘려가며 주문을 받고도 뒤통수가 뚫어질 듯 쏟아지는 시선에 아카아시는 불편한 티도 내지 못하고 오롯이 음료를 만드는 데에만 집중을 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불편했던 건,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열 잔 나왔습니다.”

“어. 이제야 나왔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이거 하나는 너 먹어라.”


저런 식으로 꼭 자신의 몫을 남겨 주던 남자의 태도였다. 불편한 마음으로, 불편한 눈으로, 불편한 기분으로 픽업 대에 처량하게 남겨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늘도 수고해, 헤이헤이헤이!”


상쾌한 햇살 한 움큼이 담긴 미소가 작별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워져 버릴 만큼. 


아카아시는 컵 홀더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든다. 빨대의 포장을 뜯고 얇은 플라스틱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애꿎은 음료를 탓할 필욘 없지만 요 몇 달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 열 잔이나 되는 음료를 매번 시켜 가면. 그것도, 제 몫은 항상 따로 빼두면. 그 누가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호의라도 기분이 미묘했고 호의가 아니라면 더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왜 제게 잘해주는 걸까 싶다가도 쓸데없는 오지랖 정도가 아닐까 치부해 버리고 싶은 마음 한 구석. 그것이 최초의 출발선. 


아카아시 케이지는 보쿠토 코타로를 극명하게 싫어했다. 


“야……. 방금 나간 사람 봤어?”


벤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절반 가까이 들이켜 버린 아카아시는 싱크대에 한 짐처럼 쌓인 설거지거리를 향해 팔을 걷어 부친다. 


“너도 봤니? 비주얼이 완전……!”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에 얼룩 묻은 접시와 머그잔을 씻어낸다. 저절로 돌아가려는 귓바퀴를 애써 고정시킨다. 


“근데 티비에선 못 본 얼굴이었지, 아마? 신인 인가? 아님 연습생?”


깨끗해진 식기들을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붙인다. 서랍장 한 켠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두툼한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책갈피가 제 주인을 부른다. 


“어느 쪽이든 어때~ 실물 봐둔 게 어디니.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에 다시 보면 또 새롭겠네. 이참에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그새 얼음이 다 녹아 맛도 향도 밍밍한 물과 다름없어진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킨다. 쌉싸름한 원두 고유의 체취가 혀에 감돌 시간도 없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헐. 야, 야, 야! 저 사람 또 오는데?”


활짝 펼쳐진 책장 위로 고운 활자들이 날아다닌다. 


“뭔가……화났나 본데? 커피가 뭐 이상했나?”


집중력이란, 그의 미적지근한 아메리카노처럼 진즉에 녹아 내린지 오래였다. 


“거기 알바생!!”


카페 문을 열기 무섭게 귀청을 뚫을 법한 거대한 음성이 포효한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황금색 눈꼬리가 오롯하게 아카아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가 그리 불만이었는지 내딛는 걸음걸음에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안착한 듯 했다. 


“네, 네?”


반자동적으로 곧게 펴진 척추가 위험 신호를 직감한다. 여태껏 클레임을 걸어 온 손님은 적지 않았건만, 눈앞의 남자에게서 물씬 풍겨오는 위험한 아우라나 희번뜩한 안광을 마주 하고 있자니 클레임 대응 매뉴얼은 물론이고 사과의 말조차 잊은 백짓장이 되고 만다.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불만에 찬 입을 비죽 내밀고 있던 보쿠토는 주먹으로 카운터를 세게 내리친다. 적지 않은 소음이 매장 안을 크게 울려 단숨에 수많은 눈동자들이 두 사람에게로 향한다. 


“사장 어딨어.”

“……네?”

“아, 두 번 묻게 좀 하지 마.”

“사장님……이요?”

“어. 니 윗사람 어디 있어.”

“무슨…….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제가 대신 전해 드릴 수 있다면-”

“너 말고 사장 어딨냐고 하잖아.”


이쯤 되자 아카아시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나 깨나 평정을 유지하던 동공이 사시나무마냥 덜덜 떨리고 저도 모르게 입 안쪽 여린 살점을 잘근잘근 깨문다.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당장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듯한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저 싸가지 없는 인간과 이성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가게 사장이자 점주 되는 유키에는 기본적으론 온화한 사람이었으나 손님과의 트러블을 절대 용납지 않는 사람이었다. 손님께는 절대 복종, 부족한 서비스 이행의 책임은 온전히 아르바이트생의 몫. 그런 식으로 해고가 되었던 사례들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아왔지 않았던가. 


핼쑥한 몰골로 아픈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으려던 친모의 인자한 미소가 뇌리를 스친다. 0이란 분기점을 향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던 마이너스 통장을 선명하게 되새김질한다. 순식간에 다른 일자리 마련에 머리를 굴리던 사고는 결국 ‘아직은 그만둘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매듭 짓고 만다.


“뭘 멍청히 있어? 사장 불러오라니까?”


칼 붙이마냥 날선 목소리에 한층 더 버벅 거리던 사고는 간신히 변명거리를 읊조린다. 


“사장님께서 지금……. 잠깐,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우셨거든요. 금방 돌아온다 하셨는데 아직 안 돌아오셨네요.”


물론 거짓이었다. 4층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건물은 1층이 카페, 2층이 건물의 주인이자 카페 사장인 유키에의 집, 나머지 층엔 세를 내주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그 주인인 유키에가 아카아시에게 일언반구조차 없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럼에도 아카아시는 쉴 틈 없이 입을 움직인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스캔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풀어내기 위해. 


“이름이랑 연락처 남겨주시면 제가 꼭. 반드시 전해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발, 이란 간절한 외침을 몇 번이나 속으로 처절하게 반복했을까. 표독 섞인 황금색으로 번득이던 남자의 홍채가 일순 긴장을 푼다. 


“아 그래?”


이윽고 전신에서 내뿜는 곤란하단 태도와 턱을 문지르며 끙끙 앓는 소리가 아카아시의 뒤통수를 때린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던가? 얼떨떨하다가도 어이가 가출해버린 듯한 요상한 기분에 휩싸인 아카아시가 조심히 말꼬리를 열려던 찰나,


“야 이 새꺄! 니 멋대로 튀어나가지 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겠냐, 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이마가 그대로 카운터에 꽂혀 버린다. 


“아프잖아, 쿠로오!!”

“그럼 아프라고 때렸지 안 아프라고 때렸냐? 내 말은 아주 귓등으로 듣더니만 꼴좋다, 인마.”


아니라니까?! 그새 벌게진 이마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울상인 얼굴로 제 뒤통수를 가격한 쿠로오를 쏘아보던 보쿠토가 퉁명스레 말한다. 어지간히 아팠는지 눈가에 찔끔 고인 액체를 손등으로 훔치던 보쿠토의 뒷목을 다시 한 번 붙잡은 쿠로오는 보쿠토와 함께 90도 넘는 각도로 고개를 숙인다. 


“이야~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리 똥개……아니, 우리 애가 민폐를 산더미같이 끼친 것 같아서요. 그간 이 무뢰한의 광폭한 말들은 싸그리 잊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긋나긋한 눈웃음과 함께 철저히 자신들의 무례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아, 혹시 이 망나니 녀석 때문에 정신적인 피해를 입으셨나요? 기분이 안 좋으셨나요? 그러면 제 쪽에서 명함 하나 드릴게요. 법적인 문제로 번질 것 같으면 이 쪽으로 먼저 연락 주시면 됩니다. 합의금은 부르는 게 값이니까 편하신 대로 해주시고.”


이런 부류의 상황을 적지 않게 겪어본 듯한 당연한 처사에,


“야. 딴 사람 얘기 아니고 바로 니 얘기거든?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겠냐.”


아카아시는 나직한 한숨을 내쉴 뿐이다. 


“됐습니다. 딱히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앞뒤 다 자르고 다짜고짜 사장님을 찾으시길래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아하, 그랬군요.”


납득했단 얼굴로 빙긋 웃던 쿠로오가 기어코 주먹을 쥔다. 딱밤을 내리치는 소리가 제법 크다. 


“아프다고!!”

“얼른 사과 안 해?”


방금 전엔 갑자기 들이닥친 쿠로오로 인해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만 보쿠토였지만 애초에 그는 쉬이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그냥…….”


검지로 뺨을 긁적이던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힐끔 흘겨보며 뒷말을 흐린다. 그런 보쿠토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아카아시를 번갈아보던 쿠로오가 삽시간에 창백한 낯빛을 띤다. 


“설마, 보쿠토 너-”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 꼬였음을 깨달았는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어 버린 쿠로오는 천천히 사방을 살펴본다. 마치 무대에 올라간 연극배우 보듯 세 사람에게 쏠려 있는 시선들에 난색을 띤 그는 결국


“정말 미안한데, 여기 사장님을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보쿠토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만다. 



* * *



전면 통유리로 제작돼 탁 트인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던 카페의 내부가 연갈색 블라인드로 뒤덮인다. 비스듬히 비치던 오후 4시의 부드러운 햇빛은 사방을 가로막은 차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이렇게 해두면 될까요?”


조금 전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던 카페엔 텅 빈 테이블과 의자들이 나뒹굴 뿐이다. 마지막으로 블라인드가 제대로 햇볕을 가려내는지 확인하던 유키에가 카페 구석 자리에 자리 잡고 앉은 두 사람을 향해 말한다. 


“네. 이 정도면 밖에서도 전혀 안 보일 것 같네요.”


뭐가 그리 신났는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도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것 마냥 구는 보쿠토와 달리 쿠로오는 콧대를 타고 흘러 내려간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단조롭게 대꾸한다. 


“그럼 아카아시~ 난 위에 있을 테니까 셋이서 잘 얘기해 봐. 무슨 일 생기면 알아서 잘하고.”


작게 하품을 하며 멀어져 가는 그녀를 채 말릴 틈도 없었다. 일단 그녀가 시킨 대로 아메리카노 세 잔을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셋팅한 아카아시였지만 졸지에 휑해져 버린 카페 한 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미묘한 상황. 


조금 전, 보쿠토에 뒤이은 쿠로오의 요청으로 마침내 유키에가 졸린 눈을 비비며 가게로 내려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쿠로오로 인해 사시사철 휴무 없이 지내왔던 카페는 생전 처음으로 긴급 사태를 맞이하게 됐는데


‘죄송해요~ 저희 카페가 지금 당장 문을 닫아야 해서요. 드시고 계신 음료 값은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환불해준다니까. 환불 받는 대로 곧장 나가주시겠어요?’


유키에의 폭탄선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야~ 이제 좀 조용해졌네.”


아카아시가 건넨 아메리카노를 덥썩 받아 들어선 빨대로 쭉쭉 들이킨 쿠로오가 늦더위로 폭삭 젖은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한다. 


테이블은 하나. 한 쪽엔 보쿠토와 쿠로오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맞은편은 빈 의자만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쿠토 앞에도 음료를 내려놓던 아카아시는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정확히는, ‘돌리려’ 했다. 


“어이쿠, 어딜 가시려고. 보기완 달리 성격이 급하시네요.”


‘그럼 아카아시~ 난 위에 있을 테니까 셋이서 잘 얘기해 봐.’

‘셋이서 잘 얘기해 봐.’

‘셋이서’


“우리는 그 쪽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건데.”


유키에가 지나가듯 말했던 ‘셋’ 안 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곤, 아카아시는 예상조차 못 했으니 말이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에이, 시치미 떼기는. 여기에 나랑 우리 애랑 그 쪽이랑 해서 셋뿐이잖아요. 일단 요 앞에 앉아봐.”

“저를요?”

“그렇다니까.”


의미심장한 어조로 되묻고 있는 아카아시에 비해 쿠로오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위장해 자신의 무해함을 돋보이고 있었다. 


“일단은 앉아봐, 범생아!”


그 옆에 있는 보쿠토 또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긴 매한가지였다. 휴일을 모르는 카페 문을 도중에 닫아 버리고, 그 안에 있던 손님들에게 일일이 돈을 환불해주고, 대뜸 아르바이트생인 자신을 불러다 앉히는, 이 간덩이가 팅팅 부은 사람들 앞에서. 아카아시는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팔자 좋은 재벌 3세들 쯤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덥썩 믿어버릴 만큼 아카아시는 순진하지 못했다. 무조건적인 호의에 대해 의심할 것은 의심하고 자신의 권리나 위치를 잘 파악해야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23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아카아시가 몸소 익힌 가치관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예인’이란 간판을 뒤집어 쓴, 혹은 ‘연예인’이란 단어에 눈에 불을 키는 속물적인 존재들을 상대하고 있다 보면 무조건적인 호의가 호의처럼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할 따름이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총동원해 경계심을 바짝 세운 아카아시가 조심스레 의자에 착석한다. 


한 편,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맞은편 두 사람의 외견이 새삼 심상치가 않다. 한 쪽은 천장을 향해 양 갈래로 치솟은 삐죽빼죽한 머리털이 기이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절반이 개털, 다른 절반이 정상에 가까운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뭐, 거리에 내놓기만 한다면 어느 쪽이든 이름 난 소속사에서 스카우트 나올 법한 휘황찬란한 이목구비인 건 인정하겠지만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감이 나돈다 느끼는 건 아카아시 혼자뿐이었는지 쿠로오는 벌써 자신의 서류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고 보쿠토는 이미 얘기가 끝난 사람마냥


“그러니까 너는! 우리 얘기를 듣고,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자기 입맛에 맞는 결론을 멋대로 도출해내고 있었다. 그런 보쿠토의 이마를 중지와 엄지로 가볍게 튕겨낸 쿠로오가 그를 나무란다. 


“다짜고짜 그게 뭐냐. 차근차근 우리 소개부터 해야지.”

“치이…….”

“미안미안. 사정은 내가 설명할게.”


어느 새 쿠로오마저도 자연스럽게 반말을 들먹이던 차, 아카아시 혼자만이 끝없는 망망대해 한복판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대체 무언가. 의문점의 해답은 다름아닌 쿠로오의 손아귀에서 비롯되었는데,


“딱 두 달만.”


거두절미하고 던져진 ‘두 달’이란 단어가 이토록 폐부를 찌른 적이 있던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는 얼음이 원두의 향을 옅게 한다. 


“일종의 거래라고 생각하면 돼. 계약 기간 동안엔 철저히 일에만 집중하고 계약이 끝나면 생판 모르는 사이 하는 거지.”


안경을 고쳐 쓴 쿠로오가 테이블 위로 내민 종이 몇 장엔 ‘계약서’란 대문짝만한 문구와 함께 깨알 같은 활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계약이 끝난 이후 뒤탈이라던가 사생활 잡힐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이 쪽 업계에선 입지가 두터운 사람들인지라 엄연한 거래처에게 속 좁게 굴 순 없거든. 뭣하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이 말이지. 다만 우리는…….”


여태껏 연예인 스카우트나 섭외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어온 아카아시였지만, 두 달이란 단기간을 선뜻 먼저 제시한 경우는 그로썬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찬스를, 하루빨리 성취하고 싶을 뿐이야.”


가지런히 놓인 서류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명함 한 장이 보인다. 


“금전적으로도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AO 엔터테이먼트 기획 이사 : 쿠로오 테츠로’


“어때. 해볼 생각 있어?”


‘계약금: 일급(5만 엔). 계약 기간 충족 시 추가금 100만 엔.’


“계약 연애.”


그러니까 이건,

최악의 도박임이 틀림없었다. 





*백야님 캘리그라피입니다.

*배경은 대만(타이완)입니다.




W. 멜




어디서부터 속이 배배 뒤틀렸는지, 그 이유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에어컨 바람을 곧장 쐴 수 있는 침대 가장자리를 항상 양보해서. 덥고 땀나고 지친다는 걸 핑계 삼아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냅다 달려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멍청히 보고만 있어서. 고수는커녕 길거리 음식 냄새만 맡아도 코를 잡고 인상을 찡그리는 이 사람을 위해 괜찮다는 말만 입 밖으로 되뇌어서. 한 짐 가득 사온 장바구니의 정리는 언제나 내 몫이라서. 조금만 걸어도 지친다, 쉬었다 가자 소리를 해서. 관광 스팟이란 스팟은 다 골라 기념사진 몇 장만 찍고 슥 지나쳐 버려서. 기껏 여행을 왔는데 삼시 세 끼 라면 같은 즉석 음식만 먹고 있어서. 괜찮다고 해서. 양보하겠다고 해서. 내가 참아야지 생각해서.


“…뭐냐. 지금 짜증 부린 거야?”


이 여행이 즐겁지가 않았다. 즐거울 수가 없었다. 


“네. 짜증 부린 거 맞아요.”

“허. 뭐?”


사흘 밤낮으로 먹은 컵라면을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가 역겨웠다. 이 쪽은 이렇게나 심각한데도, 침대에 드러누운 채 손 하나 까딱 안 하려는 이 사람을 위해.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힘든 건 싫고 10분 이상 걸으면 꼭 쉬어 줘야 하고 그런 주제에 관광 명소는 가봐야 하고 내가 여기 왔다는 사진은 남겨야 하고. 배는 고픈데 현지 음식은 거들떠도 보기 싫고. 지도도 없으면서 재밌어 보이면 무작정 달려 나가고. 기껏 쫓아가면 길 잃어버려서 다리 아프다고 징징 거리고. 대체 저보고 어쩌란 겁니까?”

“너…….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그딴 식으로? 말 한 번 잘하셨네요. 그러는 보쿠토씨야말로. 여행을 무슨 이딴 식으로 합니까?”

“내가 쉴 때 너도 쉬잖아. 다 너 체력도 생각해서 하는 소리인 거 몰라? 그리고 뭐? 음식? 냄새가 고약한 걸 안 고약하다 해? 맛없는 걸 맛있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줘? 너도 여태껏 컵라면 잘만 먹어 놓고 이제 와서 왜 딴 소리야.”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라고요.”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왔으면. 적어도 반성의 기미는 있을 줄 알았다. 아무리 보쿠토씨 상대라 해도 그를 이토록 나무라는 일은 2년이란 사귀는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 이제 와서. 그렇게 사원이나 절 돌아다니는 게 좋으면 너 혼자 가던가. 왜 힘들다는 사람 끌고 거기까지 가는데. 거기 가면 뭐가 있는데. 하나같이 향 피우고 기도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다잖아. 한 번 가는 걸로 충분하지 않아? 똑같은 곳, 똑같은 풍경, 똑같은 사람들만 가득한 데를 내가 왜 세 번 네 번씩이나 가서. 네가 사진 찍고 나오길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데. 이렇게 더운 데서. 에어컨 하나도 없는 밖에서. 그냥 멀뚱멀뚱.”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아 고개를 돌렸다. 난장판으로 헤집어 둔 캐리어 두 개 중 하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보기 좋게 개어두었던 옷가지들 위로 누구의 것인지 뻔히 보이는 칫솔, 양말, 속옷들로 뒤엉켜 엉망진창이었다. 그것들을 던졌다. 보쿠토씨 쪽으로 던져냈다. 그리곤 옷을 접었다. 접어 넣었다. 화장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선크림을 비롯한 기초 화장품들을 긁어모으고 카메라 충전기를 챙겨 넣고 욕실 용품을 쑤셔 넣고.


“애시 당초에 너 너무 무리하게 일정 잡은 거 알아? 아침 6시 기상이 뭔데. 여름 합숙할 때도 기상 시간 7시였는데 뭐? 6시? 여행까지 와서 새벽같이 눈 뜨고 나갈 채비하고 햇볕 쨍쨍한데 돌아 다녀야 겠어? 늦잠 한 번이라도 자면 내내 신경질 부리는 쪽이 누군데!”


짐을 쌌다.


“좀 느긋하게 움직이자, 응? 벌써 사흘 내내 발바닥 빠지도록 돌아다녔잖아. 이제 와서 볼 품 없게 싸우지 좀 말자, 응? 늦잠도 좀 자고, 호텔 뷔페 같은 데도 가보고, 기념품 가게 가서 그럴 듯한 것도 사고. 왜, 우리 식비 별로 안 나갔잖아. 그거 모아서 비싼 거 사가면-”

“됐어요.”


캐리어에 자크를 채웠다. 첫 날보단 가벼웠다. 괜찮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나는 충분히 노력했고 이 사람을 이해해주려고 애썼고 또


“사람 말 끝까지 들어.”


양보하려 했다. 


“들을 가치가 없어서요.”

“……지금 말 다했어?”


사귄 지 2년 쯤 됐으면 여행도 무난할 거라 생각했다. 크고 작게 투닥거리는 일도 있었지만 언제나 완만하게 넘어가곤 했다. 그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아뇨. 다 안 했어요. 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저는 그래도. 그래도 여행이라고 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그런 사소한 것들이 왜 ‘여행’이란 단어 앞에선 크게만 느껴지는지.


“그렇게나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안 힘든 여행 하고 싶으시다면 좋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야.”

“대신, 거기에 저를 끼워 넣는 짓은 그만뒀으면 해서요.”

“너 어디가냐.”

“그런 여행은 혼자 하세요.”

“아카아시!!”


쩌렁쩌렁한 외침에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손목시계를 들어 보았다. 자그마치 밤 10시였다. 


“모르셨나 본데. 이 숙소, 9시부턴 소음 금지거든요.”

“혼자 다니라고? 너 지금 그게 할 말이냐?”

“하긴. 숙소 예약이란 예약은 전부 제가 했으니 보쿠토씨는 아실 리가 없죠. 아, 혹시 여행 동선 때문에 그래요? 가이드북 하나 줄 테니까 그거라도 보고 다니세요. 괜히 쏘다니다가 길 잃고 여권 잃고 국제 미아 되지 말고.”


백팩을 열어 적당한 책을 던져 주었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 가야할 곳, 먹어봐야 할 것, 보고 싶은 것을 표시해 둔, 내 나름대로의 정성이 담긴 가이드북이었다. 


보쿠토씨는 여전했다. 여전히 납득 못하겠단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굳이 나를 붙잡으려 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자기도 할 말은 있다 이거다. 


“야. 이럴 거면 여행 왜 왔냐.”


아주 기세등등하게 한다는 소리가. 팔짱까지 껴가면서 틱틱 내뱉고 보는 말투부터가 


“아예 너 혼자 가지 그랬냐고.”


짜증이 났다. 


“누가 누구한테 하고 싶은 소린데.”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겨 버린 기분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던 것마저 정지하고 말았다. 


“여행을 왜 왔냐. 어이가 없어서 진짜.”

“내가 할 말이라고.”

“저기요. 가자고 한 게 누군데요.”


침착해지고 싶었다. 최대한 냉정해지고 싶었다. 


“이 더운 날씨에 가자고, 연인끼리 여행 가는 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 안 가고 싶었던 사람 몰래 비행기 표 끊어 버린 사람이 대체 누군데요. 대체 누가 먼저 말 꺼낸 건데. 누가. 누가!”


그러나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보쿠토씨 였잖아요!”


결국엔 주체 못할 화가 끓어오르고 말았다. 펑 터질 것 같이 뜨끈해진 눈시울이 먹먹했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야, 아카아시……! 내 말은-”

“내가 이래서 싫었어. 오기 싫었다고. 백 번, 천 번 싸울 거 아니까 오기 싫었는데. 가자고, 가자고 노래 부른 건 보쿠토씨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참으려고 한 건데. 보쿠토씨만 생각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양보하려고 한 건데!”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그치질 않았다. 사흘 간 가슴 깊이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감정들이 단번에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물들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러 대고 있으니 어느 새 인기척이 코앞까지 느껴졌다. 


“야……. 너가 거기서 울면 내가 뭐가 돼…….”

“건드리지 마요!”


단언컨대 연애 기간 내내, 한 번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이 없었다. 나 혼자 여행하고 나 혼자 비참하고 나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나 혼자 이 사람의 기분을 맞추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떨어져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저는 원래부터가 이런 인간이에요! 기왕에 여행을 왔으니까. 여행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고 더 걷고 싶고 내 눈에 더 담고 싶고 우리나라에선 못 먹어본 음식들을 잔뜩 먹어 보고 싶고 이 곳을 자유롭게 느끼고 싶어요.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걸 어떡해요. 구경하고 싶은 게 많은 걸 어떡하라고요. 한 번 가봤던 곳이라도 아침에 따라, 점심에 따라, 저녁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서 셔터가 저절로 내려가는 걸 저보고 어쩌라고요. 누군 안 힘들어요? 저도 힘들어요. 다리 아프고 덥고 지치고 푹푹 찌고. 나도 힘들다고요. 근데 참아요. 내가 힘들다는 티내면 같이 여행 온 사람 기분이 어떻겠어요. 지금 이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거에 감사하고 싶으니까, 이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그만큼 고마우니까. 그래서 참는 거예요. 그래서 견디는 거라고요. 근데 보쿠토씨는 어땠어요. 내가 열심히 당신 배려하고 있을 때 그 쪽은 뭘 어떻게 했냐고요. 내 기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내 여행을 한 번이라도 배려해 준 적 있어요? 다 자기 좋을 대로 였잖아요!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기분 좋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겠어요.”


눈물이 뺨에 흥건한 와중에도 말이 똑바로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쌓여 있었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토해져 나왔다. 


 “저요. 지난 사흘 동안 툭하면 체하고 현기증으로 빙빙 돌고 하루 종일 설사에 헛구역질만 반복했어요. 내가 이런 거 알아요, 몰라요.”


대답이 안 돌아왔다. 처음 듣는 소리라는 표정이 얼굴에서부터 다 드러나 있었다. 


“그래, 몰랐겠죠. 자기 기분만 생각했지 나한테 관심도 없었을 테니까. 내가 말 안하고 버티고 있었으니까. 내가! 보쿠토씨한테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음을 다잡았다. 흐트러지려는 결심을 겨우 붙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턴 따로 따로 행동해요. 그게 보쿠토씨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결말인 것 같으니까.”

“…….”

“급한 일 있어도 연락하지 마요. 경찰서 갈 정도의 급한 일이 아닌 이상 그 쪽이랑 여행 관련해서 얽히고 싶지 않고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여행을 할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여행을 할 거예요, 라는 한 마디가. 눈물을 멎게 했다. 그 동안의 설움을 보상 받듯 꾹 틀어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실렸다. 


“여행 마지막 날, 공항에서 봐요.”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여행을 걷기로 했다. 



* * *



단수이까지 가는 길은 평온했다. 묵직했던 바윗덩어리를 홀가분하게 덜어버린 것처럼. 발길이 닿는 골목골목이 부드러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고 담쟁이가 수북하게 자란 인적 드문 계단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내 눈을 사로잡았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에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며 붐비는 전철에 올라타는 것도, 잠깐 쉴 수 있는 시간동안 이 곳 사람들이 흔히 들고 다니는 조그만 토스트와 두유를 사 먹어 보는 것도, 다리가 아플 때 즈음엔 눈에 보이는 벤치 혹은 난간에 기대어 자유를 만끽하는 것마저도.


너무나 평화롭고, 잔잔한 일상이었다. 


셔터를 내리는 시간에 여유가 있었고 내가 한 눈 판 사이 상대가 나를 두고 가지 않을까란 걱정을 할 필요조차 없었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도 지도에서 벗어난 거 아니냐며 다그치는 이가 없었고 오래도록 지평선 너머로 추락하는 석양을 지켜봐도 돌아가자고 부추기는 이가 없었다. 


“내가 생각한 여행은 이런 건데.”


입술을 깨물었다. 쇳덩이 같은 카메라를 잠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피로로 지친 다리를 아무렇게나 펼쳐 놓고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옆 자리는 조용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입도 없었다. 덥다며 손부채질하기 바쁜 손바닥도 없었다. 물 한 입 줄까 라며 개구지게 웃는 미소도 없었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어 나가는 발소리마저 없었다. 지나치게 고요했다.


이런 결말을 원한 건 분명히 나 자신이었음에도. 혼자가 되길 자처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음에도. 


“바보……는 나였을까.”


수공예품 가게에서 샀던 조그만 열쇠고리를 꺼내 보았다. 사람의 손 떼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는 나무 부엉이. 유명한 밀크 티 브랜드나 대만에서 유명하다는 펑리수 같은 번지르르한 기념품이 아니어도. 


‘You can choose your own word. We can engrave that.’


원하는 문구를 새길 수 있다는 그들의 말에,


‘Then……. Bokuto Kotaro, please.’


나는 결국,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Bokuto Kotaro? Is it Chinese character? We can engrave Chinese character, too.’


영어는 물론 한자도 가능하다며 호쾌하게 웃음 짓던 가게 사장님들로 인해. 나 또한 빙그레 웃어 보이며 당신의 한자를 메모지에 적어 주었다. 


‘木兎 光太郞’


부드러운 나뭇결 아래에 선명히 새겨진 한자들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려 보았다. 


“좋아해줬으면 좋겠는데…….”


여행은 내일이 마지막이었다. 어딘가 텅 빈 듯한 쓸쓸함은 오늘까지고 내일부턴 다시 시끌벅적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할까. 내가 갔던 곳, 내가 먹었던 것, 내가 보았던 것, 내가 느꼈던 것. 당신이 없어 해방이 된 것 같다가도 당신이 없어 지독하게 외로웠다는 이 기분을. 막상 당신에게서 벗어나 혼자가 되었을 땐, 결국 내 곁에 남은 건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고. 어떻게 말해야 당신에게 온전히 이 기분을 전할 수 있을까.


해는 저물었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내일의 해가 뜨기까지를 기다리는 게 이토록 괴로운 일일 줄은


“보고 싶어요, 보쿠토씨.”


미처 모르고 있었다. 완전한 혼자가 되기 전까진 말이다. 


+ Recent posts